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단편소설] 유산 본문
[단편소설] 유산
섬유를 다루는 사람들이 그 업계를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업보라고도 하고 전생이나 조상의 인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업계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조금 진지하게 받아들여 보면 친할머니가 오래 전에 염색공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전역 후 의류업계에서 고군분투하게 된 배경엔 할머니가 제대로 한 몫 했던 겁니다. 할머니가 염색사업을 했던 것은 6.25 전쟁이 끝나고 몇 년쯤 지난 195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1912년생이었던 할머니는 참으로 어린 나이에 경상북도 달성에서 멀리 충청남도 강경으로 시집와 1930년생과 1934년생의 두 아들을 낳았는데 내 아버지와 큰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가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간 것이 1930년대 후반 경이었을 테니 할머니의 실제 결혼생활은 평생을 통틀어 불과 10년 남짓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당시 나이 어린 여인이었지만 일제강점기의 처절한 수탈 속에서 기아를 넘나들면서도 홀로 자식들을 보듬고 어렵사리 살아남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돈이 생길 때마다 인편으로 집에 부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돈은 현해탄을 넘어오면서 늘 누군가가 중간에서 가로챘으므로 할머니에겐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도 할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귀국한 징용동료들에게 들은 바 할아버지는 히로시마 인근 공장에서 일했으므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유명을 달리하셨으리라 추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은 할아버지의 기일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에겐 하늘이 무너져 내렸지만 누구도 어떤 사과나 보상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훗날 내가 일본출장 길에 작은 유리병에 한 줌 담아온 히로시마의 흙을 할머니는 평생 고이 간직했습니다.
해방 후 할머니는 방물장수를 했습니다. 각양각색의 물건들을 도시에서 바리바리 떼어 시골에다 파는 일이었는데 어느 날 밤 고개를 넘다가 만난 도적을 피해 아마도 몇 킬로는 족히 될 산길을 달려 도망쳤던 무용담을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에 앉아 흥미진진하게 듣곤 했습니다. 당시 할머니는 더 이상 여릿여릿한 여인네가 아니라 당차고 생활력 강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치매와 골다공증으로 말년에 몇 번이나 부러지길 반복했던 할머니의 다리는 당시 무거운 보따리들을 안고 진 상태에서도 산길을 달려 웬만한 장정들을 따돌릴 수 있을 만큼 강하고 날랬습니다. 할머니는 손주들에게 자랑하듯 당신의 오른발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날 밤 부러진 줄도 모르고 달렸던 오른발 엄지발가락은 제대로 붙질 못해 앞꿈치 관절이 흉하게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처는 어려운 시절을 끝내 견뎌낸 훈장 같은 것이었습니다.
6.25가 터졌을 때 기독학생회장이었던 둘째 아들, 즉 내 아버지가 인민군에게 처형당할 위기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오자 할머니는 뒤늦게 피난길에 함께 올라 몇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전선을 돌파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잿더미가 된 강경에 돌아온 할머니는 다시 방물장수가 되었습니다. 방물장수라는 게 말하자면 구매와 판매, 운송 심지어 회계와 재고관리까지 망라하는 전체 프로세스를 혼자 감당하는 종합무역업인 셈인데 방물장수로 잔뼈가 굵은 할머니는 셈이 빠르고 부지런했을 뿐 아니라 수완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마침내 염색공장을 차렸으니 말입니다. 도시와 지방을 오가면서 다량의 옷감을 거래하기도 했던 할머니는 앞으로 염색공장이 좋은 돈벌이가 될 것이라 판단할 만큼 남다른 사업감각과 배짱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할머니의 원단염색사업은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웠습니다.
전쟁 초기 국군에 징집되어 한국전쟁의 전 과정을 온몸으로 감당해 낸 큰 아들, 즉 내 큰아버지는 평생을 따라다닐 정신적 후유증을 숨기고 최소한 신체적으로는 별 다른 부상 없이 어느 날 홀연히 강경에 돌아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더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집에선 큰 잔치가 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아버지는 할머니가 골라준 색시와 혼사도 올렸습니다.
내가 처음 섬유업계에 들어왔을 때 자동화된 대단위 염색단지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지거’나 ‘래피드’ 기계의 위용에 놀랐는데 할머니가 염색공장을 한 것은 펄펄 끊는 물에 천연색소를 풀고 거기에 원단을 담궈 긴 막대기로 휘휘 저으며 빨강, 파랑, 노랑의 색색가지 옷감들을 만들어 내던 낭만적인 아날로그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염색한 원단들은 빨랫줄에 널어 말렸는데 주문이 넘쳐나 빨랫줄이 부족하면 대청 위 대들보에도 널어 말리곤 했습니다. 고래등 같이 거대한 저택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사업을 통해 돈을 굴린 할머니는 이제 꽤 넓은 마당이 있는 한옥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큰아버지에게 시집온 며느리가 부지런한 만큼 총명하기도 했다면 가문의 미래는 좀 더 장밋빛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운명의 그날, 대들보에 널어둔 원단이 다 말랐는지 보려고 큰엄마가 사다리를 탔습니다. 전기사정이 열악했던 시절, 컴컴한 대들보 위로 촛불을 들고 올라간 것이 문제였습니다.
“다 말랐네유~~”
뽀송뽀송한 원단을 만져본 후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려 그렇게 말하던 큰엄마의 촛불 든 오른손이 자기도 모르게 따라 돌아가면서 바짝 마른 원단에 불을 댕겼습니다. 집을 겸한 할머니의 작은 염색공장은 그날 맹위를 떨친 화마에 숯덩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만났을 때 이미 환갑을 훌쩍 넘겨 손주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짓던 큰엄마도 그때는 그토록 어수룩하고 순진무구한 시골 아낙이었던 것입니다. 애써 꾸렸던 염색사업은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져버렸고 절치부심한 할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손실은 결코 복구할 수 없었습니다.
훗날 지방에서 옷장사를 하게 되는 큰아버지는 할머니의 수완과 안목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전우들의 살과 피를 뒤집어 쓰며 낙동강과 압록강 사이를 오가며 크고 작은 전투에서 악귀처럼 살아남았던 당신에겐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고 고리타분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그로서는 할머니의 강권에 못이겨 한 혼인에서도 아무 가치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큰아버지에겐 전장에서 비처럼 쏟아지던 포탄들과 전우들의 처절한 비명소리에 필적할 만한 더욱 자극적인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아직 염색공장이 잘 돌아가던 시절, 큰아버지는 현장에서 일하던 예쁘장한 아가씨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가씨의 고향인 전라남도 완도에 들어가 버린 큰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고 할머니가 몇 번씩이나 먼 걸음을 하셨지만 큰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할머니가 어르고 달래 간신히 고향으로 불러들인 큰아버지를 큰엄마와 한 방에 가두고 강제로 합방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큰아버지는 다음 날 온갖 핑계를 댄 끝에 결국 탈출해 완도로 돌아갔는데 그날 합방의 결과로 막내 사촌형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듣는 나로서도 민망한 일이었고 그렇게 태어난 막내 사촌형 자신을 포함해 본처 소생의 딸들, 즉 두 명의 사촌누나들이 훗날 분통을 터트리며 큰아버지와 완도의 그 첩을 죽일 듯 더욱 증오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 예쁘장했던 아가씨는 내게 두 번 째 큰엄마가 되었습니다. ‘작은 큰엄마’ 또는 ‘완도 큰엄마’같은 어정쩡한 호칭으로 불러야 했는데 철들고 나선 사촌들의 날 선 시선을 따갑게 느끼며 가능하면 아무런 호칭도 쓰지 않으려 남몰래 노력해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살던 대흥동의 한옥은 건축업에 뛰어든 아버지가 승승장구할 때 구입한 것이었는데 마당 한가운데엔 뚜껑이 덥힌 우물과 그 너머엔 밤이면 귀기마저 서리는 재래식 변소가 있던 큰 집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대입구 앞 번화가가 된 그곳의 소유권을 아직 가지고 있었다면 우린 아마 지금쯤 떵떵거리며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은 그 후 줄곧 내리막길을 달렸고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집의 모습은 곳곳에 붙은 차압딱지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 후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강경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혔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날 수만 있다면 평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셨죠. 그러나 그런 기도가 무색하게 그날 강경 면사무소 창고에 잡혀있던 ‘반동분자’들은 모두 철사줄에 팔이 묶여 처형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런데 그 길목에서 아버지는 천사를 만납니다. 강경에 진주한 인민군 고위군관과 마주친 겁니다. 인민군이 천사라니 참 아이러니컬합니다.
“야! 네가 거기 웬일이냐??”
그는 아버지의 오촌아저씨였습니다. 인텔리였던 그는 마르크스 사상과 공산혁명이론에 심취해 광복 몇 년 전 만주로 넘어가 조선의용군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고 북한 공산정권 수립에 기여한 후 6.25 전쟁을 맞아 인민군 고위군관이 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그와 족보가 엮입니다. 물론 그가 누구에게나 천사였던 것은 아닙니다. 훗날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던 막내 사촌형은 신원조사를 통과하지 못해 청운의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내 아버지를 살려주었던 그가 막내 사촌형의 발목을 잡았던 것입니다. 다시 몇 년이 더 지나 내가 ROTC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맞춰 연좌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함께 끌려갔던 사람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총살당한 그날, 아버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도 같았던 오촌아저씨의 배려로 혼자만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조차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으므로 아버지가 마침내 죽어 그 혼령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신학교를 거쳐 전도사가 되면서 면사무소 창고에서 하나님과 맺었던 서원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5.16 쿠데타였습니다. 박정희 소장의 국가재건회의가 화폐개혁을 실시한 것이 하필이면 첫 아들의 백일잔치를 며칠 앞두었을 때였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그나마 애써 모은 쥐꼬리만한 돈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고 장남의 백일을 치를 수 없었던 아버지는 이런 세상에서 목사가 된다면 가족들을 굶길 뿐이라는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아버지는 그 길로 전도사직을 내던지고 지인들과 건설회사를 시작해 한때 큰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사업이 배신과 부도를 맞아 몰락하면서 집안도 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서원을 저버린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대입구 시절은 물론, 나중에 수색과 북가좌동의 전세집을 전전하던 때에도 우린 부모님 두 분과 아들 삼형제와 할머니 말고도 큰엄마와 그 소생의 두 사촌누나, 막내 사촌형, 고모, 그리고 아버지의 수양아들까지 함께 살았으므로 우리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어느 새벽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처연하도록 아름다웠던 고모도 당시 여름이면 눈부시게 흰 교복을 입고 집안을 화사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언젠가 KBS 아침드라마 ‘복희누나’에 나온 주연 여배우가 당시의 고모를 쏙 빼 닮은 것을 보고 신기해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그런 상황을 모르지 않았을 완도의 큰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완도 큰엄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며 우리 집에 보내왔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본처와 그 자식들의 적개심을 극한으로 자극했을 뿐 아니라 뜬금없이 적대적 환경에 발을 들인 완도 사촌형 역시 무척 불편하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나이 어린 우리 삼형제는 새 식구를 대하는 사촌들의 눈에 왜 불똥이 튀고 있었는지, 손위의 누나였던 예의 아름다운 고모가 왜 양쪽 사이를 애써 중재하고 다독거리면서 늘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뒤뜰에서 태권도 대련을 핑계로 맞붙었을 때 눈이 찢기고 코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세 살 위인 완도 사촌형에게 죽일 듯 달려들던 막내 사촌형이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사촌누나들이 왜 완도 사촌형 빨래를 일부러 찢거나 몰래 내버리곤 하는지, 우리들은 그런 복잡한 속사정을 까맣게 몰랐던 속 편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두 사촌누나의 결혼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어 갔습니다. 내겐 큰 매형이 되는 큰누나의 남편은 대기업 가전제품 대리점을 하던 사람이었고 명망 높은 교회집사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는 분명 처음엔 가족들을 위해 탈출구를 찾아 몸부림쳤지만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여색에 빠져 가족들을 내팽개치면서 큰누나와 세 자녀를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몰고 갔습니다. 매형은 그 후 평생을 외도로 일관하며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큰누나는 큰엄마의 고단한 일생을 똑같이 되풀이했습니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매형은 말년에 첩의 집에서 중풍을 맞아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는 반신불수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용도폐기의 신호였습니다. 첩은 매형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대신, 당시 매일 몸뻬바지를 입고 구청 공공근로사업장에 나가 푼돈을 벌고 있던 큰누나의 집 앞에 버리고 갔습니다. 그것은 평생 돈 한 푼 제대로 벌어오지 못했던 기둥서방에 대한 단죄였을까요? 아니면 모르긴 몰라도 오랜 시간 첩의 마음에 거대한 압박이자 경쟁자로 남아 있었을 조강지처에 대한 마지막 조롱이었을까요? 그런 매형을 받아들여 돌아가시던 날까지 정성껏 수발 들었던 큰 누나를 난 이해 못합니다. 이 집안엔 이해 못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작은누나도 작은누나대로 힘겨운 삶을 살았습니다. 두 남매를 낳은 후 뒤늦게 미용사 자격증을 따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배경엔 이번에도 남편의 무능력이 있었습니다. 자영업을 하던 작은 매형은 큰 매형을 빼어 닮기로 작정한 듯 외도를 일삼다가 결국 한 첩의 집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는데 작은누나는 지겹도록 지켜본 큰누나의 삶을 따를 마음이 없었으므로 어느 날 칼로 자르듯 이혼으로 결혼생활을 끝냈습니다.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비교적 낙천적이었지만 허영기는 물론 약간의 사기성마저 가지고 있던 작은누나는 학창시절부터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 다녔는데 그로 인해 집안의 가장이나 다름없던 막내 사촌형도 많이 애먹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혼 후 작은누나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모르긴 몰라도 자녀들을 부양하려 고군분투하며 엄청 고생하면서 주변에 적잖은 민폐도 끼쳤겠죠. 그러다가 내 친형이 결혼하고 형수가 임신하자 언젠가부터 우리 주변에 다시 돌아와 있던 작은누나는 미용사였던 형수에게 접근해 형수의 신사동 미용실을 자기가 운영해 주겠다며 꼬드겼습니다. 그러나 작은누나는 매상을 보고하지도 입금시키지 않았고 출산 후에도 형수가 육아에 지쳐 곧바로 미용실에 복귀하지 못하자 급기야 미용실을 임의로 팔아 치우고 말았습니다. 전셋돈과 권리금을 받았을 게 분명했지만 작은누나는 아무런 설명이나 보상도 하지 않았으므로 형을 비롯한 우리 삼형제는 형수에게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누나가 사기꾼이라도 된다는 거야? 이 미친 놈들이!!”
자긴 잘못 없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작은 누나 옆에서 막내 사촌형은 마치 당장 연이라도 끊을 것처럼 나와 친형을 윽박질렀습니다. 그들 남매는 큰엄마를 중심으로 매우 견고하고도 배타적인 집단이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누나는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했고 아버지와 형수의 만류도 있었으므로 우린 결국 더 이상 작은누나에게 미용실 문제를 묻지 않았습니다.
중견 패션회사에 다니던 막내 사촌형은 두 누나와 조카들, 그리고 큰엄마의 생활을 피땀으로 지탱하며 등뼈가 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제 보다 노골적으로 완도 사촌형과 대립하면서 사소한 부분에서조차 무리수를 두곤 했습니다.
“장인어른이 직장에서 2인자신데 권한이나 책임이 막중하신 모양이야.”
아직 신혼이었던 막내 사촌형이 완도 사촌형 부부를 포함해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렇게 처갓댁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가족들은 탄성을 질렀지만 당시 대학생이던 난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인어른의 직장이 프랑스 대사관인데 어떻게 한국인이 2인자가 될 수 있는 걸까요?
“2인자는 개뿔! 대사관 관용차 운전사란다.”
얼마 후 다시 만난 완도 사촌형은 내게 귓속말로 그렇게 속삭이며 비아냥거렸습니다. 막내 사촌형은 완도 사촌형의 기를 죽이려고 과장해서 말한 것인데 완도 사촌형은 자기 지인들을 총동원해 기어이 진위를 캐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완도 사촌형은 일찌감치 시청공무원이 되어 있었고 각급 관공서의 동기와 친구들을 통해 나름대로 인맥과 정보통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내 사촌형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혼한 완도 사촌형은 세 딸을 낳았고 당시 상계동 대형 아파트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가 고생하고 있던 이복남매들에게 화해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미래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간단히 예단할 순 없지만 두 집 사이의 머나먼 간극이 조금이라도 좁혀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기대와는 정반대의 사건들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완도 사촌형은 공무원 신분과 인맥, 그리고 위력을 십분 발휘해 호적을 뜯어고쳐 자신을 가문의 장손으로 만들고 문중 선산을 가로챘던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터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한국에서 들려온 그 소식에 난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난 사실 ‘문중의 선산’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개인이 임의로 처분할 수도 없는 문중의 재산을 관리하면 어떤 이익이 생기는지,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선산이 탐났든, 이름 뒤에 붙어 다니던 ‘서자’라는 두 글자에 대한 서러움이 그토록 사무쳤든, 아무튼 완도 사촌형은 적자인 막내 사촌형의 등에 그렇게 비수를 꽂았습니다. 아니면 평생 따라다녔던 ‘첩’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버리고 싶었던 완도 큰엄마의 의지에 휘둘렸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선산을 유지하려면 대를 이을 아들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배를 갈라 얻은 세 딸이 있었음에도 완도 큰엄마에게 등 떠밀려 첩에게서 아들을 낳아 오려 했습니다. 우린 큰아버지의 인생이 완도 사촌형에게서 반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장손의 자리를 강탈당하고서 가만 있을 리 없었던 막내 사촌형은 송사를 일으켰고 어린 시절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사촌들은 그렇게 점점 더 서로에게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어 갔습니다.
그 모든 사건의 근원이었던 큰아버지가 세상을 뜨셨습니다.
간암으로 오래 투병한 끝이었고 4년의 전쟁과 몇 년 더 이어졌던 모진 군생활의 후유증을 죽는 날까지 고스란히 끌어안은 채였습니다. 가끔은, 본처의 자식들 결혼식장에서 큰엄마 옆에 ‘혼주’ 또는 ‘아버지’라는 입장으로 어색하게 앉아있어야 했던 큰아버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가늠해 보기 힘듭니다. 잘 커주었다는 자랑스러움이었을까요? 아니면 남의 자리에 앉은 듯한 불편함이었을까요? 자식들이 날카로운 비수를 등뒤에 숨기고 서로 차갑게 노려보던 상황에서 눈을 감는 큰아버지는 그런 결과를 초래한 자신의 인생을 후회했을까요? 버려진 본처의 재가를 허락하지 않고 평생 며느리와 그 자식들을 보듬었던 할머니를 원망하셨을까요? 당시 날로 치매가 심해지던 할머니도 그날만큼은 큰 아들의 죽음을 인지하고 세상이 무너진 듯 몸서리치며 우셨습니다. 평생 속을 썩이며 멀리 떨어져 살았던 큰 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용에서 돌아오지 않은 남편 대신 누구보다도 의지했던 든든한 기둥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큰아버지의 임종과 함께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극한의 악의가 수많은 부비트랩과 지뢰가 되어 도사리고 있는 비무장지대처럼, 두 집안의 중립지대였던 우리 형제들에게도 그들의 대결의 흔적들이 남아 죽어도 해서는 안되는 말과 건드려서는 안되는 상처들이 생겼습니다. 그 금기와 비밀들은 두 큰엄마와 그 자녀들의 상처, 그 해묵은 갈등, 원망과 함께 영원히 가지고 갈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파국을 피해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지만 정작 사과해야 할 큰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마지막 기회는 완도 큰엄마와 본처인 큰엄마의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당사자들이었으니까요. 물론 그들이 어떤 계기로 마침내 화해의 악수를 나누리란 화기애애한 전개는 쉽게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원한이란 그리 간단히 풀릴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 후 또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큰엄마와 사촌누나들의 구원은 예상치도 않은 곳에서 왔습니다. 큰누나의 큰 딸, 즉 큰 조카는 우리 아래 세대의 첫 주자였습니다. 무척 귀여웠던 갓난아기는 커가면서 사뭇 변해 갔지만 어딘가 반항적인 눈매며 야릇한 미소를 띤 입가엔 이대입구 시절 큰누나의 표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전대의 삶을 따르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겠죠. 그녀는 미래를 보장해 줄 리 없는 교육이나 직장 같은 것에 인생을 투자하기보다 이제 막 봉오리를 펴던 그녀의 젊음을 보다 확실한 것에 투자했습니다. 어느 부유한 일본인의 정부가 된 것입니다. 그녀가 그러기까지 어떤 과정과 사건들을 거쳤는지는 잘 모릅니다. 별다른 직장도, 학력도 없던 그녀가 불과 10대 후반에 내로라하는 일본인 사업가를 비즈니스로 만났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분명 사랑을 듬뿍 받는 현지처였다는 사실입니다. 20대 중반이 되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살던 허물어져가던 판자촌에, 당시 국내에선 사진으로밖에 볼 수 있었던 페라리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나 큰누나와 작은누나 가족들을 강남 대형아파트로 모셔갔습니다. 큰엄마의 얼굴엔 비로소 함박웃음이 피었습니다.
어떤 성인군자는 그녀가 보다 건전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몸을 팔아 가세를 일으킨 그녀를 큰누나나 큰엄마가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모든 가족 구성원들을, 단 한 명도 남김없이 경제적 나락으로부터 영원히 구원했고 평생 그들의 인생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허덕여 온 막내 사촌형의 짐을 크게 덜어 준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스스로를 철저히 내던진 그 아이를 누구도 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큰조카에게 빠진 그 일본인에게도 피눈물 흘릴 본처가 있을 터였습니다.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그렇듯 정작 내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 피해자의 고통은 잘 보이지 않게 되는 법입니다.
한편 완도 사촌형은 그 당시 끝도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도시개발 비리에 연루되어 공무원직을 물러난 그는 여의도에 일식집을 열고 성업했으나 나름대로 질곡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온당치 못한 방법으로 손에 넣은 장손의 자리와 문중 선산을 유지하기 위해 며느리 몰래 밖에서 아들을 낳아오라며 완도 사촌형의 등을 떠밀었던 완도 큰엄마도 그 사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화해의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진 것입니다.
완도 사촌형이 외도를 시도했다는 사실을 형수가 알고 배신감에 불타오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결혼생활이 이혼으로 끝난 것은 완도 큰엄마가 아직도 병상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극도로 분노한 형수는 세 딸의 양육권과 함께 위자료와 양육비로 남편이 평생 모은 재산을 철저히 거덜 내버렸고 급기야 집도 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완도 사촌형이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인 것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의미였고 세 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릿발 같았던 형수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완도 사촌형은 식당에서 기거해야 했고 일식집에서 돈을 벌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굶어야 하는 경제적 벼랑에 섰습니다. 문중의 장손이라는 입지와 그 잘난 선산도 이번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상황이 완도 사촌형이 애당초 목적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본처와 완도 처 양쪽을 모두 다독거리며 어떻게든 두 집의 화해를 도모했던 할머니도 그 사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치매와 담낭결석으로 오래 투병한 끝이었습니다. 역사적 격변기를 드라마처럼 살았던 할머니의 너무나 초라한 임종이었습니다. 이제 완도 사촌형은 40대 후반에 이르러 부모와 할머니를 모두 여읜 천애고아가 되었고 아내와 딸들마저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습니다. 다시 재혼해 아들을 낳지 않는 한 그토록 자랑스러워 했던 장손이라는 이름표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할 터였습니다. 그런데 더 깊은 나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완도 사촌형은 자신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직장암이었습니다. 길고 지루한 투병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거기 가고 싶은데 요양할 곳 좀 알아 봐 줄래?"
전화기 너머에서 완도 사촌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완도 사촌형이 내가 있는 자카르타에 오고 싶어 하는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양쪽 사촌들 사이의 중립지대였던 시절 역시 종말을 맞은 상태였습니다. 우린 그동안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았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지만 장손과 선산의 문제로 벌어진 소송 와중에 부모를 모두 잃고 이혼까지 당하고 만 완도 사촌형의 처지에 우리 아버지가 조금 더 연민을 느낀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 낌새를 눈치 챈 막내 사촌들은 격분하며 이번엔 아버지에게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단 한번, 완도 사촌형에게 아주 조금 기울었던 것뿐이었는데 말입니다. 사촌들은 법정에서 아버지가 한 완도 사촌형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빌미로 우리와도 막무가내로 연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단칼에 말입니다. 막내 사촌형은 완도 사촌형이 고아가 되었든 암에 걸렸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그냥 길섶에서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적으로 간주했고 예전 십여 년씩이나 함께 한솥밥을 먹었던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간단히 칼끝을 겨누었던 것입니다.
원한은 그렇게 파괴적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마침내 철저히 망가뜨리니 말입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누었던 사촌들은 이제 남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고 우린 그렇게 서로 모른 척, 관심 없는 척, 등을 돌리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완도 사촌형에게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은 ‘온전한 자기 편’이었을 것입니다.
“그건 좀, 어려운 일이에요.”
하지만 난 그가 기댈 어깨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꼭 사촌들의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완도 사촌형은 동해안이 가까운 강원도의 한 산골마을에서 휴양 중이었는데 자카르타의 공기라는 건 그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습니다. 만일 안여르나 뿐짝 같이 자카르타에서 2~3시간 떨어진 곳이라면 공기 좋은 휴양소를 찾을 수 있겠지만 양질의 의료 서비스로부터도 그 거리만큼 멀리 떠나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비용을 무시할 수 없었던 난 난색을 표했습니다.
그 후에도 완도 사촌형은 몇 번 더 전화해왔지만 매번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은 무척 편치 못했습니다. 이런 민감한 문제는 당시 중국 광조우에서 택배사업을 하던 친형이나 군목으로 있던 친동생에게도 부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내가 마음 먹고 어느 정도의 불편과 수고를 감수한다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 궁지에 몰린 사업을 어떻게든 돌려 당장 먹고 살아야 했던 나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완도 사촌형이 그렇게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가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나로서는 단지 먹고 사는 문제였지만 그로서는 죽고 사는 문제였을 텐데 그걸 비용과 수고의 문제로만 가늠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인생이 너무 팍팍하고 잔인합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광조우의 형으로부터 이메일이 한 통 날아왔습니다. 그 짧은 내용을 읽으면서 난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완도형이 돌아가셨단다.
벌써 연락 받았는지 모르겠구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먼저 가셨단다.
좀 더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혼한 아내에게 모든 것을 다 퍼부어 주고 자신에겐 아무런 재산도 남기지 않았던 완도 사촌형은 병이 심해지면서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일식집마저 넘길 수 밖에 없었고 친구들에게 빌린 푼돈으로 말년의 삶을 간신히 지탱하던 끝에 한적한 시골의 어느 여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강원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요양을 하기엔 이미 체력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계에 와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명 여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의 충격파가 전국을 뒤흔들었고 적잖은 모방자살사건들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형이 최후의 순간을 계획하면서 딱히 여배우의 자살을 모방하려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통해 들은 그의 마지막 모습은 방문고리에 걸친 수건에 목을 맨 채 앉아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술한 방식이었다면 숨이 막혀 올 때 언제라도 수건을 풀거나 자세를 고쳐 앉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에겐 그럴 의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완도 사촌형은 수건에 목이 졸려 죽은 것이 아니라 한없는 좌절에 짓눌려 죽은 것입니다.
남의 것을 뺏어 틀어쥐고서도 더욱 뺏으려 했던 완도 큰엄마의 생전 욕심이 단 하나뿐인 아들을 그토록 고독한 죽음으로 밀어 넣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쯤 성숙한 여인으로 피어났을 세 딸들이 있었음에도 완도 사촌형은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렇게 홀로 마감했습니다.
잠시라도 와계시라고 할 걸….
그런 회한이 뒤늦게 밀려 왔습니다. 그가 자카르타에 오려 했던 것은 꼭 요양 때문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칼날 같은 적의와 바닥도 없는 시커먼 절망으로 가득 찬 한국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서 어린 시절 의좋았던 사촌동생에게 의탁해 잠시나마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그의 손을 난 끝내 잡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또 한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그가 움켜 쥐었던 장손의 자리는 그의 죽음과 함께 원래의 합당한 곳으로 돌아갔고 문중의 선산 역시 그 자리를 따라갔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완도 사촌형은 죽기 전 다른 사람들 번호를 모두 지운 후 핸드폰엔 오직 이혼한 아내의 번호만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받게 된 형수는 우리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해 시신을 수습하고 조촐한 상을 치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연을 끊고 돌아선 막내 사촌형도 웬일인지 그날 만은 아버지가 전한 부음을 듣고 아무 저항 없이 상가에 와주었지만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온 것은 조의를 표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원수의 죽음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에게 아버지가 큰엄마의 근황을 묻자,
"나중에 말씀드릴께요."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후 곧 총총히 자리를 떴습니다.
그 큰엄마가 사실은 1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과 그 사실을 일부러 우리 집에 알리지 않았음을 안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었습니다. 평생을 첩에게 남편을 뺏기고 힘겹게 살아온 큰엄마를 보내며 피눈물을 흘렸을 사촌들의 한 맺힌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한편 복수심에 휩싸여 이를 갈면서 완도 사촌형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삼아 우리들에게조차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급기야 큰엄마의 부음마저 비밀에 붙였던 막내 사촌형, 사촌누나들의 깊은 원한에 소름이 끼쳤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해 겨울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난 완도 사촌형이 투병기 형식의 자서전을 죽기 얼마 전 책으로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책장에서 꺼내 준 ‘고슴도치의 꿈’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완도 사촌형은 완도 큰엄마와 세 딸에 대한 사랑과 절절한 그리움에 많은 지면에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치 불굴의 투지와 특별한 운동법, 독특한 다이어트로 암을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그렸습니다. 난 그가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하려 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는 어쩌면 한때 호전되기 시작한 병세에 희망을 발견하고 이제야말로 제대로 살아보겠다 각오하며 책까지 쓰게 된 거겠죠. 그러나 그 장미빛 희망의 한 꺼풀 밑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이 숨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다가온 파국. 결국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만 처절한 절망.
그의 죽음으로 완도 큰엄마 쪽의 대는 완전히 끊기고 말았습니다. 완도 사촌형의 세 딸은 형수가 재가하면 다른 집안의 딸들이 될 터였습니다. 결국 그의 죽음으로 완도 사촌형 모자가 지고 왔던 책임과 업보가 전부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복남매들과 화해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조차 영원히 소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게 가장 안타깝습니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완도 사촌형의 그 책은 마지막 유서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난다는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부모의 과오까지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 자신의 처신에 대해서만이라도 한 마디 후회와 용서의 뜻을 비쳤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먼 훗날 화해의 씨앗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완도 사촌형은 자신과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난 것처럼 기술했을 뿐이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화해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형제들과의 관계도 어쩌면 영영 복구되지 못할 것입니다.
완도 사촌형이 죽은 후 ‘인간사 사필귀정’이라며 비감한 미소를 짓고 있을 사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완도 사촌형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관에서 꺼내 찢어 죽여야 할 간악한 원수일 것이고 가당찮은 악행을 저지르다가 천벌을 받아 죽은 악인이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쳐지겠죠. 이제 와서 막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큰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이름은 ‘증오’였습니다.
그 증오에 뿌리를 내린 원한의 나무는 반 세기 넘게 꼬이고 비틀어진 아름드리 괴목으로 성장해 그 증오의 대상이 하나도 남김없이 소멸해 버린 오늘도 긴 머리를 풀어헤치듯 무성한 복수의 가지들을 출렁거리며 미움과 악연의 홀씨들을 흩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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