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오지 않는 날 본문
어정쩡함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은 때때로 재난 같은 일이 되기도 합니다. 살다 보면 그 어정쩡한 상황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자주 다가오는데 그 순간마다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도 낮추고 숨소리도 죽여 그런 상황을 애써 참아내는 게 보통이겠지만 어정쩡한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면 선택의 폭은 둘 중 하나로 좁혀집니다. 그 상황을 어정쩡하지 않게 만들거나 그게 안되면 스스로 그 상황을 떠나버리는 것이죠. 그러나 환경에 지배를 받는 일반 개인들이 상황 자체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대개의 경우 개인이 그 상황을 이탈하게 되지요.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버리고 회사를 떠나고 나라를 등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그런 상황이 처음 찾아온 것은 1996년의 여름이었습니다. 1년 반 동안의 해외근무를 마치고 본사에 돌아왔을 때였죠. 보통 5년씩 나가는 해외근무를 그렇게 짧게 마치게 된 것은 하필 내가 나간 현지법인이 폐쇄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꼭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카르타 현지공장을 관장하던 의류팀의 넘버 투로서 신속히 현지에 부임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던 공장의 경영전반을 인수하고 벌써 해외근무 8년차에 접어들고 있던 공장장을 비롯, 한국인 관리자들을 하루라도 빨리 귀국시키는 것이 내 임무였는데 본사가 모르고 있던 거액의 비자금 문제가 그 모든 절차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비자금 28만불이 마이너스라는 것, 즉 있어야 할 돈이 비어있는 상태라는 것이었고 전임 공장장 밑에서 오랫동안 현지법인 2인자로 있다가 마침내 승진한 지 채 1년도 안된 당시 현직 공장장은 내게 그 비자금을 비밀리에 인수하라고 강권했습니다. 당시 아직도 평생직장의 가치가 샐러리맨들의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 비어 있었으므로 들키기 전에 채워 넣어야만 했던 그 비자금은 당시 내 10년치 연봉을 넘는, 그래서 자칫 누군가의 목을 날리고도 남을 금액이었고 이미 적자가 나고 있는 공장에서 그 정도의 재원을 몰래 마련할 방도는 전혀 없었으므로 그 시한폭탄을 내 품에서 터지게 할 수 없었던 나는 공장장의 요구를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본사에 사실대로 설명하고 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죠. 물론 공장장은 절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런 의견을 개진하는 순간 난 공장장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적으로 자리매김 했고 시내 연락사무소의 지사장까지 가세해 내 목에 칼을 겨눠 왔습니다. 지사장은 공장장의 입사동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거의 동시에 신도시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갑자기 불어나 버린 마이너스 비자금의 원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부터 지옥으로 변해버린 내 현지 생활이 그나마1년 반 만에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된 것은 차라리 복음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어정쩡한 상황은 그렇게 쫓기듯 본사에 돌아온 후부터 벌어졌습니다. 나를 맞이하던 본사 사람들의 시선이 깜짝 놀랄 만큼 냉랭했기 때문입니다. 공장을 인수하러 갔던 사람이 오히려 전임자들보다 먼저 귀임하게 된 것도 모양이 좋지 않았는데 그 동안 자카르타에서 내가 공장장과 충돌했던 상황들이 공장장과 지사장의 버전으로 호도되고 왜곡되어 본사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본사 사람들이 알고 있던 에피소드에서 난 애당초 지사에 내보내지 말았어야 할 해외근무 부적격 인물이었고 거듭 하극상 사건을 일으켜 어쩌면 회생 가능할 수도 있었던 공장을 내부로부터 완전히 주저앉힌 대역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28만불의 위력이었죠. 꽁지에 불이 붙은 여우처럼 한국을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본사 상층부에서 고공 로비를 펼친 입사 14년차, 부장 진급을 앞둔 공장장과 지사장의 목소리에 막혀 7년차 과장대리인 내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마침 같은 시기에 우르무치 지사에 부임했던 내 동기가 현지 사무실에서 지사장을 때려눕히는 사건도 벌어져 나도 도매급으로 함께 넘어가는 불리한 흐름을 타고 있었습니다.
“내가 기획실 전산화 TF 팀으로 끌어줄 테니 마음 고쳐 먹어. 너 파면 당하는 일 따위는 절대 없을 거야.”
대학선배였던 기획실장은 공장장이 나 몰래 본사에 날려 보냈던 징계요청서들을 내 코 앞에서 흔들어 댄 후 뜬금없이 그런 달콤한 유혹을 해왔지만 난 더욱 복잡한 심경이 되어 갈 뿐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회사에 남는다는 건 머지 않아 공장폐쇄를 마무리하거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공장장과 지사장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들은 본사의 시선이 미치지 않던 타국의 하늘 밑에서 공공연히 위협을 가해 오던 끝에 급기야 내 차 바퀴에 몰래 칼자국을 내놓고 출근길에 바퀴가 터지는 사고로 고속도로 갓길에 처박히길 기도하기까지 했었는데 그런 일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과 다시 얼굴 마주치며 지내는 장면을 난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최악의 어정쩡한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어요.
“배과장, 그런 꼴까지 봐가며 계속 있을 거요? 그 동안 공들였던 우리 일들 다 버리고 대리, 과장 달고서 신입사원들처럼 다른 부서 가서 바닥부터 다시 일 배우자고요? 어차피 의류팀 문 닫으면서 회사가 20년 해왔던 이 사업과 거래선들 다 버리는 셈인데 이건 천금 같은 기회에요. 우리가 나가서 하자고요.”
박대리는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회사를 떠났으니 몸도 떠나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었으나 그 다음의 행보는 대기업이 아닐지라도 월급 꼬박꼬박 나올 장래성 있는 직장으로 이직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전역하면서 학창시절 나를 꿈꾸게 했던 음악을 버리고 대기업 무역회사에 들어간 것은 경제적 압박을 심하게 받아온 가정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턱밑까지 차올라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대학시절 ROTC에 지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기업 입사는 내 인생에 있어 몇 번 없었던, 주류사회에 편입하려는 몸부림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본사 귀임 당시 내 두 아이가 취학연령에 들어서고 있었으므로 경제적 안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했던 그 시점에, 그러나 박대리의 속삭임이 며칠 동안 내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당시 나름대로 필드에서 경력을 쌓아가던 난 의류팀 업무에 애착도 있었고 청운의 꿈을 품고 떠났다가 날개가 꺾인 채 중도에 돌아오고 말았던 해외생활을 다시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습니다. 그런 생각은 마치 아직 피가 스며 나오는 상처처럼 찌르듯 아려와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고 깊은 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어두운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박대리는 수익성 검증된 사업을 거저 인수하는 것이고 거래선도 이미 확보된 셈이니 내가 자카르타의 하청공장들을 돌려 생산관리만 해준다면 우리가 대기업에서 누렸던 그 모든 것 이상을 누리게 될 것이라며 유혹해 왔습니다. 물론 그의 솔깃한 호언장담이 나와 내 가족들의 미래를 결코 보장해 주지 못하리란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이성은 그것이 미확인 지뢰지대로 들어서려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며 날카로운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점점 박대리와의 동업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열심히 한다면 예상 외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것은 자기 최면이 되어 갑자기 미래가 장미빛으로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난 마침내 박대리의 제안을 수락했고 의류팀원 대부분이 나와 함께 사표를 던졌습니다. 각자의 퇴직금에서 갹출하여 순식간에 회사가 세워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몇 개월 전 떠나 왔던 인도네시아를 향해 다시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찾은 자카르타는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아니, 자카르타는 변함 없었지만 그 사이에 내 입장이 너무 변해 버렸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그 동안 당연한 것처럼 여겨왔던 대기업 프리미엄을 어깨에서 내려놓고 더욱 허리를 굽힌 겸손한 자세로 거래선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전엔 회사가 지불해 주었던 주택, 차량, 비자 등을 위한 비용들이 개인에게는 매우 버겁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일단 배과장이 먼저 지출해 주세요. 나중에 회사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 소급해서 결재해 드릴 테니 영수증들 다 모아 두시고요.”
박대리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우리의 신생 회사가 돈을 버는 것은 아직 요원한 일이었으므로 난 곧 허덕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퇴직금이 바닥나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가족들을 인도네시아로 데려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자카르타 한 귀퉁이에 작고 허름한 사무실을 마련한 나는 직원들도 고용하고 하청공장들과도 계약을 맺어 서울에서 보내주는 오더들을 어렵사리 쳐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믿어 준 일단의 예전 해외거래선들이 발주를 내주었고 박대리, 아니, 이제 회사의 대표로 추대된 박사장을 포함, 6명의 서울직원들이 원부자재를 준비해 자카르타로 보내주면 그걸로 하청공장을 돌려 생산한 제품 컨테이너를 일본과 유럽의 바이어들에게 실어 보내는 게 내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족들 내팽개치고 그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서울 사무실에서 편하게 일하는데 왜 당신 혼자만 인도네시아 그 먼 곳에 나가서 생고생을 하냐구요? 박사장 그 사람한테 이용당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 아내의 말에도 물론 일리는 있었습니다. 근무지와 근무환경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서울에서 받은 신용장 상의 제품가격을 박사장이 내게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던 차였습니다. 그건 결과적으로 그 오더를 쳐내서 남는 이익이 얼마인지를 내게 숨기겠다는 의미였으니까요. 본사 시절 내가 담당했던 일본 바이어들을 물려받아 사무실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이대리도 오더 가격이나 이익 구조에 대해서는 애써 입을 닫으려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어차피 동업하는 건데 시작한 지 몇 달 됐다고 벌써 의심하고 그래? 박대리, 아니 박사장 저 친구 그럴 놈 아니야. 당신도 조금만 더 참아 줘.”
박사장은 나보다 입사가 1년 늦었는데 만약 의류팀이 그렇게 되지만 않았다면 이듬해엔 해외지사로 나갈 케이스였으니 그도 운명의 변덕에 나만큼 실망하며 절치부심하고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내를 달랬지만 마음 한구석엔 내가 인도네시아로 다시 나간 후 박사장이 서울 본사의 동료들과 함께 내가 모르는 비밀들을 하나 둘씩 만들고 있다는 의구심이 조금씩 고개를 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큰 성공을 함께 거둬야 할 더욱 분명한 이유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독립해 나올 당시 비웃음으로 일관했던 본사 사람들에게 우리의 성공을 보여주어야만 했으니까요. 물론 내게는 더욱 절실했습니다. 그것은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에게 안겨줘야 마땅한 일말의 보상이라는 측면뿐 아니라 그 즈음 이미 본사에 귀임해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공장장과 지사장에게 반드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공장 말아먹어 급기야 문닫게 되었던 회사의 한 사업부문을 우리가 이렇게 멋지게 살려냈다고 큰소리 치면서 말이죠. 그러려면 동업이 깨져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동업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은 동업자간의 불신인데 외부에서 영입한 사람들을 제외하곤 내가 우리 팀에서 가장 연장자였으니 박사장을 누구보다도 믿어주고 더욱 힘을 실어 주는 모범을 보여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노력했던 것이 조금씩 성과를 맺어 새 회사가 출범한 지 몇 개월 만에 마침내 제품 컨테이너들을 실어내기 시작했고 곧 월급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이젠 모든 것을 보다 수월하게 감당해 낼 수 있으리란 자신감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정말 다이내믹합니다. 그런 자신감을 철저히 파괴해 버리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뒤이어 터진 것입니다. 1997년 하반기 태국에서 시작한 통화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했습니다. 그건 개인이 노력해서 막거나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달러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며 수많은 회사들이 도산했고 부채와 인건비에 쫓겨 야반도주하는 교민들의 소식도 매일 들려왔습니다 하청공장들이 속절없이 흔들리면서 서울에서 보내주던 오더도 중단되어 버렸고 난 인도네시아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박사장은 본사도 어려운 상황이라 더 이상 비용을 보내줄 수 없으니 당분간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보라고 통지해 왔습니다. 그것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난 이역만리 타국에서 생존과 탈출을 위해 홀로 투쟁해야 할 것임을 박사장의 손을 잡던 순간 이미 각오했던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하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1998년 5월 서부 자카르타 소재 뜨리삭띠 대학에서 데모를 진압하던 경찰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대대적인 반정부 운동이 촉발되었고 혼란에 편승한 도시빈민들의 광기 어린 폭동과 약탈이 자카르타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자카르타는 며칠 동안 마치 전쟁터가 된 것처럼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지만 계엄군들은 시내 거점들을 확보하고서도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아 그러는 사이 화교 상업지역으로 쏟아져 들어간 폭도들은 무차별적인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많은 화교 여인들이 무자비하게 겁탈당했습니다. 혼란이 극에 달하면서 자카르타 국제공항마저 인도네시아를 떠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고 자국민 소개를 위해 국적기를 보내오지 않은 무심한 국가의 국민들은 항공권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기독재를 해왔던 수하르토 대통령도 데모와 폭동에 밀려 마침내 하야하기에 이르지만 그 후에도 사태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해를 넘기도록 소규모 폭동들이 간헐적으로 발생했고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대대적인 인종분쟁과 종교분쟁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사태를 목도한 끝에 나는 결국 악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1999년 3월 두 손 들고 서울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귀국하여 회현동 사무실에 며칠 출근하면서 난 내가 모르고 있던 몇 가지 사실들을 문득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외환위기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꼭 힘들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젠 예전 같지 않아요. 전엔 일주일에 서너 번씩 룸살롱도 가곤 했었는데…, 그땐 정말 돈이 쏟아져 들어왔거든요. 하지만 요즘은 자금상황이 그리 시원치 못해요. 배과장 오셨는데 좋은 데 모셔가지도 못하고…”
예전 회사에서부터 경리업무를 담당했던 서대리는 그렇게 말하다가 내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더니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박사장이 뒤에서 눈치를 주었던 것인데 다른 동료들은 슬며시 뒤로 빠져 버렸고 박사장은 딴청을 피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
자카르타에서 온몸으로 외환위기와 폭동을 맞았던 나와 마찬가지로 서울 본사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카르타에서 내가 구축했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동안 회사가 금방이라도 망할 것처럼 엄살을 떨며 경비송금을 줄이고 급기야 급여까지 끊어 버렸던 본사는 그 사이 생산기반을 야금야금 중국으로 옮긴 후 하늘을 찌르던 달러화 가치의 덕을 톡톡히 보며 사상초유의 흑자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수출 네고한 달러가 원화로 환전되면서 서울 본사의 금고엔 몇 배로 뻥튀기된 이익이 굴러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밤 폭죽을 쏘아 올리듯 서울의 밤을 밝히며 가라오케에서 흥청망청했고 넘쳐 흐르던 재원으로 아동복 인터넷쇼핑몰을 비롯하여 내겐 한 마디 상의도 없었던 신규사업들을 그 사이 여러 개 벌여 놓고 있었습니다. 사무실 한 편을 개조해 만든 스튜디오엔 제품촬영을 위한 고가의 장비들이 들어차 있었고 박사장과 서대리가 타고 다니던 회사명의의 차량들도 신형 세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동안 그렇게 힘들다며 엄살을 부렸던 거요?”
“배과장 고생한 거야 잘 알지만 서울에서도 들어가는 비용들이 많았어요.”
“명색이 동업인데 그렇게 매일 룸살롱 갈 돈이 있었다면 최소한 자카르타 사무실이 저 지경까진 되지 않도록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오?”
“뭐, 냉정하게 들릴 지 몰라도 그 동안 서울에서 올린 흑자에 사실 배과장이 기여한 게 없잖아요? 그건 전부 본사에서 중국생산 하면서 창출한 거였어요. 그래도 돌아오는 비행기표 값은 서울에서 보내줬잖아요?”
박사장의 그 말이 내 뺨을 후려 갈겼습니다. 난 우리 모두가 한 팀이라 믿으며 자카르타에 내 모든 재원을 투하해 생산기지를 구축했던 것인데 박사장의 생각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입니다. 어차피 내가 해외생산관리를 담당키로 한 것이었으니 회사차원에서 생산기반을 중국으로 옮기려 했다면 내가 중국으로 날아가 그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하청공장 관리는 전 직장에서도 인도네시아에 발령받기 전까지 내가 하던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자카르타에서 숨이 넘어가는 동안 박사장이 본사 동료들과 함께 나 몰래 중국으로 오더를 빼돌린 이유는 나의 개입을 더 이상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기 이미 오래 전, 그러니까 자카르타에서 폭동이 터져 내가 살던 주택단지 앞 상가 수백 미터를 불태운 화염이 넘실거리며 폭도들과 함께 단지 안으로 밀려 들던 그 당시, 난 이미 박사장의 입장에서 한계효용을 다하고 버려졌던 것입니다.
또 다시 어정쩡한 상황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난 이제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조직에 억지로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아있는 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박사장이 나를 계속 밀어내려 하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밥값은 해야 되잖아요? 우리 협력업체 일손이 딸리는 모양인데 거기 가서 월급이라도 좀 받아 와야 하지 않겠어요?”
의류팀 해체를 기폭제로 전 직장에선 급기야 일반상품부 전체가 와해되고 말았는데 의류팀 바로 옆 자리에 있던 혁제팀에서 옷을 벗고 나온 사람들 중 중국 광조우에 혁제의류 하청을 돌리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박사장이 중국에서 찾은 하청공장들 대부분을 그 선배가 소개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 선배가 이런저런 신규사업들을 개발하고 있는데 배과장 같은 인재가 도와주면 진행이 더욱 수월하지 않겠어요? 가죽옷들 말고도 요즘은 중고컴퓨터도 수출하고 대용량 서버들도 수입해서 납품하는 모양이던데…”
컴퓨터, 전산화, 이런 것들은 나와 악연입니다. 박사장은 나를 그 선배 회사에 그렇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받는 월급은 50대 50으로 하자고요. 회사에 반 입금하고 나머지 반은 배과장이 쓰시고.”
박사장과의 인연이야말로 정말 악연이었던 것일까요? 그날 밤 난 남대문시장 뒷골목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소주병을 몇 개씩이나 혼자 비우며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비웃었어요. 원했다면 더 좋은 조건의 직장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박사장의 배에 올라타 자카르타에 돌아가기로 결정했던 것을 그 동안 국제전화할 때마다 신랄하게 비난했던 아내가 이제 이 상황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 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은 비수에 꿰뚫린 듯 선혈을 쏟았습니다. 공장장과 지사장의 얼굴에 떠오른 비웃음도 눈에 보이는 듯 했습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치를 떠는 것도 그때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자카르타에 첫 발을 내딛던 1995년 1월부터 그날 그 순간까지의 시간을 허망하게 소비해 버렸다고 자조하며 난 소주잔을 거푸 들이켰습니다.
내 회사의 수입을 메워주기 위해 다른 회사에 월급 받으러 출근해야 하는 그 날의 어정쩡한 상황은 또 다시 내 등을 떠밀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엔 정말 반전이 있습니다. 우연히 재회한 대학동기와 잠시 얘기하던 끝에 그의 의약품회사 자카르타 지사장으로 전격 발탁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박사장과 동업하면서 투자한 돈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지만 난 내 자존심만을 간신히 건져 그나마 내 기반이 아직 남아 있던 인도네시아로 다시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대반전의 스토리는 또 다른 반전을 낳는 법입니다. 1999년 당시 한국산 의약품이 현지 법규상 인도네시아 시장에 상륙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알게 된 대학동기는 두 달 만에 가망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차없이 지사를 철수하면서 나와의 계약도 종료시켰던 것입니다. 난 또 다시 자카르타에 혼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봉제의류사업으로 돌아간다면 바잉오피스를 꾸려 바이어들의 오더를 하청공장에 넣어 돌리는 게 모양도 살고 품위도 있는 일이었지만 내가 담당했던 일본 바이어들은 박사장 회사의 내 후임 이대리가 모두 인계 받은 상태였습니다. 의약품회사와 함께 다시 인도네시아로 나갈 당시 박사장은 내가 2년간 써왔던 랩톱컴퓨터마저 회사 것이라며 반납을 요구했었는데 그런 박사장에게 내 옛 바이어들을 돌려 받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립무원이 되면 또 솟아날 구멍도 보이는 법. 나를 구원해 줄 누구 한 명 없던 그 상황에서 난 거꾸로 한국산 자재를 현지에 공급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방편이었기에 ‘발상의 전환’이라는 낯뜨거운 단어를 꺼낼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서 그것이 상식이었고 상식은 언제나 통하기 마련이었죠. 내가 제품 팔아주겠다는데 자재공장들이 거절할 리 없었으므로 든든한 한국 공급선들을 여럿 엮어 라인업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수배된 자재들을 무기로 막무가내로 현지 화교공장들에 밀고 들어가 영업하는 동안 외환위기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던 인도네시아에도 경기가 되살아 나면서 난 드디어 미약하나마 순풍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최악의 위기를 넘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대리, 씸테이프 40만 야드 공급해 줄 수 있죠? 납기 잘 지켜 줘요. 잘 하면 2차분 오더도 받을 수 있어요.”
박사장과 결별한 지 1년쯤 지나 사업에도 어느 정도 안정감이 찾아 왔을 때 난 옛 의류팀 친구들과 다시 한 번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시 우리가 수출하던 특수복을 전문 생산하는 공장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레인웨어나 방호복의 봉제선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기능성 씸테이프를 용착시키는 건 아직도 신기술 중 하나였지요. 그 씸테이프 공급선을 나 역시 몇 군데 알고 있었지만 굳이 박사장 회사를 통해 구매하려 했던 것은 옛 친구들에게 나의 건재를 알리는 동시에 내가 그들에게 여전히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스처는 충분히 성공적이어서 끊긴 다리가 다시 놓인 것처럼 우리들 사이에도 새롭게 교류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꼭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씸테이프에 품질불량이 발생해 20퍼센트 정도의 물량을 재생산하여 무상으로 교환해줘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불량 씸테이프가 이미 사용되어 수선조차 불가능하게 된 의류 차원의 불량과 손실을 우리에게 책임 지우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으므로 발주 업체가 후속 오더를 다른 회사로 던져 버린 것은 불평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마진이 박한데 재공급 문제 때문에 마이너스가 났어요. 그래도 배사장 커미션은 최대한 챙겨 드릴게.”
거래 시작 당시 박사장이 통지해 왔던 예상이익 400만원 중 나는 그 절반인200만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예전에 알고 있던 원가를 생각하면 턱없이 적은 마진이었지만 박사장은 그 사이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자재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200만원은 풀질사고가 나면서 받을 수 없는 금액이 되어 버렸고 마지막 정산을 마친 후 달랑 60만원을 뒤늦게 송금 받으면서 그래도 박사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다시 서울에서 출장자가 날아오기 시작했는데 김부장과 함께 서대리가 함께 날아온 것은 좀 의외였습니다. 회사 설립 당시 어렵게 영입한 형님 뻘인 김부장은 원단담당이었으니 영업출장 다니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경리담당인 서대리는 자카르타에 출장 와도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더 한 번 더 받아 주실 수 없어요? 그래야 저도 박사장님이 보너스로 외국출장도 또 보내 주시고 할 텐데 말이에요.”
자카르타의 한 한국식당에서 저녁식사 반주가 조금 지나쳤던 서대리가 혀 꼬인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자 급히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리는 김부장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총액은 얼마 안돼도 마진이…, 아휴, 그렇게 노나는 오더가 없었어요.”
그 대목에선 나도 술잔을 내려놓고 서대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봐야 했습니다.
“적자가 났다면서…?”
서대리는 자신이 말실수 한 것을 깨닫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었고 김부장 역시 좌불안석이 되어 전전긍긍했습니다. 그 문제를 캐묻는 게 참 모양 빠지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박사장이 뭔가 장난을 쳤다는 느낌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습니다. 결국 서대리가 털어놓은 상황의 전말을 듣고 급기야 씸테이프 공급선 담당자에게 국제전화로 확인한 끝에 박사장이 내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출대금 총액 2천만원 남짓한 그 40만 야드 씸테이프는 품질불량이 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최저 품질로 맞춘 것이었고 운송비까지 포함한 원가가 5백만원도 채 들지 않았으니 박사장은 단번에1,500만원이 넘는 이익을 고스란히 챙겼던 것입니다. 게다가 불량발생으로 인한 교환물량의 재생산과 운송비용 전액을 씸테이프 공급선이 부담했으니 박사장으로서는 그 사고에도 불구하고 추가 비용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이익을 홀로 챙기면서 선의로 오더를 내밀었던 내 손에 달랑 60만원을 쥐어주며 온갖 생색을 다 냈던 것입니다.
“그간의 정 같은 거 다 차치하더라도 최소한의 상도의라는 게 있는 건데 이번엔 정말 해도 너무한 거 아니오?”
어쩌면 내가 전화통에 대고 너무 몰아붙였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동안 대꾸를 못하던 박사장은 이내 헛기침을 하더니 정면으로 받아 치고 나왔습니다.
“배사장 기분 나빴다면 그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어차피 사업이란 게 그런 거 아니에요?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 건데 이렇게 욕먹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우리가 더 이상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배사장 월급 챙겨줘야 할 입장도 아니잖아요? 거래하면서 자기 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면 그건 배사장이 사업가로서 자질이 없는 거 아니냐고요?”
말이 턱 막혔습니다. 박사장으로선 애당초 나의 선의 같은 것엔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곱씹어 보면 그의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각자의 위치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사람들 망막에 맺히는 상들이 각각 다른 것처럼 어떤 사안에 대한 개개인의 관념도 서로 다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의류팀을 나와 동업을 시작하던 순간 나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눌 동지로서 박사장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나를 보았던 것입니다. 나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어요. 내가 그것을 깨닫기 몇 해 전 이미 모든 것을 간파해 버렸던 내 아내의 귀신 같은 눈썰미가 놀라웠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나를 하나의 수단, 용도폐기 되면 간단히 쓰레기통에 쳐 넣을 소모품으로 봤다면 그때 그와 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던 다른 동업동지들을 그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지, 몇 년 후 그들의 운명이 어떠할 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화가 오갔는데 당시 뭔가 다시 시작될 듯 하던 나와 박사장 회사와의 관계가 지속될 리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대성공을 과시하며 보여줘야 할 상대가 한 명 더 생긴 것이죠. 그러나 그런 마음을 먹으면 웬일인지 일은 더욱 풀리지 않는 법입니다. 어느 날 현지 파트너가 뜬금없이 술라웨시 아세라 지역의 벌목허가를 받아오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원목 바닥재 사업으로 선회한 나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 파트너의 형제인 현지 군수에게 처절할 정도로 사기를 당해 제재소와 벌목장을 뺏기며 처참한 파산을 맞게 됩니다. 하필이면 오래 떨어져 살았던 아내와 아이들을 자카르타로 불러 들인 지 불과 1년도 안된 시점이었는데 영문도 모르는 그들을 모두 끌어 안고 난 그 끝도 없는 나락의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갔습니다.
뭔가를 구축하고 쌓아 올리는 일은 평생이 걸리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대개의 경우 순식간의 일입니다. 그렇게 머나먼 타국에서 철저한 좌절감과 열등감에 휩싸여 나락의 밑바닥을 헤매던 시간은 영원처럼 길었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문득 깨달아지는 진리들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던 시절엔 그토록 살갑고 친절하던 친구, 선후배, 이웃들이 내가 깊은 곤궁에 빠져 허덕이기 시작하자 마치 내가 위험천만한 테러리스트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 둘 내 주변을 떠나거나 멀찍이 안전거리를 유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강한 자들이 휘두르는 철권을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빈곤한 이웃들이 내미는 앙상한 두 손바닥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그 나락에서 건져낸 것은 미용사업이었어요. 파산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시절,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는 순간이 곧 닥쳐오리라는 걸 소름 돋도록 생생히 인지하면서 그렇게 되기 전에 마지막 한 줌 남은 돈과 시간으로 유력한 아이템들의 가능성을 하나라도 더 서둘러 타진하고 검토하려 했었죠. 그 당시 큰 기대도 없이 한 차례 쌤플 오더를 돌려 본 게 전부였던 일단의 미용기기들이 몇 년 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견인차가 되었습니다. 국내의 한 신생업체와 인터넷을 통해 우연히 만나 초창기 몇 년간은 얼굴 한 번 직접 마주한 적도 없으면서도 서로 성심껏 밀고 당겨준 결과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며 그들은 수 십 개국에 유력한 거래선들을 보유한 가장 성공적인 미용기기 중견업체로 성장했고 나 역시 그들과의 거래를 기반으로 현지 미용업계에서 독특한 색깔을 지닌 수입재료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파산 당시 엄청났던 빚들을 아직 다 갚지 못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채권자들이 독촉전화로 퍼부어대던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들은 내가 경제적 능력을 회복하자 살가운 안부전화로 바뀌었고, 당시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하지 못할까 봐 내심 노심초사하게 했던 내 아이들도 사업상황이 더욱 호전되자 자카르타에서 고교과정까지 마친 후 그들이 꿈꿔 왔던 싱가포르와 호주의 원하는 대학으로 각각 진학해 갈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도 그리운 한국 땅을 다시 밟을 기회가 마침내 찾아 왔지요. 파산 후 7년 만에 첫 귀국 비행기에 오르면서 다시는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리라 절망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감격에 겨웠습니다.
마음이 푸근해지니 예전의 친구들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다시 들었습니다. 그렇게 감격적이었던 귀국출장을 다녀오고 나서 또 다시 몇 년이 더 흐른 후의 일이었습니다. 박사장과 결별한지는 벌써 강산이 한번 반 정도 변한 옛날 일이 되어 있었고 당시 느꼈던 참담한 심경은 이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었습니다. 파산의 나락에서 그보다 더한 수모를 이력이 나도록 당해 보았고 그 밑바닥에서 수많은 악당들과 파렴치한들의 맨 얼굴을 맞닥뜨려 왔기 때문이었죠. 옛 의류팀 동료들과 동업동지들을 회복하는 것은 허비되어버린 셈이 된 내 인생의 한 부분에 다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사람은 김부장이었습니다. 그는 대치동의 한 학원건물 1층에서 성업중인 책방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중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고 예전부터도 원만한 성격으로 모든 성원들을 아우르던 그를 통해 동업동지들 모두가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상했던 대로 회사에서 내팽개쳐진 후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박사장이 자기 비서처럼 끼고 돌았던 서대리 역시 그 땐 어느 중견기업의 경리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박사장이야 전에 하던 그 일 아직도 하고 있어. 혼자서. 그 친구 끈기 하나는 정말 대단해.”
“요즘도 만나세요?”
“그렇지, 뭐. 요즘 자전거 타는 게 대유행이잖아? 한 달에 한번 자전거 동호회에서 만나. 같이 술도 마시고. 이번에 배사장 온다고 했더니 같이 술 한 잔 하자고 하더군. 그런데 난 저 위에 학원이 끝나야 책방도 문을 닫으니 시간이 영….”
박사장의 회사는 이제 직원 한 명 없는 박사장의 1인 회사가 되었고 이미 오래 전에 회현동을 떠나 의정부 어딘가의 작은 오피스텔로 옮겼다고 했습니다.
나와 박사장과의 사이에 아직도 남은 앙금이 있다면 이젠 털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치고 받고 싸우다가 헤어진 것도 아니고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애들도 아닌데 굳이 바쁜 김부장을 불러 내려고 밤 늦은 시간에 약속을 잡는 것도 곤란했고 굳이 같아 나가려고 김부장 쉬는 날을 기다리기엔 내 출장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난 내친 김에 그날 바로 의정부로 넘어가 박사장을 만나기로 마음 먹고 지하철 학여울역에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박사장, 오랜만이에요.”
“아…! 배사장이요?”
출장 전 몇 번 문자를 주고 받았음에도 내가 직접 전화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는지 그의 목소리엔 당황한 기색이 비쳤습니다. 김부장 통해 얘기 듣고 있었다는 등 의례적 인사가 오간 후 난 본론을 꺼냈어요.
“오늘 시간 괜찮으면 의정부로 넘어갈까 하는데 저녁 때 소주나 한 잔 할래요?”
그는 어,어, 하면서 즉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김부장님도 같이 넘어 오신데요?”
“아무래도 김부장님 바쁘신 거 같아서…, 오늘은 우리끼리만 만나죠, 뭐?”
“음…, 그게….”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 왔습니다.
“오늘 말고…, 김부장님 시간 될 때 같이 만나죠?”
“그분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요. 김부장님껜 미리 말씀 드렸어요. 오늘 시간이 곤란하면 내일이나 모레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번 주말엔 다시 인도네시아행 비행기를 타야 되거든요.”
“그래도…, 원래 김부장이랑 같이 만나기로 약속했던 거리서….”
“그냥 소주나 한 잔 하자는 건데…?”
“이봐요, 배사장. 우리 약속한 대로 하자구요. 김부장 나오면 나도 나가고 김부장 안나오면 나도 안나간다구요!”
높아지려는 언성을 애써 억누르는 그의 목소리엔 짜증이 베어 있었습니다. 날 피하려는 게 분명했습니다. 예전에 그토록 독선적인 논리로 내 말을 당당히 받아 치던 그가 이제 와서 새삼 날 껄끄럽게 여기며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면 그와 나 사이에 있는 것인데 그는 김부장의 참석여부만 집요하게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부장이 나와야만 날 만나겠다는 것은 결국 핑계일 뿐이고 박사장의 진심은 어떤 식으로든 날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겠죠.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습니다.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다음 기회에 보는 걸로 해요.”
그렇다고 소리지를 필요까진 없지 않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꾹 참으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어이가 없어 전화를 걸었던 공중전화 박스를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다가 결국 지하철을 타고 마포의 부모님 집으로 귀가하는 동안 박사장의 아까 그 목소리가 내내 귓전을 때렸습니다. 약속한 대로 하자구요? 그 약속은 당신이 나랑 한 게 아니라 김부장이랑 했던 거잖아?
하지만 지하철을 내릴 즈음엔 실소가 터졌습니다.
[박사장, 그 친구 정말 일관성은 있어.]
남자라면 좀 독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일관성도 있어야 하는 거죠. 박사장은 우리가 전 직장을 그만두고 나올 때부터 그날 그 순간까지 내 입장에서만 보면 철저한 이기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건 꼭 비난할 일만은 아니었어요. 그에게도 보호하고 부양해야 할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고 비록 감언이설로 동료들의 기회와 이익을 가로채며 철저히 이용해 먹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는 나처럼 경제위기와 폭동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 실낱 같은 빛 줄기를 찾아 미친 놈처럼 발버둥치며 좌충우돌 하지도 않았고 죄 없는 가족들의 발목까지 붙잡고 파산의 낭떠러지로 끌고 가 함께 굴러 떨어지는 바보 같은 짓도 하지 않은,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아버지이자 훨씬 더 지혜로운 가장이었습니다.
자카르타에서도 바쁘게 필드를 뛰어다니다가 잠시 짬이 날 때 가끔은 그 날의 전화통화를 다시 기억해 내곤 했습니다. 만약 박사장과 그날 만나게 되었다면 우린 정말 과거의 모든 앙금을 훌훌 털고 화해의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을까요? 오히려 본의 아니게 더욱 어색하고 어정쩡한 상황으로 뛰어들 뻔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기…, 자카르타에 가려는데 호텔 좀 잡아 줄 수 있어요?”
그런 후 1년도 훌쩍 지난 어느 날, 박사장이 그런 전화를 걸어온 것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쭈뼛거리고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세상 천지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 호텔이라도 얼마든지 예약할 수 있는 시절이 도래했는데 박사장이 정말 호텔을 못잡아 전화해 온 건 아니었겠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인도네시아에 다시 하청을 넣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배사장…, 요즘 다른 일 하는 건 알지만 시간 되면…, 거기 하청공장 잡아서 우리 오더 몇 개만 돌려줄 수 있을까요? 사례는 할게요.”
중국 인건비가 폭등하면서 많은 회사들이 생산기반을 동남아의 다른 나라로 옮겨 가던 시기였습니다. 박사장의 말투가 그리 간곡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무심하게 들리도록 애쓴 흔적도 보였지만 지난 세월 나와의 사이에 그토록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모든 어색함을 무릅쓰고 내게 부탁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보면 그가 오더를 넣던 중국공장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쩌면 당장 다음 달부터 시작될 지도 모르는데…, 한 번 해줄 수 있겠어요?”
문제는 중대할 뿐 아니라 급박하기도 한 모양이었습니다. 난 낮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박사장 부탁이라면 뭐든 해줄게. 걱정 말고 와서 얘기해요.”
박사장은 그렇게 부탁을 해오면서도 내가 간단히 수락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는지 전화기 저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손을 뗀지 오래된 봉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간단한 일도 아닐 것이고 하필이면 그것이 박사장 오더 때문이라는 점이 부담되지 않을 리 없었지만 난 쉽게 그렇게 대답했고 그건 진심이기도 했습니다.
“뭐든 다 해주겠다고요. 정말로. 그러니 걱정 말아요.”
1년 전 의정부로 찾아가 소주를 대작하려 마음 먹던 당시 난 이미 마음 속에 그런 비슷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최악의 어정쩡한 상황 속으로 스스로 발을 내딛는 셈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등에 칼을 맞듯 내 의지와 관계없이 갑작스레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만큼은 내가 충분히 인지하고 각오한 상태에서 스스로 초래하는 상황이란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단지, 그의 부탁에 응하는 것이 나로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그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여전히 궁금함으로 남습니다.
박사장이 달리 할 말을 빨리 찾지 못하는지 전화기 건너편의 침묵은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가 내 반응에 감동하거나 그래서 갑자기 그의 인생을 지배해 왔던 이기심에 대해 깊이 반성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고 나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2013.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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