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임진강 블루스 본문
임진강 블루스
1.
내가 근무했던 제 1사단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사단장으로 있었던 곳입니다. 그를 직접 모셨던 당시 면역 직전의 고참 상사와 준위들은 그가 대단한 분이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지 않았다면 그는 10.26 사태로 야기된 혼란한 정국을 바로 잡고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에 일조한 훌륭한 군인으로 기억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가 사단장 시절 남겼던 많은 일화들이 80년대 후반까지도 부대에서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임진강 하안선 부대의 한 위병이 헬기를 향해 거총경례를 했던 일은 그 중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그의 경례구호가 헬기까지 들릴 리도 없었고 그 헬기에 누가 탔을지도 까마득히 몰랐지만 군기 빡세게 들었던 이 위병은 “전진! 구타금지! 더운 날씨에 수고 많으십니다,” 이런 경례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겠죠. 물론 난 지나가는 헬기나 비행기에 대고 고래고래 경례구호 외치는 놈들은 그 정신상태를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런데 그 헬기를 타고 가면서 우연히 그 위병의 모습을 발견한 전두환 사단장은 참 기특하다 생각했던 모양이고 다음날 그 위병에게 10박 11일짜리 포상휴가를 내렸습니다. 그 영향으로 내가 복무하던 시절에도 지나가는 헬기에 경례를 올려 붙이는 위병들이 있었지만 훗날 합참의장에 국방장관까지 역임하게 되는 당시 김동진 사단장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맹위를 떨치던 제5공화국이 지고 노태우의 제 6 공화국이 떠오르면서 코 앞에 닥쳐온 88 서울올림픽 준비로 서울은 물론 전국이 북적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해 6월엔 내 전역식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난 정규 보병소대장 교육을 받았지만 일선 전투부대로 가는 대신 제3땅굴과 도라전망대를 관리하는 부대의 안내장교로 발령을 받아 복무했습니다. ‘지하갱도통제실’ 뭐라나 했던 어딘가 비밀결사 유격대스러운 정식 부대명칭을 인근 부대장들은 물론 우리 부대원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임진각에서 자유교, 즉 자유의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타나는, 우리 부대의 전쟁전시관 이름을 따 ‘멸공관부대’라고 부르는 곳이 내 일터였습니다.
그해 초, 전시관 입구에 붙어 있던 전두환 전대통령의 초상을 노태우 신임 대통령의 초상과 바꾸어 다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에서 왕고참 하사관들이 달려와 그건 씻을 수 없는 불경이라며 결사 반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꼭 입구 정면은 아니더라도 그 전시관의 다른 방엔 백선엽 장군으로부터 시작되는 역대 사단장 초상들 사이에 전 전대통령의 사진이 여전히 걸려 있었는데 말입니다. 야전부대를 돌다가 이제 중령진급을 앞두고 잠시 우리 부대에서 숨을 돌리던 우리 실장님은 옛 주군을 향한 노병들의 끝없는 충성심에 무척 곤혹스러워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두환 깡패정권’ 운운하며 비무장지대 전역에서 대남 비방방송에 열을 올렸던 북한 당국도 그 즈음엔 그 문구를 어떻게 혁명적으로 바꿀까 고민했지 싶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제6공화국은 보통사람의 옷으로 갈아입은 군사정권의 연장이긴 했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관물대 속옷들 각 잡아 정리하듯 강제하고 획일화시키려는 전 정권의 숨막히는 철권통치는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보안법으로 학생들의 이념운동을 짓눌렀고 ‘이념’ 뒤에 따라다니던 ‘통일’이란 단어는 어딘가 마지못한 듯, 겸연쩍은 듯 느껴졌습니다.
그해 봄, 운동권 학생들은 ‘남북학생회담’이란 것을 발의했습니다. 구태의연한 기존 정치권의 겉치레뿐인 남북대화로 통일은 요원할 뿐이니 이제 남북의 학생대표들이 판문점에서 만나 순수한 마음으로 통일과 현안들을 논의하자는 것이었죠. 이 순진한 생각은 당시 민주화 열기와 맞물려 운동권과 정치권을 술렁이게 했고 조만간 학생대표들이 서울을 출발해 판문점으로 향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들이 지나갈 길목인 자유교 앞에 있던 우리 부대는 그 불똥을 직통으로 맞았습니다.
2.
“배중아. 역시 믿을 놈은 너 밖에 없다. 이 나라는 네가 지켜야 돼. 우리가 무슨 힘이 되겠니?”
최중위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내 눈을 응시하며 이렇게 말하는데 그 옆의 김중위도 역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너희들 정말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국방부에서 하는 일은 정말 한 치도 오차가 없어. 봐봐. 이 시국에 네가 우리 선임장교잖아. 군번도 제일 빠르고.”
군번이란 원래 묵직한 게 좋은 거라며 내 300번대 군번을 놀려대던 이 친구들이 갑자기 입장을 바꿔 그 빠른 군번을 찬양하는 건 당연히 나한테 바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전역은 어느새 2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사회복귀와 취업을 준비할 시점이었습니다.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취직이 크게 어렵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6월말에 군문을 떠날 ROTC 전역예정자들은 전역 1-2개월 전부터 장기휴가를 얻어 대기업들을 돌며 입사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습니다. 대기업 면접관들이 일선부대들을 일일이 돌면서 장교들 면접을 봐줄 리 없었으니 말입니다.
최중위와 김중위는 그런 이유로 말년 2개월 동안 나 혼자 부대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중이었습니다. 난 임관 전 H그룹에 입사해 한 달 반 가량 근무하다가 군복무사유로 장기 휴직한 상태였습니다. 나라고 좀 더 좋은 조건의 다른 직장들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삼성이나 LG 같은 곳에 입사하게 됐다면 지금의 내 인생은 크게 달라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집요하게 매달리면서 이미 갈 곳을 정한 내가 과욕을 부려 자기들의 기회마저 뺏으려 한다며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배중위. 자네가 알아서 장교들 말년휴가 스케줄 짜 봐.”
부하 장교들 앞길 막을 생각이 없었던 우리 실장님은 별다른 코멘트 없이 그 일을 내게 일임했습니다. 학군동기인 제3땅굴소대장은 앞으로 최소 3년은 더 군에 남아 있어야 할 복무연장이었고 도라전망대는 장기복무 원중사가 맡고 있었으니 멸공관에서 안내장교 세 명 중 누구든 한 명만 남아 준다면 어떻게든 부대가 돌아갈 터였습니다. 그게 이 친구들이 소주며 통닭을 사와 상납하면서 내게 졸라 대는 이유입니다. 난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선임장교라는 위치가 선택의 폭을 크게 제한했습니다.
위관급 장교들이 즐비한 일반 부대였다면 취업면접 보러 나간 학군장교들 빈 자리를 채워줄 육사, 삼사, 학사 등 타출신 장교들이나 후배 학군장교들이 수두룩했으니 얼마든지 돌려 막을 수 있었지만 우리 부대는 실장, 보좌관을 제외한 위관급 장교들 전원이 ROTC였고 그나마 같은 기수 동기들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몇 주씩 교대로 휴가 나가는 식의 일정을 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럴듯한 허울일 뿐, 저 놈들은 일단 나가면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게 뻔했습니다. 성공적으로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전역식 직전까지 말년 휴가를 만끽할 놈들이었죠. 하지만 사실 그런 상황은 당시 다른 부대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3.
멸공관은 판문점과 제3땅굴을 방문하는 국내외 귀빈들과 관광객들에 대한 안내와 의전이 주업무였으므로 국내외 장성들과 고관대작들을 수시로 수행하곤 했습니다. 안내장교들은 영어를 비롯한 각자의 전공 외국어를 유려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했고 업무상 필요로 일본어, 중국어 같은 제2 외국어를 부대에서 추가로 습득해야 했습니다. 배치 즉시 특정 외국어로 브리핑을 해야 하는 업무특성상 선임 안내장교들이 모교 학군단을 찾아 언어전공의 똘똘한 후임을 직접 선발하는 것이 관례였고 나 역시 우리 학교출신 선배에게 선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멸공관 장교들이 직접 후임자를 선발한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내가 소위 시절, 중위선배들은 후임선발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복무연장자나 장기복무자들이 야전보직을 마치고 잠시 한숨 돌리며 자기계발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배려차원의 군인사가 막 시작된 것입니다. 그건 우리 기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나를 회유, 협박하고 있는 저 최중위는 내가 직접 데려온 친구입니다. 훈련용 전함을 타고 진해에 기항하는 프랑스 해군사관생도들의 제3땅굴과 판문점 견학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생도들뿐 아니라 프랑스 해군장성은 물론 우리 군 장성들과 국방부 고관들이 함께 방문할 것은 불문가지였습니다. 불어실력 말고도, 하늘 같은 고관대작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을 배짱 든든한 안내장교가 갑자기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 빨리 나가서 한 명만 잡아 와라. 납치해 오든, 협박을 하든, 아무튼 살짝만 건드려도 불어가 술술 쏟아져 나오는 놈으로! 배중위, 너만 믿는다!!”
난 그렇게 당시 실장님에게 등 떠밀려 몹시도 부담스러운 2박3일짜리 외박을 나갔습니다.
대학 학군동기들 중 불어과 출신은 달랑 두 명뿐이었습니다. 수소문해 본 바 그 중 한 명인 조중위는 당시 자기 소대를 데리고 서해 어느 섬에 들어가 어선들 입출항을 통제하면서 해안경계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성격상 그런 폐쇄된 공간에서 소대장보다 교주에 가까웠을 조중위가 배짱 좋은 안내장교로서 적임자였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섬까지 들어갔다 올 시간이 없었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인 최중위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30 사단에 있었습니다. 어렵게 약속을 잡은 그를 서울 시내에서 만나 밤새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사며 포섭에 성공했지만 술 마시는 속도를 조절하지 못한 내가 먼저 나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나를 들쳐 업고 30사단 자기 숙소로 데려다 놓았는데 다음 날 아침 난 그 친구 방 한 구석에 토사물을 잔뜩 쏟아놓고 미안하다는 메모 한 장만 남기고서 눈썹을 휘날리며 우리 부대로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아직 핸드폰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었기 망정이지, 내가 해 놓은 꼴을 본 최중위가 문산행 버스를 타고 있던 내게 노발대발 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렇게 선발된 최중위가 정식 인사발령을 받고 우리 부대에 전출오기까지 한 달쯤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행히 그는 BOQ토사물 사건을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최중위는 곧 손가락 한마디쯤 되는 두꺼운 브리핑 매뉴얼을 놀라운 속도로 암기하면서 새로운 업무에 적응했고 마침내 방문한 프랑스 해사생도들 앞에서 유창한 불어실력을 과시하며 여유를 부렸습니다. 김동진 사단장도 만족한 듯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프랑스 해사생도 훈련용 전함. 크루저 잔다르크
수색대대에서 전출 온 김중위는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케 한 사람입니다. 상무대 전투병과학교 교육을 마치고 제1사단에 배치되면 인근에 주둔한 미군부대들과의 업무협조 때문에 사단본부와 연대본부를 거치면서 외국어특기 장교들에 대한 차출이 이루어졌는데 백학OP장, JSA 연락장교, 멸공관 안내장교 순이었습니다. 김중위는 멸공관 안내장교가 사실은 임관 전에 내정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내심 크게 기대했지만 오히려 사단 전체에서 가장 빡세다는 수색대대로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비무장지대 매복근무를 마치고 나온 아침이면 간혹 대대본부 식당에서 마주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김중위는 자길 멸공관에 데려가 달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않았던 안내장교 결원이 생겼을 때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누가 추천한 것도 아닌데 기어이 우리 부대로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남다른 친화력과 수완 때문이었습니다. 자력으로 멸공관에 전입해 온 사람은 김중위가 전무후무했습니다.
“그럼, 너희들 최소한 주말엔 꼭 들어와라. 나도 말년인데 주말엔 서울구경 좀 해야 하지 않겠냐?”
씨도 안 먹힐 소리였지만 그렇게라도 다짐을 받아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3년 후에나 취업걱정을 하게 될 땅굴소대장은 말년휴가문제로 아등바등하는 우리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찰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휴가를 나간 최중위와 김중위는 예상대로 두 달 후 전역식 때까지 부대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홀로 부대를 지켜야만 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H그룹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4.
그렇게 안면을 바꿀 줄 알았다면 굳이 우리 실장님 28호 찝차를 빌려 그들을 전진교 건너 문산까지 태워다 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부대 바로 앞에 놓인 자유교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 맞은 편 임진각까지만 나가면 거기서 얼마든지 서울행 관광버스를 얻어 탈 수 있었는데도 굳이 전술도로를 멀리 돌아 전진교를 건넌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남북학생회담 때문이었습니다. 판문점으로 가려는 학생들이 언제 임진각으로 몰려올지 몰라 노심초사하던 군은 자유교를 보수한다는 명목으로 철교 위의 목재 바닥을 몽땅 뜯어내기로 한 것입니다. 인근 GOP 안 미군부대들의 양해와 동의도 얻은 후였습니다. 그래서 원래 경의선 철교였다는 자유교는 이제 앙상한 철골만 서 있게 되었습니다.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건 물론 사람도 건널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무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학생들과의 물리적 충돌을 분명히 피할 수 있는 지혜로운 해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유교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 부대에겐 재앙이었습니다.
자유교가 닫혔는데도 땅굴 견학을 예약한 학교와 단체들은 여전히 밀려 들었고 우린 멀리 전진교까지 나가 방문객들을 인솔해 들어와야 했습니다. 멸공관에서 전진교로 이어지는 전술도로는 평소엔 민간인 사용이 통제된 군 전용 비포장도로였는데 임진강을 내려다 보는 절벽을 타고 굽이치는 좁은 도로를 차체가 긴 대형 관광버스로 달리는 것이 사뭇 위험하기도 했거니와 검문소들을 지나려면 안내장교가 맨 앞차를 타고 인솔해야 했습니다. 최중위, 김중위의 부재로 하사관들 모두 동원하고 실장님까지 움직였지만 여전히 여의치 않아 갱도시설관리로 바쁜 땅굴소대장까지 전진교로 불러 내곤 했습니다. 보훈의 달인 6월로 접어 들자 방문객들은 더욱 넘쳐났는데 서울 간 최중위와 김중위는 전역식 날 사단 휴양소에서 보자며 전화로 염장을 질렀습니다.
그날도 한 종합고등학교 남녀학생들 수백 명을 태운 관광버스들이 전진교를 통해 줄지어 들어왔습니다. 그날의 마지막 팀이었습니다. 도라전망대와 땅굴견학을 모두 마치고 땅굴 앞 광장에서 마지막 인원점검을 할 때만 해도 아무 이상 없었는데 그들을 인솔해 전진교를 빠져 나간 후 맨 뒤에서 따라오던 버스 한 대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버스 12대가 들어갔는데 나온 건 11대뿐이었던 것입니다. 군용전화로 중간 검문소들을 확인해 봤지만 일단 그 버스는 검문소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전방 GOP 지역에서 학생 40여명을 태운 민간인 버스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절대 그럴 리 없는 일이었지만 그 순간 뇌리를 스친 첫 단어는 ‘월북’ 이었습니다. 등줄기를 타고 냉기가 흘렀습니다.
마침 전진교로 들어가던 미군 험비를 얻어 타고 10분쯤 달렸을 때 전방에 펼쳐진 광경에 난 눈앞이 노래지며 숨이 콱 막혀왔습니다.
[하나님!]
임진강을 끼고 도로가 ‘ㄱ’ 자로 꺾어지는 급커브에 문제의 버스가 벼랑 위로 머리를 내밀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걸려 있었습니다. 오른쪽 앞바퀴가 도로를 벗어나 버스의 우측 앞부분이 2미터 정도 벼랑 위 허공으로 튀어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공포에 질린 학생들이 통유리 차창 안에서 소리를 질렀고 운전사 역시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버스의 유일한 출구는 오른쪽 앞바퀴 바로 위에 난 문이었지만 그 앞은 허공이었습니다. 섣불리 유리창을 깨려고 하다간 자칫 무게중심이 무너져 버스가 통째로 20미터 벼랑 밑 임진강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것만 같았습니다.
머리 속이 새하얘지면서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저 버스가 추락하면 무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학생들과 운전사는 물론, 인솔자인 나나 시설책임자인 실장님, 면접 보러 근무지를 이탈한 김중위와 최중위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습니다. 그 사이 김동진 장군 후임으로 부임한 김상준 사단장이 제아무리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하나회 멤버라 할지라도 관내에서 발생한 대형안전사고의 책임을 면할 리 없었습니다. 제3땅굴을 방문하던 민간인 버스가 추락해 무고한 고등학생 40여명이 사상하는 사고는 군사정권에서도 간단히 쉬쉬하며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불현듯 1년 전 전역한 학군선배가 생각났습니다. 전 근무지인 특공연대에서 신임 소위들에게 격한 신고식을 받던 중 소위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해 한 달간 2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그가 몰래 썼다는 눈물 젖은 시도 떠올랐습니다. 저 버스가 추락하면 내 운명도 그럴 것입니다. 군법회의와 이등병 강등, 불명예 제대와 육군형무소에서의 치욕적인 수감생활은 물론 내가 구하지 못한 수많은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며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스스로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습니다.
상황은 긴박했고 모든 건 내 판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무전기로 상황보고하고 지원을 부탁해 줘. 너희 부대든, 우리 부대든, 어디든.”
타고 온 험비의 미군운전병에게 그렇게 부탁하고 난 벼랑으로 달려갔습니다. 버스는 ‘ㄱ’ 자 모서리 부분에서 네 시 방향으로 걸려 있었는데 견인줄로 당겨 올리기엔 도로 폭이 너무 좁았고 각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중기가 와서 버스 앞쪽을 번쩍 들어 도로 안으로 내려놓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듯 했는데 정식지휘계통을 밟는다면 언제 공병대 기중기가 도착할지 예측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우선 지나는 미군차량들을 마구잡이로 세웠습니다. 그 중 트럭과 험비를 각각 한 대씩 버스 앞뒤에 세우고 두 차량의 견인와이어를 서로 연결해 벼랑 쪽으로 노출된 버스 우측 면에 팽팽하게 걸쳐 놓고 지탱하려 했습니다. 물론 그건 주먹구구식 임시방편이었습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최소한 버스가 벼랑 쪽으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 보려 한 것이지만 그렇게 해서 버스가 지탱될지, 아니면 버스가 추락하면서 트럭과 험비를 함께 끌고 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사람들부터 빼내야 했습니다. 버스 우측 앞문에서 가장 가까운 벼랑 턱까지는 대략 2-3미터 정도 거리여서 한 사람이 버스에 걸친 와이어 한 개를 밟고 다른 한 개로 등을 받친 채 버스 문 앞에서 학생들을 받아 주고 두 세 명 정도가 벼랑에서 팔을 뻗쳐 학생들을 당겨 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누가 와이어를 탈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내가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거기서 돕고 있던 미군병사들에게 목숨까지 걸라고 명령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겟미 투 모어 와이어스! (Get me 2 more wires)”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미 미군차량 여러 대가 주변에 차를 세우고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협조를 얻어 내가 타고 들어갈 견인 와이어 두 줄을 더 연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부분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유격장에서 레펠을 탈 때처럼 밧줄로 하니스를 만들어 몸에 묶고 세이프티 후크를 와이어에 연결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야 했지만 그런 게 전술도로 한복판에 준비되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난 철모와 탄띠를 벗어 놓고 또 다른 차량에서 끌어온 견인와이어를 허리에 감아 채운 후 이미 설치된 와이어들을 타고 버스 문 앞으로 조심스럽게 움직여 갔습니다. 발 밑의 와이어는 갈팡질팡 흔들렸고 등 뒤의 와이어는 살을 파고 들었습니다. 미군 차량의 견인와이어는 충분히 튼튼했지만 사람이 올라타거나 매달리기엔 두께가 너무 가늘었습니다.
폭포처럼 흐르는 땀에 옷이 흥건히 젖었지만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전경을 등지고 있어 별로 고도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과 상무대 동복유격장의 활강 레펠이나 미군 트럭 견인와이어가 끊어졌다는 얘기를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버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버스는 마치 내 정면으로 쏟아져 내릴 듯 그 기울어진 상태가 더욱 과장되게 느껴졌습니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버스가 추락하고도 나만 살아남는다면 내 남은 삶은 죽는 것만 못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얘들아, 오빠가 맨날 밥 먹고 하는 짓이 이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한 명씩, 여자애들부터 이쪽으로 나와서 오빠 손을 잡아. 발은 이쪽 와이어에 이렇게 딛고….”
버스 문을 열고 그렇게 말하던 내 얼굴도 파랗게 질렸을 터였고 목소리도 떨려 나왔겠지만 공포에 질려 경황이 없던 학생들은 다행히 그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몹시도 망설이던 첫 번째 여학생이 마침내 내 손을 잡고 발을 내딛자 와이어는 또다시 요동쳤습니다. 여학생은 비명을 지르며 내게 찰싹 달라 붙었고 그 예측하지 못한 행동에 나도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이 여학생은 이제 미군들이 손을 내밀고 기다리는 벼랑 턱까지 2미터 정도를 자력으로 와이어를 타고 이동해 가야 했는데 공포에 질려 날 껴안은 팔을 절대 풀지 않을 기세였습니다. 자칫 균형을 잃기라도 하면 곧장 벼랑 밑으로 추락할 판이었습니다.
그 순간 발 밑이 쑥 꺼지면서 와이어가 크게 출렁거렸습니다.
“패쓰느~업!!(Fasten up)”
난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순간 내 어깨를 쥐는 커다란 손아귀가 느껴졌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키가 족히 2미터는 될 것 같은 미군 백인병사 한 명이 와이어에 한 발을 딛고 내려와 나와 벼랑 턱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자청하면서 여학생을 넘기라고 신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줄의 가느다란 견인와이어가 나와 그 거인, 그리고 여학생까지 세 명의 몸무게를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거구가 나와 벼랑 턱 사이의 공간을 거의 다 채워주었으므로 난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난 떨어지지 않으려는 여학생을 간신히 설득했습니다.
“넌 절대로 안 떨어져. 그러니 안심해.”
내가 차고 있던 와이어를 풀어 여학생 허리에 채워주자 그녀는 그제서야 용기를 냈습니다. 그녀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예의 미군병사는 솥뚜껑 같은 커다란 손으로 여학생 팔을 겨드랑이 깊숙이 감아 쥐고 벼랑 턱으로 잡아 끌었습니다. 거기선 미군병사 여러 명이 팔을 뻗어 여학생을 도로 위로 끌어 올려 주었습니다. 첫 번째 학생이 구조된 것입니다.
미군들의 도움으로 탄력을 받았지만 40여명을 모두 내려주는 것은 두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아이들이 빠져 나오는 동안에도 조금씩 흔들리던 버스는 적재량이 줄어 균형이 깨지면서 벼랑 쪽으로 더욱 기우는 것 같았습니다. 한 두 번 위험한 순간이 없지 않았지만 미제 견인와이어의 견고한 품질은 기대 이상이었고 와이어에 매달려 있던 동안은 초긴장 상태에서 아드레날린 분비가 넘쳐나 힘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운전사까지 내려 주고 나서 벼랑 턱으로 기어 올라 설 땐 나도 완전히 탈진해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내 걱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승객들은 구했지만 저 빈 버스가 추락해 전파된다면 그 재산피해는 부대가 배상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마저도 내가 책임지고 군사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온갖 잡생각이 머리 속을 복잡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 즈음 군용트럭 두 대가 벼랑에서 구출된 학생들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거니와 전진교에서 그들의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트럭들은 학생들을 태우는 데로 곧장 출발했습니다. 내가 벼랑 끝 와이어에서 막 올라왔을 때엔 두 번째 트럭도 출발하는 중이었습니다. 연대장 찝차를 비롯해 그 사이 사고현장에 와 있던 우리 군 차량들도 트럭들이 출발하자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습니다. 영화에선 시민들이 구조대와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는 훈훈한 마무리 장면을 보여주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늦어진 일정을 만회하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리고서도 끝까지 현장을 지키며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미군병사들은 내게 엄지를 치켜 세우거나 서로의 수고를 치하한 후 하나 둘 그곳을 떴습니다. 이제 벼랑엔 관광버스와 와이어를 걸친 미군차량 두 대만 덩그러니 남아 공병대 기중기를 기다렸습니다.
물론 우리 실장님도 거기 있었습니다. 내가 벗어 놓은 탄띠와 철모를 멀찍이 길섶에 세운 28호 찝차에 실어 놓고서 언제부터인가 구조작업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벼랑 턱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몸을 추스르고 있던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씩 웃었습니다
“수고했다. 가자.”
사람이 그 고생을 했는데 그게 다였습니다. 그러나 실장님의 그 말 한마디에 난 세상의 모든 보상을 다 받은 것처럼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이 푸근해졌습니다. 우리는 곧장 멸공관으로 돌아갔습니다. 학생들의 귀가수속을 위해 실장님이 전진교에서 필요한 조치를 이미 해두었을 터였습니다. 부대에 돌아간 나는 완전히 뻗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은 미처 자각하지 못했지만 견인 와이어에 패이고 쓸린 내 등은 피투성이가 되어 너덜거렸고 채찍질이라도 당한 듯 깊고 긴 몇 줄의 흉터들은 전역 후까지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5.
전역식을 하러 사단휴양소로 출발하기 이틀 전, 최중위와 김중위가 짐을 싸러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짐짓 미안한 척 하는 그들의 얼굴이 밉살스러웠습니다. 실장님을 비롯한 부대 간부들이 조촐한 환송회를 열어 주었지만 정작 전역한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은 소대원들이 만들어 준 전역패를 내무반장에게서 받아 들 때였습니다. 군 현역시절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지난 두 달간 홀로 부대를 지켜준 내게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저 두 동기들에게 실장님이 그날 내가 겪은 개고생을 증언해 주길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실장님은 그 후 그 사건을 단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진급과 안위를 위해 그 사건은 애당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었지만 살짝 억울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최소한 훈장 하나쯤 받을 일이라 생각했었으니까요.
부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내가 직접 그 사건을 얘기하자 최중위와 김중위, 두 사람의 반응은 한결 같았습니다.
“너, 소설 써?”
이놈들은 정말 도움이 안됩니다.
사단 휴양소로 가기 전 작별인사를 하던 땅굴소대장이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 둘에게 얘기해 주었지만 그 역시 현장을 직접 보지 못한 건 매한가지였습니다. 게다가 그건 사실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화제는 금방 바뀌었고 최중위와 김중위는 서울에서 두 달간 겪은 무용담을 늘어 놓으며 땅굴소대장의 염장을 지르는 데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래도 특별히 불만은 없습니다. 스스로 영웅적이라 생각하는 사건을 그렇게 홀로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도 남자다운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군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해도 미군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의 기록을 남겼을 것입니다. 물론 이제 와서 그걸 굳이 찾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던 남북학생회담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고 학생대표들은 임진각까지 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학생들의 외침은 사람들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죠. 당시 바닥 상판이 몽땅 뜯긴 자유의 다리는 우리가 전역하던 날까지도 여전히 앙상한 철골을 드러낸 채로 임진강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끝>
임진각에서 바라본 자유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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