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니켈광산 영적 방어작전 (1) 본문
ep1. 사지로 보내는 이유
술라웨시는 인도네시아를 이루는 수천 개의 섬들 중 세 번째로 큰 섬입니다.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또는 자와Jawa섬)이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두 개의 큰 섬들 중 오른쪽에 ‘K’자처럼 생긴 곳이죠. 남부 술라웨시의 마카사르(Makassar)라는 도시는 우중빤당(Ujung Pandang)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술라웨시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번잡한 교통의 요지 중 하나로 동부 인도네시아의 크고 작은 도시로 날아가는 대부분의 비행기들이 이곳을 경유합니다. 부기스(Bugis) 종족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두 번씩이나 부통령을 지낸 유숩칼라(Yusuf Kalla)의 고향이기도 하죠. 술라웨시섬 북단의 마나도(Manado)는 참치잡이 원양어선들의 기항지로도 많이 알려져 있고 이곳을 통해 인도네시아에 합법 또는 불법적으로 상륙해 정착한 한국인들도 의외로 꽤 있다고 합니다. 중부 술라웨시의 주도는 빨루(Palu)라는 곳인데 ’빨루’란 인니어로 해머 또는 망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빨루는 인근 뽀소(Poso)와 함께 1990년대 후반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종교분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곳으로 유명세를 탔고 2018년에는 지진과 토지 액상화, 거기에 쯔나미까지 몰려와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반면 술라웨시 떵가라(Sulawesi Tenggara)라고 알려진 동남부의 주도 끈다리(Kendari)는 앞서 언급한 다른 주도들에 비해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개발을 거듭하면서 예전에 한산하기 그지 없던 빈한한 시내에 어느새 호화로운 유명 체인호텔들이 들어섰고 페리를 타고 한 시간쯤 들어가면 있는 무나(Muna)섬에는 대우 로지스틱스가 대규모 바이오 오일 농장을 일궜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몇 년 전 한글을 표기어로 채용했다고 해서 한국인들의 대대적인 관심을 끌었다가 그게 다 헛발질이었다고 거센 비판이 인 후, 그게 아니라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며 평판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찌아찌아족이 사는 부톤(Buton) 섬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잘못 들으면 영화 다이하드 1편의 나카토미(Nakatomi) 타워를 연상케 하는 와카토비(Wakatobi)라는 곳으로 연결됩니다. 일단의 섬들로 이루어진 이곳은 아름다운 다이빙 포인트로 유명해 서양 관광객들의 방문이 잦은 곳입니다. 그래서 바우바우에는 페리 선착장뿐 아니라 쌍발 프로펠러기가 뜨고 내리는 비행장도 있습니다.
이 지역에도 부기스 종족이 많지만 여기 토착민들은 기본적으로 꼴라키(Kolaki) 종족입니다. 이 친구들 방언은 어딘가 베트남어나 필리핀 타갈로그어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내 친구 릴리 역시 꼴라키 아가씨입니다. 아, 처음 만났을 때 아가씨였고 그간 나름 애를 많이 썼지만 결국 세월에 굴복해 지금은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세월엔 장사가 없어요. 릴리가 가진 광산들은 끈다리에서 북쪽으로 다섯 시간쯤 가야 하는 꼬나웨 우타라(Konawe Utara), 즉 북부 꼬나웨 지역 산중에 있습니다. ‘K’ 자의 아래쪽 사선 끝, 끈다리에서 북쪽으로 한참 올라간 지역이죠. 이곳은 중부, 남부 술라웨시와도 경계를 접하고 있어 술라웨시 섬 전체를 연결하는 험난한 육로가 지나는 사실상 중요한 축선입니다. 이 북부 꼬나웨의 군청 소재지는 왕구두(Wanggudu). 길이 얼마나 험한지 왕구두 같은 군용워커가 필요할 것만 같아 너무나 실감나는 이름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끈다리에서 왕구두로 가는 길목의 아세라(Asera)엔 이제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제재소가 하나 있습니다. 내 30대의 젊음을 통째로 말아먹으며 파산의 나락으로 등떠밀었던 곳이죠.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온다면 누군가 내 돈과 내 사업을 그렇게 간단히 해먹도록 놔둘 리 없지만, 물론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올 리도 없습니다. 끈다리의 숙소에서 광산에 가려면 꼭 지나쳐야 하는 그 제재소를 볼 때마다 아직도 마음 한 켠이 아려옵니다.
왕구두를 지나면 이제 본격적인 산악지형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늦어도 오전 10시-11시까지 광산에 도착해서 일을 보려면 새벽녘 어스름에 끈다리를 출발해야 합니다. 차량은, 왕구두까지 포장도로를 달린 후 비로소 비포장도로에 들어서는데 능숙한 운전수들을 그 좁고 험한 길에서도 F1 레이스를 하듯 시속 120킬로에서 160킬로 정도의 속도를 유지합니다. 짜릿짜릿한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덜컹거리는 속도감에 승객들의 멘탈은 물론 차도 남아날 리 없습니다. 그러니 비포장도로에 강한 토요타 하이룩스(Hilux)나 샤브롤렛 실버라도(Silverado) 반트럭을 새로 사도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나 정비소 신세를 지곤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인가가 밀집한 마을을 지날 때는 거짓말처럼 속도를 줄입니다. 방목하는 소나 염소, 닭들을 자칫 치게 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를 보상해 줘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이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지만 혹시 시골길에서 아이를 한 명 치어 죽여도 당시엔 100만 루피아(약 10만원) 정도만 주면 모든 걸 무마하고 오히려 환대까지 받으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요. 물론 그건 달러당 2,200루피아 정도 환율이었던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외환위기와 자카르타 폭동이 오기 훨씬 전인 1980년-1990년대의 일입니다. 이젠 닭 한 마리를 치어도 100만 루피아 정도를 물어줘야 합니다. 그 닭을 잡아 시장에 팔아도 7만 루피아(약 7천원) 밖에 못 받는데 말입니다. 소를 치면 웬만한 시골집값을 물어줘야 합니다. 그곳 시세가 특별히 비싸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시위와 데모에 눈을 뜨면서 광산촌의 마을들은 자기들이 마을 앞길을 막아버리면 그 일대의 광산들이 엄청난 불편을 겪게 된다는 것을 그곳 주민들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이 하나 밖에 없는 길을 막는 불상사를 피하려면 차 주인은 부르는 금액대로 보상해 줘야 하는 겁니다. 닭을 친 보상금 100만 루피아를 물어주지 않아이를 빌미로 마을 사람들은 길에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차량들을 막아버리면 그로 인해 추가되는 거리와 비용을 광산업자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돌아가는 길이 있다 하더라도 거리는 몇 십 킬로 단위가 아니라 몇 백 킬로로 늘어나기 쉽고 아예 육로가 없어 배를 태워야 할 경우가 생기면 그 환승비용을 포함해 몇 십 배의 비용이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이 막히면 당장 부식차가 올라갈 수 없으니 광산 현장직원들이 배를 곯아야 하고 유조차가 올라가지 못하면 현장의 굴삭기나 로더 등 모든 중장비가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두 눈 뻔히 뜨고 뒤통수 거하게 맞지 않으려면 숲 속의 나무를 들이받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가축들을 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사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결국 그 마을에서 해결을 보지 않을 수 없으니 억울해도 액면가의 수 십 배를 울며 겨자먹기로 물어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광산들은 동네 유지나 지역관리들, 그리고 힘 좀 쓰는 지역 양아치들에게 매월 일정액을 담뱃값이라며 건내곤 했습니다. 물론 말이 담배값이지 족히 담배가게를 통째로 살 수 있는 돈이었죠. 그것은 혹시 가축을 치는 문제가 생기더라도 적정선에서 원만히 처리해 주기를 바라며 지출하는 보험료인 셈이었습니다. 물론 그들과 그런 식으로 교류하는 것이 광산사업을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교통사고 이상의 일들도 처리할 때 도움을 받으려는 의도임은 분명합니다.
릴리의 베이스캠프는 토비메이타(Tobimeita)라는 마을에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읍이나 면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인데 그 산속 오지에 마을이 많을 리 없으니 대형 광산회사들도 그곳을 중심으로 직원들 숙소를 마련해놓고 있었습니다. 정말 큰 회사들은 컨테이너를 개조한 사무실과 숙소를 시내에서부터 싣고 와 광산부근에 배치해 놓았지만 그렇지 못한 소규모 회사들이 태반이었으니 이 오지마을엔 갑자기 전세대란이 일어나 판자로 대충 만든 허름한 숙소와 창고의 임대료가 하늘을 찔렀고 이런저런 이권이 오고가면서 산속 오지에서 적지 않은 현금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장사꾼들의 자본이 유입되기 전엔 그곳에도 때묻지 않은 순박함과 나름대로의 문화가 있었을 텐데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런 건 이미 남아있지도 않은 듯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들의 인맥과 지역에 대해 빠삭한 지식을 자랑하면서 한 자리를 맡거나 수수료 또는 자문료 같은 돈을 받고 있었고 그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밤늦게 잔뜩 술에 취해 광산회사들 숙소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거나 본사에서 나온 사람들을 불러내 현직에 있는 이웃들을 음해하면서 자기만이 광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강변하곤 했습니다.
그들 중 루디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나름 지역유지였고 광산들이 그 지역으로 밀려들던 초창기에 여러 광산회사들의 일을 맡아 번 돈으로 집도 새로 짓고 그 산속에 자기 트럭도 몇 대씩 굴렸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곧 다른 사람들에게 밀려났고 그때 쉽게 모았던 돈은 흥청망청 다 써버려 이젠 오히려 빚만 잔뜩 지고 있었습니다. 릴리가 광산에 올라갈 때마다 그는 어떻게 그걸 알고 찾아와 자길 써달라 졸라대면서 매번 용돈을 뜯어가곤 했습니다.
한편 로니는 트랜스플랜트, 그러니까 인도네시아 노동부가 주관했던 국내 이주정책에 따라 술라웨시 오지로 이주해 들어온 암본 사람입니다. 인구 밀집지역의 빈민들을 모아 집과 땅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오지에 사람들을 뿌려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카르타에서도 종종 보는 바와 같이 암본사람들은 마피아처럼 그룹을 이루어 실력행사를 마다하지 않곤 하는데 로니는 그 지역으로 이주해 온 암본인들로 조직된 마피아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가 루디를 밀어낸 장본인이었고 당시 릴리의 현장 파트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릴리와 반목하는 사람들과도 몰래 손을 잡고 그들의 일도 봐주고 있는 눈치가 뻔했으므로 릴리의 돈을 받는다고 해서 릴리가 충성심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피아나 조폭들이 의리를 지키는 상남자들이란 건 누군가 영화나 소설을 팔아먹기 위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 실제론 절대 그렇지 않은데 로니 역시 상남자도 의리남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오직 돈 뿐이었어요.
그런 험한 곳에 릴리가 날 보낸 건 그런 사람들이 무슨 협박을 해도 끝내 자기 편에 서줄 사람의 눈으로 본 현상상황을 보고받고 싶다는 의미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가 직접 가는 게 최선이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이 벌리는 손을 채워주지 않으면 다음 번이 힘들어지곤 했으니 '돈 줄 권한도 없도 절대 타협하지도 않는 원칙주의자'가 현지에서 좌충우돌하면 최악의 경우 모든 책임을 나한테 뒤집어 씌우면 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릴리가 도대체 난 뭘로 생각하는지 몰라도, 난 뭐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켈광산 영적 방어작전 (6) (0) | 2022.01.16 |
---|---|
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5) (0) | 2022.01.13 |
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4) (0) | 2022.01.12 |
니켈광산 영적 방어작전(3) (0) | 2022.01.11 |
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2) (0) | 2022.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