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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넷째 날

beautician 2020. 1. 2. 10:00

 

넷째 날(화염검-1)

 

 

1. 디폰

 

눈앞에 펼쳐지는 칠흑 같은 우주와 바로 어깨 곁을 스치듯 지나 멀어지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디폰은 카나엘이 전해 준 제누파의 메시지를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네가 도착하는 순간이 우리 약속시간인 거야. 서둘러도 좋고 게으름 피워도 좋아. 하지만 약속장소에서부터는 내 시간표를 따라줘야 해. 그 전까지는 모든 것이 네 자유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부탁한 것을 틀림없이 준비하는 것만은 절대 잊지 말아 줘.”

 

뭔가 심상찮은 일을 벌이려는 제누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라고 디폰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도착한 후에야 그의 계획을 시작하겠다는 제누파의 너그러움은 오히려 빨리 시작할 수 있도록 급히 서둘러 달라는 독촉처럼 들렸다.

 

항상 제멋대로면서….’

 

디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요구가 단지 고향처럼 정든 자신의 별을 떠나오라는 것뿐이었다면 디폰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마지막 만남 이후 마침내 다가온 제누파와의 재회에 들떠 더욱 채비를 서둘렀을 것이다. 마침 오랜 고독에 지쳐 있던 차이기도 했다. 그녀가 살던 곳은 아름답고 평화로웠지만 그 오랜 시간만큼 그녀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져 사실은 자신이 그곳에 영영 버려지고 만 것이라는 상실감이 사무치고 있었던 것이다. 제누파의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러나 제누파의 요구는, 언제나처럼 대지 위의 모든 것을 먼저 거두겠다는 전제를 달고 있었다. 그것은 디폰이 오랜 세월 가꿔온 이 별을 철저히 파괴하겠다는 의미였고 그녀가 다시는 이 별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것은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디폰은 몇 번씩이나 전에 살던 별을 떠나야만 했는데 매번 제누파의 그런 매정한 지시를 전하는 카나엘의 목소리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분개하곤 했다. 디폰의 미련을 단번에 끊어 쉽게 그 별을 떠나도록 하려는 제누파의 속깊은 배려였을까? 아니면 전능하다고 자부하는 한 존재가 자신보다 조금 열등한 불완전한 존재에게 아무 의미도 없이 저질러 버리는 가학적 장난일 뿐이었을까? 하지만 그의 말을 어기는 것은 디폰으로서 상상할 수도 없었고 그것이 마침내 어떤 파국을 가져올 것인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디폰에게는 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한 디폰의 분노와 좌절을 제누파도 절대 모를 리 없는데 이번에도 예외 없이 파괴와 멸절의 조건을 달고 온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카나엘을 통해 보내오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무시무시한 무언의 압력이었다.

 

제누파가 그렇듯 디폰이 카나엘을 마지막으로 본 것 역시 기억조차 희미할 만큼 오래 전의 일이었다. 별을 떠나라는 지시나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겠다는 전제가 달리지만 않았다면 방금 전 외출했다가 돌아온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디폰의 초록정원에 들어선 카나엘을, 그가 아무리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존재라 하더라도 디폰은 반가운 마음에 뛰어나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을지도 모른다. 카나엘에게 입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다.

 

그래. 이 모든 것. 전부. .”

 

카나엘은 제누파의 메시지를 전하며 그렇게 덧붙이고 있었다.

카나엘은 제누파의 가장 빠른 전령이자 오른팔이었고 왜 굳이 제누파에게 빌붙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능력을 가진 존재임에도 틀림없었다. 오래 전 디폰을 이곳에 데려온 것 역시 카나엘이었다. 그러니, 말하자면 카나엘 만큼이나 디폰과 깊은 인연도 달리 없는 셈이었지만 카나엘은 단연 우주에서 가장 차갑고 메마른 존재였다. 하필이면 말이다. 당연히 그는 망설이지도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는 제누파가 거느린 다른 무리들이 그런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한 치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디폰의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그의 무겁고 투박한 말투는 저항할 수 없는 압박으로 다가왔다.

 

디폰이 더욱 두려워 했던 것은 그런 제누파나 카나엘을 거역하려다가 어쩌면 갑작스런 파국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이 별에서 자신이 정성 들여 가꾼 것들이 이제 순식간에 황폐해져 버릴 것이며 그렇게 송두리째 빼앗긴 것들을 이번에도 두 번 다시 되찾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 그래서 이 별에서 지냈던 그 영겁과도 같았던 시간들이 또다시 아무런 추억도 남기지 못하는 철저한 무의미가 되리라는 것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별을 카나엘과 제누파의 손에서 지켜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스스로의 한계에 치를 떨었다. 카나엘은 그런 디폰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 했다.

 

디폰. 네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아. 제누파의 뜻은 그런 게 아니야.”

 

거의 위로처럼 들리고야 만 이런 말로 카나엘이 무엇을 의미하려는지 디폰은 알 길이 없었다. 너희들이 날 여기 버려 두었던 거잖아? 그런 이 별에 너희들이 도대체 무슨 권리가 있다고?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을 디폰은 간신히 참아냈다. 하지만 카나엘은 그런 디폰의 심중조차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져 버렸다단 한번의 호흡만으로 카나엘이 모든 것을 거두어 버린 것이다. 디폰이 스스로의 생명처럼 소중히 가꾸었던 모든 것들은 찰라의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그녀의 별은 순식간에 황량함에 뒤덮여 버렸다. 디폰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거대한 창에 심장을 꿰뚫린 듯한 참담함 속에서 눈물만 솟구칠 뿐이었다. 제누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번에도 이 별의 모든 생명들을 남김없이 거두어 간 것일까? 그녀의 시간과 정성과 노력이라는 것이 제누파에게는 그렇게 한 순간에 파괴해 버려도 되는 장난 같은 것이었단 말인가? 그는 왜 이런 일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들이 디폰의 머리 속에서 들끓었지만 제누파가 절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 것 또한 분명한 일이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일으켜 버린 후에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던 카나엘의 목소리에 어딘가 연민 같은 울림이 살짝 묻어있다는 사실에 디폰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누파와의 약속을 잊지 마. 그의 부탁도. 하지만 시간은 네 편이야. 네가 해야 할 일을 위해 시간은 아직도 충분해. 네가 따로 해야 할 일들도 분명 의미 있기를 바랄게. 모든 준비가 끝나면 그때 날 부르면 돼.”

 

그 말을 끝으로 카나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이 디폰의 귓전을 계속 맴돌았다. 디폰의 속마음을 읽던 카나엘이 그녀가 등뒤에 한 움큼 풀잎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그가 말했던 디폰이 따로 해야 할 일이란 제누파가 요청한 것들을 준비하면서 이 별을 떠나기 전까지, 카나엘이 앗아간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되살리는 것이었다.

 

한 치의 타협도 기대할 수 없었던 카나엘이 전부 다라는 비정한 소리마저 서슴없이 내뱉으면서 왜 한편으론 디폰의 숨겨진 염원을 눈감아 주었을까? 어쩌면 그것조차도 제누파가 이미 계산하고 있던 계획의 일부였던 것일까대지에 주저앉은 디폰은 그동안 싫증을 내기도 했던 초록 정원과 이 땅의 모든 것들을 사실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에 쥐고 있던 풀잎들은 그녀가 품고 있던 이 별에 대해 마지막 사랑과 희망이었고 머지않은 장래에 떠나면서 남기고 가야 할 그리움이 될 것이었다.

 

제누파가 디폰에게 요구한 것은 거대한 추진체였다.

디폰은 제누파가 그것을 왜 굳이 자기에게 요구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제누파가 원한다면 그런 추진체를 만들거나 얻을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디폰의 관심은 오직 생명을 낳고 가꾸는 것이었는데 그런 그녀에게 추진체를 요구했다는 것이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누파는 그만큼 제멋대로였고 절대로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라면 얼마든지 더욱 강력한 추진체들을 우주 어느 구석에서든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고 얼마간의 번거로움을 감수한다면 제누파 스스로 가장 강력한 추진체를 간단히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생명이란 너무나 쉽게 그 원형을 잃어버리는 것이지….

 

언제인지는 기억나지도 않지만 제누파가 그런 말을 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가장 처참한 심정이 되어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이 시점에 왜 뜬금없이 그녀에게 추진체를 요구하는 것일까. 디폰이 만들 수 있는 추진체는 그녀의 속성상 너무나도 당연히 생명을 기반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말이다. 게다가 제누파는 그 추진체가 얼마나 커야 할지, 얼마나 강력해야 할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

 

별의 궤도 위에 거대한 푸른 원구형 추진체가 완성되어갈 무렵 대지엔 다시 숲이 우거지며 푸른 빛이 지면을 뒤덮고 있었다. 분명 예전만큼은 못했지만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별은 예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소가 되리라 디폰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그녀는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카나엘을 불렀다면 제누파와의 약속장소까지 가는 것은 훨씬 빠르고 간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추진체를 직접 타고 가기로 마음 먹은 것은 비록 지루한 여행이 될지라도 약속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가 시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제누파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카나엘을 자신의 별에 절대 불러 들이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애써 다시 시작된 소중한 생명들을 카나엘의 비정한 눈 앞에 두 번 다시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별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그 장구한 시간을 이곳에 머물면서도 정작 이 별의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전엔 이 별을 떠날 계획조차 없었고 그래서 이 별은 당연하게도 그동안 그녀에게 나의 별이었기 때문이었다. 추진체에 올라 별의 궤도를 벗어날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멀어지는 별을 바라보며 자신이 뒤늦게 붙여준 이름을 마음 속으로 조용히 불러 보았다. 나의 소중한 별, 에덴.

 

 

 

 

 

 

2. 그의 의지

 

네가 좀 바보스럽다는 것도 알아?”

 

디폰이 추진체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는데도 카나엘은 예고도 없이 나타나 그녀의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디폰은 그녀의 별, 에덴을 파괴한 카나엘에게 화를 내야 할지, 별을 재생시킬 수 있도록 눈감아 준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제누파가 많이 화났지?”

 

시간을 너무 끌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게으름 피워도 좋다며 너그러운 척 했지만 사실은 디폰이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그래서 화가 난 제누파가 카나엘을 다시 보낸 것이라고 디폰은 생각했다.

 

디폰에겐 아무도 화내지 않아.”

카나엘, 넌 거짓말쟁이야. 제누파는 너희 거짓말쟁이들의 대장인 거고.”

가여운 디폰…, 네가 오히려 화가 나 있구나. 제누파는 널 빨리 보고 싶어 할 뿐이야.”

제누파가 날 보고 싶었다면 애당초 날 그렇게 버려뒀을 리 없잖아?”

 

그건 진심이었다. 제누파라면 굳이 약속을 정하지 않더라도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 디폰을 찾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전능한 존재이니까. 아니, 최소한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그동안 그녀가 더욱 외로웠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디폰은 카나엘의 미소를 본 것 같았다비록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였지만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카나엘이 웃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의 미소엔 애정 같은 것이 언뜻 비쳤으므로 디폰은 소스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나엘에게 애정이라니…?

 

…”

 

그의 미소는 찰라의 순간 사라졌고 카나엘은 시치미를 때듯 언제나처럼 정색으로 돌아와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추진체 역시 어느 새 약속장소에 도착해 있다는 것을 디폰은 깨달았다. 카나엘의 능력은 늘 그렇게 순식간에 발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제누파가 있었다.

 

제누파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디폰은 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제누파 자신이라기보다는 그가 남긴 섭리, 그의 흔적 같은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디폰은 이전에도 종종 제누파의 모습을 기억해 내려 애를 쓰곤 했다. 너무 오래되어 그 모습을 잊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디폰이 제누파의 실체를 본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그가 뭔가 대단한 일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구조물들이 그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우주공간에 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별의 조각들처럼 보였지만 파괴된 별의 무질서한 파편들이 아니라 그 조각들이 서로 섬세하게 짜맞추어지며 완전한 별의 형태를 거의 다 갖추어 가고 있었다. 수많은 작은 추진체들이 그 조각들 사이를 오가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추진체들은 로힘들의 것이었다.

 

로힘들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너무나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작은 별 하나를 비옥하게 만들고 그곳에 생명의 씨를 뿌려 자라나게 했던 작고 파란 존재들에게 로힘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을 때만 해도 그들이 뛰어난 기술을 발전시켜 가는 것을 보면서도 먼 훗날 그들의 별로부터 멀리 떨어진 우주공간에 거대한 별을 건축해내는 놀라운 엔지니어들이 되리라고는 디폰 자신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로힘들은 디폰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지만 별 일 아닌 듯 길을 열어주면서 자신들이 하던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오래 전 자신들의 신이었던 디폰을 억겁이 지난 후의 후손들은 이제 철저히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제누파의 주문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로힘들이 그 사이 제누파의 모습을 잠시라도 목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굳이 제누파가 아니더라도 카나엘이나, 제누파가 거느린 다른 수하들 중 어느 하나의 강림장면을 보았다면 로힘들의 눈에 디폰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연약하고 가련한 존재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디폰은 그런 것이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다. 디폰에겐 우주 한복판에서 제누파가 벌이고 있는 불가사이한 대공사를 시공하는 로힘들이 더욱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을 뿐이다.

 

[사랑스러운 디폰. 여행이 즐거웠기 바란다.]

 

마치 디폰의 바로 옆에 서있기라도 한 것처럼 제누파의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 속에서 울렸다. 그러나 디폰에게 이 여행이 절대로 즐거웠을 리 없다는 것을 제누파도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이제 내가 뭘 해 주면 돼? 당신의 그 잘난 시간표에 맞춰서?”

 

디폰은 앙칼지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제누파의 온화한 기운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어느새 추진체 구석 그늘 속에 모습을 숨긴 카나엘이 그녀의 토라진 반응에 또 그 기괴한 미소를 띄고 있을 것 같았다.

 

[디폰, 준비가 아주 잘 되었구나. 네가 무척 자랑스럽단다. 이제부터 내가 부탁하려는 이 일을 난 네가 꼭 맡아 주었으며 해.]

어떤 일?”

[별 하나를 구하는 일이란다.]

 

디폰은 아까 짐짓 토라진 척 하려던 것이었는데 이젠 정말로 분노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디폰에게는 당연히 지켜냈어야 할 자신의 별, 에덴이 있었다. 그곳을 황폐하게 만들며 디폰에게 떠나올 것을 명했던 제누파가 이제 뜬금없이 다른 별을 구하러 가라는 것이다. 제누파가 그녀의 노력과 그녀가 사랑하던 것들을 그토록 가볍게 여긴다는 부분에 생각이 미치자 디폰은 또 다시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지만 제누파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누파는 디폰의 시선을 행성의 모양을 갖추어가는 거대한 구조물로 이끌었다.

 

[저것이 내가 그 별에 보내려는 선물이야. 네가 저것을 그 별에 가져다 주었으면 한다. 네가 만든 추진체로 말이야.]

그것 뿐…?”

[그래, 그것뿐이란다.]

 

이제 디폰의 마음은 갈갈이 찢어지고 있었다. 디폰은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저 행성 크기의 터무니없는 덩치를 저 우주의 반대편 어딘가 제누파가 편애하고 있는 어떤 별까지 가져가는 일임을 알았다. 결코 간단치 않을 것이고 길고 지루한 여행이 될 것이 분명했지만 하지 못할 일 또한 아니었다. 하지만 제누파가 마음만 먹는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그 정도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굳이 디폰이 아니더라도 그런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는 다른 부하들을 부지기수로 가지고 있었다. 특히 우주를 순식간에 가로지르는 일은 카나엘의 전문이기도 했으므로 저 행성을 이동시키는 일도 그에게는 언제나처럼 한번 호흡하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할 터였다. 제누파의 부탁이란 실상 디폰을 저 구조물에 가둬 우주의 반대편으로 추방하겠다는 의미라고 그녀가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저걸 그 별에 처박아 버리면 된단 말이지?”

 

이번엔 제누파의 웃음이 울림이 되어 디폰의 추진체 안에 번졌다. 여전히 온화한 울림이 분노를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디폰의 온몸을 달래듯 어루만졌다.

 

[네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는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어련하시려고…”

 

제누파는 예전에 디폰을 에덴에 보내면서도 똑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디폰이 자연히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이 그렇게 버려졌다는 사실뿐이었다. 에덴에서 영겁과 같은 시간을 혼자 지내며 그 외로움을 잊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해 가꾸고 일구었던 모든 것들을 카나엘을 보내 단숨에 앗아가 버린 제누파가, 이번에도 디폰이 모든 것을 자연히 알게 될 거라며 우주 저편으로 등을 떠밀고 있었다. 자신을 우주의 반대편으로 내동댕이치려는 제누파의 의도를 어렴풋이 감지하면서도 디폰은 거절할 수 없었다. 제누파는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제누파, 이것만은 꼭 물어봐야겠어.”

 

이미 할 말을 다 한 것이라면 제누파의 그 마지막 흔적조차도 언제든 홀연히 떠나버릴 것이었으므로 디폰은 그 전에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던 하나의 질문을 서둘러 던져야만 했다.

 

그 별엔 도대체 뭐가 있는데? 제누파, 그 별에…, 도대체 누가, 무엇이 살고 있기에 당신이 저렇게 터무니없는 선물을 보내고 싶을 정도로 아끼고 사랑하는 거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당황했기 때문에 대답을 못하는 것이라고 디폰이 생각하는 순간 제누파는 여전히 똑같은 온화한 떨림으로 그녀의 귓가에 대답을 속삭였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은 아직 그 별에 생겨나기 전이란다.]

 

 

3. 여행

 

 

디폰의 분노는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제누파의 말대로라면 그가 사랑하는 별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먼 변방의 별이었다. 그 별을 향해 제누파의 선물이라는 또 다른 별 하나를 끌고 광활한 우주를 가로질러 가는 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이 터무니없는 일을 위해 제누파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의 별 에덴과 그곳에 있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떠나오게 했다. 이번만은 제누파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제누파를 만나기 전까지 디폰의 것이었던 시간이 이번엔 반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온몸을 불사르듯 활활 타오르던 디폰의 분노도 이 여행을 하는 장구한 시간 동안 결국 누그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여행을 아주 신속한 것이 되도록 해 줄 수도 있었던 카나엘이 이번만은 아무런 도움도 제안해 오지 않은 것 역시 제누파의 계산된 의도일 것이라고 디폰은 생각했다. 게다가 이 여행에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로힘들이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제작한 이 별은 당연히 그들의 유지보수가 필요했고 그 한정된 공간과 영겁과 같은 시간을 감안한다면 디폰과 로힘들의 교류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로힘들의 세대가 수없이 교체되면서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엔지니어 종족과 오래 전 그들을 지었던 디폰의 관계는 더욱 긴밀하고 구체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기억해내고 사랑하기 시작한 로힘들의 희로애락 속에서 디폰은 언제까지나 제누파에게 분노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제누파를 현명하다 해야 할지 얄밉다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그녀의 추진체는 완성된 별의 한 가운데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별을 되살릴 시간을 벌기 위해 디폰이 일부러 엄청난 크기의 추진체를 만들 것임을 제누파는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디폰 역시 제누파가 그녀의 추진체로 별을 옮기려 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므로 기대했던 것보다 수백만배는 더 클 추진체의 규모에 황당해 하는 제누파의 표정을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추진체는 제누파가 준비한 별을 움직이기에 한 점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제누파가 하는 일은 늘 그렇게 앞뒤가 딱딱 맞아 떨어졌으므로 놀라는 쪽은 항상 디폰이었다.

 

완성된 별은 외관상 여느 다른 행성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내부엔 그녀가 떠나온 별의 위성들 몇 개를 집어넣어도 남을 거대한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 수많은 통로들과 로힘문자가 새겨진 장치들이 가득 들어찬 넓은 광장들이 수없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었다. 그 모든 장소들을 돌아 보는 것도 그녀가 지루한 여행의 초반부를 견딜 수 있는 한 가지 방편이 되었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로힘들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기록들 속에서도 제누파가 이 별에 어떤 의미를 담아 저 변방의 행성에 선물하려 하는지 별다른 실마리를 찾지 못했고 얼마든지 더욱 효과적인 다른 방법들이 있었음에도 굳이 자신을 시켜 이 별을 운반해 가려는 제누파의 의도 역시 가늠할 수 없었다. 제누파의 심중을 헤아리려 하면 디폰의 마음 속에는 수많은 물음표들만 떠오를 뿐이었다.

 

디폰은 떠나온 에덴을 여전히 그리워했고 카나엘이 거두어간 에덴의 생명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던 아름다운 광경들을 기억해 내곤 했다. 이 정도 규모의 별이라면 에덴에서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담아 올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할 때마다 누그러졌던 분노가 다시 고개를 쳐들곤 했다. 그러나 최소한 이 별을 제누파의 별에 처박아 버리겠다는 생각을 버린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오히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제누파에 대한 분노는 그의 의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제누파는 애당초 방향만 잡아 주었을 뿐 목적지인 별이 무엇인지 콕 집어 얘기해 주지는 않았다. 그가 잘 설명해 주었다 한들 수천만개의 천체와 억겁의 시간 너머에 있는 그 작은 행성을 디폰이 출발할 당시에 직접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역시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고 제누파는 말했었다. 그리고 이제, 제누파의 말대로 디폰은 이 여행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불현듯 알게 되었다. 셀 수 없을 만큼 수없이 세대가 바뀌며 진화해온 로힘들은 제누파와 디폰의 약속장소에서 이 별이 출발하던 사건조차 그저 전설처럼 치부하게 되었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단계적으로 대규모 선단을 조직해 이 별을 떠나기 시작하더니 이제 그 남은 무리들이 마지막 대대적인 선단을 꾸려 이 별을 이탈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별자리들과 징조들을 통해 이 별을 지을 당시부터 자신들의 선조들이 계시로 남겨 경고했던 모종의 경계를 지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어느 천체의 끝자락을 지나면서 로힘들은 디폰의 곁에 남기 원하는 일부를 제외하곤, 과거가 무색하도록 놀랍게 발전한 그들의 추진체들로 거대한 선단을 꾸려 행성궤도 위에서 한 바퀴 크게 선회하더니 먼 우주를 향해 사라져가고 말았다. 디폰은 오랜 친구들을 잃은 것 같았다.

 

목적지가 다가온다는 사실은 그 억겁의 여행시간을 생각하면 분명 반가운 일이었지만 디폰에겐 불길한 예감이 먼저 다가왔다. 그 오래전 로힘의 선조들에게 경고를 남겼던 제누파가 정작 디폰 자신에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는 것 역시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뭔가 로힘들이 떠나야만 할 사건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으므로 그녀는 남은 로힘들에게 떠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녀가 막 지나쳐 온 거대한 행성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디폰이 운반하고 있던 별보다 수백 배나 컸던 그 별은 갑자기 그 원구형의 모습이 구겨지듯 찌그러지면서 원래보다 훨씬 작아지다가 잠시 후 일순 눈이 멀 듯한 섬광과 함께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긴 여행에서 디폰이 폭발하는 별들을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갑작스러운 별의 최후를 목격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또한 그 폭발은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었다. 제누파는 지혜로운 로힘의 선조들에게 이 사건을 경고했던 것이다. 디폰은 자신과 이 별이 저 폭발로 발생한 강력한 우주폭풍을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폭발에 휘말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카나엘!!!”

 

디폰 혼자라면 어떻게든 우주폭풍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도 그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그러나 이 별을 끌고 가는 그녀의 움직임은 저 우주폭풍에 비해 한없이 둔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로힘의 잔류자들도 아직 수만명이나 남아 있었다. 그들은 저 폭발로 인한 우주폭풍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카나엘이라면, 그의 능력이라면 분명 이 상황을 순식간에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디폰의 추진체는 이미 전속력을 내고 있었지만 그녀가 제누파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처럼 카나엘의 도움 없이 이 별과 함께 저 폭발을 벗어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나엘!!!”

 

디폰은 있는 힘껏 카나엘의 이름을 거듭 외쳤다. 비록 디폰이 때로는 제누파를 증오하고 카나엘에게 분노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별개의 문제였다. 그녀에게는 제누파의 선물인 이 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고 궁극적으로 이 별을 목적지에 도착시켜야만 했다. 저 폭발에 이 별을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와 관계없이 또다시 무언가를 상실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디폰 자신의 생명과 바꿔야 한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이 별을 지키고, 별에 남은 로힘들을 지키고, 제누파가 부탁했던 바를 완수할 수만 있다면 어떤 후회도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카나엘!!! 카나엘!!!”

 

그러나 카나엘은 대답이 없었다. 또다시 분노와 함께 눈물이 솟구쳤다. 제누파나 카나엘이라면 비록 우주의 반대편 끝에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간절한 외침을 듣지 못할 리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 별이 정녕 제누파의 선물이라면 비록 디폰 자신이 저 강력한 폭발에 휘말려 소멸되어 버릴지라도 이 별만은 제누파가 반드시 지킬 터였다. 그러나 제누파는 우주의 저편 어딘가에서 침묵할 뿐이었고 어느 순간에라도 그 어느 곳에든 모습을 나타낼 수 있었던 카나엘 역시 제누파의 등 뒤 그림자 속에 숨어 있을 뿐이었다.

 

디폰은 자신이 정말 버려졌다는 사실을 새삼 절절히 깨달았다.

애당초 이 별에 자신의 추진체를 달고 제누파의 임재 앞을 떠나던 그 날,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디폰은 제누파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이번엔 우주의 반대편으로 버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행성의 폭발력은 이미 디폰의 별에 영향력을 뻗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반대편을 바라 보았다. 그 순간 벼락 같은 깨달음이 그녀의 머리 속을 때렸다. 바로 거기에 목적지가 있었다. 제누파의 별이, 제누파가 편애하는 그 별이, 하필이면 바로 이 순간, 모든 것을 파괴하고야 말 우주폭풍의 영향권 한 가운데로 들어 오는 중이었다.

 

그제서야 디폰은 제누파가 그때 얘기했던 것처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스스로 깨닫고 말았다. 제누파는 디폰의 희생을 원했던 것이다. 제누파는 그녀가 이 별과 함께 스스로를 희생하여 저 거대한 우주폭풍을 온 몸으로 막아 제누파의 별을 지켜 주기 바랬던 것이다. 그래서 이 별은 그가 그의 별로 보내는 선물이었던 것이고 그의 별을 지킬 방패였던 것이다. 그리고 디폰에게 이 여행은 그의 별을 구하러가는 순례였다. 그 억겁의 시간 전 디폰이 이 별에 자신의 추진체를 결합시키던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 카나엘이 그녀의 별 에덴을 파괴하면서 제누파의 메시지를 전하던 그 순간부터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분명했다.

 

제누파!! 널 절대 용서 못해!! 절대 용서 못해!!!”

 

그녀는 더 이상 폭발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오히려 우주폭풍과 제누파의 별 사이 한 가운데로 돌진하면서 디폰은 발악하듯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처음엔 그토록 거대해 보였던 그녀의 별은 작은 태양계 하나를 소멸시킬 수 있을 엄청난 우주폭풍 속에서 돌풍에 휘말린 나뭇잎처럼 맹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누파!!!”

 

행성의 폭발이 일으킨 가공할 우주폭풍은 이미 디폰의 별을 삼키고 있었다. 그녀의 별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뜨겁게 달궈지며 디폰의 온 몸도 새파란 불꽃을 내뿜기 시작했다.

 

 

 

 

 

 

 

 

4. 넷째 날

 

디폰은 에덴에 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아 버렸다. 그러나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에덴에는 초록의 수목들이 가득 차 있었고 셀 수 없는 무수한 생명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카나엘이 그녀의 초록정원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앗아가기 전보다 더욱 더 푸르르고 아름다웠다. 꿈속에서도 디폰은 생각했다. 저것이 어쩌면 그녀가 떠나온 에덴의 현재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바로 어제 일처럼 느껴졌던 에덴과의 작별은 사실 영원과도 같은 오랜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녀의 별은 꿈속에서 보는 저 모습보다 더욱 찬란하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디폰은 감격에 겨웠다.

 

더 이상 제누파에 대한 분노의 감정 같은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제누파가 강요한 이 마지막 여행에도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힘써 가꿔온 에덴을 카나엘이 황폐하게 하던 순간에도 디폰은 저항할 용기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무언가를 지켜 내기 위해 마침내 혼신의 몸부림을 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존재했던 이유가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노력을 퍼부으며 미친 듯 발악하면서까지 제누파의 요구에 마지막 순간까지 충실하던 모습을 그가 보았던 것이고 그래서 마지막 소멸의 순간 에덴을 꿈꾸게 한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런 후회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디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그녀의 몸은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

행성폭발의 충격파에 멀리 떨어진 항성의 불꽃마저 세차게 흔들리고 천체의 바깥까지 날아간 행성의 잔해들이 우주의 끝을 향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나가는 모습이 그녀의 눈망울을 가득 채웠다.

 

어떻게….?’

 

디폰은 충격파가 이 별을 뒤흔들던 순간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제누파의 별 앞을 가로 막아 우주폭풍을 온몸으로 받아내려 했고 그녀의 추진체는 이미 그 출력의 한계치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폭발의 충격파를 차치하고 그녀의 추진체가 폭주하는 힘만으로도 이 별은 조만간 산산이 분해되고 말 순간이었다. 그때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이 별은 디폰의 추진체가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그 오랜 시간을 죽은 듯 침묵하던, 디폰으로서는 그 의미도 용도도 모를 수많은 장치들이 갑자기 생명을 얻은 것처럼 모두 살아나 격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폭주하는 추진체의 힘이 이 별의 장치들과 그런 식으로 반응하리라는 것을 디폰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제누파는 애당초 이 별을 그렇게 설계했던 것이다. 이 별의 목적은 단지 그의 별을 가려줄 방패막이 역할만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디폰의 추진체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디폰이 의식의 가닥을 놓친 것은 순간적으로 급격히 증가한 중력 때문이었다. 일제히 살아나 가동되기 시작한 장치들도 거대한 우주폭풍 속에서 이 별의 맹렬한 흔들림을 멈추지 못했지만 진동이 심해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중력은 폭발한 별의 파편들은 물론 열기와 방사선과 빛까지도 블랙홀처럼 디폰의 별로 빨아 들였다. 질량을 가진 우주의 그 어느 물체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흩어져 가던 파편들은 큰 포물선을 그으며 디폰의 별 표면에 충돌해 왔다. 그 충격은 별의 최중심부에 있던 디폰조차 폭풍 속의 먼지처럼 뒤흔들었고 이 별의 모든 것이 그 한계융점을 향해 뜨겁게 가열되어 갔다. 남아있던 로힘들이 그 지옥같은 열기 속에서 속절없이 증발해 버린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몸이 타오르면서 디폰 역시 자신이 이제 막 소멸하고 있음을 그때 온몸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에덴을 꿈꾸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던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의 몸을 싣고 있던 별이 지옥같은 열기와 충격, 진동에 진저리를 치던 무렵 디폰은 가장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몸과 이 별이 여전히 온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도 그녀는 아직 시간의 가닥을 잡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짓누르던 엄청난 중력도, 별을 뒤흔들던 맹렬한 충격도,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했던 무시무시한 열기도 이미 사라져 있었고 멀리 항성의 흔들리는 불꽃 너머로 뻗어가는 행성의 파편들을 보면서 무척이나 오랫동안 꿈을 꾸고 있었음을 추정할 뿐이었다.

 

제누파의 별은 그녀의 코 앞에 와 있었다. 그녀가 가져온 이 별은 어느새 제누파의 별을 마주 보는 공전궤도 위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 별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던 디폰의 등 뒤에서 저 가공스러운 우주폭풍과 파편 소나기를 완전히 피해 작은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그 별이 맞아야 할 모든 충격을 디폰의 별이 방패가 되어 고스란히 흡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 별이 지어진 목적이었다.

 

폭주하던 그녀의 추진체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출력한계를 턱없이 넘어 미친 듯 폭주하던 추진체는 그 힘을 다한 끝에 완전히 소멸해 버렸고 추진체를 이루었던 생명의 힘은 이 별에 흡수되어 무형의 동력원 형태로 변해 있었다. 디폰 스스로도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으므로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이 별을 제작한 로힘들조차도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제누파만이 우주의 반대편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터였다.

 

그녀의 추진체는 아무튼 이제 그 목적했던 바를 다했기에 그 원래의 형태와 기능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것이다. 비록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렸지만 이 별이 제누파의 별을 위한 영원한 방패막이가 될 위성이 되어 이미 공전궤도에 오른 만큼 영원 같았던 시간 동안 이 별을 옮겨 왔던 그녀 역시 이제 한계효용을 다한 터였고 마지막 순간 그녀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 로힘들을 생각하면 자신도 마땅히 소멸했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존재의 세계에 있다는 사실에 처절하게 실망하고 있었다. 자신의 별 에덴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와 이제는 돌아갈 기약도 할 수 없는 우주의 한쪽 끝에서 해야 할 모든 일마저 끝나고 난 지금, 아까의 우주폭풍 한 가운데에서 장렬히 소멸되어 버리는 편이 더욱 의미 있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디폰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우주폭풍 당시 살아난 별 내부공간의 장치들은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모종의 작업들을 일사분란하게 처리하면서 콧노래 같은 나지막한 소리를 쉴 새 없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디폰은 또 다시 카나엘의 속삭임을 들었다.

 

디폰,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

 

디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 먼저…, 제누파는 네가 맡은 일을 너무나 잘해냈다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오래 전 사라져 버린 것 같던 분노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카나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꿈 속에서, 에덴의 초록정원을 거닐던 그녀에게 어디선가 제누파가 그렇게 속삭였던 것 같다. 자랑스러운 디폰…, 정말 잘 해 주었다….

 

네가 결코 묻지 않았지만, 네가 왜 정말 여기 와야 했는지를 보여줄 차례야. 사실 궁금해 했잖아? 네가 모든 걸 걸고 지켜 준 저 제누파의 별에 무엇이 있는지 말이야.”

저긴 아무 것도 없어. 제누파가 말했잖아? 그가 사랑하는 존재들은 아직 생겨나기 전이라고…”

그랬지. 디폰, 하지만 제누파가 그렇게 말한 후 네가 이 우주를 한 번 건널 정도의 시간이 이미 흘렀잖아.”

 

디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정말 긴 시간이 흐르고 말았다. 하지만 자꾸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을 디폰은 어쩔 수 없었다. 제누파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로서는 제누파를 위해 해야 할 바를 이미 모두 다 한 후였다. 이제 와서 제누파가 디폰마저 희생시키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것들을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잃고 상심하고 있는 그녀에게 새삼 자랑해 보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들을 본다면 억울함에, 질투심에 가슴이 타 들어가게 될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카나엘은 막무가내였고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디폰은 어느새 카나엘과 함께 제누파의 별에 와 있었다. 그들은 높은 절벽 위에 서 있었고 거기서 디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제누파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어. 하지만 그가 말한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그는 네가 여기서 저것들을 내려다 볼 때 이 얘기를 전해 주기 바랬어.”

 

디폰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그것은 더 이상 억울함의 눈물도, 슬픔과 자기연민의 눈물도 아니었다. 디폰은 감격에 목이 메었다.

 

네가 가져온 저 별이 이 제누파의 별을 위한 선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디폰, 네가 있었기 때문이야. 제누파는 이 별에 정말 최고의 선물을 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너를 이곳에 보내고 싶었던 거야. 사실은 디폰, 네가 바로 이 별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었거든.”

 

디폰은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눈부신 푸르름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꿈속에서 보았던 광경이었다. 디폰은 제누파의 대지에 깃들어 있는 디폰 자신의 손길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만들었던 모든 것, 그러니까 카나엘이 그녀의 별 에덴에서 거두어 갔던 것들과, 그 이전에 살던 별, 또 더 이전에 살던 다른 별에서 만들고 가꾸었던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이 제누파의 별에 옮겨 와 있었고 디폰이 우주를 한 번 건너는 장구한 시간 동안 번성하고 진화하여 더욱 찬란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그녀의 눈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또한 제누파는 이 별이 너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단다. 사랑스러운 디폰, 긴 여행을 마친 너의 고단한 마음에 이 별의 모든 것들이 위로가 되기를, 그리고 이 별이 비로소 네 영원한 보금자리가 되기를 제누파는 바라고 있었어.”

 

저녁 노을로 붉게 물들어 가는 대지를 바라보며 카나엘은 긴 머리칼에 파묻힌 디폰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디폰은 그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온 에덴에서조차 한번도 보지 못했던 놀라운 광경이었다.

 

디폰, 네 등 뒤를 보렴.”

 

디폰이 돌아본 등 뒤에는 높은 산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고 그 까마득한 능선 너머 하늘 위에 그녀가 타고 왔던 별이 상처투성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제누파는 네가 가져온 저 별의 이름을 디폰이라고 붙였단다. 그래, 네 이름이지. 제누파는 처음부터 그렇게 부르기로 마음먹고 있었어저 별의 무수한 상처들은 네가 제누파와 그의 별을 위해 한 일들을 이곳의 생명들에게 증거하는 영원한 기념비가 될 거야. 디폰이 제누파의 하늘에 떠있는 한 저것은 제누파가 이 별을 소중히 아꼈다는 증거이고 네가 제누파를 깊이 사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해.:

 

디폰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제누파가 널 끔찍이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야…”

 

카나엘의 표정에 또 한번 미소가 스쳤다. 그는 이제 굳이 미소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카나엘 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디폰에겐 이제 그것이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디폰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느껴지는 애정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디폰, 이곳에서 행복하거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나엘은 또 다시 홀연히 떠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오랫동안 디폰은 대지 위에 그렇게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땅거미 그늘 속으로 스며들고 밤의 어둠이 깊어지며 숨어있던 별들이 매혹적으로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디폰의 가슴 속에서는 아주 오래 전 영원히 잃어 버린 줄만 알았던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가슴 벅찬 행복감이었다. 디폰은 그것을 두 손으로 가슴 위에 소중히 감싸 안았다.

 

제누파......

 

그녀가 타고 온 별이 다시 하늘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디폰은 고개를 들어 아직도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 별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상처투성이 표면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그 별이 마치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서 우스꽝스러운 억지웃음을 짓는 제누파의 얼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디폰은 그렇게 제누파에 강림했다. 그러나 이 신비로운 생명의 여인 역시 자신이 제누파의 궤도에 올려놓은 저 별이 먼 훗날 이라고 불리게 될 것임을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중략)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세기 1 : 1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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