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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랩톱에 깃든 작은 이야기

beautician 2022. 6. 20. 11:52

랩톱에 깃든 작은 이야기

 

 

주렁주렁 달린 코드들과 액세서리들을 하나씩 뽑아 분리한 삼성 랩톱을 보조 책상에 옮기고 새 레노보 랩톱을 메인스테이션에 올려 놓았다. 그런 다음 아까 뽑았던 코드들을 다시 연결하니 보조 모니터가 켜지고 마우스 커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새 랩톱에 세팅해야 할 것들이 아직 산더미지만 어쨌든 그렇게 새 시대가 또 시작되었다.

 

랩톱 하나 바꿨다고 뭐 새 시대까지 들먹일까 싶지만 나름 사양 높은, 그러나 6년쯤 사용하면서 여기저기 물리적 파손도 생기고 소프트웨어 에러도 잦아진 삼성 랩톱을 중국산 레노보, 그것도 속도나 램, 메모리 크기가 오히려 더 작고 느린 저사양 모델로 교체하는 건 나름 상당한 마음의 결심을 요한다. 특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50대 후반에 모든 코드를 혼자 연결하고 다양하기 짝이 없는 어플리케이션들을 일일이 찾아 설치하다 보면 점점 더 깊은 미로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마저 든다. 그 혼미함 자체가 이미 새 시대 급이다.

 

이런 익숙하지도, 평범치도 않은 상황에 처한 건 몇 가지 우연이 겹쳤기 때문이다. 오늘 벌어진 일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다. 예외는 없다. 예를 들어 오늘 누군가 맞게 된 죽음이 과거 그가 탄생하던 시점에 이미 예정되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어느 날 있었던 단 한 가지 원인만으로 벌어지는 경우도 거의 없다.

 

몇 년 전 랩톱 몸체와 기판을 고정하던 여러 개의 나사들 중 하나를 망실한 후 덮개를 여닫는 동작부위에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무리하게 가지고 다니며 사용하다 보니 나중에 뭔가 안에서 부러진 듯했고 얼마 후엔 급기야 외부 몸체에도 금이 생겼다. 컴퓨터 성능이 크게 저하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SSD를 새것으로 바꿔 느려진 속도를 한 차례 복원한 적이 있는데 이번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터였다. 언젠가부터 아예 덮개를 여닫을 수 없게 되었다. 랩톱이란 모름지기 그 휴대성과 이동성 면에서 데스크톱의 우의에 있는 것인데 그 삼성 랩톱은 이후 덮개를 열어 놓은 채 내 책상 위에 줄곧 머물러야 했다. 효용가치가 반감된 것이다.

 

그 랩톱을 사양이 훨씬 떨어지는 중국산 레노보로 바꾼 이유는 딱히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내 요쿠르트 아이스크림 회동 파트너 차차를 먼저 소개해야 한다. 한 살 반 때 처음 만난 차차가 올해 17살이 되니 알고 지낸 지도 벌써 15년이 훌쩍 지났다.

 

어느 날 내가 북부 자카르타 소재 끌라빠가딩 지역 루꼬(Ruko: 한 층이 열 평 전후인 2~4층짜리 상업용 건물 유닛) 사무실에서 밤늦게 야근하며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당시 채용한지 얼마 되지 않은 메이가 어린 차차를 안고 들이닥쳤다. 몇 시간 전 퇴근한 그 친구가 벌써 출근했을 리 없는 일이다. 메이 왼쪽 눈 밑엔 손톱으로 깊게 할퀸 자국이 있었는데 거기서 피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 동생과 싸우고서 식구 10여명이 겹겹이 겹쳐 살던 다섯 평도 안되는 중부 자카르타 센티옹(Sentiong) 소재의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영화 속 뱀파이어들처럼 인도네시아 자매들도 간혹 날카로운 손톱을 곧추 세우고 서로에게 달려든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미혼모인 메이가 갈 곳이 없어 아기와 함께 재워 달라고 돌아온 것인데 사무실엔 업무용 집기들과 작은 소파가 하나 있을 뿐 모녀가 밤을 지낼 환경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엄마 뒤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던 차차는 저녁 무렵 엄마가 집에서 벌였던 전쟁과 낯선 외국인 남자가 있는 생경한 사무실 환경에 겁먹은 모습이 완연했다. 딱한 사정이 뻔했으므로 난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무실 열쇠를 넘겨주었다. 그게 차차와의 첫 만남이었다.

 

차차와 가까와지기 시작한 것은 그 후 메이가 발군의 마케팅 능력을 발휘하면서부터다. 메이는 좋은 조건을 제시한 한국회사의 최종면접을 통과하면서 전에 다니던 직장을 막 그만두었는데 정작 출근일을 며칠 앞두고 한국인 사장이 변심하여 채용을 취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기적인 고용주들이 흔히 그렇듯 그에겐 메이의 생계가 끊기든 말든 알 바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부당한 사건에 내 정의감이 오작동하며 끓어 넘쳤다는 점이다.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린 끝에 본의 아니게 메이를 떠안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1년 후 그녀가 자카르타와 반둥 소재 천여 군데 미용실들과 거래를 트며 우리 매출을 주도할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난 당시 미용기기 수입판매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 덕에 21세기 들어서자마자 드라마틱하게 겪었던 파산의 구렁텅이에서 간신히 기어 나올 수 있었지만 돈은 여전히 잘 모이지 않아 내 아이들을 제대로 대학이나 보낼 수 있을까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속속 자카르타를 떠나 싱가포르와 호주 멜번에 진학하게 된 것은 메이의 활약에 힘입은 바 컸다.

 

굳이 아이들을 제3국으로 보낸 이유는 내가 다녔던 한국회사들이 대학 특례진학을 위한 관련 서류발급에 협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난 채용취소라는 배신을 당한 메이에게 모종의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마침내 2012년을 전후해 아이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대학을 졸업하자 난 사실상 아이들 학비의 반쯤 메이가 내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이젠 내 차례였다.

 

그때 차차는 여섯 살이 되어 센티옹의 작은 유치원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고 있었다. 가정형편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 어려운 환경에서 기인한 지독히 소극적인 성격과 낯가림, 그리고 남루한 옷차림 때문이었다. 거기에 메이는 늘 일에 진심이었지만 사랑에는 연전연패 했다. 두 번의 파혼을 겪는 사이, 차차 말고 아이가 하나 더 생겼는데도 메이는 여전히 미혼모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외근 중 자꾸 졸도하는 메이에게 종합검진을 받도록 한 결과 둘째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메이는 얼굴을 들지 못했고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메이는 얼마 후 남자아이를 낳고 마르셀이라 이름지었다.

 

한편 당시 거래선에선 제품대금을 떼어먹고 도주하는 미용사들이 종종 나왔는데 그건 고작 한 두 푼의 문제였지만 우리 영업사원들이 치는 사고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하루 종일 외근하며 회사의 통제를 벗어나 있던 영업사원들은 현금이 오가는 취약한 거래방식을 악용해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에게서 수금한 대금을 들고 도주했다. 심지어 내 이름을 팔고 미용사들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서 메이의 능력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다. ‘필드캡틴’이란 직책을 주었지만 메이는 부하직원 관리를 전혀 하지 못했다. 직원들이 일으키는 금전사고를 단 한 번도 미연에 막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터진 사건 뒷수습에는 상당한 수완을 보였다. 조직을 움직여야 하는 일은 전혀 못하면서 혼자서라면 뭐든 해내는, 대단하고도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고조사업무도 대체로 혼자 하는 일이었다. 이미 횡령사고를 내고 도주한 전 직원들이나 아직 회사 내부에 남은 조력자들로서는 사건을 조사하며 조여 들어오는 메이가 부담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그들은 회사 차량이나 제품창고 재고를 빼돌리려고도 여러 번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메이가 자주 불의의 공격에 노출되었고 그 중 몇 번은 치명적이기까지 했다. 한번은 시내에 수금하러 나간 메이가 몰래 뒤따라온 오토바이 뒷좌석 남자가 휘두른 곤봉에 머리가 깨져 길바닥에서 정신을 잃었다. 자칫 죽을 뻔한 사건이었다. 또 한 번은 메이의 자취방에 몰래 찾아온 옛 약혼자가 당시 아직 한 살도 안된 마르셀을 유괴하려다 간발의 차이로 실패한 일도 있었다. 당시 그는 이미 사고를 치고 도주 중이었는데 마르셀의 신변을 빌미로 자신을 추적하는 메이를 협박하려 했던 것 같다. 정황상 메이가 날 위해 회사의 이익을 지키려다 악당들에게 보복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는데 그걸 알고도 방치할 수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난 악당들을 일망타진해야 할 법집행기관도 아니었으니 나를 위해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메이와 아이들이 살고 있던 싸구려 자취집에는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같은 사건의 재발을 피하려면 우선 숙소를 아파트로 옮겨줄 필요가 있었다. 1998년 처참했던 자카르타 폭동 이후 현지 한국인들이 대거 아파트로 입주한 것도 일반 주택단지보다 아파트 치안을 훨씬 더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주민을 방문하려는 외부인들은 반드시 소정의 신원확인절차를 거쳐야 했다. 숙소를 옮기는 비용이 적잖게 들었지만 돈은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차차도 아파트 안에서 인도인이 운영하는 유치원에 등록했고 이듬해엔 끌라빠가딩의 한 사립학교로 진학해 초등과정을 시작했다. 매년 일인당 수만 불씩 드는 유명한 국제학교 수준은 아니지만 명색이 사립학교인 만큼 저렴한 일반 공립학교에 비해 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 아이들의 사립학교 진학은 열악한 환경의 공립학교를 다니며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던 메이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 어쩃든 난 이미 메이의 아이들 학비를 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몇 년 후 마르셀까지 입학한 후엔 두 명의 학비를 내게 되었지만 난 더 이상 주판알을 튕기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차차와 마르셀에게 드는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난 아이들이 자기들 복을 타고 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파산 당시 꿈도 꾸지 못했던 내 아이들의 유학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아이들 자신의 운과 복이 작용한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내가 메이를 만나게 된 것이라고. 차차와 마르셀의 경우도 그랬다. 그 아이들의 운이 날 끌어당겼다면 난 그들에게 복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비용을 감당했던 내 미용기기 수입판매사업이 2013년 말부터 망가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2015년에 접어들면서 메이의 월급도 제대로 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메이 혼자 찾아본 다른 직장들이 형편없는 월급을 제시했으므로 내가 직접 보증을 서 평소 안면이 있던 한국회사에 넣어주어야 했다. 그 결과 메이는 나름 괜찮은 월급과 출퇴근 차량까지 지원받게 되었지만 아이들 학비를 내고 나면 생활비가 한 푼도 남지 않았다. 결국 내가 어떻게 해서든 어느 정도 도와주어야만 메이와 아이들이 세 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미 내 직원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을까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차차가 초등학교 5-6학년, 마르셀이 막 초등과정을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역시 돈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비싼 관리비를 내야 하는 아파트 생활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메이와 아이들을 일반 주택가로 옮겨준 것도 그 즈음의 일이다. 다행히 미용기기 수입판매사업을 하던 당시 만발했던 위험요소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르셀이 유괴당할 뻔 했던 사건 이후 가사를 돕고 아이들도 돌볼 중부자바 빠티(Pati) 시골 출신의 입주 도우미를 한 명 붙여 주었는데 ‘아르니’라는 이름의 그녀는 나중에 고향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그만둘 때까지 7-8년 동안 메이가 일하러 나간 사이 충실히 아이들을 지켰다. 직접 오토바이를 몰아 아이들을 등하교시키고 과제물 준비나 숙제를 돕기까지 해 아이들에겐 가사 도우미가 아니라 큰 누나, 작은 엄마 같은 존재였다. 그 역시 아이들이 타고난 복이라 생각했다.

 

2018년부터 다시 경제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문체부 산하 기관 몇 군데의 통신원 일을 하면서 조사보고 업무에 익숙해지자 다른 다양한 기관, 단체의 굵직한 조사용역을 꾸준히 받게 되었고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벌어지자 출장자를 보내지 못하거나 현지법인 관리가 곤란해진 기업들 업무도 일부 돕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리 없지만 당장 감수해야 할 불확실성이 크게 줄어들면서 아이들 학비도 내가 다시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릴 때 엄마 뒤에 숨길 좋아하고 숫기도 없던 차차는 영어 잘하고 독서도 좋아하는 영리하고 예쁜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팬데믹 전에는 학교 친구들과K-팝 커버댄스그룹 활동도 했는데 학교에선 고등학교 남학생들까지 사귀자고 할 만큼 인기도 좋았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차차는 이제 막 여인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때가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시기지만 너무 예뻐지니 좀 위험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난 메이가 철없던10대, 20대에 겪었던 일들이 차차에게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그런 바람은 나보다 메이가 더 절실했을 것 같다. 그간 생계를 위해 앞뒤 재지 않고 좌충우돌하던 메이는 내가 주선해 준 직장에서도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출을 주도하는 발군의 수완을 보였는데 그 결과 몇 년 후엔 시내 대학 법학과 야간에 진학할 수 있도록 회사의 양해를 얻어낼 수 있었다. 겉멋 들어 시작했을 테니 곧 제풀에 지칠 거란 주변 사람들의 당시 예상과 달리 진득하게 일과 학업을 병행한 그녀는 이제 졸업을 앞두고 변호사 사무실 인턴 근무와 국가고시를 준비 중이다. 젊은 시절 제 멋대로 인생을 소진한 메이에겐 학교 남학생들 사이에서 날로 인기가 높아지는 차차에게서 자신의 학창시절이 겹쳐지며 더욱 아슬아슬해 보였을 것이다.

 

난 아이들에게 매달 용돈도 주기 시작했다. 뻔한 집안사정에 비상금 한 푼 없이 다니는 아이들이 안쓰럽고 위험해 보였다. 더욱이 예쁜 여학생이 돈에 쪼들리면 의외의 사고에 휘말릴 개연성도 크다. 특히 아르니가 결혼해 귀향한 후 등하교 문제가 대두되었다. 안전상 이유로 자카르타에서 사립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대중교통수단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 아이들도 자카르타에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치는 동안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운전사 딸린 차량으로 등하교 했다. 차차와 마르셀에게 당장 통학용 차량을 마련해 줄 여력은 없었지만 믿을 만한 오토바이나 온라인 택시를 계약해 주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그나마 펑크가 날 경우 아이들이 하염없이 학교에 방치되지 않으려면 주머니 속 비상금이 필요했다. 물론 온라인수업이 계속된 지난 팬데믹 기간 2년 동안은 통학문제 걱정을 잠시 덜 수 있었다.

 

그러다가 올해 초 차차가 내 생일 때 랩톱을 선물하겠다며 몰래 돈을 모으는 중이라는 얘기를 메이에게 들었다. 내가 주는 용돈을 일년 내내 모아도 충분치 않은 일이었는데 차차라면 필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차차는 철들면서 매년 내 생일선물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것도 자신이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을 준비하곤 했다. 지난 연말 내 아내 생일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순금 2그램을 사 선물했다. 자기 것 사고 자기 몸 치장하기에도 바쁠 1학년 여고생의 그런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차차와 마르셀은 내 아내를 ‘엄마’와 비슷한 발음인 ‘오마(Oma)’라 불렀는데 그건 집안 여성 중 최고 어른을 부르는 호칭이다. 아이들은 내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비싼 랩톱을 그 애에게 받을 수는 없는 일. 차차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단념시킬 필요가 있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내가 먼저 랩톱을 사는 것이었다. 내 삼성 랩톱이 삐걱거리던 것은 어차피 차차도 알고 있던 상황. 그러니 랩톱을 선물하겠다고 마음먹은 거겠지. 하지만 차차가 랩톱을 사주려는 걸 공식적으로는 모르고 있는 내가 먼저 새 랩톱을 산다면 조금 실망은 하겠지만 크게 마음 상하진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돈을 보태 차차가 더 좋은 자기 랩톱을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당시 차차는 내가 임시로 빌려준 여분의 업무용 랩톱으로 팬데믹 기간 2년 내내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었다. 차차에겐 그 나이 또래 다른 아이들처럼 그림도 그리고 동영상도 편집하고 게임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필요했다.

 

난 어느 날 큰 마음먹고 오래 전부터 낙점해 두었던 랩톱 대용 갤럭시 탭을 사려고 가까운 몰의 삼성전자 대리점에 갔는데 가는 게 장날이라 하필이면 내부수리 중. 부득이 며칠 후 멀리 자카르타 근교 BSD 지역의 매장에서 탭을 구매해 대금을 치르다가 곤란한 상황을 겪었다. 직불카드를 긁었는데 은행구좌에서 빠져나간 대금이 매장 구좌엔 입금되지 않은 것이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매장 직원은 90일 이내에 해당 대금이 다시 내 구좌로 돌아올 것이라 했다. 그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이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더 카드를 긁을 수는 없었다. 결국 구매 실패. 내가 탭 사는 걸 신이 원치 않는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매일 오후 두 시 온라인수업을 마치는 차차를 일주일에 한 번쯤 데리고 나가 식료품을 사거나 요쿠르트 아이스크림, 또는 생과일 쥬스를 함께 먹는 한 시간 남짓의 여유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차차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만약 내 아이들이 자카르타에서 학교를 다닐 때 내가 시간적,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때 그들과도 그런 시간을 가졌을 거라고 아쉬워하곤 한다. 지금이라도 못할 건 없지만 내 아이들을 보려면 그들이 일하고 있는 싱가포르까지 날아가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면서 아이들을 보지 못한지도 오래되었다. 그래서 그때 내 아이들과 하지 못했던 것을 차차와 함께 하면서 많은 가정법을 이중, 삼중으로 사용하며 내 아이들과 함께였다면 어디 가서 어떤 일을 함께 했을까 생각에 잠기곤 한다.

 

물론 때때로 마르셀도 데리고 나간다. 이제 중학생이 되는 마르셀은 요쿠르트보다 고기부페를 좋아해 얼굴이 점점 사각형이 되어 가고 있다.

 

BSD 사건이 있은 후 집 근처 몰에서 차차와 사워샐리(Sour Sally) 요쿠르트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으며 갤럭시 탭에 얽힌 파란만장한 무용담을 말해준 이유는 내가 알아서 내 랩톱을 살 것이란 의지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 설명이 어딘가 충분치 않았는지 차차는 내가 BSD 매장에서 돈을 사기당한 것으로 오해하고 밤새 펑펑 울더라고 메이가 다음날 전해주었다. 이 먼 나라에서도 날 위해 울어주는 아이가 있다는 생각에 안쓰러우면서도 흐뭇한 감정이 일어 그날 내내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90일 걸릴 거라던 결제금액 환불이 불과 일주일도 안되어 처리되었고 환불입금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자카르타 시내 다른 매장에서 계획대로 갤럭시 탭을 샀다. 그런데 그날 차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파파 배, 랩톱 사놓았어요. 급히 필요하잖아요. 어서 와서 가져 가세요.”

 

적잖이 당황해 달려가 보니 차차가 예의 레노보 랩톱을 내밀었다. “서두르느라 더 좋은 거 사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차차는 내가 사기를 당하고 다닐 정도로 급히 랩톱이 필요한 상황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내 생일이 아직 몇 개월 남은 시점. 난 차차가 어떻게 시간을 앞당겼는지, 그 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용돈을 거의 쓰지 않았고 사진도 팔았데요.” 메이의 설명에 화들짝 놀란 건 차차가 자기 사진을 팔았다고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차차는 미인인데다가 깜짝 놀랄 만한 포토제닉이어서 페이스북 사진을 보고 접근해 치근덕거리는 남자들이 이미 넘쳐나고 있었다. 새 신발이나 짝퉁 명품으로 보이는 여성용 손목시계를 포장째 집 담장 안에 던져 넣고 가는 남자들도 있었다. 누군지 알 수 없으니 돌려줄 수도 없었다. 메이도 어릴 때 비슷한 일을 종종 겪었다.

 

하지만 차차가 판 사진은 엄마랑 함께 시장을 볼 때마다 자기 핸드폰으로 찍은 과일과 야채 사진들이었다. 그걸 셔터스톡(shutterstock) 사이트에 올려 놓으면 간혹 그걸 사가는 사람들이 있어 한달에 몇 십 불 정도 수입이 생겼는데 그 돈을 계속 모았다는 것이다. 내 아내 생일선물도 그렇게 산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과 미술에 대단한 재능을 보이던 차차가 사진에도 그런 재주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차차는 미래의 건축설계사를 꿈꾼다.

 

그래서 그 레노보 랩톱은 절대 받을 수 없지만 절대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선물이었다.

 

돌려주는 게 맞고, 내가 아니라 차차가 새 랩톱을 쓰는 게 맞지만 선물을 주면서 그토록 기뻐하던 표정에 결국 거절하지 못했고 이제 와서 돌려줄 수도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100% 순수한 누군가의 선의를 입었던 게 언제 적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쁨과 아련함, 고마움과 죄책감이 마구 뒤엉킨 감정을 안고서 며칠을 보낸 후 난 2년 전에 사놓고 동영상 재생용으로만 가끔 사용하던 소형 태블릿에 자판과 각종 액세서리를 맞춰 차차에게 물려주었다. 얼마 전 랩톱 대용으로 산, 하지만 본의 아니게 차차에게 비밀로 하게 된 갤럭시 탭을 줄까 했지만 그건 차차의 선의와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어쨌든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다.

 

그렇게 받은 레노보 랩톱을 애지중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양이 높고 낮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어떤 물건, 어떤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양이나 가격표가 아니라 거기 깃든 스토리다. 자그마한 새 레노보 랩톱이 내겐 수천 불짜리 삼성, 또는 애플 랩톱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내 책상 메인스테이션을 차지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조사보고서를 쓰고 번역에 매달리는 내게 가장 필요한 MS오피스를 새 랩톱에 까는 건 한 달도 넘게 걸렸다. 갤럭시 탭에는 베타 버전 30일 무료사용을 하겠냐고 묻는 박스가 아직도 뜨고 있다. 요즘 기계들은 뭘 하나 시키면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건 하나도 없고 자꾸 이것저것 되묻기만 한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애플리케이션 하나 설치하는 게 옛날처럼 쉽지 않다. 예전에 내가 익숙했던 방식들은 어느 것 하나 통하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 ‘행’이 걸려 언젠간 명 짧은 놈 먼저 죽고 말, 느려 터진 에러투성이 삼성 랩톱을 책상에서 일찌감치 치워버리지 못했고 이제서야, 그것도 겨우 보조 책상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나마 억지로라도 새 랩톱을 제대로 써야 하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다.

 

난 아버지가 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 아버지가 전화기 저편에서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고 있었다. 내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높은 연세인 만큼 당연히 입원이 처음일 리 없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가 이번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목사로 살았다.

 

“우리가 기도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입원한 다음날, 곧 한국에 들어가야 할 상황이어서 그 전에 아이들을 위해 처리할 문제들이 있는지 짚어보려고 낮에 잠시 들른 메이의 집에서 차차와 마르셀이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독실한 무슬림으로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이 하루 다섯 차례 메카를 향해 기도할 때마다 날 위해서도 기도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난 아이들의 기도가 무엇보다도 위력적이라 믿는다. 그래서 두 아이를 통해 이슬람의 신마저 내 편으로 돌려세운 것 같아 늘 든든한 마음이 들곤 한다.

 

차차는 내가 아내를 두고 혼자 한국에 가게 되면 자주 방문해 오마를 돌보겠다고 한다. 팬데믹 시대가 저물며 그간 발이 묶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보복적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시대. 그래서 터무니없게 치솟은 항공료 때문에 난 아내의 동행을 포기해야 했다. 여러 사람이 턱없이 비싼 티켓 대금을 치르고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차라리 그 돈을 병원비 등 한국에서 필요한 경비에 보태기로 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차차의 저 말이 그토록 큰 의지가 될지 미처 몰랐다.

그러자 더 많은 질문이 마음 속에 늘어선다.

과연 난 차차처럼 부모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을까? 여러 해 전 내 아이들이 아직 내 품 안에 있을 때 그 아이들을 난 충분히 사랑했던 것일까? 혹시 내가 그때 내 가족, 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 차차와 마르셀에게 힘닿는 데까지 해주려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난 ‘보복적’으로 저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것일까? 이 상황을 안다면 내 아이들이 배신감을 느끼진 않을까? 이런 질문들 말이다. 그래, 굳이 가족들에겐 차차 이야기를 하지 말자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한국 출발준비의 마지막 단계는 저 레노보 랩톱을 가방 안에 넣는 것이다. 한국에 가 있는 동안에도 랩톱 작업을 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한국의 내 어머니를 이미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는 차차의 선의를 담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한국에서 돌아오면 또 다시 차차와 함께 사워샐리 요쿠르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 어머니와 레노보 랩톱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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