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아 현대사

서부뉴기니 합병 또는 침략

beautician 2016. 3. 19. 16:37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19)


서부파푸아 합병

 

수까르노의 대내적 권위가 굳건히 세워지자 그는 이제 국제무대를 더욱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반제국주의를 기반으로 한 일련의 공격적이고도 강제적인 정책들을 실행해 인도네시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 했는데 이러한 반제국주의, 반서방 정책들은 곧잘 다른 나라들과 대결양상으로 치닫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인종들과 분파들이 공존하는 인도네시아의 단합을 유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측면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외교정책전면에 나선 인물이 수반드리오(Subandrio) 외무장관이었습니다.



수반드리오는 서부자바 말랑 출신으로 의학을 공부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엔 항일저항군에서 의료실습을 했습니다. 1945년 이후 그는 수까르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어 공보처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수까르노의 특별사절단으로 유럽을 다니며 1947년 런던에 공보처 출장사무소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는 1954-1956년 기간 중 주소련 대사를 지낼 때 좌익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공산주의의 발전을 목도하며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1956년 수까르노의 부름을 받아 자카르타에 돌아와 외무성 사무총장이 되었고 1960년엔 마침내 외상 겸 제2부총리의 자리에 오른 후 1962년엔 외부-경제 관계조정장관을 겸임합니다. 그는 이 세 개의 직위를 동시에 유지했고 1966년까지 실질적으로 인도네시아 정보국의 수장으로서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면서 수까르노 정권의 막강한 실세로 떠오릅니다. 중국과의 수교도 그의 작품이었습니다.

 

수까르노는 1956년 북경을 처음 방문한 후 중국을 비롯해 공산권 전반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소련연으로부터의 군사원조규모는 날로 증가해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소련은 인도네시아에 그 어느 서방국가보다도 더 많은 군사원조를 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는 소련의 대쿠바원조와 맞먹을 정도였습니다. 공산권으로부터의 막대한 원조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존 F 케네디의 미국 행정부로부터도 거대한 군사원조를 끌어내는 동력이 되었는데 미국은 수까르노가 소련연방으로 기울어 당시 한창이던 동서냉전에서 공산진영에 서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1956년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수까르노는 뜨거운 환대를 받으며 미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을 방문했을 때엔 더욱 열렬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 소련의 니키타 후루시초프 서기장이 교환방문 성격으로 1960년 자카르타와 발리를 방문하여 수까르노에게 레닌평화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초반을 지나며 수까르노가 공산권에 한발 더 다가간 것은 PRRI-뻬르메스타 반란에 미 CIA가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실이 들통났기 때문인데 이를 상쇄하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은 수까르노를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환대하며 인도네시아에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민간 및 군사원조를 제공했습니다.

 

1955년에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던 반둥회의에 이어 수까르노는 그가 신식민주의와 제국주의’(NEKOLIM)이라 비난하던 서방열강들을 기존구태세력’(OLDEDO)라 칭하며 그 반대개념으로서의 신흥세력국가들’(NEFO)과의 새로운 동맹관계를 구축하려 했습니다. 1961년 수까르노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인디아의 판딧 자와랄랄 네루 수상, 유고슬라비아의 요십 브로즈 티토 대통령, 가나의 크와메 크루마 대통령 등과 함께 ‘5인의 발의’(The Initiative of Five)라는 공동선언을 통해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 :NAM)이라 명명한 또 다른 정치동맹을 만들었습니다.



 

NAM은 당시 냉전체제와 연계하여 미국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국가들에게 정치적 공동체의식과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을 가졌습니다. 수까르노는 이때까지만 해도 대외적으로 신흥독립국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며 좋은 이미지를 구축했고 그래서 이집트 카이로와 모로코 라밧(Rabat)의 도로엔 그의 이름이 붙여지고 파키스탄 페샤와르(Peshawar)엔 그의 이름을 딴 광장에 건설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56년엔 베오그라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도 받았습니다.

 

한편 독립전쟁이 끝난 후 서부뉴기니(서부파푸아) 지역에서는 다시금 인도네시아군과 네덜란드군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1945 8 17일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은 서부파푸아 지역을 포함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체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으나 네덜란드는 서부 파푸아를 여전히 네덜란드왕국의 한 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이 지역의 독립을 최대한 늦추었다가 1970년대에 별도국가로 독립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도네시아가 동의할 리 없었습니다. 두 나라는 이 지역의 소유권을 놓고 두 나라가 경합을 벌였습니다. 파푸아 민족으로서는 당시 드넓은 파푸아 뉴기니의 서쪽 절반에 백만명도 안되는 인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순박하고도 용맹스러운 전사였지만 1950 12월 유엔은 유엔헌장 73 e항에 따라 서부파푸아의 미래는 파푸아 민족 스스로의 민족자결로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결의했음에도 그들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가 아닌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에 의해 결정되려 하고 있었고 파푸아 부족들은 아무런 외교력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서부개척시대의 아메리칸 인디언들처럼 파푸아인들의 원시부족사회 시스템과 적은 인구는 네덜란드군은 물론 풍부한 전투경험과 현대화된 장비를 가진 인도네시아군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편 1949년 헤이그원탁회의 당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는 서부 뉴기니 지역의 미래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대신 1년 이내에 다시 이 문제를 협의키로 하는 것으로 결론을 유보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가 이 지역의 소유권을 강력히 주장함에 따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설득해 이 문제를 국제재판소에 상정해 판결을 받으려 했습니다. 물론 유럽에서 벌어질 불리한 재판이 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인도네시아는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도 인도네시아는 몇 차례 서부파푸아에 소규모 침공을 감행했고 네덜란드는 부득이 서부파푸아의 독립준비를 서둘렀는데 그 결과물 중에는 1956년 해군사관학교 설립, 1957년 파푸아군대의 발족 등이 있었습니다. 이에 반발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1956 8 17일 서부파푸아지역을 서부이리얀주라고 지정하고 띠도레(Tidore)섬에 위치한 소아시우(Soasiu)를 그 주도로 삼았으며 상징적으로 자이날 아비딘 샤(Zainal Abidin Syah)가 서부이리얀 주지사로서 1956 9 23일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수까르노는 1958 12 17일 인도네시아 국내의 모든 네덜란드 기업들을 국유화하는 1958년 제 86호 법령을 발표합니다. 이 조치로 국유화된 기업체들은 플랜테이션, 네덜란드 무역회사 NHM, 전기회사, 정유사, CBZ 병원(훗날 찝또망운꾸수모 병원으로 개명)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인들을 인도네시아로부터 추방하면서 네덜란드에 대한 압박강도를 높였고 그 결과 두 나라간의 교역량은 대폭 줄어 들었습니다. 이와 함께 인도네시아 물자의 유럽경매시장을 네덜란드에서 독일 서부의 브레멘으로 옮기고 네덜란드 국영항공기 KLM의 인도네시아 영공통과 불허와 네덜란드 영화 상영금지 같은 조치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카르타에서 네덜란드 외교관들이 물리적 공격을 받는 사태가 빈번히 벌어졌는데 인도네시아가 적극적 정책공세를 취함에 따라 네덜란드는 1959년 서부파푸아인들의 자치국가를 설립하는 준비단계에 돌입했고 인도네시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헤이그 원탁회의 합의위반이라며 1960 8월 네덜란드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습니다.

 

네덜란드 측은 1960년 제헌위원회 성격의 뉴기니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병원들과 마노끄와리(Manokwari) 조선소, 농업연구단지, 플랜테이션 등을 설립했으며 지역방위를 위한 파푸아 자경부대(Papuan Volunteer Corps)도 만들었습니다. 뉴기니 위원회는 1961 45일 파푸아인들의 독립국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공표하면서 인도네시아와 대결양상으로 치달렸습니다. 뉴기니 위원회는 1961 1월 선거로 뽑은 16명을 포함, 28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1년 이내에 서부 뉴기니의 미래의 운명과 항로를 결정하는 임무를 띠었습니다. 뉴기니위원회는 특별회의를 거쳐 국가발표문을 초안했는데 여기에 서부파푸아(West Papua)라는 국호와 샛별문양 국기가 포함되었습니다.


 


1961년 유엔총회에서 미외교관 엘스웨스 벙커는 네덜란드가 2년 내에 유엔을 통해 서부파푸아를 인도네시아에 이양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원래 미국은 서부파푸아가 인도네시아의 영토가 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워싱턴의 유럽상황위원회(Bureau of European Affairs) 인도네시아가 서부파푸아의 영유권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해 백인 지배자가 황색피부의 지배자로 바뀌게 되는 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파푸아인들의 입장을 중시했던 것이죠 그러나 1961 4월경부터 로버트 코머(Robert Komer)와 맥죠지 번디(McGeorge Bundy)는 미국의 그러한 기조를 바꾸어 유엔이 인도네시아에게 영유권을 이양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여러가지 계획들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도 냉전체제 하에서 인도네시아가 소련쪽으로 기우는 것을 우려한 정치적 입장이 작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와 갈등이 깊어갈 즈음 무기원조를 해줄 나라들과 협상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미국의 문을 두드렸지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인도네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소련과 동구권으로 눈을 돌렸고 1960 12월 나수티온 장군은 소련의 모스크바로 날아가 25억 달러 상당의 무기 구매계약을 하며 장기 거치기간을 가진 후 대금결재를 시작하는 좋은 조건까지 받아냈습니다. 이 무기구매를 통해 인도네시아는 남반구에서 가장 강력한 공군력을 가진 국가로 급부상했고 네덜란드령 뉴기니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써 수까르노 정권은 이후 소련의 군사원조에 크게 의지하게 됩니다.

 

인도네시아가 소련으로부터 구매한 군사장비들 중엔 41기의 경량화물수송 헬리콥터 MI-4, 9기의 중화물수송 헬리콥터 MI-6, 30기의 미그15 제트기, 49기의 미그17 강습기, 10기의 미그19전투기, 20기의 미그21 초음속전투기, 12척의 위스키급 잠수함, 수십대의 코르벳함, 그리고 나중에 서부파푸아 침공작전에 투입되면서 ‘KRI 이리얀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스베르드로프급 순양함 1척 등이 포함되어 있엇습니다. 뿐만 아니라 22기의 경폭기기 일류신 II-28, 14기의 장거리 폭격기 TU-16, 대함미사일과 공대지 마사일 AS-1 커널을 장착한 12기의 해양버젼 TU-16기도 구매목록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IL-15, AQvia-15 등의 경수송기 26, 안토노프 AN-12B 중수송기 6, 그리고 미국산 C-130 허큘리스 중수송기 10기도 있었습니다.


  

그해 10 UN이 서부파푸아 문제에 개입합니다. 유엔과 영국, 호주가 인도네시아의 팽창정책에 반발해 서부파푸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권리를 옹호하는 쪽이었으나 군사적 개입은 부담스러워 했으므로 결국 네덜란드는 서부파푸아를 별도의 국가로 독립시키려는 자신들의 정책에 충분한 국제적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 수까르노는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 및 비동맹운동 국가들로부터 서부파푸아 합병에 대한 지지를 끌어냈고 만약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사이에 전쟁이 발생할 경우 네덜란드를 지원하지 말 것을 유도했습니다

 

서부파푸아에서 네덜란드와 일전을 벌일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수까르노는 1961 12 19일 족자에서 행한 국민의 3대 명령(Tri Komando Rakjat : 뜨리꼬라 TRIKORA)이란 제목의 연설을 통해 네덜란드와의 군사대치상태를 선언하고 서부파푸아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1961년에서 1962년 사이의 네덜란드령 뉴기니의 점령, 합병을 목적으로 한 인도네시아의 군사작전을 뜨리코라 작전이라 칭합니다. 뜨리꼬라 선언의 전문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국민의 3대 명령 (뜨리코라) 전문

 



인도네시아 공화국 군최고사령관이자 대통령인 본인은 서부이리얀의 해방을 위해 네달란드과 대결함에 있어 현재 네덜란드가 강점하고 있는 조국의 영토 서부이리얀 해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함을 기회있을 때마다 군에 지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아직도 우리 영토인 서부이리얀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지금, 본인은 인도네시아 국민들과 서부이리얀에 사는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국민의 3대 명령을 수행할 것을 명합니다.

 

1.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이 만든 파푸아 괴뢰국가의 성립을 무산시킬 것.

2. 인도네시아 영토인 서부이리얀에 인도네시아 국기인 적백기를 게양할 것.

3. 조국과 민족의 통일과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국가역량의 총동원을 준비할 것.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한 우리의 투쟁에 위대한 신의 축복을!

 

족자 . 1961 12 19

대통령/군최고위사령관/ PBR/서부이리얀해방군 KOTI대장군

수까르노


서부이리얀 해방을 위한 만달라사령부’(Komando Mandala Pembebasan Irian Barat)라는 긴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뜨리꼬라작전 사령부의 사령관은 수하르토 소장이었습니다. 훗날 대통령의 지위에 오르지만 아직까지 나수티온과 아흐맛 야니의 그늘에 가려 있던 수하르토가 바야흐로 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습니다. 만달라 사령부는 서부파푸아 침공을 위해 육, , 공을 총동원하는 중이었고 이로서 인도네시아와 네달란드는 서부 뉴기니의 패권을 놓고 바야흐로 대결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수까르노는 단계적 동원정책을 발효시켜 국가 전체가 그의 명령을 따르도록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이에 맞서 네덜란드는 군함 HR.MS 카렐 도르만호를 서부파푸아 해역으로 보내왔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의 침공을 대비한 네덜란드 측은 해군을 주축으로 하여 1950년까지는 해병대와 해군비행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58년부터 변화를 보여 소롱, 팍팍(fakfak), 머라우께, 까이마나(Kaimana), 떠미나부안(Teminabuan)등에서 육군과 해병대의 증강이 이루어진 상태였습니다.



수하르토은 서부파푸아의 인도네시아 합병을 위한 계획수립과 준비 및 실행하고 그 과정에서 최단기간 내에 서부파푸아 지역에 잠정적 해방구를 조성하거나 자카르타 정부의 통제권이 미치는 지역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1962년 인도네시아군이 서부파푸아 지역에 대한 공수부대 투하와 해군을 동원한 상륙작전 등 침공을 시작하면서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수반드리오와 네덜란드와의 외교적 대결은 점점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습니다. 뜨리꼬라작전은 인도네시아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한다는 전제 하에 침입, 침식, 합병의 세 단계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작전의 첫 단계인 침투단계에서는 소규모의 병력이 공중과 해안상륙을 통해 적 후방에 침투해 네덜란드군의 주의를 끌고, 그렇게 해서 소홀해 진 지역에 인도네시아군 주력이 수륙 양면의 총력전을 벌여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이 작전의 침식단계이고. 그런 후 인도네시아 정부의 통제력을 서부파푸아 전체에 뻗치는 것이 합병단계였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은 본격적인 침공에 앞서 서부파푸아에 자원병들을 침투시키는 비밀작전을 먼저 시작했습니다. 뜨리꼬라라는 작전이 이미 선포되었지만 제공권을 장악하기로 했던 인도네시아 공군력의 대부분은 자바섬에 밀집해 있었으므로 뜨리꼬라 작전수행을 위한 준비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육군이 우선 지원병들을 대상으로 침투작전을 벌이면서 해군엔 이들을 서부파푸아 해안으로 실어나를 운반선과 상륙정을, 공군에겐 병력수송용 허큘러스 수송기들을 요청했습니다. 이 작전은 공군으로서는 병력만 실어 나르면 끝나는 간단한 작전이었지만 매우 비밀리에 진행되어서 공군사령부에서도 특정 고위장교들만이 이 작전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암본제도에서 조직된 인도네시아 경찰 기동타격대도 몇 개의 전투단을 이루어 서부파푸아 침공작전에 참가했습니다. 안똔 수자르워(Anton Soejarwo) 총경이 이끄는 기동타격대 특수전대는 고롬(Gorom)섬에 조직되었고 그 침투조 하나가 서부 파푸아 팍팍(Fakfak)해안에 상륙, 내륙으로 진주해 네덜란드 지역에서 사보타지와 파괴공작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뜨리꼬라 작전의 어설픈 침투단계는 1962 1 12일 인도네시아군을 레푸안(Letfuan)에 낙하시킨 헤큘리스 수송기들은 기지로 복귀한 며칠 후인 1 15일 아루해전에서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군함들이 격돌하는 해전으로 비화됩니다.

 

아루해전은 1962 1 15일에 벌어졌습니다. 서뷰파푸아 해안 블락 호엑(Vlakke Hoek) 의 아루(Aru)섬 인근에서 인도네시아군은 해군 부참모총장 요스 수다르소(Yos Sudarso) 해군준장의 기함 KRI 마짠뚜뚤(Macan Tutul)을 비롯해 수도모 대령의 KRI 하리마우(Harimau), 그리고 KRU 마짠꿈방(Macan Kumbang) 등 어뢰정급 군함 세 척이 상륙병력 해병대원 150명을 싣고 항진 중이었습니다. 그날 밤 9시경 KRI 하리마우는 자신들의 항로 좌 우측에 적 선박들이 잠복 중임을 레이다로 발견했는데 그 순간 네덜란드 군의 로키드 P2V-7B 넵튭전투기가 기관포탄을 난사하며 기습해 들어왔고 네덜란드 군함도 KRI 하리마우 쪽으로 경고사격을 해왔습니다. 수도모 대령은 응사를 명령했으나 KRI 하리마우의 사격은 적함을 맞추지는 못했습니다. 요스 수다르소 준장은 결국 퇴각을 명령했는데 KRI 마짠뚜뚤이 기관고장을 일으켜 의도치 않은 우측선회를 하기 시작했고 이를 공격하려고 포열을 맞추는 과정이라 판단한 네덜란드군은 즉각 포격을 가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스 수다르소 준장은 최후의 순간까지 과감히 응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KRI 마짠뚜뚤은 네덜란드 프리깃함 Hr.Ms.에버트슨으로 돌진하며 사격을 가했으나 오히려 치열한 대응포격을 받고 2250분 격침되면서 요스 수다르소 준장과 29명의 인도네시아 해군수병들이 전사하고 55명의 생존자들이 네덜란드군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렇게 KRI 마짠뚜뚤이 마지막까지 응전하며 적의 주의를 끌어준 덕에 KRI 하리마우와 KRI 마짠꿈방은 최소한의 피해만을 입고 무사히 전역을 이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참패를 겪으면서도 인도네시군아의 침투작전은 그 후 8개월 동안 끈질기게 계속되어 562명의 병력을 해안으로 상륙시켰고 1,154명을 공수투하 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의 레이다망을 피해 저공비행한 인도네시아군 수송기는 공수부대를 서부파푸아 내륙 깊숙이 투하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은 이 작전을 위해 야간에만 수송기를 띄웠는데 이는 이 작전 초창기에 사용된 18명 정원의 경량 수송기 C-47 다코다기의 성능이 크게 떨어져 네덜란드군 넵튠 전투기에게 족족 요격당하곤 했던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침투에 성공한 병력은 1962 4월부터 서부파푸아 전역에서 게릴라작전을 수행했지만 군사적 측면에서는 대체로 비효율적인 작전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94명 이상의 인도네시아 병사들이 전사하고 73명이 부상을 당한 반면 네덜란드군의 피해는 미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1962년 중반까지 계속된 침투작전을 통해 이 지역의 병력을 꾸준히 증강한 인도네시아군은 두 번 째 작전단계에 돌입했습니다. 인도네시아 공군은 소련에서 공급한 튜폴레프 TU-16 뱃저(Tupolev Tu-16 Badger) AS-1 커널 / KS-1 커밋(AS-1 Kennel / KS-1 Komet) 대선박 미사일을 장착해 배치하여 네덜란드 군함 HNLMS 카렐 도르만과의 일전을 대비했습니다.



1962년 여름까지 인도네시아군은 서부파푸아의 네덜란드 주둔군 거점인 비악(Biak)에서 대규모 상륙작전과 공습을 감행했습니다. 이 작전은 자야위자야 작전이라 명명되었는데 소련과 동구권에서 지원된 여러 척의 군함들을 포함한 100여척의 함선이 동원되어 괄목할 만한 병력을 움직였습니다. 이는 인도네시아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작전이었습니다. 비악섬에서 7천명의 공수부대, 4,500명의 해명대, 그리고 13,000명의 보병들이 동원되어 네덜란드 기지들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하는 동안 1962 8 13일과 14일에 인도네시아 공수부대가 북서쪽 방면의 소롱(Sorong)과 남동쪽 방면 머라우께(Merauke)에도 대거 투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네덜란드 왕립군 정보국과 정찰기에 사전 노출되었고 인도네시아군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서부파푸아 전역의 네덜란드 해군은 구축함 다섯 척, 프리깃함 두 척, 잠수함 세 척, 탐사선 한 척, 보급선 한 척 그리고 유류탱커 두 척을 보유했고 공군력은 해군에서 지원된 넵튭전투기 11, 호크 헌터 F MK4(Hawker Hunter F.Mk.4) 12, 호커 헌터 MK6 12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네덜란드 지상군은 다수의 대공포대, 해병대 5개 중대, 3개 보병대대가 있었습니다. 방어계획의 일환으로 네덜란드군은 마리드 6 NNG 를 사용해 인도네시아군 통신체계를 교란시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 사태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할까 우려하며 네덜란드를 인도네시아와의 협상테이블로 등을 떠밀었습니다. 1962 2월 미검찰총장 로버트 케네디가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인도네시아와의 무력충돌에서 미국이 네덜란드를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습니다. 또한 미외교관들이 총력을 다한 결과 1962 8 15일 뉴욕협정이 체결되는데 당초 파푸아의 독립을 지지했던 호주도 미국의 압력을 받아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지지로 선회했습니다. 뉴욕소재 유엔본부에서 체결된 뉴욕협정엔 인도네시아 수반드리오 외상과 네덜란드측의 얀 헤르만 반 로옌(Jan Herman van Roijen), C.W.A. 슈르만(Schurmann)이 각국 대표로 나서 서명한 협정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네덜란드는 서부파푸아의 통치를 유엔사무총장 산하의 유엔임시집행위원회(UNTEA)에 위임하며 UNTEA는 이를 다시 인도네시아에 양도한다.

2. 신탁통치기간 동안 유엔깃발을 게양한다.

3.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국기의 게양은 유엔사무총장과 각국 정부의 협약에 따른다.

4. 치안유지를 위해 유엔은 파푸아 경찰력을 지원하며 현지 네덜란드군과 인도네시아군은 신탁통치기간 동안 유엔사무총장의 관할하에 둔다.

5. 인도네시아는 유엔의 지원아래 서부파푸아의 주민들에게 다음 방식을 통해 스스로의 미래를 자유롭게 결정할 기회를 공여한다.

a. 서부파푸아 주민대표들간의 협의.

b. 인도네시아와의 합병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 일정 확정.

c. 국민투표 용지 준비

d. 국제표준에 따라 실시될 국민투표에 참여할 모든 성인남녀의 권리보장

6. 국민투표는 1969년말 이전까지 실시한다.



네덜란드는 이 뉴욕협정을 비준함으로써 서부파푸아 합병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의지를 마침내 인정했습니다. 네덜란드 정부 역시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또 다시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자야위자야 작전은 조기에 종결되고 1963년 서부파푸아는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 영토에 합병됩니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식민지를 넘겨주기로 결정한 배후에는 미국의 강력한 입김도 작용했습니다. 네덜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으로서 미국의 우방이었고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수까르노가 소련의 품에 안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인도네시아에게 우호적 입장을 취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서부파푸아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군사행동과 이에 대해 소련이 적극적 군사원조를 한 것이 역설적으로 미국에게 경종을 울려 서부파푸아 분쟁에서 인도네시아 편에 서서 네덜란드를 압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뉴욕협정은 미외교관 엘스워스 벙커(Ellsworth Bunker)가 추진한 협상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네덜란드-인도네시아 간의 휴전을 중재하면서 10 1일 네덜란드가 서부파푸아를 일단 유엔임시집행위원회(UNTEA)에 위임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여기서 한 박자를 쉰 후 1963 5 1 UNTEA가 다시 인도네시아에게 이양하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서부파푸아의 수도였던 홀란디아(Hollandia)는 꼬따바루(Kota Baru)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1963 9 5일 인도네시아는 서부파푸아지역을 격리지역으로 공표하면서 강압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파푸아 위원회를 해산시키고 파푸아 국기와 국가를 금지했는데 이는 파푸아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와 1965년엔 독립파푸아조직(OPM)이 조직되기에 이릅니다. 이를 짓누르기 위해 인도네시아 정부측은 살인, 감금, 고문은 물론 폭격도 마다하지 않는 등 가혹한 조치를 펼친 것입니다. 국제사면위원회에 서는 이 과정에서 10만여명의 파푸아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OPM 역시 자체의 군대를 구성해 폭력적 저항에 나섰습니다.



뉴욕협정에는 서부파푸아가 1969년까지 국민투표를 실시해 계속 인도네시아의 일원으로 남을 것인지 독자노선을 걸어갈 것인지 결정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사에 있어 서부파푸아가 국제기구의 감독 아래 독립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가 그렇게 방치할 리 없었습니다. 1969, 인도네시아 점령군의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hi Wibowo)장군이 이 국민투표의 조직을 주도한 것입니다. OPM 멤버였던 모세스 웨러(Moses Werror)에 따르면 Pepera가 열리기 몇 주 전 인도네시아군은 파푸아 주민대표들을 체포해 위협하기도 하고 뇌물로 구슬르기도 하면서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에 표를 던지도록 공작을 벌였습니다. 그 후 벌어진 투표에서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유엔이 파견한 두 팀의 감독관들은 총 1,054표 중 200여표가 개표된 시점에서 개표소를 떠난 것도 석연치않은 장면이었습니다.

 

PEPERA의 결과는 파푸아가 인도네시아와 합병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 지역에서의 국민투표라면 당연히 해당 지역인구 유권자 전체인 816,000명 모두의 의견을 물어야만 했지만 부족장 1,022명만이 투표권을 받았고 그들은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에 몰표를 던졌습니다. 현지에 주둔한 인도네시아군으로 인해 그토록 많은 살인과 폭력사건들이 벌어졌는데도 파푸아 주민대표들이 건전한 정신상태로 합병을 선택했다는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당연히 OPM은 물론 독립옵저버들이 그 결과에 의구심을 제기했지만 미국과 호주는 설레발을 치며 이 투표 결과에 대해 유엔이 승인하도록 자카르타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여전히 미국-인도네시아-소련의 미묘한 삼각관계가 기저에 깔려 있었지만 거기 개입된 이권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권의 위력은 정의를 초월하곤 하는데 서부파푸아의 막대한 천연자원에 주변 강대국들은 군침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유엔회원국 중 84개 회원국이 투표결과 수용에 찬성표를 던졌고 30개 회원국들은 기권했습니다. 서부파푸아인들의 운명은 그런 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부파푸아는 인도네시아의 26번째 주로 편입되며 이리얀자야(Irian Jaya)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러나 서부파푸아를 국가의 지위로 형성하려 했던 네덜란드에 동조한 적잖은 해당지역 주민들은 이 투표결과를 수용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분리주위단체인 자유파푸아운동이 일어나 오늘날까지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는 사태가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사실상 거의 침략수준으로 진행되었던 인도네시아의 서부파푸아 합병을 자카르타 정부는 애써 정당화 했는데 인도네시아 교과서에서도 가르치고 있는 합병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서부파푸아는 1945 8 17일부터 이미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영토였으나 아직 네덜란드에게 강점당한 상태였다.

2. 네덜란드는 헤이그원탁회의에서 서부파푸아를 인도네시아에 이양키로 약조한 있다.

3. 서부파푸아를 인도네시아에 합병한 것은 인도네시아의 영토를 네덜란드의 강점상태로부터 되찾은 정당한 조치이다.

4. 또한 인도네시아의 서부파푸아 합병은 파푸아 주민들이 원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수까르노의 마음을 사려던 미국의 노력은 수까르노가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에 눈독을 들여 신생 말레이시아와 대결국면에 접어들면서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미국은 서부파푸아에 매장되어 있던 막대한 양의 구리와 황금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수하르토가 정권을 잡자 프리포트-맥모런사(Freeport-McMoran)를 통해 마침내 이 지역 광권을 손에 넣으며 실리를 챙깁니다. 프리포트 유황회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채굴허가를 받은 첫 외국회사로 등록되며 그 허가기간은 1981년부터 30년간이었습니다. 물론 프리포트는 모종의 수단과 방법으로 특권을 누리며 1972년부터 이미 채굴활동을 하고 있었고 허가기간이 끝난 2011년 이후에도 가용한 모든 불법과 편법, 인도네시아 부패고위관료 및 정치인들과의 뒷거래를 통해 스캔들을 일으키고 조코 위도도 정부와 대립하면서도 전 정권 실세들에게 주식을 나누어주는 등의 방법으로 기어이 채굴허가를 몰래 연장해 2041년까지 채굴과 파푸아 노동력의 착취를 계속할 예정입니다.


 

1988년 서부파푸아의 그라스버그 광산(Tambang Grasberg)이 개발되며 세계 최대 금광으로 떠올랐습니다. 현지 주민들은 프리포트와 인도네시아 정부의 환경파괴와 인권말살행위에 대해 여러 방법으로 저항했는데 OPM조직과 연계하여 가스관을 폭파하기도 했고 1996년에는 유럽과 인도네시아에서 프리포트 직원들을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납치사건 피해자들이 풀려나는 과정에서 두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트란스이미그라시(Transimigrasi) 이주정책의 일환으로 자바섬과 수마트라에서 수만명을 이리얀자야로 이주시켰는데 이는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골수분자들을 대량으로 현지에 심어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2000년엔 와히드 대통령 시절엔 현지 분리독립 움직임을 완화시키기 위해 파푸아에 보다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파푸아의 독립의지는 아직도 그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자유파푸아운동 측은 파푸아의 독립에 대해 어떤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을 들여다 볼만한 자료가 있습니다.

 

1962년 인도네시아는 미국, 영국, 호주의 지원을 받아 서부파푸아를 침공하여 불법적으로 강점하여 이리얀자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국제법는 모든 인간 한명 한명이 평화적 방법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부파푸아에서는 독립을 지지하는 평화시위는 물론 이 파푸아깃발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인도네시아 침략자들에게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금당하고 고문당해야 했습니다.

 

1) 서부파푸아의 멀라네시아(Melanese) 후손들은 인도네시아인들과 종족적 기원이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는 서부파푸아에 대해 과거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는 공통점 외에는 그 어떠한 역사적 공통분모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2) 서부파푸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을 도와 일본군들을 무찔렀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호주를 침공할 수도 있었지만 파푸아인들의 치열한 항전으로 여의치 못해 결과적으로 수많은 미국, 영국, 호주인들의 생명이 구원받은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연합군은 파푸아를 그들의 혈맹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자바와 수마트라가 주축을 이룬 인도네시아의 하타와 수까르노 정권은 일본군에 부역한 주축국의 일원이었습니다. 파푸아와 인도네시아는 현대사의 출발점 자체가 틀립니다.

 

3) 인도네시아가 침공하기 이전, 파푸아는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로부터 이미 독립을 쟁취하여 신뢰할 수 있는 합법적 자치주로서 이미 그 기능을 가동하고 있었습니다.

 

4)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서부파푸아가 금과 원유, 가스, 청동 등의 막대한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반면 서부파푸아인들과 네덜란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프리포트, 리오 틴토(Rio Tinto), 브리티쉬 페트롤륨, BHP 빌리톤(BHP Biliton) 등 미국, 영국, 호주의 주요기업들은 자카르타와 일련의 독점계약을 맺고 서부파푸아에서 수십억 달러의 이익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부파푸아 지방정부는 자카르타 정부가 걷어들이는 해당 세금의 불과 6분의 1만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5) 인도네시아군은 서부파푸아를 침공한 이래 전체인구의 최소 6분의 1을 학살했습니다.

 

6) 1961년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의 공산화를 원치 않는다면 서부파푸아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지지하라며 당시 케네디 미대통령을 협박한 바 있습니다. 1962년 인도네시아는 서부파푸아를 침공할 당시 파푸아의 부족들은 자위수단으로서 낡은 창과 활 이외엔 가진 무기가 없었으므로 인도네시아군은 손쉽게 파푸아를 무력으로 짓누를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미국은 전후복구비를 주지 않겠다고 협박해 네덜란드가 공식적으로 서부파푸아를 인도네시아에 이양하도록 공작했습니다. 네덜란드는 공정한 국민투표를 통해 파푸아인들이 인도네시아 편입할지 여부를 결정한다는 전제 하에 이양에 동의했으나 국제적 지지를 등에 업은 인도네시아군은 그들이 찾아낼 수 있었던 서부파푸아 전 정부요인들과 독립을 지지하는 지도자들을 모두 검거해 즉시 살해했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은 그렇게 8년간 파푸아인들을 압박한 끝에 1969년 투표를 실시했는데 그것은 전체 파푸아인들을 대상으로 한 국민투표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가 선택한 공모자와 민족반역자 1,022명의 간접투표였습니다.



7) 1965년과 66년 사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수까르노 대통령이 미국이 공작한 쿠데타에 의해 하야하자 1967년 미국 프리포트사는 서부파푸아에서 금과 동을 채굴하는 30년짜리 허가를 획득합니다.

 

8) 이것은 자카르타 정부에 엄청난 세금수입을 안겨주었고 뿐만 아니라 서부파푸아의 천연자원을 착취하는 이들 외국회사들은 인도네시아군에도 막대한 보호비를 지급하여 결과적으로 더 많은 서부파푸아인들이 인도네시아군에게 살해당하는 토양을 만들었습니다.

 

9) 서부파푸아에서 일하는 외국인들도 이 지역엔 좀처럼 진입허가를 받지 못합니다. 자카르타에 충성을 맹세한 서방 언론의 인권조사관들이나 외국 정치가들(특히 미국외교관등)조차도 진입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 역시 이 시설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이 시설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법과 인권침해 행위 때문입니다.

 

10) 인도네시아는 호주 정치지도자 죤 하워드에게 망명을 원하는 서부파푸아 출신자들을 인도네시아로 송환하는 것과 인도네시아와 파푸아의 합병이 온당한 것으로 지원하도록 설득했습니다. 호주총리는 그들을 일본군 침략자들로부터 막아준 민족들에게 등을 돌린 것입니다.

 

입장이 틀린 만큼 관점도 다르기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주장도 섞여 있지만 서부파푸아가 인도네시아에 합병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을 벌인 네덜란드군이나 인도네시아군보다도 파푸아주민 수십만명이 학살 수준으로 죽어나갔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오늘날까지도 파푸아 분리주의 움직임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잔혹한 인권말살 행위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 대목에서 남방개발 KODECO의 최계월 회장도 등장합니다. 2015 11 27일 일본 토쿄에서 향년 96세로 타계한 최계월은 뜨리꼬라 작전이 한창이던 당시 서부파푸아의 민족대표라고 자칭하며 일본에 온 부족장 3명을, 그들로 인해 벌어진 일본과 인도네시아간의 외교분쟁장에도 불구하고 교외로 빼돌려 장기간 보호했고 그 후 자카르타에서 수까르노와 만난 그들이 서부파푸아의 인도네시아 편입의사를 천명함에 따라, 일정한 영향을 끼친 공로로 최계월은 인도네시아에 초청받아 수까르노 대통령으로부터 깔리만탄(보르네오)의 벌목사업권을 불하받고 박정희 5.16정권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KODECO라는 대기업을 일궜습니다.



그의 청년기에 대해선 와세다 법학과 졸업, 일본군 소위출신으로 오사카 방공부대 근무, 야쿠자 경력, 일본 정계 인맥 등 특이한 이력들이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2015 11 28일자 그의 부고기사를 쓴 조선닷컴 김동휘 기자가 수카르노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됐을 당시, 학병으로 인도네시아에 끌려간 고인이 교도소 간수로 근무해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며 국내최대신문 사이트에 소설을 갈겨 쓸 정도로 왜곡된 부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수까르노는 일본에 부역했으니 일제강점기 당시 투옥될 이유가 없었고 최계월은 1962년 이전엔 인도네시아에 가 본 적도 없었습니다.

 

예전 TV 드라마 3공화국에서도 오일쇼크로 에너지위기를 맞은 한국에 인도네시아산 원유를 실은 유조선을 들여온 난세의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했던 최계월은 이 파푸아 부족장들과 관련된 공로로 다이아몬드 광산을 불하해 주려 한 것을 거절했다거나 수까르노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지도를 펴 놓고 어딜 떼어 줄까 물어봤다는 전설 같은 얘기들도 전해지는데 당시 새파란 청년이었던 그가 부족장들에게 어떤 조언과 설득으로 영향을 줄만한 경륜이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1963년 사실상 인도네시아에 합병되는 서부파푸아의 운명에 최계월 회장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당시 침공작전의 잇단 실패로 사기가 떨어지고, 네덜란드의 압제에서 막 해방된 신생 독립국에서 어느덧 그럴싸하게 포장된 명분으로 군사력을 앞세워 소수의 원시부족들이 사는 드넓은 영토를 짓쳐 들어가 학살마저 개의지 않는 침략자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고 있던 수까르노에겐 이억만리 타국에서 친인도네시아 성향의 파푸아 부족장들을 줄곧 보호해 준 거구의 한국청년이 고마운 사람이었을 것임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수까르노와 서부파푸아(이리얀자야) 합병의 단면이 최계월 회장의 그런 에피소드를 통해 부각되면서 수까르노나 최계월의 시각에서만 서부파푸아 문제를 바라보게 된 측면도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정작 서부파푸아인들의 입장은 도외시 하고서 말입니다. 화려한 장식을 한 나체 위에 꼬떼까(Koteka) 한 개만 장착한 채 창과 화살을 들고 들판을 달리던 파푸아의 원시 전사들에게는 인도네시아에 합병된 지난 60여년의 세월이 한일합방이란 미명하에 일본에게 강점되었던 조선의 36년 세월 이상의 혹독하고 쓰라린 시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2016. 3. 19.

 

참고 :

1) 내스티 발리 (www.nasty-bali.org)

2) 그린레프트 (www.greenleft.org.au)

3) 위키백과

4) 조선닷컴

5) 한인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