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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엘리트들의 반란 : PRRI-뻐르메스타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17)
PRRI-뻐르메스타 반란
1956년 12월부터 1957년 1월까지 수마트라의 북부, 중앙, 남부의 해당 지역군 사령부들은 지방정부의 행정권을 인수해 자카르타의 명령을 받지 않고 군위원회가 해당지역들을 운영할 것임을 천명했습니다. 비슷한 시도가 1957년 3월 북부 술라웨시에서도 잇달아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정부내 공산주의 영향력 일소와 중앙정부 세수의 공평분배, 그리고 수까르노-하타 정-부통령 시스템의 원상복구를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공화국 통일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수까르노는 1957년 3월 14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 쥬안다 까르타위자야(Djuanda Kartawidjaja)를 총리에 임명하는 한편 확고한 친정부 성향의 나수티온장군에게 군권을 맡겼습니다. 나수티온은 서구민주주의가 인도네시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수까르노의 견해에 점차 동조하던 차였고 국가기강을 세우는 데에 군이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수까르노는 유화책도 함께 펼쳐 반란조짐의 지역들을 포함한 각 지역위원회의 지도자들을 1957년 9월 10일에서 14일까지 5일간 자카르타에서 열린 국가연석회의(Musjawarah Nasional)에 초청했으나 이 회합은 당면한 위기에 종지부를 찍지 못했습니다.
국가연석회의의 실패를 맛본 수까르노와 육군사령관 나수티온 장군은 반란지역사령관들에 대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보고 해당 지역에서 아직도 자카르타 정부에 충성을 바치는 장교들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나수티온은 그들을 움직여 ‘지역 쿠데타’를 일으켜 북부 수마트라 사령관 말루딘 심볼론 대령(Colonel Maludin Sumbolon)과 남부 수마트라 사령관 발리안 대령(Colonel Barlian)을 1957년 12월에 축출했고 그제서야 비로서 메단과 빨렘방 등 수마트라의 주요 도시들을 중앙정부가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건재한 중부 수마트라의 지역사령관 아흐맛 후세인 대령(Colonel Ahmad Hussein)과 북부 술라웨시의 펜쩨 수무알(Ventje Sumual) 중령은 PRRI 정부수립과 뻬르메스타 운동을 각각 선언하며 자카르타 중앙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합니다. 오늘의 본론은 대략 이 부분에서 시작합니다.
1956년 12월 20일 빠당에서 조직된 황소위원회(Dewan Banteng)는 사실상 PRRI의 전신입니다. 이 조직은 자바섬에 비해 손색없는 수준의 높은 지역발전을 추구했습니다. 이 위원회를 조직한 것은 이스마일 릉아 대령(Kolonel Ismail Lengah)이었지만 그 의장직은 아흐맛 후세인이 맡았습니다. ‘황소’ 란 명칭이 붙여진 것은 이 위원회가 두 차례에 걸친 제9사단 황소부대 전,현직 장교들의 회합을 통해 조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립전쟁 당시 만들어졌다가 중앙정부에 의해 해체된 이 부대는 숨버르(Sumber), 리아우(Riau), 라아우제도, 잠비(Jambi)등을 포괄하는 중부 수마트라 지역을 관할했고 특히 제9사단 제6연대는 수마트라 전역을 통틀어 최고의 정예부대였습니다.
그들의 첫 회합은 1956년 9월 21일 자카르타에서, 두번째 회합은 11월 20에서 24일까지 빠당에서 전현직 장교 61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그 결과 1956년 12월 20일 자존감 높은 지역발전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가진 황소부대 출신자들과 현역장교들을 중심으로 황소위원회가 결성된 것입니다. 주민복지와 지역발전 외에도 이 위원회는 중앙정부에 불만을 표출하는 창구이기도 했습니다. 사단급이었던 황소부대가 황소여단으로 축소된 후 다시 제4 보병연대로 축소되었다가 결국 메단 소재 제1지역군 뿌낏바리산(Bukit Barisan) 사령부에 흡수되어 버린 것에 대해 빠당출신 장교들의 불만이 드높았습니다. 더욱이 아흐맛 후세인의 직위 역시 제1지역군 제4연대장이었는데 지역사령관이나 사단장급이었던 다른 중령, 대령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직급이었습니다.
황소위원회는 황소사단 전, 현직 간부들뿐 아니라 공산당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정당, 종교지도자, 지식인, 청년조직, 원주민들을 포함한 중부 수마트라 각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황소위원회와 더불어 살든가 죽든가”라는 구호까지 제창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공화국 정부를 존중했고 소속감도 가지고 있었으나 중앙정부의 까칠한 반응이 오히려 이들을 점점 더 구석으로 밀어붙이는 형국이었습니다.
황소위원회의 요구는
- 보다 포괄적인 지방분권제로 각 지역의 자치권을 증대하고 중앙과 지방간에 예산분배에 합리와 형평을 기할 것.
- 부패와 관료주의의 온상이며 지역발전을 방해하는 중앙집권체제를 폐지할 것.
- 중부 수마트라 제9사단 황소부대를 부활시켜 육군 직속 일개 군단으로 둘 것.
등이었습니다.
이후 아흐맛 후세인은 황소위원회 의장으로서 루스란 물요하르요(Ruslan Mulyoharjo) 주지사를 밀어내고 자신이 주지사의 권한을 발동했습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이를 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들의 요구대로 중부 수마트라 지역군사령부(KMDST)를 조직해 제1지역군 부낏바리산 부대로부터 독립시키고 아흐맛 후세인 대령을 KMDST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중앙정부는 황소위원회의 요구 사항 중 일부를 들어 준 것입니다.
황소위원회가 조직된 지 이틀 후인 1956년 12월 22일, 제1지역군 부낏바리산 부대 사령관 말루딘 심볼론 대령은 메단에 코끼리위원회(Dewan Gajah)의 발족을 선언하면서 조금 더 나아가 쥬안다 총리의 정권으로부터의 분리와 관할지역의 전쟁위험상태(SOB)를 선포했습니다 중앙정부는 이번엔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즉시 강경대응에 나선 육군사령관 나수티온 장군은 실볼론 대령을 해임하고 쟈민 긴띵(Djamin Ginting) 중령을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남부 수마트라의 발리안 중령은 가루다위원회(Dewan Garuda)를 조직하고 술라웨시의 벤쩨 수무알 중령은 부엉이위원회(Dewan Mangumi)를 조직하는 등 반란조짐이 뒤를 이으며 중앙정부는 이들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수티온이 지역쿠데타를 유도해 심볼론과 발리안을 축출했던 것입니다.
황소위원회의 요구사항 일부를 들어준 중앙정부는 지방자치, 지방분권주의체제, 중앙과 지방의 공정한 예산분배, 쥬안다 총리의 퇴진, 출신배경을 배제한 직능중심의 내각구성, 대통령의 헌법준수 같은 사안들에 대해선 전혀 양보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발한 황소위원회는 중부 수마트라의 지방세수입을 더 이상 중앙정부로 보내지 않고 자체적으로 지방발전용도의 비용으로 집행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황소위원회는 중부 수마트라의 생산품들을 이용해 외국과 바터무역을 시작했고 그 소득 역시 지방발전을 위해 지출되었는데 그렇게 한지 불과 수개월만에 괄목할 만한 변화와 발전이 일어나 중부 수마트라는 당시 인도네시아 전체에서 가장 빠른 발전상을 보였습니다. 중부 수마트라는 그 선례를 따르려는 다른 지역들에게는 모범사례가 되었지만 중앙정부와의 관계는 첨예한 갈등양상으로 치달렸습니다.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끝난 후 혼란한 정치상황 속에서 진행되고 있던 국가재건에 대한 체감정도와 우선순위는 중앙정부와 지방, 특히 자바섬을 벗어난 지역 사이에서 큰 차이를 보였고 전국적 발전계획이나 예산배정에 형평성이 부족했던 수까르노의 중앙정부는 외곽지방들의 이러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막을 올리는 PRRI 사건은 곧이어 거의 동시에 벌어지는 뻐르메스타 사건과 함께 국제정치상황이나 미국을 비롯한 외세와 복잡미묘하게 관계가 얽혀 있었습니다. 케예스 비치(Keyes Beech)기자는 “미국만 아니었다면 없었을” (Not without the Americans)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1957년 미국이 빠당(Padang)으로 무기를 공급하던 상황을 그렸습니다. 한 미국상선이 중장비와 건설자재를 싣고 빠당을 향해 항해에 나서는데 배가 빠당항에 닿자마자 메니페스트 상 태국군에게 공급할 것으로 되어 있던 일단의 무기들을 아흐맛 후세인 대령의 명령으로 모조리 압수당하고 맙니다. 이것이 당시 미국이 PRRI 반군들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뻐르메스타의 수무알 대령은 마닐라까지 가서 반란지역으로 무기를 들여오려고도 했습니다.
미국이 반군과 손잡은 것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가는 냉전체제 속에서 수까르노의 인도네시아 중앙정부가 점점 공산주의자들에게 기우는
것을 우려한 미국이 분명한 반공노선을 보인 PRRI-뻐르메스타 반군에게 은밀히 보험을 들어놓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미외무장관이었던 죤 포스터 둘스는 1957년 앨리슨 주인도네시아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명료한 지시를 내린 바 있었습니다.
“수까르노가 공산당과 엮이게 놔두지 마시오. 그가 네덜란드에게 무력을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마시오. 극단주의자들의 등을 밀어주지도 마시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석유자원이 풍부한 수마트라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시오.”
이러한 혼란상황에도 불구하고 수까르노가 1958년 1월 출국하여 6주간의 해외순방길에 나선 사이 1958년 2월 10일 중부 수마트라의 빠당에서 아흐맛 후세인 대령이 중앙정부에게 최후통첩을 내놓습니다. 그 최후통첩은 “국가보전을 위한 투쟁헌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고 쥬안다 총리의 내각퇴진, 수까르노가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역할로의 회귀, 공산당 배재를 전제조건으로 한 하타와 스리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 중심의 직능내각 구성과 이때 출신, 배경에 관계없이 역할과 능력을 중심으로 한 각료선발 등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쥬안다 총리는 반란세력의 이러한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수까르노는 아직 외유중이었습니다. 나수티온은 아흐맛 후세인, 심볼론, 잠벅 등을 군에서 제명하고 ‘대통령 시해시도와 무력에 의한 국가와 정부전복’ 이라는 뜬금없는 혐의로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1957년 11월 30일 중부 자카르타 찌끼니 지역의 한 학교를 방문하던 수카르노에게 수류탄이 투척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암살를 시도한 자들은 다룰이슬람 반군 멤버들이었고 여섯명의 학생들이 이 테러로 목숨을 잃었지만 수까르노는 생채기 하나 없이 무사했습니다. 격노한 수까르노는 다룰이스람의 즉각집압을 촉구했는데 나수티온은 의도적으로 방향을 살짝 틀어 이 사건에 PRRI 반란군을 연루시켰던 것입니다.
최후통첩 기한이 지나자 1958년 2월 15일 빠당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 혁명정부(Pemerintahan Revolusioner Republik Indonesia-PRRI)의 수립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자 북부 술라웨시와 중부 술라웨시는 이틀 후인 2월 17일 PRRI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군이 장악한 외곽지역들이 현 정권에게 연이어 반기를 든 것입니다. PRRI는 과거 독립전쟁 당시 부낏띵기에서 공화국 긴급정부(PDRI)의 수반을 지냈던 샤리푸딘 쁘라위라느가라(Sjarifuddin Prawiranegara)를 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추대했고 말루딘 심볼론 대령을 외무장관에, 미나하사 지역출신의 야심만만한 .J.F.와로우(J.F. Warouw)를 건설부장관에 포진시키는 등 중량감 있는 인사들을 영입해 제법 짜임새 있는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하타는 빠당에 반란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실망했고 여기에 수미트로 죠요하디꾸수모, 부르하누딘 하라합, 샤리푸딘 쁘라위라느가라, 심볼론, 까윌라랑 같은 저명한 인사들이 그쪽으로 전향해 반란지역의 사기를 붇돋으며 중앙정부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상심했습니다.
한편 미국을 포함한 외국으로부터 쇄도한 무기공급제안은 반란정부의 사기를 더욱 고무했습니다. 그들은 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준다면 굳이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정부군을 물러서게 할 수 있으리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정부군 측의 나수티온과 야니는 녹록치 않은 인물들이었습니다. 반란은 반드시 진압되어야 한다는 원칙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황소위원회가 중앙정부에 도발해 올 당시만 해도 대체로 파병을 주저했던 나수티온은 PRRI 수립이 발표되며 명백한 반란으로 발전하자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외국이 간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진압군의 주력을 이룬 디포네고로 사단, 브라위자야 사단 및 공군에게 반란분쇄의 사명감을 더욱 드높였습니다.
나수티온은 1955년 자신을 육군사령관(KSAD)으로 복귀시킨 부르하누딘 하라합 전총리가 이제 PRRI 반란군 쪽에 서있다는 것이 내심 부담으로 작용했고 그래서 수까르노에게 더욱 충성심을 내보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육군부사령관 쥴키플리 루비스 대령을 비롯해 몇몇 요직의 육군장교들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사실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1957년 10월 3일 반란군의 수무알 대령, 바리안 중령, 아흐맛 후세인 중령 등이 서명한 ‘기본적, 교도적 지방투쟁의 합동 프로그램’은 육군사령관인 자신의 교체와 공화국의 새로운 대통령 선출을 위한 선거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나수티온은 자신의 부사령관 쥴키플리 루비스가 과연 어느 편에 서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루비스가 새로운 내각과 신규 군사령관들을 선발하는데 매우 적극적인 것도 거슬렸습니다. 나수티온은 제7지역군 사령관 가똣 수브로또 대령이 오래 전 1952년 10월 17일 사태 당시 자신의 참모장 와로우 중령에게 체포되었던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수티온 역시 그 사건으로 한번 군복을 벗었던 바 있었습니다. 그는 지난 1957년 11월 30일 찌끼니에서의 벌어진 수까르노 대통령에 대한 수류탄 암살시도에도 쥴키플리 루비스가 연루되었을 것이라 믿었는데 북부 수마트라의 아쩨 출신인 그가 PRRI에 대해 내심 동조하는 입장이라면 가똣 수브로토를 체포한 와로우처럼 자칫 루비스도 어느 순간 자신을 체포하려 들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지근거리의 잠재적 적들로부터 자신과 정부를 방어하는 최선의 방법은 거대한 적이 등장해 좋든싫든 내부역량을 결집하는 것이었습니다. PRRI와의 몇차례 협상에서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자 중앙정부는 대규모 병력을 보내 반란지역들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으려 했고 나수티온은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수티온은 아흐맛 야니(Achmad Yani)을 ‘8월 17일 작전’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대대적인 침공을 준비시켰습니다. 이 작전은 인도네시아군 합동작전 중 가장 큰 규모로 기록되는데 전함 6척과 수송선 19척이 동원되어 6,500명의 병력을 수마트라로 실어 날랐고 그중엔 디포네고로 사단과 브라위자야 사단의 보병부대들은 물론 해군소속 해병대 1개 대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온갖 반란진압작전에 동원되었던 실리왕이 사단은 이번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편에서 독립전쟁을 치러온 수마트라의 동료들에게 차마 총을 겨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대사관 무관이자 야니의 절친이었던 죠지 벤슨은 한 밤 중에 빠당지역의 군사지도를 요청하는 야니의 전화를 받아 지도를 들고 그의 집을 찾아가 야니와 동료장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빠당해방작전을 논의했다고 말합니다. 야니는 의도적으로 육군사령부를 피해 잘란 람방 거리(Jalan Lambang)의 자택에서 즐겨 작전협의를 했는데 이는 육군사령부가 오히려 보안에 더욱 취약해 대부분의 작전명령들이 반란군 측으로 새어나간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니는 PRRI 진압작전계획 역시 어느 정도 누출되어 빠당의 반란군들도 충분한 준비를 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반란군은 죽창형태의 지뢰들을 공중에서 흩뿌렸고 해안과 언덕들은 언제라도 박격포로 포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바유르만(Teluk Bayur)에도 상륙방해를 위한 수중장애물이 설치되었고 해변엔 지뢰가 깔렸습니니다. 더욱이 4천명 규모의 PRRI의 졍규병력 외에도 수천명의 청년군 지원자들이 줄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원 즉시 총기를 지급받아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PRRI의 방어선은 사기가 높았고 일견 매우 견고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1958년 4월 16일 함포사격으로 공격을 시작한 정부군이 4월 17일 육해공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시도하자 PRRI의 방어선은 의외로 쉽게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반란군은 의미있는 저항을 하지 못했으므로 8월17일작전의 사령부참모들까지 모두 그날 점심 경 빠당 시내까지 진입했고 날이 저물기 전 반란군 수도가 함락되었습니다. 반군 잔당들은 부낏띵기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이 작전으로 정부군은 983명의 전사자와 1,695명의 부상자를 낸 반면 반군측의 인명피해는 압도적이어서 6,373명이 전사, 1,201명이 부상했고 6,057명이 투항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RPKAD의 중대를 지휘했던 베니 무르다니(Benny Moerdani)는 당시 아흐맛 야니 대령이 훌륭한 수완을 발휘해 현지 주민들의 마음을 얻던 장면들을 증언했습니다. 야니는 PRRI 병사들이 떠빙(Tebing)비행장에서 투항해 나오자 그들을 체포하지 않고 전향자로 받아들여 정부군과 나란히 공항경비를 세워 대인배 인증을 했고 빠당에 머무는 동안 암살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그곳 주민들과 어울려 현지 회교사원의 금요일 숄랏줌앗 기도회에 충실히 참석했다고 합니다.
쥴키플리 루비스는 PRRI 반란군이 쉽게 패한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반란지역의 지휘관들을 그리 깨끗하지 못했어요. 그들은 부와 권력을 잡으려 했죠. 반면 모범적인 용맹은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바에서 도착한 부대를 앞에서 도망가기 바빴고 어치피 그들이 확보한 군수물자도 충분치 않은 상태였습니다.”
PRRI가 패한 후 서부 수마트라 사람들은 극한의 폭력과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자바에서 온 군대가 그들 삶의 모든 것을 장악했고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청년자경단 OPR이 현지치안에 나서며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OPR은 PRRI에게 저항하기 위해 조직된 시민군의 성격이었습니다. 정부군은 OPR을 도시의 치안과 방어에 동원했고 OPR이 사전에 ‘해방’시킨 지역에 정부군이 진주해 ‘독립’시키는 식으로도 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OPR 소속 6천명 안팍의 병력은 크게 치안과 재건 두 기능으로 나뉘어져 투입되었는데 PRRi의 추종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체포, 취조하는 권한도 주어졌습니다. 뚜깡뚠죽(Tukang tunjuk – 가리키는 사람)이란 별명도 이 과정에서 유래했는데 OPR 대원들은 매우 오만한 태도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내키는대로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누구는 감옥에 쳐넣고 누구는 살해하는 막무가내 방식으로 일처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자바출신인 정부군 군인들에게 수마트라 사람인 OPR 대원들은 고집스럽게도 서툰 인도네시아 표준어를 썼고 그런 어색한 발음과 억양에 장난기마저 다분한 말투로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는 부분이 사뭇 섬뜩합니다.
PRRI 사건 전후로 미낭까바우족은 대규모 이주를 했습니다. ‘반란군’ 출신이라는 낙인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폭력적 상황들이 주민들의 자존심과 가치관, 존엄성을 뒤흔들었고 PRRI가 몰락함에 따른 패배감과 모욕감이 오랫동안 그들을 심리적으로 괴롭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태어난 신생아들 사이에 쁘라잇노, 마르또, 사디꾼 같은 자바식 이름이 유행했던 것도 PRRI 반란지역 출신임을 감추려던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나수티온은 한 발 더 나아가 샤리르, 수바디오, 모하마드 로엠, 쁘라워또, 아낙아궁 그데아궁 같은 이들을 모두 잡아 들이라는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이들이 PRRI-뻐르메스타 반군과 연루되어 수까르노가 1962년 1월 7일 마카사르를 방문할 때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한 실증적 증거도 없는 무모한 혐의였고 스스로 인생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인도네시아 독립달성을 위해 매진했던 수딴 샤리르나 모하마드 로엠 같은 인사들을 테러범으로 몬 것은 나수티온이 자신의 충성심을 지나치게 과시하려 했던 측면이 엿보입니다.
모하맛 낫시르, 샤리푸딘 쁘라위라느가라, 부르하누딘 하라합, 까스만 싱오디메죠, 이사 안샤리, 부야 함까 같은 마슈미당 인사들에 대한 체포령도 뒤따라 떨어졌습니다.
당시 PRRI 측에서는 정부가 설마 강경대응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 사건은 충분한 각오도 없이 저지른 반쪽짜리 혁명인 셈이었습니다. 반란의 형식을 빌어 지방자치체제와 관련한 그들의 요구를 자카르타 정부에게 강요하려 했던 것이 일이 커져버렸던 것입니다. 어쨋든 반란세력의 인사들은 독립전쟁 당시 진압군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네덜란드와 싸웠던 사람들이었으므로 훗날 선처가 이루어졌고 PRRI 주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자신들이 반란행위를 했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태의 주동자인 아흐맛 후세인 대령은 당시의 고위장교들 대부분이 그랬듯 그 역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참전용사이기도 했습니다. 수마트라 빠당에서 1925년 4월 1일 출생한 인물로 1998년 11월 28일 7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반란군의 수괴였지만 당시 군법회의로 처형된 것이 아니라 천수를 누린 것입니다.
한편 북부 술라웨시에서는 D.J. 솜바(D.J. Somba)중령의 스메스타 투쟁헌장 운동(Gerakan Piagam Perjuangan Semesta)이 PRRI의 뒤를 이었습니다. 흔히 뻐르메스타라 부르는 이 사건은 PRRI 반란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부가 술라웨시 등 외곽지역을 차별해 제한된 경제지원으로 발전이 늦어지고 있다는 차별의식에서 기인했습니다. 또한 자바민족에 대한 반감도 한 원인이었습니다. 자바인들에게 집중된 인구비중이 신생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발전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정치적 세력구도 역시 자바인 중심으로 구축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작한 갈등은 점점 고조되어 결과적으로 분리독립에 대한 유혹을 낳던 차에 중부 수마트라에서 터진 PRRI 수립선언에 더욱 고무되었던 것입니다.
1957년 3월 2일 마나도 소재 사리오(Sario)에 있는 뻐르메스타 대학 회의실에서 아침 7시에 열린 회의에는 정치가, 학자들은 물론 일반시민들도 참석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윔 나요안(Wim Najoan)대위는 중부 수마트라에서 PRRI가 수립될 수 밖에 없었던 중앙과 지방의 발전상 차이를 설명한 후 “술라웨시 중부와 북부의 뻐르메스타 투쟁운동은 PRRI의 입장에 백프로 동의하며 온전한 지지를 보낸다. 또한 이로서 지금 이 순간부터 뻐르메스타 역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한다”며 말을 맺었습니다.
그러자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기립해 환호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PRRI 만세! 뻐르메스타 만세! 솜바(Somba)만세!” D.J.솜바 대령은 중북부 술라웨시 지역군사령관으로 이날 이 회의를 주재한 인물이었습니다 회의는 30분간 휴회했고 그동안 에디 가골라 소령, 윔 나요안 대위 등 장교들이 선언문 문구를 다듬었습니다. 회의가 재개되자 참석자들 앞에 나선 펜쩨 수무알 중령이 중앙정부와의 관계단절선언을 포함한 뻐르메스타 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그런 후 돌프 룬뚜람비 소령(Mayor Dolf Runturambi)이 이 선언에 동의하느냐 외치며 군중심리를 유도하자 참석자들은 크게 환호하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중앙정부는 펜쩨 수무알 중령과 솜바 대령, 그리고 그의 동료장교들을 즉시 공화국 육군으로부터 불명예제대 처리했습니다. 현지 일반인들의 반응은 사뭇 이중적이었습니다. 뻐르메스타가 중앙정부와의 관계단절을 선언하자 뻐르메스타 부대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줄을 늘어선 마나도의 학생, 청년들과 전 KNIL부대 출신자들은 바로 마빵엇(Mapanget) 훈련장에서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한 반면 대다수의 주민들은 진압군이 공격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불안해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개입은 이 시점에서도 이미 뚜렷이 엿보였는데 미국은 군사고문을 파견하고 탄약과 고사포를 비롯해 혁명군(Angkatan Perang Revolusioner - AUREV)에게 필요한 전쟁물자를 대량으로 제공했습니다. 공산당 활동을 정지시키고 공산당 냄새를 조금이라도 풍기는 활동은 무조건 불허한 뻐르메스타의 행보가 미국으로 하여금 그들을 냉전동지로 여기게 했던 것입니다. 미국은 DC-3 다코타 수송기, P-51 머스탱 전투기, 비치크래프트, 통합 PBY 카탈리나 수상이착륙기, B-26 인베이더 전폭기 등도 공급했습니다. 뻐르메스타는 이에 힘입어 혁명경찰, 뻐르메스타 여군부대, 뻐르메스타 야드 정보부대 등도 창설했습니다.
뻐르메스타는 미국뿐 아니라 대만, 한국, 필리핀, 일본 등 친서방 아시아 국가들의 지원도 받았습니다. 이러한 원조를 토대로 뻐르메스타는 중북부 술라웨시에 강력한 군사력을 형성했고 이들 중엔 학생자원병들로 구성된 여러 개의 뻐르메스타 청년특수부대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전운이 짙어지자 마나도에서 시외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한편 뻐르메스타 지지세력도 더욱 커졌습니다. 주미 대사관 무관으로 나가 있던 알렉산더 에버트 까윌라랑 대령이 돌아와 정부군 준장으로서 전역한 후 북부 술라웨시의 고향에서 뻐르메스타에 가담하자 뻐르메스타의 사기는 극에 달했습니다. 남말루꾸공화국 반란진압작전의 영웅이었던 까윌라랑은 소장 계급을 받아 PRRI-뻐르메스타의 군사령관 겸 혁명군(APREV) 참모장이 되었고 곧이어 총사령관 자리에 오릅니다. 중앙정부에서 출세가도를 달렸을 까윌라랑의 정의감과 공명심은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PRRI와 뻐르메스타 편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대만 장개석 총통은 해병 1개연대와 전투기 1개 편대를 보내 모로타이 전투에서 뻐르메스타군을 도우려 했으나 당시 대만 외무장관은 중국이 자카르타의 중앙정부를 도울 경우 양안관계의 악화를 우려해 무산시킨 바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은 군수물자와 2개 편대규모의 전투기들을 미나하사의 반군들에게 보냈고 1958년 8월 대만의 개입을 알아차린 자카르타 중앙정부는 대만계 화교들의 국내사업을 국유화하고 서신교환을 통제하고 대만학교도 폐쇄해 버렸습니다.
중앙정부는 나수티온에게 뻐르메스타 반군진압을 명령했습니다. 이 작전은 삽따마르가 1호 작전(Operasi Saptamarga I)이라 명명되었고 수마르소노 중령이 지휘봉을 잡아 1958년 3월 중북부 술라웨시의 거점들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빨루(Palu)와 동갈라(Donggala)는 프란스 까랑안 대위가 이끄는 기동여단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한편 1958년 3월말 뻐르메스타는 얀 띰불렝(Jan Timbuleng)이 이끄는 PPK 부대(정의수호군)의 도움을 받았고 얀 띰불렝의 전처인 다안 까라모이(Daan Karamoy)와 렌 까라모이가 이끄는 300명 규모의 또 다른 반군들을 규합했습니다. 다안과 렌은 뻐르메스타 여성청년대(PWP)의 군사훈련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카르타 작전 2호라는 이름으로 자카르타를 공격할 계획도 세웁니다. 그 내용이란 우선 정부군이 점령한 빨루/동갈라를 탈환한 후 깔리만탄의 발릭빠빤, 발리, 다시 깔리만탄의 뽄띠아낙의 순으로 점령한 다음 그 기세로 자카르타까지 공격해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의 목적은 중앙정부를 압박해 PRRI-뻐르메스타와의 회담에 나서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958년 4월 13일 혁명군 소속 항공기들은 만다이, 마카사르, 떠르나떼, 발릭빠빤, 동갈라 등의 비행장 등 전술목표들을 폭격했는데 발릭빠빤 인근 섬 사이에서 정부군 전함 항뚜아호를 침몰시키는 전과도 올렸습니다. 한편 정부군은 5월 18일 할마헤라 북방 모로타이섬의 비행장을 점령하려는 메나 2호 작전(Operasi Mena II)을 KKO 훈홀츠 중령(Letkol. KKO Huhnholz)의 지위 하에 진행했습니다.
1958년 5월 18일 정부군의 수도모(Soedomo) 제독은 P-51 머스탱 전투기와 B-26 전폭기의 공중엄호를 받으며 육군과 해병대의 급속대응군을 싣고 암본 해안에서 떨어진 띠아가섬(Pulau Tiaga)으로 항진해 갔는데 미국인 알렌 로렌스 포프(Allen Lawrens Pope)가 조종하는 B-26 인베이더 전폭기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는 마나도의 마빵엇에서 이륙해 암본을 공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부군 선단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위기를 느낀 배안의 모든 병력은 대공포와 기관총은 물론 소총과 권총까지 동원해 대응사격에 나섰습니다.
이때 정부군 공군의 이그나띠우스 데완또(Ignatius Dewanto)가 이 상황을 무전으로 듣고 정부군 해군을 돕기 위해 P-51 머스탱를 이륙시켜 수색하다가 정부군 선단이 혁명군 B-26기에 공격받는 것을 발견하고 기체에 장착된 12.7mm 구경 기관포 6정과 로켓을 동원해 공격했습니다. B-26이 화염에 휩싸이자 두 개의 낙하산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들은 앤런 포프와 해리 란뚱(Harry Rantung)이었는데 하나는 나무에 걸리고 다른 하나는 산호초에 부딪혔습니다. 앨런 포프는 미국 CIA의 조종사로 뻐르메스타군을 돕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정부군 공군은 PRRI 반란군 진압을 위해 수마트라에 집결해 있었으므로 중북부 술라웨시와 동인도네시아 지역에서는 뻐르메스타 반군이 대체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이 사건으로 미군개입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정부군에게 제공권이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정부군은 해당 지역의 뻐르메스타 반군을 좀 더 쉽게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술라웨시 주지사 안디 빵어랑(Andi Pangerang)은 모든 뻐르메스타 활동의 중지와 뻐르메스타에 대한 미국의 원조철회를 촉구했습니다. 앨런포프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자카르타 정부를 기만하면서 뻐르메스타를 도왔다는 사실이 발각되자 치부를 들킨 미국은 이 사실을 철저히 부인했습니다. 죤 포스터 둘스(john Poster Dulles)는 “수마트라에서 발생한 사건은 인도네시아 국내사건일 뿐입니다. 미국은 타국의 내정에 절대 간여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수마트라와 술라웨시에서 미군 무기들이 발견된 사건에 대해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이 발견한 무기들은 세계 암시장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게다가 분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용병들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앨런포프를 조사하면서 그가 필리핀에 미군물자를 들여보내며 받은 확인서와 장교클럽 출입증 같은 것들이 발견되면서 미국의 개입사실은 더욱 명백해졌습니다.
1957년 내내 수까르노 정권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 CIA는 1958년 1월부터 비밀리에 PRRI와 뻐르메스타에 대한 지원에 나서 B-26 전폭기와 P-51 머스탱 전투기 총 15대를 공급해 반란군이 마나도 비행장에 본부를 둔 ‘혁명공군’을 창설케 했고 무기와 장비, 자금 뿐 아니라 대만, 필리핀, 미국으로부터 용병들도 조달했습니다. CIA의 지원에 고무된 반란군은 정부군 점령지인 발릭빠빤, 마카사르, 암본 등에 맹렬한 공습을 퍼부었는데 반란군 항공기들은 대부분 CIA의 조종사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958년 5월 15일 예수승천일 일요일을 맞아 암본시장을 폭격해 많은 민간인 인명피해를 발생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암본해상에서 격추된 반란군의 B-26 전폭기를 조종한 앨런포프를 체포하면서 미국이 PRRI-뻐르메스타 반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 일로 미국은 불쌍할 정도로 체면을 구겼고 CIA의 활동내용에 대해 쏟아져 나온 비판여론은 미국을 더욱 구석으로 몰아세웠습니다. 격분해 펄펄 뛰던 수까르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미국은 군사원조를 제안하고 루피아 무역결제를 허용하는 등 인도네시아에 유리한 제반 조건들을 내밀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득이 PRRI와 뻐르메스타에 대한 모든 군사원조를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이로 인해 PRRI와 뻐르메스타는 그 위력의 상당부분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정부군과 뻐르메스타의 전쟁은 더욱 격렬해져 몇몇 전략적 지역에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정부군은 P-51 머스탱전투기로 마빵엇 비행장을 공격해 상당수 대공포들을 파괴했지만 뻐르메스타 측의 반격도 만만찮아 정부군은 세 대의 항공기만 격추당한 채 공격의 결실은 맺지 못했습니다. 뻐르메스타의 방어는 매우 견고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과거 KNIL 부대출신들로 나이는 많았지만 충분한 전투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959년 2월 17일 뻐르메스타군은 ‘자카르타 스페셜 1호’이라는 작전명으로 전 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쳤습니다. 뻐르메스타군은 몇몇 전술목표를 몇 시간 가량 점령하는 성과를 보였으나 정부군의 육군과 공군이 반격하여 곧 탈환하면서 전체적인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정부군의 계속된 반격으로 그동안 뻐르메스타군의 가장 강력한 거점이었던 몇몇 전략적 요충지들마저 정부군에게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앨런포프 사건으로 반란군의 혁명공군을 무력화시킨 정부군은 ‘독립작전’이란 작전명의 육해공 합동작전으로 반란군 수도인 마나도 침공을 시도했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은 반란군을 단시간에 마나도에서 몰아냈고 반란군은 똔다노 호수 인근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방어작전에 나섰습니다.
첨차 궁지에 몰려가던 뻐르메스타 측은 1960년 중앙정부와의 대화의사를 밝혔습니다. 뻐르메스타 측은 군사령관 알렉스 에버트 까윌라랑 소장이 나섰고 중앙정부에서는 육군참모장 니콜라스 본단이 나왔습니다. 이 회합을 통해 뻐르메스타군은 TNI 정부군을 도와 자바섬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겠다는 중재안을 내밀며 합의를 시도했습니다. 1961년 중앙정부는 대통령령 322호(Keppres 322/1961)를 통해 투항하는 PRRI와 뻐르메스타 연루자 모두를 무조건 사면, 복권키로 했는데 이는 PRRI와 뻐르메스타 반군들뿐 아니라 서부자바와 아쩨, 중부자바, 남부 깔리만탄, 남부 술라웨시에서 아직 게릴라로 활동 중이던 다룰이슬람 반군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법령이 발표됨에 따라 많은 뻐르메스타군이 즉시 투항했고 D.J. 솜바 대령, 까윌라랑 소장, 돌프 룬뚜람비 대령, 쁘띳 무하르또 까르또디르죠 대령(Kolonel Petit Muharto Kartodirdjo), 벤쩨 수무알 대령 등 수뇌부는 최후의 무리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숲에서 나왔습니다. 사면과 복권은 그들에게도 적용되었고 이로서 뻐르메스타는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뻐르메스타 반란의 주동자들 대부분이 중앙정부에 충성을 약속하고 사면, 복권되었지만 욥 와로우만은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야콥 프레드릭 와로우(Jacob Frederick Warouw)라는 본명의 욥 와로우(Joop Warouw)는 1917년 9월 8일 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KNIL에 입대했다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 이후 수라바야에서 술라웨시 인도네시아공화국 청년민병대(PERISAI)에 가입해 나중엔 PERISAI의 부대장자리까지 오릅니다. 이 그룹은 수라바야에서 술라웨시 인도네시아 민중공동체(KRIS)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는 수라바야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고 1946년부터 라왕(Lawang)의 제6해군사단 참모장, 시뚜본도(Situbondo)의 제10기지 참모장 등 군 주요보직을 섭렵했습니다. 1948년 제16여단 부사령관이 되었다가 필리핀을 통해 미나하사의 마나도 침공을 계획했던 친구 아돌프 렘봉 대령의 뒤를 이어 여단장으로 승진합니다.
1950년 4월 와로우는 B 군사령부로 발령되는데 이 부대는 1952년 제24 보병연대로 재편성됩니다. 제24보병연대는 마나도에 본부를 두고 북부와 중부 술라웨시의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1950년 11월 그는 빠레빠레(Parepare)의 제23 보병연대 지휘관으로 발령받고 1952년 3월엔 동인도네시아 제7지역군 참모장이 됩니다. 자카르타에서 10월 17일 사태가 벌어진 후 와로우는 상관인 가똣 수브로또를 해당사태에 동조한 혐의로 체포하며 중앙정부에게 충성심을 과시했고 그 결과 가똣 수브로또가 맡았던 동인도네시아 제7지역군 사령관 자리에 앉게 됩니다.
와로우는 제7지역군을 벤쩨 수무알 중령에게 인계하고 1956년 베이징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지역자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던 가운데 1958년 2월 와로우는 수무알과 함께 토쿄로 날아가 이미 장기간 외유중이던 수까르노 대통령을 만나 담판을 벌이며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던 위기상황에 대한 조치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 설득에 실패하자 와로우는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무관직을 버리고 곧장 인도네시아로 돌아와 PRRI 반란을 지지했고 1957년 3월 2일 수무알이 선언한 뻐르메스타 운동에도 가담합니다. 그는 수무알, 알렉스 까윌라랑과 함께 뻐르메스타 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명이었고 뻐르메스타 반란군이 PRRI 반란군과 연횡종대하자 와로우는 PRRI의 부총리 겸 건설부장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불과 잠시뿐이었습니다. 중앙정부의 진압군이 1960년 북부 술라웨시를 점령했고 와로우는 그해 4월 그와 대립하던 얀 띰불렝(Jan Timbuleng)의 뻐르메스타군 제999여단 제7대대에게 체포되어 6개월 동안 감금되었다가 1960년 10월 15일 살해당한 것입니다.
뻐르메스타 반란군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킨 셈인 얀 띰블렝은 당시 PRRI의 고관이었던 와로우와 그 일행이 회합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와로우의 무릎을 쏴 체포하고 그의 일행을 몰살시키는 사건을 벌였습니다. 벤쩨 수무알 대령이 와로우를 구출하기 위해 얀 띰블렝과 그의 부대를 10월 8일 한 회합에 불러내지만 이를 안 얀 띰블렝은 저항하다가 사살당했고 그 자리에서 살아서 빠져나간 얀 띰블렝의 부하들은 수무알 대령의 병력이 미치기 전에 그동안 감금되어 있던 와로우를 끌어내 살해했던 것입니다. 얀 띰블렝은 금강불괴 신체술인 일무끄발(Ilmu Kebal) 주술이 걸린 반지부적을 사용해 소총 사격으로도 그를 죽일 수 없었으므로 그를 죽일 때 특별한 방법이 동원되었다고 하며 그가 잔혹한 성품을 지니게 된 것 역시 그가 오랜 기간 사용한 주술의 부작용이었다는 야사도 전해집니다.
뻐르메스타 반란의 핵심인물 대부분이 천수를 누린 반면 와로우는 같은 편에게 그렇게 처참한 최후를 맞아 1960년 10월 15일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와로우의 시신은 1992년이 되어서야 똠바뚜(Tombatu)인근에서 발견되어 고향 렘보껜(Remboken)에 안치되었습니다.
2016. 3. 2.
참고
1) 위키백과
2) 이만브로또세노의 블로그(http://blog.imanbrotoseno.com)
3) 콜렉터스자라 워드프레스(https://kolektorsejarah.wordpress.com/)
4) 오케존 뉴스 (http://news.okezo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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