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다룰이슬람 반군의 성쇄와 대통령궁 공습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18)
다룰이슬람, 그리고 또 다른 갈등의 시작
PRRI-뻐르메스타 반군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1957년 12월 수까르노는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구체적인 행보를 시작했습니다. 그 달에 그는 인도네시아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246개의 네덜란드 회사들을 국유화 했는데 그 중엔 NHM과 로열더치쉘(Royal Dutch Shell) 자회사인 바따프쉬 페트롤륨 마앗샤피즈(Bataafsche Petroleum Maatschappij)와 에스콤토뱅크(Escomptobank) 등과 네덜란드의 당시 5대 무역회사 (NV Borneo Sumatra Maatschappij/Borsumij, NV Internationale Crediet-en Handelsvereeneging "Rotterdam"/Internatio, NV Jacobson van den Berg & Co, NV Lindeteves-Stokvis, 및 NV Geo Wehry & Co)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과정에서 4만여명의 네덜란드인들이 추방되었습니다. 1949년 원탁회의에서 네덜란드 정부가 약속한 네덜란드령 뉴니기의 미래에 대한 협상이 지지부진하던 것을 수까르노가 빌미로 삼았던 것입니다.
수까르노의 민족주의적 경제정책은 1959년 대통령령 10호의 발표와 함께 더욱 가시화되었습니다. 이 대통령령은 농촌지역에서 외국인들의 상업활동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그 외국인들이란 대체로 화교들을 지목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화교들은 대부분 인도네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상태로 농촌지역과 도시에서의 소매경제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정책으로 인해 농촌지역에 살던 화교들이 대거 도시로 이동하게 되었고 약 10만명 정도는 아예 중국으로 돌아가 버리기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관련정책을 손바닥 뒤집듯하여 외국인 거류자들의 운명을 하루 아침에 뒤바꿔 버리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이 당시에도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 기업들에 대한 국유화 조치는 국민들의 큰 환영을 받아 수까르노의 입지는 매우 굳건해졌습니다. 이에 탄력을 받아 수까르노는 1945년 헌법을 대통령령으로 다시 발효시켰습니다. 이로서 교도민주주의 원칙을 적용하는 데에 훨씬 용이한 대통령 중심제가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이 발표선언을 마니폴(Manipol - Manifesto Politik)이라 하는데 1959년 7월 5일 자 수까르노 대통령이 대통령령을 1959년 8월 17일 발표할 때 ‘혁명의 재발견’이란 제목의 국정연설을 하면서 그해 9월부터 발효될 국가방침들의 큰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수까르노는 USDEK 원칙에 따른 인도네시아식 사회주의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이 방침은 1967년이 되어서야 수하르토의 대통령령에 의해 폐기됩니다.
USDEK이란
1. 1945년 기본헌법 (Undang-Undang Dasar '45)
2. 인도네시아식 사회주의 (Sosialisme Indonesia)
3. 교도민주주의 (Demokrasi Terpimpin)
4. 조정경제 (Ekonomi Terpimpin )
5. 인도네시아의 독자성 (Kepribadian Indonesia)
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수까르노는 1960년 3월 의회를 해산하고 대통령이 의원 절반을 지명하는 새로운 의회체제(고똥로용 국민대표의회 - Dewan Perwakilan Rakjat – Gotong Rojong / DPR-GR)로 전환했습니다. 뒤이어 1960년 9월 그는 1945년 헌법에 입각해 최고입법기관으로서 임시국민자문의회(Madjelis Permusjawaratan Rakjat Sementara/MPRS)라는 것을 설치했습니다. MPRS 의원들은 선거로 선출하는 DPR-GR 의원 전원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직능그룹’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므로 대통령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반영되는 체제가 들어선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나 유정회는 대체로 이와 일맥상통하는 모델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전군사령관 나수티온의 절대적 지지에 탄력을 받은 수까르노는 PRRI-뻬르메스타 사태 연루혐의로 이슬람정당인 마슈미당(Partai Masyumi)과 수딴샤리르의 PSI 당을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군은 사회주의자인 샤리르, 모하마드 낫시르(Mohammad Natsir), 함까(Hamka)같은 이슬람 정치인들을 비롯해 수까르노의 수많은 정적들을 체포했습니다. 또한 계엄령을 선포해 수까르노의 정책을 비난하는 신문들을 폐간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에도 수까르노에 대한 여러 번의 암살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1960년 3월 9일 인도네시아 공군소속 미그17전투기가 통일궁과 보고르궁에 기총을 난사한 사건이었습니다.
단쩨(Daantje)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다니엘 알렉산더 마우까르(Daniel Alexander Maukar)는 인도네시아 공군의 전도유망한 파일럿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기량으로 명성이 높았고 최고의 조종사에게 주어지는 ‘타이거’(Tiger)라는 콜사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쩨가 이집트에서 미그17전투기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것은 정부군과 PRRI-뻐르메스타 반군과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비록 반둥에 살고 있었지만 뻐르메스타 반란의 본거지인 북부 술라웨시 미나하사 지방 출신이었고 미그17전투기 같은 공군전력에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뻐르메스타 반군 포섭대상에 일찌감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형 헤르만 마우까르는 부엉이위원회의 비밀요원이었고 그 우두머리인 샘 까룬뎅(Sam Karundeng)은 부엉이위원회의 반둥 지하조직 우두머리였으므로 뻐르메스타를 위한 반수까르노 세력을 조직하던 그들이 단쩨의 사상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은 의심할 나위 없습니다.
그날 독립궁에선 수까르노 대통령이 몇몇 장관들로부터 일일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흐마디 장관에게 장난을 걸기도 하고 수간디 대령(Kolonel Sugandhi)에겐 다른 일로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후 즐겨 앉던 독립궁 테라스의 나무의자에서 수까르노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단쩨가 조종간을 잡은 미그17전투기가 반둥 라누드 후세인 사스트라느가라(Lanud Hussein Sastranegara) 공군비행장 활주로를 날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미그17전투기가 독립궁 상공에 나타난
것은 불과 몇 분 후의 일이었습니다. 굉음과 함께 하강한 전투기는 기체에 장착된 23mm 기관포로 테라스를 포함한 독립궁 전반에 기총소사를 해댄 후 다음 타겟인 보고르궁으로 쇄도헸습니다. 다행히도 대통령은 그때 이미 장소를 옮겨 독립궁 바로 옆건물인 DPA 건물에서
다른 업무를 보던 중이었습니다. 수까르노는 훗날 신디 아담스를 통해 집필한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앉아 있었던 독립궁 테라스의 의자를 산산조각낸 공습을 미리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알라가 베풀어준
천운’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런 후 단쩨는 북쪽으로 향해 딴중쁘리옥의 저유시설을 공격해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2009년 4월 템포지와의 인터뷰에서 펜쩨 수무알 전 뻐르메스타 반군 지휘관은 단쩨가 딴중쁘리옥의 저유탱크를 파괴한 것이 정부군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의도였다고 밝힌 바 있었습니다. 다니엘 마우까르의 공습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도네시아는 충격에 휩싸였고 공군은 이 사건이 단쩨 마우까르의 소행임이 순식간에 퍼지면서 일대 혼란이 일었습니다. 단쩨는 인도네시아 공군 최고 조종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임무를 마친 단쩨는 모두가 예상한 싱가폴 방향이 아닌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습니다. 연료가 부족했던 것일까요? 미그17기는 반둥에서 4시간 거리의 가룻(Garut) 지역 렐레스(Leles) 평야의 논에 비상착륙 했습니다. 가릇 지역은 당시 다룰이슬람 반군이 발호하는 곳이었으므로 단쩨는 그들의 보호를 받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출동한 실리왕이 사단 예하부대에게 체포되어 자카르타로 이송되었습니다.
독립궁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나수티온 장군은 급히 육군본부 회의실로 직행했고 아흐맛 야니 장군은 사령관들을 불러모아 긴급대응군을 구성해 수도 자카르타의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공군참모총장 수리야다르마 중장(Laksamana Suryadarma)이 사의를 표하나 수까르노는 1960년 3월 11일 그의 사표를 반려했습니다. 1960년 3월 12일자 머르데까지에 따르면 오마르 다니 중령(Letkol Omar Dhani)는 120기의 공군항공단 전체를 대표해 단쩨의 반역행위에 대한 재발방지와 수까르노 정부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몇 주 후 단쩨는 군사재판정에 섰고 뻐르메스타 인물인 샘 까룬뎅이 그를 변호했습니다. 단쩨는 대통령을 살해할 의사는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내 영웅인 대통령을 내가 왜 죽이려 했겠습니까?”
단쩨는 대통령이 거기 있다는 표시인 황금색깃발이 게양되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 기총소사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쩨는 공산주의자들의 꼭둑각시가 되었다고 비난받던 수까르노에 맞서는 뻐르메스타 반군사상에 영향을 받은 정황이 뚜렸했으므로 뻐르메스타 반란군의 지령을 받았을 것이라는 심증이 강했습니다. 단쩨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부의 잘못된 판단을 고쳐주려 한 것이지 국가에 반역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군사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런데 단쩨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그의 배짱과 용모가 많은 여성들의 호감을 샀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리마 멀라띠(Rima Melati)도 그의 구명을 위해 뛰었다고 합니다. 그는 다니엘의 감방까지 여러 번 찾아와 수까르노에게 사과하고 감형을 청원하라고 권했으나 당시 28세였던 단쩨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자기 소신을 고집하며 사과제의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수까르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놈 참 맹랑한 녀석이군. 아직 젊고 미래도 창창하겠지!.”
그는 단쩨에게 내려진 선고된 사형을 8년형으로 감형해 주었고 군복무 기간에 대한 군연금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버전에서는 수리야다르마 공군참모총장이 구명에 나서 사형을 면했다고도 합니다. 실제로 수까르노는 1961년 6월 22일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모든 뻐르메스타 관련자들을 사면했고 1964년 단쩨도 사형에서 8년형으로 감형해 줍니다. 그리고 수까르노가 하야한 후인 1968년 단쩨도 수하르토 정권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건들은 대부분 반전과 음모론을 내포하듯 이 대통령궁 기총소사 사건은 몰리 맘보(Molly Mambo)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연관된 또 다른 버전이 존재합니다. 요가와 영어를 가르치던 몰리에게 흑심을 품게 된 수까르노가 추파를 던지며 유혹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녀는 단쩨의 약혼녀였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있을지도 모를 독립궁과 보고르궁에 갈겨된 기관포탄에 단쩨의 개인적 감정이 묻어있을 개연성이 엿보이는 정황입니다. 그 둘은 훗날 결혼까지 가지는 못했는데 훗날 이 의혹에 대해 질문을 받은 단쩨는 그가 대통령궁을 공격한 사건과 몰리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이 버전은 수까르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 당시 뻐르메스타 반란군을 배후에서 돕고 있던 미 CIA가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기총소사 사건이 삼각관계의 치정이 얽힌사건이라는 논리는 좀 무리일 듯 하지만 수까르노가 몰리에게 수작을 걸었을 것이라는 부분은 사실 너무나 믿음이 가긴 합니다. 사족이지만 감방에서 나온 단쩨는 나중에 목사가 되었고 2007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한편 1962년 5월 14일 바이뚜라힘 회교사원(Masjid Baiturahim)에서 열린 이둘아다(Idul Ada)기념 기도회 앞줄에 앉게된 사누시 피르깟(Sanusi Firkat)이라는 자가 숨겨들어온 권총으로 수까르노 저격을 시도한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이둘 아다는 이슬람력 12월 10일에 열리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종교축제로 아브라함이 알라의 명으로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려다 알라의 제지로 대신 염소를 바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물론 코란의 에피소드들은 기독교 성서와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보입니다. 성서에선 이스마엘 대신 이삭이 제물로 바쳐질 뻔 하죠. 아무튼 어떤 이유때문에 그의 총신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그가 발사한 여러발의 총알은 수까르노를 비껴가 국회의장 KH 자이눌 아리핀을 비롯해 사원 기도실 안의 다른 사람들 여럿에게 부상을 입히지만 정작 수까르노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다. 불과 5-6 미터 앞에서 발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누시는 발사하려는 순간 수까르노가 둘로 보여 조준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수까르노는 모종의 주술적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일까요? 사누시는 다음 순간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했습니다. 사누시의 배후엔 그를 사주한 보고르 소재의 이슬람선생인 끼아이 바크룸(H. Moh. Bachrum)이 있었고 다룰이슬람의 입김이 선명했지만 수까르노는 그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어딘가 석연찮은 이유로 나중에 감형해 줍니다. 이것이 벌써 수까르노에 대한 다섯번째 암살기도였습니다.
한편 인도네시아군은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며 정부를 공격하던 다룰이슬람 반군들을 1962년 서부자바와 아쩨, 1965년에는 남부 슬라웨시에서 일련의 효과적인 작전으로 섬멸했고 다룰이슬람의 지도자 까르토수위르죠(Kartosuwirdjo)는 체포되어 1962년 9월 처형되었습니다.
다룰이슬람(이슬람의 집이라는 의미) 또는 DI/TII(다룰이슬람/인도네시아 이슬람군)이라고 약자로 쓰이는 이 조직은 NII(인도네시아 이슬람국)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이슬람조직입니다. 1942년 카리즈마 넘치는 과격 이슬람정치인 스까르마디 마리쟌 까르또수위르요에 의해 조직된 이슬람 민병대로 시작된 이 조직은 샤리아법만을 유일한 규범으로 여겼고 여기서 파생된 후대의 조직들은 테러집단으로 인식되는 제마이슬라미야(Jemaah Islamiya)를 비롯해 비폭력적 종교그룹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망라합니다.
다룰이슬람의 설립자인 까르또수위르요는 중부자바의 유전지대인 쯔뿌(Cepu)에서 1905년에 태어나 의외로 네덜란드학교의 세속교육을 받았고 수라바야에서 네덜란드계 대학을 나온 인물입니다. 그는 이슬람 민족주의자 쪼끄로아미노또가 마련한 이슬람 기숙사에서 묶다가 그의 인도네시아 이슬람연합당(PSII)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정치일선에 뛰어들면서 의과공부를 중단했습니다. 어쩌면 수많은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다룰이슬람 반군의 수장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될 수도 있었던 시점에서 그의 선택이 인생의 진로를 뒤바꿨던 것입니다.
그는 서부자바 가룻 인근인 말랑봉(Malangbong)을 여행하다가 PSII 지역지도자의 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는 이슬람율법 중심의 이슬람국가를 인도네시아에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노선을 달리하는 PSII를 탈퇴합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42년-1945년 사이 까르또수위르요는 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하던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가룻에 무장민병대를 조직했습니다. 독립전쟁기간 중 까르또수위르요는 서부자바에 자신의 자유투쟁조직을 수립하여 ‘히즈불라와 사빌릴라’라고 칭했습니다. 이것이 다룰이슬람의 전신입니다. 이들은 네덜란드 점령지 내에서 끈질기게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초창기의 다룰이슬람 민병대는 공화국의 세속부대들과 원만한 관계였지만 1948년 렌빌조약에 따라 공화국 부대들이 철수하면서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렌빌조약은 서부자바를 네덜란드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까르또수위르요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1949년 8월 7일 아직도 네덜란드군이 맹위를 떨치던 서부자바 한 복판에 다룰이슬람(이슬람국가)의 성립을 선포하고 자신은 지도자 이맘(Imam)이 되어 네덜란드군에 맞서 싸웠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1948년 네덜란드의 제2차공세로 족자가 함락된 이후 서부자바로 스며들려던 공화국게릴라들도 공격했습니다. 이제 네덜란드만이 아니라 공화국의 세속정부도 다룰이슬람의 적이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독립전쟁은 네덜란드군, 공화국군, 다를이슬람군 간의 3파전 양상을 띄기 시작했습니다. 1949년 네덜란드가 주권을 이양한 후에도 다룰이슬람조직은 해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관할지역으로의 진입하려는 공화국군을 공격했으므로 완전한 반란으로 진화하며 바야흐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와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탈영병 출신인 압둘 까하르 무자까르(Abdul Kahar Muzakkar)가 이끄는 남부 술라웨시의 반란군들이 1951년 다룰이슬람에 가담했고 1953년 9월 20일에는 다웃 버우르에(Daud Barureu’eh)가 아쩨에서 봉기해 자신들을 까르또수위르요가 영도하는 인도네시아 이슬람국가의 일부분이라고 천명하며 반란에 합류했습니다.
다룰이슬람은 자유민주주의 시기에 미약한 중앙정부와 중구난방인 정부의 군사대응으로 인해 1950년대에 크게 득세했고 1957년에는 서부자바의 3분의1을 지배하며 자카르타 외곽까지 작전반경을 넓혀 정부군을 습격하곤 혔습니다. 또한 남부 술라웨시의 90%, 아쩨지역의 농촌, 산림지역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는데 그 지역에서도 까르또수위르요를 조직의 최고권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 이슬람군의 기치 아래 15,000여명의 무장게릴라를 거느렸고 그해 중부 자카르타의 찌끼니에서 수까르노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사건과 1962년 이둘아다 기도회에서 수까르노를 저격하려던 사건의 배후에도 다룰이스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57년 계엄령이 선포되고 1959년 수까르노가 교도민주주의를 선언하자 다룰이슬람 활동도 쇄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미르 파타(Amir Fatah)의 지휘 아래 있던 중부자바의 소규모 다룰이슬람 조직들이 1954년-1957년 사이에 아흐맛 야니 대령의 반뗑레이더스(Banteng Raiders) 부대에 의해 소탕되었고 남부 술라웨시의 입누 하자르(Ibnu Hadjar)의 다룰이슬람 조직은 1959년에 투항했습니다. PRRI-뻐르메스타 반란군의 경우와는 달리 다룰이슬람에 대한 중앙정부의 처벌은 무거웠습니다. 아미르 파타는 1954년, 입누 아자르는 우여곡절끝에 1962년 각각 처형됩니다.
1959년-1962년 사이에 있었던 3년간의 회담이 가져온 평화협정을 통해 아쩨지역에서 분쟁이 멈췄고 이때부터 아쩨는 특권을 가진 자치주로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편입,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아쩨 지역이 타지역에 비해 이슬람 율법이 우선하는 이슬람근본주의가 득세하고 중앙정부의 법률과는 매우 상이한 통치규범을 가지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극단주의 파벌들은 어디나 존재하는 것이어서 당시 이 협정에 만족하지 못한 잔당들은 중앙정부는 물론 아쩨 주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계속했는데 그 유산은 1976년 GAM(Gerakan Aceh Merdeka – 아쩨독립운동) 또는 수마트라-아쩨 국민해방전선(Aceh Sumatra National Liberation Front -ASNLF)으로 발전해 산속으로 들어간 반란군들의 사보타지와 무장투쟁으로 15,000여명의 인명이 희생된 끝에 30여년 후인 2007년 12월이 되어서야 중앙정부와 극적인 타결을 맺어 무장해제하고 자진 해산한 바 있습니다.
한편 정부군은 1959년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한 ‘인간그물작전’을 펼쳐 다룰이슬람군을 포위해 퇴로와 병참선을 끊고 우세한 화력을 과시하면서 게릴라들에게 항복이냐 전멸이냐의 결정을 위협적으로 강요했습니다. 그 결과 서부자바 교외지역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던 반군들의 강력한 거점들을 성공적으로 포위,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까르또수위르요는 1961년 정부와의 전면전을 새삼 선포하고 일반인들까지 테러와 폭력의 대상으로 삼으며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다룰이슬람의 추종자들은 점점 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1962년 6월엔 가룻(Garut)인근 게베르산(Gunung Geber)의 은신처에서 마침내 까르또수위르요가 정부군에게 체포됩니다.
체념한 까르또수위르요는 모든 추종자들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했고 1962년 8월 찌러마이(Ciremai)산에서 활동하던 마지막 게릴라들이 투항하면서 서부자바의 다룰이슬람은 완전히 해체됩니다. 까르또수위르요는 자카르타로 이송되어 군사법정에 섰다가 반란과 대통령 암살미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62년 9월 5일 총살됩니다. 이미 백발노인이었지만 13년간 다룰이슬람 반군을 이끌었던 까르또수위르요의 저력을 두려워한 중앙정부는 그의 재판과 사형선고, 그리고 처형을 매우 신속히 진행했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이렇게 조직이 와해된 후에도 잔당들은 1970년대와 1980년까지도 ‘꼬만도 지하드’라는 이슬람 과격집단의 테러가 종종 벌어졌는데 모두 다룰이슬람 출신들의 소행이었습니다.
그동안 중앙정부의 골머리를 썪였던 반란군들을 이렇게 모두 진압하자 이번엔 그 과정에서 급격히 세력을 키운 군이 수까르노에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절대권력을 지향하고 있던 수까르노는 비록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넘볼 정도로 커지는 것을 그냥 두고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가 중정부장과 경호실장을 서로 견제시켰던 것처럼 수까르노 역시 군을 견제하려 했고 그러기 위한 상대세력으로서 인도네시아공산당(PKI)를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1960년 정부의 이념적 기반으로서 도입한 나사콤(Nas-A-Kom)체제에서 그러한 견제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사콤은 인도네시아 사회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어지는 세 가지 사상적 경향, 즉 민족주의(Nasionalisme), 종교(Agama), 공산주의(Komunisme)를 하나의 체제로 묶은 것이었습니다. 수까르노는 이를 계기로 더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입각시켰고 당시 PKI 당수 디파 누산따라 아이딧(Dipa Nusantara Aidit)과 견고한 유대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1962년 아시안게임을 자카르타로 유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아시안게임을 소화하기 위해 10만석 규모의 붕까르노 스타디움을 포함한 스나얀 스포츠컴플렉스와 같은 많은 체육시설들이 건설되었습니다.
하지만 배후에는 정치적 알력도 존재해 인도네시아는 이스라엘과 타이완의 참가를 거부해 국제적 반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거부한 것은 인도네시아의 우방인 아랍국가들과의 관계를 고려했던 것이었고 타이완 거부는 단일 중국을 내세운 중국과의 외교관계 때문이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이러한 인도네시아의 배제정책에 대해 규제를 가했고 이에 반발한 수까르노는 올림픽 경기에 대항해 가네포(Games of New Emerging Forces :GANEFO)라 부르는 ‘비제국주의자들의 국제경기’를 따로 조직해 1963년 51개국 2,700명의 선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는 수까르노의 몽니이자 꼴통인증이기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국격향상 노력의 일환으로 수까르노는 국가기념탑(MONAS-Monumen Nasional), 자카르타의 이스틱랄 사원(Istiqlal Mosque), CONEFO 빌딩(현재는 국회의사당 건물), 인도네시아 호텔, 사리나 쇼핑센터 등 기념비적 대형 건조물들의 건축을 명해 자카르타를 과거 식민지시대의 잔재에서 새로운 근대도시로 탈바꿈시키려 했습니다. 현대적인 탐린거리와 수디르만 거리, 가똣수브로또 거리 등도 이 시절 설계되어 건축된 것들입니다.
196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이제 인도네시아는 모든 반군들을 진압했고 국제적으로도 그 위상을 높이면서 이제 발전일로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중앙정부는 당시 인도네시아 육지면적 전부를 합친 것과 맞먹는 면적의 네덜란드령 서부 파푸아뉴기니의 합병을 시도하려 했고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훼방하면서 동남아의 맹주는 물론 아시아와 제3세계의 맹주가 되기 위해 도약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2016. 3. 6.
참고 :
1) 히스토리아 (http://historia.id/)
2) 노바라리핀 블록스폿(http://novalarifinm.blogspot.co.id)
2)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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