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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쿠데타 전야 - PKI 공산당 득세

beautician 2016. 5. 29. 02:32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 (21)


파국으로 가는 길

 

수까르노는 공산진영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면서 린든존슨의 미행정부와 관계가 소원해질 무렵인 1964년 반미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정부관료들은 미국기업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보유하고 있던 각종 이권들을 비난했고 인도네시아 공산당 PKI가 주도하는 폭도들은 물리적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헐리웃 영화들은 상영이 금지되었고 미국의 서적들과 비틀스 앨범들은 거리에서 불태워졌습니다. 심지어 미국 로큰롤음악을 연주한 인도네시아 밴드 꾸스플러스(Keos Plus)는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습니다. 장발을 단속하던 당시의 한국기준으로 본다 해도 퇴폐조장이어야 하지만 수까르노 정권은 미국 음악을 하는 이 밴드를 반역행위자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중단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까르노는  그 잘난 원조 갖고 꺼져 버려라”("Go to hell with your aid")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되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과 서방의 지원을 받은 말레이시아가 UN 회원국이 되자 격노한 수까르노는 1965 1 7 UN에서 탈퇴해 버립니다.



 

NAM 회원국들이 여러 파벌로 나뉘어 분열되면서 반서방 외교정책을 진심으로 지지하는 국가들이 줄어들자 수까르노는 언젠가부터 비동맹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대신 그는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보다 살갑게 접근하며 중국, 북한, 북베트남, 캄보디아 등과 새로운 동맹관계를 형성했고 이를 북경-평양-하노이-프놈펜-자카르타축이라 명명했습니다. 인도네시아가 1965 1제국주의가 편만한’ UN에서 탈퇴한 후 수까르노는 UN에 필적할 국제기구의 설립을 모색하다가 당시 아직 UN 회원국이 아니었던 중국의 지원을 받아 신흥국회의(Conference of New Emerging Forces:CONEFO) 라는 것을 발족했습니다. 마침 소련의 군사원조로 발생한 막대한 부채에 큰 부담을 느끼던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 참에 배를 갈아타 점차 중국의 원조를 받으며 그 의존도를 높여갔습니다. 수까르노는 빈번하게 베이징-자카르타축을 언급했고 이것은 새로운 반제국주의 국제기구인 CONEFO의 핵심을 이루게 됩니다.

 

수까르노는 국내에서 더욱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진 끝에 1963 MPRS를 통해 마침내 종신대통령의 직위에 올랐습니다. 마니폴-우스덱(Manipol-USDEK)과 나사콤(NASACOM)에 대해 쓴 그의 저서들은 각급 학교와 대학에서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 되었고 그의 연설들은 모든 학생들이 암기해야 할 과제가 되었습니다. 신문들은 물론 당시 하나뿐이던 라디오(RRI), 역시 하나뿐이던 TV(TVRI)혁명의 도구가 되어 수까르노의 의지를 전파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수까르노는 새로이 인도네시아에 편입된 서부이리안(현재의 서부파푸아)의 수도를 그의 이름을 따 수까르나뿌라(Sukarnapura)라 명명했고 당시 칼스텐쯔 피라미드(Carstensz Pyramid)라 불리웠던 인도네시아 최고봉을 수까르노봉(Puncak Sukarno)이라고 개명하는 등 자신에 대한 우상화작업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인도네시아에서 그의 통치권력은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수까르노 교도민주주의를 떠받치고 있던 중요한 두 기둥인 군과 공산당이 서로 반목하고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언제 붕괴할 지 모르는 위태로움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군과 민족주의자, 그리고 이슬람그룹들은 수까르노의 비호를 받으며 빠르게 세를 키워가는 공산당에게 위협을 느꼈고 인도네시아의 공산화가 임박했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했습니다.

 

사실상 인도네시아 공산당 PKI1965년 당시 중국과 소련을 제외하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 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350만명의 당원들을 거느렸고 특히 중부자바와 발리에서 그 위력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당원 외에도 청년행동대원 300만명이 그 저변을 떠받쳤고 350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노동조합운동과 9백만명의 회원을 가진 인도네시아 농민전선도 사실상 공산당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여성운동(Gerwani)과 문인 및 예술인 조직, 문학운동까지 감안하면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전국에 2천만명이 넘는 지지자를 보유하고 있던 셈입니다. 1920년대부터 인도네시아 현대사 속에서 좌충우돌하던 천덕꾸러기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마침내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정당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물론 마디운 사태와 같은 반란행위로 낙인찍힌 민족 반역자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선정권에 적극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습니다.

 

1959 7월 수까르노는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초월하는 대통령령을 세워 국정을 통제했는데 PKI는 그런 수까르노의 조치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 시기에 수까르노는 군장성들을 승진시켜 주요 보직에 배치하면서 군에게도 힘을 실어 주며 공산당과 경쟁하여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하면서 그 세력균형을 바탕으로 교도민주주의를 출범시켰습니다. PKI는 교도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 나사콤(NASAKOM)이라 불리는 민족주의와 종교, 공산주의를 포괄하는 사상을 제창한 수까르노를 칭송했습니다. 이렇게 현존하는 정권의 비위를 맞추면 세를 불려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무산계급 프롤레타리아의 봉기에 초점을 맞춘 종래의 공산주의와는 사뭇 다른 접근방식을 보였습니다.

 

교도민주주의 시기에 공산당 지도부와 민족주의 부루조아 집단이 합작하여 사회전반을 통제하고 정치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못했습니다. 당시 큰 폭의 무역적자와 바닥상태의 외환보유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경제상황을 짓눌렀고 그 위에 군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수까르노가 중국에 접근하는 것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측면도 있었지만 군과 민족주의자들은 중국 공산정권과의 밀접한 관계가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갉아 먹게 될 것이라 우려했습니다. 특히 군부는 수까르노의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이 오직 공산주의자들을 최대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라며 반발하면서 훗날 인도네시아 전군사령관이 되는 레오나르두스 벤야민 무르다니 등 여러 장교들을 비밀리에 말레이시아로 보내 인도네시아군에도 말레이시아와의 평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있음을 전달했습니다.



당시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정책은 훗날 9 30일 사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반인도네시아 데모가 벌어지자 시위대는 인도네시아 대사관건물을 공격해 수까르노의 사진을 훼손하는가 하면 인도네시아의 국가상징물인 가루다 빤짜실라(빤짜실라 이념을 담은 독수리상)를 말레이시아 수상 툰쿠 압둘 라흐만에게 가져가 이를 자근자근 밟도록 했는데 수까르노는 이 사실로 인해 말레이시아에 앙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국가원수를 모독한 말레이시아 연방에 대해 말레이시아를 분쇄하자라는 유명한 발언과 함께 대대적인 복수에 나서려 했습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를 분쇄하라는 수까르노의 명령을 당시 장성들을 냉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수까르노의 신뢰를 얻었던 아흐맛 야니 중장조차 영국을 등에 업은 말레이시아와 일전을 치루는 것이 당시 인도네시아군의 역량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군사령관 나수티온 장군만은 말레이시아 이슈가 말레이시아 분쇄정책에 적극 동조하는 PKI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해 말레이사와의 전쟁에 찬동했습니다.

 

이제 육군으로서는 영국군을 상대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었고 그렇다고 전쟁에 나서지 않자니 불같이 화를 내며 기염을 토할 수까르노를 마주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습니다. 결국 육군장성들은 마지못해 깔리만탄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나섰지만 서부 깔리만탄 군사령관으로서 직접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수빠르죠 준장이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이 전심전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뒤에서는 오히려 계속 작전을 방해하는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디포네고로 사단 장병 대다수가 육군 고위장성들이 말레이시아를 두려워하면서 마지못해 전쟁에 임했고 결과적으로 수까르노 대통령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를 저버렸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분개하면서 육군은 내부적 분열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수빠르죠 준장도 아마 이 시기에 나수티온이나 아흐맛 야니 등 군수뇌부에 대해 큰 불만과 환멸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얼마 후 그는 9 30일 쿠데타의 주역이 되어 친정부군과 전투를 벌였고 군수뇌부 장성들을 공격, 납치, 살해한 사건의 보고책임을 맡아 할림공군기지에서 수까르노를 독대하게 되니 말입니다. 쿠데타의 환경은 그렇게 무르익어 갔습니다.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에 있어서 자신이 군의 지지를 받지 못함을 알아챈 수까르노는 크게 낙담하면서 냉담한 군 대신 언제나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던 PKI 공산당에게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PKI는 말레이시아가 영국과 신식민주의의 괴뢰국가라 여겼으므로 말레이시아 대결정책 기간에도 가장 열렬히 수까르노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물론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PKI 역시 정권차원의 이익을 추구하였으니 아주 순수한 파트너는 아닌 셈이었습니다.

 

PKI가 수까르노의 총애를 얻어 순풍을 받기 시작하자 그 반대편에 선 세력들은 입장이 곤란해졌습니다. PKI는 국제 공산당 조직들과 연계하고 자카르타-북경-모스크바-평양-프놈펜을 잇는 공산주의축의 중심에 함께 서 그 세력을 크게 키워가고 있었는데 정치적 반대파들에게는 중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스스로도 이를 실감하면서도 상대편의 불안감을 일축시켰습니다. 수까르노로서는 아직도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정책이 진행중이었고 1965 1월 유엔에서도 탈퇴해 인도네시아의 국제적 위상이 추락하고 있었으므로 내부결속을 위해서라도 PKI의 위세를 계속 빌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대부분 지주들이었던 이슬람성직자들은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던 PKI의 토지몰수행위와 마을의 일곱가지 악마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일곱가지 악마란 대체로 지주나 부유한 농가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용어였습니다. 군과 이슬람계 양쪽 모두 PKI에 대한 뿌리깊은 이질감을 품고 있었고 그러한 감정은 1920년대 공산당이 인도네시아에 소개된 이후 벌여왔던 크고작은 소요와 봉기와 배신과 반란, 특히 1948년 독립전쟁 와중에 신생 인도네시아 정부의 뒷통수를 첬던 마디운 공산당 반란의 기억에서 기인한 측면이 컸습니다. 그것은 마치 PKIDNA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사콤 체제 하에서 수까르노는 이들 세 그룹 사이의 중재자를 자임했지만 누가 바도 공산주의자들의 입장과 의지에 동조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PKI는 사실 수까르노의 정책들을 무조건 지지한 것은 아니고 대체로 비판을 삼가며 긍정적 입장결정이 결정되면 본격적으로 지지를 표하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지만 수까르노는 PKI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잘 조직되고 이념적으로 강건한 정당이라고 생각했으며 공산진영으로부터 보다 많은 군사적, 재정적 원조를 받아낼 수 있는 유용한 채널이라 보았는데 자신에게 적극적 지지까지 보내주니 더 말할 나위 없는 파트너였습니다. 수까르노는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이념이 자신의 사상과도 많이 닮았다고까지 여겼으므로 공산당에 대한 감정은 각별했습니다.

 

그러던 중 1965 1 13일 미CIA는 수까르노가 우익지도자들과 나누었던 담소를 기록한 어떤 문건을 공개했는데 거기선 수까르노가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내 적이 될 수도 있소. 그건 당신들이 정할 일이요. 나로서는 지금 당면한 눈 앞의 적은 말레이시아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때가 오면 PKI도 정리할 것이요. 단지 지금은 그때가 아닐 뿐이요.” 수까르노가 PKI를 쓰고버릴 소모품 정도로 생각했다는 이 문건은 사실이었을까요? 아니면 수까르노와 공산당을 이간질하려던 CIA의 교활한 공작이었을까요?

 

아무튼 이제 수까르노는 자신의 편에 서주지 않는 군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1963년 그는 계엄령을 해제했습니다. 그러자 계엄령 체제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군의 위력은 단숨에 현저히 감소했습니다. 이를 위한 준비단계의 성격으로 1962 9월 그는 군의 우두머리인 나수티온 장군을 승진시킨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실권이 적은 전군사령관에 임명하고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육군사령관에는 자신에게 확고한 충성을 바치던 아흐맛 야니 장군(Ahmad Yani)을 임명했습니다. 비록 말레이시아 대결정책에 있어서 실망스러운 신중함을 보여주었지만 말입니다. 한편 공군사령관에 임명된 오마르 다니(Omar Dani)는 수까르노에게 충성을 다했을 뿐 아니라 공산당에게 우호적 인사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대결정책을 주도한 꼴라가작전 사령관에 육군장성이 아닌 공군사령관이 임명된 뜬금없는 배경은 대략 그런 것이었습니다.



 

1964 5월 수까르노는 문화선언(Manifesto Kebudajaan :Manikebu)의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이 예술가들과 작가들의 협회는 한스 바구스 야신(Hans Bagus Yasin)이나 위랏모 수끼토(Wiratmo Sukito) 같은 저명한 인도네시아 문인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맡고 있던 모든 직책에서 해직되었습니다. 문화선언은 공산주의 문인협회였고 쁘라무디야 아난타 뚜르(Pramudya Ananta Toer)가 이끄는 시민문화협회(Lembaga Kebudajaan Rakjat :Lekra)의 라이벌이라 여겨지던 곳이었습니다. 1964 12월 수까르노는 수까르노주의 수호협희(Badan Pendukung Soekarnoisme : BPS)도 해체합니다. 단체명만 보면 마치 수까르노를 전적으로 옹호할 것만 같은 이 협회는 사실 수까르노 자신이 주창한 빤짜실라 이념을 인용해 공산당을 반대하는 주요 이유로 들이밀며 수까르노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1965 1월 수까르노는 PKI의 압력을 받아 무르바당(Partai Murba)도 금지합니다. 무르바는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었는데 그 이념이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PKI와 충돌했던 것입니다. 이제 수까르노와 인도네시아 공산당 PKI 는 우호와 연대를 넘어 거의 결합수준의 상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963년에 이르러 공산당 간부들은 날이 갈수록 공산당 행동대와 군경 간의 충돌을 고의적으로 유발시켰고 또 다른 한편으로 공산당 당수 아이딧은 공공의 안녕을 위해 경찰을 돕자는 사뭇 정겨운 슬로건을 제창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속뜻은 경찰의 업무를 덜어줄 제5의 군대를 만들자는 얘기인 것이죠. 아이딧은 군이 지엽적 성향을 배제할 것을 요구했고 좌익 작가와 예술가들에게는 민중군을 작품주제로 사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1964년 말에서 1965년 초 사이에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수천명의 농민들이 지주들의 토지를 약탈했고 이로 인해 경찰을 등에 업은 지주들과 농민들 사이의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농민이라면 그 토지가 누구의 것이든 이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공산당의 정치선전이 이러한 충돌을 야기시킨 것입니다. 국가의 것은 국민들이 공유해야 한다는 논리였죠.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농민과 공산당이 황제의 토지를 압수해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을 흉내내려 한 듯 합니다.

 

1965년 초, 노동자들도 미국기업들이 소유한 고무농장과 원유회사들을 점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화답하듯 공산당 지도부 인사들이 공식적 정부각료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군 고위장성들도 내각에 입각했습니다. 수까르노가 장성들의 지위를 장관급으로 격상시키면서 벌어진 상황이었습니다. 군사령관장관, 육군사령관장관 등등 당시 각료직함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적을 둔 장관들은 장성급 각료들에 비해 숫적 열세였습니다.

 

군의 입지가 강력해지는 만큼 PKI 역시 더욱 굳건한 지지세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 농민으로 이루어진 제5의 군대인 것이고 그 인적자원의 저변은 종래의 군대와는 비할 바 없이 광범위한 것이었습니다. 1965 4PKI 당수 아이딧이 육해공 및 경찰군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군과 별도로 발족을 촉구한 5의 군대란 북한 노농적위대의 개념과 유사한 것이었는데 PKI는 제5의 군대창설이 국가를 더욱 굳건히 세우기 위한 제안이라고 주장했고 수까르노는 이 구상을 받아들여 1965 5 17일 이 군대의 즉각적인 구성을 공식적으로 촉구했습니다.

 

수반드리오 외상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주은래 수상은 브랜드의 소총 10만정의 무상공급을 제의했는데 9 30일 사태가 발생할 때까지도 그 인도시기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수까르노는 이 무기들로 제5의 군대를 무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군의 지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고 언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자신을 축출할지도 모른다고 여겼으므로 자신이 PKI를 통해 직접 운용할 수 있는 제5의 군대창설은 마치 신의 한 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 속셈을 꿰뚫고 있던 육군 고위장성들은 당연히 이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육군사령관 아흐맛 야니 장군과 나수티온 국방장관이 이는 공산당의 사병을 양병하는 일이라 여겨 이 구상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결구 제5의 군대창설에 대한 공방은 군과 공산당 사이의 불신만 가중시켰습니다.

 

그러자 시의적절하게도 5 29길크라이스트 서신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이 편지는 영국대사 앤드류 길크라이스트(Andrew Gilchrist)가 런던 외무성에 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현지 군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영국이 힘을 합쳐 인도네시아를 전복시키려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현지 군의 친구들이란 보수적인 장성들을 뜻하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제5의 군대 창설을 반대하는 군장성들을 숙청할 빌미가 마침내 마련된 것입니다.

 

수반드리오가 꺼내 든 이 편지는 군에 대한 수까르노의 의심과 경각심을 더욱 부추겼고 수까르노는 그 후 수개월동안 이 우려를 줄곧 측근들에게 언급하곤 했습니다. 훗날 귀순한 체코 공작원 라디슬로프 빗만은 PKI의 요청을 받고 인도네시아 군부의 반공주의 강경파 장군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그의 정보국(StB)에서 그 길크라이스트 서한을 위조해 소련을 통해 넘겨준 것이라고 1968년에 주장했습니다. 그로 인해 9 30일 사태가 터졌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 공작은 대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1965 8 17일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가 중국을 비롯한 타 공산주의정권들과 반제국주의 동맹을 맺을 것이며 군은 절대 간여하지 말라는 그의 의지를 밝혔습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농부와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제 5의 군대창설을 승인함도 천명했습니다.

 

한편 수까르노가 대내외적인 정치 부문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는 동안 간과된 인도네시아의 경제상황은 날로 악화되어 갔습니다. 정부가 군비충당을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낸 결과 1964-1965년 사이 연 600%에 이르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유발했고 수출전문 대단위 농장부문의 쇠퇴와 창궐하는 밀수로 인도네시아는 외환부족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서방과 공산진영 양쪽에서 마구 끌어와 산적해버린 차관들에 대한 상환능력을 상실한 모라토리움 상황에 임박하고 있었습니다. 정부예산의 대부분은 군에 투입되었고 그 결과 도로, 철도, 항만 및 여타 공공시설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습니다. 교통 인프라의 악화와 열악한 농업수확량은 국가 곳곳에서 식량부족을 가져왔습니다. 중소기업부문은 투자부족으로 인해 말라 비틀어져 갔고 산업설비는 생산능력 대비 20% 정도의 가동율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한때 인도네시아 독립의 원동력이었고 전국민의 자부심이었던 인도네시아군도 이제 폭주하는 부정부패로 인해 인도네시아의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부분에서 걸림돌이 된 듯 보였고 이를 위해서도 수뇌부를 갈아치워 군의 체질을 쇄신해야 한다고 생각을 정부와 민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관심부족은 경제적으로 곤궁에 빠져 있던 인도네시아 인민들과 재임기간 말년으로 접어드는 수까르노 자신 사이에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9 30일 사태가 벌어지던 당시 인도네시아 민중의 경제상황은 완전히 바닥이었으므로 수까르노에 대한 민중의 지지도 크게 하향곡선을 그었습니다. 말레이시아 분쇄정책을 내세우며 애국심의 결집을 요구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었으므로 민중들은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습니다.

 

인플레이션이 계속 되면서 식료품값도 천정부지로 뛰었으므로 기아선상을 헤매게 된 민중들은 쌀, 설탕, 식용유 등 생필품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야 했습니다. 가격인상을 주도한 요인들은 수하르토와 나수티온 사이에서 결정된 전군 급여의 500% 인상과 물품수급을 주도하던 화교상인들에 대한 축출정책이었습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수많은 인도네시아 인민들은 끼니를 걱정해야 했고 포대자루의 천으로 옷을 지어 입기도 했습니다.

 

한편 수까르노 자신은 미시경제부문을 경시했고 그래서 경제문제에 대한 어떠한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능력도, 그럴 의도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대신 그는 새로운 사상적 컨셉들을 생각해 냈는데 그건 예로부터 그가 가장 재능을 보인 부분이었습니다. 그때 제창한 사상 중 하나가 뜨리삭띠(Trisakti)였습니다. 이는 정치적 주권, 자급자족경제, 그리고 문화적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도네시아인들이 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력으로 홀로 서 궁극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 해야 한다고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허울 좋은 이 말은 실상 인도네시아를 국제사회의 독불장군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뜨리삭띠를 주창하면서 했던 사용했던 수사들은 자급자족을 역설하던 북한이 지도자들의 똑같이 사용했던 것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한때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수까르노도 환갑을 넘겨 병을 얻어 얼굴이 부어 올랐고 1964년초부터 930일 사태가 벌어질 때 당시까지 수까르노의 투병설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수까르노 사망 시 벌어질 권력투쟁 시나리오와 음모설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세기의 스캔들로 여인들의 성적 상상력을 부추겼던 그의 여성편력도 이젠 도덕적 비난을 불러 올 뿐이었습니다. 국민들은 점차 수까르노의 독재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인도네시아의 현대사는 시시각각 19659 30일 운명의 시간을 향해 다가 갔습니다.

 

2016.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