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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모하마드 하타 - 수까르노의 더 나은 반쪽

beautician 2016. 2. 23. 17:28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16)


모하마드 하타 

 

1955년의 선거는 새 국회와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도 서로 적대세력이었던 국민당 PNI, 마슈미, 나드라툴 울라마 그리고 공산당 PKI에게 거의 같은 의석수를 나누어 갖게 되어 국내정치상은 여전히 분열되었고 새로운 헌법을 제창하기 위한 제헌의회의 협의는 이슬람율법을 포함시키느냐 여부의 문제로 막다른 골목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국제외교 측면에서 수까르노는 1955년 반둥회의를 조직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가들과 연계하여 당시 지배적 서구열강들과 어깨를 겨루려 했습니다.

 

수까르노는 자신의 상징적 국가수반의 위치와 인도네시아의 정치상황이 날로 혼란을 거듭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는 인도네시아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교도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주창하게 됩니다. 수까르노는 이 개념이 인도네시아의 전통문화 속에 이미 오래 전부터 녹아들어 있는 것이라 보았는데 교도민주주의란 마을 지도자의 영도하에 토론이 전개되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타협점이 발견될 때까지 토론이 계속되고, 지도자의 교도(敎導)에 의한 질서있는 토론과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지도자의 통제를 전제로 한 교도민주주의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보다 인도네시아 상황에 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듣기에 그럴듯한 결과적으로 교도하는 지도자, 즉 자신에게 전권을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논리였습니다. 또한 그는 정부가 정당에만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기본요소를 구성하는 직능그룹에도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국가적 차원의 민의는 대통령이 용인하는 한도 내에서 국가위원회의 논의를 통해 반영되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의 모든 제안들은 자신의 절대권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모하마드 하타 부통령은 이러한 교도민주주의 개념에 강력히 반대했고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1956 12월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맙니다. 자바인들이 주축을 이룬 정부에서 수마트라 출신으로서 비자바인들의 권익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였던 하타의 사임은 전국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특히 비자바인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수까르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켰지만 수까르노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모하마드 하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하타는 1902 8 12일 부낏띵기에서 독실한 이슬람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존경받는 울라마(이슬람학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하지 모하마드 자밀이 하타가 생후 8개월 즈음 하타의 어머니와 7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미낭까바우 지역 마뜨릴네알 공동체의 전통에 따라 그는 외가에서 키워졌습니다. 그는 부유한 외가 덕택에 네덜란드어도 배웠고 방과후엔 따로 이슬람경전인 꾸란의 공부도 했습니다.

 

부낏띵기의 멀라유학원(말레이학교)을 마친 후인 1913년부터 1916년까지 그는 빠당 지역에서 ELS (Europeesche Lagere School)라고 부르는 네덜란드어 초급학교를 다녔습니다. 13세가 되었을 때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의 네덜란드 중등학교인 HBS (Hogere burgerschool) 입학시험에 합격하지만 나이 어린 그가 혼자 바타비아에 가는 것을 걱정한 어머니의 만류에 따라 빠당에서 MULO (Meer Uitgebreid Lager onderwijs)라는 중등학교를 다니게 됩니다. 이 시기에 하타는 따헤르 마라 수탄이 이끄는 노동연대사무실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는 그는 네덜란드 신문을 자주 읽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 의회인 볼크스라드(Volksraad)의 정치토론 부분을 특히 즐겨 읽었습니다. 그가 정치에 눈뜨며 전국적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6세 때였습니다. 그는 1918년 발족한 용스마트라넨본드’ (Jong Sumatranen Bond = 수마트라 청년조합)의 재무부장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1919년 하타는 마침내 바타비아의 HBS로 진학해 1921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네덜란드 로테르담 상업학교(현재의 에라스무스대학(Erasmus University Rotterdam)로 진학합니다. 그는 1932년 거기서 경제학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시작했지만 논문을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그의 인생판도가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타는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협회에 가입했는데 이 단체는 나중에 뻐르힘뿌난 인도네시아(Perhimpunan Indonesia)로 이름을 바꿉니다. 뻐르힘뿌난 인도네시아는 학생조직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정치조직으로 변모하면서 인도네시아 독립을 강력히 촉구하기 시작했고 하타는 자유 인도네시아라는 매체의 편집장을 맡아 이 조직의 주장을 실어 전달했습니다.

 

하타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대해 더 많은 나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유럽을 종횡하며 모든 정치집회에 인도네시아 사절단장 자격으로 참석했고 1926년에는 그와 뻐르힘뿌난 인도네시아는 프랑스 비에르빌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국제 민주주의 의회에도 가입합니다. 그는 1927년 제국주의와 식민압제 반대연맹에서 주최한 브뤼셀 집회에도 참석하여 인디아의 자와할랄 네루, 이집트의 하피즈 라마단 베이, 세네갈의 라민 셍호르 같은 저명한 민족주의자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해 말 스위스에서 열린 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여성연맹이 주최한 또 다른 집회에서 하타는 인도네시아와 독립에 대하여’("Indonesia and the Matter of Independence")라는 제목의 연설로 열변을 토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뻐르힘뿌난 인도네시아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네덜란드는 19276월 하타와 조직 수뇌부 네 명을 체포되어 투옥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서 6개월을 보낸 끝에 마침내 헤이그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하타는 자기변론의 기회를 이용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의지를 강변했습니다.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이해와 상충하는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인으로서 무조건 네덜란드에 맹종할 수 없다는 취지의 연설을 법정에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타는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가 서로 협조하려면 우선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선행되어야 하고 식민지가 아닌 평등한 조건의 파트너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함을 강조했습니다. 이 연설은 자유인도네시아 연설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타와 다른 뻐르힘부난 인도네시아 간부들은 1929년 석방된 후 인도네시아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자 수까르노가 설립한 인도네시아 민족당(Indonesian National Party – PNI) 활동에 가담했습니다. 하타는 간부학교를 설립해 장래성이 엿보이는 사람들에게 민족주의적 관점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는데 주로 경제학, 민족주의운동의 역사는 물론 정부행정업무도 교육시켰습니다.



 

하타가 인도네시아로 돌아온 1932년엔 수까르노가 투옥되어 민족주의운동이 침체기를 맞고 있던 시기였는데 하타는 이미 네덜란드에서 이름을 알린 대표적 민족주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타는 수까르노의 PNI당에서 갈라져 나온 수딴샤리르의 신 PNI당에 들어가 총재직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그해 석방된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당(Partindo)을 선택하면서 두 사람은 라이벌 구도를 이루었습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하타는 신PNI당 당지인 국민의 권위지에 정치와 경제에 대한 글을 실었는데 그의 사설은 인도네시아 지도부를 구성할 만한 새로운 간부집단의 훈련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수까르노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사설들을 여러 번 실었습니다.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수까르노를 다시 체포해 1933 12월 플로레스섬의 엔데(Ende)지역 유배형에 처하는 가혹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식민정부는 1934 2월 신PNI당 자카르타지부와 반둥지부를 급습해 하타를 포함한 지도부 인사들도 체포했습니다. 1년간 글로독 교도소에 수감된 하타는 그곳에서 결재위기와 자본주의라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네덜란드 강점기가 엄혹했다곤 하지만 그래도 민족주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법정에서 연설도 하고 교도소에서 책도 쓸 수 있는 정도의 권리와 자유가 주어졌던 모양입니다.



 

1935년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하타와 신PNI당의 샤리르를 포함한 그의 동료 지도자들을 파푸아의 보벤디굴(Boven Digoel)이라는 곳으로 유배시켰는데 유배지에 도착한 하타는 언젠가 유배가 풀릴 때까지 그곳에서 하루 40센트를 받으며 네덜란드 총독부의 공무원으로 일할 것인지, 아니면 연명할 음식 외에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갈 기약조차 없는 빡센 유배생활을 할 것인지 어느 한쪽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하타는 공무원이 되려 했다면 이미 자카르타에서 공무원이 되어 큰 돈을 벌었을 것이라 조소하며 후회없이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하타는 유배지에서도 뻐만당안’(Pemandangan : 관점)이라는 신문에 꾸준히 글을 썼고 그 고료를 받아 보벤디굴에서 자신과 동료들의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카르타를 떠나올 때 16개의 박스에 넘치도록 담아왔던 책들로 동료들에게 경제학, 역사, 철학을 가르쳤고 당시 강의자료들은 훗날 지식의 장도로의 소개’, ‘희랍사상의 본질같은 책으로 엮여 나오기도 했습니다.

 

1936 1월 하타와 샤리르는 말루꾸의 반다네이라라는 곳으로 이송되었는데 거기서 그들은 이와 꾸수마수만뜨리(Iwa Kusumasumantri), 찝또 망운꾸수모 박사(Dr.Cipto Mangunkusumo) 같은 민족주의자들과 만나 교분을 쌓게 됩니다. 하타와 샤리르에게는 좀 더 많은 자유가 주어져 현지 주민들과의 접촉도 허용되었는데 그들은 현지 어린이들에게 정치와 역사를 가르치는 과정을 열기도 했습니다. 하타는 반다네이라 유배기간 중 현지 소년 데스 알위를 자신의 양자로 입양했는데 그는 훗날 인도네시아에서 이름을 떨친 역사가이자 외교관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1942 3 9일 네덜란드군에게 항복을 받아낸 일본군에 의해 3 22일 하타와 샤리르는 자카르타로 돌아왔고 샤리르는 일본에 저항해 곧장 지하로 스며든 반면 하타는 일본군정의 내무장관 하라다소장을 만나 점령군 자문관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수락합니다. 그는 일본의 힘을 이용해 서방 열강에 맞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얻어 내려 했고 자카르타에서 재회한 수까르노와 그 지점에서 의견이 맞았습니다.  숙명의 라이벌이던 두 사람은 그때부터 서로 가장 신뢰하는 정치적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가 겪은 일제강점기와 독립전쟁의 과정은 수까르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두 사람은 늘 같이 움직였으니 말입니다독립선언 후 부통령이 된 하타는 모든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정부조직을 구성하는 한편 수카르노가 제시하는 정부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는 일에 주력했습니다하지만 객관적 판단과 행정처리에 능했던 하타의 부통령으로서의 업적들은 직관적 선동적 인기몰이와 행동우선의 수까르노의 등 뒤 그림자에 가려지기 시작했습니다두 사람은 전혀 다른 정치스타일을 보였지만 오히려 그런 차이점으로 인해 서로를 더욱 효과적으로 보완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움비라테(Duumvirate = Dwitunggal)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는데 지금까지도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과 부통령의 조합이라고 칭송받고 있습니다.

 

1949 8월 하타는 인도네시아 사절단을 이끌고 헤이그 원탁회의에 참가했습니다. 하타와 사절단이 최선의 외교력을 발휘했던 그 원탁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에 따라 16개 자치주의 연합이며 여전히 수카르노와 하타를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합주국이 성립되고 1949 12월 마침내 네덜란드로부터 주권을 이양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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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는 자신의 부통령 재임기간에도 정기적으로 대학에서 초청강연을 하곤 했고 지성에 대한 추구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아 경제와 노동조합을 주제로 한 많은 서적과 에세이를 남겼습니다. 그가 열성을 다해 전파한 경제의 핵심부분으로서의 노동조합에 대한 사상은 하타의 개인적 취향을 반영한 영구적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는 1953년 노동조합 사상계몽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인도네시아 노동조합협회의 공로패와 함께 인도네시아 노동조합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하타의 중요한 또 다른 업적은 인도네시아 외교정책의 근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입니다. 1948년 하타는 두 바위의 대결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을 언급하면서 인도네시아의 외교정책은 진영논리에 빠지거나 미국, 소련의 이해에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되며 항상 자국의 이해가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하타가 1948년에 깨달은 이 사실을 오늘날의 한국 지도층들은 좀 더 절절히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타는 냉전체제 속에서 인도네시아가 스스로의 위상을 독자적으로 결정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인도네시아가 자국이익 우선의 기조를 세우고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타의 사상은 독립적, 적극적 외교방침이라고 명명되었고 오늘날 인도네시아 외교정책의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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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의 선거를 통해 새 헌법을 기초할 헌법의회와 국민대표회의(DPR)가 구성될 때 하타는 수카르노에게 편지를 보내 부통령 사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인도네시아가 독립 후 의회민주주의 기반의 헌법을 채택해 대통령의 역할이 크게 축소됨에 따라 부통령 직책 역시 그 의미의 대부분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리를 지키는 것은 혈세의 낭비라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물론 정치적 노선차이로 인한 갈등도 사퇴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하타는 날로 더해가는 수카르노의 독채적 성향과 권위주의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침 그의 부통령 임기가 끝나던 중 수까르노가 교도민주주의를 주창하며 나선 것에 하타는 크게 반발했습니다. 하타는 수카르노가 독재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나 수까르노는 그 조언들을 무시했으므로 하타는 결국 더 이상 수까르노와 같은 길을 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손을 놓아버린 것입니다독립선언 후 11년 반동안 둘도 없는 파트너로서 수까르노와 함께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세웠던 하타는 부통령 임기의 연장을 요구하지 않았고 1956 12 1일 부통령직에서 물러 났습니다.

 

하타의 사임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비자바인들이 받은 충격은 실로 컸다. 비자바인들의 입장에서는 자바인들이 주도하는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오직 하타 홀로 비자바인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봤던 것입니다. 하타의 사임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혁명정부(PRRI) 반군들에게도 분명한 영향을 끼쳐 각 지역들이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뻐르메스타(Permesta)운동에서도 지방분권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PRRI-뻐르메스타 반란군은 중앙정부와의 교섭에서 수카르노와 하타의 재결합을 주요조건의 하나로 내걸기도 했습니다.

 

정부 밖에서 하타는 수카르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수카르노가 예전과 달리 최근엔 국가발전을 위한 헌신이 부족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함과 함께 혁명은 이미 끝났으므로 이제 정부역량은 국가발전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수카르노는 1959년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인도네시아의 혁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천명하며 하타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입니다수까르노는 아직은 민생안정과 국가발전보다 국내 반란세력들과 서구열강들의 신제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을 지켜내는 혁명이 아직 진행 중이며 그 싸움을 위해 전국민이 자기를 중심으로 뭉쳐 교도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단결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960년 출간한 우리의 민주주의’(Demokorasi Kita)라는 책에서 하타는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가 또 다른 형태의 독재체제라고 비난했고 수카르노는 즉시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샤리르의 정당도 해산시켰고 2년 후에는 내란음모의 혐의로 샤리르를 투옥하기에 이릅니다. 수까르노의 폭주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타는 샤리르의 체포를 식민주의적이며 비이성적이라고 언급하는 편지를 개인적으로 수카르노에게 보냈지만 이제 그런 구시대의 낭만적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습니다. 수까르노의 부통령으로서 파트너를 이루고 있을 당시 하타는 그의 이성적 사고와 논리적 판단을 근거로 언제 어떻게 폭주할지 모르는 즉흥적 성격의 수까르노에게 제어장치, 내지는 잠금장치가 되어 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타가 수까르노를 떠나면서 수까르노는 이제 아무 꺼리낌없이 독재를 향해 걸어나갔고 그 과정에서 과거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혁명을 주도했던 민족주의자 삼인방의 관계는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수카르노에게서 수하르토로 넘어가던 격동기에 하타는 정치일선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0 6월 수카르노가 죽기 일주일 전 하타는 그의 오랜 침묵을 깨고 수하르토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하타는 그 편지에서 새 정권이 수카르노에게 공정한 재판의 기회도 주지 않고 가택연금한 조치는 매우 실망스럽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1965 9 30일에 있었던 소위 공산당 친위 쿠데타 시도와 관련한 배후를 철저히 조사하고 수카르노에게도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수까르노가 그 쿠데타 시도와 무관하다고 믿었고 하타 역시 그렇게 믿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타는 1970년 초, 당시 만연하고 있던 정치권의 부패문제에 대해 일련의 데모와 시위가 벌어지면서 수하르토 정권에 자의반 타의반 개입하게 됩니다 수하르토는 하타를 다른 몇몇 인사들과 함께 정부내의 부패감찰위원회의 위원과 고문으로 촉탁했던 것입니다. 이 위원회의 조사활동결과는 1970 7월 그 내용이 일부 유출되기 전까지 철저한 비밀에 붙여졌습니다. 그 조사결과가 너무나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시위대들이 정부에 대해 품고 있던 의심이 대부분 사실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고위 정치권에 만연해 있던 부패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하르토는 1970 8월 이 위원회를 해산하고 조사된 부패혐의들 중 달랑 두 케이스만 다루기로 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독립전쟁 당시 나라를 구원했던 군은 이제 그들이 개입하기만 하면 대형 부패사건들이 터져나오는 애물단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타는 1980 3 14일 세상을 떠났고 자카르타 외곽의 따나꾸시르(Tanah Kusir)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사후 1986년 수하르토 정부는 그에게 선언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의 딸 므티아 파리다 하타(Meutia Farida Hatta)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의 내각에서 여성인권부 장관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녀는 현재 인도네시아 정의통일당(PKP)의 당수입니다.



 

모하마드 하타의 약력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 1902. 8. 12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서부자카르타 포트드콕(Fort de Kock) 출생

- 인도네시아 첫 부통령 (1945. 8.18 ~ 1956. 12. 1)

- 인도네시아의 3번째 총리 (1948. 1. 29 ~ 1950. 9. 5

- 인도네시아의 4번째 국방장관 (1948. 1. 29 ~ 1949. 8. 4)

- 인도네시아의 4번째 외무장관 (1949. 12. 20 ~ 1949. 9..6)

- 1980. 3. 14 향년 77세로 사망.

- 아내 라흐미 라찜(Rahmi Rachim), 자녀는 므티아 하타, 그말라 하타(Gemala Hatta), 할리다 하타(Halida Hatta) 3.

- 이슬람 수니파.




모하마드 하타가 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이 1956.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인도네시아 역사상 그처럼 대통령의 보좌역이 아니라 엄연한 파트너로서 대통령의 눈치보지 않고 자기 할 일 다 하고 자기 할 말도 다하다가 정치적 파국을 맞아 후회없이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었던 부통령은 아직 없었습니다.

 


2016.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