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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대결정책 : 인도네시아군 vs 영연방군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20)
말레이시아 분쟁
인도네시아의 독자적 외교노선을 확립하려 했던 수까르노는 독립전쟁의 미해결 과제로서 네덜란드령 뉴기니의 합병과 동서진영, 국제사회로부터 존경받는 실질적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에 우선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50-1962년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주장한 네덜란드령 뉴기니에 대한 주권이 여러 차례 유엔총회 비준획득에 실패하자 이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인도네시아는 1955년 반둥회의를 주최하며 비동맹운동의 중심국가로서 위상을 높이면서 국제사회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58년 동인도네시아의 뻐르메스타 반란과 수마트라에 근거지를 둔 혁명정부 PRRI 선언 등 위기상황에 대처하면서 인도네시아는 괄목할 만한 군사력 증강을 이루어 동남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거듭났습니다. 소련의 무기원조를 받은 인도네시아는 뉴기니에 대한 네덜란드와의 외교협상에서 보다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급기야 1962년 두 나라 간의 외교분쟁이 절정을 이루었을 때 인도네시아군은 네덜란드령 뉴기니에 대규모 공수작전과 상륙작전을 벌이는 무력행사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비록 침투병력들은 네덜란드군과 토착 파푸아 민중군에 의해 대체로 격파되어 전술적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 뉴기니 침공을 통해 위협적인 군사력을 국제사회에 인상적으로 세겨 놓을 수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군사, 외교적 공세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공산진영 합류를 우려한 미국의 압력이 가중되자 네덜란드는 아직 군사적 우위에 있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등떠밀려 지역의 주권을 인도네시아에게 넘겨주고 물러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1962년 말 인도네시아는 서구열강에 대한 거대한 외교적 승리를 거두고 스스로 동남아의 맹주라 자처하며 콧대를 높이 세우게 됩니다. 영국이 말레이시아 연방의 설립을 국제사회에 공표한 것은 인도네시아가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1963년의 일이었습니다. 영국은 당시 독립 6년차인 말레이시아 연방(지금의 서부 말레이시아)과 싱가폴, 영국령 북부 보르네오, 사라왁(Sawawak)주를 통합하여 말레이시아의 지경을 크게 확장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정부는 1950년대 후반부터 영국정부는 극동지역에서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식민지로 되돌아와 다시 한 번 끝까지 착취하려 했던 네덜란드와 달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더 이상 해외식민지들을 유지할 역량을 상실한 영국은 식민지들을 우호적인 영연방국가로 자발적으로 독립시키면서 철수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영국은 북부 보르네오의 식민지를 1957년 영국으로부터 이미 독립한 말레이시아 연방, 1959년에 자치지역이 된 싱가폴과 합병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것입니다. 이러한 말레이시아 연방의 물리적 확장에 인도네시아 공산당 PKI가 극렬 반발했지만 당시 서부파푸아를 놓고 네덜란드와 일전을 벌이고 있던 인도네시아는 이때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는 대체로 온건히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루나이가 말레이 연방에 합류할 지는 아직 불투명했습니다. 브루나이의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로서는 브루나이가 말레이 연방에 합류할 경우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축소될 것이 불보듯 뻔했고 당시 브루나이의 막대한 산유량은 독자적인 경제성장을 충분히 담보할 만한 것이었으므로 한동안 말레이시아 연방 합류를 심각하게 검토하던 술탄은 결국 브루나이의 자주독립 노선을 선택하게 됩니다.
한편 브루나이 정치가인 AM 아자하리 빈 쉐익 마흐뭇 박사 (Dr. AM Azahari bin Syeikh Mahmud)는 보르네오 북쪽지역들이 독자적인 ‘북부 보르네오 연방’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말레이시아 연방 광역화를 반대했습니다. 브루나이가 이 신생국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술탄의 이해와는 상반되는 것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아자하리가 뜬금없이 보르네오 징집병 훈련에 인도네시아의 지원을 요구하자 인도네시아 전군사령관 압둘 나수티온 장군은 심정적 지원을, 수반드리오 외상 겸 인도네시아 정보국장은 보다 광범위한 지원을 시사하며 화답했습니다. 몇 차례의 회합 끝에 인도네시아는 깔리만탄 지역에서 소수의 자원병들을 모아 북부깔리만탄 정부군(TNKU)라 이름짓고 군사훈련을 시작했습니다. 그 병력들이 1962년 12월 8일 브루나이 반란이라 칭하는 봉기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엉성하게 훈련되고 장비도 빈약했던 이들은 브루나이 술탄을 체포하거나 유전지대를 장악하거나 유럽인 인질 확보하는 등의 주요 목표들을 모두 놓치고 말았으므로 애당초 실패할 것이 뻔한 시도였습니다. 봉기발생 수시간 만에 싱가폴 주둔 영국군이 즉각 대응에 나섰고 30시간 후 구르카(Gurkha)부대가 브루나이 주요 도시의 방어와 술탄 경호를 위해 싱가폴에서 날아오면서 봉기의 실패는 기정사실화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브루나이 반란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부인했지만 말레이시아 연방성립을 훼방하려는 TNKU의 목적에는 적극 동조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브루나이에서 TNKU의 군사적 패배가 있은 후 1963년 1월 20일 수반드리오 외상은 말레이시아 연방수립안에 대한 종전의 동의를 철회하고 인도네시아의 말레이시아 대립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말레이시아 연방수립안이 인도네시아를 위협하기 위한 영국의 신식민주의 음모라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수까르노는 그 배후에 보다 은밀한 다른 동기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 인도네시아 외무상 그데 아궁은 인도네시아가 서부 파푸아 확보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당시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 정부나 민중이 말레이시아 연방구성안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도록 통제했다는 사실을 많은 해가 지난 후 밝혔습니다. 그러다가 서부파푸아에서 외교적 대승리를 거둔 후 자신감에 도취된 수까르노가 인도네시아의 위력과 증강된 군사력을 주변국에게 과시하고자 한 측면도 있지만 당시 날로 가중되던 인도네시아 공산당 PKI의 말레이시아 연방안 불복 압박에 어느 정도 등떠밀리기도 했고 전반적 국내외 정치상황이 자신에게 사뭇 불리하게 돌아가려 하자 외국과 또 다른 분쟁을 일으켜 세간의 관심을 돌리고 국론을 통일시켜야 할 필요성도 분명 있었던 것입니다.
수까르노는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괴뢰국가이자 신식민주의의 실험장이라 비난하며 말레이시아의 확장정책은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통제권을 보다 공고히 하려는 시도이며 인도네시아의 안보를 좀 먹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필리핀 역시 영국령 보르네오가 술루 열도(Sulu Archipelago)의 연장선이며 필리핀과 역사적 교접점이 있음을 들어 북부 보르네오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수까르노는 북부보르네오를 인도네시아의 깔리만탄으로 흡수하겠다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고 말레이시아 연방의 성립이 마필도(Maphildo), 즉 말레이시아와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포괄하는 비정치적, 민족대통일 성격의 연합체에 중대한 장애물이 될 것이라 보았습니다. 당시 필리핀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이 개념에 반대하지 않았고 마닐라 성명을 내놓는 등 오히려 동조했습니다. 한편 필리핀이 적대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음에도 말레이시아가 ‘말라야의 계승국’임을 필리핀이 비준하지 않고 시간을 끌자 말레이시아는 필리핀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며 강경하게 나섰습니다.
수까르노의 정치적 제스쳐는 얼마간의 반향을 얻어 영국령 보르네오 지역인 사라왁(Sarawak)과 브루나이(Brunei)의 좌파정치가들이 연방안에 반대하며 수까르노와 연계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3년 9월 마침내 말레이시아가 성립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963년 1월 20일 말레이시아 연방국가 성립안에 대해 인도네시아가 대결정책을 천명하며 나서기 앞서 1962년 코볼트 위원회(Cobbold Commission)는 말레이시아 연방의 영속적 존립 가능성에 대해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코볼트 보고서는 보르네오 식민지 지역에선 보다 확장된 말레이시아 연방의 건립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크다는 부분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연방성립에 대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반대가 날이 갈수록 거세지자 반대의견을 청취하고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편입될 후보지역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대표들이 1963년 7월 30일 마닐라 회합에서 마주 앉았습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며칠 앞둔 1963년 7월 27일 수까르노 대통령은 격정적인 수사를 동원하며 말레이시아를 ‘쳐부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이것은 수까르노가 즐겨 쓰는 쇼맨쉽이었지만 그 파장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 회합에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유엔이 조직하는 국민투표에서 북부 보르네오와 사라왁의 대다수가 찬성표가 던진다면 말레이시아 연방수립을 비준하겠며 한발 물러섰고 UN은 1963년 9월 14일까지는 국민투표 결과보고가 나올 것으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마닐라 회합에 앞서 말레이시아 정부는 8월 31일 서둘러 말레이시아 연방의 성립을 선포하였는데 마침 이 날은 말레이시아의 독립기념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닐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정부의 강권에 밀려 말레이시아의 수립은 1963년 9월 15일로 연기되었고 UN위원회는 두 영국령 보르네오 식민지가 말레이시아 연방합류를 지지하느냐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기로 되었습니다. 마닐라 협상결과가 나온 후 말레이시아 수상 툰쿠 압둘 라흐만(Tunku Abdul Rahman)은 기 상정한 말레이시아 연방국가가 1963년 9월 16일부터 존립할 것임을 다시 한 번 발빠르게 천명했습니다. 아직 관련 수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이 말레이시아의 돌출행동에 대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말레이시아가 마닐라 협상을 존중하지 않았다며 불쾌함을 표했고 수까르노는 더욱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말레이시아와 툰쿠 수상을 성토했습니다.
한편 편입 후보지인 북부 보르네오와 사라왁도 말레이시아에 호의적인 UN 보고서가 나올 것을 확신하면서 1963년 8월 31일 말레이시아의 여섯번째 독립기념일을 맞아 말레이시아의 일부로서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이는 UN 보고서가 제출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9월 14일 UN 보고서가 제출되고 말레이시아 연방안에 대한 전체적인 추인이 이루어지면서 말레이시아는 1963년 9월 16일 연방국가로서 공식적인 출범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러한 과정에 불만을 품었던 인도네시아는 즉각 반발하며 말레이시아 대사를 자카르타에서 추방했고 이틀 후 시위대가 자카르타의 영국대사관에 불을 질렀으며 수십만명의 시위대가 싱가폴 대사관과 싱가폴 외교관들의 자택까지 쳐들어 가 파괴와 린치를 가했습니다. 한편 말레이시아에서도 인도네시아 기관원들이 체포되고 폭도들이 쿠알라룸푸르의 인도네시아 대사관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자 앞서 서부파푸아 합병의 원동력이 되었던 뜨리꼬라 선언을 기억하며 수까르노는 이번에도 비슷한 방법을 시전합니다. 1964년 5월 3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수까르노 대통령은 두 개의 국민명령(Dwikora-드위꼬라)라는 선언문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대결국면에 더욱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Pertinggi ketahanan revolusi Indonesia 인도네시아 혁명의 기치를 높이 휘날려
Bantu perjuangan revolusioner rakyat Malaya, Singapura, Sarawak dan Sabah, untuk menghancurkan Malaysia 말라야와 싱가폴, 사라왁 그리고 사바의 혁명진중들이 정진해 말레이시아를 분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이것이 그 두 가지 명령의 내용이었습니다. 드위꼬라 선언의 목적은 사라왁 지역을 북부깔리만탄 공산당이 통제하는 북부깔리만탄 독립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브루나이 반란 주동자 아자하리 박사가 그렸던 그림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입장에선 말레이시가 영토를 확대해 동남아에서 인도네시아에 맞설 만한 강력한 국가가 되는 것은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일단의 소수 인도네시아 군인들과 자원병들, 그리고 말레이시아 공산게릴라들이 북부 보르네오와 말레이반도로 파견되었고 그들은 신생국 말레이시아를지키기 위해 배치된 영국군, 영연방군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가 하면 싱가폴에서 맥도날드 매장을 날려버리는 등 여러 건의 폭파공작을 감행했습니다. 수까르노는 대내적으로 반영감정을 부추겨 1964년에는 영국대사관이 방화로 전소되기도 했고 차터드뱅크와 유니레버의 인도네시아 영업소들을 포함한 인도네시아 내 모든 영국기업들에 대해 국유화조치를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배경과 경위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32. The Year of Living Dangerously
1961년 보르네오섬은 5개 주로 이루어진 깔리만탄이 보르네오섬의 남쪽에 위치했고 북쪽에는 영국령 브루나이 술탄국가와 영국 식민지인 북부 보르네오(나중에 사바-‘Sabah주’로 명칭을 바꿈), 사라왁(Sarawak)주가 깔리만탄과 1천마일의 국경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사라왁엔 90만명, 사바에 60만명, 브루나이에 8만명 등 영국령 3개 주에 약 150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절반이 다약(Dayak)족이었습니다. 한편 사라왁에선 31%가 화교, 19%가 말레이인이었고 사바에서는 21%의 화교와 7%의 말레이인, 브루나이엔 28%의 화교와 54%의 말레이인들이 살았습니다. 남부 사바의 따와우(Tawau) 지역엔 인도네시아인 인구가 밀집해 있었고 사라왁엔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는 화교들이 번성했습니다. 다약족은 그 압도적인 인구에도 불구하고 해당 지역 전반에 걸쳐 부족단위로 흩어져 살았고 정치적으로도 전혀 조직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라왁은 5개 행정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사바는 북부해안의 제슬턴(Jesslton – 지금의 꼬따끼나발루)에 수도를 두었지만 마을들은 지역 전역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국경은 그 양끝은 제외하곤 제5지역에서 대체로 해발 2,500미터를 넘나드는 능선을 따라 이어졌는데 쿠칭(Kuching)에서 브루나이나 사바 동쪽해안의 산다깐(Sandakan) 등으로 이어지는 도로들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4지역과 제 5지역 내륙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아예 나 있지 않았고 제3지역은 국경에서 150마일 정도 되는 해안도로만 있었습니다. 당시 측량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대충 만든 영국지도들은 해당 지역의 구체적인 등고선을 표시하지 못했는데 인도네시아 측 지도는 더 형편없어 1964년 참전군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인도네시아군은 학교 교과서에서 뜯어온 흑백지도 달랑 한 페이지만 가지고 기동했다고 합니다.
깔리만탄의 5개 주 중 북부, 동부, 서부 깔리만탄이 국경과 접해 있었습니다. 서부깔리만탄의 주도인 서부해안의 뽄띠아낙은 국경으로부터는 약 16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동부깔리만탄 주도 사마린다는 남쪽 해안에 위치해 국경으로부터 35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국경지역엔 일부 서쪽에만 몇몇 도로들이 있었고 서부와 동부 깔리만탄을 연결하는 도로는 아예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국경의 양측 모두 차량기동이 가능한 도로나 이동로가 없었으므로 지도에도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걸어다닌 흔적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최선인 상황이었습니다. 국경 양쪽 모두 큰 강들이 흘렀는데 그것은 유용한 이동경로가 되었고 영국군은 이 강을 호버크래프트를 이용해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이 지역의 빽빽한 정글엔 경비행기가 뜨고 내릴 잔디활주로나 보급물자를 투하할 적당한 공터도 거의 없었으며 헬리콥터조차도 여의치 않은 곳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적도는 쿠칭으로부터 100마일 정도 거리였으므로 언제나 푹푹 찌는 날씨에 북부 보르네오의 연간강우량이 3천 밀리미터 정도였으므로 항상 높은 습도를 유지했습니다. 보르네오는 기본적으로 열대우림이 뒤덮은 산악지대였고 강들이 경계를 이루는 곳엔 벼랑이나 가파른 경사면이 불과 몇미터 폭의 능선과 이어져 있곤 했습니다. 높은 강우량과 깊고 넓은 강들은 군사적 기동을 크게 제한했고 빽빽한 맹그로브 숲이 해안지대를 뒤덮어 수많은 작은 만들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국경의 양쪽 끝은 물론 브루나이 지역 역시 다를 바 없었습니다. 나중에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간의 교전이 시작된 후에도 이런 자연환경은 대대적인 병력과 장비를 동원하는 전면전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분쟁 또는 보르네오 분쟁은 1963년부터 1966년 사이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의 성립을 반대하면서 벌어진 폭력적 갈등을 말하는데 두 나라의 대결이 전쟁이라고 공표되지 않았던 것은 대부분 보르네오섬의 인도네시아와 동부 말레이시아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충돌에 한정되었고 국지적 제한적 육상교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환경이 한 몫 한 것입니다. 교전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소대-중대규모의 부대들간에 벌어졌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보르네오 침투작전을 통해 사바(Sabah)와 사라왁 지역이 싱가폴이나 말레이시아 본토와는 인종적, 종교적 차이가 있다는 부분으로부터 침식해 들어가 말레이시아 연방의 확대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려 시도했습니다.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국경의 길도 없는 험난한 보르네오 정글지대는 인도네시아군과 영연방군 모두에게 긴 행군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 경무장한 보병작전과 공중이동 중심이었는데 고성능 헬리콥터과 풍부한 물자를 가진 영연방군 측은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그랬던 것처럼 병력이동과 전방기지 운용을 그나마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던 반면 인도네시아군은 주로 강을 타고 이동했습니다. 간혹 항공지원이나 함포사격을 등에 업기도 했습니다. 대결양상이 장기화되면서 말레이시아군은 꾸준히 그 역량을 높여 갔고 호주군과 뉴질랜드군도 군사지원을 확대했습니다. 영연방군은 서부 말레이시아와 싱가폴에 극동연합전략본부를 구축했습니다.
1962년 12월 브루나이 반란진압을 위해 북부 보르네오에 도착한 병력들은 1963년 1월 보르네오 영국군사령부(COMBRITBOR)의 휘하에 배치되었고 월터 워커(Walter Walker) 소장은 라부안(Labuan)에 본부를 둔 보르네오 작전 지휘관(DOBOPS)이었고 극동 최고사령관 데이빗 루스 제독에게 직접 보고해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1963년 초 극동 최고사령관은 베릴 벡 제독(Admiral Sir Varyl Begg)으로 정기 교체되고 1963년 중반엔 싱가폴 주제 참모장이었을 팻 글레니(Pat Glennie) 준장이 극동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부임합니다.
사라왁과 북부 보르네오에는 식민지 사령관인 주지사들을 포함하는 비상위원회가 설치되었습니다. 브루나이에서는 국가고문위원회가 술탄 직속으로 설치되었고 쿠알라룸푸르의 말레이시아 국가방위위원회 휘하 국가집행위원회는 사바와 사라왁에 설치되었습니다. 군사명령은 말레이시아 국가작전위원회에서 나왔는데 말레이시아군 총참모총장 툰쿠 오스만 장군과 클로드 페너(Clausde Fenner) 총경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극동 영국군 총사령관도 이 위원회의 회원자격으로 회합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습니다.
한편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당시 사라왁의 브룩왕조(Brooke Dynasty)도 종말을 고하고 있었습니다. 찰스 바이너 브룩(Charles yner Brooke)은 사라왁 주민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믿으며 왕좌를 영국왕실에 이양했던 것입니다. 이로서 사라왁은 런던의 식민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왕실식민지가 되었고 런던에선 곧 신임총독을 선임해 현지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 인구점유율을 보이는 말레이인들의 양위반대운동이 1946년 벌어져 사라왁의 영국 고등집정관 던컨 스튜어트(Duncan Stewart)가 암살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아흐맛 자이디 아드루쩌(Ahmad Zaidi Adruce)가 이끄는 사라왁의 반 말레이시아 운동이 뒤를 이어 전개되었습니다.
좌익과 공산당 세포조직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부터 사라왁의 도시 화교사회에 이미 자생하며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바의 초기 공산당조직들 중 반파시즘연맹이 있었는데 이 조직은 나중에 민족해방군과 항일연맹으로 발전했고 다시 북부보르네오 항일전선, 서부보르네오 항일연합 등으로 세분화 되었습니다. 이중 서부 보르네오 항일연합은 우찬(Wu Chan)이라는 사람이 이끌었는데 그는 1952년 사라왁 식민정부에 의해 중국으로 추방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1946년 결성된 해외중국청년연합, 그 전위대인 해방연맹, 1950년대에 부각된 진보청년연합 등을 포함한 사라왁의 다른 공산당 조직들도 당시 사라왁에서 활동했습니다. 이들 조직들은 두 개의 공산게릴라조직으로 발전했는데 반말레이시아 북부 깔리만탄 인민군(PARAKU)과 사라왁 인민게릴라(PGRS)가 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공산당조직들은 영국이나 서구 매체들에 의해 ‘비밀 공산당조직’(CCO – Clandestine Communist Organization) 또는 사라왁 공산당조직(Sarawak Communist Organization – SCO)라고 불렸습니다.
사라왁 공산당조직은 화교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상당수의 다약족 지지자들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말레이 인종이나 사라왁 토착민들의 지지는 미미했지만 한창 전성기엔 SCO 회원 숫자가 24,000명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1940년대와 50대를 거치면서 현지 화교학교들을 통해 모택동사상이 전파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은 노동집단과 1959년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족한 정치정당인 화교주류의 사라왁 통합국민당에도 파급되었습니다. 사라왁 봉기는 1962년의 브루나이 반란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SCO는 인도네시아의 지원을 받았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인연으로 그들은 1963년-1966년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결상황에서 브루나이 반군과 인도네시아군의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브루나이 반란의 여파로 어수선한 와중에 북부깔리만탄 정부군(TNKU) 잔당은 국경을 넘어 인도네시아로 건너갔고 영국군의 보복을 두려워한 많은 화교 공산주의자들도 수천명 단위로 사라왁을 빠져나갔습니다. 사라왁에 남은 그들의 동료들을 영국은 CCO라 불렀고 인도네시아 측에선 사라왁 인민 게릴라군(Pasukan Gelilya Rakyat Sarawak)이라는 의미로 PGRS라 불렀습니다. 수반드리오 외상은 보고르에서 그들의 유력한 지도자 그룹과 회합을 가졌고 나수티온 장군은 육군특수전연대(RPKAD) 2대대에서 훈련교관 세 명을 차출해 사라왁 국경 인근의 낭아바단(Nangabadan)으로 보내 약 300여명의 훈련병들을 교육시켰고 약 3개월 후 두 명의 위관급 장교들이 추가로 합류했습니다.
PGRS는 800명 규모의 병력을 이루었고 서부 깔리만딴 바뚜히땀이라는 곳에 근거지를 두었는데 인도네시아 정보국 소속 파견대 120명과 중국에서 훈련받은 일단의 간부들이 합류한 상태였습니다. 주로 인도네시아 공산당원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아랍계 혁명가인 소피안이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PGRS는 사라왁에서 일련의 습격작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사라왁지역 지지자들을 포섭하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PGRS의 좌익성향을 우려해 오히려 금지하려 했으나 말레이시아와 대립하던 시절 내내 PGRS가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인도네시아 공군 오마르 다니 사령관이 이 상황에 긴밀히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오마르 다니 장군은 공산당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64년 인도네시아군은 말레이시아의 스멘안중(Semenanjung)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5월엔 말레이시아와의 전쟁행위를 조정하는 비상사령부를 구성했습니다. 이 작전은 드위꼬라 작전이라 했고 이 사령부의 명칭은 비상 만달라사령부, 줄여서 꼴라가(Kolaga)라 불렀습니다. 작전사령관은 오마르 다니 공군장군이었고 휘하에 3개 지휘소를 두고 있었는데 수마트라 소재의 제 1 대는 3개 공수대대와 1개 KKO 대대를 포함한 육군 12개 대대로 이루어졌고 께말 이드리스 준장 지휘 하에 말레이시아의 스멘안중을 작전목표로 했습니다. 제2대는 서부 깔리만탄의 벙까양(Bengkayang) 소재로 KKO, 공군, RPKAD에서 차출된 13개 대대로 구성되었고 제3대는 해군과 KKO로 구성된 비상전단사령부로 여단병력의 상륙부대를 태우고 리아우와 동부 깔리만탄의 경계에서 작전을 벌였습니다.
1964년 8월 조호(Johor)지역에서 인도네시아의 무장공비 16명이 생포되었고 접경지역에서도 인도네시아군의 움직임이 활발해졌으므로 말레이시아군은 방어수위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방어작전에 투입된 말레이시아군의 숫자가 적어 국경초소를 중심으로 경계활동에 치중하며 인도네시아군의 침투를 예방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군과 교전을 벌였던 주된 상대는 SAS 특수부대를 비롯한 영국군과 호주군이었습니다. 2006년자 잡지 앙까사(Majalah Angkasa)에 따르면 당시 교전을 통해 인도네시아군 2천여명과 영국/호주군 200여명이 전사했다는 비공식 보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첫 침투공격작전은 1963년 4월 보르네오에서 벌어졌습니다. 낭아바단에서 훈련받던 병력들은 첫 작전을 위해 두 개의 부대로 나뉘었고 1963년 4월 12일 첫 번 째 침투부대가 사라왁 제 1지역의 떠버두(Tebedu)에서 경찰서를 공격해 접수했던 것입니다. 이곳은 쿠칭에서 40마일, 깔리만탄과의 국경으로부터는 2마일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또 다른 침투부대는 그 다음 달 쿠칭
남쪽의 굼방(Gumbang)이라는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작전에 투입된 침투부대원들은 불과 절반만이 깔리만탄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떠버두 공격을 기점으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대립국면은 군사적 대결로 치달았습니다.
평화협상이 마련되었으나 곧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자 인도네시아는 침투작전을 재개했습니다. 8월 15일 50명 규모의 인도네시아군이 월경하여 일련의 교전을 벌였고 2/6 구르카 부대가 순찰과 매복임무를 위해 배치되어 그로부터 한달 동안 15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영국군의 네팔용병인 구르카 부대는 상대병력이 매우 잘 훈련되었고 기민한 명령체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나 탄약소모가 크고 교전규칙이 무너진 상태라고 보고했습니다. 침투병력의 규모는 첫 주에 300명, 둘 째 주에는 600명 규모로 파악되었습니다. 롱자와이(Long Jawai) 전투는 제 3지역 한복판에서 벌어진 첫 번 째 본격적인 교전이었는데 인도네시아측 RPKAD는 그 해 초 낭아바단 지역으로 전출 온 물요노 수르요와르도요(Mulyono Soerjowardojo) 소령이 이끌었습니다. 1963년 9월의 말레이시아는 말레이시아군이 공식적으로 보르네오에 배치되었음을 천명했습니다.
비록 인도네시아 정부가 개입을 부인하며 KKO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열정적 이상주의자라고 비난했으나 말레이시아 부대에 대한 인도네시아군의 도발이란 사실은 너무나 명백했으므로 그동안 수까르노가 가지고 있던 ‘반제국주의’ 투사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했습니다. 브루나이에서 망명해 온 아자하리가 나서 보르네오 분쟁에 인도네시아 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발언을 내놓기도 했고 수까르노 역시 1월 하순 평화공세를 취하며 언제라도 휴전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직접적 개입을 부인하던 와중에 휴전이라니. 수까르노는 본의 아니게 인도네시아군의 개입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방콕에서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국경분쟁은 멈추지 않았고 협상도 곧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토쿄에서 다시 협상을 시작했으나 이 역시 불과 며칠 만에 결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사라왁을 방문한 태국감시단은 며칠 전 월경했다가 다시 국경을 넘어 돌아가는 잘 무장된 인도네시아 군인들을 분명히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1964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 행사에서 수까르노가 ‘위험한 삶이 될 한 해’(Year of Dangerour Living)를 천명하면서 인도네시아군은 본격적으로 말레이반도에 대한 공수작전과 상륙작전 등 군사행동을 개시했습니다. 이날 공군 즉각대응군(Pasukan Great Trepat – PGT) 낙하산병들과 KKO, 그리고 십여명의 말레이시아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100여명 규모의 상륙부대가 보트를 타고 말라카해협을 건넜습니다. 그들은 해방군으로 환영받을 것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영연방군에게 포위되어 불과 며칠 만에 대부분 생포되고 말았습니다.
9월 2일 자카르타에서 이륙한 로키드 C-130 허큘리스 수송기 세 대가 저공비행으로 레이더망을 피하며 말레이 반도를 향했습니다. 다음날 밤 이 중 두 대가 목표물에 도달해 싱가폴에서 100마일 정도 떨어진 조호(Jojore) 지역의 라비스(Labis)에 즉각대응군 낙하산병 96명을 투하했습니다. 이들은 번개를 동반한 폭풍으로 인해 여기저기로 흩어져 버렸는데 그 결과 그들은 왕실 뉴질랜드군 보병연대 1대대에 배속된 1/10 구르카 부대 근처에 내려 앉았습니다. 말레이시아 제 4 여단이 주도로 벌어진 소탕작전으로 96명의 공수부대원들 중 90명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고 말레이시아측이 입은 인명손실은 단 두 명뿐이었습니다. 다른 한 대의 C-130기는 출격 당일 RAF 떵아Tengah) 기지에서 발진한 재블린 FAW 9 영군공군 전투기의 요격을 피하다가 말라카 해협에서 격추되고 말았습니다.
인도네시아가 분쟁을 말레이반도로 확대하자 순다해협위기가 발생하여 순다해협을 통과할 예정이었던 영국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와 두 척의 호위구축함이 위기의 한 복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영연방군은 만약 말레이반도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침투시도가 계속된다면 콜라가 사령부가 있는 수마트라 본토를 공습하겠다며 엄포를 놓았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3주가 지나면서 위기는 사뭇 완화되었으나 1964년 12월 영연방 정보국이 쿠칭 인근 깔리만탄 지역에서 인도네시아군의 증강징후를 발견하고 이를 상황 악화조짐이란 판단에 따라 영국군 2개 대대가 보르네오에 추가로 배치되면서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습니다. 한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계속 군비를 증강하면서 호주와 뉴질랜드 역시 1965년 초 보르네오에 전투부대를 배치했습니다.
한편 UN이 말레이시아를 준회원국가로 받아 들이자 수까르노는 1965년 1월 20일 UN을 탈퇴하고 UN에 맞서 COFECO라 부르는 신흥국 협의체를 구성합니다. 이는 그가 1962년 아시안게임에서 이스라엘과 대만 선수단을 거부하여 국제올림픽협회의 제재를 받자 1963년 11월 10일-22일에 걸쳐 자카르타 스나얀 경기장에서 GANEFO라 부르는 신흥국 국제운동경기를 개최했던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미 등에서 48개국 2,250명의 선수단이 참석했고 500명의 외신기자들이 몰려오는 등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던 것에 고무되었던 것이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판을 깨버리고 자신만의 판을 만들곤 하던 수까르노는 스스로 꼴통인증을 한 셈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매번 성공시키는 저력과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기도 했습니다.
33. 클라렛 작전
클라렛 작전이란 1964년 6월부터 1966년 초까지 영국군 주도로 장기간 이루어진 일련의 은밀한 월경습격작전입니다. 이 습격작전들은 영국 공군특전대(SAS), 호주 공군특전연대, 뉴질랜드 공군특전대 등 특수부대들과 일반보병부대들의 합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 단계에서 영연방군과 말레이시아군은 인도네시아군의 공격에 대비해 국경을 통제하고 인구밀집지역을 보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1965년에 이르러 그들은 보다 공격적인 양상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국경을 넘어 정보를 수집하고 퇴각하는 인도네시아 침투부대들을 ‘급속추격’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작전반경을 넓혀 국경너머에서 수행하는 매복작전에 대해 1965년 5월 승인 받아 7월부터 실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극비로 분류되던 이들 순찰작전은 인도네시아군이 동부 말레이시아 지역으로 침입하는 것을 감지하기 위해 사라왁이나 사바 주에서 인도네시아의 깔리만탄 지역으로 내보내는 소수의 정찰팀들을 포함했습니다. 처음엔 그 월경거리를 3천 야드(2,700미터)로 제한하던 것을 나중엔 1만야드(9,100미터)까지 확대했습니다. 한편 일반부대의 소대, 중대 단위의 병력이 매복작전에 투입되었는데 그 매복작전은 국경너머 인도네시아 지역에서도 실행되었습니다. 이 민감한 작전들이 백일하에 드러날 경우 맞게 될 파국은 파괴적인 것이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었고 ‘공격적 방어’ 정책이란 개념에서 수행되었습니다. 또한 ‘황금률’이라 알려진 특정 조건하에서 고위 지휘관의 작전통제가 이루어졌고 투입된 병사들은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습니다.
클라렛 작전은 전쟁 후반부에 인도네시아군에게 괄목할 만한 인명피해를 발생시켜 인도네시아 측을 수세로 돌려 세우고 작전종료될 때까지 주도권을 영연방군으로 가져오는 데에 성공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은 이 작전에 대한 비밀을 1974년 해제하고 공개했지만 호주정부는 1996년까지도 이 작전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영국과 달리 인도네시아에서 멀지 않은 이웃의 호주는 말레이시아 대결정책 당시 자신이 인도네시아의 뒷통수를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가 매우 곤혹스러웠을 것임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양측의 대립과 갈등이 한창 고조되어 있던 1965년 8월 9일 싱가폴이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된 사건은 영국관료들마저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그 이유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호전적 정치정당들과 말라야, 싱가폴 지역들의 역량중심지 사이의 정치적 파국 때문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가 싱가폴을 축출했다는 말레이시아 연방이 사실은 영국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인도네시아 측이 그간 줄기차게 해왔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카르타에서 대사건이 터졌습니다. 1965년 9월 30일 밤 자카르타에서 쿠데타 시도가 벌어져 육군사령관 아흐맛 야니 중장을 포함한 6명의 군장성들이 살해되고 전군사령관이었던 나수티온 장군만이 간신히 피신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뒤이어 전개된 혼란상황 속에서 수까르노는 수하르토 장군이 비상사령부를 맡아 자카르타와 그 지역 주둔부대들을 장악하도록 했습니다. 쿠데타가 실패하고 그 결과적 책임이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에게 돌아가자 PKI 당원들과 그 동조자들은 자카르타와 인도네시아 전역에 걸쳐 그 후 수 주, 수 개월 동안 사냥과 가혹한 린치를 당한 후 살해되거나 투옥되는 참혹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카르타와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가 실세로 등극하면서 보르네오에서의 침투작전 강도나 규모는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쿠데타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수하르토는 권력을 확보면서 수까르노와의 차별성을 부각시켰고 동시에 강력한 반공노선을 천명하면서 공산당과 화교들을 추격해 학살하는 광기가 인도네시아 전역을 휩쓸도록 방조했습니다. 9월 30일 이후 막강한 권력을 확보한 수하르토는 마침내 1967년 3월 수까르노를 축출하고 새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1966년 5월 28일 방콕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정부는 대결상황이 종식되었음을 함께 선포했습니다. 수하르토가 수까르노보다 인도네시아를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했으므로 보르네오의 팽팽한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다가 수하르토의 적극적 협력으로 8월 11일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이틀 후 이 협정은 국회의 비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수하르토가 권좌에 오르는 동안에도 클라렛 작전은 계속되고 있었고 1966년 3월에는 구르카 부대 1개 대대가 깔리만탄 지역에서 두 번의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인도네시아 측에서도 국경지역에서 소규모 전투를 일으켰는데 그중엔 영연방군 센트럴 여단 105mm 야포부대에 대한 포격공격시도도 있었습니다. 주민들 증언에 따르면 이 사건에서 영국포대가 응사하여 76mm 포로 추정되는 인도네시아군 야포들이 단숨에 무력화되었다고 합니다.
1966년 초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혼란이 차츰 잦아 들면서 인도네시아군은 영국군 포로생포작전을 중지하고 사바와 사라왁 지역에서 PGRS 부대들과 연계해 게릴라 부대를 구성했습니다. 사바에서는 결코 국경을 넘지 않았으나 사라왁에서는 2월과 5월에 다시금 두 그룹의 전투부대가 국경을 넘어 동조자들을 집결시켰습니다. 그들은 여러 차례 교전으로 인명손실을 입고서도 6월까지 버티다가 대립국면이 종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국경을 넘어 돌아올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호주군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의 마지막 도발은 5월과 6월에 있었습니다. 적잖은 병력이 센트럴 여단을 가로지를 것이란 징후가 포착되었는데 숨비 중위(Lt. Sumbi)가 이끄는 80명 규모의 의용군과 600명 규모의 강습중대가 브루나이 방면으로 빠르게 진행했고 1/7 구르카 부대가 그들을 추격, 매복했으나 대부분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연방군은 38 야포를 동원한 매복포격전을 벌였는데 그것이 마지막 클라렛 작전이었습니다.
1965년 9월 30일 사태 이후 소강상태에 접어든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간 군사갈등은 1966년 5월 새롭게 시작된 평화협상이 타결되어 그해 8월 11일 평화협정이 서명되었고 인도네시아가 말레이시아 연방의 성립을 인준하면서 양국의 대결국면은 완전히 해소됩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이 대결사태로 인해 영연방측은 구르카 부대원 43명을 포함해 영국, 호주, 뉴질랜드군을 통틀어 114명의 전사자와 181명의 부상자를 냈고 반면 인도네시아군은 590명의 전사자와 222명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인도네시아군의 전사자는 정규군과 자원병들을 모두 합쳐 수천명에 이른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그때 수까르노가 하야하지 않았다면 북부 보르네오와 사라왁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 전역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시켰고 암본과 미나하사, 미낭까바우, 아쪠 등에서 모든 반란군들을 분쇄하면서 그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개입도 물리쳤고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서부파푸아마저도 인도네시아로 편입시켰던 인물입니다. 그가 수하르토에게 내몰려 하야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사라왁의 꼬타키나발루나 사바지역은 인도네시아의 영토가 되어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브루나이 역시 절대 무사하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2017.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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