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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풍운의 장군들 - 나수티온, 시마뚜빵, 가똣수브로또

beautician 2016. 2. 22. 13:15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15)


26. 나수티온과 시마뚜빵 

 

네덜란드는 헤이그 원탁회의를 통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인도네시아 합주국(Republik Indonesia Serikat)을 구축했지만 그들이 완전히 철수하기도 전인 1950년 상반기부터 자체 대통령과 의회까지 지니고 있던 국가 수준의 자치주들이 급속히 붕괴해 갔습니다. 이는 국민의 합의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현지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괴뢰국가들의 태생적 운명이었고 무너져 내리는 합주국 시스템과 네덜란드 연방구조를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던 세력들의 몸부림이 실체화되었던 반란들이 족족 실패하면서 그 붕괴속도를 가속화 했습니다.

 

그리하여 1950 8월 마지막 주단위 국가였던 동수마트라주까지 해체되자 1950 8 17일 수까르노는 독립선언 5주년을 맞아 이제야말로 인도네시아가 단일국가로 거듭 났음을 선포했습니다. 새로운 인도네시아는 새로이 정비된 1950년 수정헌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1949년의 연방헌법과 1950년의 수정헌법은 모두 근본적으로 의회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고 그 최고권력은 총리에게 있었으므로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제한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축소된 위상으로 인해 수까르노는 분명 만족스럽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부로서의 위엄을 한껏 발산할 수 있었습니다.

 

의회민주주의의 초창기는 매우 불안정한 기간이었습니다. 새롭게 임명된 의회(DPR) 안에는 수많은 정치정당들이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각은 재편을 거듭해야만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미래상에 대해서도 이견이 충돌했는데 수까르노가 발족한 인도네시아 민족당(PNI) 주축의 민족주의자들은 세속국가의 형태를 원했고 마슈미당(Partai Masyumi) 주축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샤리아율법이 지배하는 이슬람국가를, 1948년 마디운 사태 이후 전국적인 사냥을 당하기까지 했다가 1951년이 되어서야 활동재개가 허락된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주축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국가를 각각 희구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거대 네덜란드 기업들과 화교들이 주도하는 경제상황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드높았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수까르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서부자바의 까르토수위르죠 휘하 다룰이슬람 반군이 1949 87일 인도네시아 이슬람국가(NII : Negara Islam Indonesia)의 수립을 선포한 후 그들을 지지하는 반군들이 1951년 남부 술라웨시와 1953년 아쩨에서도 봉기를 일으키며 꽤 오랜 기간 맹위를 떨쳤습니다. 한편 해산된 예전 의회에서 연방주의를 지지하던 이들이 반둥에서 1950년 일어난 아프라(APRA) 반란에 동조했다가 진압당했고 같은 해 마카사르에서 반란이, 말루꾸에선 분리독립이 시도되었음을 앞서 챕터에서 둘러 본 바 있습니다.

 

군에서도 장교들 간에 첨예한 갈등이 분열을 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식민지시절 KNIL 부대출신 장교들은 전문적인 군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군대를 유지하고자 했고, 절대적 다수를 이루는 일본군정시절 PETA 출신들은 조기퇴역당할 것을 우려하면서 전문성보다는 민족주의적 열정에 방점을 둔 군대를 만들려 했습니다. 네덜란드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 힘을 합쳐 싸웠던 KNIL출신 장교들과 PETA출신 장교들은 이제 서로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52 10 17 KNIL 출신분파의 지도자들인 육군사령관(KSAD) 압둘 하리스 나수티온 대령과 전군사령관(KSAP) 따히 보나르 시마뚜빵(Tahi Bonar Simatupang) 소장은 병력을 움직여 무력시위를 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국민대표의회(DPR) PETA 출신분파의 영향을 받아 군문제에 간섭했으므로 KNIL 출신, 그것도 네덜란드 정규사관학교 출신인 나수띠온과 시마뚜빵 등 군수뇌부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병력을 동원해 독립궁(Istana Merdeka)을 에워싸고 탱크와 야포들의 포신을 독립궁을 향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국민적 지지를 얻은 군은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헌정질서를 우습게 볼 정도로 콧대가 높아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까르노에게 의회의 해산을 요구했습니다. 수까르노를 더욱 압박하기 위해 나수띠온과 시마뚜빵은 민간 시위대도 동원하는 꼼수를 썼습니다.

 

이 사건의 전말은 이랬습니다.

1952년 말 군은 의회와 정치가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정치권은 군이 정치세력화 하는것에 위협을 느끼고 군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52 PSI당 주류의 내각은 군을 재편성하면서 6만명의 비정규군과 3만명의 경찰병력을 감축하려 했습니다. 게다가 독립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군은 벌써 네덜란드로부터 협력과 원조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행태는 군 안팍의 반발을 불러 왔습니다. 이것은 군수뇌부 대부분이 KNIL 부대 또는 네덜란드 사관학교 출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PETA 출신인 밤방 수뻐노(Bambang Supeno) 대령을 필두로 한 일단의 장교들이 군지도부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습니다.



 

나수티온과 TB 시마뚜빵을 포함한 군수뇌부는 밤방 수뻐노의 행동을 군의 엄격한 계급체계를 어지럽힌 하극상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1952 7 11 TB 시마뚜빵 소장의 집에서 17명의 고위 군장령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대책을 협의했습니다. 한편 의회에서도 일단의 정치가들이 군수뇌부에 대한 불신임결의안을 상정했습니다. 9 28일 자에눌 바하루딘(Zaenul Baharuddin)은 군 내부갈등 종식의 한 방안으로 국방장관에 대한 불신임결의안을 제출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2주 후 카톨릭당의 까시모(Kasimo)는 군정상화와 이를 위한 국가위원회 구성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상정했고 그 다음 날 마나이 소피안(Manai Sophiaan) 전날 까시모의 제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위원회에 국수뇌부 해임권한을 주자는 제안을 내놓습니다.




의회의 이러한 공격은 군 고위장교들을 격분케 했습니다. 그들은 국회 역시 기술적으로 군관할지역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군이 정치가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우월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격분한 남부술라웨시 제7지역군 사령관 가똣 수브로또 대령은 의회에게 엄포를 놓았습니다.

 

국회가 해산하든 군이 해산하든 어디 한 번 해보자구!!”

 

국가와 의회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군이 공화국의 입법부인 의회와 대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똣 수브로또 대령이 기염을 토했음에도 불구하고 1952 10 16일 의회는 마나이 소피안의 결의안을 통화시켰고 수까르노 역시 의회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수까르노는 군이 정치와 민생에 간여하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독립전쟁 중 네덜란드의 제2차 공세인 크라이 작전 당시 족자의 공화국 정부 전체가 네덜란드군의 포로가 되던 당시, 그리고 그 이후 수디르만 장군 이하 악전고투하며 목숨바쳐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백척간두의 인도네시아를 살려냈던 군 고위장교들이 수까르노 정부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에 품고 있던 일말의 경멸심과 도덕적 우월감 같은 것이 수까르노가 군과 대체로 척을 지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군의 그런 공명심이 이제 군의 정치적 위상을 비정상적으로 키워 놓았던 것입니다.

 

한편 군의 입장에서는 수까르노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수까르노는 의회가 끝도 없이 토론을 계속하면서도 민생문제는 좀처럼 손대지 않는 의회를 질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까르노와 같은 관점의 정치적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군수뇌부는 수까르노에게 의회해산을 요청하려 했던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1952 10 17 5천여명의 군중이 자카르타의 도로 위에 나서, 지금의 외무부가 들어서 있는 중부 자카르타, 뻐잠본(Pejambon)거리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향해 살기등등하게 줄을 지어 행진했습니다. 국회의사당 건물에 도착한 군중들을 안으로 뚫고 들어가 기물을 부수며 난동을 부린 후 이번엔 대통령궁을 향해 움직여 갔습니다. 군중들의 숫자는 점점 더 불어나 이제 3만여명에 육박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독립궁 앞에선 군대의 무력시위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늘어서 몇 대의 탱크와 장갑차들이 독립궁을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포 4문도 독립궁을 조준하고 있었습니다. 수까르노는 국민의 목소리, 수까르노’ Bung Karno: penyambung lidah rakyat 라는 자서전에서 이 사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1952 10 17일 새벽 일찍 탱크 두 대와 장갑차 네 대, 그리고 수천명의 군중이 독립궁을 문을 통해 짓쳐 들어왔다. 그들은 국회를 해산하라!’는 포스터를 들고 있었다. 포병도 야포 네 대를 끌고 독립궁 인근 광장으로 진입했다. 25 파운드 야포들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무력시위는 시대의 혼란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이 과연 현명했을까? 이를 지휘한 군사령관들이 나와 함께 독립궁 안에 있었는데 말이다.”



 

이 사태의 배후에 반수카르노, 반공산당 카드를 만지작 거리고 있던 PSI 인도네시아 사회당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당수 DN 아이딧은 PSI당과 마슈미당이 수끼만 내각의 총사태 후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기자 배후에서 이 사태를 촉발시켰거나 방치한 것이라 보았습니다. 수끼만 내각은 PSI당과 마슈미당의 지지를 받았고 내각의 성격도 매우 반좌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이 1952 10 17일 사태를 일종이 쿠데타 시도라고 잘라 말했는데 사실 이 말은 이 사태를 주동한 당시 육군사령관 나수티온의 입에서도 나왔습니다.

 

이 쿠데타 시도는 수까르노 개인을 겨냥한게 아니었어요. 그건 정부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태를 벌인 나수티온과 그 동료들은 수까르노에게 국회의 해산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1952 10 17일 사태는 그 전날 철저히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육군부참모총장 수또꼬(Sutoko) 중령과 S.빠르만(S.Parman) 중령이 작전통제를, 무스토포(Mustopo)대령과 께말이드리스 중령이 야전지휘를  맡았고 실리왕이사단 정보처가 반둥과 서부자바에서 데모대를 끌어모아 군용트럭 편으로 자카르타로 보낸 것만으로도 모자라 자카르타 군사령부가 자카르타 출신 깡패들을 움직여 자카르타 군중을 동원했던 것입니다. 군은 각자 주어진 임무에 따라 일산분란하게 움직였고 노동자들을 포함한 많은 군중들이 선동에 넘어가 데모에 앞장섰습니다. 일간지 하리안 라얏(Harian Rajat) 10 18일자 발행본에서 노동자들이 데모에 따라나서는 바람에 많은 회사와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독립전쟁을 통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수까르노는 압력에 간단히 무릎꿇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군을 등에 업고 동원된 군중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자신을 겨눈 중화기들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두려워하긴커녕 오히려 나수티온에게 역정을 냈습니다.

 

당신 요구하는 사항을 잘 알겠지만 방법이 틀려먹었단 말이요!”

 

수까르노는 그렇게 소리쳤습니다. 수까르노는 군중 대표 다섯 명을 선발해 자신을 만나게 해달라 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자 수까르노 자신이 군중을 만나러 그들 앞에 나섰습니다.

 

국회의 해산을 요구한다고 했습니까?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 난 독재자처럼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겠어요 만약 누군가 민주주의를 파훼하려 한다면 그는 우리의 독립을 파괴하려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 독재자가 되려 한다면 국민이 그 사람을 반드시 망가뜨려 끌어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뒷전에 팽캐쳐 둔다면 우리들의 이 나라는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화려한 언변을 동원한 수까르노의 설명을 들은 군중들은 대체로 납득했고 스스로 해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나수티온은 패가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군중들을 해산시킨 수까르노는 이제 군수뇌부를 만났습니다. 나수티온은 여전히 핏대를 세우며 인도네시아 전역에 비상사태 선포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국회해산 요구는 물론 비상사태 선포요청도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수까르노에게 직접 총을 들이댈 의도까진 없었던 군수뇌부로서는 더 이상 쓸 수 있는 패가 없었습니다. 한편 이날 군은 애당초 계획한 대로 계속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날 작전을 시작하면서부터 전화선을 끊어 통신을 차단했고 계엄령이라도 발동된 것처럼 시민들이 5명 이상의 모이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또한 평소 야간통행금지시간이 밤 10시에서 새벽 5시까지이던 것을 밤 8시에서 새벽 5시까지로 연장했습니다. 군은 하리안머르데까, 마잘라 머르데카, 밈바르 인도네시아, 브리따 인도네시아 같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매체들을 검열했고 일단의 국회의원들도 체포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시마뚜빵은 전군사령관으로서 국방장관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와 나수티온 육군사령관을 대동하고 대통령을 만나 밤방 수뻐노 대령의 육군 수뇌부 경질요구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을 따져 물었습니다. 수까르노는 경질을 고려 중이니 옷벗을 준비를 하라 얘기했고 격분한 보나르는 대통령이 지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 직언을 쏟아 부었습니다. 사단장 의견을 듣고 육군사령관을 경질한다면 사단장 역시 불만 가진 부하들의 청원으로 경질되어야 할 것이며 그런 하극상은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할 군의 근간을 흔들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시마뚜빵은 자신이 전군사령관으로 있는 한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습니다하지만 시마뚜빵은 자신의 바로 그런 행동이 대통령에 대한 하극상이란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 이후 군내 갈등은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수까르노에게 충성하는 일단의 장교들은 1952 10 17일 사태를 옹호했던 군지휘관들을 무장해제시켰는데 이러한 사태는 5지역군 브라위자야 부대(동부자바)와 제2지역군(남부 수마트라), 그리고 가똣 수브로또 대령의 제 7지역군(남부 술라웨시)에서도 벌어졌습니다. 나수티온과 시마뚜방의 관점을 공유하고 마카사르에 앉아 자카르타의 의회에 엄포를 놓았던 가똣 수브로또는 사태 당시 자카르타에 있지도 않았지만 쿠데타 동조혐의로 자신의 참모장이었던 J.F. 와로우 중령(Lt.Col. J.F.Warouw)에게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직으로 밀려난 후 스스로 사임하고 군복을 벗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주동했던 시마뚜빵과 나수티온 역시 무사할 수 없었습니다. 시마뚜빵은 수까르노에 의해 수디르만 장군의 후임으로 1950 29살의 젊은 나이로 인도네시아 전군사령관에 임명되었는데 이 직위는 국방장관의 밑에서 육, , 공군 사령관들을 지휘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1953년 전군사령관이라는 직책을 폐지하고 시마뚜빵의 어깨에 별을 하나 더 얹어 국방부 군사고문으로 보내면서 사실상 군권을 빼앗았습니다. 그렇게 실권에서 멀어진 시마뚜빵은 육군참모 및 지휘관 학교’(SSKAD)에서 교편을 잡고 책을 쓰면서 조만간 완전히 막을 내릴 그의 군경력 마지막 기간을 알차게 보내려 최선을 다했습니다.

 

TB 시마뚜빵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 따히 보나르 시마뚜빵(Tahi Bonar Simatupang) 1920 1 28 수마트라 시디깔랑(Sidikalang)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인도네시아군은 물론 인도네시아 교회사에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는 따루뚱(Tarutung)과 바타비아에서 네덜란드식 교육을 받았고 네덜란드어에 능통했습니다. 1940 5월 나찌가 네덜란드를 침공함에 따라 브레다(Breda)에 있던 왕립사관학교가 동인도제도의 반둥으로 옮겨왔고 시마뚜빵은 거기 입학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는 1942년 사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는데 당시 동기생들 중엔 나수티온과 까윌라랑 등이 있었습니다. 나수티온에 따르면 시마뚜빵은 동문회에서도 가장 분석과 발언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은관생도로 졸업했지만 만일 시마뚜방이 네덜란드인이었다면 분명 금관생도로 졸업했을 거라고 까윌라랑도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동인도제도는 1942 3 8일 무조건 항복하고 맙니다. 그래서 2년간의 사관학교 과정을 마치고 임관했음에도 그는 KNIL 부대의 보직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군 자카르타 제1연대에서 장교후보생으로 근무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선언 후 그는 TKR(국민치안군)에 들어가 수디르만 장군 휘하에서 게릴라활동을 하며 네덜란드군과 싸웠습니다.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중 1948-1949년의 기간 동안 전군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네덜란드의 덴하악(Den Haag)에서 열린 원탁회의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 사절단으로 참석해 군의 입장을 대변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네덜란드를 압박해 인도네시아에서 KNIL 부대를 폐지하고 그 병력을 공화국군에 편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950년 수디르만 장군이 타계함에 따라 보나르는 29세의 나이로 소장으로 승진해 전군사령관의 직위를 물려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52 10 17일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시마뚜빵은 1959 7 21일 중장 계급으로 군복을 벗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39세였습니다. 군문을 떠난 시마뚜빵은 교회에 열심을 내며 신앙생활에 몰두했고 각종 교회연합회나 기독교계 대학의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회사뿐 아니라 사회공동체에도 경영학 공부가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선각자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료 독립투사였던 알리 부디아르죠(Ali Budiardjo)의 여동생 수마르띠 부디아르죠(Sumarti Budiardjo)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얻었고 1990 1 1일 세상을 떠나 깔리바타 영웅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는 2013 11 8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에 의해 국가영웅의 칭호를 수여받았고 남부 자카르타 찔란닥 지역의 한 도로도 그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습니다


다시 1952 10 17일 사태로 돌아갑니다. 당시 쿠데타에 실패한 나수티온과 시마뚜빵은 그렇게 몇 개월 후 군복을 벗었고 공석이 된 육군사령관 자리엔 나수티온 대령의 파벌이나 그 반대편의 밤방수뻐노 대령의 파벌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 인사인 전군부사령관 밤방수겅 대령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1955 2 25일 군 회의에선 통일된 육군의 하나됨을 선언하는 족자헌장을 채택하는 등 나름 노력은 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주도한 밤방수겅 대령 자신이 사퇴하고 맙니다.

 

그 후임으로 육군부사령관 쥴키플리 루비스가 대리직을 맡았으나 얼마 후 정부는 이와 꾸스마수만뜨리 장관을 통해 제 2지역군 사령관 밤방 우또요 대령(Kolonel Bambang Utoyo)을 소장으로 승진시켜 육군사령관에 임명한다는 결정을 하달합니다. 밤방 우또요는 일본강점기에 만들어진 PETA와 유사한 의용군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밤방 유또요를 선택한 것은 PETA 출신인 쥴키플리 루비스의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이와 꾸수마수만뜨리 총리와 수까르노 대통령의 심기를 크게 불편케 했습니다. 일단의 장교들은 새 육군사령관의 임명을 보이콧했고 임명식장엔 군악대조차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방 우또요의 임명철회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든 말든 육군사령관 임명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보이콧하던 장교들도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임 육군사령관이 육군사령부(MBAD)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정치권으로 비화되어 자이날 바하루딘이 의회에 청원을 넣어 알리 사스뜨로아미죠요(Ali Sastroamidjojo)의 내각을 실각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부르하누딘 하라합(Burhanuddin Harahap)의 새 내각 역시 이 인도네시아 군파벌의 질문공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지난 3년간 군문을 떠나 있던 나수티온을 다시 불러 들이기로 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수까르노의 양해가 있어야 했습니다. 나수티온이 아무리 적임자라 하더라도 그는 한번 수까르노와 대립하려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슈미당과 나들라툴 울라마(NU) 이슬람문파가 지배적이던 바하루딘의 내각은 1955 11 1일 나수티온을 중장으로 승진시켜 육군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나수티온은 군내 갈등을 불식하기 위해 ‘넓은 시작점’ 또는 ‘중도’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인도네시아군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서는 안되지만 한편 모든 결론도출단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수티온은 1958 12월 중부자바 마글랑에 위치한 군사관학교의 생도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한 바 있었습니다

 

‘우리는 군이 하나의 정치세력이 되어 극단적 조치를 취하는 작금의 남미국가들의 선례를 따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린 군이 정권의 주구로 전락한 서부유럽의 선례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동유럽의 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극적인 사과와 화해로 무대 전면에 복귀한 나수티온과 그의 과오를 용서해 준 수까르노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고 수까르노는 국가가 와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도 군대의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편 1952 10 17일 사태에서 시마뚜빵과 나수티온이 요구했던 의회해산은 뜬금없게도 1959 7 5일에 이루어집니다. 수까르노가 교도민주주의를 실행에 옮기면서 국회를 해산했던 것입니다.

 

 

2016. 2. 22

 

참고 :

1) 오케존 뉴스 (http://news.okezone.com)

2) 버르디까리 온라인 (http://www.berdikarionline.com)

3)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