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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본인들의 반란 - 남말루꾸 공화국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13)
남말루꾸공화국 (RMS)
북쪽으로 태평양 외곽을 이루는 할마헤라(Halmahera) 섬으로부터 남쪽으로 NTT 경계에 웨떠르(Weter)섬까지를 아우르는 해상지역 말루꾸는 면적이 85만 평방 킬로미터에 달하지만 육지는 달랑 10%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카사르에서 안디 아지스의 반란을 사주하고 마나도에선 TWAPRO 당을 통해 KNIL 부대와 합주국군 간의 대결을 유도하려다 여의치 않자 암본으로 날아가 남말루꾸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며 인도네시아 합주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시도했던 크리스띠앙 로베르트 스테픈 수모킬(Christiaan Robbert Steven Soumokil) 박사는 동부자바의 수라바야에서 1905년 10월 13일에 남말루꾸인 아버지와 유럽혼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암본지역엔 그런 커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수라바야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네덜란드로 유학해 레이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35년 인도네시아로 돌아와 자바섬에서 네덜란드 총독부의 법무공무원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식민정권의 특혜를 톡톡히 받았고 총독부를 위해서도 충실히 복무했던 사람이었죠.
그는 1942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진주했을 때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버마와 태국의 수용소로 끌려 다녔지만 용케 살아 돌아와 말루꾸 지역에서 단번에 태평양전쟁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동인도네시아 자치주(Negara Indonesia Timur - NIT)의 검찰총장이 될 정도로 인기도 있었고 자치정부나 네덜란드 측으로부터도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웨스털링의 APRA 반란이나 안디 아지스의 반란, 그리고 수모킬의 반란에는 일정한 공통점이 엿보이는데 그것은 인도네시아 합주국이 통일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 흡수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헤이그 원탁회의에서 KNIL부대가 해산되고 공화국 정규군 TNI에 통합되는 것으로 결정된 후 일신의 안위와 미래의 불안을 느끼던 KNIL 부대를 반란군의 주력으로 사용했습니다. 사실 인간사 새옹지마라 독립전쟁 당시 공화국군의 주력을 이루었던 일본군 PETA 출신들이 수디르만 장군 사망 이후 크게 위축되고 훗날 시마뚜빵과 나수티온 같은 KNIL 장교출신들이 군권을 쥐게 될 줄 알았다면 이런 반란들은 애당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당시 암본의 관료들은 암본이 인도네시아공화국에 흡수될 경우 거대한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겁을 주며 주민들에게 분리독립의 논리를 주입했습니다. 마치 그 증거라도 보여주려는 듯 아지스 반란의 후폭풍으로 1950년 4월 20일 동인도네시아 자치주가 해체됩니다. 수모킬은 이를 남말루꾸 분리독립의 기회라고 보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안디 아지스의 반란실패로 마카사르에서 말루꾸로 달아날 때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마카사르에 주둔하고 있던 KNIL부대의 그린베레와 레드베레 특수부대를 암본으로 뺴돌린 상태였습니다. 암본은 남말루꾸 지역을 지배할 만한 강력한 군대와 화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암본에서 회합을 통해 남말루꾸 분리독립에 대해 KNIL 부대 청년들과 저명한 마누사마의 지지를 요구했고 필요하다면 남말루꾸 대표회의 의원 전원의 목숨을 내걸겠다며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독립선언은 수모킬 박사가 아니라 당시 남말루꾸 대의원 의장이었던 J. 마누후뚜가 발표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수모킬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숫가락만 얹으려 한 것이죠. 마누후뚜는 노회한 정치가답게 결국 남말루꾸공화국 독립선언서에 서명도 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지만 그의 재임기간은 채 10일도 되지 못했습니다. 수모킬은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분리독립에 대한 사전홍보전이 KNIL 부대원들과 ‘위대한 동쪽당’ 당원들에게 의해 열렬히 전개되어 중부 말루꾸의 민심을 휘어잡은 수모킬은 자카르타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투옥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4월 25일 마침내 수모킬박사 자신이 나서 남말루꾸공화국(RMS)의 독립을 선포합니다.
그는 RMS의 독립을 선포하고 1950년 4월 25일 RMS의 외무장관이 되었다가 몇일후인 5월 3일 마누후뚜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1950년부터 1966년까지 무려 16년간 RMS의 대통령이었으나 수도 뉴빅토리아의 화려한 집무실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기간은 불과 6개월 정도였던 것입니다.
독립선언 당시 그는 특히 KNIL 부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KNIL 부대 해산명령이나 합주국군과의 통합조치에 결사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전우였던 왕립네덜란드군을 따라 네덜란드에 가기를 기대했지만 네덜란드군(KL)은 KNIL을 그렇게까지 살갑게 여기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KNIL부대원들을 기어이 인도네시아에 떼어 놓고 가려 했던 것입니다. 근 5년간 KNIL 부대는 네덜란드군편에서 공화국군과 전쟁을 벌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헤이그에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가 악수를 나누더니 별안간 전쟁도 끝나고 주권이양도 이루어지면서 KNIL 부대원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공화국군과의 통합을 거부한 상태에서 네덜란드로부터도 버림받자 절망한 그들은 결국 RMS를 통해 돌파구를 찾고자 했습니다.
RMS의 반란적 독립선언에도 불구하고 반란 초창기에 자카르타 정부측에서는 평화적 타결책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자카르타 정부는 말루꾸 출신의 저명한 인사들을 암본에 보내 수모킬과 그 각료들을 만나보게 했으나 지지부진하던 회담은 결국 실패했고 이제 군사작전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50년 7월 까윌라랑 대령을 사령관으로 한 정부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남말루꾸공화국 반란사건의 한 축인 RMS를 그렇게 수모킬 박사가 맡았다면 또 다른 한 축인 정부군측엔 까윌라랑 대령과 슬라멧 리야디 중령이 있었습니다. 합주국군 사령부는 당시 마카사르에 본부를 두고 있던 동인도네시아 지역군 사령관 알렉스 에버트 까윌라랑 대령 휘하에 남말루꾸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중부자바 솔로출신 스노빠티 부대 5여단장 슬라멧 리야디 중령을 RMS 진압작전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러 들였던 것입니다.
까윌라랑 대령과 리야디 중령의 조합은 꽤 흥미롭습니다. 당시 30세였던 까윌라랑 대령은 미나하사족 후손으로 자카르타의 자티느가라에서 태어나 반둥에 소재한 네덜란드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는데 그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정부 말기에 네덜란드군 보병장교로 임관했던 단 일곱명의 현지인 장교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다른 여섯명은 GPH 자띠꾸수모(GPH. Djatikusumo), 압둘 까디르(Abdul Kadir), 나수티온(AH. Nasution), 시마뚜빵(TB. Simatupang), 아돌프 렘봉(Adolf Lembong), 모꼬긴타(A.J. Mokoginta) 등으로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 한명도 빠짐없이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공화국군에 합류해 전공을 세웠고 훗날 주요보직을 섭렵하며 인도네시아군의 기둥이 됩니다.
한편 슬라멧 리야디는 솔로 출신으로 당시 23세에 불과했고 일제강점기엔 어부로 일하다가 독립전쟁 첫 날부터 게릴라로 참전해 수라카르타 총공세로 솔로를 점령하면서 발군의 야전지휘능력을 보여준 바 있었습니다. KOPAS MALSEL(남말루꾸 군사령부)의 야전사령관으로 발령날 당시 리야디는 서부자바에서 까르또수위르죠의 다룰이슬람 반군들과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그의 부대가 애당초 중부자바의 솔로를 떠나 처음 서부자바에 왔던 것도 반둥에서 벌어진 APRA 반란의 잔당소탕작전을 위해서였으므로 리야디는 거의 모든 반란사건에서 진압군으로 나서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이그나티우스 슬라멧 리야디(Ignatius Slamet Riyadi)는 1927년 7월 26일 수라카르타에서 군인인 아버지와 과일장사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는데 유아시절 삼촌에게 입양되었다가 수까르노처럼 큰 병을 앓아 자바전통에 따라 이름을 바꾼 것이 현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와 성장했고 네덜란드식 학교에서 교육받았습니다.
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했을 때 리야디는 일본이 후원하는 해양학교에서 공부했고 졸업 후 항해사로 일했습니다. 그는 바다에 나가지 않을 때엔 자카르타 감비르역 가까이의 숙소에서 지하운동투사들을 많은 만나게 되었는데 1945년 2월 14일 일본의 패색이 짙어질 즈음 지하운동 영향을 받은 리야디는 친구들과 함께 숙소를 이탈해 수라카르타로 돌아가 지하저항군에 합류합니다. 그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일본 패망 후 리야디는 게릴라부대에 합류했고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발군의 지휘능력을 보여 급속 진급해 수라카르타에서 제26연대를 지휘하게 됩니다. 1947년에 벌어진 네덜란드군의 제1차 총공세에서 리야디는 암바라와와 스마랑 같은 중부자바의 주요도시에서 군대를 지휘해 구눙머라삐 화산과 머르바부에 이르는 지역을 관할했습니다.
1948년 9월 리야디는 다시 승진해 4개 대대와 학생군 1개 대대를 지휘하게 됩니다. 2개월 후 네덜란드군이 제2차 총공세를 벌여 당시 공화국 수도였던 족자를 함락시킬 때 리야디와 그의 부대는 끌라뗀 지역을 돌파해 솔로에 접근했지만 네덜란드군의 족자점령이 더 빨랐습니다. 리야디는 나중에 수라카르타 총공세를 벌여 솔로를 탈환하는 데 앞장 섰습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는 서부자바로 이동해 APRA 반군과 다룰이슬람 반군에 맞섰고 이번엔 RMS 반란진압을 위해 말루꾸의 최전선에 배치된 것입니다. 리야디 중령의 제5여단 스노빠띠 부대는 마카사르에서 장비를 재정비하면서 마나도로부터 도착하는 워랑대대, 5월3일대대의 합류를 기다렸습니다. 거기서 리야디는 앞서 벌어졌던 압둘 아지스 반란집압임무로 와 있던 수하르토 중령과도 잠시 만났습니다. 그러나 까윌라랑 대령은 먼저 전선으로 출발했으므로 마카사르에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처음 까윌라랑 대령을 만난 것은 1950년 7월 17일 부루(Buru)섬 남레아(Namlea) 해안을 바라보는 KRI 빠띠 우누스(Pati Unus)호의 선상 브리핑에서였습니다.
RMS 반란진압작전은 부루섬 상륙으로 시작했습니다. 태평양의 섬들마다 치열한 공성전을 벌이며 일본 본토를 향해 치닫던 태평양전쟁 당시 미해병대처럼 합주국군은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삐루(Piru), 스람 반다(Seram Banda), 따님바르(Tanimbar), 게세르(Geser)섬 등에서도 상륙공격작전을 벌였고 남말루꾸의 섬들 하나하나를 점령하며 암본의 RMS 반란정부에 대한 봉쇄선을 구축했습니다.
첩보에 의하면 RMS의 주력은 KNIL 2개 대대와 2개 중대의 KST 특수부대, 그리고 서부 자바의 바뚜자자르 기지를 출발해 바로 몇 주전 도착한 KNIL 그린베레 부대였습니다. 이 그린베레 중대는 예전 APRA반란에 참가해 반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웨스털링 대위의 부대였습니다. 그외에도 스람섬과 암본섬엔 2천여명 규모의 청년민병대가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부루섬을 함락시킨 지 닷새만에 325대대와 5월3일대대는 다시 KM 와이껠로, LCI 스톰보글, LCI 트루펜 보글, 그리고 여러 척이 상륙정에 나누어 탔고 리야디 중령은 사령선인 KRI 라자왈리호에 올랐습니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스람섬의 삐루시를 장악하는 것이었고 까윌라랑 대령은 이를 ‘파자르 작전(여명작전)’이라 명명했습니다.
해안에 상륙한 부대는 오후 15:00시 이미 삐루시 외곽에 도달했습니다. 삐루엔 KST 특수부대 출신 KNIL 부대가 방어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때 5월 3일대대 정보장교 깔랑이 중위(Letnan Satu Kalangie)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들이 마주한 RMS의 지휘관 누씨 대위(Kapten Nussy)는 예전 KST 부대에서 깔랑이 중위의 동료였으므로 교전을 벌어기 전 우선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투항을 권유하겠다며 리야디 중령의 재가를 요청한 것입니다.
깔랑이 중위는 까잇질리 병장, 그리고 남레아에서 RMS 지휘관이었다가 전향해 5월3일 대대에 합류한 레스딸루후 하사(Sersan Lestaluhu)와 함께 백기를 들고 RMS 진영으로 넘어갔으나 한 시간 넘게 돌아오지 않자 리야디 중령은 예정대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KRI 라자왈리의 함포사격을 등에 업고 시작한 공격은 시가전 양상을 보여 집집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끝에 한시간여 후인 18:30시 양측이 큰 피해를 남기고 결국 정부군이 삐루시를 장악했습니다. 깔랑이 중위와 그 부하들은 삐루시 중앙광장에 처참한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반군들은 그들을 모욕하며 모진 고문을 한 끝에 잔인하게 살해했던 것입니다. 깔랑이 중위는 남레아전투에서 오웬기관단총 한 자루와 탄창 4개만을 가지고 두 개의 RMS 기관총진지를 무력화시켰던 용맹스러운 군인이었습니다.
깔랑이 중위 일행의 처첨한 주검을 본 5월3일 부대원들은 격분하여 RMS 병사들의 시신을 훼손하고 단검던지기 과녁으로 삼는 등 잔혹함을 잔혹함으로 되갚았고 리야디 중령의 재가를 받아 RMS 잔당들을 깊숙히 추격해 들어갔습니다. 삐루시는 7월 22일 오전 8시 정부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습니다.
7월 26일 오전 6시 KRI 라자왈리 사령선은 아마히(Amahi)에 상륙한 352대대가 기습을 당해 위기에 빠졌다는 긴급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352연대는 리야디 중령이 솔로에서부터 직접 지휘했던 부대였으므로 개개인의 이름까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은 물론 그들의 풍부한 전투경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공중지원까지 요청한 것으로 보아 매우 급박한 상황임은 분명했지만 삐루만에 들어선 KRI 라자왈리는 아마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리야디 중령은 전문을 보내 최선의 방어와 반격을 독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면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야!!”
7월 27일 08:00시 KRI 라자왈리는 다시 아마히에 접안했고 하선한 리야디 중령 앞에 어수선한 352대대의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수로소 중대의 병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352대대장 수르자디 소령은 그들은 전날 새벽부터 수튜탄과 기관총을 앞세운 RMS의 맹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전투로 352대대 병사 22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를 낸 반면 RMS 측은 불과 4명의 시체만 남겼고 352대대의 브렌 기관총 3정을 탈취해 간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RMS의 노련한 특수부대였고 적은 숫자로 전장을 마음껏 휘젓고 철수했던 것입니다. 정부군은 선박으로 대규모 병력을 움직였으므로 그 움직임을 숨길 수 없었지만 RMS 특수부대는 야음을 틈타 언제든 기습해 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리야디 중령은 휘하 공격부대들의 경계를 강화시켰습니다.
8월 13일 KRI 라자왈리로 마카사르에 돌아가 배에서 내린 슬라멧 리야디는 임시 사령부로 사용하던 웨이난트 호텔(Hotel Weynandt)에서 까윌라랑 대령을 만나 야전상황을 보고했고 최근 마카사르에서 벌어졌던 TNI와 KNIL 부대의 충돌사건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습니다. 까윌라랑과 리야디는 말루꾸의 전황을 토대로 암본의 RMS 본거지 공격을 위해서는 병력과 화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부분에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까윌라랑은 리야디가 직접 자카르타로 날아가 육군참모총장 나수티온에게 상황보고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아싸!!
리야디 중령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당분간 전장을 떠난다는 게 기뻤던 것이 아닙니다. 급히 전장으로 달려오느라 꼭 해야 했으나 미쳐 하지 못했던 일을 할 기회가 마침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애인인 수라크미(Soerachmi)에게 기념품으로 가져다 줄 RMS의 깃발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 달전 수라바야에서 있었던 약혼식에서 약속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리야디는 RMS 깃발 대신 소박한 결혼반지 같은 것을 품고 있었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총알구멍이 난 흙투성이 RMS 깃발만으로도 기뻐할 만큼 리야디와 수라크미의 사랑은 그토록 젊고 애틋했습니다. 그들은 1950년 8월 19일 자카르타의 멘뗑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나수티온에게 현황보고와 병력충원을 요청한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혼여행을 갈 여유도 없이 리야디는 8월 20일 다시 말루꾸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끄마요란 비행장에서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보내는 수라크미는 한편으론 슬펐지만 또 한편으론 국가의 중대사를 늠름한 양어깨에 짊어진 남편이 한없이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남편과 함께 보낸 하루밤이 그녀의 결혼생활 전부였다는 것을,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남편의 비행기를 바라보던 수라크미는 아직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1950년 9월 28일 까윌라랑 대령은 ‘스노빠띠’라는 작전명의 암본총공격을 명령합니다. 까윌라랑 대령 스스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가장 중요한 작전의 작전명을 스노빠띠라고 붙인 것은 독립전쟁 당시 스노빠띠 여단을 이끌었던 리야디 중령에게 존중의 뜻을 표하려 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인도네시아군 공식문서에 따르면 이 작전은 3군 입체작전으로 진행되었는데 육군에서는 352대대와 5월3일대대, 빠띠무라(Pattimura)대대, 클롭파트(Cloparth)대대, 워랑대대, 삐속(Pisok)대대, 기밀작전중대, 특수전대, 362대대, 백골대대, 예비참모부 등은 물론 기갑과 포병부대까지 자바섬 전역과 술라웨시 남부와 북부에서 14개 대대가 차출되어 동원됐고 해군에서는 KRI 빠디우누스, KRI 라자왈리, TRI 항뚜아, KRI 벤뗑, KRI 남레아, KRI 앙강, KRI 안드레스, KRI 아마하이, KRI 삐루 등의 전함들과 4척의 LST 장비수송선, 10척의 LCVP 상륙정, 3척의 인력수송선(KM 와이껠로, KM 와잉빠우, KM 와이발롱) 등이 동원되었습니다. 한편 공군에서는 B-25 전폭기 2기, P-51 머스탱 전투기 4기가 동원되었고 남레아 항구와 부루섬에 PBY 카탈리나 수상이착륙기 4기가 대기했습니다.
9월 28일 미명에 삐루만의 접촉점에서 세 척의 코르벳함과 병원선 기능을 겸한 병력수송선 세 척, LCI 두 척, 상륙정 10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이 목표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일정지점에서 두 무리로 나뉘어 한 무리는 암본 동쪽측면의 뚤레후(Tulehu)로 향했고 다른 한 무리는 북쪽방면의 히뚜라마(Hitu Lama)를 향했습니다.
문제는 팀웍이었습니다. 동인도네시아지역엔 아직 정규군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이 작전을 위해 자바 각지에서 불러모은 생면부지의 부대들을 섞어놓고 제대로 된 합동훈련도 한 번 없이 직접 대규모 작전에 투입하는 것이 까윌라랑 대령에겐 큰 부담이었습니다. 더욱이 상륙작전을 벌이는 자바출신 부대원들 중엔 바다에 발 한 번 담가보지 못한 병사들도 부지기수였고 특히 솔로 병사들은 배를 타 본 적이 없어 작전지역으로 항해하던 4일 동안 계속 토하다가 상륙 후에는 바닷물에 젖은 비스켓으로 허기를 때워야 했으므로 부루섬의 정글에서 전투를 벌이던 정부군 병사들은 대부분 배를 곯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한편 그런 상태의 정부군이 마주해야 할 RMS의 부대는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그린베레 특수부대와 레드베레 공정대 출신 정예들이었습니다. 이것은 RMS 반란진압과정에서 정부군이 큰 인명피해를 입는 원인이 됩니다.
두 갈래로 나뉜 정부군 주력 중 히뚜라마를 향한 부대는 수디아르또 중령이 지휘했고 뚤레후를 향한 부대들은 슬라멧 리야디 중령이 직접 지휘했습니다. 두 부대의 상류작전이 까윌라랑 대령의 작전대로 진행된다면 그들은 빠소(Passo)에서 합류해 함께 암본 공략에 나설 참이었습니다.
KRI 항뚜아 호의 함포사격지원을 받으며 정부군은 07:00시에 히뚜에 상륙했으나 지휘관 수디아르또 중령은 상륙정이 해안에 닿자마자 피격되어 사망하고 맙니다. 상륙정의 문이 채 열리기도 전이었는데 RMS 측 저격수가 상륙정 문의 작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발사한 총탄이 상륙정 안에 있던 수디아르또의 머리통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수디아르또 중령의 전사로 루스민 소령이 히뚜 해안의 지휘를 맡게 됩니다.
“슬라멧, 너한텐 안된 일이지만 난 여기서 너보다 빨리 죽기로 했어.”
“바보같은 녀석. 내가 먼저다. 수디아르또, 너같은 굼뱅이가 어떻게 나보다 빨리 가겠어?”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잖아!”
“웃기지마, 내가 너보다 상관이야. 넌 내 명령 없이는 죽을 수 없어. 하지만 난 암본을 완전히 점령한 다음에 죽을 거다!”
KRI 라자왈리호가 암본을 향하던 어느날 아침식사를 하면서 리야디 중령과 수디아르또 중령이 이런 호기로운 대화를 나누었다고 슬라르디 중위(Lettu Selardi)는 훗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라카르타 게릴라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두 사람 중 수디아르또 중령이 암본 전투에서 먼저 유명을 달리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 뚤레후에서의 상륙작전은 비교적 안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아침 07:00시 첫번째 선단이 뚤레후 앞 바다에 정지하자 리야디 중령이 직접 지휘하는 352대대와 5월3일대대, 워랑대대, 클롭파트대대, 삐속중대 등은 상륙정으로 옮겨타고 08:00시 대형을 이루어 뚤레후 해안 전역에 상륙했습니다. 기밀작전부대는 M.Q.마루아페이 중위가 지휘했는데 이들은 RMS 반란군에서 투항해온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까윌라랑 대령과 부관 M. 유숩 대위(훗날 육군대장으로 예편), 그리고 두 명의 소년병 장교 레오 로뿔리사 중위와 무스키타 중위(두 명 모두 중장 예편)와 함께 뚤레후 북방에 상륙했습니다.
지휘관 수디아르또 중령을 잃고서 우여곡절 끝에 히뚜해안을 장악한 정부군은 스노빠티 작전계획에 따라 계속 전진하다가 히뚜 뒷편 고지대에 다다르자마자 다시 치열한 전투에 휘말렸습니다. RMS군은 비록 히뚜해안에서 물러났지만 조금만 틈을 줘도 반격하여 정부군의 움직임을 위축시켰고 정부군 측에 많은 사상자 발생을 강요했습니다. RMS군은 벼랑과 구릉지대, 그리고 굽이치는 오르막길투성이인 와낫(Wanat)지역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므로 격전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군이 피해를 무릅쓰고 계속 밀어붙이자 결국 견디지 못한 RMS군은 마침내 떨라가꼬독(telaga Kodok)방면으로 후퇴해 갔습니다. 그러자 수리요 수반드리오 소령 휘하의 백골대대는 아마카랑산과 헬라산을 우회하여 측면으로 기동했고 백골 305부대가 하살(Hasal)지역에서 적과 교전하자 붉은 코끼리 362부대의 2개 중대가 백골부대를 지원했습니다.
뚤레후에서도 안전한 상륙이 무색하게 해안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KNIL 부대와 치열한 교전이 벌어져 5월3일대대에서만 20명이 전사했습니다. 슬라멧 리야디 중령의 부관 수끼르모 중위(훗날 대령 예편)도 총상을 입어 MV.와이껠로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16시경 RMS의 방어선을 돌파한 합주국군은 8킬로미터를 더 전진해 정글 한 복판에서 다시 RMS군과 조우해 교전을 벌이다가 폭우가 쏟아지면서 각자의 진지에서 밤을 맞게 됩니다.
“그렇게 비가 쏟아붓는데도 까윌라랑 대령이나 슬라멧 리야디 중령 모두 피로에 지쳐 길섶에서 잠들어 있더라구요. 우린 비옷도 없고 텐트도 없었어요. 그런 건 당시 우리에겐 꿈에서나 만져볼 수 있는 사치품들이었죠”
훗날 TNI 전군사령관을 역임하게 되는 M 유숩 대위는 당시를 그렇게 회고했습니다.
아침이 밝자 전투가 다시 벌어졌고 저격수들이 극성을 부려 부대의 전진은 매우 느렸습니다.
10월 2일 목요일 새벽 05:00시 미명에 술리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즘바딴두아 지역에 352대대의 수미트로 중대가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보고를 들은 슬라멧 리야디 중령은 혼자 찦을 몰고 암본 동쪽해안의 뚤레후(Tulehu)마을 외곽을 빠져나갔습니다. 잠이 덜 깬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서 경례를 붙이면서도 리야디 중령이 혼자 나서는 모습에 불안해졌습니다. 그건 무모한 일이었거든요. 그들이 뚤레후에 상륙한 건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공화국군은 이제 겨우 술리(Suli)지역 근처까지 진주했을 뿐 남말루꾸공화국 수도인 뉴빅토리아까지는 아직 많은 거리를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반란군은 아직 암본섬의 상당부분을 장악한 상태였고 뚤레후와 술리 사이엔 자신을 교묘히 은폐한 많은 저격수들이 타겟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정부군 야전사령관인 리야디 중령은 그들 저격수들이 노리는 가장 중요한 타겟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리야디 중령은 RMS로부터 노획한 오웬기관단총 한 자루만으로 무장한 상태였습니다.
병사들이 우려했던 대로 도중에 숲 한 가운데에서 매복을 당한 리야디는 불행 중 다행으로 근접거리에서 왼쪽 팔에 총상을 입고서도 탄창이 다 비도록 적이 도망친 방향으로 총을 쏴댄 후 급히 부대로 돌아와 부상을 치료했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까윌라랑 대령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야전의 부하들 사이에서는 리야디가 ‘근거리에서 총격을 받고도 끄떡없는 불사신의 지휘관’이라는 소문이 빨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것은 좋은 징조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부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4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술리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0월 4일 RMS군이 매우 치밀한 전술작전을 펼쳐 하살과 떨라가꼬독에 진출한 정부군을 총반격하고 나섰으므로 305부대와 362부대는 모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RMS군은 10월 7일에도 히뚜지역까지 공격해 들어와 정부군은 해안 가까이까지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해안 가까이에선 인근 KRI 라자왈리의 함포지원과 항공기 공중지원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정부군은 그곳 방어선을 기점으로 다시 반격에 들어가 하살 방면으로 추격해 들어갔고 RMS 잔당들은 떨라가꼬독과 두리안빠따 지역에서 정부군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당초 정부군은 상륙 후 4-5일 내에 암본을 함락시키려 했으나 예상보다 강한 저항때문에 부득이 작전일정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까윌라랑 사령관이 최전선까지 나와 전황을 직접 확인한 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즉각 암본에 상륙, 점령할 것을 독려했습니다. 암본의 RMS군은 만 깊숙히 위치하고 있어 접근이 용이치 않았습니다. 까윌라랑 대령은 암본 남쪽 버구알라(Beguala)만에도 상륙을 지시했는데 이는 보충병력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RMS반란을 진압하면서 여러 섬들을 거쳐온 병사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사망자와 부상자들도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병력보강은 어차피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번째 스노빠띠 작전의 개시일이 11월 3일로 결정되었습니다. 결전의 날을 앞두고 정부군은 3개 그룹으로 재편성했습니다. 그 제1군은 수르요 수반드리오 소령의 지휘 아래 백골대대, 가자마다 352대대, 수따르노(Soetarno)대대를 놓았고 제2군은 슬라멧 리야디 중령 휘하에 워랑대대, 글롭파트 대대, 마흐뭇 대대, 파아(Faah) 분견대 메단 포병대, 팬저기갑부대, 제니 공병대를 편성했고 제3군은 아흐맛 위라나타꾸수마 소령 밑으로 5월3일대대, 루까스 까르따르죠(Lukas Kastardjo)대대, 뽀니만(Poniman)대대를 편성한 것입니다. 당연히 리야디 중령이 주력을 담당했습니다.
11월 3일 작전계획에 따라 제1군의 352부대는 히뚜지역 왼쪽의 샛길을 통해 떨라가꼬독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교전 첫날 그들은 와넷 철교에 교착되고 말았는데 이는 RMS가 해당 지역을 더욱 견고히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스민 소령은 352부대원들을 독려해 소총에 대검을 부착하고 RMS 진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이 치열한 백병전에서 양쪽 모두 심대한 사상자가 발생했고 두 시간의 사투 끝에 RMS군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결국 정부군이 와넷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352대대는 1개 중대 병력을 잃었고 RMS군은 포로 한 명도 남지 않고 모두 전멸했습니다. RMS군 역시 칼날같은 시퍼런 각오를 다지고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352대대와 동시에 히뚜 우측 샛길로 기동했던 수따르또대대는 비교적 수월하게 전선을 돌파해 RMS군을 두리안빠따 지역까지 몰아붙였습니다. 이렇게 두 개 대대의 동시공격으로 정부군은 그날 오후 떨라가꼬독 지역을 확보했고 백골대대는 그 배후에서 히뚜지역에 남은 RMS 잔당들을 소탕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352대대의 2개 중대가 떨라가꼬독에서 느거리나니아(Negeri Nania)와 빠소라마(Paso Lama) 지역으로 들어가는 지름길로 기동했고 그 후 본대가 대로를 통해 두리안빠따로 이동해 갔습니다. 그들은 최대한 빨리 빠소-히뚜-라하를 잇는 삼거리를 확보해 정부군에게 밀려 퇴각하는 RMS 부대의 퇴로를 끊으려 했습니다.
한편 수따르노 대대는 하살에서 출발해 루마띠가(Rumah Tiga)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도로를 따라 기동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루마띠가를 점령한 후 그들은 적이 집결해 있는 갈라라(Galala) 지역에 엄호포격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RMS의 강력한 저항으로 시간을 대지 못하는 동안 13:00시경 제2군이 바뚜메라(Batu Merah)지역까지 기동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날 새벽 02:30시 제2군의 슬라멧 리야디 중령은 계획대로 파(Faah)분견대를 앞세워 바뚜공(Batugong)인근 또이사뿌(Toisapu)지역에 상륙로를 열도록 하고 마흐뭇 부대를 빠소-느거리라마의 북쪽 방면으로 진출시켰습니다.
05:30시 파분견대와 마흐뭇대대는 서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RMS군과 교전을 시작했고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인 끝에 파대위와 그의 부하들은 피를 철철 흘리며 바뚜공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이제 빠소지역에 느거리라마, 바뚜공, 그리고 뚤레후-와이따띠리 등 3개방면으로부터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방으로 빠소를 함락시킬 준비가 된 것입니다.
클롭파트 소령의 돌격부대는 포격이 빗발치는 전선 최전방에서 악전고투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와이따띠리를 확보하려 했는데 RMS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4주 이상 교착상태에 빠졌습니다. RMS군은 야포부대의 포격지원과 기갑부대를 최대한 활용하여 정부군의 진군을 막았는데 그 과정에서 RMS와 정부군 양측의 야포부대, 기갑부대 등 중화기부대들끼리의 직접적 교전도 처음으로 벌어졌습니다. 기갑부대의 근접전에서 정부군은 탱크 3대를 잃으면서 RMS군의 팬저 6대를 파괴했고 포격전에서도 RMS는 크게 밀려 대부분의 장비를 놓고 도주하기 급급했습니다. 산 중턱의 RMS의 진지와 지하은폐시설들도 하나 하나 소탕되었습니다.
훗날 A. 론도누우라는 작가가 집필한 HV 워랑의 자서전 ‘우리들의 초상” Potret diri 이라는 책에서 와이따리리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의 치열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워랑부대는 와이따띠리에서 적군의 막강한 저항에 부딪혀 치열한 교전을 시작했다. 적은 자연적 지형지물을 이용해 매우 전술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진지의 앞으로는 강이 있었고 왼쪽과 오른쪽은 험한 벼랑과 급한 경사지로 보호되어 있어 정부군으로서는 매우 극복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게다가 RMS군은 옛날 일본군이 버리고 간 벽돌로 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했기 때문에 단번에 무너뜨릴 수도 없었으므로 우린 그 진지들을 하나하나 치고 들어가 소탕해야 했다. RMS군은 잘 무장되어 있었고 야포와 기갑부대의 지원도 받고 있었으므로 거기서 처음으로 야포와 야포, 탱크와 탱크가 맞붙는 전투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18:00시 해가 질 무렵 RMS의 강력한 방어선을 마침내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RMS군은 반격을 감행해 왔다. 그들은 기관총과 박격포, 그리고 팬저의 탱크포까지 동원했지만 워랑대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군의 공격은 잠시 지연될 수 밖에 없었고 적의 월등한 전투력에 수세로 밀리면서 우선 방어에 치중해야만 했다.”
RMS군은 중화기도 다수 보유했던 반면 워랑대대는 기본화기만 갖추고 있었으므로 화력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수세로 돌아섰을 때 워랑대대는 적 탱크포, 야포, 박격포의 쉬운 타겟이 되었고 인명피해가 늘면서 사기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야포지원과 기갑부대를 거느린 제2군의 클롭파트 부대가 합류하면서 상황은 다시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와이따띠리의 야전상황은 이처럼 매우 급박했습니다. 버구알라만 해안은 도로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그 사이엔 야자나무들이 자라 있었습니다. 까윌라랑 대령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와이따띠리에서의 전투는 정말 버거웠다. 적들은 철통 같은 방어작전을 펼쳤고 그 결과 우린 전혀 전진할 수 없었다. 우린 거기서 4주간이나 묶여 있었다. 와이따띠리의 일부지역을 우리 손에 넣긴 했지만 적들은 나머지 부분을 내어주지 않았다. 와이띠띠리의 야자수들을 모두 포격을 맞아 부러져버려 마치 1943년 11월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타라와섬, 길버트섬을 떠올리게 했다.”
말루꾸의 RMS 반란에 맞서 전국에서 끌어 모은 병력을 이끌고 1950년 7월 17일 반란진압작전이 사작된 후 우여곡절끝에 암본 상륙이 시작되어 10월 3일 리야디의 부대가 알렉산더 에버트 까윌라랑 대령과 함께 반란군 수도인 뉴빅토리아를 점령하기 위해 전진했지만 맹그로브숲이 우거진 늪지대에서 그들은 정글카빈과 오웬기관총으로 무장한 RMS군의 강력한 저항과 변칙적 반격을 받으며 그렇게 한 달 이상 지체하면서 큰 인명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간신히 뉴빅토리아에 들어서면서도 리야디의 부대는 RMS부대에게 다시 공격을 받았습니다. 11월 3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전투 마지막 날인 11월 4일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RMS군의 저항은 더욱 맹렬했습니다. 훗날 TNI 소장으로 예편한 하인픽터 워랑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암본전투 마지막날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암본시내 전투에서 우린 강력한 저항을 마주해야 했다. RMS군은 이미 동쪽 전선에서 밀리고 있었지만 기갑부대와 예상보다 많은 KST, 레드베레, 구 KNIL 부대 등 예비병력을 아직도 운용하고 있었다. 우린 실탄부족에 시달렸고 그래서 자주 곤경에 처하곤 했다. 하지만 슬라멧 리야디 중령은 그럴 때마다 우리들 사이에 나타나 사기를 북돋으며 독려하곤 했다. 내 부하들은 이미 2개 중대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상태였다. 적의 기갑부대는 아직도 맹렬히 기세를 떨쳤고 내 부하들 중 구석으로 몰린 1개 소대가 그들에게 꼼짝없이 전멸당하는 것이 보였다”
그날 탱크를 타고 전투를 독려하던 리야디 중령은 암본시내의 반군기지를 향해 전진하다가 저격수에게 피격당합니다. 복부를 관통한 총상을 입은 리야디는 병원선으로 급히 후송되었으나 전선으로 되돌아가려는 그의 고집을 꺾기 위해 의사들은 다량의 모르핀을 주사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시작되었으나 리야디의 용맹도, 용량을 초과해버린 모르핀도, 리야디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사이 너무 많은 출혈을 했고 내장 곳곳이 끊겨나간 복부의 총상은 복구되기엔 너무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당차고 총명했던 슬라멧 리야디 중령이 인도네시아 근대사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았다면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는 무척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발의 총탄이 젊은 영웅을 그렇게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리야디 중령은 결국 사랑하는 신부 수라크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그날 밤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날이 전투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말입니다. 마침내 그날 정부군이 뉴빅토리아를 함락시킨 것입니다. 리야디는 시신조차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암본에 뭍혔습니다.
그의 전공을 기려 많은 장소와 건물들이 그의 이름을 따랐는데 그 중 5.8킬로미터에 달하는 수라카르타의 중앙통 도로가 대표적이고 인도네시아 해군의 프리깃함 한 척도 KRI 슬라멧 리야디라고 그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중령으로 전사했고 사후 육군준장으로 추서되었습니다.
리야디는 죽은 후 많은 훈장과 서훈을 받았는데 그 중엔 1961년 5월의 빈땅삭띠 훈장과 1961년 7월의 빈땅게릴라훈장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2007년 11월 9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에 의해 인도네시아 국민영웅의 칭호를 받습니다.
한편 마누사마와 일단의 말루꾸 정치인들처럼 네덜란드로 망명할 기회도 놓친 수모킬은 뉴빅토리아(Nieuw Victoria)가 함락되자 남은 병력을 이끌고 스람섬으로 들어가 정부군과 오랜 기간 대치하며 힘겨운 항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위상은 이미 RMS군이 아니라 반란잔당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1963년 1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수모킬이 체포되었고 그는 부루섬과 스람섬에 연금되어 있다가 1964년 4월 삐에르 윌리암 블록(Mr. Pierre-William Blogg) 등의 변호사를 대동하고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의 모국어는 분명 말레이어였음에도 그는 재판에서 굳이 네덜란드어로만 말하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네덜란드어를 알아 듣지 못하는 일부 법관들과 군인들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1966년 4월 12일 오비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수모킬이 죽자 네덜란드에 있던 RMS 망명정부에서는 마누사마를 RMS의 다음 대통령으로 추대했습니다. 마누사마는 1992년까지 26년간 RMS 망명정부의 제3대 대통령으로 재직했고 1993년-2010년의 17년간 제4대 대통령을 지낸 프란스 뚜뚜하뚜네와(Frans Tutuhatunewa)를 거쳐 지금은 죤 와띨레떼(John Watillete)라는 작가가 제5대 대통령으로 재직중입니다.
네덜란드가 350년간 동인도제도를 식민지배하면서 여러 경로와 사유로 네덜란드에 이주한 인도네시아계 이민들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지만 RMS군의 뉴빅토리아가 함락된 다음 해인 1951년엔 암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말루꾸인들이 대거 네덜란드로 이주했습니다. 이는 KNIL 부대원들이 원하는 연고지에서 전역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전역조건 때문이었습니다.
암본인들은 KNIL 부대의 군복을 입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고 네팔인들로 이루어진 영국군의 구르카(Ghurka)부대만큼이나 암본인으로 이루어진 KNIL 부대는 세계적으로 용맹을 떨쳤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에 들어서 KNIL부대의 해산이 확실시되자 인도네시아 전역에 산재된 KNIL 부대에 배치되어 있던 암본인들은 크게 실망하며 KNIL에 잔류하기를 희망했고 그게 아니라면 네덜란드군이 되어 네덜란드에 따라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희망은 모두 거부됩니다. KNIL은 반드시 해산되어야 하는 떨거지 신세로 전락해 버렸고 네덜란드는 그들을 전장으로 데려가는 거라면 몰라도 집으로 데려가기는 싫었으므로 가능한한 인도네시아에서 전역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선택지는 반란이 진행중이던 RMS에서 전역하여 RMS반란에 가담해 말루꾸에 자기들의 공화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전지역에 예전과 같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던 네덜란드 측은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암본에 데려다 주려 했지만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는 당연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950년 11월 암본이 함락되고 반군잔당이 스람섬으로 들어가자 이제 암본인 KNIL 부대원들은 스람섬에서 전역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갈 수 없다면 곧 소탕될지언정 반군이 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네덜란드 측은 이제 백여년간 자기들을 위해 싸워 준 KNIL부대의 암본인 병사들에게 자기들이 세운 ‘전역조건’이란 약속도 지켜주지 못한다는 도덕적 손가락질을 받을 위기에 몰렸습니다. 결국 네덜란드의 결정은 그들을 네덜란드에 데려가 전역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2,500여명의 암본인 KNIL 부대원들이 가족들과 함께 네덜란드에 도착했고 네덜란드 땅을 밟음과 동시에 전역하여 민간인이 되었습니다..
영국군을 따라 영국에 이주한 인디아인들이 빠른 속도로 주류사회에 편입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들 암본인들은 언젠가 인도네시아로 추방되어야 할 임시체류자로 분류되어 수용소 같은 임시숙소에서 모여 살아야 했는데 그중 일부는 나찌시절 유태인수용소를 재활용한 곳도 있었습니다. 1968년까지도 80% 이상의 암본 이주자들은 네덜란드 국적을 얻지 못했고 그것은 네덜란드 주류사회와 현지 암본인 커뮤니티 사이에 넘지 못할 배신과 깊은 실망의 골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당시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지만 뉴빅토리아가 함락된 후 70년이 가까이 되도록 아직도 RMS의 망명정부가 네덜란드에 존재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당시 암본인들의 깊은 절망과 최후의 보루를 지킬 결속점을 고수하려는 그들의 끈질긴 고집 같은 것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습니다.
2016. 2. 16.
참고 :
1) MKSSEJ6 블로포스트
2) 위키백과
3) 까스꾸스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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