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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수까르노의 여인들

beautician 2016. 2. 20. 02:51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14)


수까르노의 사랑과 전쟁 

 

여러 챕터들을 점철했던 전쟁과 반란의 에피소드에서 잠시 벗어나 이 시리즈의 주인공 수까르노에게 돌아가 그의 개인사를 들여다 보며 숨을 고르기로 합니다.

 

수까르노는 1954년에 살라띠가에서 30세의 과부 하르띠니(Hartini)를 만나 결혼까지 이르게 됩니다. 세번째 부인이었던 파트마와띠는 이 네번째 결혼에 격분하여 수까르노를 떠났지만 공식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파트마와티는 여전히 영부인의 칭호를 유지했지만 수까르노와 함께 보고르궁에 살게 된 하르띠니가 실질적인 영부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43년 수까르노와 결혼했던 벙꿀루의 처녀 파트마와티는 12년간 두 아들과 세 딸 등 다섯명의 자녀를 두었고 대통령 수까르노의 가족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자녀들의 이름에도 수까르노의 아들’, ‘수까르노의 딸이라는 의미로 수까르노뿌뜨라, 수까르노뿌뜨리라는 단어를 포함시켰습니다.  수까르노 이후 수하르토, 하비비, 압두라흐만 와히드를 거쳐 인도네시아의 제5대 대통령이 되었던 메가와띠 수까르노뿌뜨리는 파트마와티의 장녀로 그 이름은 수까르노의 딸, 위대한 여인 메가와띠라는 거창한 뜻을 갖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서는 여성권익 개선과 이를 위해 결혼법을 고쳐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파트마와띠는 처음엔 이러한 법개정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남편 수까르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부터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여권투쟁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수까르노의 남성우월주의와 이슬람식 중혼제도에 맞서 여성권익의 투사가 되어달라는 요청이 그녀에게 빗발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까르노는 이전 부인들을 모두 이혼으로 정리했던 것과 달리 파트마와티와는 이혼하지 않고 아내를 넷까지 둘 수 있도록 하는 이슬람법에 따라 본처의 허락을 받아 두번째 부인을 두려 했습니다.

 

자존심을 크게 다친 파트마와티는 대통령궁을 나와 자카르타에 따로 집을 얻어 살게 되었고 이혼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주변의 중재를 통해 영부인의 칭호는 유지하면서도 그렇게 두번째, 세번째 부인을 계속 들이는데 파트마와티가 첫번째 부인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게 된 상황은 여성권익운동에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파트마와티는 이혼을 원했지만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대통령 수까르노의 의지를 거슬러 이혼절차를 주재할 이슬람 성직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성단체들은 그녀에게 차라리 대통령궁으로 다시 돌아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라고 강권했고 수까르노의 새 부인 하르띠니는 그런 파트마와티의 심정을 이해하는 듯 했지만 정작 그 소식을 들은 수까르노는 짜증을 낼 뿐이었습니다.

 

한편 활발히 사회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한 파트마와티는 특히 폐결핵 아동들에게 관심을 가져 수까르노부인 재단(Ibu Soekarno Foundation)을 통해 모금한 돈으로 1954, 지금의 파트마와띠 병원(Fatmawati Central General Hospital)의 전신인 마담수까르노 병원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1980 5 14일 메카에 움로(Unroh – 하지 Haji와는 별도로 평시에 행하는 성지순례)를 다녀오던 길에 쿠알라룸푸르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그녀는 1945 8 17일 독립선언 낭독 당시 사용되었던 인도네시아 국기를 직접 재봉하는 등 격랑의 시절을 수까르노와 함께 보냈다는 사실과 여성권익과 사회활동의 공헌을 인정받아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었고 그녀의 고향 벙꿀루의 공항은 그녀의 이름을 따 파트마와티 수까르노 공항이라 붙여졌습니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수까르노의 여인들을 잠시 둘러 보기로 합니다. 수까르노는 평생 9명의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수까르노는 호남형의 미남이었고 명망높은 정치가이자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많은 여성들이 그를 따른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부인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염문을 뿌린 상대들도 많았고 언젠가 헐리웃의 여배우들을 만난 수까르노의 모습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첫 아내였던 민족주의 지도자 쪼끄로아미노또의 딸, 씨띠 우따리(Siti Oetari) 13년 연상의 반둥 하숙집 주인으로 수까르노의 두번쨰 아내가 되어 20년간 곁을 지켰던 잉깃 가르나시(Inggit Garnasih – 반둥엔 그녀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음), 네덜란드 식민정권에게 체포되어 벙꿀루에 유배 중이던 수까르노를 만나 잉깃을 밀어내고 세번째 부인으로 들어앉았던 시골처녀 파트마와티의 이야기는 이미 앞서 소개한 바 있었습니다.

 

29세의 나이로 수까르노의 네 번 째 부인이 된 하르띠니는 다섯명의 자녀를 둔 과부였습니다. 당시 파트마와티는 인도네시아가 독립하던 격랑의 시대에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부인이었으므로 그녀의 위상을 위협하는 한낱 과부인 하르띠니는 매체와 여성단체들의 호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수까르노와 결혼하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수까르노가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결국 다른 여자들과도 사랑하고 결혼하게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파트마와티가 별거하고 있던 남편의 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활발한 사회생활을 통해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것과 달리 하르띠니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끝까지 수까르노의 곁을 지켰습니다. 결국 수까르노는 다른 여성들의 품을 들락거렸지만 1970 6 21일 그의 임종을 함께 했던 사람은 하르띠니였습니다.

 

하르띠니는 동부자바 뽀노고로(Ponogoro)에서 1924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산림청 공무원이어서 늘 도시를 옮겨 다니며 살아 말랑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반둥의 우스만(Oesman) 가문에 수양딸로 들어가 그 곳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마칩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처녀로 자라나며 뭇 남성들에게 흠모의 대상이 되다가 수워노(Suwono)라는 남자에게 시집가 살라띠가(Salatiga)에 살게 되지만 남편은 자식만 다섯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1952년 수라바야의 슈하다(Syuhada) 회교사원 준공식에 참석하러 가던 수까르노와 만나게 되는데 수까르노는 첫눈에 하르띠니에게 마음을 뺏깁니다. 물론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여인에게 대체로 쉽게 마음을 뺏기는 남자였습니다.

 

일년 후 수까르노는 쁘람바난 사원(Candi Prambanan)의 라마야나 노천극장 준공식을 위해 족자에 갔다가 하르띠니를 떠올렸고 지인을 통해 스리하나라는 가명으로 한 통의 편지를 써 살라띠가의 하르띠니에게 보냈습니다. 받는 사람의 이름도 하르띠니가 아니라 스리하니였습니다. 둘은 그동안 그렇게 가명으로 편지를 교환하며 애정을 키워 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스리하나는 스리하니에게 수십통의 편지와 선물들을 보냈을 게 틀림없습니다.

 

쉽게 사랑에 빠지는 그의 로맨틱한, 또는 바람기 가득한 성향을 탓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백보 양보해도 수까르노는 파트마와티에게 관한 한 타이밍을 잘못 잡았습니다. 그는 1953 1 15, 막내아들인 구루 수까르노뿌뜨라(Guruh Soekarnoputra)가 태어난 지 달랑 이틀 후, 둘째처를 들이겠다며 아직 몸을 추스리고 있던 아내 파트마와티에게 허가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파트마와티는 배신감과 분노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마지못해 수락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는 중혼을 반대하는 여성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됩니다. 그 와중에 수까르노는 1953 7 7일 찌빠나스궁(Istana Cipanas)에서 하르띠니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르띠니는 1954년 보고르궁으로 이사온 후 보고르에서 벌어지는 수까르노의 각종 공식행사에 안주인의 자격으로 늘 수까르노의 곁에 섰습니다. 그녀는 수까르노가 실각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국가행사에 실질적 영부인으로서 참석했는데 그중엔 호치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노로봄 시아누크 캄보디아 왕자,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비를 위한 연회들도 있었습니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수까르노는 강력한 민족주의와 혁명노선으로 들어섰고 하르띠니는 보고르궁에서 수까르노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아내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르띠니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수까르노의 결혼행진곡은 끊임없이 울려퍼져 1961년엔 랏나 사리 데위와, 1963 5월엔 하르야띠와, 1964 8월엔 유리끄 상어르와 줄줄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를 향한 하르띠니의 한결같은 마음은 늘 변함이 없었으므로 굳은 충정을 가진 자바여인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수까르노는 하르띠니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많은 여성들을 만나고 또 결혼하지만 그가 하르띠니를 선택했던 결정만큼은 수까르노의 인생에 있어 신의 한 수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1970년도에 남편 수까르노를 먼저 보낸 후 2002 3 12일 세상을 떠났고 슬하의 자녀중 따우판 수까르노뿌뜨라(Taufan Soekarnoputra)와 바유 수까르노뿌뜨라(Bayu Soekarnoputra)는 수까르노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수까르노와 별거하기 시작한 파트마와티는 이제 수까르노의 여성편력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곁을 지키던 하르띠니의 마음을 찢은 첫번째 여자는 항공기 승무원 출신 까르띠니 마노뽀(Kartini Manoppo)였습니다. 수까르노는 그녀와 다섯번째 결혼을 합니다. 수까르노는 그녀를 직접 본 것도 아니고 가루다항공 승무원이던 당시의 초상화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전해집니다. 볼랑 지역 출신의 까르띠니는 명망높은 집안에서 잘 교육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수까르노와의 사이에서 1967년 또똑 수리야완 수까르노(Totok Suryawan Sukarno)라는 이름의 아들을 얻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수까르노의 생애에 그리 많이 언급되지 않지만 수까르노와의 결혼생활은 1968년까지 9년간 꽤 오래 이어졌습니다.



 

여섯째 부인인 일본인 네모또 나오꼬는 랏나 사리 데위(Ratna Sari Dewi), 또는 데위 수까르노(Dewi Soekarno)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40년생 토쿄 출신 19살의 나오꼬가 57살의 수까르노를 만난 것은 1959년 토교 긴자의 임페리얼 호텔 인근 호스테스바에서였습니다.  나오꼬는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신분으로 바의 접대부로 일했고 수까르노는 일본을 국빈방문 중이었습니다. 일국의 국가원수가 외국에서 호스테스바에 가는 것이 흔한 경우는 아니었겠죠. 아무튼 거기서 불꽃이 튀었습니다.

 

나오꼬는 1962년 인도네시아에 들어와 수까르노와 결혼하면서 이슬람에 입교했고 수까르노는 나오꼬에게 산스크리트어로 여신의 보석 같은 정수라는 의미의 랏나 사리 데위 수까르노라는 인도네시아 이름을 붙여 줍니다. 마치 수까르노 교도를 만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파트마와티 때부터 그의 아내들 대부분이 자신의 이름 뒤에 수까르노라는 남편의 이름을 붙여 함께 사용했는데 데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의 명성이 시들기 시작하던 1963년 인도네시아를 떠난 그녀는 20년간 프랑스에 머물다가 1983년이 되어서야 인도네시아에 돌아왔습니다. 수까르노가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난 후였으므로 아름다운 그녀의 귀환은 인도네시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다시 스위스, 프랑스, 미국 등 여러나라를 전전하며 화제를 뿌리던 그녀는 2008년에 이르러 토교 시부야에 안착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녀는 수까르노와의 사이에서 딸을 하나 얻어 까르띠까 사리 데위 수까르노(Kartika Sari Dewi Soekarno)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데위 수까르노는 솔직담백한 성격으로 유명하고 일본에서 그녀는 데위부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곤 했습니다. 그녀는 수까르노를 하야시키고 정권을 잡았던 수하르토가 세상을 떠난 2008 1월 한 뉴스에 출현해 수하르토는 국민들을 철권으로 통치한 캄보디아의 폴포트 같은 폭군이었다며 맹비난했습니다.

 

2012년 이후 그녀는 16마리의 개를 키우며 일본세무당국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장품사업과 함께 자선사업도 펼치고 있습니다. 노년에 접어들고서도 늘 예쁘게 단장하는 그녀는 아직도 파트타임으로 일도 하고 일본 TV에도 출연하고 2005년 토쿄에서 열렸던 미스 인터내셔널 미인대회에서는 배심원으로 참가하기도 했으며 연예인 못지않게 성형의혹이나 페이스리프팅 등과 관련한 구설수에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설명하는 등 매체들을 늘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1992년 미국 콜로라도 아스펜에서 참석한 한 파티에서 필리핀 전 대통령의 손녀 미니 오스메냐(Minnie Osmeña)와 말다툼을 벌인 것은 세계곳곳에서 해외토픽으로 다루어질 만큼 유명한 사건이 되었는데 데위는 그녀의 얼굴을 와인잔으로 때려 37바늘을 꿰매게 하고 자신은 소란죄로 34일간 아스펜 구치소에 갇혔던 일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이미 몇 개월 전 다른 파티에서부터 서로 앙숙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필리핀 부통령으로 출마하겠다던 오스메냐의 포부에 데위가 비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들 입장에선 예쁘기만 하면 항공기를 폭탄테러 해도 용서해 주기도 하지만 여자들끼린 그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데위는 한 화보집을 출간했는데 그녀 자신의 반라포즈와 문신 비슷한 보디페인팅 작품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수까르노의 이름을 더럽혔다며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 화보집은 인도네시아에서 발매되지도 않았음은 물론 일본에서도 즉시 판매금지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1967년 수까르노가 하야한 후 그녀는 정치에 간여하지 않았고 유엔환경프로그램(UNEP)에서 일하며 난민들과 북한 같은 정권 하에 사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희망을 나타낸 바 있었습니다. 의붓딸인 메가와띠 정권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떄 그녀는 메가와띠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서서히 알아가게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무슬림여성이 대통령을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라는 인상적인 답변을 하기도 했습니다.



 

데위 같은 미인을 아내로 맞고서도 수까르노는 이번엔 하르야띠(Haryati) 1963 5 21일 일곱번째 결혼을 합니다. 하르야띠는 무용수이자 국무부 예술과의 공무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공연을 보러왔던 수까르노는 그녀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그녀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고 결국 23살의 하르야띠와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2년밖에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엔 아이가 없었고 수까르노는 성격차이를 들어 하르야띠와 이혼했던 것입니다. 우연이었을까요? 당시 수까르노는 데위와 다시 가까워지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이해는 갑니다. 데위의 미모는 압도적이었거든요.

 

그러나 세상은 넓고 아름다운 여인들은 얼마든지 많은 법이죠. 1963년 유리끄가 수까르노의 눈에 띈 것은 고등학교 2학년으로 비네까 뚱갈 이까(Bhinneka Tunggal Ika) 대원이 되어 붕까르노 경기장에서 뿌사카 깃발(Bendera Pusaka)을 게양할 때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아청법으로 당장 딸려 들어갈 일이지만 수까르노는 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리끄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는 아마도 청순한 유리끄의 모습에서 떠나간 데위의 미모를 발견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수까르노는 유리끄에게 사랑의 편지와 함께 값비싼 목걸이를 동봉해 보냈습니다. 고가의 선물공세를 벌이는 국가영웅 앞에 어린 여학생의 마음이 넘어오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1964 4 1일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것이 수까르노의 여덟번째 결혼식이었습니다. 그 결혼생활은 3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국가 최고권력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몇 번 째일지도 모를 어린 첩으로서의 아내 말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대통령궁에 들어가 함께 사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화려한 이름표와는 달리 매일밤 왕이 자기 침소에 들기를 고대하던 구중궁궐 속의 후궁만도 못한 상황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녀는 늘 외로움과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수까르노는 아직 부모와 함께 살고 있던 유리끄를 위해 동부 자카르타 찌삐낭 지역에 살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집은 도망친 사기꾼에게서 검찰청이 압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집은 높은 담장과 튼튼한 철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리끄는 그 밖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자궁외임신으로 오랫동안 후사다(Husada) 병원에 입원해야 했는데 결국 자궁을 들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다시는 임신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아리핀이란 이름의 의사가 관심을 보이며 TV와 외국잡지를 가져다 주는 등 많은 배려를 해 주었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외국잡지에는 이태리 유명 여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수까르노가 만나는 사진이 실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질투를 한 것은 수까르노 쪽이었습니다. 그 젊은 의사가 유리끄에게 배려를 배푼 것을 알게 된 수까르노는 병원에서 언성을 높이며 TV 와 잡지들을 내다 버리게 했고 그 의사를 신식민주의 괴뢰로 엮어 잡아가 조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날도 끝나갔습니다. 어느날 수까르노가 그녀를 찾아 왔습니다. 헌병들이 경호하는 찝을 타고 나타난 수까르노의 안색은 무척 어두웠습니다. 이것은 1967 3 12, 그러니까 수하르토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며칠 후의 일이었습니다. 수까르노는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대통령궁에서 쫒겨 나오던 길이었던 것입니다. 수까르노가 무너져 내리면서 유리끄와 가족들의 삶에도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대통령의 가족으로서 수령해왔던 돈이 더 이상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20여명에 달하던 식모와 하인들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까르노가 남부 자카르타 위스마 야소 건물(Wisma Yaso – 지금의 Museum Satria Mandala 군사박물관) 안에 연금되자 유리끄의 가족들은 더 이상 찌삐낭의 저택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집을 비우라는 검찰청의 요구가 빗발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리끄는 수까르노가 준 집을 그렇게 간단히 넘기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까르노가 보낸 메모가 인편으로 전달되어 왔습니다. 담배봉투에 갈겨쓴 수까르노의 친필이었습니다. 그 메모의 형태나 그 내용으로 유리끄는 수까르노가 얼마나 곤궁에 처해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가야. 그 집을 떠나는 게 낫겠다. 어차피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야.”

 

그리고 그 메모에서 수까르노는 유리끄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국내정치상황과 수까르노의 건강이 계속 악화되고 있었으므로 그의 아내라는 위상이 앞으로 유리끄의 삶과 미래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유리끄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나중엔 그 말에 담긴 수까르노의 진심을 믿고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따라 이혼에 응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수까르노의 부고를 듣게 되죠



 

수까르노의 아홉번째 부인이 될 당시 헬디 자파르(Heldy Djafar) 18세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수까르노는 65세의 노인이었고요. 헬디 역시 유리끄 못지 않게 젊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생활 역시 불과 몇 년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별하게 되는 수순은 유리끄의 경우와는 상반됩니다. 수까르노의 위상과 미래가 점점 위태로워지자 헬디 측에서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너무 어린 아내는 쓰러져 가는 거인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편 노인의 고집은 간혹 구질구질해지기도 합니다. 수까르노는 자기가 죽기 전엔 절대 이혼해 줄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죠. 하지만 헬디는 21살이 되던 해인 1968 6 19일 기어코 반자르 왕족출신인 구스띠 수리안샤 누르(Gusti Suriansya Noor)라는 남자와 두번째 결혼을 합니다. 늘 여인을 떠나가던 수까르노도 말년엔 그렇게 여인에게 버림받기도 했던 것입니다.



 

헬디 자파르는 수까르노의 부음을 듣던 당시 만삭의 몸이었으므로 수까르노의 전, 현 아내들 대부분이 참석한 장례식에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요? 1967년 수까르노를 등떠밀어 하야시킨 수하르토와는 양집안이 철천지 원수가 된 셈이었는데 헬디의 자녀 여섯명 중 딸 마야 피란띠 누르(Maya Firanti Noor)가 수하르토의 손자인 아리 시깃(Ari Sigit)과 결혼하면서 잠시 혼맥이 얽히게 됩니다.

 

재혼만 해도 인생과 촌수가 꼬이기 쉬운데 정식결혼을 아홉번 하면 자녀들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기기 쉬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까르노의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서는 복잡한 플로챠트같은 족보도 나와 있지만 어떤 고마운 분께서 아래와 같이 사진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르야띠의 사진이 데위의 것으로 잘못 게재되어 있지만 말이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도네시아의 5번째 대통령을 지낸 메가와띠 수까르노뿌뜨리(Megawati Sukarnoputri)는 파트마와띠에게서 얻은 딸이고 그녀의 막내동생인 구루 수까르노뿌뜨라(Guruh Sukarnoputra 1953년생)는 수까르노의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아 안무가이자 작곡가로 일하며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해 ‘Untukmu, Indoensiaku’ 등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메가와띠의 투쟁민주당 DPR 의원은 역임했고 그의 형 군뚜르와 누나들인 라흐마와띠, 쑥마와띠 등도 모두 정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수까르노가 나오꼬에게서 얻은 딸 까르띠까는 2006년 바클리 글로벌은행의 CEO였던 네덜란드인 프릿츠 세에거스(Frits Seegers)와 결혼했습니다. 수까르노는 그렇게 아홉번 결혼하면서 그 중 다섯 명의 아내로부터 모두 열 명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2016. 2. 19.

 

참고 :

1) 나빌라츠 블로그 (http://nabilafz-blog.tumblr.com)

2)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