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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미나하사의 남자들 - KNIL 쿠데타

beautician 2016. 2. 11. 01:05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12)



미나하사 KNIL 쿠데타

 

1949 12 27일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주권승인은 열도 각 부분에서 다양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인도네시아의 북단인 북부 술라웨시도 큰 충격을 받은 곳 중 하나였습니다.



 

동인도네시아 자치주는 발리, 롬복, 술라웨시, 암본 및 오늘날의 NTT주와 NTB 주를 모두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이곳이 한 개의 국가로 남았다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뉴기니 사이의 거대한 해상제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지역은 1945-1950년 사이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친공화국파와 친네덜란드파로 나뉘어 내부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했고 네덜란드는 그런 상황을 이용해 양쪽을 이간질 시키며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공화국군에 합류해 독립전쟁에 참전중이던 이 지역출신 TNI 장교들은 고향의 그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며 우려했는데 이들은 주로 1948년 조직된 민병대 출신으로 공화국군에 합류한 후 대체로 합동 KRT-X 군단(Korps Reserve Umum X – 일반예비군단 X)이라는 곳에 함께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대표격인 A.G 렘봉 중령(Let-Kol A.G. Lembong)이 동료인 J.F.와로우(Let-Kol J.F. Warouw)중령과 함께 H.N. 사무알 소령(Mayor H.N. Sumual), 삐엣안뚱 대위(Kapten Piet Ngantung) 등 많은 후배 장교들과 지연으로 맺어진 긴밀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제16여단으로 재편되어 마디운 공산당반란 진압에도 나섰고 네덜란드군의 제2차 공세 당시에도 최전방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1948 10월 제16여단은 네덜란드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던 깔리만탄과 동인도네시아를 해방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렘봉중령은 이때 삐엣안뚱 대위의 도움을 받아 특수부대를 조련해 북부 술라웨시의 KNIL 출신 병사들을 흡수통합을 하려 했습니다. 렘봉중령은 필리핀을 통해 북부술라웨시를 공격하려 했는데 태평양전쟁 당시 연합국소속 게릴라였던 렘봉 중령이 필리핀을 무대로 활동했던 것이 이런 작전계획을 가능케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연합군의 한 축이었던 네덜란드군을 공격하려는 렘봉 중령의 계획을 필리핀의 연합군이 승인하려 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렘봉중령은 16여단의 지휘권을 와로우 중령에게 넘기고 자신은 먼저 필리핀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1948 12 19일 네덜란드군이 제2차 총공세를 벌여 공화국군 거점들을 공격해 오는 바람에 오히려 네덜란드군에게 생포되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불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도네시아가 주권을 이양받은 후에도 여전히 네덜란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북부 술라웨시 해방계획을 세웠지만 1950 1월 웨스털링의 APRA 반란을 맞아 렘봉 중령은 그 꿈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반둥에서 동료병사들과 함께 반군들에게 사살됩니다.

 

네덜란드군의 2차공세가 계획에 차질을 주었지만 독립전쟁 중에도 KNIL 흡수통합계획은 계속 진행되어 많은 TNI 장교들이 비밀리에 깔리만딴과 술라웨시 각지에 보내졌습니다. 삐엣안뚱 대위의 지휘아래 워워르, 샘오기, 렉스아네스, 알로 땀부운 깥은 현지 청년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북부술라웨시 TNI 사령부도 설치됩니다.



주권이양 초기 동인도네시아의 상황은 태평양전쟁 직후과 같이 극도로 불안정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패망하고 자카르타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지만 동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외곽지역엔 정권공백상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지역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해군의 군정이 이루어졌고 일본패망 후엔 1945년부터는 맥아더장군의 연합군 SWPA가 장악했습니다. 연합군은 태평양전쟁 중 남서태평양 지역을 장악하면서 비악섬과 모로타이섬에 군사기지를 세워 북부말부꾸에서 술라웨시 앞바다까지를 통제권 안에 넣었고 모로타이기지로부터 날아오른 연합군 전폭기들이 암본, 마나도, 마카사르, 발릭빠빤 등지의 일본군 거점들을 폭격했습니다. 이 지역엔 전후 연합군 선발대로 호주군이 상륙했고 나중에 네덜란드 민간정부 (NICA - Netherlands Indiesch Civil Administration)에 이 지역 정권을 이양했는데 태평양 전쟁 중 호주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망명정부를 이끌었던 H. 반묵 박사가 호주군을 따라 들어와 서부 뉴기니의 머라우께(Merauke)에서 이를 지휘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인도네시아인들은 당연히 네덜란드의 귀환을 환영하지 않았으므로 깔리만탄, 술라웨시, 말루꾸 등지에서 봉기가 발생했고 호주군은 네덜란드와 현지인 민족주의 진영 사이에 끼어 곤혹스러워 했습니다. 게다가 일제에 부역한 대부분의 자바와 수마트라의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동인도네시아지역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강점기간동안 지하저항세력이 되어 연합군을 도와 일본과 싸웠던 전력이 있었는데도 네덜란드군을 코웃음치며 그들을 군화발로 짓밟으려 할 뿐이었으므로 현지인들의 반감은 더욱 사무쳤습니다.

 

한편 주권이양 이후 1949 12월부터 1950 4월 사이에 동인도네시아 출신 장교들이 대거 자바 외곽도서의 합주국군 선발대 임무를 받아 아흐맛 유누스 모꼬긴타 중령(Let-Kol Ahmad Yunus Mokoginta)과 뿌뚜헤나(Ir. Putihena)가 이끄는 동인도네시아 지역군위원회 (Komisi Militer Territorial Indonesia Timur - KMTIT)를 도왔습니다 1950 5월 북부술라웨시-북부말루꾸 사령부(Pasukan Komando Sulawesi Utara-Maluku Utara -KOMPAS SUMU )가 조직되면서 제16여단은 해체되고 와로우 중령이 KOMPAS-SUMU의 사령관으로 취임합니다. 그 전에 공화국 국방부는 벤쩨 사무알 소령(Mayor Ventje Sumual), 다안모곳 소령, 에디 가골라대위, 삐엣안뚱 대위를 마나도에 보내 네덜란드군 지역사령부로부터 공화국 정규군이 현지 치안업무를 넘겨받고 북부 술라웨시의 KNIL 부대원들을 TNI 정규군에 통합시키는 임무를 수행토록 지시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KMTIT 지역군위원회를 통해 TNI에 합류한 KNIL 출신 전투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특히 KNIL 하사관들을 부추겨 욥 와로우 중령의 제16여단 출신 TNI 병력의 도착을 방해하려 했습니다. 동인도네시아에서의 반TNI 정서조장은 동부지역과 깔리만탄을 아우르던 네덜란드군 껄리만탄 지역군사령부(GOB, Grote Oost en Borneo) 숏보그 대령을 등에 업은 크리스 수모킬 박사(Dr. Chris Soumokil)가 주도했는데 KNIL 부대를 부추겨 암본, 마카사르, 마나도 등지에서 TNI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켜 상륙이 임박한 TNI에게 저항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중앙의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부터 분리된 동인도네시아 독립국가(Negara Merdeka Indonesia Timur)의 성립을 선포하고 마카사르-마나도-암본을 잇는 선을 그 경계선으로 하겠다는 메타코히 계획을 확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숏보그대령은 KNIL 부대출신으로 합주국군에 합류한 병력들이 자바의 TNI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합주국군 내에서 대대 및 중대단위로 자리잡도록 독려하며 마카사르. 마나도, 암본의 KNIL 병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TNI 정서를 고취시킨 결과 이들 지역에서 다양한 봉기가 발생했는데 1950 1월 암본에서 KNIL 출신 병사들의 군사봉기가 벌어졌고 그해 4월엔 마카사르에서 안디 아지스 대위의 부대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바와 같이 안디 아지스는 동인도네시아 자치주 수꼬와티 대통령의 경호부대에서도 근무했었고 3 30일 막 합주국군으로 편입된 KNIL부대의 중대장이기도 했습니다. 안디 아지스는 마나도에서 막 도착한 크리스 수모킬 박사를 숏보그 대령과 함께 만나 4 5일 마카사르에서 도착하는 TNI 워랑대대의 상륙을 막아야 한다는 사주를 받습니다. 이미 현지에 합주국군(APRIS)이 조직되었으므로 본토로부터 공화국 정규군인 TNI가 굳이 상륙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수모킬 박사 역시 마카사르의 동인도네시아 독립국가는 네덜란드의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는 메테코히 계획’(Plan Metekohi)에 의거해 인도네시아 합주국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안디 아지스는 그들에게 사주받은 대로 TNI를 상대로 군사작전을 벌쳤던 것입니다.

 

4 5일 안디아지스의 부대는 마카사르의 현병막사를 위시한 TNI 장교숙소를 공격했고 선발대로 와 있던 모코긴타 중령과 다른 TNI 장교들을 체포한 후 마카사르 항구를 폐쇄해 H.V.워랑 소령(Mayor H.V. Worang)이 이끄는 워랑 대대의 상륙을 저지했습니다.



동인도네시아의 분리독립 위기를 진압하기 위해 수까르노 대통령의 명령에 의거해 당시 국방장관이자 육군중장이었던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는 합주국군 고위사령관이자 수마트라에서 TNI 합병작업을 지휘한 알렉스 E. 까윌라랑 대령을 1950 4 15일 동인도네시아 지역군사령부(KMTIT)의 사령관으로 발령냅니다. 까윌라랑 대령은 수하르토 중령의 가루다마따람 여단(Brigade Garuda Mataram), 수쁘랍또 수까와티 중령의 브라위자야 부대, 코사시 중령의 실리왕이 부대, 워랑소령의 워랑대대와 과거 제16여단출신인 안디 마탈라타 중령의 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술라웨시에서 뻐르띠위작전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 안디 아지스가 투항하여 워랑대대의 마카사르 입성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수라바야로부터 주력부대가 며칠 후 LST 수송선 편으로 마카사르에 상륙했고 그 병력의 위세에 눌려 마카사르에서 KNIL 부대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어 갔습니다.

 

마카사르에 도착한 KOMPAS SUMU 사령관 욥 와로우(Joop Warouw) 중령은 당시 국방부 정보사령관이던 쥴키플리 루비스 중령에게 직접 요청해 수하르요 소령(Mayor Suharyo)을 참모장으로 삼고 네덜란드 지역군 사령부로부터 현지치안을 인수인계를 받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는 마카사르에서 마나도 상륙을 위한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했습니다.

 

마카사르-마나도-암본에 방어선을 그으려던 네덜란드의 시도는 안디 아지스의 반란실패로 벽에 부딪히자 크리스 수모킬 박사는 크게 실망하여 네덜란드군의 B-25 전폭기를 빌려 타고 마나도로 향했습니다. 그는 북부 술라웨시의 TWAPRO의 지도자 마위끄러(Mawikere)를 사주해 KNIL 부대가 TNI로 흡수합병되지 않게 저항하도록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빵엇(Mapanget) 비행장(지금의 샘 라뚜랑이 Sam Ratulangie 공항)에 착륙했을 때 자신은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고 마위끄러를 만날 수하만 마나도 시내로 보냈습니다. 수모킬 박사는 수완이 좋은 선동가이자 용의주도한 전략가였으며 동시에 사전에 위험을 감지해내는 조심스러운 촉각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그가 보낸 수하들은 도중에 청년민병대들에게 체포되었고 위협을 느낀 수모킬은 마빵엇을 이륙해 곧장 암본으로 들어갑니다. 암본에 도착한 수모킬은 4 25일 남말루꾸공화국(Republik Maluku Selatan :RMS)의 수립을 선포합니다. 이는 남말루꾸를 인도네시아 합주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뿐 아니라 동인도네시아 자치주로부터도 분리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RMS의 독립선언은 나중에 RMS 망명정부의 제3대 대통령으로 추대되는 마누사마(Ir. Manusama)과 레드베레, 그린베레 특수부대를 포함한 KNIL 부대 2천여명의 열렬한 지지를 받습니다.



수모킬은 이 선언을 통해 요하니스 마누후투(Johanis Manuhutu) RMS의 초대 대통령으로, 암본을 RMS의 수도로 정하고 그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암본의 친공화국 정당인 독립인도네시아당(PIM)의 뿌뻴라(Pupell)를 전격 체포합니다.




한편 안디 아지스 반란사건의 소식은 마나도에도 전해졌습니다. 마나도의 KNIL 부대가 이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는 안디 아지스 사건 이전인 3월 말에 마나도 남쪽 와네아(Wanea)지역의 KNIL 예비군단기지에서 네덜란드군 수비대 사령관이 전체 네덜란드군 장사병 대표들을 소집한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회의의 목적은 ‘메테코히 계획’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고 동인도네시아에서 TNI가 군사적 헤게모니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므로 TNI 부대의 미나하사(Minahasa)지역 상륙을 여하히 막아내느냐 하는 것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사주하고 있던 숏보그 대령은 마카사르 사령부의 네덜란드군 장교대표들을 보내 이 회의를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회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당시 북부 술라웨시는 참모본부와 통신, 보급부대 등으로 구성된 북부셀레베스 KNIL 군사령부의 관할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 사령부 휘하엔 보병 1개 대대와 KNIL 예비부대, 통신부대, 헌병대 그리고 병참부대가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과 하사관들은 미나하사 지방 토착민 출신들이었고 대대참모에서 소대장까지 각급 단위부대 장교들은 네덜란드 혼혈들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이미 퇴역한 KNIL 병사들을 재소집하는 방안도 제시되었으나 토착 KNIL 출신들의 강력한 반대를 직면해야 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수까르노의 공화국 정부을 지지하고 있었던 반면 재소집의 목적은 그 공화국 정부군과 맞서 싸우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 일본군이 물러난 후 다시 네덜란드의 식민지 상태로 돌아가야 했다는 사실에 주민들은 크게 실망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돌아온 네덜란드군은 예전 식민지시대와 마찬가지로 차별과 착취를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네덜란드가 겁장이 주제에 주민들을 강압으로 대한다며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했으므로 네덜란드군 장교들의 위상도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발언권을 얻어 일어선 살몬(Yan Salmon) 상병은 비록 낮은 계급에 KNIL 부대 인사처 행정병의 신분이었지만 비판적인 발언을 소신껏 쏟아 냈습니다.

 

“현실적으로 네덜란드 왕국은 이미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여왕의 결정을 존중한다면 미나하사 역시 자동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해 인도네시아 국토로 편입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미나하사 출신들이 KNIL 부대원으로서 TNI에게 저항한다면 이는 분명 공화국에게도, 여왕에게도 반역으로 규정될 것입니다.

 

살몬은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만약 우리와 우리 동포인 TNI부대와 전투가 벌어진다면 나중에 전사하거나 은퇴한 미나하사의 KNIL 부대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누가 연금을 줄 것인지 생각해 보세요. 우린 그런 전투에서 무의미하게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살몬상병의 발언에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KNIL 은퇴장병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참석자들 대부분은 그의 발언에 동의하는 눈치였습니다. 회의 분위기가 확 바껴 버리자 네덜란드군 장교들만이 눈살을 찌푸리며 살몬 상병을 노려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 장교들이 그의 견해와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으므로 참석자들의 반감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결국 네덜란드 장교들은 이 회의를 통제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목적했던 북부 술라웨시 KNIL부대의 은퇴장병 재징집에 대한 안건을 통과시키지 못했던 것은 물론 메테코히 계획의 지지도 유도하지 못했습니다. 이 회의엔 마카사르 네덜란드군 사령부에서 보낸 장교들뿐 아니라 수모킬 박사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수모킬 박사는 동인도네시아 자치주의 검찰총장으로서 마카사르에서 까와누아(Kawanua), 월터 몽인시디(Wolter Monginsidi) 등 공화국측 청년민병대 대원들의 사형을 구형한 바 있는 적극적 친네덜란드 인사였습니다. 마나도에서 메테코히 계획이 좌절되자 수모킬은 네덜란드군 장교들과 함께 곧바로 마카사르로 돌아가 안디 아지스에게 반란을 사주해 수까르노의 합주국 정부에 대한 저항정서를 조장하려 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군은 당시 KNIL 부대원들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북부 술라웨시는 통일공화국전선, 훕덴본드(Hoofden Bond), TWAPRO (Twaalfde Provintie) 등 친공화국, 반공화국 분파들이 정치적으로 얽히고 섥힌 복마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마위끄러(Mawikere)라는 인물이 이끄는 친네덜란드 분파 TWAPRO가 미나하사 의회를 장악했고 그 반대파 J.A.마엥꼼(J.A. Maengkom)이 이끄는 GIM(Gerakan Indonesia Merdeka - 독립인도네시아운동)이 이에 맞서 또모혼(Tomohon), 랑오완(Langowan), 똔다노(Tondano) 등지의 친공화국 청년민병대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한편 현지 KNIL 부대원들 상당수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사령부 휘하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그 후 영국군 사령부 밑에서 동남아시아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은 다시 네덜란드군 휘하로 돌아가 공화국정부군과 싸워야 했는데 네덜란드군에 소속된다는 것은 가족들이 신분과 안전을 전혀 보장해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족 대부분은 극렬 청년자경단들에게 몰매를 맞으며 ‘NICA의 개들이란 비난을 듣고 심지어 고문당하기까지 했는데 그나마 끄리스(KRIS - Kebaktian Rakyat Indonesia Sulawesi 술라웨시 인도네시아 시민군) 민병대가 개입해 학살행위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TWAPRO는 의회를 장악하긴 했지만 연합군 편에서태평양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후, 일본군에게 항복했던 네덜란드군에게 오히려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KNIL 부대원들에게는 친네덜란드적 행동을 강요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TWAPRO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숏보그 대령이 보낸 장교들이 와네아(Wanea)회합에서 반TNI 작전전개에 대한 승인을 얻어내지 못하자 미나하사 의회의 TWAPRO의 입장은 곤혹스러워졌습니다. TWAPRO는 이번엔 의회에서 메테코히 계획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려 했으나 격렬한 논쟁과 강력한 반발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메테코히 계획을 추진하다가 자카르타 정부와 충돌해 내전이라도 벌어진다면 마나도가 피바다가 될 것이란 반대파의 반박에 친네덜란드 분파들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술라웨시 민중들은 전쟁에 지친 상태였고 그들이 일제강점기 당시 겪었던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을의 노인들도 더 이상 자녀들을 연합군이나 일본군을 위한 전쟁에서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나하사 지방 전체에서 공론화된 이 논쟁은 내전발발위험을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었는데 여론을 주도한 것은 모로타이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KNIL 부대 반네덜란드 성향의 젊은 세대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친공화국진영을 고무시켜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는 배경이 됩니다.

 

마나도에서 벌어진 5 3일 사태의 시작은 1950 4 25 20:00시에 KNIL 프레드 볼랑 상사(Fred Bolang – 훗날 TNI 육군준장으로 전역)가 적백기 형태의 자켓을 맞춰 입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청년무장전선(Front Laskar Pemuda – FLP) 민병대 소속 로렌스 세랑(Laurens Saerang), 렉시 아네스,(Lexi Anes), 프란스 워워르(Frans Wowor) 등을 만나면서 태동합니다. 이 회합에서 볼랑은 공화국군에 합류해 청년민병대와 함께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군사작전을 지휘해달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그들이 볼랑을 선택한 것은 그의 참전경험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연합군 톰 해리슨 소령 휘하의 특수부대 소속 게릴라로서 깔리만탄 오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미나하사에 돌아온 후 볼랑은 네덜란드 점령군들에게도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실제로는 1946 2 14일 적백기 사건(마나도 KNIL부대 제12중대의 항명반란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에도 마나도의 네덜란드군은 그를 예의주시했습니다. 볼랑은 1939년 곰봉(Gombong) KNIL 하사관 학교를 중퇴한 경력밖에 없었지만 많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많은 전공을 세웠고 그 결과 영국군 마운트배튼 제독에게서 대영제국메달(British Empire Medal),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으로부터도 태평양메달을, 인도네시아 주둔 네덜란드군 총사령관 스폴 중장에게서는 리더릭 오더(Ridderlijke Orde) 훈장 등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 이름값때문에 네덜란드군도 볼랑을 간단히 체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46년 적백기사건이 끝나고 자바로 파견된 주동자들이 모두 체포된 후 마나도는 네덜란드군 특수부대 그린베레와 레드베레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은 마나도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KNIL 출신 쁘라뚜가 이끄는 똔다노, 랑오완, 또모혼의 청년민병대와 모로타이의 KNIL 소년단 출신 게릴라들의 간헐적 공격에 시달려야 했고 이들 청년민병대는 떨링(Teling)기지를 공격해 그곳 네덜란드군을 무장해제시키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4월초 뚜뚜로옹 상사가 이끄는 소규모 KNIL부대가 떨링 주둔부대의 무기고를 습격한 후 곧바로 뽀모혼으로 들어가 그곳 친공화국 청년민병대에게 획득한 무기들을 나누어 주고 마나도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떨링의 KNIL 부대공격은 사전에 네덜란드군 비밀정찰국 NEFIS에게 정보가 누설되고 누에스(Nues) 소령이 이끄는 KNIL부대와 앙트와넷 중위의 레드베레 특수부대, 헤타리아 중위의 그린베레 부대 등의 요격을 받아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을 미나하사에서 몰아내려는 청년민병대의 높은 사기는 여전히 불타 올랐습니다. 그들은 KNIL 부대출신들은 TNI로 흡수하여 네덜란드군에 무력행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비밀임무를 수행하던 사무알, 가골라, 안뚱 등 TNI 장교들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A.E. 까윌라랑, 욥 와로우, 에버트 랑키(Evert Langkey) 등 미나하사 출신 장교들을 전면에 내세운 TNI의 전략은 현지 KNIL 하사관들이 공화국 측으로 기울게 하는데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고 그린베레와 레드베레 부대에 소속된 북부 술라웨시 출신병사들 역시 영향을 받았습니다. 볼랑 역시 그런 하사관들 중 하나였습니다. 민족적 통일성을 고취하기 위해 KNIL 출신 부대원들은 까왕꼬안(Kawangkoan)에 소재한 박티 끄리스(Bhakti KRIS) 교원학교 선생인 까레수삣(Karel Supit) 같은 공화국측 인사들과 잦은 회합을 가져 민족주의적 견해를 듣곤 했고 월터 세랑(Wolter Saerang)과 헤르마누스(Hermanus)가 운영하는 ‘국민의 생각’(Pikiran Rakyat)이라는 신문사에서 지하운동회합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던 볼랑이 그날 밤 청년무장전선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떨링의 KNIL 18보병대대 기지에 대한 공격작전을 조율하는 회의가 뒤를 이었고 볼랑과 그의 부대는 청년민병대, 다른 KNIL 하사관들과 함께 거사일을 결정하고 완벽한 보안을 유지합니다. 떨링숙소에 사는 인원들로 구성된 제1단은 5 223:00시에 숙소내의 모든 KNIL 인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무기고를 열기로 했고 제2단은 23:00시 정각에 떨링숙소에서 무기를 받아 혹시 있을지 모를 저항세력에 대비키로 했습니다. 마나도 외곽의 KNIL 분견대들로부터의 공격이 있을지 몰랐으므로 병력을 또모혼으로 실어 나를 차량들은 청년민병대가 띠띠웅언(Titiwungen)지역에 준비해 놓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후 5 2일 밤 21:00시 볼랑상사는 말끔한 군복차림에 무장을 하고서 떨링히땀(Teling Hitam) 기지 앞에 섰습니다.

 

계획대로라면 볼랑은 KNIL 부대의 병력을 모으고 뚜뚜로옹 상병을 선임하사로 한 1개소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움직일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볼랑은 떨링기지에 단신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찦차 한대가 그의 곁에 소리도 없이 다가와 섰습니다. 찦을 운전한 사람은 네덜란드인 대위였고 간단히 목례를 한 그는 볼랑상사에게 승차하라고 말했습니다. 볼랑은 깜짝 놀랐지만 의심받지 않기 위해 대위의 명령대로 찦에 탔는데 찦은 떨링기지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리오(Sario)를 지날 때 볼랑은 계획이 어딘가에서 새어나가 이제 헌병대 영창에 갖히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찦은 헌병대도 그냥 지나쳐 부대사령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대위는 볼랑을 지역사령관 누에스 소령의 방으로 볼랑을 안내했습니다. 누에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볼랑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러나 볼랑은 아직 누에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볼랑상사, 일이 이렇게 되면 곤란해. 나중에 서로 총질을 해대게 될 뿐이라구.

 

이렇게 시작한 누에스의 얘기는 볼랑이 예상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모든 장교들과 하사관들을 불러 모은 이유가 현지토착민 병사들을 장교로 진급시키고 상응하는 보직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난 합주국군 대대를 구성할 생각이야 뿌루깐 중위를 소령으로 진급시켜 지휘를 맞기고 셈벨 부관을 대위로 진급시켜 참모장을 맞길 걸세, 볼랑상사, 자네는 대위로 진급해서 제4중대를 맡아주게. 무슨 얘기인지 알겠나?

 

누에스는 볼랑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볼랑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누에스는 체념한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자구. 난 자네가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네. 떨링에 돌아가서 부하들을 불러모아 이리로 데려오게, 그들에게 내가 내일 직접 얘기하겠네. 어떤가?

 

누에스 소령의 방을 나서면서 볼랑은 한숨을 돌렸습니다. 누에스 소령이 한 얘기로 미루어 네덜란드 기지를 공격하려는 계획은 아직 새어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누에스 소령은 그간 누적되어 온 현지인 병사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조치를 준비하면서 현지인 병사의 대표로서 볼랑의 의견을 물었던 것입니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세워놓은 계획을 미룰 수는 없었습니다.

 

부대로 돌아온 볼랑상사는 즉시 초소 앞으로 병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는 78명의 병사들을 3개 소대로 나누어 자신이 1개 소대를 이끌고 앙까우 상사와 멩코 상사가 각각 1개 소대씩을 지휘하도록 했습니다. 부대는 떨링기지를 나와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문에 다다랐을 때 볼랑상사는 어디선가 레드베레 병력을 몰고 나타난 앙트와넷 중위의 거친 으르렁거림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봐, 너희들 어디 가는 거야?

 

그는 잰 걸음으로 볼랑상사의 부대를 따라붙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우린 누에스소령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요”

 

볼랑상사가 퉁명스럽게 쏘아 붙이자 앙트와넷 중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기 병력들에게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역시 거사정보에 대한 보안은 철저히 지켜졌던 것이고 레드베레 병력과 야간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앙트와넷 중위는 그저 평소대로 깐죽거렸던 것입니다.

 

떨링숙소를 나온 볼랑 상사의 부대는 무장청년전선의 부대가 기다리는 띠디웅언을 향해 곧장 나아갔습니다. 계획이 세어나간 줄 알았던 청년민병대원들은 흩어져 숨어 있었습니다. 볼랑의 모습을 보고 로렌스 새랑, 월터 새랑, 렉시 아네스 등이 한숨을 돌리며 숨은 곳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청년민병대의 이름으로 프레드 볼랑 동지가 우리를 지휘해 주십시요!

 

모든 병사들은 어깨 위의 계급장을 떼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 계급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그들은 이제 오직 청년무장전선의 전사일 뿐이었습니다. 모든 보대원들은 렉시 고잘과 그 동료들이 준비해 놓은 트럭들에 분승해 또모혼으로 향했습니다. 콘보이는 마나도 도시를 한 바퀴 돌 듯 기동하면서 장애물들을 우회했습니다. 그런 후 아이르마디디(Airmadidi), 떵가리(Tenggari), 똔다노(Tondano)를 거쳐 도시를 빠져나간 그들은 새벽 03:00시에 또모혼에 도착해 경계대기상태에 들어갔고 로렌스 새랑, 샘오기와 그 동료들이 구축한 첩보망을 통해 마나도로부터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새벽 04:00 네덜란드군이 떨링의 무기고에서 중화기들을 옮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때 사무알소령과 삐엣안뚱대위도 또모혼에서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첩보망을 통해 KNIL 부대의 방어가 느슨하다는 마나도 상황을 들은 볼랑상사는 05:15시에 중무장한 1개 중대를 이끌고 마나도를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첫번째 목표는 KNIL 본부를 공격해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나도에 도착한 그들은 팀을 나누어 2개 소대가 사령부와 참모숙소를 포위했고 다른 1개소대가 라뚜랑이거리에서 딴중바뚜와 사리오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장악했습니다. 이 사건은 1946 2 14일 벌어진 적백기 사건 이후 두번째 군사쿠데타라 불리게 됩니다. 작전은 순조로왔고 모든 것이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프레드 볼랑은 로렌스 새랑과 함께 오전 10:00시 사령부 병영을 공격해 누에스 소령을 포함한 KNIL 부대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 그들을 무장해제 시켰습니다. 누에스 소령은 이 모든 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기지 내의 모든 KNIL 부대는 체념한 듯 공격부대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고 인질이 된 장교들도 부하들에게 무기를 버리도록 협조했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공격을 마친 볼랑의 부대는 또모혼의 거점을 떠나 마나도로 들어가 떨링에 본부를 세웠습니다.

 

상황을 장악한 그들은 간단한 행사를 통해 누에스 소령으로부터 군통솔권과 민간정부 통제권을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를 대표하는 청년민병대에게 이양하도록 했습니다. 모든 장교와 하사관들은 그들의 네덜란드인 가족들과 함께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병영에 남아 있었던 일반 KNIL 병사들에게만은 모두 개인 사물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산시켰습니다. 볼랑의 부대원들에게 그들 KNIL 병사들의 입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지역을 장악한 후 로렌스 새랑은 NIT의 적백청기를 내리고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적백기를 게양했습니다.

 

14:00시가 되자 마나도 전체를 친공화국 세력이 장악했고 곳곳에서 적백기가 휘날렸습니다. 마나도에서 벌어진 복잡한 군사행동과 네덜란드 측의 패배 소식을 들은 네덜란드군 사령관 숏보그 대령이 다음날 마카사르에서 마나도로 곧장 날아왔습니다. 숏보그는 현지 ‘반란군’과 무전연락을 통해 마빵엇(Mapanget)광장에 착륙허가를 신청하고 누에스 소령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청년민병대의 착륙허가를 받아 B-25 전폭기 편으로 광장에 착륙한 숏보그대령은 비행장에 많은 군인들이 나와 있는 모습에 위험을 느껴 다시 이륙해 곧장 마카사르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동인도네시아 전역을 관할하는 네덜란드군 사령관이 반란군의 포로가 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나도에서 벌어진 5 3일 사태에 대한 소식은 마카사르에도 빨리 퍼져 나갔는데 까윌라랑 대령은 편향된 정보통으로부터 안디 아지스의 경우와 같이 마나도에서도 TNI를 반대하는 반란이 벌어졌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습니다. 네덜란드측 장교들도 프레드 볼랑 상사라는 악명높은 과격분자가 이끄는 군사행동이 벌어져 마나도가 반란지역이 되었다고 사실을 왜곡했습니다.

 

이 보고로 인해 마카사르의 KMTIT 본부에서는 마나도에서 친네덜란드 반란행위가 벌어진 것이라 판단한 까윌라랑 대령은 워랑대대와 무자인(Mudjain) 대대를 마나도로 출발시켜 ‘53일 반란’의 주역들을 토벌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한편 마나도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자카르타의 네덜란드군 고위장교들에게도 경종을 울렸습니다. 네덜란드군 총참모장 뻐레이라 소장은 마카사르로 날아가 까윌라랑 대령을 만나 합주국군으로 편입되는 KNIL 부대원들을 그냥 독립된 KNIL 부대로 남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합주국군으로 편입될 인원들은 KNIL 부대원 스스로가 조정해 선택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뻐레이라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반란이 계속 일어나 행정부를 괴롭힐 것입니다.

 

하지만 까윌라랑 대령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우린 그들을 재편성할 거에요.

 

KNIL의 해산은 이미 확정된 사안이었던 것입니다.

마나도 시내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KOMPASSUMU의 지휘관인 와로우 중령은 뻐레이라 소장에게 부탁해 네덜란드군 KNILM 항공기에 동승해 마나도에 갈 수 있도록 요청했습니다. 와로우 중령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무장청년전선의 까렐 수삣과 알렉스 멩코는 마빵엇 비행장에서 최고의 군대식 의전을 준비했습니다.



마카사르에서 도착한 와로우 일행은 현장의 실제상황이 마나도에서 들은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나도의 KNIL 부대는 TNI에게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현지 네덜란드군을 제압해 놓고 TNI의 입성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일행은 나름대로 준비된 최고의 의전도 받았는데 의장대의 빰빠레가 그들을 환영했고 각잡고 도열한 볼랑상사의 부대가 와로우 중령의 사열을 받았습니다. 한편 함께 도착했으나 환영행사가 끝날 때까지 비행기에서 내릴 수 없었던 뻐레이라 소장은 비행기 안에서 그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뻐레이라는 사리오 거리에 수용된 KNIL 대대 지휘관을 만나러 마나도 시내에 들어갈 수도 없었으므로 결국 그날 곧바로 마카사르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상을 알게 된 까윌라랑 대령은 ‘53일 대대’의 조직을 승인했고 5 10일 그 자신도 마나도를 방문해 조상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그는 술라웨시에서의 짐을 덜고 말루꾸의 RMS 반란 진압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반란군을 토벌하겠다면 콧김을 씩씩거리며 5 10일 마나도에 상륙한 워랑대대는 반란군청년민병대들이 주도한 마나도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얼떨떨해 했습니다.


 

그래서 ‘5 3의 사건은 부대명이 되었고 1950 5 20일 띠깔라 광장에서 공식적인 명명식 행사가 열렸습니다. 와로우 중령은 모든 주역들에게 공화국 정부를 대신해 게릴라 금성훈장을 수여했습니다.



 5 3일 대대는 KNIL 출신병사들과 LFP 무장청년전선 민병대 출신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는데 알렉스 멩코가 소령계급장을 달고 대대장이 되었고 부대대장 겸 참모장에 프레드 볼랑 대위, 1중대장 알렉스 앙코우 대위, 2중대장, 뚜몽고르 대위, 3중대장 시몬 뽄또 대위, 4중대장 렐시 아네스 대위, 예비중대장 로렌스 새랑 대위가 포진했습니다. 53일 대대의 무장은 1천여정의 소총 L.E.(-엔필드 Lee-Enfield 소총), 빅커 수냉식 기관총 4, M-23 자동소총, 81밀리 박격포 3, 스텐 기관단총 100정 등이었습니다.


 

5 3일 대대는 추가모병한 청년들을 KNIL 출신 병사들이 훈련시켜 병력을 보강했습니다. 신병교육이 끝나자마다 그들은 말루꾸의 RMS 반란진압작전에 투입되었는데 KTTIT 사령관 까윌라랑 대령 휘하에서 멩코 소령, 프레드 볼랑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여 1천명 병력이 1950 7월 와이껠로(Waikelo)호를 타고 암본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현지에서 자바의 TNI 부대들과 연합해 KNIL 출신병력 2천명 규모의 RMS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1950 11 4일 암본을 함락시켰습니다. 한편 마누사마와 다른 RMS 인사들은 네덜란드측의 도움을 받아 자카르타로 빠져나갔다가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수모킬 박사와 그의 추종자들은 스람(Seram)섬으로 도주해 1963년 말까지 12년 넘게 저항하다가 1963 12 12일 와하이(Wahai)에서 실리왕이부대 엔죠대대에게 생포됩니다. 수모킬 박사는 1964 4 22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53일 대대는 실리왕이 부대에 소속되면서 부대장도 멩코소령에서 마무숭 소령(Mayor Mamusung)으로 바뀝니다. 비록 마나도에서 조직되었지만 5 3일 대대는 말루꾸에서의 작전을 마친 후 다시는 마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러 부대로 분산되었다가 바로 자바섬으로 가게 되는데 수마트라와 술라웨시, 말루꾸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알렉스 까윌라랑 대령 역시 실리왕이 사단으로 전보됩니다. 자카르타에 도착한 5 3일 대대는 공화국군의 G.H. 만띡 대위(Kapten G. H. Mantik – 훗날 중장으로 퇴역)에게 인계되고 프레드 볼랑대위는 술라웨시의 마카사르로 돌아가 TT-7부대의 인사참모를 맡게 됩니다.

 

자카르타에서 5 3일 대대는 두 부대로 쪼개져 한쪽은 예비군단으로 흡수되고 다른 한쪽은 서부자바의 반둥 인근 찌마히(Cimahi)로 옮겨갑니다. KNIL 출신 부대원에게 반둥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KNIL부대 총사령부가 있던 곳이어서 감회가 새로운 곳이었습니다. 서부자바 지역 역시 1880년대에 약 5천명의 북부 술라웨시 미나하사 청년들이 모집되어 반유마스 등 자바출신 동료들과 함께 레인저 특수부대 훈련을 받았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특수부대로 조련되어 여러 군사작전에 동원되었고 상당수는 KNIL부대의 훈련소가 있었던 수방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이름을 알렸던 많은 장병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후에도 승승장구하여 인도네시아 근대사에 한 획을 긋기도 합니다. 이 사건에서 외곽지원을 했던 까윌라랑 대령, 와로우 중령, 사무알 소령 역시 50년대 말 뻐르메스타(Permesta)사건과 RRRI 반란사건에 연루될 때까지 공화국 정규군의 중심인물로 성장해 갔습니다.

 

2016. 2. 11.

참조 : 인도네시아 문화광관부 자료 (http://kebudayaan.kemdikbud.go.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