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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웅의 반란 - 격랑의 동인도네시아 본문

인도네시아 현대사

전쟁영웅의 반란 - 격랑의 동인도네시아

beautician 2016. 2. 9. 03:54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11)


안디 아지스의 반란


 

이 착하게 생긴 남자는 안디 압둘 아지스(Andi Abdul Azis)라는 사람입니다.  20세기 초에 태어난 사람 치고 파란만장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아지스 역시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탔습니다.

 

그는 남부 술라웨시에서 부기스(Bugis)족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술라웨시는 자바, 수마트라처럼 민족주위 열기가 높았던 곳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네덜란드의 영향력이 더욱 큰 지역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착취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극에 달했지만 술탄과 지주들의 지위와 권리를 네덜란드가 지켜준만큼 상류층들은 네덜란드에게 호의적이었고 그 계층의 젊은이들은 네덜란드를 동경했습니다. 350년간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태평양전쟁으로 일본군이 네덜란드군을 쓸어버리기 전까지 네덜란드는 파라다이스이자 특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 상류층들은 스스로를 네덜란드인이라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최소한 준네덜란드인 정도라고 생각했을까요? 극단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도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자부하거나, 일본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눴던 인사들이 넘쳐 났으니 인도네시아에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아지스는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1930년 초 한 네덜란드인 은퇴자의 지원을 받아 함께 네덜란드에 들어가 레거스쿨(Leger school)을 다니고 1944년까지는 리큼(Lyceum) 학교를 다니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그게 행운이었는지는 그 후의 그의 인생을 좀 더 들여다 보아야 판단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튼 그가 일반 인도네시아인들이 누리기 힘든 네덜란드 본토의 높은 교육혜택을 받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는 사관학교에 진학해 왕립네덜란드군의 장교가 되고 싶어 했는데 이 시점에서 아지스는 자신이 술라웨시의 부기스족 출신이라는 이름표보다 네덜란드인이라는 위상을 갖고 싶어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때 유럽을 휩쓸기 시작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아지스는 그 뜻을 접어야만 했고 그 대신 나찌에게 점령된 네덜란드의 지하저항군에 합류해 독일군과 싸웠습니다. 그가 나중에 방해공작팀이 되어 적전선 후방으로 투입되었다는 기록에서 아지스가 제법 높은 전투력을 가진 레지스탕스 공작원이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태평양 태생의 순박한 얼굴이 유럽 한 복판에서 나찌의 의심을 피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요? 독일군이 현지저항세력들을 강력히 옥죄어 오자 위기를 느낀 그는 동료들과 함께 영국으로 밀항했습니다.

 

영국에서 아지스는 런던으로부터 7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한 캠프에서 특수부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훈련을 마쳤고 1945년엔 부사관학교 교육도 수료합니다. 그러던 1945 8월, 일본과 싸우고 있던 SEAC은 인도네시아어를 유청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원을 필요로 했고 그 결과 안디 압둘 아지스가 유럽전선을 떠나 인디아 소재 연합군 사령부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는 하사관 계급을 달고 콜롬보와 캘커타로 옮겨다니며 보직을 소화했는데 할림 뻐르다나꾸수마와 같이 유럽 서부전선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몇 안되는 인도네시아인이었고 유럽과 태평양, 두 개의 전선에서 각각 나찌와 일본제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 참전한 베테랑 연합군 군인이었습니다. 게다가 특수부대 훈련까지 모두 이수했다는 측면에서는 그는 네덜란드군 웨스털링 대위에 비해 경력과 전투경험 면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일본이 항복한 후 안디 아지스는 일본 본토에 설치된 연합군사령부에 합류하거나 인도네시아에서의 보직을 받거나 양자간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것은 이후 그의 인생을 좌우할 중요한 결정이었지만 아지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채, 이미 11년째 부모를 떠나 있었던 그는 남부 술라웨시 마카사르에 돌아가기로 마음 먹고 인도네시아행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국군의 일원으로서 1946 1 19일 자카르타에 착륙했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수까르노가 독립선언을 한 지 5개월째로 접어드는 시점이었습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인도네시아 땅을 밟는다는 것이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적이 되어 돌아왔다는 의미임을 아지스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겠죠. 나찌와 일본제국을 무릎꿇린 연합군에게 신생 인도네시아 정부의 급조된 공화국군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그가 도착하기 불과 두 달 전 영국군과 공화국군이 서로 대대적으로 맞붙었던 수라바야에서 예상했던 대로 공화국군은 궤멸적 패배를 기록하고 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바로 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연합군 측의 군인이었던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그는 영국군 분대장이 되어 나중에 찔린딩(Cilinding)으로 근무지를 옮기지만 1947년에 이르러 그는 비로소 장기휴가를 얻어 마카사르에 갔다가 군복을 벗기로 결심합니다. 아지스는 전쟁터를 이미 신물나도록 돌아다녔다고 생각했고 당시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벌어지고 있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자바인들의 전쟁이지 부기스인인 그와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연합군 출신인 그는 심정적으로 수까르노의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보다 네덜란드의 편에 좀 더 가까왔습니다. 그래서 영국군복을 벗은 그는 다시 자카르타에 돌아와 멘뗑뿔로(Menteng Pulo)에서 경찰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지스는 1947년 중반 다시 KNIL로 소집되어 소위계급을 달게 됩니다. 이번엔 네덜란드군이 된 것입니다. 순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그는 천상 군인체질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때에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변함없었습니다. 수까르노 정부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이는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었고 강력한 네덜란드군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고야 말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본군 장교신분으로 만주에서 독립군부대를 때려잡던 박정희나 간도특설대의 백선엽처럼 네덜란드군 장교로서 남부 술라웨시에서 준동하는 공화국군 게릴라들과 전투를 벌였고 때로는 습격해 섬멸시키기도 했겠죠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네덜란드의 패배나 철수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대한 소속감 같은 것 역시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NIT 동인도네시아 자치주 수꼬와띠(Sukowati) 대통령의 고위경호원으로 1년 반을 일한 후 이번엔 1948년 반둥 찌마히(Cimahi)지역의 SSOP 부대(KNIL 소속의 공수부대 훈련소)에 교관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때 찌마히 지역은 당시 임박한 네덜란드군의 2차 총공세(크라이 작전)를 대비해 네덜란드군이 대규모로 집결해 훈련받던 곳이었는데 특수부대인 그린베레와 공정대인 레드베레도 와있었습니다. 아지스는 유럽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특수부대 훈련을 담당했습니다. 그렇게 특수부대를 조련한 그는 결과적으로 족자를 함락시킨 네덜란드군 크라이작전 성공에 일조한 셈이었습니다.



  

그 해 아지스는 다시 마카사르로 발령이 나 중위계급장을 달고 125명의 부하를 거느린 중대장이 됩니다. 그는 곧 대위로 진급한 후에도 같은 부대를 지휘했는데 이들은 전투경험이 풍부했고 전투력도 일반적인 네덜란드군이나 인도네시아 정규군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아지스는 어떤 적이라도 무찌를 있다는 높은 자신감이 있었고 그의 부대를 네덜란드의 가공할 화력이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언젠가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4912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합주국에 주권을 이양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지스 뿐만 아니라 KNIL 부대에 소속된 인도네시아 국적의 병사들은 이 충격적인 소식에 모두 곤혹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암본인들은 대대적으로 KNIL부대에 복무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으므로 KNIL 부대 전체에서 암본인 병사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었고 마두라인들과 자바인들도 상당수를 이루었습니다. KNIL은 엄밀히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정부군이었지만 지휘계통의 네덜란드인 장교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인도네시아인 병사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은 독립전쟁이 전개되는 내내 네덜란드 본국에서 파견된 왕립네덜란드군과 한편이 되어 공화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동인도제도의 대부분 지역들이 그 공화국과 함께 인도네시아 합주국을 수립하고 KNIL 부대도 합주국군으로 편입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수년간 전쟁을 통해 쌓인 원한을 풀 여유도 주지 않고서 말입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동인도제도를 침공한 일본이 네덜란드군을 격파하여 동인도제도의 KNIL 부대는 사실상 와해되어 버린 상태에서 1945 8월 일본의 패망을 맞았을 때 전역상태에 있던 우립 수모하르죠 장군이나 나수티온 대령, 시마뚜빵 대령 같은 KNIL 출신 장사병들 상당수가 공화국군에 참여했지만 또 다른 많은 수는 그 이후 상륙한 네덜란드군이 재편한 KNIL 부대에 복귀했고 네덜란드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신병들도 대거 새로 모집된 상태였습니다.



 

주권이양 이후 KNIL 부대원들의 문제가 터진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KNIL에 네덜란드군 병사로서 공화국군의 적이 되어 싸워왔던 인도네시아인 병사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철수하는 네덜란드군을 따라 인도네시아를 떠나지 않는한 그간 저지른 공화국에 대한 적대행위로 인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심지어 군법회의를 통해 처형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나찌와 일본을 상대로 싸운 끝에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전쟁영웅이 되어 돌아온 아지즈에겐 공화국을 선택할 여지조차 사실상 없었는데 말입니다. 아니, 그동안 그런 부분엔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많은 수의 지휘관들이 그 사상과 성향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런 문제는 네덜란드식 군사교육과 지원을 받은 지휘관들에게서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투쟁위원회에 속한 청년민병대나 게릴라들은 모두 하나의 몸체, 하나의 사령부 즉 인도네시아 정규군에 소속된 것임을 1947 7월 공화국 정부가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군 내부애선 공화국군과 게릴라부대들 사이에서도 이중적 지휘체계의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던 바 합주국군과 KNIL 부대의 지휘관들 사이의 사상과 성향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도 없었으므로 상대방의 지휘체계를 따르지 않으려는 반감이 역력히 투영되곤 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영향이 강한 지방일수록 이런 경향이 더 컷는데 대표적인 곳이 남부 술라웨시였습니다. 1950년에 남부 술라웨시와 마카사르에선 4월 안디 아지스의 반란을 포함해 1950 5 15, 8 5일 등 세번에 걸쳐 사건이 터지면서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세 번의 사건 모두 그 원인은 자신들의 운명이 어찌될 지 두려워하는 KNIL 부대의 초조함이었습니다. 마카사르에서 이러한 사태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은 KNIL 소속 군인들이 마카사르 주민들의 삶을 교란시켜 결과적으로 공화국군이 자신들을 공격해 오도록 유도해 반란의 빌리로 삼으려 했던 측면이 큽니다. 마카사르 도시주민들은 자치주 체제보다 통일된 인도네시아를 선호하며 수까르노 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동부인도네시아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동부자바, 빠순단, 동부수마트라 등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인도네시아 합주국 정부 전체, 내지는 최소한 많은 각료들과 의회의 상당수 의원들이 자신들 출신지방 자치주에 그러한 분위기를 조장시켰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합주군 군대의 임박한 마카사르 입성에 대해 자치주 정치가들과 관료들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며 긴장국면을 조장한 정황도 엿보이는데 주민들과 군인들에게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이 자치주 정부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안디 아지스의 반란 배후에도 동인도네시아 자치정부 내 반합주국 인사들의 선동도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안디 아지스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잡을 데 없는 군인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이었으나 그가 일으킨 반란사건의 배경을 보다 큰 그림으로 보자면 아지스는 남의 장단에 춤춘 꼭뚝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마카사르 시내의 KNIL 병력을 조종한 것은 안디 아지스가 아니라 네덜란드군 사령관 숏보그 대령(Colonel Schotborg)과 동부인도네시아 자치주 검찰총장 수모킬(Soumokil) 박사였던 것입니다.

 

당시 자카르타의 합주국 정부는 동부 인도네시아를 병합할 목적으로 연합부대를 만들었는데 동부, 중부, 서부자바에서 차출한 육군대대들이 주력을 이루어졌고 합주국 공군과 해군, 경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 부대의 사령탑은 북부 수마트라 사령관인 알렉스 에버트 까윌라랑 (Alex Evert Kawailarang) 대령이 맡았습니다.



 

아지스의 부대가 1950 4월부터 8월까지 마카사르에서 벌어진 합주국군 반란의 주력부대가 된 배경은 대략 이랬습니다. 아지스가 내세운 반란목적은 동인도네시아 자치주(Negara Indonesia Timur :NIT)를 현상유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NIT가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흡수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고 그래서 그의 KNIL 부대가 합주국군(APRIS - Angkatan Perang Republik Indoensia Serikat )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웨스털링의 APRA 반란은 특수부대에게 너무 의존했던 경향이 있었으나 안디 아지스의 반란은 특수부대를 포함하지 않은 일반 KNIL 부대들과 네덜란드군 전반을 포괄하고 있었습니다.

 

1950 4 5, 안디 아지스의 부대가 마카사르의 주요거점들을 공격해 점령하고 지역사령관 A.J.모꼬긴타(A.J. Mokoginta) 중령을 체포하면서 반란이 시작됩니다.



 

타이밍을 뺏긴 합주국군은 주력부대가 출발을 준비하는 동안 워랑(Worang)대대가 선발대로 1950 4 11일 남부술라웨시에 도착했습니다. 워랑대대는 항구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아 마카사르에 직접 상륙하지 못하고 약 100km 남쪽의 예네뽄또(Jeneponto)에 상륙했는데 그곳 주민들이 그들을 환영하던 사진이 1950 5 13일자 머르데까 잡지에 실려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세 명의 합주국 병사들이 모여있는 주민들 앞을 지나가는데 주민들 뒤로 우리들의 군대, 환영합니다’(SELAMAT DATANG TENTARA KITA)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남부 술라웨시 주민들은 진심으로 합주국군의 상륙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합주군군과 KNIL 부대 사이엔 이렇다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고 합주국측은 안디 아지스에게 4x24시간 내에 자카르타에 출두하라는 중앙정부의 최후통첩을 전달했습니다.

 

아지스는 자신이 반란군의 수괴가 되어 반역행위를 하리라는 것 역시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그를 둘러싼 상황과 그가 속한 지역의 정부가 변했던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전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예전 나찌와 맞서던 네덜란드 지하저항군 시절처럼, 또는 그의 KNIL 부대에게 저항하던 인근 산속의 공화국군 게릴라들처럼 공화국에 맞서 지하투쟁을 벌이는 것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습니다. 유럽본토의 레지스탕스들은 강력한 연합군을 등에 업고 그들의 지원을 받았지만 아지스와 그의 KNIL 부대가 지하로 스며든다면 그 누구의 지원도 받을 수 없을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에게 반란을 사주했던 동인도네시아 자치주 검찰총장 수모킬 박사는 합주국군이 상륙하자 부리나케 마나도를 통해 암본으로 달아났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의 상관 숏보그 대령은 네덜란드 귀환을 준비하며 몸을 사렸으므로 그에겐 더 이상 믿을만한 지원세력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앙정부의 최후통첩에 따라 4 15일 자카르타에 도착해 자신 투항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묻지 않겠다던 중앙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반란 3년 후 군사재판에서 14년형을 언도받지만 아지스는 자신이 혐의를 인정하여 항소하지 않았고 그대신 대통령의 사면을 청원했습니다.

 

안디 아지스가 투항하자 KNIL 보병출신 병사들은 더 이상 누구를 따라야 할지,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인도네시아인 병사들은 대부분 하사관 이하 병사들인 KNIL 부대에서 안디 아지스 대위 외의 다른 현지인 장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KNIL부대가 정식으로 해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합주국군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될 판이었습니다 한편 합주국군의 최후통첩에는 부대의 철수와 무장해제, 그리고 포로들의 석방요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디 아지스가 투항한 후에도 반란군은 최후통첩의 다른 조건들을 지키지 않았고 알렉스 까윌라랑 대령(Kolonel Alex Kawilarang)의 긴급대응부대가1950 4 26일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분위기는 험악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50 5 15 KNIL 출신병사들이 자기들이 묵는 막사 인근에서 인도네시아국기를 내리면서 다시 전투가 불붙었습니다. 이 사건은 합주국 대통령 수까르노가 술라웨시 순회를 위해 마카사르에 도착하던 날에 맞춰 벌어졌으므로 계획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합주국기를 내리면서 KNIL 부대인근 주민들 가옥기둥이나 현수막 등에 합주국을 비난하는 문구들이 써넣어졌고 합주국 장교 한 명이 KNIL 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집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KNIL 부대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합주국군 측은 인내심을 발취했지만 이에 분개한 주민들이 공화국군 사령부의 지시도 없이 KNIL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리빵바젱 대대와 하리마우인도네시아 대대 휘하의 현지 게릴라부대들도 교전을 준비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KNIL 부대는 움추려드는 대신 오히려 마카사르를 장악하여 합주국군의 예봉을 꺾으려 했으므로 1950 5 15일 마침내 마카사르 시내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KNIL 부대가 합주국군의 병영들을 공격했고 주민들의 집을 불태우며 화교지역의 가옥과 가게들을 파괴했던 것입니다. 마카사르 전역이 화염에 휩싸였고 곳곳에 피비릿내와 화약냄새가 넘쳐났습니다. KNIL 부대의 공격은 합주국군측에서도 어느정도 예측했던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합주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이와 동시에 리빵바젱 대대, 하리마우인도네시아 대대의 게릴라부대들도 그들의 근거지인 마카사르 인근 뽀로방껭 지역과 빨랑가 지역에서 내려와 전투에 합류하면서 전세는 금방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합주국군은 게릴라 2개 대대와 주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와 함께 KNIL 부대를 몰아 붙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었을 때 합주국군 총참모총장 A.H. 나수티온 대령과 KNIL 부대의 부참모장 뻐레이라(Colonel Pereira) 대령이 각각 마카사르에 도착해 사태를 파악하고 협상에 나섰습니다. 1950 5 18일 합주국측 대표 슨똣 이스깐다르디나타 중령(Overste Sentot Iskandardinata)과 레오 로폴리사 대위(Kapten Leo Lopolisa)가 나수티온 대령과 뻐레이라 중령이 참관하는 가운데 KNIL 부대측의 대표 스콧보그 대령, 무쉬 중령(Overste Musch)과 테이만 중령(Overste Theyman)과 회합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 KNIL 부대와 합주국군 사이의 경계선이 확정되고 두 부대는 서로 50미터 이상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정이 채택되어 일단 급한 불을 껐습니다. 이 협상의 결정내용은 KNIL 부대를 세 군데 장소로 분산시킨다는 결정도 담고 있었는데 그 부분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7월에 접어들면서 불안한 휴전은 금방 깨지고 다시 맹렬한 교전이 시작되었는데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마리소(Mariso)에 있던 KNIL 병영과 봄슈트랏(Boomstraat)거리 마또앙인(Matoangin) KNIL 병영 인근, 호그팟(Hogepad) KNIL 간부숙소 등이었습니다. 전투는 사흘 밤낯으로 계속되다가 7월말이 되어서야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KNIL 7 27일 정식으로 해체됩니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KNIL 부대원들을 어느 부대로 배속시키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중 일부는 네덜란드 왕립군에 귀속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합주국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아직 진로가 결정되지 않은 KNIL 부대원들은 심리적으로 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그들을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의 주구라고 여겼고 네덜란드 측은 자신들이 그동안 전쟁터로 내몰았던 인도네시아인 부하들에게 닥쳐올 운명에 별반 신경을 써주지 않았습니다. 마카사르의 KNIL 부대원들이 1950 7 26일 왕립 네덜란드군으로 임시 편입된 후에도 그들의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네덜란드 측은 그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곤 했는데 그 중 하나는 오히려 인도네시아 태생 KNIL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시키려는 네덜란드군 지휘관들의 강압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네덜란드군에서 내쫒거나 무장해제시켜 합주국군에게 인도하려는 시도로 여겨졌습니다. 불안과 절망의 끝에서 그들은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주민들을 괴롭히며 게양된 인도네시아 국기를 내리는가 하면 인근 마을에 가족을 방문하고 돌아온 합주국군 장교를 잔인하게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도발에 대해 합주국군은 대수롭게 않게 반응했으므로 합주국군이 너무 인내심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합주국 동인도네시아 전역사령관 까윌라왕 대령의 대응자제지시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안따라통신은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어제 17:00시 까윌라랑은 마카사르의 정당 및 조직 대표들과 접견했다. 그는 합주국군이 KNIL 측 도발에 대해 너무 인내로 일관하는 것 아니며 주민들이 합주국군의 조치에 대해 실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합주국군은 정부의 정규군이며 KNIL은 합주국군으로 재편되지 않는 한 단지 객으로 온 다른 나라의 군대일 뿐이다. 합주국군은 KMB 협정을 준수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충분한 전투력으로 현재의 문제를 즉각 해결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더욱 혼란이 가중될 것이고 전 세계가 이 사건을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 나라의 위신은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KNIL 부대의 도발과 합주국군의 인내 사이에서 결과적으로 합주국군이 다음 단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이냐는 내부적 딜레마가 발생했습니다. 더욱이 KNIL 부대에 대한 마카사르 주민들의 반발은 더욱 커져 해당 지역 KNIL 부대와의 모든 상거래행위를 보이콧 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KNIL 부대원들은 식료품을 사들일 수도 없고 커피 한 잔 제대로 사 마실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긴박한 분위기는 언제라도 폭발할 심각한 상황이 되어 갔습니다. 날로 험악해지는 긴장국면을 해소하기 위해 합주국군 측은 1950 8 5일 인도네시아 주둔 네덜란드군 대표와 회합을 갖기로 합니다. 네덜란드군의 대표 세 명과 UNCI의 대표도 참석한 회합에서 합주국군은 긴장완화를 위해 주민들을 설득해 KNIL 부대에 대한 보이콧을 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 협상결과가 나온지 불과 80분 후인 그날 17:20시를 기해 KNIL 부대는 합주국군 병영과 가루다부대 10여단 참모들의 숙소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협약에 대한 즉각적인 배신과 도를 넘어도 너무 넘어버린 이 사태는 대해 합주국군과 하사누딘 사단에 편입된 토착 게릴라부대들, 그리고 마카사르 주민들을 격분시켰습니다. 전투 초기엔 KNIL 부대가 전장을 장악하는 듯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세는 곧 역전되었고 항공과 해상지원에 힘입은 합주국군은 게릴라부대와 민병대들과 더불어 KNIL 부대들을 격퇴했습니다.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초창기엔 대책없는 오합지졸이었던 인도네시아군이 이제 네덜란드군과 대등히 맞서 격퇴할 수 있을 정도의 전투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과 72시간이 채 되지 않아 KNIL 부대는 각각의 병영 안에 포위되어 전멸될 위기에 처하자 1950 8 8일 마침내 만다이 비행장에서 합주국군을 대표한 까윌라랑 대령과 인도네시아 주둔 네덜란드군 최고사령부를 대표한 쉐플라르(Scheffelaar) 소장 간에 협약이 체결됩니다.

 

그들은 모든 네덜란드군이 마카사르를 떠나고 보유 장비들을 모두 합주국군에게 넘겨주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장병들은 왕립네덜란드군에서 축출될 것임도 분명히 했습니다. 1950 8 8 16:00시 체면을 잔뜩 구긴 네덜란드군은 마카사르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조롱과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이는 1949 12 27일 네덜란드로부터 주권을 이양받은 후 처음으로 네덜란드군과의 전투에서 거둔 분명한 군사적 승리였고 그 결과 네덜란드군을 해당지역에서 몰아냈으므로 합주국군이 박수받아 마땅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로서 이 지역에선 자치주 국기 대신 인도네시아 국기인 적백기가 영원히 휘날리게 되었습니다.

 

2016. 2. 8.


참고

1)블록포스트 스자라키타 http://sejarahkita.blogspot.co.id/2006/04/pertempuran-makassar-1950.html)

2) 위키페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