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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의 끝 그리고 반란의 시작 본문

인도네시아 현대사

독립전쟁의 끝 그리고 반란의 시작

beautician 2016. 1. 30. 23:42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10)


헤이그에서 1949 8 23일부터 11 2일까지 열린 원탁회의의 결과 그 해 12 27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주권이 인도네시아에게 완전히 이양되었습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16개의 자치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 합주국 (Republic of the United States of Indonesia : RUSI)의 형태를 띈 네덜란드 연방국의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독립전쟁 중 인도네시아인 사망자의 수는 유럽인 사망자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전사한 병사들은 45,000명에서 10만명 사이로 추정되었고 민간인 사망자들은 25,000명에서 많게는 10만명까지 추산됩니다. 영국군은 1945-1946년 기간 중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1,200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는데 대부분이 영국령 인디아병사들이었습니다. 1945-1949년 기간 중 네덜란드 군인들은 5천명 이상이 전사했습니다. 일본군은 반둥에서만 1,057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전사자는 절반 정도였고 나머지는 인도네시아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3년 동안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치명적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인들은 그 수백~수천 배에 달합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은 이 시기에 학살당안 일본군들에 대해 아직까지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화교들은 대체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을 지원했지만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유라시아혼혈들도 적잖은 수가 사망하거나 집을 잃었습니다. 전쟁 중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7백만명이 넘습니다.

 

인도네시아가 훗날 법령으로 정한 국가영웅들 중에서도 이 시기에 사망한 사람들은 30여명에 달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다루었던 인물들 중에서도 일제강점기 당시 수까르노와 함께 민족역량본부(PUTERA)의 수뇌부를 이루었던 무함마디야의 수장 KH 마스 만슈르, 그 해 초 발리에 상륙한 네덜란드군에게 발리식 옥쇄로 맞섰던 이 구스티 구라라이 중령, 남부 술라웨시의 투사 월터르 몽인시디, 블리타르(Blitar)에서 일본군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PETA 쇼단쬬 수쁘리야디, 1948년 마디운사태 때 살해당한 동부자바 주지사 수리요 등의 이름이 보입니다.

 

수디르만 장군과 함께 인도네시아군을 조직하고 이끌었던 우립 수모하르죠 장군도 1948 11월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25년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군(KNIL)에서 복무하다가 1939년 전역했으나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과 함께 곧 진주할 연합군들과 싸우기 위해 공화국군이 조직되면서 그는 최고위 수뇌부가 되어 복귀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감시와 수모를 당하면서 심장병을 얻었던 그는 과거 네덜란드에 충성을 맹세했던 경력이 늘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공화국 정규군의 전신인 BKR이 군대로 진화해 갈 것인가 아니면 경찰로 변모해 갈 것인가를 놓고 훗날 또 다른 국가영웅이 되는 경찰 측의 오또 이스깐다르 디나타(Oto Iskandar Di Nata)와 맞서기도 했던 우립 장군은 1945 10 TKR군이 창설될 때 총사령관으로 내정된 수쁘리야디가 나타나지 않아 얼떨결에 임시 총사령관이 되어 군을 조직합니다. 총사령관 내정자 수쁘리야디는 앞서 언급한 블리타르의 반란주역 PETA 쇼단쬬였던 그 수쁘라야디였는데 이미 유명을 달리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 해 12월 전군 사단장회의에서 군복을 입은 지 2년된 23년 연하의 새파란 수디르만에게 전군사령관 지위를 뺏기지만 그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고 그 후 수디르만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총참모장으로 남아 실질적으로 전군을 지휘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그는 인도네시아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내리는 명령도 무슨 말인지 모호한데다 부하들은 수디르만의 재가가 없으면 그의 명령을 듣지 않으려 했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1948년 초 렌빌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는 네덜란드가 다시 대규모 침공을 위해 힘을 기를 의도로 기획된 것이라 생각했던 우립장군은 군의 기강과 훈련을 강화하려 했으나 레라프로그램이 가동되면서 병력감축과 함께 아미르 샤리푸딘이 좌익세력을 대거 군으로 끌어들이자 이에 실망하여 사표를 제출합니다. 뒤이어 구성된 하타의 내각은 우립장군을 설득해 국방장관과 총리의 군사고문으로 남게 하지만 그 해 11월 지병인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뜹니다. 그의 죽음에 상심한 수디르만 장군은 우익과 좌익, 전쟁과 병력감축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기만 했던 수까르노 정부의 변덕과 우유부단이 우립장군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책망하며 우립장군의 빈 자리를 애도했다고 전해집니다.

 

수디르만 장군도 우립 장군이 사망한 날로부터 1 2개월 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주권이양하는 장면을 지켜본 지 불과 한 달 만인 1950 1 29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일대기는 오래 전 별도의 챕터로 따로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미르 샤리푸딘의 레라프로그램이 가동되던 1948 1 2공군사령관 수르자디 수르자다르마(Soerjadi Soerjadarma)에게 총사령관직을 넘기면서 대장에서 중장으로 강등되는 이상한 사건을 겪기도 했습니다.




 

족자의 공화국정부와 함께 수르자다르마 사령관도 사로잡혀 방카로 유배되면서 수디르만 장군이 다시 전군사령관이 되지만 그는 사망할 때까지도 강등된 중장계급을 그대로 달고 있다가 사망 후에야 다시 대장으로 복권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강산이 여러 번 변한 1997년에 이르러 젠드랄 브사르(Jendral Besar) 즉 오성장군으로 다시 추서되는 뜬금없이 사건이 벌어집니다. 수디르만 장군은 지금도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사람들 마음 속에 따뜻한 아우라를 뿜는 찬란한 별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오성장군이 된 것은 그의 뜻도, 국민의 뜻도 아니었습니다.

 

미군은 역사상 아홉명의 오성장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죠지마샬 장군, 맥아더 장군, 아이젠하워 장군, 헨리 H 아놀드 장군, 오마르 브래들리 장군은 최소한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 보았을 만한 미육군 사령관들이었죠. 미해군에도 미드웨이 해전으로 이름을 떨친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제독을 비롯해 윌리엄 대니얼 래히 제독, 언스트 죠셉 킹 제독, 윌리엄 프레드릭 핼시 제독 등이 별 다섯개를 어깨에 달았습니다.



 

이들 중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 9월 오성장군으로 진급한 브래들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1944 12월에 별 다섯을 달았습니다. 당시 유럽에선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막을 내리고, 태평양에서는 한창 일본을 밀어붙이던 때였습니다. 여덟 명의 오성장군들이 현직에 있어도 아무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당시 유럽과 태평양에 포진한 미군의 규모는 전쟁으로 인해 엄청나게 확대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왜 인도네시아에서는 1997년에 갑자기 오성장군들이 출현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장기집권 말년에 접어들던 수하르토 대통령의 노욕 때문이었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던 수하르토는 스스로 대장군 계급을 달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많이 엇갈리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이 가장 훌륭한 군사적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 믿었고 그 어떤 군인들보다 더 높은 계급을 달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뜬금없이 그 나이에 자기만 별 다섯개를 달기는 매우 뻘쭘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성장군 계급장을 세 세트 만들어 그 중 한 개를 인도네시아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해 마지 않던 수디르만 장군에게 먼저 바쳤고 또 다른 하나를 당시 아직 생존해 있던 군원로 중 자신의 직속상관이기도 했던 나수티온 장군에게도 바치면서 자기 어깨에 스스로 오성장군 견장을 다는 민망함을 애써 감췄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는 역사상 가장 평화롭던 시기에 갑자기 세 명의 오성장군들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1997년 오성장군이 된 두 사람 중 수하르토는 이듬해인 1998년 경제위기와 자카르타 폭동을 맞아 32년간 철권으로 쥐고 있던 대통령직에서 하야해야 했고 나수티온은 불과 3년 후인 2000년 타개하여 먼저 간 수많은 동료와 상관들, 그리고 부하장병들이 잠들어 있는 깔리바타 국립묘지에 뭍힙니다. 수하르토와 나수티온에겐 이 대장군의 계급장이 자랑스러워 마지않을 영예였겠지만 수디르만 장군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이유없는 진급을 그의 성품상 절대 달가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독립전쟁 중 전사해 국가영웅반열에 이름을 올린 인도네시아 공군들도 적지 않은데 그 중 공군준장 할림 뻐르다나꾸수마도 1947 12 14일 태국에서 군수품을 사서 돌아오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습니다. 1922년생인 그는 당시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당시 그가 탓던 앤더슨 기종의 항공기는 말레이시아의 뻬락(Perak)에 추락했는데 그 추락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훗날 자카르타의 한 공군비행장을 그를 기념해 할림 뻐르다나꾸수마 공항이라 이름붙이게 되는데 여기가 공군기지이자 이슬람성지 메카를 향해 하지(Haji)순례를 떠나는 무슬림 민간인들이 애용하는 할림비행장이고 그 옆으로 원래는 공군전용으로 지어졌지만 이제는 퍼블릭코스가 되어 한국인들도 수십년간 싸게 이용하면서 때로는 군장성이 낀 앞팀과 시비가 붙어 한국인 골퍼들이 그쪽 캐디들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부관에게 권총으로 위협받기도 했다는 악명높은 할림골프장도 여기 있습니다. 할림의 유해는 뻬락에 뭍혔다가 나중에 자카르타 소재 깔리바타 영웅묘지로 이장됩니다.

 

앞서 에피소드에 종종 등장했던 공산주의자 딴말라카(Tan Malaka)1949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20세기 초 유럽유학을 통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니체들의 사상에 감명받았고 심지어 독일군에 입대하려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초기 공산주의자중 한명으로 유학생활을 마치고 인도네시아에 돌아와 정치일선에 뛰어들어 급기야 네덜란드 식민지국회인 볼크라드의 의원으로 선출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1927년 인도네시아 공화당(Partai Replulik Indonesia), 1946년엔 투쟁연대(Persatuan Perjuangan), 1948년엔 무르바당(Partai Murba)를 만드는 등 적극적인 정치활동와 유배, 투옥생활을 반복했습니다. 특히 투쟁연대 시절 네덜란드와의 링가자티 조약에 불만을 품고 수딴 샤리르 총리와 몇 명 각료들을 납치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도 없이 2년 반 동안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에 무쏘, 아미르 샤리푸딘 등의 공산주의자들이 마디운사태에서 대거 죽음을 당할 때 그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가 크라이작전을 통해 족자를 함락시키자 그는 동부자바의 시골로 가 블림빙이란 농촌마을에 터를 잡았고 인근 38대대의 사바루딘 소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을 대항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지휘관이라고 딴말라카가 인정했던 사바루딘은 그러나 군내에서 여러가지 갈등을 겪다가 동부자바 공화국군 지휘관들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됩니다. 그때가 19492 17일이었습니다. 그달 19일 딴말라카도 블림빙에서 공화국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네덜란드군 특수부대 KST가 소위 타이거작전을 펼쳐 2 20일 동부자바의 안죽(Nganjuk)마을을 공격해 왔습니다. 화력에 밀린 공화국군은 딴말라카가 네덜란드와 내통한 것이라 생각했고 이미 부상을 입어 절뚝거리는 몸으로 공화국군에게 끌려 끄디리 인근 윌리스산 중턱에 선 딴말라카는 브라위자야 사단 시까딴(Sikatan) 대대 소속 한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즉결 처형되어 숲속에 아무렇게나 매장됩니다. 훗날 역사가들이 공산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 민족적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일본군 밀정, 이상주의자, 이슬람 리더이자 미낭카바우 출신의 쇼비니스트라고 평가하는 딴말라카의 최후였습니다. 그는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공산주의자로서는 알리민(Alimin)과 함께 단 두 명만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으로 지정됩니다.

 

이들 외에도 많은 독립영웅들과 군인들, 민간인들이 이 시기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편 경제적으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국토와 사회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독립혁명의 파괴력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독립전쟁은 공화국 경제에 더욱 직접적 영향을 끼쳐 공화국 지역에서는 음식, 의류, 연료 등을 비롯한 모든 물자가 품귀현상을 보였고 우표에서부터 육군뱃지, 기차표 등 모든 필요한 물품들을 네덜란드의 해상봉쇄에 맞서 스스로 만들어 자급자족해야만 했습니다. 한편 일본화폐와 네덜란드 신권화폐, 공화국 화폐들이 각각 동시에 쓰이면서 통화혼란이 심화되었고 파멸적 인플레이션이 공화국을 휩쓸었습니다.

 

이 독립전쟁은 인도네시아 근대사의 전환점이며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인도네시아의 정체적 경향을 결정하는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독립전쟁 기간은 공산주의와 호전적 민족주의, 수까르노의 교도민주주의, 이슬람의 정치세력화, 인도네시아군의 기원과 권력구도에서의 자리매김, 인도네시아의 헌정구조, 중앙집권적 구도 등이 태동하는 시기였습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지구 반대편의 지배자가 세운 식민정권을 무너뜨렸고 구시대적이고 나약하게만 보였던 라자(raja – )들의 시대를 저물게 했습니다. 또한 식민지 인도네시아의 심각한 인종적, 사회적 계급구분을 완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에너지와 희망이 많은 문학작품에서 엿보였고 교육과 근대화에 대한 욕구를 고취시켰습니다. 그러나 가난에 찌든 대다수 농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그다지 개선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상업부분에선 오직 몇몇 사람들이 나눠먹는 구도가 자리를 잡았고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은 향후 수십년 동안 짓눌리게 됩니다.

 

한편 독립선언에 이어 나온 소위 사회적 혁명이란 것은 네덜란드가 세운 인도네시아의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이었고 어느 정도는 일본이 부과한 정책들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기도 했습니다. 전국에 걸쳐 국민들은 전통 귀족들과 마을 지도자들을 대항해 들고 일어났고 토지와 기타 물자에 대한 공동소유권을 행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적 혁명들은 금방 진압되었고 특히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들은 완강히 짓밟혔습니다.

 

혁명시기를 거치는 동안 시골지역을 분열시켰던 깊은 갈등에 뿌리를 둔 폭력문화는 20세기 후반부 내내 반복해서 터져 나왔습니다. 사회혁명이란 단어는 주로 좌익에 의해 행해진 폭력행위를 지칭하곤 했는데 진짜 혁명을 조직하는 움직임뿐 아니라 단순한 보복, 분노의 표현, 권력행사 등을 포함했습니다.. 폭력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가장 많이 학습된 부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왕, 귀족 또는 단순히 부유한 사람들은 봉건적이라고 표현되어 종종 공격받고 때로는 참수당하기도 했습니다. 봉건적 여인들에겐 벌로서 강간이 성행했습니다. 수마트라와 깔리만탄의 해안선을 따라 세워져 있던 술탄왕국들에서 술탄들과 높은 권한을 가진 자들은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특권을 누렸지만 일본군이 떠나자마자 공격을 당했고. 아쩨의 세속지주들도 대부분 처형당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에 부역했거나 네덜란드 통치권 안에 살았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두려움과 불활실성 속에서 살았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혁명구호는 공화국의 권위를 내세워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히즈불라 출신 공화국군 멤버들은 공화국 정부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1948 5월 그들은 수까르노 정권에서 스스로를 분리해 다룰이슬람’(Darul Islam)이라고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도네시아 이슬람국가(Negara Islam Indonesia)의 성립을 선언했습니다. 이슬람 신비주의자인 스까르마지 마리쟌 까르또수위르죠(Sekarmadji Maridjan Kartosuwirjo)가 지휘하던 다룰이슬람은 인도네시아를 이슬람 신정정치국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당시 공화국 정부는 네덜란드의 위협에 대항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다룰 이슬람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동안 마슈미(Masjumi)당의 일부 지도자들이 이 반란을 지지했습니다. 1950년 인도네시아 전역을 회복한 공화국정부는 비로서 다룰 이슬람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특히 몇몇 주들은 다룰 이슬람을 추종한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다룰이슬람의 반란도 1962년에 완전히 진압되긴 하지만 네덜란드에 대한 독립전쟁이 막을 내리던 1949년 말부터 인도네시아 전역에 걸쳐 각종 반란이 시도되었고 다룰이슬람의 경우와 같이 어떤 것은 자칫 국가의 분열을 초래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중 아프라(APRA)반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화국이 통제하고 있던 자바와 수마트라는 한 개로 묶여 인도네시아 합주국 16개 주들 중 하나가 되었지만 전체인구의 절반 정도가 이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15개의 연방주들은 네덜란드가 1945년부터 창설했던 괴뢰정권들이었고 이들 자치주들은 독립적 체제를 갖춘 국가로서 자체 대통령과 국기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1950년 상반기에 모두 공화국으로 흡수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1950 1 23일 반둥과 자카르타에서 웨스털링의 라뚜아딜부대(APRA)가 반공화국 쿠데타를 일으키는데 챕터 6에서 남부 술라웨시의 소요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네덜란드 특수부대 DST의 레이먼드 터크웨스털링 대위 (Captain Raymond "Turk" Westerling)가 여기서 다시 등장합니다.






라뚜아딜의 군대(Angkatan Perang Ratu Adil – APRA)라는 친네덜란드계 민병대이자 준군사조직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웨스털링이 1949 1 15일 창설한 것입니다. 이 민병대 명칭은 자야바야(Jayabaya)예언서에서 터키인의 후손 중 공의의 제왕이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에 기반한 것입니다. 터키 태생이었을 뿐 터키인의 피는 하나도 섞이지 않았는데도 웨스털링은 자신이 폭군에게서 인도네시아 민중들을 구원할 그 공의의 사도라고 주장했는데 절대 먹힐 것 같지 않은 이 주장이 난해한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묘하게 먹히면서 라뚜아딜의 군대는 그 세를 불립니다.

 

라뚜아딜(공의의 여왕)은 구원자로서의 한 지도자가 사람에게 공의와 위로를 가져올 것이라는 신화에 기초합니다. 남자 왕은 에루쪼끄로’(Erucokro)라고도 부릅니다. 예언에 따르면 라뚜아딜의 강림의 시기는 사회가 불안해지고 자연재해가 잇따르며 천하를 호령하던 거대한 왕조가 쓰러지는 등의 전조를 보이는 때라고 합니다. 하지만 공포로 전횡하던 왕을 갈아엎은 후 라뚜아딜의 치세는 오래 가지 못하고 곧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었어요. 영악한 웨스털링은 이 신화를 교묘히 사용했던 것입니다.

 

 

웨스털링은 인도네시아 합주국의 연방자치주들을 부추겨 수까르노와 하타가 주도하는 인도네시아 통일운동을 자바인들이 주도하는 세상을 만들려는 시도라고 매도하고 공화국을 반대하는 18개의 다양한 분파들, 즉 과거 공화국군 게릴라, 다룰이슬람, 암본, 멀라유, 미나하사, 퇴역 KNIL 부대원, RST KNIL 특수전 연대 출신, 그리고 네덜란드군 출신들을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1950년 시골자경단으로 출발한 APRA2천명의 전투원을 가진 2개 연대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수까르노 정부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웨스털링은 네덜란드 연방을 지지하는 뽄띠아낙의 술탄 하미드2세를 부추겨 1950 1 23일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들은 수까르노 정부를 전복시키고 당시 국방장관 술탄 하멩꾸부워도 9세와 알리 부디아르죠 사무국장을 포함한 주요각료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APRA 반란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과거 스폴장군은 개인적으로 웨스털링을 총애했지만 그가 남부 술라웨시에서 벌였던 작전과 관련해 군법회의에 회부된 모든 전쟁범죄혐의에 대해 더 이상 조사가 진행되며 네덜란드군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웨스털링의 강제 퇴역을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 웨스털링은 2년 반동안 DST KST 특수부대를 이끌었던 경력을 마지막으로 1948 11 16일 현역생활을 마쳤습니다. 불명예제대로 상심한 웨스털링은 당시 애인과 결혼하여 서부자바의 빠쩻(Pacet)이라는 곳으로 들어가 터를 잡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4911월 네덜란드군 비밀정보국은 웨스털링이 50만명의 추종자를 가진 비밀조직을 결성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네덜란드 경찰조사관 J.M.버버그(J.M.Verburgh) 1949 12 8인도네시아 공의의 여신 연맹’(Ratu Adil Persatuan Indonesia : RAPI)이라는 단체가 공의의 여신의 군대(Angkatan Perang Ratu Adil : APRA)라는 군사조직까지 갖추고 있으며 웨스털링이 깊이 간여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입니다. 웨스털렝은 찌아삐엣까이(Chia Piet Kay)라는 화교의 도움을 받아 부대를 무장시켰는데 그는 웨스털링이 메단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12 5일 밤 10시경 웨스털링은 스폴 대장 후임으로 네덜란드군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해 있던 부르만 반브레덴 중장에게 전화하여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주권을 이양한 직후 자신이 수까르노와 그의 정부를 전복시킬 쿠데타를 벌이겠다며 반브레덴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반브레덴은 이미 주권이양을 저지하려는 군사적 움직임이 있다는 첩보와 웨스털링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심정적으로는 웨스털링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었을 듯 합니다. 하지만 반브레덴 장군은 1949 12 27일에 있을 주권이양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도록 보장해야 할 위치에 있었으므로 웨스털링의 쿠데타계획을 반대하며 강력히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웨스털링을 당장 잡아들이는 수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1950 1 5일은 목요일이었습니다. 그날 웨스털링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에 일종의 최후통첩을 편지에 담아 보냈습니다. 그는 공화국 정부가 빠순단주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합주국 내 자치주들을 격에 맞게 대해야 하며 특히 APRA가 빠순단주의 공식군대임을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7일 이내에 공화국 정부의 긍정적 답변을 요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할 것이라 위협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 최후통첩은 공화국 정부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신임네덜란드 고등판무관 H.M.허쉬펠트(Hirschfelt)박사를 긴장시켰습니다. 그에게 쏟아진 공화국 내각의 질문공세는 그를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네덜란드 내무장관 슈티커(Stikker)는 모든 네덜란드 민간관료들과 군인들이 웨스털링에게 협조하라는 지시를 허쉬펠트에게 내렸던 것입니다.



 

1950 1 10일 공화국 측에선 이미 웨스털링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냈음을 하타 부통령이 허쉬펠트에게 통지했습니다. 로빙크(A.H.J. Lovink)가 네덜란드측 전임 고등판무관으로 있을 당시 웨스털링에게 면책특권 부여를 요구한 바 있었는데 이제 공화국정부를 웨스털링의 면책특권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웨스털링은 자카르타의 드인디호텔(Hotel Des Indies)에서 뽄띠아낙 술탄 하미드 2세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949 12월에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웨스털링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면서 하미드 2세가 자기들 조직의 수장이 되어줄 것을 부탁한 바 있었습니다.



 

하미드는 웨스털링의 조직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으나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으므로 당시의 회합은 아무런 결과도 도출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의 회합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웨스털링은 1952년에 쓴 자서전 기억 Mémoires에서 뽄띠아낙 술탄 하미드 2세를 수장으로 한 그림자내각(Kabinet Bayangan)이 구성되었고 그래서 하미드 2세는 이를 비밀에 붙이고자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50 1월 중순 연방 및 해외주 담당장관인 J.H. 마르스번(J.H. van Maarseven) 1950 3월에 조직될 인도네시아-네덜란드 연방회합을 준비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하타는 웨스털링의 체포를 경찰에 지시했음을 마르스번에게 통지했습니다.




공화국 경제장관 쥬안다(Juanda) 1950 1 20일 네덜란드를 방문하면서 괴첸 장관에게 현지 위험요소로 대두되고 있던 RST 정예부대를 인도네시아에서 즉각 퇴출시킬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 직전인 1 17 RST의 한 부대가 마침 실제로 자바섬에서 암본으로 이동한 사실이 있어 허쉬펠트는 이를 토대로 반브레덴 장군과 네덜란드 국방장관 쇼킹(Schokking) RST부대의 철수시기를 조율 중이라는 전문을 괴첸 장관에게 보냅니다.

 

그러던 중 1 22일 저녁 9시 중무장을 한 RST 특수부대원들이 바뚜자자르(Batujajar)의 병영을 이탈하여 APRA 반란에 가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해당 부대 중대장은 즉시 공화국군 실리왕이 사단 사령관 사디낀 대령과 자카르타의 반브레덴 장군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 부대에 나타난 RST 지휘관 보가우츠 중령(Letkol Borghouts)은 부대원들의 조직적 탈영으로 크게 충격받은 모습이었습니다. 사디킨 대령도 9시경에 부대를 방문했습니다. 인원점검결과 바뚜자자르에서 140, 뿌라바야에서는 190명의 RST 대원들이 탈영했으며 찌마히의 부대에서도 암본출신 병사 12명이 탈영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레드베레와 그린베레의 합작품인 RST 특수부대를 철수시키는 것은 결국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철수계획을 예전 부하들로부터 전해 들은 웨스털링은 철수시작 전인 1950 1 23일 쿠데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KNIL 부대의 T. 카사 중령은 엥글스 장군에게 전화하여 중무장한 APRA 부대가 뽀스브사르(Pos Besar) 도로를 통해 반둥으로 기동하고 있음을 보고했습니다웨스털링과 그 부하들은 길에서 마주치는 공화국군을 무조건 사살했는데 이 과정에서 렘봉(Lembong)중령을 포함한 94명의 공화국군들이 목숨을 잃었고 APRA 측은 아무런 인명피해 없이 계속 진군해 갔습니다.



 

웨스털링은 반둥공격을 지휘했고 메이여 상사의 RST 부대는 수까르노 대통령을 생포하고 정부관청들을 장악할 목적으로 자카르타를 향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반둥에서는 실리왕이 사령부를 점령하는 전술적 승리를 누리지만 이 기회에 함께 봉기할 것으로 계산에 넣었던 KNIL 부대나 인도네시아 이슬람군(Tentara Isalm Indoensia :TII)이 끝내 침묵함에 따라 자카르타 공격이 실패하면서 APRA 반란은 사실상 좌절되고 맙니다.

 

반둥을 한껏 휘저어 놓은 후 RST 부대원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모두 각자의 부대로 복귀했고 웨스털링 본인은 자카르타에 스며들어 1 24일 호텔드인디에서 술탄 하미드 2세를 다시 만났습니다. 술탄은 이번엔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비서인 J. 키어스 박사를 동행한 하미드 2세는 자카르타 공격이 실패한 것에 대해 웨스털링에게 호통을 쳤고 그가 반둥에서 실리왕이 부대원들을 학살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질책했습니다. 웨스털링은 이에 반박하지 않고 묵묵히 하미드 2세의 반응을 본 후 호텔을 떠났습니다.

 

그런 웨스털링이 다시 행동을 개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1 25일 하타부통령은 웨스털링이 RST와 다룰이슬람의 지원을 받아 자카르타를 공격해 올 것이라고 허쉬펠트에게 연락했고 엥글스 장군 역시 웨스털링이 당시 다룰이슬람 반군들의 본거지 중 하나였던 가룻(Garut)에 추종자들을 집결시키고 있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웨스털링의 APRA가 일으킨 군사행동에 네덜란드군 정예부대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뉴스를 타고 전 세계에 보도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보도를 낸 것은 1950 1 23일의 로이터 통신원 휴 래밍이었고 호주 멜번썬(Melbourne Sun)지의 오스머 화이트(Osmar White)한 위기가 거대한 스케일로 동남아시아를 집어삼키다라는 제목을 표지에 붙였습니다. 주미 네덜란드 대사 반클레픈스 조차 네덜란드가 교활한 방법으로 인도네시아에 생채기를 내었고 반둥을 공격한 것은 네덜란드의 검은 손이었다고 미국인들 앞에 밝히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의 쿠데타 시도를 할 수 없었던 웨스털링은 자카르타 모처에 몸을 숨기고 아내와 자식들을 불러 들였고 계속 거처를 옮겨 다녔습니다. 그러던 1950 28일 웨스털링의 부인이 반랑겐을 만났습니다. 크라이작전의 주역이었던 반랑겐대령은 이제 육군소장으로 진급하여 총참모장의 보직은 맡고 있었습니다. 웨스털링의 처한 상황을 들은 반랑겐은 반브레덴장군, 허쉬펠트 고등판무관과 당시 자카르타를 방문 중이던 네덜란드 국무장관 W.H.안드레아 포커마(W.H. Andreae Fockema)에게 즉시 보고했습니다. 웨스털링은 네덜란드인들의 입장에선 애국영웅이었으므로 그들은 머리를 짜내 웨스털링을 서부 뉴기니로 빼돌리기로 합니다. 그러나 다음날인 2 9일 하타부통령은 만약 네덜란드측이 웨스털링의 신병을 확보했다면 즉시 공화국측에게 인도할 것을 촉구합니다. 허쉬펠트는 만약 그들이 웨스털링을 돕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네덜란드가 국제사회에서 지탄을 당하는 곤경에 처할 것이라 판단하고 웨스털링 구출계획 보류를 군에 지시합니다.



  

그러나 반랑겐 소장은 허쉬펠트의 지시를 무시하고 2 10일 비밀리에 정보참모 F. 반더벤 소령을 시켜 웨스털링과 접촉해 그를 인도네시아에서 빼내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는 웨스털링의 후임으로 KST 특수부대장에 부임해 있던 보가우츠 중령(Johannes Josephus Franciscus Borghouts)의 도움을 받아 꺼본시리(Kebon Sirih)지역 은신처에서 웨스털링을 만나 보고체계를 통해 반랑겐 소장에게 해당 사실을 알렸고 웨스털링이 은신처를 옮겨다니는 동안 허쉬펠트 고등판무관을 제외한 민간관료와 군은 물론 반브레덴 사령관과 포커마 국무장관까지 모든 네덜란드 요인들이 웨스털링의 은신과 도피에 연루되어 협조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포커마 국무장관이 총대를 매고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2 17일 보가우츠 중령과 반더벤 소령은 웨스털링 철수임무를 맡았고 웨스털링은 J.W. 키스트(J.W. Kist)해군 중장의 지휘권 아래에 있는 해군공무항공기 카탈리나 밀크(Catalina Milk)편에 웨스털링을 태우기로 합니다. 그들은 돈과 고무보트, 위조여권 등을 준비하여 2 18일 반브레덴 장군에게 보고하고 반더벤 중령은 해군공무항공대 P. 브론 대위에게 카탈리나호를 특수임무에 사용한다고 둘러대어 키스트 중장의 재가까지 받습니다. 키스트 중장은 한 특수부대 장교를 리아우섬에 데려가기 위해 항공기를 사용한다고 보고받은 상태였으므로 이 일이 웨스털링을 빼돌리는 작전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보고받은 승선자 이름은 터키 태생 웨스털링이 아니라 마닐라에서 태어난 윌렘 루이텐베엑(Willem Ruitenbeek)이었습니다.



 

2 22일 웨스털링은 KNIL 상사의 군복을 입고 반더벤 중령과 함께 딴중쁘리옥 항구로 가 그곳을 경유하는 카탈리나호에 몸을 싣고 곧장 싱가폴로 날아가 그날 정오경 싱가폴 해안에서 1km 정도 떨어진 해상에 착륙해 고무보트를 내렸습니다.

 

웨스털링의 저서인 드엔링(De Eenling)에 따르면 그의 고무보트는 구멍이 나 침수되었으나 한 중국어선에 의해 구조되어 싱가폴에 입성했다고 합니다. 그는 싱가폴에 도착하자마자 오랜 친구인 화교무기상 찌아삐엣까이와 만나 조만간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기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웨스털링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편 웨스털링이 싱가폴로 도망치면서 수장을 잃은 APRA 1950 2월 그 기능을 정지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술탄 하미드 2세도 자카르타에서 체포됩니다.

 

2 24일 한 프랑스통신이 네덜란드군에 의해 웨스털링이 네덜란드 해군소속 카달리나호를 타고 싱가폴에 입국했다는 보도를 냈습니다. 이 소식은 전세계로 전파되어 미국 주간지인 라이프지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됩니다. 그가 자카르타를 떠나기 전인 2 20일 로이터통신의 기자 휴 래밍은 웨스털링이 싱가폴로 향하는 중이며 곧 유럽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런던에 전보를 날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중매체의 보도는 인도네시아에 있던 네덜란드군 지휘관들과 민간인 관료들의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매체의 보도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허쉬펠트는 인도네시아 내각에게 맹공격 당했고 반브레덴과 반랑겐은 네덜란드군이 웨스털링의 싱가폴 도피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연루사실을 부인했습니다.

 

2 25일 허쉬펠트는 자신과 키스트 해군중장만이 반브레덴장군과 반랑겐소장, 포커마 장관이 기획한 웨스털링 구출계획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포커마 장관은 성명을 통해 자신이 이 모든 계획을 지시했으며 허쉬펠트는 이 일과 무관함을 천명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주둔 네덜란드군 수뇌부와 허쉬펠트의 신뢰관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2 26일 찌아삐엣까이의 집에 머물던 웨스털링은 영국경찰에게 전격 체포되어 창이(Changi)감옥에 투옥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공화국 정부는 싱가폴 당국에 웨스털링을 인도네시아로 추방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8 15일 열린 싱가폴대법원 결심에서 에반스 판사는 네덜란드 국적의 웨스털링을 인도네시아로 추방할 수는 없다고 판결합니다. 그보다 일주일 앞선 8 7일 네덜란드 의회는 웨스털링이 네덜란드에 도착하는데로 체포해 투옥할 것임을 의결한 바 있었습니다. 웨스털링은 8 21일 싱가폴의 네덜란드 총영사와 웨스털링의 변호사 R. 반더가악(R. Van der Gaag)이 동행하여 호주 칸타스 항공편으로 싱가폴을 출발합니다.

 

그러나 웨스털링은 네덜란드로 직행하지 않고 반더가악의 양해를 얻어 벨기에 브뤼셀에 내렸습니다. 그는 영원한 충성협회’(Stichting Door de Eeuwen Trouw – DDET)를 세운 덴하악(Den Haag) 암본인 대리인들의 방문을 받아 조속히 말루꾸로 들어가 공화국 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웁니다. 네덜란드에서는 그렇게 간단히 빠져나가 끝까지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웨스털링을 가장 영예로운 사람으로 추앙하기까지 했습니다.

 

1952년 초 웨스털링은 비밀리에 네덜란드에 입국했지만 금방 행적이 탄로나 4 16일 당국에 체포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네덜란드 주재 인도네시아 측 고등판무관 수산토가 5 12일 웨스털링의 인도네시아 추방을 요구하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거절했고 오히려 그 다음 날인 5 13일 웨스털링을 방면했습니다. 그해 10 31일 네덜란드 대법원은 웨스털링이 네덜란드인이므로 인도네시아로 추방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웨스털링은 그렇게 유유히 유치장에서 풀려난 뒤 다양한 회합에 나가 그의 견해를 얘기했는데 그때마다 매번 추종자들이 늘어났습니다. 그 중 어떤 회합에서 왜 수까르노를 그냥 쏴죽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웨스털링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매우 계산적인 사람들입니다. 총알 한 발 가격은 35센트이죠. 하지만 수까르노의 가치는 5센트도 되지 않습니다. 30센트씩이나 손해를 봐서야 안될 일이죠.”

 

1954 12 17일 웨스털링은 암스테르담에 호출되어 한 법무부직원을 만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에 대한 조사가 완료되었고 더 이상 조사를 진행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고 결정되었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1955 1 4일 웨스털링은 그러한 법원 결정문을 서면으로 받았습니다.

 

웨스털링은 그 후 두 권의 책을 쓰는데 하나는1952년 출간된 기억이란 제목의 자서전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1982년에 출간된 드엔링(De Eenling)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기억은 불어와 독어, 영어로 번역되기도 했고 영문판은 테러에 대한 도전’(Challenge to Terror)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많은 판매량을 보였고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식민지 반란을 진압할 필요가 있는 유럽국가들 사이에서는 전투전략분야 대소요작전의 바이블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인명을 잔혹하게 죽였던 웨스털링은 1987년 평화롭게 생을 마감합니다. 참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곤 합니다.

 

얘기는 다시 APRA 반란 직후로 돌아갑니다. 불발에 그치고 난 APRA 반란은 웨스털링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서부자바 빠순단주의 해체를 초래했고 이는 연방구도의 해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마침내 인도네시아 합주국이 조기에 해체되고 1950 8 17일 자카르타의 공화국정부가 전국을 통일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음을 천명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렇게 APRA 반란이 종식되자 이번엔 암본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기독교인 인구가 지배적인 암본은 친네덜란드 성향을 가진 몇 안되는 지역 중 하나였고 그들은 자바의 무슬림들이 지배하는 공화국을 좌익이라 간주하며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1950 4 25일 암본에서 남말루꾸 공화국(Republic of South Maluku:RMS)이 독립을 선언하자 공화국 군대는 그해 7월에서 11월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이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남아있는 연방주는 동수마트라주 뿐이었으나 이 역시 곧 무너져 공화국에 귀속됩니다.

 

 

2016.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