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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독립전쟁 마지막 전투 - 수라카르타 총공세

beautician 2016. 1. 24. 03:18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9)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끈기있는 저항과 적극적인 국제외교공세는 식민지 회복을 노리는 네덜란드에게 세계의 여론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군사적 성과를 거둔 두번째 경찰행동이 외교적으로는 네덜란드에게 재앙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신임 미국무장관 딘 에치슨(Dean Acheson)이 일찍이 UN이 제안했으나 네덜란드가 줄곧 거부했던 협상테이블을 향해 이제 전 세계가 네덜란드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카르타의 호텔 드인디스(Hotel des Indes)에서 1949 4 14일부터 협상을 주도한 인도네시아측 모하아드 로엠(Mohammad Roem)과 네덜란드측 얀 헤르만 반로옌 (Jan Herman van Roijen)의 이름을 딴 로엠반로옌 조약(Roem–van Roijen Agreement) 1949 5 7일 서명되었습니다. 이는 그 해 하반기에 헤이그의 국제원탁회의에서 인도네시아 독립이 승인되기 전 양국간의 현안을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합의된 내용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l  인도네시아군은 모든 게릴라활동을 중지한다.

l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는 원탁회의에 참가할 것을 동의한다.

l  족자에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를 복원한다.

l  네덜란드군은 모든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모든 전쟁포로들을 석방한다.

 

어쩌면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로엠반로옌 조약이 체결되던 날 스폴 장군은 네덜란드군 사령관직을 사임합니다. 고국에서 멀리 떠나와 남태평양에서 제2차 세계대전과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전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이먼 핸드릭 스폴 장군은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3주 후인 5 25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해 6 22일 향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의 관계에 대한 회합이 열렸고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합의했습니다.

 

l  1948년 렌빌조약에 의거하여 인도네시아에게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권력이양을 집행한다.

l  자발적이고도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 동등한 동반자관계로서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는 하나의 연방을 수립한다.

l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권리와 권한, 의무를 인도네시아에 이양하는 것에 대해 합의한다.

 

이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군은 6 24일 족자에서 철수했고 사흘 뒤인 6 27일 공화국군이 족자에 입성했습니다. 네덜란드 점령기간 내내 홀로 족자를 지켰던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는 7 6일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나 공화국 수도인 족자로 돌아온 수까르노 대통령과 모하마드 하타 부통령 등 공화국 정부와 각료들을 끄라똔에서 반갑게 맞았습니다. 7 13일 샤리푸딘 쁘라위라느가라가 이끌던 부낏띵기의 긴급정부가 공식적으로 수까르노의 정부에게 정권을 이양했고 하타의 내각은 이 날 로엠반로옌 조약을 비준합니다.



 

그리하여 8 3일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간의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8 11일에는 자바에, 8 15일에는 수마트라에 각각 평화가 선포되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이날 12,000명의 공화국군 포로들을 석방했습니다.

 

그런데 자바섬에서 휴전이 발효되기 직전인 1949 8 7일부터 10일까지 공화국군이 수라카르타를 총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은 수라카르타 4일전투’(Serangan Umum Empat Hari)라고도 일컫어 집니다.

 

1949 8 3 22:00시 전군사령관 수디르만 장군은 1949 8 11일엔 자바에서, 8 15일엔 수마트라에서 모든 교전을 중지할 것을 명령합니다. 슬라멧 리야디 중령이 이끄는 스노빠띠 사단 제 5여단과 아흐마디(Achmadi)소령의 특임대 학생군(TP – Tentara Pejalar)여단은 휴전이 발효되기 전에 네덜란드군을 공격해 솔로를 탈환함으로써 정전협약이 아니라 무력으로도 네덜란드군을 몰아낼 수 있는 공화국군의 역량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공화국군은 족자에서 그랬던 것처럼 솔로에서도 2 8일과 5 2일 두 차례 공세를 펼쳐 네덜란드군의 방어능력을 확인한 바 있었습니다. 6월말 족자에서 철수한 네덜란드군 일부가 솔로에 합류하면서 화력은 좀 더 증강된 상태였습니다.

 

솔로 총공격이 있기 전 몇가지 사건들이 이 작전의 성공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쯜루링안 다리를 공격할 때 전사한 네덜란드 병사들의 개인물품들을 학생군 17여단 측에서 네덜란드군 사령부에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네덜란드 병사들 중 신경쇄약으로 미쳐버린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수라카르타 수비대대 중 네덜란드인들로 구성된 1개 중대가 브렌 경기관총 8정과 자동소총 30, M95 소총 등을 들고 통째로 투항해 온 일도 있었습니다.



 

이상의 사건들 말고도 네덜란드군 반브레덴 중장(Van Vreeden) 8 3일 휴전발표가 나던 날 보다 유리한 협상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가똣 수브로또 대령의 부대와 데사발롱(Desa Balong)에 있던 인도네시아 국영 라디오방송시설을 비밀리에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한국영화 고지전에서도 한국전쟁 막바지에 발표된 휴전발효일정의 예보가 철의 삼각지대에서 참혹한 막판 고지전을 불러왔던 것처럼 휴전예보는 그 시한 내에 군사적, 정치적으로 보다 유리한 거점을 선점하기 위한 유혈사태를 불러오는 법이죠. 가똣 수브로토 대령의 지휘소와 방송시설은 그 전에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피해를 입진 않았으나 이 사건은 네덜란드가 그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얼마든지 정전협정을 어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로 여겨졌습니다.

 

솔로는 족자 점령군 지휘관 반랑겐 대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올(Van Ohl) 대령이 지휘하는 네덜란드군 최정예부대가 요새화한 도시였고 족자를 공화국에게 넘겨주고 철수한 네덜란드군 상당수가 솔로로 집결해 1949 8월 솔로에는 네덜란드군 11개 대대가 주요 거점지역들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들과 대치한 공화국군은 경찰군 2개여단, 학생군 1개 중대, 아흐마디 소령의 특임대 학생군 17여단, 슬라멧 리야디 중령의 스노빠티 사단 5여단이었습니다. 숫적으로는 공화국군이 약간 우위를 점했지만 그들이 갖추고 있던 무장과 화력은 네덜란드군에 비할 바 없을 정도의 열세였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사전회합와 작전회의를 거친 끝에 8 7일 새벽 6시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SWK(준방어선) 106의 아르쥬나 부대가 먼저 침투해 솔로 시내의 마을들을 통제권에 넣었고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네덜란드군의 병영들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공화국군은 즈브레스(Jebres) KL402 사령부, 주룩, 자갈란, 발라빤 등의 초소들, 그리고 반자르사리(Banjarsari)지역의 포병부대들을 목표로 했습니다.

 

둘째날인 8 8, 하루 종일 지속된 교전은 한밤중까지 이어졌고 공화국군은 빠사르끔방(Pasar Kembang)지역 도로에 장애물을 설치하며 공격해 들어갔는데 역습에 나선 네덜란드군은 그 일대의 인도네시아인 26명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중 학생군 병사는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주민들이었는데 네덜란드군은 그 여자 6명과 아동 8명을 포함해 총 24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SWK 100에서 105에 있던 전체 병력이 공세에 가담해 솔로 시내 전 거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아흐마디 소령을 대신해 슬라멧 리야디 중령이 야전지휘를 맡기 시작했습니다.



 

공화국군의 추가병력투입으로 SWK 106 부대는 더욱 네덜란드군을 밀어붙였고 제5여단 부대들은 스마랑에서 출발한 네덜란드 지원군을 살라띠가(Salatiga)에서 공격해 솔로에 입성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저지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전폭기 2대와 P-51 머스탱 전투기 4대를 동원해 라눗 빠나산(Lanud Panasan – 지금의 아디수마르모 Adisoemarmo)에 공수부대를 낙하시켰지만 전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어서 솔로 전역의 네덜란드군은 수세에 몰려 포위되었고 솔로 시내 대부분에 공화국군이 진주했습니다.

 

8 9일에 이르러 악이 받친 네덜란드군은 KST 특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서면서 군인,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마주치는 모든 인도네시아 남자들을 사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빠누라란(Panularan) 전투에서 제1연대 제1중대장 사히르 대위가 전사합니다.

 

넷째날인 8 10일 제5연대 제1방어선 지휘관 슬라멧 리야디 중령은 4일간의 공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분산공격을 명령했습니다. 학생군 게릴라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전투는 휴전이 발효되는 1949 8 11 00:00시까지 밤늦게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은 동료 2명이 전사한 것을 복수한다며 이미 휴전이 발효된 8 11일 아침 11시경 빠사르 낭카(Pasar Nangka) 주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36명을 집밖으로 끌어내 무차별 학살했는데 그 중엔 여자 5명과 아기 1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공화국군은 총공세 넷째날 도시 전역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1방어선 지휘관을 겸하고 있던 슬라멧 리야디 중령은 정전협정에 따라 SWK 106 지휘관 아흐마디 소령에게 전병력을 도시 경계선으로 불러들이도록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그 명령은 간단히 수행되지 않았습니다. 휴전이 발효된 당일에도 양측의 교전이 간헐적으로 벌어졌고 아마도 고의성이 다분해 보이던 네덜란드군 그린베레 특전대(KST)는 가뿌라가딩(Gapura Gading)지역의 공화국 적십자시설을 공격해 적십자 직원 14명과 피란민 8명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그들은 발포음이 나지 않도록 총기를 사용하지 않고 모두 대검이나 둔기로 살해하는 무자비한 방법을 썼습니다.

 

이 사건으로 109채의 집들이 불타고 205명의 민간인들이 네덜란드군에게 학살당했습니다. 반면 정작 군인들은 네덜란드측 7, 공화국측 6명의 전사자가 나왔을 뿐이었습니다. 불과 5개월 전인 1949 3 1일 족자 총공격작전에 비해 공화국군은 강력한 화력과 조직력을 가진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괄목할 만큼 사상자를 줄이면서 솔로를 탈환하는 역량을 보여주었고 이것은 그 사이 공화국군의 전투력과 사기가 크게 향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당시 족자의 병석에 있던 지역사령관 가똣 수브로또 대령의 휴전지시가 정식으로 내려오지 않은 가운데 8 11일 당일 휴전협정 위반사건들이 속출하고 있었으며 아흐마디 소령도 주민들의 안녕과 질서를 해하는 상대방 적대행위에 대해 각 섹터의 지휘관들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휴전협정과는 상반되는 명령을 내리는 등 혼란이 벌어지자 반올대령과 리야디 중령은 공식적인 접촉을 통해 양군 간의 휴전조건을 별도로 정하는 해프닝이 벌어졌고, 휴전을 명한 전군사령관 수디르만 장군의 8 3일자 명령서를 따르려는 리야디 중령과 전투명령 해제를 내리지 않은 지역사령관 가똣 수브로또 대령의 종전 교전명령을 따르려는 아흐마디 소령의 의견이 충돌하면서 내분상황까지 갔으나 상황보고를 받은 족자의 가똣 수브로또 대령이 급히 휴전명령을 하달하면서 사태는 급히 일단락 됩니다.

 

브레덴 장군은 자카르타로 날아가 로빙크(Locink) 고등판무관을 만나 격정적인 어조로 솔로의 상황을 전하며 공화국군의 휴전협정 위반이라 강조했습니다. 그는 즉각 세번째 경찰행동을 실시할 것을 제안하지만 로빙크는 이를 단번에 거부했습니다. 그는 솔로에서 공화국군의 공세에 밀려 솔로를 내어주고만 현지 네덜란드군의 역량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8 7일 총공세를 비롯하여 학생군이 중심이 된 공화국군의 세 차례 수라카르타(솔로) 공격은 네덜란드와의 외교협상에 있어 공화국의 입지를 유리하게 했습니다. 더욱이 가장 엄중한 방어력을 갖추었다고 평가되던 솔로를 훨씬 열악한 장비를 가진 공화국군에게 밀려 내주었던 사실은 이제 네덜란드가 군사적으로도 인도네시아를 쉽게 이기지 못할 것임을 시사하는 일이었고 공화국군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지원과 슬라멧 리야디 중령 같은 야전지휘관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사건이었습니다.



 

8 23일부터 112일까지 헤이그에서 열린 원탁회의에서 모든 현안문제들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지만 서부뉴기니 지역에 대한 문제만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원탁회의에는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뿐 아니라 네덜란드가 급조한 연방주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합주국(Republic of the United States of Indonesia:RUSI)라 명명된 새로운 연방국가로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의 이 신생국가는 네덜란드가 설치한 15 자치주를 포함하는 합중국으로 탄생했습니다.



 

이 신생국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모든 영토를 포괄하는 것이었는데 네덜란드령 뉴기니만은 인도네시아와 추가 협상의 여지를 남겨둔 채 일단 여기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인도네시아가 양보해야만 했던 또 다른 곤란한 사안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채무 43억 파운드를 떠안는 것이는데 그 대부분은 네덜란드가 식민지회복을 위해 인도네시아에서의 전쟁에 퍼부은 비용들이었습니다.



 

1949 12 27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주권을 완전히 이양하고 철수했습니다. 미국은 이 신생국가를 가장 먼저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날 족자에서 단숨에 자카르타까지 날아온 수까르노는 총독부 건물 계단에서 승리감에 도취되어 감격적인 일장연설을 한 후 그 곳을 통일궁이라 새로 이름 붙였습니다.



 

수백만명의 인파가 인도와 차도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울고 있었고 환호하고 있었고 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수까르노여 영원하라!!” 그들은 차의 측면과 보닛, 러닝보드 등에 엉겨 붙기까지 했다. 그들은 나를 잡고 내 손가락에 키스를 퍼부었다. 군인들은 희고 거대한 궁전의 가장 윗쪽 계단까지 내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양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수백만 인파는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알함둘릴라 하나님 감사합니다나는 외쳤다.

우리는 이제 자유인입니다.!!”

- 수까르노의 '성취된 독립의 재구성

 

 

2016.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