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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자존심 - 수디르만 장군과 부낏띵기 긴급정부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8)
네덜란드와 공화국 간의 외교적 노력은 계속 되었으나 안팍의 문제들이 앞길을 계속 막았습니다. 공화국 정부는 외교적으로 양보한 부분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한편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더욱 강화하면서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 했지만 시간은 절대적으로 인도네시아의 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렌빌조약의 해석을 둘러싼 분쟁에서 결코 인도네시아와 타협할 생각도 없었지만 동인도제도의 식민지회복을 위해 지출되고 있던 하루 1백만 달러가 넘는 군사비용은 마샬플랜 등 해외원조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복구를 하고 있던 네덜란드로서는 너무 큰 부담이었습니다.
1948년, 협상은 마침내 결렬되고 네덜란드는 일방적으로 인도네시아 연방안을 밀어 붙였습니다. 이 새로운 안에 의해 남부 수마트라주와 동부 자바주가 신설되었으나 이에 대한 분명한 이유도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는 연방자문의회 (Bijeenkomst voor Federaal Overleg – BFO 또는 Federal Consultative Assembly)를 만들어 인도네시아 합주국과 임시정부의 구성을 1948년 말까지 완료토록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의 입지를 대폭 줄여버린 이 계획을 공화국이 받아들일 리 없었습니다. 이 계획은 자바와 수마트라를 포함하고 있었으나 공화국이란 언급은 모두 삭제된 상태였습니다.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공화국은 아직도 렌빌라인의 네덜란드측 지역에 남아있던 공화국 거점들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우려했습니다. 렌빌조약 초기였던 1948년 2월, 공화국측은 조약내용을 이행하며 동시에 공화국군의 건재함을 보여줄 목적으로 나수티온이 이끄는 35,000명 규모의 공화국군 실리왕이 사단(Divisi Siliwangi)이 서부자바에서 중부자바로 행진해 들어가는 퍼포먼스를 벌였던 터였습니다.
이러한 병력의 재배치는 사실상 수라카르타 지역에서 내부갈등을 벌였던 반란인자들을 겁주기 위한군사적 실력과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공화국군이 반묵라인을 넘어 공화국지역으로 철수하던 과정에서 슬라멧산을 횡단하던 한 대대가 네덜란드군과 충돌했고 네덜란드측은 이를 반묵라인 전역에 걸친 공화국의 조직적 군사행동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반묵라인의 네덜란드측 지역에서 아직도 활동하던 공화국군 게릴라들이 네덜란드가 설립한 괴뢰자치주인 빠순단주를 침식하고 있던 상황과 다른 여러가지 부정적 보고들이 맞물려 네덜란드군 지도부는 해당 지역의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8년을 관통하면서 발생한 다룰이슬람반란과 그 해 9월의 마디운 공산당반란은 공화국에게는 재앙이었지만 네덜란드에게는 더없는 호재로 작용했습니다. 이 반란들로 인해 공화국군이 크게 약화되었을 거란 네덜란드 측의 판단은 렌빌조약을 파기하고 최종적 군사작전을 감행하려던 확신을 더해 주었던 것입니다.
크라이작전(Operatie Kraai)은 암호명 ‘까마귀작전’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1947년 7월의 프로덕트 작전에 이어 크라이작전은 1948년 12월부터 1949년 1월 사이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대한 네덜란드군의 두 번 째 총공세였습니다. 네덜란드는 이를 두번째 “경찰행동” (Politionele acties)이라 부르고 인도네시아 측에선 ‘네덜란드군의 제2차 공세’ (Agresi Militer Belanda II)라 부릅니다
두번째 경찰행동은 링가자티 조약에 명시된 연방정책 집행에 있어 인도네시아의 협조를 촉구한다는 핑계도 붙어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연방국가로 새로 조직겠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군사작전의 직접적 동기는 인도네시아가 렌빌조약을 위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측은 당초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인도네시아군이 철수하는 댓가로 공화국 지역에 대한 해상봉쇄를 풀기로 했었는데 인도네시아군이 비밀리에 다시 네덜란드 지역으로 돌아와 게릴라작전을 벌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이 1948년 9월 공화국의 암호문 해독에 성공해 상대편의 군사적, 외교적 전략과 계획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기인한 자신감 역시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네덜란드군 사령관 사이먼 헨드릭 스폴 대장은 전장과 외교무대에서 공화국의 우위에 설 수 있었습니다. 확신에 찬 네덜란드군은 실제 공세를 벌이기 며칠 전 자카르타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여유까지 보였습니다. 당시 정세를 읽은 인디아의 수상 자와할랄 네루는 전용기를 보내 수까르노와 하타를 서부 수마트라의 부낏띵기(Bukittinggi)로 빼돌려 비상시국 임시정부를 수립토록 한 후 인도네시아 사절단을 뉴델리를 경유해 뉴욕까지 데려가 UN 총회에서 인도네시아의 입장옹호를 도우려 했으나 이 정보를 미리 입수한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와 인디아가 시간조율을 할 수 없도록 선수를 칩니다. 당시 신생 독립국이었던 인디아는 서방제국주의와 맞서고 있던 인도네시아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2월 8일 네덜란드의 닥터 빌(Dr. Beel) 고등판무관은 자카르타에서 라디오방송을 통해 다음 날 중대발표을 할 것임을 공표했습니다. 그러나 통신선이 두절된 상태여서 족자에서는 이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한편 스폴 장군은 공화국에 대한 전면적 기습공격을 명령했고 이 작전의 암호명이 크라이작전, 즉 까마귀작전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본에서는 길조로, 한국에서는 흉조로 여겨지는 까마귀의 이율배반적 속성은 이 작전의 결과에서도 드러나게 됩니다. 네덜란드군은 12월 19일로 계획된 공화국군의 군사훈련 일정에 맞추어 작전을 시작하도록 조정해 공화국군으로 하여금 네덜란드군의 침공이 실제상황인지 훈련인지 혼란에 빠뜨려 기습공격의 효과를 극대화 하도록 기획했습니다. 이 침공계획은 UN의 정전감독위원회인 GOC(Good Offices Committee)에도 사전 통지되지 않은 채 기습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첫 공격은 12월 19일 새벽 04:30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반둥비행장에서 이륙한 네덜란드군 항공기가 공화국측의 방공망을 피해 인도양으로 우회해 족자를 향해 날아갔고 그 사이 네덜란드군 빌 고등판무관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 이상 렌빌조약에 구속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습니다. 이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네덜란드군은 자바와 수마트라에 산재한 인도네시아군의 주요 거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05:30 족자의 라디오방송국과 마구워(Maguwo)비행장이 ML-KNIL(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공군)에 의해 폭격을 당했습니다. 당시 공화국군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미쯔비시 제로기를 달랑 3대 가지고 있었으나 네덜란드 공군은 P-40 키티호크, P-51 머스탱, B-25 미첼 전폭기들은 물론 더글러스 C47 수송기 23대를 동원해 900여명의 병력을 실어날랐으므로 크라이 작전에서 네덜란드의 제공권은 가히 압도적이었습니다.
네덜란드 공수부대가 마구워 비행장에 낙하할 때 비행장은 고사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인도네시아 공군 사관생도 47명을 비롯한 150여명이 비행장을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먼저 더미들을 낙하해 사격을 유도했고 사격위치가 확인된 비행장 수비대를 기총소사로 쓸어버리는 작전을 썼습니다. 25분간 지속된 이 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은 아무런 인명피해 없이 128명의 공화국군을 사살하면서 공항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공항외곽지역까지 완전히 확보한 것이 06:45시였고 네덜란드군 후속부대가 두 차례에 걸쳐 마구워 비행장에 추가 착륙했습니다. 이 비행장은 스마랑에 근거지를 둔 네덜란드군 공군의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아침 08:30시, 스폴 장군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모든 네덜란드군에게 반묵라인을 넘어 족자를 점령하고 공화국의 ‘불안정한 요소들’을 ‘축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당초 스폴 장군은 공화국 임시수도인 족자를 공격하면 공화국 정규군 TNI가 필사적으로 수비할 것이라 예상했으므로 크라이작전의 주 목표는 족자에 집결하는 TNI를 신속히 궤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공중과 육상에서의 압도적 전력을 이용해 인도네시아 공화국군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인 승리를 이끌어 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TNI 병력은 네덜란드군의 주력을 피해 족자 서부에서 밀고 들어오는 네덜란드의 측면공격을 견제하며 족자를 이탈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자바군 사령관 나수티온 장군은 동부자바를 시찰 중이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의 공습에 인도네시아군은 몇 시간 만에 무방비로 무너져 내렸고 네덜란드군은 신속히 진주해 공항과 주요도로, 교량과 전략적 거점들을 점령했습니다. 한편 전군사령관 수디르만 장군의 전략은 가능한한 네덜란드군과의 교전을 피해 인도네시아군이 파멸적 패배를 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을 재건하고 힘을 키울 시간을 얻기 위해 잠시 영토를 내주는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공격받았다. 네덜란드 정부는 휴전협정을 위반했다. 모든 병력은 네덜란드군의 공격을 맞아 기존에 결정한 계획들을 수행하라.
- 1948년 12월 19일 수디르만 장군의 라디오 방송연설
기습공격의 보고를 받은 전군사령관 수디르만 장군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긴급명령(Perintah kilat)을 하달하는 한편 수까르노와 다른 공화국 지도자들이 족자를 탈출해 게릴라군과 합류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수디르만 장군과 그를 수행한 TB 시마뚜빵 중령을 기다리게 해놓고 소집한 긴급 각료회의 결정을 통해 수까르노는 수디르만의 요구를 거절하고 족자에 그대로 남아 끝까지 UN 및 KTN 사절단들과 연락하기로 결정합니다. (KTN – Komisi Tiga Negara 3국대표위원단 : GOC) 수까르노는 만일 족자의 공화국 지도부에 유고가 발생할 경우 수마트라에 ‘비상시국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계획도 수립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족자에 남겠다는 것은 공화국 정부 스스로 네덜란드군의 포로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각료들 앞을 빠져나온 수디르만은 걷잡을 수 없는 실망감을 애써 눌러 참으며 공화국군의 퇴각을 지휘했고 그 과정에서 공화국군은 아미르 샤리푸딘을 비롯해 족자에 잡혀 있던 마디운사태의 포로들을 모두 사살했습니다.
한편 D.R.A 반 랑겐(D.R.A. van Langen) 대령이 이끄는 중무장한 네덜란드군 보병과 공수대원들은 마구워 비행장에 집결해 본격적으로 족자를 접수할 준비상태를 최종 점검했습니다. 이날 족자의 대부분 거점들이 네덜란드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공군본부와 참모총장공관들은 네덜란드군의 폭격과 인도네시아군의 철수 전 초토화 작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방화로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수까르노 대통령, 하타 부통령, 수딴 샤리르 전총리 등 공화국 핵심지도자들은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혀 북부 수마트라의 네덜란드 점령지인 쁘라빳(Prapat)으로 보내져 감금되었다가 나중에 방카(Bangka)섬의 유배지로 이송됩니다.
수까르노와 그의 각료들은 스스로 자청하여 포로가 된 이 사건이 인도네시아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지원을 불어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어 주리란 외교적 노림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디르만 장군 휘하의 게릴라들은 목숨 걸고 족자를 탈출해 게릴라전에 참전하기보다 손쉽게 목숨을 구하려 항복하는 길을 선택한 비겁한 정치가들의 변명이라 여겼습니다. 한편 족자의 술탄 하멩꾸부워도 9세는 방카로 유배되지 않고 네덜란드 점령기간 내내 족자에 남았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어떠한 협력요구도 거절했고 친네덜란드 성향의 뽄띠아낙 술탄 하미드2세의 중재제의도 단호히 거절하는 강단을 보였습니다.
12월 20일, 살아남은 공화국군은 모두 족자에서 철수했고 아쩨와 수마트라의 몇몇 지역을 제외한 인도네시아 전지역이 네덜란드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당시 폐결핵 말기로 접어들고 있던 수디르만 장군은 병상에 누워서 정부군 게릴라들을 지휘했습니다. 자바 지역군 사령관 나수티온 장군은 자바에 군정을 설치하고 ‘전국민 무장투쟁’(Pertahanan Keamanan Rakyat Semesta)이라는 게릴라전술을 펼쳤는데 이는 민간의 지원을 받아 교외와 시골 전체를 게릴라전의 전선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계획되었던 비상시국 긴급정부는 12월 19일 서부 수마트라의 부낏띵기(Bukittinggi)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정식명칭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긴급정부 (Pemerintah Darurat Republik Indonesia : PDRI)였고 샤리푸딘 쁘라위라느가라(Sjafruddin Prawiranegara)가 그 수장을 맡았습니다. 수까르노는 정부의 연속성을 위해 족자 함락 직전에 샤리푸딘에게 전보로 명령서를 보냈지만 그 전보는 1949년이 되어서야 샤리푸딘의 손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샤리푸딘은 족자 함락소식에 당초 마련되어 있던 비상계획에 따라 긴급정부를 수립했고 수까르노가 석방되던 1949년 6월까지 비록 짧은 비상시국 중이었지만 인도네시아의 사실상 대통령으로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의 입장은 이랬습니다.
“샤리푸딘씨. 그럼 당신이 수까르노를 대신해 대통령이 되는 건가요?”라고 까밀꼬또가 물었다.
“꼭 그렇진 않아요. 맡은 일만 본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난 긴급정부의 대통령이라 불리기 보다는 긴급정부의 수장이라 불리는 게 좋습니다.”
샤리푸딘 쁘라위라느가라는 까밀꼬또의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악말 나세리 바스라이의 저서 “대통령 쁘라위라느가라”에서)
수디르만 장군은 이 사실을 듣고 즉시 라디오방송을 통해 긴급정부에 대한 지지를 밝혔습니다.
당시 인디아의 뉴델리를 방문중이던 재경부장관 마라미스도 샤리푸딘이 받은 것과 유사한 전보를 받았지만 그는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1949년에 들어서 긴급정부는 자바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던 군지휘관들과, 족자침공 당시 네덜란드군에게 잡히지 않은 여섯명의 각료들과도 마침내 연락이 닿아 연계할 수 있었습니다.
이 크라이작전은 많은 신문에 잘 포장되어 보도되었지만 미국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네덜란드의 침공을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미국은 네덜란드에게 주기로 되어 있던 총 10억달러에 이르는 마샬플랜원조를 연기하겠다며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 금액의 반에 해당하는 거액을 인도네시아에서 벌이는 전쟁에 쏟아 붓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원조가 ‘정신나간 비효율적 제국주의’에 돈을 보태주는 행위라는 관점은 미공화당을 포함해 미국내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네덜란드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려세웠고 미국내 교회들과 NGO들도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948년 12월 24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즉각적인 적대행위의 중지을 촉구했고 1949년 1월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의 복권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이를 거칠게 거부하는 네덜란드에게 원조중단카드를 내밀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어차피 미국과 국제사회의 원조 없이는 동인도제도에서의 전쟁을 지속할 수도 없을뿐더러 아무리 현대적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한들 네덜란드군이 자바섬의 모든 촌락과 시골 구석구석까지 점령, 통제하여 공화국군 게릴라들을 완전히 소탕하려면 당시의 15만명 병력 외에도 최소한 10개 사단 이상을 추가 투입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네덜란드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습니다. 실제로 네덜란드군의 당시 병력만으로는 게릴라가 준동하는 점령지에서 주요병참선을 지키는 것만도 힘에 벅찼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네덜란드는 어차피 족자를 함락시켰고 자바와 수마트라의 주요도시 대부분을 수중에 넣는 등 전술적 목표들을 거의 다 달성한 상태였으므로 UN 결의안에 따라 자바에서는 1948년 12월 31일, 수마트라에서는 1949년 1월 7일 휴전을 발효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게릴라전이 마침내 종료된 것은 1949년 5월 7일 로엠-로옌 조약(Perjajian Roem -Royen)이 서명된 후였습니다.
끄라이작전 이후 수디르만 장군과 살아남은 공화국군은 네덜란드군의 집요한 추적과 공격을 받으며 산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폐결핵으로 무너져내리던 육체를 지팡이와 가마에 의지하며 족자에서부터 라우산 인근 소보(Sobo)까지 1천여 km의 험준한 산악을 끝내 해쳐나갔던 수디르만 장군과 그 일행의 일화는 몇 년 전 상영된 ‘젠드랄 수디르만’(Jendral Soedirman)이라는 영회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멸망했다고 생각하던 순간 소보에 마련한 기지에서 전국적인 게릴라전을 지휘하며 끝까지 저항하여 공화국이 아직 살아있음을 증거했던 수디르만 장군은 그 스스로가 인도네시아 공화국이었습니다.
와신상담하던 인도네시아군은 마침내 반격을 도모하기 시작했고 우선 전화선절단, 철로파괴, 네덜란드군 병참수송대 공격 등 각종 방해작전을 전개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어쩔 수 없이 점령한 도시와 도시를 잇는 대로변에 초소들을 늘려야 했는데 이는 게릴라전을 통해 한정된 네덜란드군 병력을 광범위한 지역에 얇게 포진시켜 특정지점에 대한 수비강도를 획기적으로 약화시키면서 결과적으로 반격의 기반을 마련해주고 있었습니다.
동부자와의 경계에서 해당 지역사령관이자 제2지역과 제3지역의 게릴라망을 구축해 온 윌리어떠르 후타갈룽 중령(Letkol. dr. Wiliater Hutagalung)은 1948년 9월부터 제2 지역사령관 가똣 수브로또 대령, 제3 지역사령관 방밤 수겅 대령과 수디르만 장군 사이의 연락창구 역할을 했고 또한 그 스스로 의사였으므로 군무로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 폐결핵으로 고통받던 수디르만 장군을 간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49년 2월 수디르만 장군을 만나 UN안전보장이사회가 동인도제도의 정전을 결의한 것과 더 이상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워 네덜란드 측이 안보리 결정을 거부하였음을 보고했습니다. 부낏띵기의 비상정부는 사실상 유명무실했고 수까르노의 공화국 정부는 네덜란드의 포로가 되어 방카에 유배된 상태였으니 네덜란드의 주장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수디르만의 공화국 게릴라부대들만이 공화국의 마지막 호흡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디르만은 네덜란드의 그러한 프로파겐다를 역이용할 방법을 연구하도록 지시합니다.
후타갈룽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와 정규군이 아직 건재함을 미국과 전세계에 각인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의 프로파겐다를 단번에 타파할 화려하고 대대적인 군사공격으로 UN안보리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디르만 장군은 이 아이디어를 수용해 후타갈룽 중령에게 인근 지역사령관들과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토록 지시했습니다. 이에 후타갈룽은 1949년 2월 18일 숨빙산 중턱에서 제3 지역사령관 밤방수겅 대령과 제2방어선 지휘관 사르비니 마르토디하리오 중령(Letkol. Sarbini Martodiharjo), K.R.M.T 웡소느고로 주지사, 반자르느가라의 군수 R.A. 수미트로 꼴로빠낑, 상이디(Sangidi)의 군수 등을 불러모아 수디르만 장군이 동의한 군사작전에 대해 설명하고 협의했습니다.
이 작전의 관건은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그 정규군의 존재를 여하히 효과적으로 만방에 알리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후타갈룽이 제안한 계획은 모두의 동의를 받았는데 공화국군 주력의 침공목표에 대해서만큼은 밤방수겅 대령이 족자를 고집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1. 족자는 공화국의 수도이므로 단 몇시간 만이라도 탈환할 수 있다면 공화국군과 인도네시아인들의 사기를 크게 높일 것이다.
2. 외신기자들은 물론 UN안보리의 3국대표단(KTN)과 군사감독관들도 족자 머르데카호텔에 머물렀으므로 가장 효과적인 정보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3. 족자는 제3지역군 관할지역이므로 지역 내에서 독자적인 작전이 가능하고 아군은 이 작전지역을 충분히 숙지하고 통제할 수 있다.
제3지역군은 그 사이 네덜란드군 단위부대를 대상으로 소규모 공격을 몇 번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공격훈련도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게릴라전을 시작한 이후 웡소느고로 주지사를 비롯한 민간관료들이 군작전회의에 늘 참석하면서 그 결정에 따라 기민하게 주민들을 조직해 보다 긴밀하고 효과적인 병참지원을 구축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게릴라들은 자주 장소를 옮겨다녀야 했고 이때 필요한 물자들을 조달하는 주민들의 도움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율하는 것은 해당 지역 군정 주지사들, 즉 지역사령관들의 역할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훤칠하고 건장하며 네덜란드어, 영어 또는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고 모자에서 군화까지 TNI 장교군복을 깔끔하게 갖춰 입은 젊은이들도 필요로 했습니다. 그들은 미리 시내에 침투해 있다가 공격이 시작될 때 시내 호텔들에서 UN안보리 인사들과 외신기자들 앞에 나서 신분을 밝히고 공화국의 상황을 설명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숨빙산에 소재한 국방부의 PEPOLIT(군정치교육 - Pendidikan Politik Tentara)담당 위요노(Wiyono)대령이 이 조건을 충족시킬 젊은이들을 수배하기로 했습니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규군의 족자침공사실을 실시간으로 국제사회에 보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바나란(Banaran)에 본부를 두고 있던 T.B. 시마뚜빵 대령이 맡았습니다. 그는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TNI의 대공세가 족자에 퍼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즉시 전파를 탈 수 있도록 워노사리(Wonosari)인근 쁠라옌(Playen)에 있는 인도네시아 공군 라디오방송국을 연결하기로 했습니다.
한편 공화국군이 대대적으로 족자를 침공하면 네덜란드군은 중부자바 다른 도시들로부터 지원군을 불러 들일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들 도시 중 마글랑과 스마랑은 방방수겅 대령의 제3지역군 관할이었고 솔로는 가똣 수브로또 대령의 제2지역군 관할이었습니다. 따라서 계획된 시간 내에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선 솔로 등 다른 지역으로부터 족자로 들어오는 네덜란드 증원군을 중간에서 격퇴하거나 최소한 지연시키기 위해 제2지역군과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회의를 마친 각지역 지휘관들과 민간관료들은 자기 임무처로 돌아가 맡은 바 준비를 시작했고 1949년 2월 18일 숨빙산의 수디르만 장군과 제2지역군 사령관 가똣 수브로또 대령에게도 이 회의결과가 전달되었습니다. 밤방수겅 대령의 전령들은 물론 방방수겅의 동생과 주치의, 운전병들과 군주지사 사무실의 직원들이 백방으로 달려 제10여단장 수하르토 중령, PEPOLIT의 위요노 대령, 바나란의 부참모총장 시마뚜빵 대령, 바끄룬(Bachrun) 대령, 마글랑에서 들어올 네덜란드 증원군을 차단할 제9여단장 아흐맛 야니 중령(Achmad Yani) 등에게 연통을 돌렸습니다. 1949년 2월 19일 밤방수겅 대령과 후타갈룽 중령과 부관, 수하르토 중령과 부관 이렇게 다섯명은 뻐나가시(Penagasih) 촌 논 한 가운데의 원두막에서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밤방수겅 대령은 수하르토에게 2월 25일에서 3월 1일 사이 족자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고 정확한 날자는 PEPOLIT 위요노 대령 등의 준비상황을 확인한 후 확정키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후 3월 1일 오전 6시로 공격시간이 확정되고 제3방어선 방면 수하르토 중령의 제10여단을 주력으로 전방위적인 족자 총공격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공격 직전, 군은 족자의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의 재가를 받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 대규모 공세는 제3지역군 전역에서 동시에 시작되고 그 촛점은 제9여단으로부터 1개 대대를 지원받아 증강된 제10여단 병력의 족자공격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한편 밤방수겅 대령은 제1방어선의 바크룬 중령, 제2방어선의 사르비니 중령에게 마글랑의 네덜란드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고 그와 동시에 가똣 수브로토 대령의 제2지역군도 솔로의 네덜란드군을 공격해 족자에 지원군을 보낼 수 없도록 했습니다. 이 모든 작전을 조율한 야전사령부는 무토(Muto) 마을에 차려졌습니다.
총공격 전날 밤 머르데카 호텔로 향한 소수의 공화국군이 족자시내로 침투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침 6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족자에 대한 전방위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수하르토 중령은 서부의 말리오보로(Malioboro) 지역까지를, 동쪽은 벤지 수무알(Bentji Sumual)소령, 남쪽은 사르디오노(Sardjono) 소령, 북쪽은 꾸스노 소령의 부대가 각각 담당했고 도심에서는 아미르 무르또노 중위와 마즈두끼 중위가 시가전을 지휘했습니다. 벼락 같은 공격으로 족자를 탈환한 공화국군은 여섯 시간 동안 도심을 장악하고 있다가 마글랑과 암바라와, 스마랑으로부터 네덜란드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여 반격해 오자 12시 정오에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솔로에 대한 공격도 계획한 성과를 내, 네덜란드군은 대규모 공격을 받고 있는 족자에 지원군을 보낼 수 없었지만 제9여단의 게릴라들은 마글랑에서 들어오는 네덜란드 증원군을 오래 잡아두지 못하고 결국 패퇴하면서 길을 내주어야 했습니다..
이 전투로 네덜란드 측은 경찰 3명을 포함, 총 6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었고 공화국군이 물러난 후 족자 시내엔 다시 일반차량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사장도 열리는 등 금방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네덜란드의 중부자바 지역군 사령관 메이어(Meier) 장군과 앙겐트 박사(지역자문관), 반랑겐 대령(족자 주둔군사령관) 등은 이 날 12시 정오 끄라똔궁을 방문해 스리술탄과 상황을 얘기하며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인도네시아 측은 53명의 경찰관들과 300여명의 병사들이 전사했고 민간인 희생자들의 수는 집계하지도 못했습니다. 사상자 숫자만 본다면 이견의 여지없는 네덜란드의 압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얘기했던 네덜란드를 공화국군은 이 전투를 통해 부끄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에 고무된 공화국군은 그 해 8월 수라카르타에서도 슬라멧 리야디 중령이 이끄는 공화국군이 총공세를 펴 중무장한 네덜란드군 기병대가 방어하는 도심을 짓쳐 들어감으로써 공화국 게릴라들이 비단 매복과 방해공작뿐 아니라 정규전에서도 얼마든지 네덜란드군과 맞설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1949년 3월 1일 족자총공격 사건은 1970년 초반까지만 해도 독립전쟁 중 있었던 암바라와 전투나 반둥불바다 사건 등과 대략 동급으로 취급되다가 수하르토가 대통령에 등극해 장기집권이 시작되면서 그에 대한 영웅화가 진행되자 이 사건의 중요성이 필요이상으로 강조되는 역사의 왜곡이 일어나기도 했고 심지어 수하르토가 이 사건을 기획하고 각 지휘관들에게 임무를 나누어 주었다는 버전까지 존재하지만 그날 족자와 솔로, 마글랑에서 함께 싸웠던 다른 지휘관들에 비해 수하르토가 특별히 더 주도적이었거나 영웅적이었다고 볼만한 자료들은 사실 미약합니다. 게다가 전군사령관 수디르만 장군 – 부참모총장 TB 시마뚜빵 대령 – 자바사령관 나수티온 대령 - 제3지역군 사령관 밤방수겅 대령 – 제10여단장 수하르토 중령으로 내려오는 군명령체계가 엄연히 존재했던 바 이 사건에 있어 수하르토 직속상관들의 역할이 더욱 컸으리란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디르만 장군 휘하의 공화국군이 절대적인 화력 우세를 앞세운 네덜란드군에게 게릴라전으로 항전하고 있을 때, 족자에서 크라이작전 당시 사로잡힌 수까르노와 공화국 정부각료들은 수마트라 동쪽 방카섬의 수도인 꼬따 빵깔 삐낭(Kota Pangkal Pinang)에서 133km 떨어진 먼똑, 또는 문똑(Muntok)이라 부르는 곳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먼똑은 1913년 이전엔 약 200년간 방카섬의 수도였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족자에서 네덜란드군에게 체포되던 장면은 유튜브에서 동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족자를 함락시킨 네덜란드군이 공화국 멸망의 증빙으로서 찍었던 동영상과 사진들 속에서 수까르노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여유를 보이려 했지만 긴장하여 부자연스러운 모습도 엿보입니다.
방카섬에 유배된 그들은 비록 네덜란드군의 감시를 받았지만 머눔빙 언덕과 먼똑 숙소(Pesanggrahan Mentok)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고 인도네시아 국기를 게양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공화국군 게릴라들처럼 포탄과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 필요도 없었고 굶주린 배를 끌어 안고 애써 잠을 청할 필요 또한 없었습니다. 그들은 유배기간 동안 체육활동을 통한 체력단련에 힘썼는데 PORI는 지금의 국가체육위원회(bakal Komite Olahraga Nasional Indonesia :KONI)와 동격인 인도네시아 공화국 체육연합(Perkumpulan Olahraga Republik Indonesia,)이라는 의미였고 운동을 하면서 인도네시아 국기와 비슷한 모양인 PORI 깃발을 게양하는 것을 나름대로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에 의해 방카로 유배된 사람들은 수까르노와 하타 외에도 아구스살림 외무장관, M 로엠, 알리 사스트로아미조요(Ali Sastroamijoyo), 수리야다르마 공군준장(Komodor Udara Suryadarma), 쁘링고딕도(Mr AG Pringgodigdo) 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1948년 말부터 1949년 중반까지 각각 5개월에서 7개월 가량을 방카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숙소건물의 중 방 한 개는 특별히 네덜란드 측과의 회합을 위해 사용되었고 여기서 인도네시아 측은 국토와 족자의 반환을 촉구하곤 했습니다. 수까르노 일행을 방카에 유배시킨 것은 방카가 네덜란드가 공고한 통제력을 발휘하는 점령지였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이 방카주민들과 접촉하면서 방카 사람들의 독립의지를 북돋는 계기가 되었고 수까르노는 1949년 2월 21일자 그의 일기에 방카주민들이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합류하기를 희망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한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와 로엠로옌조약이라는 것을 체결하고 그 조약에 의거 네덜란드군이 1949년 7월 5일 족자에서 철수하자 수까르노 일행은 방카주민들과 작별을 고하고 먼똑을 떠나 주도인 빵깔 삐낭에서 하루밤을 지낸 후 항공기편으로 족자에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방카 먼똑에서 지냈던 숙소는 오늘날 여인숙이 되어 있고 그 앞엔 수까르노 일행의 현지 유배를 기념하는 뚜구 붕하타(Tugu Bung Hatta)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게 수까르노의 기념비가 아닌 하타의 기념비인 이유는 하타가 수마트라 출신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족자로 돌아간 수까르노는 자신이 계산했던 대로 스스로의 정치력과 유엔 등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와 조약을 맺고 그 결과 아무도 피흘리는 일 없이 족자에서 네덜란드군을 철수시키는 성과를 맺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각료들은 끄라이작전 당시 네덜란드군에게 항복했음에도 떳떳했던 것이고 인도네시아 시민들은 깊은 생각 없이 수까르노와 정부의 귀환을 그저 기뻐하고 축하하면서 인도네시아 전역은 축제분위기 속에서 흥청거렸습니다.
하지만 수까르노도 딱 한 사람에게만은 떳떳하기 어려웠습니다. 그건 바로 수디르만 장군이었죠. 족자가 함락되던 날 대통령과 각료들을 찾아와 족자탈출과 게릴라전 참전을 요구하던 수디르만이, 주저하던 수까르노의 눈빛에서 두려움과 용렬함을 읽었다는 것을 수까르노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던 수까르노의 권유를 단호히 거절하고 전장으로 돌아간 수디르만 장군이 그동안 그 병약해진 육체로 고통받으면서도 남은 공화국군을 이끌며 얼마나 죽을 힘을 다해 항전과 반격을 되풀이 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혼자 옳은 길을 갔던 강직한 부하는 상사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었고 수까르노는 그에게서 일말의 열등감을 느꼈을 것임은 두말한 나위 없습니다. 그런 비슷한 느낌을 오래 전 일제에 철저히 부역했던 그는 일제강점기를 항일투쟁으로 점철했던 수딴 샤리르와 아미르 샤리푸딘에게서도 똑같이 느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족자 합류를 거부하며 소보에 남아 있던 수디르만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족자로 불려 내려던 수까르노는 그 죄책감과 열등감을 뒤집을 복안이 있었습니다. 결국 마음을 고쳐 먹은 수디르만 장군이 그동안 자바에서 조직해 놓은 군정 체제를 수까르노의 민간정부에게 이양하기 위해 족자에 도착했을 때 대통령궁 앞까지 마중나온 수까르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수디르만 장군을 뜨겁게 포옹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백 마디의 변명보다 수디르만 장군의 노고를 포옹으로 치하하는 이 사진 한 장으로 수까르노는 그가 공화국군의 게릴라전을 수디르만 장군에게 지시했던 국가원수임을 웅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수디르만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막바지에 이른 네덜란드에 대한 독립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이제 영웅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정치가들의 시대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2016.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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