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휴전조약과 공산당 봉기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7)
영국의 중재로 1946년 11월 15일 조인된 체리본 조약(Cheribon Agreement) 또는 찌레본협정(Cirebon Agreement)라도고 불리는 링가자티 조약은 공화국이 자바와 마두라, 수마트라를 ‘잠정적’으로 지배함을 네덜란드가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했습니다. 양측은 1949년 1월 1일까지 네덜란드 여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준자치 연방국가로서 인도네시아 합주국을 구성하는데 이는 공화국이 통제하는 자바와 수마트라는 물론 네덜란드군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는 남부 깔리만탄과 이른바 ‘위대한 동부’라 칭했던 술라웨시, 말루꾸, 순다끄찔(Sunda Kecil - 오늘날의 NTT주와 NTB주)과 서부뉴기니를 포괄함에도 합의했습니다. 말하자면 자치권을 인정받는 대신 하나의 국가였던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인도네시아 합주국의 일개 자치주로 강등되는 셈이었습니다.
당시 이 조약을 이끌어내기까지 네덜란드와 협상키로 한 수까르노의 결정은 인도네시아의 많은 분파들로부터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공산주의 정치가 딴말라카(Tan Malaka)는 이러한 반대세력들을 하나의 전선으로 묶어 ‘투쟁연대’(Persatuan Perjuangan: PP) 라는 것을 조직했습니다. PP는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즉각적인 완전한 독립, 외국 자산의 국유화, 외국 군대들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모든 회담의 거부를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실제로 인도네시아군 총사령관 수디르만 장군을 포함해 광범위한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46년 6월 26일 PP와 연계된 군부대가 수라카르타에서 샤리르 총리와 몇몇 각료들을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의 전조는 그 며칠 전부터 엿보였습니다. 정부각료들에 대한 납치를 기도한다는 혐의로 딴말라카, 아흐마드 수바르죠(Achmad Soebarjo), 수까르니 등 투쟁연대의 주요간부들이 전격 체포되었는데 그 우려하던 사건이 불과 나흘 후 실제로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는 샤리르 총리가 서명한 링가자티 조약이 국익을 훼손했다고 주장하는 투쟁연대의 주장에 동조해 수다르소노 육군소장(Mayor Jendral Soedarsono)을 비롯한 14명의 민간인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사건이었고 전군사령관 수디르만 장군도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까르노는 샤리르 총리 구출을 위해 정치력을 십분 발휘했고 특히 대중매체를 통해 여론을 환기시키며 수디르만을 압박한 것이 주효해 빠라스(Paras)의 한 휴양소에 감금되어 있던 총리와 각료들은 며칠 후 무사히 풀려 납니다.
하지만 총리납치사건이 그렇게 대충 끝날 리 없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측의 요구사항은 샤리르 내각을 총사퇴시키고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대통령 권한을 정치지도자협의회(Dewan Pemimpin Politik)에 전격 위임하되 무하마드 야민(Muhammad Yamin), 아흐맛 수바르죠 등 일련의 투쟁연대측 인사들을 위원으로 위촉하고 자신들이 지정한 13명의 장관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격노한 수까르노는 요구사항을 가져온 사신부터 전격 체포하고 수라까르타 경찰을 움직여 7월 1일 반란세력의 간부들을 모두 체포해 위로구난(Wirogunan)의 교도소로 송치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수다르소노 소장이 이 교도소를 공격해 간부 모두를 구출해 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서로의 주체할 수 없는 애국심에서 시작되었던 이 사건은 이제 지켜야 할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수까르노는 수라까르타 지역사령관인 수하르토 중령에게 반란군 진압을 지시하나 직속상관 체포를 꺼린 수하르토는 수디르만 참모총장의 동의가 있어야만 체포명령에 따르겠다며 수까르노에게 항명했다고 합니다. 수하르토는 훗날 수까르노의 뒤를 이어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이 되는 사람이지만 당시 일천한 계급의 그가 감히 감히 대통령에게 항명하며 직언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후세에 수하르토의 정의감을 찬양하려고 이 사건의 스토리를 미화되고 각색한 것이기 쉽습니다. 실제로 수하르토는 엄호해 주겠다는 기만전술로 위요로(Wiyoro) 연대막사에 있던 수다르소노 소장을 포함한 14명의 간부들을 대통령궁으로 유인해 전격 체포합니다. 항명까지 했다는 사람이 말입니다. 이를 ‘1945년 7월 3일 반란’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사건에서 수디르만 장군이나 딴말라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습니다. 반란 지도자들은 모두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수다르소노 소장과 무하마드 야민은 4년형을 받고 다른 5명은 2-3년 형을 받지만 나머지는 방면되는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습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도 1년 후인 1848년 8월 17일 독립선언 3주년 기념특사로 모두 석방되는데 이는 그들의 애국심과 충정을 십분 감안했기 때문이라 이해되지만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 근대사의 첫 쿠데타로 기록됩니다.
이 난리를 겪었는데도 중앙국가위원회(KNIP)마저 조약조건의 문제를 들어 링가자티 조약을 비준하지 않자 궁지에 몰린 수까르노는 대통령령을 통해 KNIP의회의 의원수를 두 배로 늘리고 조약 찬성자들을 KNIP에 대거 선임해 1947년 3월 마침내 조약을 비준하게 합니다. 비록 비상시국이었다고는 하나 수까르노는 매우 비민주적인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고 이것은 훗날 그가 독재자로 변모해 갈 모종의 기질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한편 이 조약 내용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네덜란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네덜란드 의회에는 네덜란드가 신으로부터 동인도 제도의 통치를 위임받았다고 생각하는 강경파들도 포진하고 있었으므로 인도네시아에게 양보한 부분들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네덜란드 하원에서는 조약내용을 인도네시아의 동의 없이 임의로 수정하여 1947년 3월 25일 조약을 비준하였는데 인도네시아 측에선 이를 더더욱 받아들일 리 없었습니다. 양측은 서로를 조약위반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공화국은) 내부적으로 점차 붕괴하고 있다.
정당지도자들은 다른 정당지도자들과 대결하고
정부는 다른 이들에게 뒤엎어지고 교체되기를 반복했다.
무장세력들은 지역분쟁에서 자기들 잇속만을 챙기고
공화국의 각 지역들은 중앙과 연계하지 않으려 한다.
저들은 그냥 저렇게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전체상황이 이 정도로 악화된 바
네덜란드 정부는 법과 질서를 바로잡아 인도네시아의 각 지역들이 서로 교류하고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그 어떠한 진전도 있을 수 없음을 결정할 의무가 있다.
- 전 동인도제도 총독 H.J. 반묵의 첫 네덜란드의 ‘경찰행동’에 대한 변호
그러다가 1947년 7월 20일 네덜란드군은 ‘프로덕트 작전’이라 불리는 공화국 통제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공세를 감행함으로써 링가자티 조약을 파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측은 오히려 인도네시아 측이 링가자티조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동인도제도의 법과 질서를 세우기 위해 부득이 “경찰행동”(politionele acties)을 취한 것이라 강변했습니다. 그들은 일본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을 주권국가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식민지의 반란지역으로 간주했으므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을 ‘전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경찰행동’이란 용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부대인 KNIL이나 경찰을 동원했어야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는 본국의 왕립 네덜란드군을 인도네시아에 상륙시키는 모순을 보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네덜란드에서는 해병대 5천명을 포함해 25,000명의 지원자들을 먼저 파병했고 그 후 추가로 징집된 대규모 병력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전투기와 기갑부대를 동원해 자바와 수마트라의 주요도시와 항만을 공격했고 당시 TNI(인도네시아 정규군)로 재편된 공화국군의 병력규모는 50만명에 달했지만 여전히 조직과 장비, 경험에서 네덜란드 군의 상대가 되지 못해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렸습니다. 네덜란드군은 공화국군을 족자지역으로 몰아 붙였고 급격히 밀려나는 전선에서 머뭇거리다 적 후방에 고립된 일부 공화국군 부대들은 도시와 마을의 근거지들을 불태우고 산악과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으로 돌아서야 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수마트라의 유수한 플랜테이션들과 자바의 유전 및 탄광 등을 통제권에 두었고 수심이 깊은 항구들도 손에 넣었습니다.
한편 국제적인 간섭과 조율을 통해 성사된 링가자티 조약을 네덜란드가 일방적으로 파기한 이 침공으로 네덜란드는 또 다시 국제여론의 역풍을 맞았습니다. 인도네시아 인근의 호주와 신생 독립국 인디아는 UN에서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적극 지지했고 소련과 미국도 인도네시아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네덜란드의 상선들은 호주의 항구들에서 부두노동자들의 반네덜란드 시위로 하역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샤리르의 3기 내각이 무너지고 수까르노는 아미르 샤리푸딘을 총리로 임명하여 내각을 구성토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내각은 ‘극좌내각’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사회당과 공산당, 예전 BTI 당 및 노동계 인사들이 대거 내각에 진출해 전면에 포진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샤리르는 본격적으로 외교전에 가담해 뉴욕으로 날아가 인도네시아 문제를 UN에 청원했습니다. UN의 안전보장이사회는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했고 GOC(Good Offices Committee)라고 불리는 중립국 중재기구를 설치해 휴전을 감독키로 했습니다. 자카르타에 본부를 둔 GOC는 호주(인도네시아측 선택. 리차드 커비 Richard Kirby가 대표), 벨기에(네덜란드 측 선택. 폴 반 지랜드 Paul van Zeeland가 대표), 미국(중립, 프랭크 포터 그레이엄 Frank Porter Graham)의 사절단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결국 네덜란드군과 공화국군 사이에 1947년 8월 4일 UN의 요구에 의해 휴전이 명령되고 결국 국제적 압력에 굴복한 네덜란드는 침공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휴전 후에도 공공연히 진행되던 군사작전 중 1947년 12월 9일 라와거데 마을(Rawagede – 지금의 서부자바 까라왕지역의 바롱사리 Barongsari)에서 네덜란드군에 의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로 431명의 주민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네덜란드 정부는 2011년에 들어 이 사건에 대해 사과하며 보상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갈 길이 바쁘지만 이 라와거데 학살사건을 잠시 들여다 보면 과거 학살과 만행에 대해 네덜란드와 일본의 다른 점과 닮은 점이 동시에 보입니다.
당시 네덜란드군의 임무 중 하나는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네덜란드인, 유라시안혼혈, 화교 인종집단에 대한 학살을 방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스 꾸스따리오(Lukas Kustario)라는 공화국 전사의 은신처를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47년 12월 9일 네덜란드군은 오히려 라와거데 마을주민 431명을 학살합니다. 네덜란드 육군대장 사이먼 헨드릭 스폴(Simon Hendrik Spoor)은 이 사건의 책임이 있는 알폰스 위넨 소령(Major Alphons Wijnen)의 처형을 요구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48년 1월 12일 UN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이 사건이 매우 계획적이고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강산이 여러 번 변한 후인 2008년 9월 8일 이 사건에서 살아남은 10명의 생존자가 네덜란드 정부에게 이 학살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네덜란드측 변호사는 2009년 11월 24일자 서한을 통해 이 사건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소멸시효를 지났으므로 네덜란드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답변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서한은 인도네시아 측은 물론 네덜란드의회의 의원들로부터도 격렬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고 NRC 한델스블라트(NRC Handelsblad) 같은 주요 신문은 전쟁범죄엔 소멸시효가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10명의 생존자는 2009년 12월 네덜란드를 법정에 고소했고 2011년 9월 14일 법정은 사안의 특수성을 감안해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고 네덜란드가 해당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음을 판결했습니다. 네덜란드는 라와거데 학살사건의 원고와 미망인들에게 각각 2만유로(약 3천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키로 했고 더욱 구체적인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11년 12월 9일 네덜란드 대사는 “우리는 64년전 네덜란드군의 행위에 의해 가족과 동료주민들을 잃은 분들을 기억하고...네덜란드 정부를 대신해 당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심심한 사과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생존자들마저 이제 하나 둘 죽어가고 있고 지금도 당시 약속한 2만유로의 보상금 지급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일본이나 네덜란드를 보면 어떤 면에서 대량 학살과 만행을 자행한 가해자들은 국제적으로 비슷한 행동양식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한편 당시 법정은 ‘네덜란드가 자국 주민들을 보호할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결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네시아가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발생 당시 학살당한 라와거데 주민을 네덜란드 국민으로 간주하여 인도네시아가 당시 네덜란드의 영토였음을 암암리에 주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1947년 말로 돌아갑니다. 네덜란드군은 프로덕트 작전을 통해 서부자바 전역과 중부, 북부자바의 북쪽 해안선, 수마트라의 주요곡창지대를 장악했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에게 목줄을 잡힌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네덜란드 해군은 공화국 지역으로 필수 식료품, 의약품과 전쟁물자가 유입을 해상에서 봉쇄했으므로 공화국 지역의 경제상황을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 결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아미르 샤리푸딘 총리는 딴중쁘리옥 항에 닻을 내리고 있던 미군함 USS 렌빌 선상에서 네덜란드와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의 지나친 양보로 네덜란드의 결과적 외교승리라고 평가되는 이 렌빌조약(Renville Agreement) 은 1948년 1월 17일 양측이 서명을 마칩니다.
기본적으로 UN 안전보장이사회가 폐기된 링가자티 조약을 보완할 목적으로 주선한 렌빌조약(Renville Agreement)에 의해 네덜란드군의 진출지역을 연결한 반묵라인(Van Mook Line)이라 일컫는 경계선을 따라 휴전이 발효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라인 건너편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고 있던 공화국군의 강력한 거점들이 아직 많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이 조약은 프로덕트 작전으로 네덜란드가 탈취한 지역을 네덜란드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반묵라인이라 명명된 휴전선 건너편에 남아있는 모든 병력들을 철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에게 점령당한 서부자바 지역에서 아직 저항을 계속하던 스까마지 마리잔 까르토수위르조(Sekamadji Maridjan Kartosuwirjo)가 이끄는 다룰이슬람 게릴라(Darul Islam querrilla)은 이 조약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화국에 대한 맹세했던 충성을 철회했습니다. 그 이유는 십분 이해됩니다. 하늘을 찌르던 그들의 애국심을 차치하고서라도, 공화국 정부가 국토는 물론 적전선 후방에 남은 전사들이 목숨바쳐 싸워온 가치마저 쉽게 포기하고 말았다는 배신감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죠. 다룰 이슬람은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서부자바와 또 다른 지역에서 유혈봉기를 일으키는 등 두고두고 수까르노 정권을 괴롭히게 됩니다.
렌빌조약의 조항들은 네덜란드 점령지역의 정치적 미래를 묻는 국민투표의 실시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조약의 성사를 위해 공화국 측에서 많은 양보를 하여 결과적으로 미국의 호의를 산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인종적 다양성을 이용해 점령지에 괴뢰국가를 세워 지역간 민심을 이간질하고 공화국과 맞상대 시키려 도모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별 국민투표는 네덜란드 측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링가자티 협정 이전부터도 이미 보르네오와 셀레베스에 동인도네시아라 부르는 괴뢰정부를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우 불리한 조항들을 포함한 렌빌조약에 아미르 샤리푸딘 총리가 서명함으로 인해 공화국의 정치지형엔 일대 파란이 일었습니다. 재임 초기 연정 파트너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던 아미르는 렌빌조약 서명 후 이들 중 마슈미당과 PNI가 등을 돌렸고 자기 당이 추천한 장관들을 사퇴시켰습니다. 궁지에 몰린 아미르 역시 1948년 1월 23일 총리직을 사임해야만 했고 부통령 모하마드 하타가 총리를 겸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조약으로 인한 휴전으로 인도네시아에 잠시 평화가 찾아온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한숨 돌린 여유를 찾자 공화국 정부는 레라프로그램(Program Re-Ra)이라는 정책을 진행합니다. 원래 이것은 정규군 재건 및 최적화 프로그램(Program Rekonstruksi dan Rasionalisasi)이란 뜻으로 1947년 12월 KNIP의 좌파 의원들에 의해 제안된 청원에 근거하여 아미르 샤리푸딘 내각 시절 시작된 정책이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1948년 1월 2일 대통령령 1호를 발표해 전군사령관과 군지도부를 해임했는데 KNIP의 강력한 항의를 불러일으켜 이 대통령령은 결국 폐기됩니다. 그런 다음 나온 것이 레라프로그램인데 이는 건국선언 후 즉시 군대를 구성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 자생적으로 발생해 조직체체가 중구난방이었던 군에 효율적 체계를 장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자이눌 바하루딘(Zainul Baharuddin)이 군개혁에 대한 법안을 포함한 국회청원을 정식으로 제출했습니다. 이 법안은 군을 국방부 산하에 두고 병력도 감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력감축안에 대한 군의 반발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공화국은 당시의 50만명에 이르는 병력을 가지고서도 네덜란드의 진군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미르는 이 레라프로그램이 부여해 준 기회를 이용해 군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 했고 이를 위해 방해가 되는 주요 군간부, 즉 전군사령관 수디르만 장군과 정규군 TNI 수장 우립 수모하르죠 장군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당시 국방장관을 거쳐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두 번 째 총리라는 중책을 맡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아미르 샤리푸딘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봉기를 신봉하는 공산주의자였고 어쩌면 그는 독립전쟁에서 네덜란드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승리보다도 공화국의 모든 영웅들을 제거하고서라도 동인도제도에 공산주의국가가 수립되는 것을 더욱 염원했을 지도 모릅니다.
수까르노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지식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이 ‘YES!’라고 외치며 일본군에게 부역하면서 그곳에 길과 진리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일제 강점기 시절 내내 수딴 샤리르와 함께 ‘NO!”라고 부르짖으며 항일저항으로 일관했던 아미르 샤리푸딘은 수마트라 메단의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네덜란드 최고의 학교를 다녔고 유학에서 돌아온 후 바타비아에서 법학을 전공한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흔치 않게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했고 바타비아의 바딱인들이 다니던 가장 큰 개신교 교회엔 그가 설교했던 자료들도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신앙의 깊이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미르는 1937년 네덜란드 식민지시대가 저물어갈 무렵 국제 파시즘을 주적으로 삼는 극좌정당 인도네시아 시민운동(그린도 - Gerindo)을 설립하면서 일단의 마르크스주의자 후배들을 이끌게 됩니다. 소련의 드미트로프 독트린이 파시즘에 대한 공동전선구축을 촉구했을 때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맞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이 공동전선에 보조를 맞추려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린도는 인도네시아인으로 이루어진 온전한 입법부를 갖는 것을 우선의 목표로 했는데 이는 수까르노나 하타 같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즉각적인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목표로 한 것에 비해 훨씬 원만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위력과 영향력이 점점 커지던 시절, 파시즘의 위험을 일찌감치 경고했던 그는 1940년에 이르러 네덜란드 정보국으로부터 공산주의 지하조직에 연계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지만 아미르가 동료들과 함께 독일의 동맹인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동인도제도 물품의 대일수출 보이콧운동을 전개하자 그의 주도적 역할을 눈여겨 본 네덜란드 정보국은 1942년 3월 오히려 그에게 25,000길더를 주며 마르크스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형성된 그의 인맥을 이용해 일본에 대한 지하저항운동을 조직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 시점은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일본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네덜란드군 사령부도 호주로 옮겨가던 때였습니다.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면서 모든 저항을 강경하게 진압하던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지도자들 대부분은 중립적 방관자나 일본군의 능동적 협력자가 되었으나 아미르는 수딴 샤리르와 함께 저항세력을 조직해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1943년 아미르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으나 수까르노의 개입으로 처형을 면하고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1945년 공산주의자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그는 이미 공화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정치가들 중 한 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공산당과 교류했지만 1935년 재건된 이후 저급한 모습을 보이던 PKI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대체로 경멸하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산당 친구들과 전쟁 전 그린도 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모아 1945년 11월 1일 인도네시아 사회당(PARSI)을 설립합니다. 그리고 같은 달, 아미르의 추종자들도 인도네시아 사회주의 청년단(PESINDO)을 발족합니다.
왼쪽 앞이 아미르, 우측 끝 앉은 사람이 샤리르
12월 16-17일에 있었던 양자회의에서 아미르의 PARSI가 샤리르의 정치그룹인 PARAS를 합병하여 사회당(PS)을 발족시킵니다. 사회당은 족자와 동부자바에서 가장 강력한 친정부 정당이 되었습니다. 아직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적용하기엔 때가 무르익지 않았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쟁취를 위해 필요한 국제적 지지를 얻어 내는 것이 우선이며 옳지 못한 구성요소들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아미르와 다른 당지도자들의 의견이 당론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당의 서구화된 지도자들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쟁취를 위해 인도네시아 자국민의 혁명열기보다 네덜란드의 좌익세력을 더욱 신뢰하는 편이었으므로 이 정당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당연히 불만스럽고 석연치 않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이틀 후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서가 낭독됨에 따라 공화국은 9월 4일 그 첫번째 정부구성을 발표했는데 17명의 각료들은 대부분 일본에 부역했던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 정부의 정보처장관으로 임명된 아미르만이 당시 아직도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한 몇 안되는 항일투사였습니다. 아미르는 독립전쟁 초기엔 공화국의 첫 총리이자 수까르노의 라이벌이었던 수딴 샤리르와 긴밀하게 협력했고 새 정부가 국민들과 소통하는 시스템을 놀라울 만큼 효과적으로 정착시키는 데에 함께 공헌했습니다.
그해 10월 30일 아미르는 영국임시행정부의 다급한 요청으로 수까르노, 하타와 함께 동부자바의 수라바야로 날아간 세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당시 영국령 인디아군 제 49여단은 수라바야에 집결하고 있던 공화국군과 민병대에 비해 절대적 숫적 열세에 놓여 있었고 오직 이들 세 명 만이 공화국군과 영국군 사이의 전투를 종식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휴전은 즉시 발효되었지만 통신상의 혼선과 양측의 불신으로 전투의 불씨는 금새 다시 불붙어 그 유명한 수라바야 전투로 치닫습니다.
1945년 10월 16일 샤리르와 아미르는 KNIP을 장악하고 11월 11일 의회주의 정부를 출범시키면서 아미르는 샤리르가 총리인 내각에서 국방장관의 중책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 국방장관이란 직위는 TKR과 그 새 사령관 수디르만 장군과 알력을 빚는 원인이 되었는데 군은 국방장관 후보로 족자의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를 – 사실 그 스스로는 그 직책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지만 - 추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미르는 정부가 추진하는 반파시즘 프로그램의 핵심적 인물이었고 그 프로그램의 주요 타겟은 군이었으므로 군과의 갈등은 더욱 골이 깊어졌습니다. 아미르는 일본과 협력했던 PETA출신 장교들을 ‘반역자; ‘파시스트’, ‘주구’라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아미르는 정부에 충성하고 사회주의 이념 투철한 소련의 붉은 군대를 인도네시아 시민군대의 전형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19일 아미르는 사회주의자들과 마슈미당 정치가들 일색인 ‘교육참모부’를 군에 설치하고 육군사령부와 협의도 없이 5월말까지 55명의 ‘정치장교’들을 임명하게 했습니다. 이 새로운 장교들은 TRI 부대들을 혁명목적에 부합하도록 교육할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디르만 장군을 포함한 PETA 출신 고급지휘관들은 자신들에게 붙여진 ‘파시스트’라는 호칭에 이미 격분한 상태였고 각급 사령관들은 이 제도를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더욱이 사관학교에 스며들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위기는 군의 우월감을 훼손하고 군이 국가적 투쟁에 있어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통일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군수뇌부의 시각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군수뇌부는 빨치산 이데올로기를 군에 도입하려는 아미르의 시도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정부와 PETA 출신 장교들과의 적대관계로 인해 아미르는 군사적 지원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몇몇 사단에서 네덜란드군 교육을 받은 호의적인 장교들을 규합했는데 그 중 하나인 서부자바의 실리왕이 사단(Divisi Siliwangi – 제3지역 군사령부)은 1946년 5월 당시 KNIL 출신 A.H. 나수티온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새 내각을 지원하는 또 다른 무력의 원천은 내각의 반파시즘 노선을 지지하며 높은 교육수준을 지닌 무장청년단이었습니다. 정당을 만들어 키워내는 데에 샤리르보다도 더욱 분명한 적성을 지녔던 아미르는 높은 친화력과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 청년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공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정규군 외에 특정노선에 충성하는 별도의 무력집단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고 네덜란드군과 전선을 형성하고 있던 정규군 수뇌부는 자신들이 통제권 밖에 출현한 석연치 않은 무력집단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굳건하던 아미르와 샤리르의 관계도 1947년 급격히 무너져 갔습니다. 아미르와 1946년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해묵은 서로간의 의심은 반파시즘 구호가 힘을 잃으면서 점점 더 극명해져 갔습니다. 샤리르는 외교를 선점하여, 혁명열기가 뜨거운 중부자바를 물리적으로 떠나 자카르타에 머물러 네덜란드와의 협상을 진행했고 소련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회당과 좌익들이 지배하는 대형집회를 싫어해 점점 더 마주치기를 피하자 1946년 6월에 이르러 반대파벌들은 샤리르를 용도폐기하는 대신 사회당의 대안 지도자인 아미르에게 지지를 보냈습니다. 이에 아미르는 1947년 6월 26일 좌익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모스크바 편향의 두 지도자 압둘마짓(Abdulmadjid - 사회당), 위까나(Wikana -PESINDO)와 함께 샤리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합니다. 샤리르가 외교에 치중한다는 이유로 사실상 공화국의 이익을 저해하고 있으며 호전적인 네덜란드와 맞선 상황에서 강화의 시도는 부질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아미르는 광범위한 연정을 시도했지만 무슬림인 마슈미당은 아미르에게 적의를 보이며 당수 수끼만 박사(Dr. Sukiman)와 이전 샤리르 내각의 ‘종교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새 내각참여를 만류했습니다. 그 해 7월 아미르는 공화국의 총리로 임명되었고 원도아미세노(Wondoamiseno)같은 영향력 큰 다른 마슈미 파벌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한 가운데에 공산주의의 아우라를 본격적으로 풍기는 내각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렌빌조약이 국가적 재앙이 되어 아미르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고 PNI와 마슈미당의 각료들은 1948년 1월초에 사퇴하기에 이릅니다. 1월 23일 지지기반을 잃은 아미르도 총리직을 사임했고 수까르노 대통령은 하타에게 비상내각을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이번 내각은 이전처럼 KNIP에게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직접 복무하도록 요구합니다. 수까르노는 이제 일본 부역자의 올무를 끊고 전면에 나서려 하고 있었습니다. 새 내각은 PNI당과 마슈미당 및 무소속 출신들이 주종을 이루면서 아미르와 좌익세력은 야권으로 밀려났습니다. 아미르 샤리푸딘의 입신양명의 경력은 일단 여기서 끝나는 듯 했습니다.
총리에 취임한 하타 부통령은 국방장관도
겸임했습니다. 하타의 내각은 좌익정당을 대변하는 인사들을 포함시키지 않았고 내치에 힘썼는데 특히 경제상황을
호전시키려 노려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지난 아미르 내각 당시 중도폐기되었던 레라프로그램을 이어받아
진행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타는 전임 아미르와는 달리 레라프로그램을 통해 군 내의 좌익세력을
청산하려 했고 수디르만장군이나 군의 지위를 격하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책의 기본취지는
군병력을 축소하여 정부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면서 동시에 군의 효율성을 높이고 자생적으로 발생해 많은 파벌이 서로 견제하던 군을 정부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포진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중 마지막 부분이 가장 중요했던 것은 각지에 산재한 부대들이
각각의 지역과 전선을 통제하면서 중앙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 판단과 결정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타의 정규군 재편 및 최적화 정책 첫 번 째 조치는 병력감축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50만에 달하던 군을 16만 명으로 줄였고 이외에 약간의 비정규 게릴라만을 남겨 두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타는 16만에서 다시 정예화를 시도해 5만 7천명선까지 축소하려 계획했고 군사전략 면에서도 거점방어개념에서 정예군을 능동적으로 기동시키는 이동공격개념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이 정규군 이동공격에는 농민들로 구성된 향토방위군의 지원도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하타내각의 제안들을 정부가 받아들여 1948년 1월 2일 국방과 관련된 모든 권한은 국방장관에게 집중시키는 법안이 서명되었고 BP-KNIP에서도 1948년 3월 5일 국방부와 군의 체계에 대한 1948년 제3호 법령이 제정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네덜란드의 경제봉쇄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과 물자부족으로 인해 경제부문에 있어 하타의 노력은 대체로 실패했던 와중에 레라프로그램마저 군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그리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축군 조치에 해당된 부내나 개인들 역시 자신이 지위를 잃는 것은
당시 청년으로서의 특권이 사라지는 것이라 여겨졌으므로 큰 실망을 자아냈습니다. 더욱이 해군에서는 상기
제3호 법령에 따라 1948년 3월 17일 R 수비약또(R.Soebijakto)중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인도네시아공화군 해군제편위원회를 설치해 해군 1사단과 2사단을 통합육군으로 편성해 버리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실망한 사람들 중엔 앗마지(Atmadji) 부제독도 있었는데 그는 1945년 10월 5일 해양 BKR이 M. 빠드리 제독(Laksamana M. Padri)을 참모총장으로 하고 족자에 본부를 두는 TKR 해군으로 재편할 때부터 실망을 표명해 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부터 해군으로 근무해 왔지만 공화국이 해군을 비교적 홀대하는 것에 반발해 어느날 스스로 국민해양치안대(Marine Keamanan Rakyat : MKR)라는 것을 만들어 수라바야에 본부를 두고 그 부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와 군수뇌부가 그렇게 막 나가도록 놔둘 리 없었습니다. 그는 레라프로그램에 의해 국방부로 자리를 옮겨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앗마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1948년 마디운의 공산당반란에 가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됩니다.
한편 그 즈음 국방부의 요직을 맡고 있던 좌익인사들은 대부분 퇴출되고 아미르 샤리푸딘이 1947년에 만든 무장청년군은 사령부 지시에 따라 정규군에 편입됩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무력지지기반을 잃게 된 좌익세력은 하타를 비난하며 레라프로그램의 집행을 방해했습니다. 1948년 4월 레라프로그램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동부자바에서 벌어졌고 1948년 5월에는 스노빠티 사단(Divisi Panembahan Senopati=육군 제4사단)도 레라 반대시위에 가담했습니다.
레라프로그램에 대해 1948년 9월 2일 하타는 BP-KNIP 총회에서도 최적의 체계가 갖추어질 수 있도록 군 병력을 감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948년 10월 28일자 국방장관의 명령서에 따라 자바군 및 지역사령관(PTTD)인 A.H 나수티온 대령 휘하에 자바지휘본부(MBKD)가 설립되고 히다얏 대령 휘하에 수마트라 지휘본부(MBKS)가 구성됨으로써 정규군 육군에 대한 레라프로그램은 어쨌든 완성되는 모양새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레라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던 9월 중순 마디운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아미르 샤리푸딘의 좌익연합이 인민민주전선(Front Demokrasi Rakyat)이라고 개명하고 아미르 스스로가 서명했던 렌빌조약을 성토하던 중 1948년 8월 11일 인도네시아 공산당 PKI의 1920년대 거물 지도자 무쏘가 소련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는 중량감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미르와 인민민주전선의 지도자들은 즉시 그의 권위를 받아들였고 스탈린주의적 공산당이란 노동계급의 단일정당이어야 한다는 무쏘의 사상에 동조하여 인민민주전선의 다수를 점하고 있던 좌익정당들은 스스로 해체하여 PKI에 가담했습니다. 9월 8일 무쏘가 족자에서 행한, 인도네시아가 소련의 선례를 따라야 한다는 연설에 고무된 전국 공산주의자들은 산업운동과 시위로 그치지 않고 중부자바 수라까르타에선 PKI와 친정부세력과 공개적 전면전을 벌였고 동부자바 마디운지역에서는 한 PKI 지지그룹이 전략적 거점을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그 마디운에서 1948년 9월 18일 인도네시아 공산당(PKI)과 인도네시아 사회당(PSI)이 주축이 된 ‘인도네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성립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선포되었고 대통령에 무쏘를, 총리에 아미르 샤리푸딘이 추대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디운사태는 의도치 않았던 설익은 쿠데타였고 무쏘와 아미르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뿌린 씨앗에서 자라난 결과였고 무쏘와 아미르, 그리고 다른 PKI 지도자들은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 즉시 마디운으로 출발했습니다. 물론 봉기의 성공을 믿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리 쉽게 마디운행을 선택하지 않았겠죠. 그 옛날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독일과 싸우던 로마노프 왕가의 배후를 공격해 무너뜨린 소련의 붉은혁명처럼 무쏘와 아미르는 네덜란드군과의 전쟁으로 군사적 역량이 소진되고 하타의 레라프로그램으로 공화국 병력규모가 획기적으로 축소된 이 때가 공화국을 전복할 프롤레타리아 봉기의 적기라도 판단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마디운을 일본과 미국의 노예인 수까르노와 하타에 대항하는 반란의 중심지로 삼아 전국의 공산주의자들을 궐기시켜 동인도제도 전체에 거대한 공산국가를 건설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족자에 남아있던 약 200명의 PKI 지지자들과 다른 좌익 지도자들이 바로 그 다음 날 체포되었고 수까르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마디운 반란군을 성토하며 소련식 정부를 꿈꾸는 무쏘에 대항하여 자신과 하타를 따라 궐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무쏘 역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끝까지 투쟁할 것임을 밝히는 등 승부수를 날렸지만 반뗀과 수마트라의 인민민족전선은 자신들은 반란과 아무 상관없다며 슬며시 발을 빼면서 마디운반란은 이념봉기가 아닌 지역반란으로 주저앉고 있었습니다. 무쏘와 아미르는 공산당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면서 잘못된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 주에 들어서자 5천-1만명으로 추정되는 PKI 병력이 있는 마디운으로 실리왕이 사단을 주력으로 한 친정부군이 진군해 왔습니다. 한때 아미르를 지지하는 무력세력의 한 축이라 여겼던 실리왕이 사단마저 공산주의자들에게 총구를 겨눈 것입니다. 반군들은 동부자바 주지사 수리요를 비롯해 경찰관들과 종교지도자들, 마슈미당과 PNI당의 지도자들을 살해하면서 퇴각했고 인근 마을과 부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9월 30일 마침내 반란군은 마디운을 포기했고 정부군은 그들을 시골지역까지 주척했습니다.
PKI의 주력은 마디운에서 둥우스(Dungus)라는 곳으로 후퇴하지만 10월 1일 정부군에게 점령되자 무쏘는 아미르와 함께 제법 강력한 2개 대대병력을 데리고 움직이다가 주력과 헤어져 다른 2명과 함께 쫒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는 중간에 검문하던 경찰관을 살해했고 또 다른 군인을 쏘아 맞추지 못하자 도망치다가 10월 31일 스만딩(Semanding)이란 작은 마을의 한 옥외화장실에 숨어 정부군과 교전하다가 사살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꿈꾸었던 무쏘의 허망한 최후였습니다.
아미르는 좀 더 오래 버텼습니다. 그는 마디운과 둥우스를 거치면서 남은 반군 병력 300여명과 함께 오랜 행군 끝에 뿌르워다디 (Purwodadi) 지역 끌람부(Klambu)외곽의 뻐갓(Pegat)산 동굴로 스며들었습니다. 그곳은 천연요새와 같이 양호한 엄폐와 은폐를 제공했지만 포위망을 좁혀오는 정부군 실리왕이 부대에게 외곽경비부대가 11월 22일 항복했고 아미르 역시 다른 PKI 지도자들과 함께 11월 29일 동굴에서 나와 항복하여 꾸두스(Kudus) 소재 29여단 사령부로 압송됨으로써 마디운사태는 완전히 종결됩니다. 이 사건으로 35,000명 정도가 체포되었고 사망한 사람들은 8천여명으로 추산됩니다
인도네시아 독립과정과 독립전쟁 초기에 큰 족적을 남긴 아미르는 비록 그렇게 허접한 반란의 반란수괴로 몰려 사라지기엔 아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처형위기에 몰렸던 그를 한 차례 구원해 주웠던 수까르노는 어쩌면 이번에도 아미르의 목숨만은 살려볼 마음을 가졌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상황은 아미르에게 호의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2월 19일 네덜란드군은 크라이 작전(Operation Kraai)라는 두 번째 대규모공세를 펼쳐 족자를 점령하고 수까르노, 하타, 아구스살림, 그리고 샤리르를 포함한 공화국 정부 전체를 포로로 잡습니다. 하지만 수디르만 장군이 이끄는 공화국군은 궤멸적 손실을 입으면서도 간신히 족자를 탈출해 시골지역으로 철수하여 반묵라인의 양편 모두에서 전격적인 게릴라전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불과 한달 반 전 마디운에서 철수하던 PKI 부대가 포로들을 모두 살해했던 것처럼 정부군 역시 족자에서 퇴각하던 날, 아미르와 다른 좌익지도자들이 탈출할 것을 우려해 모두 사살했던 것입니다.
한때 ‘정적조차도 미워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묘사되었던 아미르 샤리푸딘은 그렇게 생을 마감합니다.
정부군이 마디운사태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일소한 것은 그렇지 않아도 반식민정서에 기반해 대체로 인도네시아에게 동정적이었던 미국으로부터 보다 큰 외교적 지원을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번져가던 냉전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소련 주도의 공산진영에 대항해 미국이 주도하는 지유진영이 동맹으로 삼을 만한 확고한 반공국가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2016.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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