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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인도네시아 독립선언 - 1945년 8월 17일

beautician 2016. 1. 1. 22:32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4)


수까르노 일행이 자카르타에 돌아온 다음날인 8 15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며 연합군에게 전격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인 8 17일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문을 낭독합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은 8 15일이 아니라 8 17일입니다. 물론, UN과 네덜란드에서는 자신들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한 1949 12 27일을 인도네시아의 독립일로 인정합니다.

 

어떤 이들은 인도네시아가 너무 멀어 일본패망의 정보를 늦게 알게 돼 한국의 광복절보다 이틀 늦은 8 17일이 광복절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광복절과 독립기념일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한들 일본이 망한 후 뒤늦게 독립선언 한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국은 항복했어도 병력과 화력을 그대로 유지한 인도네시아 주둔 일본군의 서슬 시퍼런 면전에서 8 17일의 독립선언은 분명 용기있는 결단과 행동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8 15일 거리로 몰려 나와 만세를 불렀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절대적 폭력을 휘두르던 일본군 부대들이 국내 곳곳에 여전히 건재한 상황에서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민족대표 누군가가 과감히 종로 한복판에서 독립선언 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시대 특성상 그런 민족대표는 아마도 상해나 만주에 있었겠죠. 그래서 한국의 8 15일은 광복절이지만 독립기념일은 되기 힘든 것입니다.



 


독립선언일로부터 불과 11일 전이었던 1945 8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뒤이어 8 9일 나가사키에도 또 한 개의 원폭이 투하됨으로써 일본군의 전쟁의지는 완전히 꺾였습니다. 그래서였겠죠. 일본이 주도하는 독립준비/조사위원회인 BPUPKI/PPKI는 인도네시아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분명히 했고 수까르노와 PPKI의장 하타, BPUPKI의 전의장 라지만 위조디닝랏이 베트남으로 날아가 테라우치 육군원수를 만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테라우치는 수까르노에게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허락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는데 말입니다.

 

1945 8 12일 베트남 달랏에서 테라우치는 일본이 수까르노와 하타, 라지만에게 일본정부가 조만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할 것이며 PPKI의 업무속도에 따라 이 독립선언까지 며칠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일본이 계획한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은 8 25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일본은 당시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연합군에게 항복할 시기를 8 15일로 못박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보다 앞서 인도네시아에서는 수딴 샤리르는 1945 8 10일 라디오를 통해 일본이 연합군에게 곧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었고 지하투쟁을 하던 모든 투사들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에 협력한 수까르노나 하타와는 달리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대한 지하투쟁으로 일관했던 수딴 샤리르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일본이 선심을 베풀어 허락하는 공여물의 형태가 되는 것을 극렬히 거부했습니다.

 

세 사람이 달랏에서 돌아왔을 때 수단 샤리르는 수까르노와 하타가 당장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그는 달랏회합의 결과가 단지 일본의 기만전술에 불과하고 일본이 당장이라도 연합군에게 항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정쩡한 상황이 길어져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보루가 친일과 반일로 분열되지 않으려면 조속한 독립선언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타가 달랏회합결과를 샤리르에게 설명해 주었지만 샤리르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수까르노는 일본이 정말 이미 항복했는지, 그 시기의 독립선언이 대규모 유혈사태를 불러오는 것은 아닐지, 아직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립선언으로 인해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닥쳐오지는 않을지 우려하며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수까르노 입장에서는 일본에 대한 부역을 거부한 샤리르가 무척 껄끄러웠을 것임도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수까르노는 독립선언의 권리는 샤리르에게 있지 않고 PPKI에게 있음을 하타에게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주구인 PPKI를 통해 독립선언이 낭독된다면 그것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일본의 선물로 격하시킨다는 수딴 샤리르와 반일세력들의 주장은 분명 설득력있는 것이었습니다.

 

1945 8 15일 일본이 마침내 연합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수딴샤리르와 위까나, 다르위스, 차에룰 살레 등이 당일 BBC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들었고 청년들은 즉시 장년층 지도자들에게 조속한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을 촉구했지만 장년들은 유혈사태를 우려해 시간을 갖고 PPKI의 회의에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을 안건으로 상정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지하조직의 투사들이나 청년들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청년들은 8 15일 자카르타 뻐강사안 동로의 한 세균학연구소에서 가진 사전 회합에서 인도네시아 독립의 성취는 지금껏 일본이 남발해온 어떠한 약속과도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야 함을 결의한 바 있었습니다.  이 결의는 이날 밤 수까르노에게 전달되었으나 수까르노는 이를 보기 좋게 거절했습니다. 그는 PPKI의 수장이었고 테라우치 원수로부터 인도네시아 독립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독립은 인도네시아를 서방, 특히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를 보호해야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수까르노 자신을 포함해 일본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안위를 머지않아 진주해 올 연합군들, 특히 네덜란드군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낱 청년들의 혈기에 휘둘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청년들의 압박에도 수까르노와 하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자카르타에서 차이룰 살레과 동료들은 주도권을 장악할 일종의 설익은 쿠데타 계획도 세웠지만 실제로 병력을 움직여야 할 PETA 소속 회원들이 그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수까르노와 하타, 수바르죠는 코닝스플레인(Koningsplein – 모나스광장 인근 지금의 메단머르데까)에 있는 일본군사령부를 찾아가 상황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곳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 때 느꼈을 황당함이 상상됩니다. 세 사람은 다시 메단 머르데까 거리의 마에다 제독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마에다제독은 달랏회합 성공을 축하면서 그들을 맞았지만 그 역시 대본영의 확인을 받지 못해 아직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라 했습니다.




 

마에다제독을 만나고 돌아가면서 수까르노와 하타는 다음날인 8 16일 뻐잠본 거리 2번지(Jl. Pejambon No.2) PPKI 사무실에서 회의를 열어 독립선언 준비문제와 관련한 사안들을 협의하기로 하고 즉시 의원들에게 소환연락을 내는 등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자카르타의 1945 8 15일은 그렇게 저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8 16일 이른 아침, 일단의 청년들은 수까르노의 우유부단을 참지 못해 그를 까라왕 렝아스뎅끌록(Rengasdengklok)으로 납치해 감금하고 수까르노가 다음날까지는 독립선언을 할 것이라는 맹세를 받아냅니다. 그들은 그날 밤 자카르타로 돌아온 수카르노는 독립선언서의 문구를 다듬고 다음 날 있을 독립선언의 거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전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수까르노 일행이 마에다 제독 사무실을 들러 돌아온 다음날인 1945 816일 새벽 3 랑가스뎅끌록(Rangasdengklok) 사건이라는 것이 벌어집니다. 수까르니, 위까나, 차에룰살레 등을 비롯한 멘뗑31 조직의 청년들이 수까르노와 하타를 납치한 사건입니다.

 

훗날 당시의 일들을 회고록으로 정리한 라스미자 하르디(Lasmidjah Hardi) 따르면 수까르노는 이러한 청년들의 행동에 크게 분노했고 동시에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청년들이 건전한 사리분별의 토론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청년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매우 애국적이라 생각했고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를 만큼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서 오른 상태였으므로 수까르노로서는 청년들이 데러가려는 곳으로 따라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청년들은 PPKI가 한낱 일본군의 주구라고 여겼으므로 이를 거치지 않고 즉각적인 독립선언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까르노와 하타가 어떠한 형태로든 일본의 영향이나 압력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투쟁으로 얻어진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마치 일본이 인도네시아에게 선심을 써 허락한 모앙새가 될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납치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하타의 입장에선 이 사건이 본질적으로 납치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수까르노의 메모에서도 청년들은 그날 정오 15천명의 군중들과 학생, PETA 군인들이 결집해 도시를 공격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킬 계획이 진행 중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청년들이 무리해서라도 수까르노와 하타를 렝가스뎅끌록에 데려간 것은 위험할 수 있는 자카르타에서 일단 도피소개시킨다는 측면도 있었다고 하타는 생각했습니다.

 

밤길을 따라나선 것은 수까르노뿐 아니라 아내 파트마와티와 장남 군뚜르(Guntur)도 함께였습니다. 렝가스뎅끌록에서는 그들에게 PETA 막사를 거처로 마련해 주었다가 나중에 한 화교의 집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나도록 자카르타에선 시민들이나 PETA군의 움직임에 대해 들려오는 소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수까르노 일행을 감금한 청년들은 수까르니(Soekarni)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수까르니는 이 납치사건의 주범이었는데 말입니다. 하타의 증언에 따르면 대략 12.30시경에 문과 앞뜰을 지키는 청년들에게 수까르니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들은 그게 누구에요? 선생님?’ 하며 되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청년이 자기들을 이 집으로 안내해 주었을 뿐이라며 멋적은 머리를 긁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하타는 그 모습에 헛웃음을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경비를 선 것이 아니라 그냥 우연히 거기 머물러 쉬고 있던 것이었으니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수까르니가 그들을 찾아 왔습니다. 하타는 그들이 자카르타에 계획했다는 혁명이 벌어졌는지 물었지만 수까르니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약 한 시간 후 다시 돌아온 수까르니는 아직도 자카르타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 혁명은 벌써 실패한 거야. 자카르타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 피해 있을 이유가 뭐야?”라며 하타는 빈정거렸고요. 수까르니는 상황에 대해 확신이 없는 표정이었고 하타가 다른 질문을 더 던지기 전에 다시 방을 나가 버렸습니다.

 

자카르타가 감감무소식이자 유숩 꾼또(Jusuf Kunto)를 자카르타에 보내 자카르타 청년단들과 협의하려 했으나 그는 위까다와 아흐맛 수바르죠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꾼또와 수바르죠는 수까르노와 하타를 자카르타로 데려올 목적으로 다시 렝가스뎅끌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저녁 6시경 도착해서야 렝가스뎅끌록의 청년들은 비로소 자카르타의 상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카르타에선 아무 일도 터지지 않았고 그저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수바르죠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일갈했다고 하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카르타에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했는데 우리 지도자들을 여기 모셔 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타가 그날 아침예정으로 소집통보를 해 두었던 PPKI의 회의가 있었냐고 묻자 수바르죠는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회의에 소집한 사람들이 여기 다 있는데요.”라고 답했습니다. 수까르노와 하타가 렝가스뎅끌록에 납치되어 부재중인 상황이었으므로 8 16일 계획되었던 PPKI의 회합은 열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루 종일 수까르노와 하타가 렝가스뎅끌록에 머무는 동안 청년들의 목적은 그들을 압박해 왜색을 완전히 씻은 독립선언을 가장 빠른 시간내에 하도록 압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두 사람의 권위가 청년들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두 사람을 렝가스뎅끌록에 납치해 온 청년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웅성거리면서도 정작 직접적으로 자기들 주장을 강요하기는 꺼렸던 것입니다. 수까르니와 동료들의 압박은 그래서 촉구의 수준이었고 노련한 정치가인 수까르노와 하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치적 계산과 계획이 굳건했으므로 렝가스뎅끌록의 논 한 가운데 무대처럼 만들어진 대나무 원두막에서 청년들과의 열띤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혁명은 지금 우리들 손에 달려 있고 우리가 선생께 명령하는 입장인 것이요. 만약 선생이 오늘 밤이라도 혁명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는 뭐? 어쩌겠다는거요?”

 

격노한 수까르노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지르자 그 기세에 압도된 청년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거나 움직이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상황이 진정되자 수까르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이번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이 전쟁과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요. 사이공에서 나는 이 일의 전반에 대해 이미 계획을 세웠소. 거사는 17일에 거행될 것이요.”
17일인 겁니까? 왜 지금 당장이면 안되는 거죠? 16일이면 안됩니까?”

 

수까르니가 그렇게 질문하자 수까르노의 대답은 사뭇 예상 밖이었습니다.

 

나는 신비주의적 힘을 믿는 사람이요. 17일이 내게 더 큰 희망의 비젼을 보여주는지를 이성적 잣대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선 17일이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게 느껴져요. 17은 고결한 숫자입니다. 우선 우린 지금 라마단의 와중에 있어요. 우리 모두의 금식기간인 이때는 가장 성스러운 기간이죠. 내일인 17일은 금요일이에요. 레기(legi)금요일. 행복의 금요일, 성스러운 금요일. 코란도 17일에 인간들에게 주어졌죠. 무슬림들이 17번을 주기로 기도를 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죠. 17이란 숫자가 갖는 고결함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화는 라스미자 하르디(Lasmidjah Hardi) 1984년자 저서에 따른 것입니다. 늘 강직한 무슬림처럼 보였던 수까르노가 자신의 신비주의적 취향을 드러내 말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렝가스뎅끌록을 떠난 수까르노 일행은 마에다 타다시 제독의 멘뗑저택으로 가서 독립선언서의 문구를 다듬고 수까르노의 조수 사유띠 멀릭(Sayuti Melik)은 인근 헤르만 칸들러라는 독일 해군소령의 집에서 강탈해온 타이프라이터로 문서를 타이핑 했습니다. 그렇게 밤을 지샌 일행은 1945 8 17일 새벽 5시 뻐강사안 동로의 수까르노 자택으로 돌아옵니다.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선언문은 1945 8 17일 이까다 광장(lapangan IKADA-지금의 모나스광장)이나 뻐강사안 동로 56번지에 있는 수까르노의 자택에서 수까르노와 하타가 읽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까다 광장에 다른 대규모 집회가 예상되어 일본군이 삼엄한 경계 중이라는 첩보에 따라 민중소요와 일본군과의 충돌을 우려해 수까르노의 자택이 선언장소로 확정되었습니다. 하타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날 새벽 언론계통에 종사하는 청년들에게 독립선언문을 가능한 많이 인쇄해 전국에 뿌려 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날 아침 내내 PETA와 청년그룹들은 급조된 유인물을 뿌리며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이 임박했음을 알렸습니다.

 

이날 수까르노 자택의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가운데 마이크로폰과 확성기 가 설치되고 뒷뜰에서 대나무를 잘라와 다듬고 줄을 매달아 급조한 국기게양대가 테라스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지는 등 분주했습니다. 수까르노의 부인 파트마와티가 손수 바느질한 국기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훗날 분데라 뿌사카(Bendera Pusaka)라고 불리게 되는 이 국기는 그 크기나 모양이 훗날 정착될 표준과는 많이 차이나는 것이었지만 주어진 여건과 재료를 이용해 최선을 다해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독립선언이 있을 것임을 전해 들은 시민들도 아침 일찍부터 모여들었습니다. 수까르노의 집엔 500여명의 청년들과 시민들이 뺵빽히 줄지어 들어섰고 어떤 이들은 일본군이 언제 난입해 들어올지 몰라 초조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도 선언식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수까르노는 밤새 고열에 시달리면서 선언문 작업을 한 후 늦게 잠자리에 들어 건강상태가 최악이었고 하타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급증을 참지 못한 청년들은 수까르노가 빨리 선언문을 낭독하라고 독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모하마드 하타가 배석하지 않은 상태로는 선언문 낭독을 하려하지 않았어요. 하타가 흰색 계통의 복장을 하고서 도착한 것은 선언식 시작 5분 전이었고 그는 곧장 수까르노의 방으로 직행했습니다. 하타의 도착을 응대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난 수까르노는 비로서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그 역시 흰색 계통의 옷을 선택해 입은 후 두 사람은 함께 아침 10, 이미 500여명이 운집한 자택 행사장에 나타났습니다.

 

이 행사는 간단히 진행되었고 어떤 특별한 형식이나 순서를 갖추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PETA 군인이었던 라띠에프 헨드라닝랏(Latief Hendraningrat)이 장내를 관리했는데 그는 수까르노 일행이 밖으로 나오자 청년들에게 손짓해 모두 일어서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절도있게 동시에 일어나자 라띠에프는 수까르노와 모하마드 하타를 몇 걸음 앞의 마이크로폰으로 나오도록 요청했습니다. 수까르노는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간단한 사전 연설을 한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이것이 1945 8 17일 수까르노의 자택에서 있었던 독립선언입니다


 

(참고 : http://www.apakabardunia.com/2013/08/kisah-proklamasi-soekarno-hatta-tidak.html)

 

이렇게 독립선언으로 명소가 된 이 저택은 훗날 아리러니컬하게도 수까르노 본인의 지시에 의해 허물어지는데 그 명백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그 장소는 따만 프로클라마떠르(Taman Proklamator)라는 호젓한 공원으로 변모해 있고 그 공원엔 수까르노 스스로가 설계했다는 독립선언기념비(Monumen Proklamator Kemerdekaan)라는 것이 세워져 그날의 기억을 인도네시아인들의 마음 속에 되살리고 있습니다.


 


독립선언은 인도네시아 민중들에게는 민족자긍심을 드높이는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수까르노와 하타로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일본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얻으려 했던 것은 일본이 힘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지금, 머지않아 인도네시아에 진주할 연합군, 특히 네덜란드군에게 있어서, 그들은 자신들의 옛식민지로서의 인도네시아를 되찾으러 오는 것이었기에, 수까르노의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은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일이었는데 그토록 신뢰해마지 않았던 일본의 힘을 전혀 기대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수까르노는 이제 오직 인도네시아 민중들의 힘만으로 네덜란드를 포함한 연합군들과 대항해야 한다는 거대한 중압감과 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 3년간 그의 권력의 근원이었던 일본군 역시 그냥 힘을 못쓰는 허수아비로 전락해 버린 것이 아니라 연합군이 진주하기도 전 그들의 지령을 받아 오히려 인도네시아의 심장에 총칼을 겨누는 제국주의의 괴뢰가 되어 버릴 것이라는 최악의 상황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날 그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앞선 연설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Saudara-saudara sekalian!

만장하신 동포 여러분!

Saya telah meminta Anda untuk hadir di sini untuk menyaksikan peristiwa dalam sejarah kami yang paling penting.

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의 증인이 되어 주십사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청했습니다.

Selama beberapa dekade kita, Rakyat Indonesia, telah berjuang untuk kebebasan negara kita-bahkan selama ratusan tahun!

지난 수십년간, 우리 인도네시아인들은 수백년간 계속된 압제를 끊고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해 왔습니다.

Ada gelombang dalam tindakan kita untuk memenangkan kemerdekaan yang naik, dan ada yang jatuh, namun semangat kami masih ditetapkan dalam arah cita-cita kami.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들 중엔 잘 된 것들도 또 잘못된 것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정성을 다해 우리들의 이상이 가리키는 바를 향해 정진해 왔습니다.

Juga selama zaman Jepang usaha kita untuk mencapai kemerdekaan nasional tidak pernah berhenti. Pada zaman Jepang itu hanya muncul bahwa kita membungkuk pada mereka. Tetapi pada dasarnya, kita masih terus membangun kekuatan kita sendiri, kita masih percaya pada kekuatan kita sendiri.

또한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단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일장강점기에 우리는 다만 그들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듯 보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힘을 기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우리 스스로의 역량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Kini telah hadir saat ketika benar-benar kita mengambil nasib tindakan kita dan nasib negara kita ke tangan kita sendiri. Hanya suatu bangsa cukup berani untuk mengambil nasib ke dalam tangannya sendiri akan dapat berdiri dalam kekuatan.

이제 진정으로 우리의 운명과 우리 나라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개척할 충분한 용기를 가진 민족만이 자력으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Oleh karena semalam kami telah musyawarah dengan tokoh-tokoh Indonesia dari seluruh Indonesia. Bahwa pengumpulan deliberatif dengan suara bulat berpendapat bahwa sekarang telah datang waktu untuk mendeklarasikan kemerdekaan.

그래서 우린 전국의 주요인사들께 의견을 구했고 모두의 깊은 뜻을 한 마음으로 모아 이제야말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할 시기가 마침내 도래했음에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Saudara-saudara:

동포 여러분,

Bersama ini kami menyatakan solidaritas penentuan itu.

이에 우리의 굳은 결의를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Dengarkan Proklamasi kami :

우리의 선언을 들으라!



 

P R O K L A M A S I (선언문)

 

KAMI BANGSA INDONESIA DENGAN INI MENYATAKAN KEMERDEKAAN INDONESIA.

우리 인도네시아의 민족은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포한다.

 

HAL-HAL YANG MENGENAI PEMINDAHAN KEKUASAAN DAN LAIN-LAIN DISELENGGARAKAN

DENGAN CARA SAKSAMA DAN DALAM TEMPO YANG SESINGKAT-SINGKATNYA.

주권의 인도와 기타 사안들은 세심한 방식으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집행될 것이다.

 

DJAKARTA, 17 AGUSTUS 1945

1945 8 17일 자카르타에서

ATAS NAMA BANGSA INDONESIA. 인도네시아 민족의 이름으로

SOEKARNO-HATTA. 수까르노 하타

 

 

Jadi, Saudara-saudara!

그러므로, 동포여러분

Kita sekarang sudah bebas!

이제 우리는 자유인들입니다.

Tidak ada lagi penjajahan yang mengikat negara kita dan bangsa kita!

이제 우리 민족과 국가를 옭아 매는 족쇄는 더 이상 없습니다.

Mulai saat ini kita membangun negara kita. Sebuah negara bebas, Negara Republik Indonesia-lamanya dan abadi independen. Semoga Tuhan memberkati dan membuat aman kemerdekaan kita ini!

이제부터 우리는 이 나라를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 자유로운 나라, 영원히 지속될 독립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말입니다. 신이시여, 우리들의 독립을 축복하여 영원케 하소서!

 

 

2016.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