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세계대전의 끝 독립전쟁의 시작 : 인도네시아군 vs 연합군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5)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다음날인 8월 18일, PPKI는 신생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기본 정부조직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수까르노와 모하마드 하타를 대통령과 부통령에 각각 임명함.
2. 이슬람법에 대한 문구가 삭제된 1945년 인도네시아 헌법을 발효함.
3. 의회구성을 위한 총선에 앞서 대통령 보좌기구로서 중앙 인도네시아 민족위원회(Komite Nasional Indonesia Poesat/KNIP)를 설치함.
BPUPKI나 PPKI 같은 독립준비조직은 비록 일본주도의 ‘주구’였다 하더라도 분명 그 설립된 목적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남방작전을 수행하여 네덜란드군을 궤멸시키고, 연합군과 대립시키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를 고취시킨 것이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가 독립할 환경을 무르익게 했던 것처럼 일본이 주도한 독립준비기구들도 일본패망 후 불과 사흘만에 인도네시아가 나름대로 자신들의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사전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PPKI는 8월 29일 중앙 인도네시아 민족위원회 (KNIP : Komite Nasional Indonesia Pusat)로 재편되었고 인도네시아 정부는 8월 31일 정식 출범합니다.
1945년 인도네시아 헌법에 반영된 빤짜실라(다섯 개의 원칙)의 구성에서 수까르노의 정치철학이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 이슬람을 모두 아우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수까르노는 국가의 모든 원칙들을 고똥로용(Gotong Royong – 함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상호협력)이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고똥로용의 원칙이 강조된 것은 방대한 인도네시아 땅덩어리 안에 다양한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분파들이 서로회복할 수 없는 정도의 차이점과 괴리감, 그리고 상반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습니다.
신생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영토는 수마트라, 보르네오, 서부자바, 중부자바, 동부자바, 셀레베스, 말루꾸 및 순다끄찔(Sunda Kecil)의 8개 주로 구성되었고 파푸아는 아직 인도네시아의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독립선언의 소식은 일본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라디오와 신문, 전단지 같은 매체들은 물론,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져나갔습니다. 광분할 것이라 우려했던 일본군은 8월 22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했음을 자카르타에서 공식인정하고 휘하의 PETA와 헤이호의 해체를 발표한 후 대체로 병영에서 연합군의 진주를 기다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일본군의 패배인정에 안심이 되었던 것일까요? 수까르노는 그 다음날인 8월 23일 전국을 대상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에 대한 첫 라디오방송을 하며 앞서 해산된 PETA와 헤이호의 병력을 BKR(시민치안대 :Badan Keamanan Rakjat)로 규합합니다.
하지만 수까르노 정부는 앞으로 진주해 들어올 연합군과 적대시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고 만일 그들과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들과 대결할 만한 수준의 군대를 시간 내에 조직할 능력이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으므로 애당초 군대를 조직하지 않는 편이 연합군의 환심을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BKR은 아직 군대조직이라기 보다는 “전쟁피해자 원조단체”의 하부조직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10월 연합군과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에 속속 상륙하면서 수까르노는 BKR을 TKR(Tentara Keamanan Rakjat – 시민치안군)로 재편했습니다. 공화국 정부는 최소한 어느 정도 저항가능한 수준의 군대를 조직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TKR군은 주로 주둔일본군을 습격하여 노획한 무기로 무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첫 라디오연설을 하던 그날은 네덜란드군 첫 선발대가 아쩨 북단 사방(Sabang)에 상륙한 날이기도 합니다. 인도네시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패망과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 직후 즉시 자국 군대로 동인도제도 전체를 장악할 수 없었던 네덜란드는 9월 첫날, 총독대행 휴버투스 요하네스 반묵(Hubertus Johannes van Mook)이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서 영국제독 마운트베튼경을 만나 인도네시아 주둔 일본군에게 명령해 수까르노 정부를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전쟁전 식민지 행정을 담당했던 반묵은 식민정부의 귀환을 총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일본침공 당시 호주 브리스베인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망명정부를 이끌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명령은 패배감에 휩싸여 있던 일본군에게 기대치 않았던 자극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즉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인도네시아인들과의 충돌까지 불사하면서 관할 지역의 통제권을 되찾아 전력의 대부분을 복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를 공격해 진압하기보다는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며 스스로의 안전을 더욱 도모하려 했습니다. 패전 후 일본군의 가장 우선적 목적은 정복과 지배가 아니라 본국으로의 안전한 귀환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의 보신적 조심스러움으로 인해 그들과 위태롭게 대치한 상태에서도 수까르노의 신생 정부는 일본군과 중대한 충돌을 피하며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상륙하기까지 6주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9월 8일 영국군 공수부대의 낙하산들이 자카르타 끄마요란 비행장의 하늘을 수놓자 수까르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국군 선발대일 뿐이었고 나중에 시포스 하이랜더 부대(Seaforth Highlanders)의 1대대가 자카르타에 입성한 것이 9월말경이었습니다. 적대적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직 아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9월 16일 자카르타에 입성한 영국군 패터슨 해군소장 (Sir Wilfrid Rupert Patterson)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합법적인 정부가 가동될 때까지 법과 질서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패터슨에게 공화국 지도자들을 체포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패터슨은 총사령부로부터 현지 정치문제에 간여하지 말라는 명령도 받고 있었으므로 네덜란드의 요청은 거절됩니다. 그래서 당시 자카르타에서는 신생 인도네시아 정부와 영국군이 잠시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그 해 10월에 이르러 인도네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는데 필립 크리스티슨 중장 (Lieutenant General Sir Philip Christison) 휘하의 영국 23사단 사령부는 자카르타에서 과거 총독부 건물에 그 본부를 차렸습니다. 크리스티슨은 모든 전쟁포로들의 석방을 천명했고 인도네시아가 전쟁 전의 상태, 즉 네덜란드의 식민지 상태로 복귀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공화국 정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로 버마와 말레이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영국군이 뜬금없이 인도네시아에 진주하게 된 것은 원래 연합군의 전략지도상 맥아더 장군의 미군 주도의 서남태평양 사령부의 소관이었던 자바와 수마트라가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의 영국군 주도의 동남아 사령부로 이관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1945년 9월 당시 아직도 인도네시아가 미국 관할지역이었고 맥아더가 그 사령관이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요? 네덜란드의 침공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미국이 네덜란드를 도와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정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렸을까요? 물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1945년 사이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침공을 기획했지만 미합동참모부와 루즈벨트 대통령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그 결과 태평양에서 연합군이 대대적인 반격으로 일본을 밀어 붙어는 동안 인도네시아는 대체로 연합군의 직접적인 침공지역 외곽에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동인도제도에 주둔하던 일본군들은 일본이 항복하던 날까지 비교적 건재한 상태로 실질적인 현지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수까르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네덜란드, 또는 연합군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는 시점에서 본다면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은 실제로 일본의 패망과 함께 이미 시작한 셈이었으므로 미군이 인도네시아를 침공경로에서 제외시킨 것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을 비롯한 자바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미군들의 생명을 당장은 보호한 셈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연합군을 상대로 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촉발되어 못지 않은 많은 인명이 상하게 될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시 미군이 침공경로를 바꿔 대대적으로 동인도제도의 일본군을 공격해 섬멸했다면 인도네시아는 훗날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을 벌이기도 전에 그간 일본군 주도로 준비해온 독립정부의 모든 계획과 PETA나 헤이호 등의 전력자원들까지를 포함한, 독립쟁취를 위한 모든 역량을 미군과의 전쟁에 휘말려 소진해 버려 독립을 꿈꿀 수도 없는 처지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관할지역이 그렇게 이관되면서 미군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장면에서 일단 사라졌고 영국주도의 일본군 무장해제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럽열강의 식민지 회복작전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1945년 9월 마운트배튼경의 맡고 있던 동남아사령부의 대리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싱가폴에서 일본군 제7광역군과 남방함대의 항복을 받아낸 필립 크리스티슨 중장은 영국령 인디아군에서 근무하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인디아로 진출하려던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인물입니다. 인도네시아에 입성하던 당시 그는 승승장구하던 중이었고 태평양에서 한 때 무적과도 같았던 일본군을 무릎 꿇린 그로서는 신생 인도네시아의 허접한 TKR 부대가 한낱 메뚜기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입장엔 물론 야비함도 엿보입니다. 영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식민지들을 되찾아 해가 지지 않은 나라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니 네덜란드의 전쟁전 식민지회복을 지원하는 것은 동병상련이었습니다. 나찌 독일에게 목이 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유럽열강들은 이제 좀 한숨 돌리더니 예전의 탐욕에 다시 눈이 뒤집혀 두고온 보따리들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9월 19일, 수까르노는 자카르타의 이까다 광장에서 백만명 가량의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연설을 했는데 이는 최소한 자바와 수마트라의 인민들이 신생 공화국을 열렬한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개의 섬에서 수까르노의 정부는 신속히 행정권을 장악해 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1945년 9월 8일 자카르타 끄마요란에 안착한 영국군 공수부대원들은 민족주의자들이 자카르타와 인도네시아 주요 도시들의 방송국과 신문사 등 공공시설을 장악해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었고 자바와 수마트라에 진출한 연합군 역시 해당 지역 대부분에서 민간통치가 행해지고 있음에 놀라워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사회혼란은 그 수위를 넘어서 이 시기에 유럽인들은 물론, 화교, 기독교인, 토착지주그룹,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반대하는 일단의 무리들간의 무력 충돌과 소요가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아쩨와 북부수마트라에서 벌어진 사회주의혁명이었는데 아쩨의 이슬람 단체들과 공산당이 주도한 북부수마트라의 폭동에서 적잖은 현지인들과 말레이계 귀족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이러한 유혈사태는 1945년 말부터 1946년 초까지 계속되다가 공화국 정권이 통제력을 분명히 미치기 시작하면서 점차 진정국면에 접어 들었습니다..
공화국 정부는 크리스티슨 중장이 요구한 모든 전쟁포로들의 석방과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식민지 상태로의 복귀 중, 후자는 절대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력한 연합군에게 실력으로 저항할 수도 없었습니다. 수까르노는 오히려 연합군에 비해 형편없는 인도네시아의 군사력을 대비시켜 국제사회의 동정표를 얻어 궁극적으로 UN의 지지와 인정을 끌어내겠다는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한편 신뢰할 수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연합군 포로와 민간인들의 석방과 환송에 대해 기꺼히 협력하기로 하고 이에 의거, 일본군과 연합군포로 및 피억류자 송환위원회 (Panitia Oeroesan Pengangkoetan Djepang dan APWI/POPDA)를 설치하여 영국과의 공조 하에 1946년 말까지 7만명에 달하는 일본군과 연합군포로, 피억류자들을 실제로 송환했습니다. 하지만 전 과정이 일본 패망 후 1년도 넘게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으니 열과 성을 다했다고 말하긴 어려울 듯 합니다. 물론 수용환경은 전쟁이 끝난 후 괄목할 만큼 나아졌는데 그것은 적십자사의 지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악독한 일본인 간수들을 먼저 송환했던 측면도 컸습니다. 연합군 포로와 피억류 유럽인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4개월 가량 지난 후 인도네시아를 떠나는 조건으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 포로들은 상당수가 그 약속을 어기고 현지에 진주한 네덜란드군에 합류해 재무장하고 인도네시아에 총구를 겨눕니다.
일본군 대부분과 군정에 참여한 일본인 민간인들 역시 전쟁이 끝난 후 순차적으로 환송되었지만 전범 수백명은 억류되었고 그 중 일부가 전범재판을 받았습니다. 인도네시아에 복귀한 네덜란드 민간정부 NICA는 전쟁범죄 448건과 관련 용의자 1,038명을 법정에 세워 이 중 93.4%인 969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이중 234명(24.6%)을 처형했습니다. 이중엔 일본군으로 징용되어 온 한국인들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무장해제 과정에서 탈영한 약 1천여명의 일본군병사들은 사라지듯 인도네시아 민간에 스며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으로 터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다시 총을 들고 나타나 인도네시아편으로 참전해 연합군과 싸우게 됩니다. 이중에도 한국인이 끼어 있었고 그 중 전사한 양칠성씨는 훗날 무덤과 신원이 밝혀진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일본 패망 후 모든 일본군들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본은 항복조건에 따라 일부 마을과 도시 단위에서 이미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넘어간 통제권을 되찿아 연합군이 진주하기까지 현상유지를 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져 이미 일본군과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 전쟁의 불씨가 불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중부자바의 뻐깔롱안(Pekalongan)에서 일본군 헌병들이 1945년 10월 3일 공화국 청년단 회원들을 대거 사살한 후 영국군에게 도시를 인계했고 스마랑에서는 10월 14일 영국군에 밀려 공화국군이 퇴각하면서 300명 정도로 추정되는 일본군 포로들을 보복살해 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군의 본격적인 반격을 불러와 영국군이 스마랑에 진주하기 전, 6일동안 일본군은 기염을 토하며 스마랑 전역을 거의 점령했고 그 과정에서 500명의 일본군과 2천여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46년 4월 수마트라를 방문한 버마사령관 마운트배튼 제독이 항복한 일본군 활용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기록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통신선과 주요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장한 일본군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략)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명이 넘는 일본군이 공항에서 도시에 이르는 9마일 거리의 도로를 방어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8개월이 지난 후에도 전투력을 고스란이 간직한 일본군이 아직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독립선언서 낭독 후 국제사회로부터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승인받고자 했던 수까르노는 자신이 적극적 일본군 부역자였으며 수백만명의 로무샤 징용에 발벗고 나선 PUTERA 의장이었다는 전력이 서방국가들과의 관계에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까르노는 총리가 행정전반을 감당하고 대통령은 상징적 국가수반으로 존재하는 의회중심적 정부를 구성하기로 하고 1945년 11월 14일 수딴 샤리르를 첫 총리로 지명합니다. 또한 총리와 내각은 대통령이 아니라 중앙 인도네시아 국가위원회(KNIP)에 복무하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수까르노는 대통령의 권리 상당부분을 총리에게 이양한 것입니다. 수딴 샤리르는 수까르노에게 있어 오랜 동지이자 잠재적 정적임이 분명했지만 유럽에서 학업을 마친 엘리트 정치가였고 일본에 부역한 적 없이 오로지 지하항일투쟁 선봉에 있었던 인물이었으므로 연합군의 입맛에 딱 맞는 인선임엔 틀림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네덜란드령 동인도 민간행정부(NICA)의 군대와 행정가들이 영국의 비호를 받으며 인도네시아로 귀환하기 시작한 것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석방된 네덜란드군 전쟁포로들을 재무장시켜 인도네시아 일반시민들과 경찰들을 상대로 막무가내의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공화군 군대와 영국, 네덜란드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촉발되고 말았는데 11월 10일 수라바야에서 영국령 인디아 49 보병여단과 제대로 무장을 갖추지도 못한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고 영국군은 공습과 함포사격으로 수라바야 일대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 맬러비 여단장을 포함해 300여명의 영국군이 전사했고 반면 인도네시아군의 사망자는 수천명에 달했습니다. 자카르타에서도 심심찮게 총격전이 벌어졌고 샤리르 총리에 대한 네덜란드인 건맨의 암살시도도 있었습니다. 수까르노와 그의 정부는 영국군 사령부와의 위태로운 동거를 끝내고 1946년 1월 4일 자카르타를 떠나 보다 안전한 족자로 옮겨가 그곳에서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의 절대적 지지와 보호를 받게 됩니다. 족자는 1949년 독립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화국의 수도로서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샤리르 총리는 자카르타에 남아 영국과의 회담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1945년 하반기부터 1946년 초반까지 벌어진 초기 전투들을 통해 영국군은 자바와 수마트라 대부분의 항구도시들을 수중에 넣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자바와 수마르타를 제외한 외곽도서들은 일본해군의 제56 남방함대가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은 독립선언 후에도 공화국의 행정력이 잘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호주군과 네덜란드군은 이들 도서들을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1945년 말까지 비교적 쉽게 접수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구스띠 구라라이(I Gusti Ngura Rai)의 발리항전, 남부 술라웨시의 봉기, 남부깔리만탄 훌루(Huli)강의 전투 같이 강력한 저항이 벌어진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군사력 열세에 몰린 인도네시아만큼이나 영국과 네덜란드도 누구나 다 아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제2차세계대전을 겪으며 본국이 만신창이가 되어 전후복구가 시작되고 있었으므로 외국에 대군을 보내 장기간 전쟁을 치를 인력도 비용도 처음부터 이미 한계에 닿아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전쟁 전 식민지에서 공짜로 착취해 썼던 값싼 인력과 무궁한 자원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의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연합군의 희망과는 달리 간단히 무릎꿇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은 인도네시아의 편이었으나 그 시간을 버는 댓가는 무수한 인도네시아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목숨이었습니다.
2016.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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