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수라바야 전투 - 인도네시아군 vs 영국군 본문

인도네시아 현대사

수라바야 전투 - 인도네시아군 vs 영국군

beautician 2016. 1. 8. 02:45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6)


8월말 공화국 중앙정부가 자카르타에서 출범하고 중앙 인도네시아 민족위원회가 선임되어 대통령을 보좌하게 되자 비슷한 위원회들이 주 단위, 면 단위에서도 조직되었습니다.신생정부는 지방과 외곽도서를 포괄하는 과정에서 각 지방의 통치자들에게도 중앙정부 출범을 통지했는데 중부자바에서는 즉시 지지회신을 해온 반면 네덜란드의 비호로 호화스로운 생활을 누렸던 도서지방의 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열의를 보였습니다. 공화국 지도부의 극단주의적, 비귀족적, 이슬람적 성격과 자바인 위주의 중앙정부 인적구성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네(Bone)의 왕을 비롯한 중부 술라웨시의 지지가 있었고 마카사르와 부기스(Bugis)의 왕들도 신생 공화국을 지지했으며 마나도의 기독교인들과 발리의 왕들도 순순히 공화국 정부의 권위를 받아들였습니다.

 

1945 9월에 이르러 스스로 청년단이라 칭하며 온전한 자유를 위해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하자 점점 초조해지더니 급기야 그들은 첩자라고 여겨지는 네덜란드인 피억류자들, 유라시아혼혈, 암본인, 화교 등의 인종집단들을 위협, 납치, 강탈, 살해하고 심지어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혁명기간 내내 계속 되었는데 특히 준비단계’(Bersiap)라 불리는 1945-46년 시기에 주로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희생자 무덤 3,500기 정도를 수라바야의 끔방꾸닝(Kembang Kuning) 묘지를 비롯한 몇몇 장소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수라바야의 심빵소사이어티 클럽은 인도네시아 국민당(Paetai Rakyat Indonesia : PRI)의 청년단에게 접수되어 PRI의 본거지가 되었고 그 우두머리 수또모(Sutomo)라는 자는 수백명의 간이처형을 감독했는데 1945 10 22일 벌어진 사건에 대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매번 처형을 할 때마다 수또모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군중들에게 이 민중의 적을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고 군중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죽여라라고 외쳤어요. 그러면 루스땀이라는 자가 칼을 들고 나와 희생자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렸죠. 목이 잘린 시신은 10세갓 넘은 소년들에게 던져주었는데 그 아이들은 피에 굶주린 악마들처럼 시신들을 난도질해서 조각내 버렸어요. 여자들은 뒷뜰 나무에 묶어 성기를 죽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렇게 목이 잘린 시신들은 바다에 버려졌고 여자들은 강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준비단계시기의 사망자 숫자는 수만명에 달했고 실종자들도 20,000여명을 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인들 중 수라바야 전투에 이르기까지 사망한 사람들은 6,300명에서 15,000명 사이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군은 1000여명, 영국군의 사망자 660명의 태반은 영국령 인디아 군인들이었으나 네덜란드군은 대부분 1946 3월과 4월 사이에 인도네시아에 상륙했으므로 이 시기엔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군대 역시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일본 패망으로 PETA와 헤이호가 해산되자 군의 지휘체계와 소속감은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그 해 9월부터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들이 군경험 없는 청년집단들을 무장시키면서 이들은 군벌의 성격을 띄고 다른 파벌과 곧잘 충돌했는데 이들을 통합해 체계와 기강이 잡힌 군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 혁명시대 신생정부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자생적으로 발생한 인도네시아 군에는 일본식 훈련은 받은 장교들이 네덜란드식 훈련을 받은 이들을 수적으로 압도했고 30살의 교사출신 PETA 장교 수디르만이 1945 11 12일 족자에서 처음 열린 사단장급 사령관회의에서 네덜란드군 출신의 경험많고 노련한 경쟁자들을 누르고 인도네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한편 네덜란드는 수까르노와 하타의 일본 부역경력을 비난하며 공화국은 일본 파시즘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깎아 내렸고 그 프로파겐다가 어느 정도 먹혀 네덜란드 식민정부 NICA는 인도네시아를 회복할 비용으로 UN 으로부터 1만 달러를 지원받기도 했습니다. 1945 11월 의회중심주의의 정부가 발족하고 일본군에 저항하여 지하운동을 펼쳤던 수딴 샤리르가 총리로 임명된 것은 이런 서방의 시각을 의식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는 동안 네덜란드는 아직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1946년 초가 되어서야 동인도제도에 의미있는 병력을 파병할 수 있었습니다. 동인도제도는 연합군 총사령부 산하 영국제독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의 동남아시아 사령부의 관할 하에 있었고 그동안 일본군과 연합군의 다른 부대들이 마지못해 네덜란드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연합군이 깔리만칸, 모로타이(말루꾸), 이리안자야 일부지역으로 진출할 때 네덜란드 행정관료들은 그들을 따라 이미 인도네시아에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일본남방함대 관할지역에 도착한 호주군은 공화국의 혁명활동을 재빨리 금지시켰는데 일본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으므로 육군 2개 사단만으로 발리와 롬복을 제외한 인도네시아 동쪽 도서지역 전체를 신속히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영국군은 자바의 질서회복과 민간정부의 회생지원을 명령받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이 민간정부가 전쟁 전 식민정부를 뜻하는 것이라 강조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영연방군이 자바에 상륙해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것은 9월말의 일이었고 마운트배튼경은 30만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송환과 전쟁포로들의 석방 등 당면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그로서는 네덜란드에게 인도네시아를 되찾아 주는 대장정에 투여할 인적, 물적자원이 부족했고 그럴 의지도 없었던 것입니다.

 

첫 영국군 부대가 자카르타에 입성한 것은 1945 9월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메단(북부수마트라), 빠당(서부 수마트라) 빨렘방(남부 수마트라), 스마랑(중부 자바), 수라바야(동부 자바) 등에도 10월에 입성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인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영국군 사령관 필립 크리스티슨 중장은 네덜란드군을 호주군이 이미 점령한 인도네시아 동쪽 외곽도서들부터 네덜란드군이 넘겨 받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이 자바와 수마트라에 입성하면서 긴장이 고조되다가 정작 영국군이 먼저 전투에 휘말리면서 공화국군은 네덜란드인 피억류자들, 네덜란드 식민지군(KNIL), 화교, 유라시아인 및 일본군 등 적이라고 인식되는 모든 집단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첫 대규모 전투가 1945 10월에 촉발됨에 따라 영국군은 1만여명의 인도네시아-유라시아인들과 유럽인 피억류자들을 위태로운 자바지역에서 소개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한편 암바라와와 마글랑 인근마을에서 영국군 분견대들이 공화국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자 영국군은 이들에 대한 공습도 불사했습니다. 수까르노는 11 2일 휴전을 합의했는데 11월말 다시 전투가 시작되면서 영국군은 해안으로 철수했습니다. 연합군과 친네덜란드 시민들에 대한 공화국군의 공격은 11월과 12월에 극에 달해 그 시기에 반둥에서만 1,200명이 사망했습니다. 1946 3월 영국군의 최후통첩에 따라 반둥을 떠나던 공화국군은 반둥의 남쪽 절반을 불태우는데 이것은 반둥 불바다 사건’(Bandung Lautan Api)이라고 불립니다.



 

이중 10월 하순에서 11월말에 걸져 벌어진 수라바야 전투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중 단일 전투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고 오늘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상징적 사건이 되어 있습니다. 수라바야의 청년집단들은 일본군으로부터 탈취한 무기와 탄약으로 무장하고 임박한 연합군과의 전투를 준비하며 수라바야를 요새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는 아비규환이었다. 시내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고 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머리가 날아가고 사지가 절단된 시체들이 여기저기 겹쳐져 누워 있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격렬히 사격하고 찔러 적들을 죽였다.   수까르노

 

1945 9월과 10월 풀려난 유럽인들과 친네덜란드 혼혈들이 수라바야 야먀토 호텔에서 인도네시아 폭도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격렬한 전투가 촉발되었고 6천명 병력의 영국령 인디아군이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군의 주 목표는 수라바야 항구였습니다. 연합군과의 전면전을 피하려 했던 수까르노와 하타는 급히 수라바야로 날아와 영국군 호손 소장, 멜러비 준장과 공화국군 사이에 휴전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10 30일 멜러비가 살해되면서 영국군은 11 5일 영국령 인디아군 5사단을 추가 상륙시키고 11 10일부터 수라바야를 대대적으로 폭격하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맞선 인도네시아측은 공화국군 2만과 각지에서 모여든 민병대 12만명이었습니다.  유럽군은 3일만에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빈약한 무장의 공화국군은 11 29일까지 수천명의 전사자를 내는 등 호된 희생을 치르면서도 주민들이 교외로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결사적으로 항전했습니다.



 

 

수라바야 전투에 영향을 끼쳤던 팩터들은 수없이 많겠지만 수라바야에서 항복한 일본군 시바타 야이치로 제독의 결정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일본군은 연합군에게 무기를 넘겨주고 항복했야 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과의 전투를 준비 중이던 인도네시아인들은 계속 일본군의 무기고를 습격했고 구식 소총 몇 자루를 빼면 대부분 죽창으로 무장한 그들을 일본군의 당시 전력으로 충분히 섬멸할 수도 있었지만 시바타 제독은 하급부대들에게 교전을 자제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인도네시아인들의 무기 탈취에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인도네시아군이 획득한 소총과 자동화기는 물론 탱크와 야포들을 아우르는 일본군의 무기들은 수라바야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대부분 제대로 사용도 해보기 전 파괴되거나 유실되지만 3주 가까이 영국군에 맞서 장기간 항전할 수 있게 했던 소중한 전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시바타 제독이 연합군 대표로 온 네덜란드군 대위에게 정식항복한 것은 10 3일의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팩터는 붕또모(Bung Tomo)라는 인물의 등장입니다. 수라바야 토박이로 본명이 수또모(Sutomo)인 이 사람은 위에 언급했던 청년단의 잔인한 리더 수또모와는 동명이인입니다. 수라바야 전투에 앞서 10 22일 인도네시아 양대 무슬림단체 중 하나인 나드라툴 울라마(Nahdlatul Ulama)가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이 무슬림들의 의무인 지하드’(Jihad) 성전임을 공표해 전국의 무슬림들이 죽창을 들고 수라바야로 몰려들게 한 것만큼이나 붕또모의 격앙되고 애국적이면서도 카리즈마 넘치는 라디오 연설은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의 전투의지를 크게 붇돋았고 지금까지도 널리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리오 끄찍(Hario Kecik)이라는 이름도 수라바야 전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는 수라바야 전투에서 백발백중의 명사수이자 칼을 잘 다루는 전사로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전후 그는 육군소장까지 진급하여 발릭빠빤에서 깔리만탄 제9지역군 사령관을 역임했고 1965년 수까르노의 지령으로 소련에 갔다가 1977년 귀국길에 공항에서 공산당 연루혐의로 수하르토 정권의 수사당국에 전격 체포되기도 합니다.



 

이 수라바야 전투을 지켜본 수딴 샤리르는 인도네시아의 청년들이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사용했던 각종 폭력적 방법들이 부지불식간에 일본의 파시즘의 모델을 본받았다고 생각하며 우려를 표한 반면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탄 말라카(Tan Malaka)는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꼭 필요한 청년들의 영웅적 행동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연합군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벌어집니다. 당시 인디아는아직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독립하기 전이었으므로 지금보다 무슬림 인구가 좀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수라바야에서 공화국군을 짓쳐 들어가던 영국령 인디아군 24,000명 중에도 당연히 무슬림병사들이 있었고 그들 중 600여명은 격렬하게 항전하다 알라후 악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죽어가는 공화국군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911사태 이후 전세계의 무슬림들이 미군의 아프간 침공에 분개하며 그중 일부가 현지로 달려가 탈레반에 합류했던 것처럼 그런 마음을 인디아군의 무슬림 병사들도 똑같이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던 1945 11 10일 무장한 채로 영국군을 이탈해 공화국군으로 전향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결정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대대적인 함포사격과 항공엄호를 등에 업고 월등한 화력을 쏟아 부으며 수라바야의 인도네시아군을 맘껏 짓밟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우세한 영국군 진지를 떠나 죽음이 창궐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전향한 인디아 무슬림병사들 대부분이 수라바야 전투에서 전사했고 독립전쟁이 끝나기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과 75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신념을 따랐던 그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인도네시아에 남았으나 많은 병사들은 전쟁으로 지치고 망가진 몸을 이끌고 인디아와 파키스탄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공화국군은 결국 이 전투에서 패했고 여기서 입은 심각한 인적, 물적 피해로 인해 독립전쟁 내내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인들이 이 전투를 통해 보여준 독립에 향한 열정은 국제사회의 주목을 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전면전이 너무나 큰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고 게릴라 전술등 새로운 전략전술 연구에 골몰하는 한편,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전쟁보다 정치력에 달려 있다고 믿으며 수딴 샤리르 총리를 외교전 최전선에 내세우는 등 대대적 정책변화를 도모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한편 네덜란드는 이 전투를 통해 공화국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력함을 새삼 깨달으며 동인도제도의 네덜란드군 군비증강을 더욱 서둘렀고 영국 역시 이 전투를 정점으로, 이후 중립적 위치로 돌아서며 몇 년 후 UN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입장을 지지하게 됩니다. 수라바야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11 10일은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현충일개념인 영웅의 날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도움으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민간정부(NICA)의 부대를 자카르타와 다른 주요거점에 상륙시켰습니다. 1946 14일 공화국 지도부는 스리 술탄 하멩꾸보워노 9세의 절대적 지원에 힘입어 족자로 천도했고 공화국군은 자카르타 방어전에서 8천명의 사망자를 내며 결국 도시를 내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족자는 전쟁기간 내내 인도네시아의 수도로서 복무했습니다. 오늘날 족자가 특별시의 지위를 얻은 것에는 그런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합니다.



 

 

자카르타 인근의 보고르와 깔리만탄의 발릭빠빤에서는 공화국 관료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네덜란드군의 수마트라 침공 준비단계로서 그 지역 최대도시인 메단과 빨람방에 대대적인 폭격이 이루어졌습니다. 1946 12월 레이먼드 터크웨스털링 대위 (Captain Raymond "Turk" Westerling)의 대소요전 특수부대가 남부 술라웨시에서 임의테러기법을 사용한 것이 내외의 비난을 받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네덜란드군은 이 지역의 공화국 민병대 3천여명을 단 몇 주 만에 소탕하는 효율성을 과시합니다. 문제는 그들 3천명이 정말 민병대였냐 하는 것이었어요. 이 기법은 이후 공화국군이 그대로 배껴 써먹게 됩니다.

 

웨스털링 대위가 터크’(Turk)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그가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스탄불의 네덜란드 대사관을 찾아가 네덜란드군에 입대해 영국군에서 코만도 훈련을 받고 전쟁 중 버마와 스리랑카에서 근무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 9월 수마트라의 메단에 도착한 그는 첩보망을 구축하고 경찰력을 조직해 네덜란드에 반기를 드는 불순분자들을 제거하는데 때로는 전범수준의 잔인한 방법까지 동원하곤 했습니다. 한 갱 두목의 목을 베어 마을 한 가운데에서 장대에 효수하여 인근 지하로 스며든 갱 부하들을 위협한 것 정도는 애교였습니다. 오늘날 이슬람국가 IS가 자행하고 있는 공포를 매개로 한 프로파겐다를 70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특수부대가 먼저 선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DST(특수부대본부)의 코만도팀을 맡게 되는데 1946 9월 자카르타에 주둔할 당시 그의 부대는 130명 규모로 네덜란드 베테랑들과 인도네시아-유럽혼혈, 토착 인도네시아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영국식 코만도 훈련을 마스터한 상태였습니다. 그해 12, 그는 술라웨시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을 명령받았습니다. 당시 술라웨시엔 자바의 게릴라들까지 유입되어 현지 저항세력을 강화하고 심지어 현지 네덜란드 정부를 궤멸 직전까지 몰고가면서 많은 친네덜란드 인사들과 화교들을 공격, 살해하고 있었으나 현지에 주둔한 KNIL 일반부대는 그들을 보호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현지 통제력이 소멸되어 가는 기미가 역력하자 NICA는 웨스털링과 그의 DST 부대에게 적들의 활동을 분쇄할 전권을 위임합니다.

 

웨스털링은 가장 효율적인 진압방법이란 적 전사들을 현장에서의 즉결처분 하는 것이라 믿는 사람이었고 이 방법은 나중에 웨스텔링 방식이라고 특정해 불리기까지 합니다. 그의 DST 부대는 미리 확보한 첩보에 따라 가장 의심스러운 부락 하나를 포위한 후 주민들을 마을 한 가운데로 몰아넣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주민들 중 남자들을 따로 추려내 그들 중 살인자또는 테러리스트로 정보보고 되어 있던 자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현장에서 즉각 사살했습니다. 그런 후 웨스털링은 자신이 부락 대표를 선임하고 자경단을 임의로 구성한 후 주민 전원에게는 절대 테러리스트의 길을 걷지 않을 것임을 코란에 두고 맹세케 했습니다. 웨스털링은 주민 모두를 학살하지 않고도 질서를 잡아가는 자신이 자비롭고 효율적이라 생각했겠지만 그건 매우 잔혹하고,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대소요작전은 1946 12월에 시작해 이듬해 2월에 끝나게 되는데 인도네시아 당국은 이 기간동안 웨스털링이 4만여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역사학자들은 그러한 인도네시아측 주장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 DST 부대에게 사살된 사람들은 1,500명 선, 이 중 400명만이 처형되었고 나머지 1,100명은 전투중 전사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기타 교전에서 전사한 인도네시아군이 1,500명이 더 있는데 친네덜란드 경찰이나 자경단에게 살해된 것이라 하고요. 하지만 즉결심판당한 인도네시아인들이 400명이든 4만명이든 웨스털링은 적포로들과 로무샤들의 목을 기분 내키는 대로 베어 버리던 일본군 망나니들에 비해 하나도 밀리지 않는 냉혈한이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웨스털링은 남부 술라웨시에서 네덜란드 정부의 통제력을 완전히 부활시켰고 살아남은 인도네시아군 전사들은 산속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위협을 당한 주민들은 당연한 알이지만 공화국측 전사들 돕기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정부와 네덜란드군 사령부는 웨스털링의 악명이 대대적인 비판을 불러 일으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일을 무지하게 잘하는 부하직원이 하나 있어서 회사의 모든 골치거리를 한 방에 해결해 주곤 하는데 문제는 그놈이 지독하게 나쁜 놈이라는 겁니다, 거의 사이코패스 같은.... , 이런 그리 낯설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1947 4월 네덜란드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으로 질타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의 동인도제도 쟁탈전에서 결과적으로 큰 공을 세웠던 웨스털링은 한직으로 물러났다가 1948 11월 군복을 벗게 됩니다. 그는 세상사 사필귀정이라 생각했을까요? 아뇨. 그는 나쁜 놈인데 하늘을 찌를 듯한 신념이 강철같고 성실하기까지 한 나쁜 놈이었어요. 그는 서부자바에 정착해서 운송회사를 하는 듯 하더니 APRA라는 준군사조직을 만들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끝까지 방해합니다.



 

 

웨스털링과 거의 동시기에 같은 지역인 남부 술라웨시에서 네덜란드군과 싸웠던 로베르 월떠르 몽인시디(Robert Wolter Monginsidi) 1946 7월부터 전장에 몸을 던졌고 웨스털링은 그해 12월부터 이 지역에 나타났으니 두 사람이 조우해 교전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몽인시디는 1925년 마나도(Manado) 태생의 기독교인으로 독립전쟁이 벌어질 당시 미나하사 지역의 리우뚱(Liwutung)이라는 곳의 한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교사였습니다. 그는 1946 7 17일 랑공댕 로모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술라웨시 시민저항군(Laskar Pemberontak Rakyat Indoensia Sulawesi – LAPRIS)을 조직하여 지속적으로 네덜란드군의 거점을 공략하며 주둔군을 괴롭혔습니다. 그는 1947 2 28일 네덜란드군에게 생포되었다가 그해 10 27일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얼마 후 다시 생포된 그는 정보원이 되면 살려주겠다는 네덜란드측의 회유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사형을 언도받고 1949 9 5,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불과 3개월 앞두고 24세의 나이로 네덜란드군에게 총살 당합니다. 그는 1950 11월 마카사르의 영웅묘지에 묻혔고 1973 11 6일 인도네시아의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어 최고훈장인 마하뿌뜨라 금성훈장이 추서됩니다. 남부자카르타에서 깝뗀 뗀데안 도로(Jl. Kapten Tendean)와 맞닿아 토박, 본가, 우장동 등 한국식당들이 몰려 있고 고가도로 공사가 한창인 월터 몽인시디 도로(Jl. Wolter Monginsidi) 는 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한편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네덜란드군은 도시와 주요 마을에서 성공적으로 작전을 펼치지만 교외와 외곽부락들까지 진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럴만한 병력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 측은 행정편의를 위해 점령한 지역들을 자치주로 묶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동인도네시아주(NIT)로 인도네시아 동부 전역을 포괄했는데 1946 12월에 설립된 이 주는 그 주도를 마카사르에 두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이렇게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공화국과 네덜란드의 협상은 1946 2월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매일 수많은 인명피해를 더해가고 있던 인도네시아에게 있어 독립와 평화를 동시에 얻기 위한 원만한 협상은 필수적이 것이었고 비록 강경 일변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전후복구 상황에서 병력과 비용에 허덕이던 네덜란드로서도 협상은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별다른 경제적 잇권이 걸려 있지 않은 인도네시아에서 병력과 비용손실이 눈덩이처럼 불고 있던 영국은 빨리 철군하고 싶었으므로 인버채플(Inverchapel)의 일위남작 아치볼드 클라크 커경(Lord Archibald Clark Kerr)과 킬런의 일위남작 마일스 램슨경(Miles Lampson)을 보내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를 협상테이블로 불러 냈습니다.



 

 

그 협상의 결과 1946 1115일 링가자티 조약(Linggadjati Agreement)이 조인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자바와 수마트라, 마두라 지역에 대한 공화국의 잠정적 주권을 인정하고, 그 대신 공화국은 영연방과 같은 형태의 네덜란드 연방의 일원이 되는 관계수립을 기꺼이 협의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조약의 성사에 박수를 보내며 태평양전쟁의 종료와 함께 인도네시아에 첫 발을 들였던 영국군은 1년이 좀 넘은 1946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됩니다. 이런 수순을 처음부터 염두에 뒀던 영국군은 1946년 한해 동안 네덜란드군의 대규모 유입을 허용했고 그래서 영국군이 철수하며 생긴 빈 자리를 15만명 규모의 네덜란드군이 이미 채우고 있었습니다.

 

 

2016.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