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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침공 : 일본군 vs 연합군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2)
인도네시아 민족회복운동이 한창이던 1929년 초, 수까르노는 그의 동료이자 저명한 민족주의 지도자 모하마드하타(Mohammad Hatta – 훗날 부통령)와 함께 태평양전쟁이 발발해 일본이 인도네시아에 진주한다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가져다 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 바 있었습니다. 그 예상은 10여년 후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942년 2월 일본제국은 실제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침공해 네덜란드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무서운 속도로 인도네시아 내의 전략적 요충지들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덩달아 수까르노와 그 일행은 벙꿀루에서 다시 300km 더 떨어진 수마트라 빠당(Padang)지역으로 이송되었다가 호주로 후송될 뻔 한 상황까지 처했습니다. 네덜란드 총독부가 일본에 밀려 호주로 도망가 망명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수까르노 일행도 함께 후송하여 연금상태를 유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네덜란드 당국은 수까르노의 손발을 묶어 놓는 데에 집착했지만 일본군이 예상보다 빨리 빠당 인근까지 진주하자 그들은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처럼 결국 모든 걸 팽개치고 꽁무니를 뺐습니다.
오래 전부터 수까르노 파일을 별도 관리하고 있던 일본군은 수마트라 지역사령관을 통해각별한 예의를 갖춰 수까르노에게 접근했습니다. 물론 일본군의 속내는 수까르노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인도네시아인들을 조직, 선무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수까르노 역시 일본를 인도네시아 독립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마음을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죠. 그들은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수까르노는 일본군을 찬양하며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알라를 찬양하라. 알라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마침내 나에게 길을 보여주셨다. 그렇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오직 대일본제국의 힘을 빌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평생 처음 나는 스스로를 아시아의 거울에 비쳐 볼 수 있었다.”
수까르노의 분명 일본에게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1942년 7월 자카르타로 돌아온 수까르노는 일본군의 요청대로 모하마드 하타를 포함해, 일본군의 진주로 최근 풀려나온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재규합했습니다. 자카르타에서도 이번엔 일본제국군 제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이 직접 수까르노와 다른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만나 일본의 전승지원을 위해 그들이 인도네시아 인민들의 지원을 이끌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대충 이 즈음에서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연합군을 격파하는 과정을 잠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3년간의 일본강점기를 경험한 인도네시아인들은 무려 36년간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여 당시 서서히 고사해 가던 우리와는 일본군에 대한 감정을 그리 많이 공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옛날 무적과도 같았던 청나라와 러시아를 육전과 해전에서 보란 듯이 거꾸러뜨리던 일본의 모습에 경악하면서도 부지불식간 우리들 마음에 움텄던 일말의 경외감와 동경심, 그리고 두려움이, 350년간 동인도 식민지에서 폭압으로만 일관했던 네덜란드군들을 탈탈 털어버리며 스스로를 ‘아시아의 등불’이라 일컫던 일본군의 진주를 목도하던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의 뜨거운 마음 속에서도 더욱 들불처럼 타올랐겠죠. 그 마음을 가늠해 보기 위해 잠시 시계를 되돌려 봅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은 현대산업국가로의 변모에 성공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습니다. 또한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대부분이 미국이나 유럽열강의 지배하에 있을 때 일본만은 홀로 독립을 유지한 몇 되지 않는 나라 중 하나였고 심지어 유럽열강 주 하나였던 러시아를 러일전쟁을 통해 완파하면서 놀라운 군사력을 보여주기까지 했습니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면서 스스로 아시아의 새로운 맹주로 자임하며 자신이 주도하는 일종의 상권개념의 ‘아시아 공영권’을 주창하고 동남아로 눈을 돌렸습니다. 일본은 20세기 상반기 동안 점차적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키워갔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동인도 지역과도 교역관계를 개설했습니다. 그 교역은 작게는 작은 마을의 이발소, 사진관, 판매원들로부터 크게는 백화점이나 나중엔 사탕수수 무역에 뛰어드는 스즈키, 미쯔비시 같은 대형기업들까지를 총망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일본인 거류민 인구는 1931년 6,949가구로 그 정점을 찍었고 이후 네덜란드 총독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점차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일본 정부는 일단의 거류민들을 공작원으로 활용해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자들, 특히 무슬림 정당들과 교분을 쌓도록 했고 그들을 일본으로 초청해 들이기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것은 ‘아시아인들을 위한 아시아’라는 일본의 원대한 계획의 한 조각이기도 했고 인도네시아인들이 네덜란드에 반기를 들게 하는 것은 자국의 이익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인종차별주의체제가 조만간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일본인들의 약속에 대부분 인도네시아인들은 희망을 품었으나 식민통치 하에서 특권을 누리던 화교들은 당연히 그럴 리 없었습니다. 물밑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일본은 그들이 소련의 방침에 따라 단일전선을 구축해 대항하고 마침내 타파해야 할 또 하나의 파시스트국가였을 뿐입니다. 1930년대 일본의 만주와 중국 침공은 인도네시아 화교들의 우려를 더욱 증폭시켜 항일전쟁지원을 위한 막대한 기금을 모금하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 정보국 역시 잠재적 적국인 일본인 거류민들을 눈여겨 감시한 것은 두말 할 나위 없습니다.
1941년 11월 인도네시아의 종교정치조직인 마즐리스 라걋 인도네시아(Madjlis Rakjat Indonesia)과 무역연대집단들은 임박한 전쟁위협에 대비해 인도네시아인들의 동원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네덜란드 총독부에 제출했으나 총독부는 그들이 공식적인 인민대표단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 청원을 간단히 거부해 버립니다. 이슬람조직의 정보와 예측이 더욱 정확했던 것일까요? 불과 4개월 후 동인도 열도 전체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떨어지리란 것을 네덜란드 총독부는 아직 상상치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1941년 12월 8일 네덜란드는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일본이 아니라 네덜란드가 선전포고를 했다니 좀 의외입니다. 이듬해 1월, 동남아 전역의 연합군 부대들을 조율할 목적으로 아치볼드 웨이블 (Archibald Wavell) 장군 휘하에 미국-영국-네덜란드-오스트렐리아의 연합사령부(ABDACOM)가 설치되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는 하인 텔 폴텐(Hein ter Poorten) 장군 휘하에 8만5천명의 네덜란드군이 있었지만 일부 장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훈련과 장비가 극히 열악한 토착민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당시 그들을 향해 진격해 오던 일본군 주력은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의 제 16군으로 제2, 제38, 제48 사단 및 제56 혼성여단이었으므로 비록 막강한 해군화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하더라도 병력규모는 네덜란드군의 절반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침공 몇 주 전부터 네덜란드 고위관료들이 가족, 개인비서들을 대동하고 호주로 망명했고 정치범들도 후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본국이 유럽전역에서 이미 나찌에게 점령당했거나 나찌와의 전쟁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붓고 있던 상황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네덜란드군과 서방 연합군들은 태평양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일본군 앞에서 이미 패색이 짙었던 것입니다. 일본군이 상륙하기도 전에 인도네시아의 라이벌집단들간에 유혈충돌이 벌어지면서 살인과 실종, 잠적사건들이 빈번하게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화교들과 네덜란드인들의 재산이 약탈되고 파괴되었습니다.
1942년 초 일본군의 침공은 신속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들은 1941년 12월 15일 브루나이 침공을 시작으로 뒤이어 영국령 사라왁(Sarawalk – 현재 깔리만탄 섬의 말레이시아 영토 부분)의 유전지대를 노린 일본군이 상륙했고 24일에는 쿠칭(Kuching), 1월 11일에는 북부 보르네오의 타라칸(Tarakan)까지 일본군이 도달했습니디. 이후 1월 24일에는 발릭빠빤(Balikpapan)의 유전지대가, 2월 10일에는 반자르마신(Banjarmasin)이 함락되면서 자원의 보고 보르네오섬 전체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사용가능한 유전은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원유 확보는 남방작전을 수행하는 일본군의 최대 과제였습니다. 일본군은 정유시설을 파괴하면 그 일대의 모든 유럽인들을 참수하겠다며 엄포를 놓았지만 이런 경고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로열더치쉘의 민간 원유기술자들은 일본군이 점령하기 전 발릭빠빤의 유정들과 정유시설들을 모조리 파괴했던 것입니다..
한편 셀레베스섬 북단 마나도에선 일본 해군소속 공수부대를 이용한 강습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작전은 태평양 전역 최초의 공수작전으로 기록됩니다. 일본은 1940년 당시 프랑스 침공에서 활약한 나찌독일 공수부대에 감명을 받아 육군과 해군이 44식 기병총이나 2식 소총으로 무장한 연대급 공수부대를 각각 창설하여 육군은 이들을 정진연대(挺進連隊), 해군은 공정부대(空挺部隊)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창설된 해군육전대의 공정부대 1개 대대가 1월 11일, 마나도 비행장에 낙하된 것입니다. 전선 후방에 침투한 공수부대가 적군 전술비행장을 우선 점령하는 것은 이미 고전적 작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군 수비대의 저항은 대세를 되돌리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다음날 2차 공수부대가 추가로 낙하하면서 상륙작전도 동시에 진행되자 패퇴를 거듭한 마나도의 네덜란드군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2월에는 일본군이 빨렘방을 비롯한 수마트라에 상륙했고 이에 고무된 아쩨인들이 네덜란드 총독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킵니다. 2월 19일 이미 암본을 장악한 일본군 특임대가 띠모르(Timor)섬에 상륙했고 꾸빵(Kupang)인근 서띠모르 지역에도 공수부대를 투하했습니다. 2월 27일 일본군의 병력전개를 막으려던 연합군 측 해군은 자바해전에서 전멸당하다시피 했고 그 결과 1942년 2월 28일에서 3월 1일 사이 일본군은 자바섬 북쪽 해변 4개 거점을 통해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암본과 띠모르, 깔리만탄, 그리고 자바해의 주요 거점들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한편 네덜란드 부대가 주둔하지 않았던 발리에서는 거의 이렇다 할 육상교전이 없었습니다.
1942년 3월 9일에 네덜란드군 사령관이 용키르 A.W.L 자르다 반 슈탄켄보러 슈타카우워(Jonkheer A.W.L. Tjarda van Stankenborgh Stachouwer) 총독과 함께 일본군에게 전격 항복하기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서 수많은 접전이 벌어졌지만 그 중 세계 전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몇몇 전투들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빨렘방 전투는 1942년 2월 13일에서 15일까지 빨렘방과 그 인근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일본제국군은 쁠라주(Pladjoe) 인근의 로열더치쉘 석유회사의 정유시설 탈취를 주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에 의한 원유 엠바고가 발동된 상태에서 빨렘방 유전지대의 양질의 원유와 엄청난 매장량, 이에 딸린 정유시설, 그리고 인근에 건설된 군용 비행장 등은 일본군에게 너무나 매력적이고도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습니다.
그해 1월 ABDACOM은 수마트라의 공군력을 빨깔란 벤뗑(Pangkalan Benteng- P1 비행장)과 비밀비행장 쁘라부물리(Praboemoelih – P2 비행장) 두 곳에 집결시켰습니다. 영국 왕립공군은 제225 전폭기 편단을 빨렘방에 조직했는데 이는 호주공군 두 개 편대와 다수의 영국 편대들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40기의 브리스톨 브렌하임 전폭기(Bristol Blenheim bombers)와 35기의 로키드 허드슨 경폭격기(Lockheed Hudson light bombers)를 보유했습니다. 브렌하임 전폭기는 독일과 이태리의 전투기를 감당하기엔 너무 노후해 중동과 이집트에서 퇴역한 기종이었어요. 미군 극동공군의 신예 B-17 플라잉 포트리스 전폭기가 이 지역에서 잠시 운용되었지만 빨렘방 전투 직전 자바섬과 호주로 부대가 옮겨간 상태였습니다.
제226 전투기편대는 항모 인도미터블(HMS Indomitable) 편으로 2월초 빨렘방에 도착한 호커허리케인(Hawker Hurricanes) 전투기 2개 편대로 편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말레이반도와 싱가폴에서의 치열한 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은 영국, 호주, 뉴질랜드 공군의 허리캐인, 브루스터 버팔로(Brewster Buffalo) 전투기 편대의 잔존 항공기들과 재편성하여 일본군과 임박한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 성능을 차치하고 이 모든 항공기들을 합쳐도 앞으로 일본군이 몰고 오게 될 A6M 제로기와 전폭기들을 포함, 350여기 규모와는 큰 전력차를 보였습니다.
빨렘방에 본부를 둔 네덜란드령 동인도 왕립육군(KNIL) 남부 수마트라 지역사령부의 보겔레상 중령(Lieutenant Colonel L. N. W. Vogelesang)은 2천명 규모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빨렘방에 소재한 남부수마트라 수비대대와 예비보병중대, 잠비의 예비보병중대, 그리고 몇몇 포대와 기관총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수마트라의 타 지역 KNIL 부대는 유용한 운송수단이 없어 빨렘방을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네덜란드 왕립해군은 기뢰설치함 프로패트리아(Pro Patria)와 무시강(Sungai Musi)에 배치된 P-38, P-40 순찰선이 보유한 전력의 전부였습니다.
연합군 항공기들은 제84편대의 허드슨기 6대가 14일 아침 일본군 수송선 이나바산마루호를 격침시키고 다른 여러 척에 데미지를 입혔지만 같은 날 아침 다른 9기의 허드슨 전투기가 일본군 함선들을 공격하다가 일본군 제22 항공전단 A6M 제로전투기들에게 격추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1 전투기편대 짐 더글라스 중위를 비롯한 몇몇 허드슨 전투기와 브랜하임 전폭기들이 일본항모 류조를 발견해 공격했지만 명중시키지 못하고 연합군 조종사들은 장렬히 산화합니다.
한편 네덜란드군은 빨렘방과 비행장을 방어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 방법이 이들의 전술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무시강(Musi river)에 방어선을 만들어 일본군을 붙잡아 놓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일본해군의 막강한 화력을 감안하면 함포사격이 비오듯 쏟아지는 해안에서 일본군의 상륙을 막는 것은 그 피해를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연합군의 허를 찔렀습니다. 해상에 출현한 일본군함들을 향해 연합군 항공기들이 몰려나간 사이 일본제국 육군항공대 소속 1,2,3 중대의 카와사키 Ki-56 수송기들이 빨깔란 벤뗑 비행장(P1 비행장)에 공수부대를 투하했던 것입니다.
해군소속의 공정부대가 마나도 전투에서 첫 선을 보인데 이어 이번엔 육군소속 정진부대의 데뷔 무대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에게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정진부대 제1연대가 타고오던 수송선이 1월 3일 적재화물의 자연발화로 폭발, 침몰하면서 병력은 구출되었지만 보급품과 장비를 모두 잃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더욱 대규모로 진행될 수도 있었던 빨렘방의 정진부대 낙하는 제2연대 329명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98 전단의 미쯔비시 Ki-21 전폭기들이 제59, 64 편단의 대규모 나까지마 Ki-43 전투기 편대의 호위를 받으며 보급품을 빨렘방에 떨궈 주었습니다.
빨렘방과 빨깡란 벤뗑 비행장 사이에 투하된 세이찌 구메 대령의 정진부대원 180명은 보급품 지원에 차질이 생기고 중간에 500명 병력규모의 연합군 장갑차 부대를 만나 비행장 점령에 난항을 겪었지만 쁠라쥬 정유시설 서쪽에 안착한 90여명의 병력은 정유시설 전체를 별다른 시설손상 없이 장악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네덜란드군이 부랴부랴 반격하여 이 시설을 일단 탈환했지만 큰 인명손실을 입어 더 이상 일본군과 공성전을 치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시설 파괴를 시도해 저유탱크 일부에 화재를 일으켰지만 정유시설과 유정은 대부분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어 결국 고스란히 일본군 손에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한편 공수부대의 첫 낙하가 있은 지 두 시간 후 60명의 일본 공수부대가 추가로 빵깔란 벤뗑 비행장 인근에 낙하되면서 결국 비행장도 일본군에게 점령되었고 재편성을 마친 정진부대는 빨렘방 인근의 무시살랑(Musi Salalng)과 딸렝강(Sungai Taleng)으로 진격해 갔습니다. 정진부대원 329명 중 이 전투의 사망자는 불과 39명, 부상자는 37명이었습니다.
한편 일본 제국해군 지사부로 오자와 소장 휘하의 상륙전 공격선단은 일본육군 제 16군의 주력인 제38사단 제229 보병연대를 싣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캄란만을 출항하여 빨렘방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8척의 수송선과 이를 호위하는 경순양함 센다이호, 그리고 네 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작은 선단을 앞세웠고 지원선단에는 경항모 류조와 네 척의 중순양함, 한 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세 척의 구축함이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지상 활주로에서 이륙한 일본해군소속 항공기들과 일본 제3공군비행단이 선단의 공중엄호를 맡았습니다.
2월 13일 아침, 싱가폴과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오가며 인원과 장비를 운반하던 토마스 윌킨슨 중위의 영국해군 수송선 리워(HMS Li Wo)호는 난데없이 나타난 이 대규모 일본군 전단과 마주칩니다. 원래 양쯔강에서 수송선으로 사용되다가 징발된 리워호는 달랑 4인치 포 한 문과 중기관총 2문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일본군 순양함들의 맹렬한 사격을 뚫고서 일본 수송선단을 타격하여 한 척을 불덩어리로 만들고 다른 수송선 여러 척에도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이 전투는 리워호의 총탄이 바닥날 때까지 90분간 계속 되었고 윌킨슨 중위는 리워호가 완전히 파괴되기 전 가장 가까운 일본군 배에 돌진해 들이받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윌킨슨 중위는 훗날 그 무훈을 기려 빅토리아 크로스(VC) 훈장을 추서 받았는데 이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를 통틀어 유일한 VC 훈장이 되었습니다.
2월 15일 ABDA의 해군은 카렐 도르만 제독의 지휘 아래 5척의 순양함과 10척의 구축함을 기동하여 일본군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항모 류조와 지상 활주로에서 이륙한 항공기들의 집요한 공격을 버티지 못한 그들은 남부 수마트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합군의 남은 공군력은 수마트라 해안을 향해 거리를 좁혀오는 일본군 상륙부대들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 수송선 오타와 마루(Otawa Maru)호가 침몰했습니다. 연합군의 허리케인 전투기들은 강을 따라 올라가며 일본군 항공기들과 공중전을 벌이는등 분전했지만 2월 15일 오후 연합군 항공기들은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이 예상되는 자바섬으로 이동하라는 긴급명령을 전달 받고 1942년 2월 16일 저녁까지 남부 수마트라에서 완전히 철수했으며 남은 병력들도 오스타벤(Oosthaven – 지금의 반다르 람뿡)에서 선박편으로 자바섬이나 인디아로 철수했습니다.
2월 14일 방카 섬에 도착한 제38사단은 15일 선발대를 먼저 빨렘방에 보냈고 주력도 18일 뒤따라 진주해 유전지대와 정유시설을 포함한 주변지역을 완전히 점렴함으로써 빨렘방 전투는 막을 내립니다.
(참고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worldwar2&no=64801)
이렇게 2월 13일-15일의 빨렘방 전투가 끝나고 불과 2주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운명은 물론 태평양전쟁 초반의 판세를 가르는 운명적 전투가 2월 27일에서 3월 1일 사이 자바해와 순다해협 등 해상에서 벌어집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일본군의 침공은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들은 동부 보르네오와 북부 셀레베스의 기지들을 점령했고 점령지의 비행장에서 벌떼처럼 날아오른 엄청난 수의 전투기들로부터 항공정보를 수신하고 구축함과 순양함들이 길을 열면서 병령수송선들은 마카사르 해협을 지나 몰루카해로 진입했습니다.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미국과 영국, 호주의 제 1차 대전 때 써먹던 고물 군함들로 이루어진 작은 전단뿐이었고 토마스 C 하트 제독이 그 초창기 사령관이었다가 자바해전 당시엔 네덜란드의 카렐 도르만 제독이 사령관직을 물려 받았습니다.
하지만 연합군은 그 와중에서도 1942년 1월 23일 미국 구축함 4척이 마카사르 해협에서 발리빠빤으로 접근 중이던 일본수송선단을 공격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냈고 2월 19일과 20일 일본군의 동부 침공부대를 발리의 바둥해협(Badung Strait)에서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 일본군은 한 번은 항모에서 항공기들을 발진시켰고 또 다른 한 번은 지상 비행장에서 폭격기들을 이륙시키며 1월 19일 호주 다윈(Darwin)을 두 차례 공습했습니다. 이날 공습으로 철저히 파괴된 다윈의 연합군 해군기지는 더 이상 동인도제도에서의 작전지원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자바해전 직전 전역의 병력균형은 연합군에게 매우 불리했는데 더욱이 4개국 해군들을 모아 급조한 연합군 측은 체계도 잡히지 않았고 계속된 일본군의 공습으로 사기도 주저앉아 패배감이 팽배했습니다. 여기에 해군과 공군의 협력도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과의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상륙전단은 자바섬을 공략하기 위해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 2월 27일 ABDACOM 사령부의 함대는 도르만 제독의 지휘 아래 수라바야를 출항해 북동쪽 방향으로 발진했습니다. 마카사르 해협으로부터 접근하고 있던 동부침공부대의 병력수송선단을 차단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죠. ABDA 함대는 두 개의 중순양함(HMS 엑시터와 USS 휴스턴)과 세 척의 경순양함(HNLMS 드루이터와 HNLMS 자바, HMAS 퍼스), 그리고 9척의 구축함(HMS 엘렉트라, HMS 엔카운터, HMS 쥬피터, HNLMS 코르티네어, HNLMS 비테드빗, USS 엘던, USS 존 D. 에드워드, USS 존 D. 포드, USS 폴존스)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주 - HMS는 영국해군, HNLMS는 네덜란드해군, HMAS는 호주해군, USS는 미해군)
한편 수송선단을 호위하는 일본군 특임대는 타케오 타카기 해군소장의 지휘 하에 두 척의 중순양함(나치, 하구로), 두 척의 경순양함(나카, 진쮸), 14척의 구축함(유다치, 사미다레, 무라사메, 하루사메, 미네구모, 아사구모, 유키카제, 토키츠카제, 아맛쯔카제, 하쭈카제, 야마카제, 카와카제, 사자나미, 우시오)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쇼지 니시무라 해군소장이 이끄는 제4구축함 전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중순양함은 8인치(203mm)포들과 어뢰발사기 등으로 중무장 되어 있었던 반면 영국 중순양함 엑시터에는 어뢰발사기가 없었고 휴스턴은 9문의 8인치 포들 중 일본군의 공습피해로 6개만 가동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ADBA 군은 마침내 자바해에서 2월 27일 16:00시 서로를 발견하여 사거리로 접근하다가 16:16시 발포를 시작하지만 첫 포격전은 피차 매우 낮은 명중률을 보였습니다. 연합군은 한밤중까지 약 7시간에 걸친 교전을 벌이며 병력수송선의 사거리 안까지 접근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일본군의 월등한 화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으며 밀려나곤 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악천우로 인해 일본군 항공기들이 전역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으나 악천후는 연합군의 정찰, 공중엄호는 물론 전대 사령부 전체에 통신장애를 일으켜 상황은 점점 더 통제하기 어려워졌고 거기에 일본군이 쏘는 방해전파로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영국 순양함 엑시터는 최근 최신 284-타입의 포탑관제레이더를 장착하는 등 업그레이드를 했음에도 도무지 일본 순양함들을 맞추지 못했고 오히려 기관실이 8인치 포탄에 피격되어 전투기능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엑시터는 구축함 HNLMS 비테드빗의 호위를 받으며 전역을 이탈해 수라바야를 향해야 했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92인치짜리 거대한 어뢰 두 발을 발사해 그 중 하나로 네덜란드 구축함 코르티네어를 맞췄고 두 조각난 코르티네어는 순식간에 침몰해 버렸습니다.
영국 구축함 엘렉트라도 엑시터를 엄호하며 일본군의 경순양함 진쮸와 구축함 아사구모에 맞서 여러 발을 명중시켰지만 자신도 상갑판이 대파되는 심각한 타격을 입습니다. 엘렉트라에 걷잡을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고 포탑의 탄약이 모두 바닥나자 퇴선명령이 내려져 선원들이 바다로 뛰어 들었습니다. 엘렉트라는 결국 격침되고 말았지만 포격전을 주고받았던 일본군 측 아사구모는 복구수리를 위해 전역에서 일단 철수해야 하는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연합군은 교전을 중지하고 18:00시에 미 58구축함전단의 구축함 네 척이 깔아준 연막을 타고 전역을 이탈합니다. 도르만의 함대는 자바해안을 향해 남쪽으로 항진하다가 밤이 깊으면서 다시 서쪽으로 진로를 틀었다가 다시 북쪽으로 선수를 돌려 일본군의 호위전단을 피해 수송선단과 직접 조우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이때 제58 구축함전단은 어뢰가 떨어져 임의로 수라바야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가뜩이나 함정 숫자나 화력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밀리던 연합군의 상황은 점점 더 불리해지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인 21:25, 구축함 쥬피터가 느닷없이 아군 기뢰에 걸려 침몰해 버리는 어이없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거기에 구축함 엔카운터는 낮에 코르티네어가 침몰한 해역에서 생존자 구출을 위해 뒤로 쳐졌습니다. 그런 식으로 순양함 4척으로 대폭 축소된 도르만 함대는 23:00시 일본군 호위전단과 다시 마주쳐 어둠 속에서 장거리 포격전을 주고 받았습니다. 여기서 기함 드루이터(De Ruyter)와 자바가 모두 어뢰를 맞고 침몰하면서 선원 대부분도 전사하여 구조된 사람들은 111명에 불과했습니다. 드루이터에 승선하고 있던 도르만 제독도 이 때 전사합니다.
이제 연합군측의 남은 순양함은 호주해군의 퍼스와 미해군의 휴스턴 뿐이었습니다. 연료와 탄약이 바닥난 그들은 도르만 제독의 마지막 지령에 따라 전역에서 이탈하여 2월 28일 딴쭝쁘리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퍼스와 휴스턴은 곧바로 순다해협을 거쳐 찔라짭(Tjilatja)으로 항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자바는 보급품이 부족해 재무장은커녕 연료도 꽉 채울 수 없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2월 28일 21:00시 순다해협을 향해 출발한 이들은 반땀만(Bantam Bay)에서 서부자바를 향하던 일본함대의 주력과 우연히 조우합니다. 이 전투는 3월 1일 자정을 넘겨 끝났고 퍼스와 휴스턴은 분전 끝에 모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두 척의 연합군 순양함이 격침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일본군에게 저항하며 응전하는 과정에서 일본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퍼스와 휴스턴을 노리고 사방으로 쏘아댄 어뢰에 일본군 기뢰제거함 한 척과 병력수송선 사쿠라마루가 맞아 침몰했고 아군 어뢰를 피해 미친 듯 회피기동을 하던 다른 수송선들 중 세 척이 해안에 좌초되었는데 그 중 하나인 신슈마루엔 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도 승선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대파되었다가 긴급 수리한 순양함 엑시터는 실론섬을 향해 2월 28일 미명에 영국 구축함 엔카운터와 미군 구축함 포프의 호위를 받으며 수라바야를 떠나 여전히 비틀거리며 순다해협 통과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 길목엔 일본 해군의 나치, 하구로, 묘코, 아시가라 같은 중순양함들과 그들을 호위하는 여러 척의 구축함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월 1일 아침 이들과 조우한 연합군 전함들은 전투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에게 숫자와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했고 결국 엑시터와 엔카운터는 거의 동시에 격침되고 맙니다.
안간힘을 다해 연막을 치며 전역을 이탈한 포프는 자바섬 동쪽의 롬복해협을 향해 필사적으로 도주했지만 항모 류조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의 맹공을 받아 역시 격침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제58 미구축함 전단의 구축함 네 척은 수라바야에서 2월 28일 야음을 틈타 호주로 항진합니다. 그들은 발리해협에서 일본군 구축함과 조우하지만 회피에 성공해 3월 4일 호주 프레맨틀(Fremantle)항에 무사히 입항합니다. 그러나 다른 두 척의 미국 함정과 한 척의 네덜란드 구축함은 호주로 도주하는 도중 격침되었습니다.
이로서 ABDA의 해군력은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습니다. 자바해전을 마지막으로 1942년 동남아 해상에서 연합군의 해군작전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일본육전대는 2월 28일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자바섬에 상륙합니다. 네덜란드의 해상전력은 아시아에서 완전히 제거된 셈이었고 이 후 다시는 식민지에 대한 통제권을 결코 완전히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이로서 세계 주요곡창지대 중 하나인 자바섬을 완전히 손에 넣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전역을 점령하면서 1940년 당시 세계 제 4위의 석유생산지역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미군과 영국왕립공군은 호주로 퇴각했고 영국의 원조를 받은 네덜란드군은 자바섬에 상륙한 일본군과 치열한 육상전을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수많은 연합군포로들과 그들에게 동조한 인도네시아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며 파죽지세로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ADBA군은 3월 9일 마침내 항복하게 됩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처음엔 낙관적 열정으로 국기를 흔들며 “일본은 우리 형님나라다”,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며 진주해 오는 일본군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일본군이 진주해 들어오자 동인도 열도 곳곳에서 이에 고무되어 봉기한 인도네시아인들은 유럽인들, 특히 네덜란드인들을 살해했고 그들이 모여있는 곳들을 일본군에게 밀고하기도 했습니다.
저명한 인도네시아 작가인 쁘라무디아 아난타 뚜르(Pramoedya Ananta Toer)는 ‘일본군이 도착하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희망에 가득 찼지만 네덜란드에 부역한 사람들만은 그렇지 못했다’라고 증언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까르노와 하타는 이제 적극적 일본군 부역자의 길로 기꺼이 들어섭니다.
2015.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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