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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다안모곳(Daan Mogot) 소령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다안모곳(Daan Mogot) 소령
일본제국의 패망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는 서둘러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이란 일본으로부터 독립이라기보다는 수백 년간 동인도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던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이라는 의미가 더욱 컸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인도네시아에 연합군이 상륙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연합군에는 제2차 세계대전 내내 히틀러에게 내리 당해 눈두덩에 시퍼런 피멍이 든 네덜란드군도 베레모를 한껏 고쳐 쓰고 영국군과 함께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연합군의 진주는 인도네시아에게 있어 환영해 마땅한 승전국의 개선이 아니라 과거 350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고 착취하며 잔혹한 철권을 휘둘렀던 막강한 침략자들의 귀환이었고 그들의 더욱 진보된 무기들에 맞서 싸워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그토록 악명 높았던 세계대전이 끝나던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에는 불길한 전운이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촉박한 시간을 나누어 급히 정부를 구성하고 군을 조직했지만 무엇보다도 무기와 화력은 치명적일 정도로 보잘것없었으므로 유럽에서 그 성능을 익히 발휘했던 연합군의 최신무기들을 당해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인도네시아군의 유일한 희망은 현지주둔 일본군의 무기를 넘겨받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있던 3년 동안 그들이 저지른 학살과 약탈 등 그 악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군은 천하무적일 것만 같았던 네덜란드군을 피죽지세로 무너뜨려 무조건항복을 받아내는 엄청난 전투력을 보였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열광한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은 일본군 하급부대인 헤이호(Heiho)와 뻬따(PETA)에 앞다투어 몰려들어 일본식 군사훈련을 받고 일본군복과 계급장을 받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일본군에게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미군의 주력이 태평양 도서들을 하나씩 초토화시키며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를 향하는 동안 태평양 전역에 주둔하던 일본군 부대와 일본열도를 열병처럼 휩쓸었던 옥쇄와 할복의 시대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선언과 함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1945년의 연말을 인도네시아의 열대림에서 맞고 있던 일본군의 열망은 이제 정복과 승리가 아니라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패망이 알려졌을 때 절망에 빠진 일본군 일부 부대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인도네시아군에게 무장해제 당하기도 했지만 인도네시아 주둔 일본군의 사령탑은 더 이상 대본영이나 지역사령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승국인 연합군에게 넘어간 상태였고, 연합군 입장에선 자신들이 진주하기도 전 인도네시아군이 일본군의 무기로 무장하는 것을 당연히 원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일본군은 연합군의 지침에 따라 인도네시아군의 무장해제지시를 따르지 않고 다시 부대를 재정비하여 연합군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1945년 연말을 지나던 시점까지도 편재와 화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일본군 부대들이 인도네시아 열도 곳곳에 아직 건재하고 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독립선포 후 불과 20일 후인 1945년 9월 8일 영국군이 처음으로 스마랑에 상륙했고 그 뒤를 이어 영국군 후속부대와 네덜란드군이 속속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주해 들어왔습니다. 인도네시아군과 곳곳에서 충돌하던 영국군은 1945년 10월 27일 수라바야에서 인도네시아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는데 이것이 유명한 수라바야 전투입니다. 인도네시아 정규군 보병 2만명, PETA 비정규군 10만여명이 전차와 전함, 전투기 등 첨단무기로 무장한 3만명의 영국군, 영국령 인디아군과 다음달인 11월 20일까지 3주 넘게 교전했던 치열한 전투였는데 여기서 인도네시아군은 괴멸적 타격을 입습니다.
그러나 12월에는 수디르만 장군의 5사단이 암바라와에서
연합군을 격퇴시키며 인도네시아군의 사기는 다시 하늘을 찌르고 당초 엉성하기만 했던 인도네시아군 조직도 전군 지휘관회의과 후속조치들을 통해 점차
치밀한 구성을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첫 해가 지나고 새해가 밝자 연합군은 속속 일본군들을 무장해제시키며 인도네시아의 내륙거점들을 향해 진주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46년 1월 24일 땅거랑 4연대의 다안야야(Daan Yayah) 소령은 수카부미(Sukabumi)를 넘어온 네덜란드의 NICA 부대(NICA – 동인도민간정부 즉 네덜란드 총독부)가 이미 빠룽(Parung)지역을 점령하고 곧 자카르타 방면으로 진주하면서 렝꽁(Lengkong) 지역을 지나게 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마침 렝꽁에는 잘 무장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은 이 일본군부대로부터 무기를 넘겨받기 위해 오랫동안을 공을 들이고 있었지만 이 부대의 깐깐한 부대장 아베대위는 좀처럼 무기고를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무기들이 네덜란드군에게 넘어간다면 그들과 맞서야 할 땅거랑 4연대와 땅거랑사관학교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아베 대위와 줄다리기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이 렝꽁에 닿기 전에 인도네시아군이 먼저 렝꽁 주둔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대책이었습니다.
땅거랑 4연대는 다안야야 소령을 참모장으로 하여 작전을 강구했고 작전지원을 위해 인근부대의 장교들을 소환했는데 이때 소환에 응한 장교들 중엔 다안모곳(Daan Mogot) 소령도 있었습니다. 당시 17살 소년이었던 다안모곳이 소령계급장을 달고 있었던 것부터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욱 믿기지 않는 일은 그가 땅거랑사관학교의 교장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1946년 1월 25일 오후 2시경 땅거랑 연대장 싱기(Singgih) 중령에게 보고를 마치고 위보워 소령, 수비안또 조조하디꾸수모 소위, 수또뽀 소위 등 장교들과 함께 땅거랑사관학교의 생도 70명, 기간병 8명으로 이루어진 병력을 이끌고 렝꽁의 일본군 주둔지로 출발합니다.
다안모곳은 자카르타와 땅거랑 지역을 잇는 기나긴 도로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따만앙그렉 몰을 지나 일반도로를 타고 공항방면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서 만나게 되는 찌뿌뜨라 몰을 끼고 좌회전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다안모곳 도로는 지독한 교통정체와, 비만 오면 범람하는 홍수로 악명높은 곳입니다. 이 도로가 1946년 1월, 17번째 생일을 막 보낸 다안모곳 소령의 이름을 딴 것임은 인도네시아 사람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지도 낮고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27.5km라는 엄청난 거리를 가진 자기 이름의 핵심도로를 가지게 된 이 청년장교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다안모곳은 1928년 12월 28일 술레웨시섬 북단도시 마나도에서 니콜라스 모곳과 에밀리아 잉끼리왕(미엔)의 사이에서 일곱 남매 중 다섯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엘리아스 다니엘 모곳(Elias Daniel Mogot)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라따한(Ratahan)지역의 대법관이었고 사촌 중 알렉스 까윌라랑(Alex Kawilarang)은 훗날 실리왕이부대 사령관이자 뻐르메스타 작전의 최고사령관을 지냈습니다. 또 다른 사촌인 A 고르돈 모곳(A. Gordon Mogot)은 다안모곳의 고향인 마나도가 포함된 북부 술라웨시 경찰청의 경찰군 장군이었죠. 다안모곳은 이른바 유복한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11살 되던 해인 1939년 그의 가족은 마나도에서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로 이주해 지금의 중부자카르타 쭛머우띠아 거리(Jl. Cut Meutiah)에 집을 얻었고 그의 아버지는 폴크라아드(Volkraad – 네덜라드 식민지시절 의회)의 의원으로 추대되었고 나중엔 찌삐낭 교도소장이 되어 영전합니다. 일각에서는 다안모곳이 독립전쟁의 영웅임에도 그의 아버지는 마나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훗날 ‘침략자 네덜란드의 주구’라는 오명을 쓰고 폭도들에게 살해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시절 식민지정부의 고관이었던 다안모곳의 아버지는 그 후손들의 업적과는 상관없이 명백한 반민족행위자였음엔 대체로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일본강점기에 그가 PETA에 지원한 것은 네덜란드를 단번에 쳐부순 일본군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작용한 듯 합니다. 그래서 그는 1942년 PETA 창설과 동시에 지원하여 첫 번 째 기수의 부대원이 되었습니다. 당시 14세였던 그는 18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자격요건에 크게 미달한 상태였지만 나이를 속인 거짓말에 일본군 면접관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는 신체적으로 성숙했고 모든 훈련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거두어, 진급을 거듭하면서 발리에서 조직된 PETA의 보조훈육관으로 승진했다가 그 후 다시 자카르타로 근무지를 옮기게 됩니다.
그는 발리에서 지내던 시절 두 명의 친구를 사귀게 되는데 께말이드리스(Kemal Idris)와 쥴키플리 루비스(Zuikifli Lubis) 였습니다. 께말이드리스는 훗날 인도네시아 정규군 중장까지 진급하며 독립전쟁과 PKI 반란집압에서 전공을 세우고 쥴키플리 루비스는 1955년 육군참모총장까지 역임하면서 인도네시아 근대사에 이름을 남깁니다.
그들은 발리의 세이넨도조(청년도장)에서 두각을 나타내 일본인 훈육관에 의해 보조훈육관으로 발탁되는데 땅거랑의 세이넨도조에서 빡센 훈련을 받았던 그들에서 발리에서의 훈련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교육훈련은 4기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첫 깃수가 1943년 3월에 시작했고 마지막 기수인 4기의 훈련은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7월에 마무리 됩니다. 그 첫 번 째 기수였던 다안모곳과 그의 친구들은 야나가와 대위가 차출한 50명에 포함되어 게릴라전술을 체득했고 비둘기를 이용한 통신기법과 각종 무기사용법 등 다방면의 군사학을 익혔습니다. 이들 50명은 장교로 임관된 후 더 이상 보조훈육관 역할을 넘어서 ‘쇼단쬬’ 즉 중대장급 지휘관의 임무를 맡게 됩니다.
이들은 임관한 후 그 출신지로 각각 복귀했는데 다안모곳과 께말이드리스, 줄키플리 루비스 등은 다른 PETA 장교들과 함께 발리에 배치되어 그곳 PETA 지원자들의 훈련을 담당했습니다. 일본군이 발리에 PETA군을 창설한 것은 발리가 연합군의 상륙공격을 받을 경우 주요거점들을 사수하려는 목적이었어요. 이를 위해 일본군은 우선 나가라(Nagara)지역과 끌룽꿍(Klungkung)지역에 전력을 증강하면서 그들이 신임하던 다안모곳에게는 따바난(Tabanan)지역에서, 께말이드리스는 나가라에서, 쥴키플리 루비스는 끌룽꿍에서 신병훈련을 지휘하도록 했습니다. 비록 이들 세 친구들은 그렇게 임무를 맡아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지만 께말이드리스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 접촉하면서 신병훈련에 대한 것은 물론 침략자에게 짓밟혀 고통받는 인도네시아의 운명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포한 후 다안모곳은 BKR(Barisan Keamanan Rakyat : 시민치안전선)의 장교가 되면서 소령 계급장을 달게 되고 BKR은 얼마 지나지 않아 TKR(Tentara Keamana Rakyat : 시민치안군)로 명칭을 바꿉니다. 그때 다안모곳은 막 16살이 되었는데 그런 소년장교의 탄생은 그 당시에만 벌어질 수 있었던 독특한 사건이었습니다.
1945년 8월 23일 조직된 BKR군은 4일 후 찔라짭 5번지에 그 본부를 설치하고 자카르타 방위를 책임지게 됩니다. 자카르타 1사단의 쇼단쬬 중 한명이었던 무프레이니 무민(Moefreini Moe’min)이 지휘관이 되었고 그 휘하에 찌깜뻭 연대에는 싱기(Singgih), 다안야야(Daan Yahya), 께말이드리스, 다안모곳, 이슬람살림(Islam Salim), 요피볼랑(Jopie Bolang), 우따르죠(Oetardjo), 사디낀(Sadikin), 다르소노(Darsono) 를 비롯해 훗날 이름을 떨친 여러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그는 사관학교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그 결과 1945년 11월 18일 그가 아직 17살이었음에도 땅거랑 사관학교(MAT)의 교장으로 임명됩니다. 사실 땅거랑사관학교의 설립은 다안모곳과 께말이드리스, 다안야야, 그리고 따스윈(Taswin) 등 네 명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의 KNIL(왕립네덜란드군)이나 일본군의 헤이호, PETA 모두 공히 별도의 장교양성을 위한 사관학교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고 신병훈련소에서 감독관의 면접과 측정을 통해 일단의 소양을 갖춘 신병들을 선별해 별도의 장교양성과정에 편입시키는 식이었습니다. 수디르만 장군도, 다안모곳 소령도 이런 과정을 통해 단번에 대대장으로, 또는 쇼단쬬로 임관했던 것입니다.
인도네시아군 육군소장을 역임한 R.H.A 라덴이 쓴 “땅거랑사관학교과 렝꽁사태”라는 책에서 이 장교양성소의 이름은 처음엔 “고급군사학교” 였으나 대부분의 장교들은 대체로 M.A(엠.아.)라는 명칭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이는 네덜란드군의 사관학교가 K.M.A.(Koninklijke Militaire Academie = 왕실군사학교)라고 불렸기 때문이었는데 그렇게 M.A.라고 부르는 것이 뭔가 더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아이러니 하게도 이 민족적인 사관학교를 가리키는 M.A.라는 말은 사실 네덜란드어인 셈이었습니다.
설립 초기 180명의 생도가 훈련을 받았는데 이들 중에는 이까대학(Ika Daigaku) 박사과정을 이수한 사람들도 있었고 졸업 후 소대장과 중대장은 물론 대대장까지 진급한 인물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천한 역사와 장비, 그리고 자격미달의 교관들을 감안할 때 아직 오합지졸일 수 밖에 없었던 이들 중 70명의 생도를 주축으로 한 병력을 이끌고 다안모곳 소령은 1946년 1월 25일 이른 오후, 렝꽁의 일본군 주둔지를 향해 출발했던 것입니다.
다안모곳의 인도네시아군이 트럭 세 대와 찝 한 대를 나누어 타고 기동한 도로는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고 패망 전 일본군이 설치했다가 방치한 대전차 장애물과 바리케이트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출발한 지 2시간만인 오후 4시경 렝꽁소재 일본군 병영에 도착했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은 병영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트럭을 세우고 모두 하차한 후 대오를 지어 병영에 진입하려 했으나 일본군 경비병들의 강력한 제지를 받자 대오의 맨 앞에 있던 다안모곳 소령과 위보워 소령, 그리고 알렉스 사주띠(Alex Sajoeti) 생도 등 세 명만이 영내의 아베 대위 사무실로 들어갔고 수비안또 소위와 수또뽀 소위는 생도병력을 이끌고 영내의 일본군과 대치했습니다.
두 부대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번졌습니다. 일본군으로부터 무기를 확보하는 일은 인도네시아군에게 있어 매우 중대하면서도 충분한 당위성을 가진 사안이었고 사실 1945년 11월 인도네시아와 연합국 사이에 채결된 약정에 인도네시아 영토 내에 있는 일본군과 전쟁포로들의 송환은 인도네시아의 소관이라고 명기되어 있었으므로 다안모곳 소령의 일본군 무장해제 시도는 아무 문제 없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관련 주체들 사이에 충분한 공조도, 조직적인 진행도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독립전쟁 당시 모두가 처해있던 혼란한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연합군은 인도네시아 측과 그렇게 약정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명령체계를 통해서는 일본군이 인도네시아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불허하는 지침을 내린 상태였으므로 천황과 대본영도 항복한 마당에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연합군의 명령을 감히 어길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 무장해제는 인도네시아 측의 무력시위를 동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반발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합지졸을 이끌고 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우선 말로 풀어보려 했던 17세의 다안모곳 소령은 너무나 순진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가 아베 대위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하게 될 무장해제 작전을 염두에 두고 그는 렝꽁의 일본군을 여러 번 접촉하면서 관계를 형성하려 노력했고 아베 대위와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베 대위는 그리 녹록치 않았던 것입니다.
다안모곳 소령은 자신들이 온 이유를 설명했지만 상급부대로부터 무장해제에 대한 지시를 아직 받지 못했다고 변명하던 아베 대위는 자카르타의 상급자와 연락을 취할 시간을 요구했습니다. 연합군이나 일본군 타부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던 아베 대위가 무엇 때문에 시간을 벌려 했던 것인지, 실제로는 당시 연합군 사령부가 설치된 보고르의 영국군 여단본부로부터 어떤 지침을 받고 있었는지 등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가 인도네시아군의 무장해제 시도가 있을 경우에 대한 대응 프로토콜을 휘하 장병 모두에게 지시했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안모곳 소령이 아베 대위와 얘기를 하는 동안 왕성할 혈기를 참지 못한 수비안또 소위와 수또뽀 소위가 생도병력을 데리고 병영 안으로 진입해 일부 일본군 병사들을 무장해제 시키며 확보한 무기들을 트럭에 싣는 중이었고 일본군 역시 대체로 자발적으로 무장해제에 협조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도네시아군은 일본군 병사 40여명을 연병장에 도열시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총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감쪽같이 은페되어 있던 세 군데의 비밀초소로부터 개활지나 다름없는 연병장 한 가운데에 아무런 대비도 없이 서있던 생도병력에게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도들을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속절없이 피격되어 쓰러졌고 이미 연병장에 도열했던 일본군도 아직 트럭에 다 실리지 못한 무기들을 다시 빼앗아 들고 생도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습니다.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자동화기로 잘 무장된 일본군 앞에 생도들이 주력을 이룬 인도네시아군은 너무나 쉬운 타깃에 불과했습니다. 이 전투는 총격전으로 시작되어 서로 수류탄을 던지며 결국 백병전으로까지 맞붙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다안모곳 소령은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가 전투를 중지시키려 했으나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다안모곳 소령과 동료 장교들, 그리고 하사관의 지시에 따라 땅거랑사관생도들은 일본군 병영에서 빠져나와 렝꽁숲이라 불리는 뒷편 고무나무숲으로 퇴각해 들어갔습니다. 숲속에서 생도들을 간신히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길 수 있었지만 연병장엔 이미 수많은 인도네시아군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보유한 터니카빈소총(Terni carbine rifle)은 탄환규격이 일정치 않아 약실이 막혀 소총이 먹통이 되곤 하여 일본군 공격에 적절한 반격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은 일본군을 상대할 만한 무기나 탄약이 결정적으로 부족했으므로 전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다안모곳 소령은 가슴과 오른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옆의 기관총사수가 피격되자 자신이 기관총을 집어 들고 응사하다가 일본군의 집중사격을 받아 마침내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결국 33명의 생도와 다안모곳 소령을 비롯한 3명의 장교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10명의 생도가 중상을 입었으며 위보워 소령을 비롯한 20여명의 생도가 일본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전사자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총격으로 부상을 입고 연병장에 쓰러진 인도네시아군들을 일본군이 일일이 확인사살 하거나 대검으로 찔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다르노, 머놋, 우스만 스자리엡이라는 이름의 생도 3명은 렝꽁전투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다음날인 1월 26일 아침 땅거랑 4연대본부에 도착해 상황을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은 현지 소규모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셈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본군의 승리라기보다는 그들을 감시, 감독하던 연합군의 승리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아 일본군의 포로가 된 사람들은 죽은 동료들의 무덤을 파야만 했는데 살아남은 자들에겐 죽어도 잊지 못할 치욕과 악몽이 되었습니다. 다안모곳 소령을 비롯한 인도네시아군 사망자들의 유해는 그렇게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며칠 후인 1월 29일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정식으로 재안장 되었습니다. 거기엔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어 땅거랑병원에서 치료받다가 결국 사망하고 만 수까르디 생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거랑 소년원 인근에 묻혔고 이 장례식에는 땅거랑사관학교의 장교들은 물론, 군연락사무소, 수딴샤리르 총리, 외부차관 아구스살림, 그리고 전사한 생도들의 가족들이 참석했습니다.
다안모곳 소령에게는 하자리싱기(Hadjari Singgih)라는 아름다운 연인이 있었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이 10대의 연인들은 어떤 사랑을 속삭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집중포화를 받고 산화한 다안모곳 소령의 처참한 주검을 마주한 어린 여인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을 최소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가 다안모곳을 떠나 보내며 줄 수 있었던 마지막 선물은 허리까지 닿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 연인의 유해와 함께 무덤 속에 안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후 다시는 머리를 길게 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은 지금의 반뜬주 남부땅거랑의 세르뽕면, 렝꽁웨딴 지역입니다. 이곳엔 오래된 일본군막사를 전용한 오래된 집이 당시의 렝꽁전투를 증언하고 있는데 이곳이 다안모곳 소령이 아베 대위와 담판을 짓던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엔 이 전투에서 전사한 생도들과 장교들의 이름이 일일이 새겨진 기념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본군막사와 전시관, 렝꽁기념비 등은 국민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명소가 되어 있진 않습니다. 그저 당시의 그 전투와 사건을 상기시키는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의미가 있는 정도일 뿐이죠. 그래서 인근 주민들조차 이런 역사적 구조물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전시관에는 인도네시아군과 사관학교의 생도들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어야 마땅하나 그 사진들은 땅거랑사관학교에 걸려 있을 뿐이고 매년 1월 25일이 되어야 이 렝꽁전투를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면서 기념비 주변에 한시적인 전시회가 진행될 따름이다.
그들이 재안장된 곳은 바로 그 옆에 ‘생도영웅묘지공원’ (Taman Makam Pahlawan Taruna)이라 불리는데 그 주소는 다안모곳 거리 1번지로 땅거랑 시내 알아좀(Al A’zhom)사원 가까이의 소년원(Lapas)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이 영웅생도 묘지공원 입구의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Kami bukan pembina candi
우리는 사원을 건설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Kami hanya pengangkut batu
우린 단지 벽돌을 나르는 사람들일 뿐이다.
Kamilah angkatan yg mesti musnah
우린 반드시 죽어 없어져야 할 세대이다.
Agar menjelma angkatan baru
Di atas kuburan kami telah sempurna
그래서 우리의 완벽한 무덤 위로 새로운 세대가 모습을 나타낼 수 있도록.
헨리엣 롤랑 홀스트(Henriette Rolang Holst)의 이 시를 적은 종이쪽지가 렝꽁전투에서 사망한 수비안또 죠조하디꾸수모 소위의 주머니 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원래 네덜란드어로 된 이 시를 나중에 로시한 안와르(Rosihan Anwar)가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한 것인데 네덜란드인의 이상이 그들과 대적하던 인도네시아군 장교의 모토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 사뭇 아이러니 합니다.
사족이지만 이 사건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도 후세에 유산을 남깁니다. 위의 시를 적은 메모를 남겼던 수비안또 죠조하디꾸수모 소위는 지난 대선에서 당선된 조코 위도도 대통령과 맞섰던 전 전략특전사령관 쁘라보워의 작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친동생인 거죠. 그래서 쁘라보워의 아버지는 렝꽁전투에서 스러진 동생의 이름을 기려 막내아들의 이름을 완성합니다. 그래서 쁘라보워의 풀네임은 쁘라보워 수비안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잊혀져 버릴 것만 같았던 일천한 계급의 다안모곳 소령의 이름을 수많은 장군들과 영웅들이 독식하고 있던 자카르타의 주요도로명으로 되살려 기억하게 하고 일본군의 일방적 공격을 받아 인도네사아측 TKR 부대가 괴멸하다시피 했던, 그래서 한편으로는 수치스러울 수도 있었던 렝꽁전투를 기념비와 묘지공원으로 추모하게 된 것은 어떤 배경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모르긴 몰라도 인도네시아 근대사에 나름대로의 족적을 남겼던 께말이드리스 중장이나 쥴키플리 루비스 육참총장 같은 사람들이 군시절 초창기를 함께 보내다가 말할 수 없이 불리한 전정에서 투혼을 불태우다가 너무나 빨리 세상을 등진 친구를 오랜 시간 동안 기억하고 추억하고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의 입김으로 홍안의 다안모곳 소령의 이름이 수많은 장군들과 독립투사들을 제치고 자카르타와 땅거랑을 연결하는 그 긴 도로에 부여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압도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인도네시아군은 비록 전략/전술적 목표를 성취하여 결과적으로 승리한 전투였다 하더라도 연합군에 비해 몇 배, 또는 몇 십 배의 인명피해를 입곤 했는데 그래서 전투의 승패보다는 그 과정에서 보여준 장병들의 기백과 희생정신을 더욱 높이 산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1966년 11월 10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현충일을 맞아 표창수여에 대한 대통령령 Keppres RI No.28/BTK/Tahun 1966에따라 이그나티우스 슬라멧 리야디 중령과 다안모곳 소령에게 국가와 민족, 인도네시아 독립, 그리고 땅거랑사관학교에 대한 업적을 기려 제3급 마하뿌뜨라 금성훈장(Kehormatan Bintang Mahaputra Kelas III)이 추서되었습니다. (슬라멧 리야디 중령은 1950년 말루꾸독립을 선언한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암본에서 전사한 지휘관.)
17살의 나이에 육군소령이자 땅거랑사관학교의 교장으로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다안모곳은 께말이드리스와 쥴키플리 루비스의 기억 속에서 그저 다 큰 척 하는 철없는 소년만은 분명 아니었을 것입니다.
2015. 11. 26.
P S 다안모곳의 약력
마나도에서 출생 (1928)
청년도장(세이넨 도조 - Seinen Dojo)의 첫 기수가 됨 (1942-1943);
PETA의 첫 기수로 입대 (1943);
발리에서 PETA 쇼단쬬(대략 구대장 위치)로 근무 (1943-1944);
자카르타 PETA의 본무참모 (1944-1945);
땅거랑 4연대의 소령으로 부임 (1945);
땅거랑사관학교(MAT)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자 초대교장 역임 (1945-1946) :
렝꽁전투에서 전사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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