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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첫 부통령 - 모하마드 하타(Mohammad Hatta) 본문

인도네시아 현대사

인도네시아 첫 부통령 - 모하마드 하타(Mohammad Hatta)

beautician 2015. 12. 13. 19:54




무하마드 하타 (Mohammad Hatta)



모하마드하타(1902.8.12~1980.3.14)는 인도네시아의 첫 부통령이고 훗날 총리도 역임한다. 그는 선언자로 알려져 있고 수까르노를 포함한 일단의 인도네시아인들과 함께 네덜란드에 대항하여 독립을 얻기 위해 항쟁했다. 하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의 서부 수마트라, 뿌낏띵기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기본은 1921년부터 1932년까지에 걸친 네덜란드 유학을 통해 닦았고 심지어 어린 시절 동인도의 네덜란드 학교에서 수학했다. 모하마드하타는 붕하타’(하타대형)이라고 흔히 불리운다.

 

2002년에 발행된 인도네시아 우표. 하타의 젊은 시절 초상이 담겨 있다.


하타는 1902 8 12일 부낏띵기에서 독실한 이슬람 가정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빠야꿈부 인근 바뚜함빠르 지역에서 존경받는 울라마(이슬람학자)였다. 그의 아버지인 하지 모하마드 자밀은 하타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하타의 누나 및 여동생 여섯명을 남기고 하타가 생후 8개월 즈음에 세상을 떠났다. 미낭까바우 지역 마뜨릴네알 공동체의 전통에 따라 그는 외가에서 키워졌다. 그의 외가는 부유했으므로 그는 네덜란드어를 배웠고 방과후에는 이슬람경전인 꾸란의 공부도 마쳤다.


그는 부낏띵기의 멀라유학원(말레이학교)를 마친 후인 1913년부터 1916년까지 빠당 지역에서 ELS (Europeesche Lagere School)라고 부르는 네덜란드어 초급학교를 다녔다. 그는 13세가 되었을 때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의 네덜란드 중등학교인 HBS (Hogere burgerschool) 입학시험에 합격하지만 나이 어린 그가 혼자 바타비아에 가는 것을 걱정한 어머니의 만류에 따라 빠당에서 MULO (Meer Uitgebreid Lager onderwijs)라 하는 중등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는 틈날 때마다 우체국에서 알바로 일했다. 보통 MULO의 학생은 재학 중 일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그가 HBS 입학자격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일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하타는 축구에 관심을 가져 축구팀에 가입하여 주장을 역임하기도 하면서 그 지위를 이용해 더욱 많은 사람들을 사귀며 자신의 세계와 인맥을 넓혀갔다.


하타는 따헤르 마라 수탄이 이끄는 노동연대사무실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는 그는 네덜란드 신문을 자주 읽었고 네덜라드령 동인도 의회인 볼크스라드(Volksraad)의 정치토론 부분을 즐겨 읽었다. 그가 정치에 눈뜨고 전국적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6세 때였다. 그는 1918년 발족한 용스마트라넨본드’ (Jong Sumatranen Bond = 수마트라 청년조합)의 재무부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1919년 하타는 마침내 바타비아의 HBS로 진학하게 된다. 그는 1921년 우수한 교육성적을 거두며 졸업했고 네덜란드 로테르담 소재의 로테르담 상업학교(현재의 에라스무스대학 (Erasmus University Rotterdam)에서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얻는다. 그는 1932년 경제학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까지 밟게 되나 논문을 끝마치지 못해 박사학위는 받지 못한다. 정치가 그의 인생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하타는 네덜란드에서 인디쉐 베레니깅(Indische Vereniging – 네덜란드령 동인도협회)이라는 단체에 가입한다. 이 단체는 1922년에 그 이름을 인도네시쉐 베레니깅(Indonesische Vereniging = 인도네시아협회)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뻐르힘뿌난 인도네시아(Perhimpunan Indonesia)로 바꾸는데 그 의미는 앞서의 네덜란드어와 동일한 것을 인도네시아로 바꾼 것 뿐이었다. 뻐르힘뿌난 인도네시아는 점차 학생조직에서 정치조직으로 변모하면서 인도네시아 독립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들은 인도네시아 머르데까(자유인도네시아)라는 잡지를 통해 그 목소리를 높였는데 하타는 이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더 많은 나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하타는 유럽을 종횡하며 모든 정치집회에 인도네시아 사절단의 회장 자격으로 참석했고 1926년에는 그와 뻐르힘뿌난 인도네시아가 프랑스 비에르빌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국제 민주주의 의회에도 가입하기에 이른다. 그는 1927년 제국주의와 식민압제 반대연맹에서 주최한 브뤼셀 집회에도 참석하여 인디아의 자와할랄 네루, 이집트의 하피즈 라마단 베이, 세네갈의 라민 셍호르 같은 저명한 민족주의자들과 친분을 쌓는다. 그 해 말에는 스위스에서 열린 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여성연맹이 주최한 또 다른 집회에도 참석했다. 거기서 하타는 인도네시아와 독립에 대하여’("Indonesia and the Matter of Independence")라는 제목의 연설로 열변을 토한다.



젊은 시절의 하타


1927년 중반 뻐르힘뿌난 인도네시아의 활동은 마침내 네덜란드 정권에 경종을 울려 그 해 6월에 집행된 조직 수뇌부들의 가택수색을 통해 하타는 물론 다른 네 명의 인도네시아 액티비스트들이 체포되어 투옥된다. 감옥에서 6개월을 보낸 후 그들은 마침내 헤이그에서 재판에 회부되는데 법정에서 자기변론을 허락받았을 때 하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의지를 애써 설명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이해가 네덜란드의 이해와 상충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인인 그들은 네덜란드에게 협조할 수 없다는 취지의 연설을 법정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타는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가 서로 협조하는 기본조건으로서 인도네시아가 독립해야만 하고 그래서 더 이상 식민지로서의 불평등한 상대방이 아닌 평등한 조건의 파트너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하타의 이 법정에서의 연설은 자유인도네시아 연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유명한 연설이다.


하타와 다른 뻐르힘부난 인도네시아 간부들은 1929년 석방된 후 인도네시아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자인 수까르노와 그의 인도네시아 민족당(Indonesian National Party – PNI)에 가담한다. 이 석한다. 하타는 수까르노와 함께 간부학교를 설립해 사람들을 민족주의적 관점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학교에서 장래성이 엿보이는 간부들에게는 경제학, 민족주의운동의 역사는 물론 정부행정업무도 교육시켰다. 하타는 1932년 마침내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

 

하타는 수까르노의 체포와 투옥으로 민족주의운동이 침체기를 맞고 있던 시기에 인도네시아로 귀국했다. 그가 귀국하던 당시 수까르노의 PNI 당원들은 인도네시아당(Partindo)에 가입해 있었고 좀 더 과격한 당원들은 정통 네덜란드교육을 받은 수딴 샤리르가 조직한 신PNI당에 규합되고 있었다. 수딴샤리르의 PNI는 수까르노의 PNI와 이니셜은 같았지만 간부양성에 초점을 맞춘 인도네시아의 민족교육을 표방하고 있었다. 하타는 1932년 네덜란드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신 PNI의 총재직을 맡게 된다.


1932년 수까르노도 석방되는데 세간의 관심은 그가 과연 어느 당을 선택하는가에 쏠렸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통합된 공동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던 수까르노는 자신이 어느 한 쪽의 당을 선택하면서 다른 한 쪽의 당을 그보다 열등한 듯 보이게 하는 것은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가 되리라 생각했으므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타는 수까르노의 그러한 우유부단을 질타했다. 상호간의 차이에 대해 보다 유연했던 그에게 이 문제는 정국을 인도네시아당(Partindo)의 과격주의자와 대다수 당원들의 대결구도로 가져가느냐, 아니면 신PNI당의 중도세력과 간부세력간의 대결구도로 보느냐의 문제였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당과 신PNI당이 통합할 수 있도록 협상할 것을 촉구했다가 실패를 맛본 후 결국 인도네시아당을 선택했다.



수까르노


1932년부터 1933년까지 하타는 신PNI당 당지인 국민의 권위지에 정치와 경제에 대한 글을 실었는데 그의 사설은 인도네시아 지도부를 구성할 만한 새로운 간부집단의 훈련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하타는 이 당시 수까르노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듯 보였다. 1933 8월 수까르노가 다시 체포되었을 때 그는 수카르노 체포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고 그해 11월엔 수까르노의 비극’, 12월에는 지도자의 자세라는 사설을 연달아 썼다.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그해 12월 수까르노를 플로레스섬의 엔데(Ende)지역 유배형에 처하는 가혹한 판결을 내린다. 그렇게 수까르노를 처리한 네덜란드 총독부는 이제 신PNI당과 그 지도부에 시선을 돌려 1934 2월 자카르타지부와 반둥지부를 급습해 하타를 포함한 지도부를 체포한다. 그들은 1년간 찌삐낭과 글로독의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글로독 교도소에 수감된 하타는 그곳에서 결재위기와 자본주의라는 책을 집필한다.


1935년 네덜란드총독부는 하타와 신PNI당의 샤리르를 포함한 그의 동료 지도자들을 파푸아의 보벤디굴(Boven Digoel)이라는 곳에 유배키로 결정한다. 유배지에 도착한 하타는 그곳에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당한다. 그 중 하나는 언젠가 유배가 풀릴 때까지 그곳에서 하루 40센트를 받으며 네덜란드 총독부의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연명할 음식 외에는 고향에 돌아갈 기약도 없는 빡센 유배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하타는 자신이 자카르타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면 큰 돈을 벌었을 텐데 그런 박봉을 받으려고 보벤디굴에서 공무원이 될 이유는 없다고 말하며 후자를 선택했다.


하타는 유배지에서도 뻐만당안’(Pemandangan : 풍광)이라는 신문에 꾸준히 글을 썼고 그 고료를 받아 보벤디굴에서 자신과 동료들의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는 자카르타를 떠나올 때 16개의 박스에 담아야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던 자신의 책들을 이용해 동료들에게 경제학, 역사, 철학에 대한 레슨을 해주기도 했다. 훗날 이 레슨들은 지식의 장도로의 소개’, ‘희랍사상의 본질같은 책들로 엮여져 나오기도 했다.

 

1936 1월 하타와 샤리르는 말루꾸의 반다네이라라는 곳으로 이송되었는데 거기서 그들은 이와 꾸수마수만뜨리(Iwa Kusumasumantri), 찝또 망운꾸수모 박사(Dr.Cipto Mangunkusumo) 같은 민족주의자들과 교분을 쌓게 된다. 하타와 샤리르에게는 좀 더 많은 자유가 주어져 현지 주민들과의접촉도 허용되었는데 그들은 현지 어린이들에게 정치와 역사를 가르치는 과정을 열기도 했다. 하타는 반다네이라 유배기간 중 현지 소년 데스 알위를 자신의 양자로 입양했는데 그는 훗날 인도네시아에서 이름을 떨친 역사가이자 외교관으로 성장한다.


Iwa Kusumasumantri



찝또 망운꾸수모 박사

 

1942년에 이르러 하타와 샤리르는 서부자바의 수까부미 지역으로 다시 이송된다.


1942년 이미 한창이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에서 제국주의적 야심을 욕심껏 채우고 있었다. 그들이 인도네시아에 처음 상륙작전을 개시한 것은 1942 3월이었고 네덜란드 총독부는 본국이 독일군을 만나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로 1942 3 9일 일본군에게 격파당한 끝에 항복하기에 이른다. 그 와중에서도 1942 3 22일 하타와 샤리르는 자카르타로 다시 이송되었다.


자카르타에서 하타는 일본점령군 정부의 내무장관을 맡고 있던 하라다소장을 만난다. 하라다 소장이 하타에게 점령군 자문관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하타는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것이 아님을 다짐받은 후 하라다 소장의 요청을 승락한다. 하타에게 있어 인도네시아 독립에 대한 일본의 인정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만일 일본이 그 초 국수주의적 사고체계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표상이라 자부하는 미국과 영국이 주축을 이루는 연합국에게도 보다 큰 압력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라다 소장


1942년 하타는 수까르노와 재회했다. 수까르노는 일본군이 진주하기 직전 플로레스에서 수마트라로 이송된 상태였는데 일본군은 하타에게 요구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수까르노에게도 요구했다. 그들은 비록 썩 좋지 않은 관계가 되어 헤어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수까르노는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기에 앞서 먼저 하타와 대화하고자 했다. 하타의 자카르타 자택에서 하타와 수까르노, 샤리르가 비밀회동을 하면서 하타와 수까르노가 표면에 나서 일본군과 협력하는 동안 샤리르가 지하로 숨어들어가 저항조직을 만드는 것에 합의했다. 하타와 수까르노는 일본군을 도와 일하고 결과적으로 그들로부터 독립을 얻어낸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의기투합했다. 끼 하디아르 데완또로(Ki Hadiar Dewantoro)와 무하마디아 이슬람조직의 지도자 꺄이 하지 마스만수르(Kiai Hajo Mas Mansur)와 함꼐 하타와 수까르노는 일본군정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사회지도자들의 꿔뚜어비라테(Quattuorvirate = 포럼)를 조직해 인도네시아 국민들과 일본군 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왼쪽부터 수딴 샤리르, 수까르노, 모하마드 하타



꿔뚜어비라테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하타는 일본군정 하에서 열심을 다해 일했다. 그들은 일본군의 프로파겐다를 전파하고 일본제국을 수호자이자 지도자, 그리고 아시아의 등불로서 국민들에게 소개했다. 그러나 동시에 하타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의지를 북돋았다. 1942 12월 한 연설에서 그는 인도네시아가 이미 네덜란드 식민정부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나 그 자유가 또 다른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앞잡이에 불과한 것이라면 차라리 인도네시아가 깊은 심연에 가라앉아 익사해 버리는 것이 낫다며 열변을 토했다.


1943 3 9일 일본군정은 하타와 다른 꿔뚜오비라떼 회원이 공동대표를 맡은 협회인 민중역량센터(PUTERA)의 발족을 승인한다. 수까르노는 이것이 인도네시아 독립에 대한 지원을 얻어내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이 조직을 통해 인도네시아에 로무샤(Romusha – 징용자) 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1943 11월 일본군정에 대한 하타와 수까르노의 협력을 높이 산 일본천황은 두 사람을 토쿄에 불러들여 훈장을 수영한다.


한편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서면서 인도네시아의 일본군정은 상황을 통제하려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뿌떼라(putera)는 해체되고 그 대신 1944 3월 자와호코까이(Djawaa Hokokai = 자바HOKO)가 들어선다. 여전히 수까르노가 의장을 맡고 있었지만 뿌떼라 시기에 비해 운신의 폭은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패전의 기미가 보이시 시작하던 1944 9월 코이소 총리는 일본이 가까운 미래에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할 것임을 천명한다.


이를 기점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한 세력이 응집되기 시작하는데 인도네시아인들의 민족주의 정서에 기름을 부었고 일본에서도 마에다 해군소장 같은 동정파들의 지원도 이어진다. 마에다소장의 경우 그 스스로 자유인도네시아 포럼이라는 협의체를 구성하고 하타와 수까느로를 초청해 민족주의에 대한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이에 힘을 얻어 1945 4월에는 인도네시아 독립준비본부(Body for the Preparation of Indonesian Independence =BPUPKI)가 구성되었는데 그 임무는 향후 3개월간 협의를 계속하면서 헌법제정과 인도네시아의 국토범위 같은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1945 8월 일본의 패망을 목전에 두고 있던 당시 일본정부는 마침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하고 인도네시아 독립준비위원회(Committee to Prepare for Indonesian Independence =PPKI)를 조직하여 감독한다. 1945 8 8일 하타와 수까르노는 사이공으로 소환되어 동남아지역 일본군 총사령관인 테라우치 제독을 만난다. 테라우치 제독은 그 해 8 18 PPKI가 구성되고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감독하에 독립하게 될 것임을 알린다.


테라우치 제독


하타와 수까르노는 8 14일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는데 하타를 기다리던 샤리르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에 대한 뉴스를 가져왔다. 샤리르는 수카르노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하루 속히 천명하도록 종용해야 한다며 하타를 설득했다. 불과 며칠 후면 그들을 감독하기로 했던 일본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샤리르는 국민이 우리 편이니 일본군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며 하타를 강권했다.


샤리르를 하타를 앞세워 수까르노에게 가서 같은 주장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하타는 나중에 연합군이 그를 일본군 부역자로 간주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피력했고 수까르노 역시 그런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샤리르는 절망하며 회의를 떠났다.


바로 그 다음날인 1945 8 15일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항복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인도네시아에서 아직 확인되지 않은 뜬소문일 뿐이었다. 하타와 수카르노는 자카르타의 일본군정 본부를 찾아갔으나 그곳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마에다 소장을 찾아가서야 마침내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확인 받을 수 있었다. 일본의 항복에 하타와 수카르노가 충격을 받은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날 오후 내내 하타와 수카르노는 한시 바삐 인도네시아의 독립선언을 요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단의 인도네시아 청년들의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열띤 토론이 과열되어 가는데도 수카르노는 학생들에게 좀 더 참을성을 갖고 사태를 주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한 수카르노의 성향을 알고 있으면서도 조직 내에서 자신보다 상위직에 있는 수카르노에게 대놓고 주장을 펼치지 못한 하타는 오히려 수카르노 없이는 독립선언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이라고 청년들을 비꼬기도 했다.


1945 8 16일 아침 청년들은 하타와 수카르노를 렝아스뎅클록이라는 도시로  납치해 조속한 독립선언을 계속 종용하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한편 자카르타에서는 그날 아침 PPKI가 회합을 열어 수카르노를 회장에, 그리고 하타를 부회장에 선출키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부재로 인해 혼란이 일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타와 수카르노의 행방이 파악되고 일본의 항복선언이 확인되자 PPKI 대의원 중 한명인 아흐마드 수바르죠(Achmad Subardjo)는 즉시 렝아스뎅클록에 가서 이 소식을 하타와 수카르노에게 전했다. 그날 밤 그들은 자카르타로 돌아와 마에다 소장의 집에서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


마침내 1945 8 17일 수카르노의 저택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선언되는데 이 짧은 독립선언서에는 수카르노와 하타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독립선언서 - 모두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매우 짧고 단촐합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



하타는 꼭두각시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1945 8 18일 수카르노가 PPKI에 의해 인도네시아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하타는 그를 보좌하는 인도네시아의 첫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통령이 된 하타는 모든 행정잡무들을 처리하는 정부조직을 구성하는 한편 수카르노가 제시하는 정부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는 일에 주력했다. 그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정치스타일을 보였지만 오히려 그런 차이점이 서로를 결정적으로 보완해 줄 수 있다는 부분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였다. 그들은 두움비라테(Duumvirate = Dwitunggal)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는데 지금까지도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과 부통령의 조합이라고 칭송되곤 한다.


하타는 인도네시아공화국 초기에 세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해 10월 그는 인도네시아 중앙국가위원회(KNIP)에 입법권과 함께 대통령 자문역을 맡겼다. 그리고 같은 달 인도네시아의 정치정당들의 구성을 허용했다. 그리고 다음 달인 11, 그는 대통령이 맡고 있던 정부수반의 위치를 총리에게 넘기도록 결정했다. 하타가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수카르노가 관련 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해당 권한을 하타의 결정에 위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카르노 역시 최소한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만큼은 하타의 결정에 별다른 불만을 품지 않았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다시 군대를 보내기 시작할 때 하타는 샤리르, 수카르노와 함께 외교적으로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차이룰살레(Chairul Saleh)나 아담말릭(Adam Malik)같은 정부 내의 급진 청년그룹 지도자들과 마찰을 빚게 된다.



차이룰 살레(Chairul Saleh)



아담 말릭 (Adam Malik)


1946 1월 자카르타에서의 회담을 이끌도록 당시 총리였던 샤리르를 남겨놓고 하타와 수카르노는 중부자바의 족자로 정부를 옮겨갔다.


1946년 말에 이르러 하타와 수카르노가 기대했던 외교적 성과가 결실을 맺었다 1946 11월에 서명된 링가자티 조약(Linggadjati Agreement)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대한 네덜란드 측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독립국의 경계는 자바와 수마트라, 마두라 만을 포함했다. 더욱이 공화국은 네덜란드의 여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하는 인도네시아합주국의 일부로서만 인정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조약이 네덜란드 하원의 승인을 득하기 전 몇몇 조항들이 인도네시아의 동의 없이 멋대로 수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는 이 조약의 실행을 거부하였고 결과적으로 네덜란드는 1947 7월 첫번째 치안조치’(Police Action)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 하타는 해외로 나가 인도네시아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오랜 친구인 네루의 고향, 인디아에 갔다. 인디아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몰래 빠져나가야 했던 그는 비행기의 부기장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그는 인디아에 도착해 네루와 마하트마간디의 도움을 요청했더, 네루는 인디아가 반드시 인도네시아를 지지할 것이며 UN과 같은 국제기구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게 할 것임을 약속했다.



네루와 간디


네루와 하타


1947 12 USS 렌빌이란 이름의 군함 위에서 협상이 벌어졌고 1948 1월 조약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 조약은 좀 더 네덜란드에게 호의적인 것이어서 첫번째 치안조치가 진행되는 동안 네덜란드 측이 장악한 지역을 인도네시아 측이 네덜란드의 영토로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조약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아미르 샤리푸딘이 이로 인해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USS Renville


샤리푸딘을 대신해 수카르노는 하타를 총리에 임명하면서 이번 내각은 응급내각의 성격을 띄며 국가중앙위원회(KNIP) 대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해야 함을 천명했다. 하타는 국방장관직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하타는 총리로서 민중의 불만을 자아내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1948 8월 군비지급에 허덕이던 하타는 일부 군인들을 강제전역 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1948 12월 네덜란드는 두번째 치안조치 작전을 펼쳤는데 이번엔 족자공격이 그 핵심이었다. 하타와 수카르노는 그곳에서 몸을 피해 게릴라전에 뛰어드는 것보다 도시에 남아 있다가 포로가 되는 편을 선택했다. 수카르노는 유배지로 떠나기 전 모든 권한을 인도네시아공화국 긴급정부(Emergency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Indonesia = PDRI)에 위임했다. 하타는 방카(Bangka)로 유배되었다.


그 후에도 수디르만장군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고 인도네시아군은 게릴라전을 펼쳤다. 1949 3, 술탄 하멩꾸부워도 9세는 3 1일 총공세를 조직했고 족자도 인도네시아군이 6시간 동안 탈환할 수 있었다. 이 전투는 네덜란드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조직하는 데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1949 5, 로엠로옌 조약이 서명되었고 네덜란드는 공화국 정부지도자들을 석방키로 약속했다. 이 조약에 의해 1949 7월 하타와 수카르노도 풀려나 족자로 돌아왔다..

 


하타가 1949년 헤이크의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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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8월 하타는 인도네시아 사절단의 단장으로 헤이그에서 열린 원탁회의에 참가했다. 그리고 1949 11월 인도네시아 합주국의 성립이 비로소 합의되었다. 인도네시아 합주국은 공화국과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기간 동안 만든 15개 주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여왕은 여전히 상징적 국가수반인 것으로 동의했지만 수카르노와 하타도 여전히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건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1949 12월 마침내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부통령 하타와 네덜란드 여왕 쥴리아나가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하타는 인도네시아 합주국의 총리직을 계속했고 연방주 체계를 단일주 체계로 바꾸는 작업이1950 8 17일 공식적으로 발표될 때까지 그 전과정을 주관했다.


인도네시아는 독립 후 의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했고 대통령의 직위를 공식석상에서의 국가수반의 역할로 축소했다. 자연히 하타가 부통령으로서 일할 수 있는 여지도 없어져 버렸고 공교롭게도 그의 부통령 임기가 끝나던 중이어서 더 이상 연장되지 않았다.



하타와 수카르노


하타는 자신의 부통령 잔여임기 동안에도 정기적으로 대학에 초청되어 강연하곤 했고 지성에 대한 추구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아 경제와 노동조합을 주제로 한 많은 서적과 에세이를 남겼다. 경제의 핵심부분으로서의 노동조합에 대한 사상은 하타의 개인적 취향을 반영하는 영구적 프로젝트가 되어 있었고 하타는 이 사상을 열정적으로 전파했다. 1951 7월 노동조합의 날에 하타는 라디오를 통해 노동조합에 대한 연설을 했고 1953년에는 노동조합 사상계몽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인도네시아 노동조합협회에서 공로패를 받으며 인도네시아 노동조합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는다 .

 

노동조합 외에도 인도네시아 정부에게 있어 하타의 가장 큰 공로는 외교정책의 근간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1948년 하타는 두 바위의 대결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에 대해 언급했다. 하타는 인도네시아의 외교정책은 진영논리나 미국, 소련이 이해보다는 자국의 이해를 먼저 돌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타는 냉전체제 속에서 인도네시아가 스스로의 위상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것을 원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인도네시아가 국제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하며 그 방향의 우선권은 역시 자국의 이익에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하타의 요점들은 독립적, 적극적 외교방침이라고 명명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인도네시아 외교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1955년의 선거를 통해 새 헌법을 기초할 헌법의회와 국민대표회의(DPR)가 구성될 때 하타는 수카르노에게 편지를 보내 부통령 사임 의사를 밝혔다.


표면적으로는 하타가 퇴진할 개인적인 이유들을 제시한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대통령 직위가 의전적인 역할로 격하되면서 부통령 직책이 그 의미를 사실상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관련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는 하타의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물론 개인적 이유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하타는 날로 더해가는 수카르노의 독채정치와 권위주의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타는 수카르노가 독재의 길로 나아가지 않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나 수까르노는 그를 무시할 뿐이았다. 하타는 결국 수까르노가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상대방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손을 들고 말았다.


하타는 1956 12 1일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하타의 사임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비자바인들이 받은 충격은 실로 컸다. 비자바인들의 입장에서는 자바인들이 주도하는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오직 하타 홀로 비자바인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봤던 것이다.


하타의 사임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혁명정부(PRRI) 반군들에게도 분명한 영향을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주장하게 되었고 대학투쟁운동(뻐르메스타 = Permesta)에서는 지방분권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PRRI와 뻐르메스타는 중앙정부와의 교섭에서 수카르노와 하타의 재결합을 주요조건의 하나로 내걸기도 했다.


정부 밖에서 이제 하타는 수카르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가 수카르노를 비난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수카르노가 국가발전에 대한 헌신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혁명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함과 함께 이미 끝났으며 이제 정부역량은 국가의 발전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하타는 역설했다. 그러나 수카르노는 하타의 생각을 극명하게 거부했고 1959년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인도네시아의 혁명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며 하타에게 정면으로 반박했다.





1960년 출간한 우리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하타는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가 또 다른 형태의 독재체제라고 비난했고 수카르노는 즉시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그리고 그 해 샤리르의 정당도 해산시켰고 2년 후에는 내란음모의 혐의로 샤리르를 투옥하기에 이른다. 하타는 샤리르의 체포를 식민주의적이며 비이성적이라고 언급하는 편지를 개인적으로 수카르노에게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과거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혁명을 주도했던 삼인방은 이렇게 완전히 와해되고 있었다.



삼인방의 한 때


대통령의 권한이 수카르노에게서 수하르토로 넘어가던 격동기에 하타는 일선에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1970 6월 수카르노가 죽기 일주일 전 하타는 그의 오랜 침묵을 깼다. 하타는 수하르토에게 쓴 편지에서 수카르노를 공정한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그 대신 가택연금을 하고 있는 조치에 대해 크게 실망했음을 표명했다. 그는 1965년 월 30일 있었던 쿠데타 시도와 관련한 배후를 철저히 조사하고 수카르노에게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 쿠데타 시도와 관련한 수카르노의 무죄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타는 1970년 초, 당시 만연하고 있던 정치권의 부패문제에 대해 일련의 데모와 시위가 벌어지면서 수하르토 정권에 자의반 타의반 개입하게 된다 수하르토는 하타를 다른 몇몇 인사들과 함께 정부내의 부패감찰위원회의 위원으로 촉탁된 것이다. 이 위원회의 조사활동결과는 1970 7울 그 내용이 일부 유출되기 전까지는 철저한 비밀에 붙여졌다. 이것은 시위대들이 갖고 있던 정부에 대한 의심하던 부분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만연하던 고위 정치권의 부패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수하르토는 1970 8월 이 위원회를 해산했고 조사된 부패혐의들 중 단 두 가지 케이스만 다루기로 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더욱 부추겼다.



수하르토



나수티온


1978 7월 하타는 압둘 하리스 나수티온(Abdul Haris Nasution – 독립전쟁 당시 수디르만 장군의 부관, 훗날 인도네시아의 대장군이 됨)과 함께 헌정각성재 YLKB가 당초 예정했던 1979 1월의 첫 회합 자체가 성사되지 않도록 공작했다. 그러나 YLKB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79 8월 국민대표회의(DPR의회)의 의원들이 포함된 회합을 갖는 데 성공한다. 이 회합에는 인도네시아군의 요직인사들도 참여했다는 점에서 나름 중요성을 갖는다. 나수티온은 수하르토의 신질서(Order Baru) 정부가 국가이념인 빤짜실사(Pancasla)1945년 헌법정신에 충분히 입각하고 있지 않음을 질타했다.


하타는 1980 3 14일 세상을 떠났고 자카르타 외곽의 따나꾸시르(Tanah Kusir)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는 1986년 수하르토 정부에 의해 선언영웅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저서 


훈장 및 표창

기타

  • 그의 딸 므티아 파리다 하타(Meutia Farida Hatta)는 수실로밤방유도요노의 내각에서 여성인권부 장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녀는 현재 인돈네시아 정의통일당의 당수이다.
  • 하타는 인도네시아가 독립할 때까지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 수카르노하타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담고 있다.

 

모하마드 하타 약력

 

- 1902. 8. 12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서부자카르타 포트드콕(Fort de Kock) 출생

- 인도네시아 첫 부통령 (1945. 8.18 ~ 1956. 12. 1) : 당시 대통령은 수까르노. 차기 부통령은 1973년에 임명된 하멩꾸부워노 9(족자 술탄).

- 인도네시아의 3번째 총리 (1948. 1. 29 ~ 1950. 9. 5) : 전임자는 마디운사태로 처형당한 공산주의자 아미르 샤리푸딘(Amir Sjarifoeddin)이었고 후임자는 수산토 띠르또프로조*Susanto Tirtoprodjo).

- 인도네시아의 4번째 국방장관 (1948. 1. 29 ~ 1949. 8. 4) : 전임자는 아미르 샤리푸딘, 후임자는 하멩꾸부워노 9.

- 인도네시아의 4번째 외무장관 (1949. 12. 20 ~ 1949. 9..6) : 전임자는 아구스 살림(Agus Salim), 후임자는 모하마드 로엠(Mohammad Roem).

- 1980. 3. 14 향년 77세로 사망.

- 아내 라흐미 라찜(Rahmi Rachim), 자녀는 므티아 하타, 그말라 하타(Gemala Hatta), 할리다 하타(Halida Hatta) 3.

- 이슬람 수니파.

 







2015. 12. 13


(이 글의 대부분은 위키페디아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