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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민족주의적 로맨티스트 - 수까르노

beautician 2015. 12. 21. 21:00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수까르노(Soekarno) (1)

 

1.

 



인도네시아의 근대사에서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을 비켜 갈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수많은 책자들이 시중에 나와 있고 영화도 여러 편 나왔습니다. 그의 장녀 메가와띠가 수하르토 하야 후 혼란기에 하비비 대통령과 압두라흐만 와히드 대통령 다음으로 잠시 대통령 직에 올랐을 때 대체로 독재자로 분류되는 수까르노의 딸이었기에 당시 한국의 박근혜와도 여러 면에서 비교되며 조명된 바 있습니다.

 

수까르노는 1901 6 6일 수라바야에서 출생했고 인도네시아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던 1945년부터 1967년까지 23년간 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20년간 독재했던 박정희의 재임기간을 넘어섰지만 32년간 인도네시아를 철권통치한 자신의 후임 수하르토 대통령에 의해 그 기록은 간단히 깨집니다.

 

그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지도자들 중 단연 발군이었고 2차 세계대전을 맞아 일본군이 진주할 때까지 10년 넘게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료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중의 노력을 모아 일본군의 전쟁행위를 지원했지만 패전한 일본군이 무조건항복하자 1945 8 17일 모하마드 하타(Mohammad Hatta)와 함께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민첩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는 시도에 저항하며 국민들을 이끌었고 군사적, 외교적 노력을 통해 마침내 1949년 네덜란드로부터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인정받기에 이릅니다.

 

혼돈 속을 지나던 의회민주주의 시기에 수까르노는 1957교도민주주의라 칭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정치적 불안과 반란들을 종식시켜 인도네시아가 품고 있던 다양성과 지엽적 특성들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수까르노는 군과 이슬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공산당(PKI)를 비호하면서 인도네시아를 좌경화시켰고 소련과 중국의 후원을 받으며 반제국주의의 기치 아래 일단의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펼쳐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1965‘9 30일 사태를 거치면서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철저히 와해되어 버리고 수까르노의 정치생명은 치명상을 입어 1967년 마침내 하야하고 새로운 독재자 수하르토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건국의 영웅이었던 수까르노는 남은 인생을 가택연금상태로 지내다가 1970 6 21일 숨을 거둡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많은 뒷얘기들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경로를 따라 가 보는 것은 격동의 인도네시아 근대사를 독립운동 중심으로 되짚어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고 동시대 한반도의 상황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한 시도와 조사가 사실 이미 여러 번 이루어졌고 관련 논문들도 많이 나와 있지만 여기서는 좀 더 가볍게 수까르노를 다루면서 당시 시대상을 조명해 보려 합니다.

 

일각에서는 그의 이름을 아흐맛 수까르노(Achmat Sukarno)라고도 표기하지만 수하르토 대통령의 이름이 그냥 수하르토인 것처럼 수까르노 대통령의 이름 역시 수까르노일 뿐인데 당시 그런 식의 동양이름에 익숙치 않던 유럽독자들을 위해 한 영국인 기자가 임의로 작명해 마치 성과 이름이 따로 있는 것처럼 붙여 놓았던 이흐맛 수까르노가 아직도 이런 저런 자료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그냥 수까르노입니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수까르노의 아버지는 자바의 초등학교교사 귀족 라덴 수끄미 소스로디하르죠(Raden Soekemi Sosrodihardjo)였고 어머니는 발리의 브라만 계급으로 불레렝(Belelng)지역출신인 이다 아유 뇨만 라이(Ida Ayu Nyoman Rai)이었습니다. 수까르노는 1901 6 6일 네덜란드령 동인도 동부자바 수라바야의 빤데안로 4 40번지 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생사를 오가는 중병을 앓으면서 자바의 전통에 따라 이름을 수까르노로 개명했습니다.

 

1912년 현지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모조꺼르토(Mojokerto)의 네덜란드 초등학교에 재입학했습니다. 1916년 그의 아버지는 그를 수라바야의 네덜란드 대입준비학교에 보냈는데 거기서 수카르노는 민족주의자이자 이슬람연합인 사레깟이슬람(Sarekat Islam)을 세운 쪼끄로아미노토(Tjokroaminoto)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수까르노가 묶고 있던 하숙집의 주인이기도 했어요. 자카르타의 꾸닝안 도로를 북쪽으로 달려 그 끝의 다리를 건너면 나타나는 도로명인 호스 쪼끄로아미노토(HOS Cokroaminoto)는 그를 기념한 도로입니다.


 


 

1920년 그는 쪼끄로아미노토의 딸인 시티 우따리(Siti Oetai)와 결혼했고 1921년 반둥에 소재한 테크니쉐 호게스쿨(Technische Hogeschool : 지금의 반둥공대)에 진학해 토목과 건축을 공부했습니다. 반둥공대 시절 수카르노는 그곳 하숙집 주인인 사누시(Sanoesi)의 아내 잉깃 가르나시(Inggit Garnasih)와 로맨스에 빠지게 되는데 당시 잉깃은 수카르노보다 13살 연상이었습니다. 훗날 국가를 책임져야 할 대통령직에 오르게 되는 그는 아이러니컬 하게도 젊은 시절, 아니 평생을 걸쳐 자신의 아내와 여성들에게 대한 책임을 가볍게 보았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 같습니다. 1923 3, 수카르노는 시티 우타리와 이혼하고 잉깃과 결혼하는데 잉깃 역시 그 때엔 이미 전남편 사누시와 헤어진 후였어요. 하지만 그 결혼생활도 결국 파국을 맞고 잉깃과도 이혼한 수카르노는 파트마와티(Fatmawati)와 재혼하게 됩니다. 파트마와티는 메가와띠 전 대통령의 어머니이고 남부 자카라타 찌뻐떼(Cipete) 대로에 있는 파트마와티 병원은 이 분의 이름을 딴 것이기도 합니다.


짧은 기간에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해치운 수까르노의 여성편력은 그걸로 끝이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면을 수까르노의 스캔들로만 다 채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수카르노는 1926 5 25일 학위를 받고 반둥공대를 졸업한 후 그 해 7월 대학 친구읜 안와리(Anwari)와 함께 반둥에서 수카르노와 안와리라는 설계 및 시공회사를 설립합니다.





수까르노는 반둥에 지금도 서 있는 쁘레앙어(Preanger)호텔의 건물보수공사에서 저명한 네덜란드 건축가 찰스 프로스퍼 볼프 슈마커(Charles Prosper Wolff Schomaker)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는 오늘날의 반둥의 가똣수브로또 거리, 빨라사리 거리, 데위사르티카 거리 등에 많은 민간 주택들을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수까르노는 훗날 대통령이 된 후에도 건축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자카르타에서 독립선언기념탑과 거둥뽈라(Gedung Pola – 뽈라 건물) 주변지역과 스마랑의 청년기념비(Tugu Muda), 말랑의 광장기념탑(Alun-alun monument), 수라바야의 영웅기념비 등을 설계했으며 중부 깔리만탄의 빨랑까라야(Palangkaraya) 신도시를 직접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잘 교육받은 몇 되지 않은 엘리트들 중에서도 여러 언어에 능통한 수까르노는 특히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고향방언인 자바어를 비롯해 순다어, 발리어 등의 인도네시아 주요 방언들은 물론, 네덜란드어에 특별히 능했고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 일본어 등을 큰 어려움 없이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언어들은 그가 HBS 학교 재학시절에 배운 것들이었는데 여기에 한 번 본 것은 사진 찍은 듯 명료하게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과 두뇌의 영민함이 그의 외국어 구사능력을 크게 북돋았던 것입니다.

 

그는 건축에서뿐 아니라 물론 정치에서도 극히 현대적이었습니다. 그는 자바의 전통 봉건주의를 퇴행적 행태라 여겨 경멸했고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에게 엎어져 착취당하는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서구열강의 제국주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악행이었고 네덜란드의 착취로 인해 인도네시아의 심각한 빈곤과 열악한 교육문제가 발생한다고 여겼습니다. 훗날 수까르노는 인민들 사이에 이러한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의복과 수도(결과적으로 자카르타)의 도시계획과 사회주의적 정치철학에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담아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팝뮤직에 있어서만큼은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지 자기의 유명한 여성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름을 날렸던 팝밴드 꾸스 버르사우다라(Koes Bersaudara)를 퇴폐적 가사를 채용했다는 혐의로 투옥시키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수까르노에게 있어 현대적이라는 것은 특정 민족과 인종을 가리지 않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방식을 보이며 동시에 반제국주의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수까르노는 쪼끄로아미노토에게서 민족주의사상을 먼저 접했고 그 후 반둥에서 대학 시절 유럽, 미국,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종교정치적 인물들의 다양한 사상과 접하면서 자기 자신만의, 인도네시아식 자급자족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철학을 태동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마르해니즘(Marhaenism)이라 칭했는데 이는 남부 반둥에서 만난 마르핸이란 농부의 이름을 딴 것이었어요. 마르핸이 얼마간의 자기 땅을 경작하여 자기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충분한 수확을 거두던 모습에 착안했던 것입니다. 또한 수까르노는 대학에서 네덜란드 학생들이 지배하던 기존의 스터디클럽에 대항하여 인도네시아 학생들을 조직해 스터디클럽인 알게메네 수투디클룹(Algemeene Studieclub)이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수까르노는 네덜란드인들이 인도네시아에서 향유하는 모든 것들을 당연히 인도네시아인들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그의 젊은 시절의 행보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27 7 4일 수까르노는 알게메네 스투디클룹의 친구들과 함께 독립성향의 정당인 인도네시아 민족당(Partai Nasional Indonesia : PNI)을 발족했고 수까르노는 스스로 그 당의 첫 당수가 되었습니다. PNI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지지하고, 인도네시아인들의 생활을 위협, 악화시키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배격했습니다. 또한 PNI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우는 대신 세속주의를 선택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 내의 수많은 인종들간의 단합을 촉구해 통일된 인도네시아의 성립을 희구했습니다. 수까르노는 또한 일본이 서구열강들을 대항해 개전하면 인도네시아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 내다 보았습니다. 1920년대 초 쪼끄로아미노토의 사레캇이슬람이 해체되고 1925년의 반란실패로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몰락하자마자 PNI는 획기적으로 더욱 많은 지지자들을 그 이탈자들로부터 끌어 모을 수 있었는데 그들 중엔 인종차별정책과 속박이 근간을 이루던 네덜란드 식민주의의 정치적 시스템이 인도네시아인으로부터 박탈해 간 자유와 기회를 되찾고자 열망하는 고학력 젊은이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PNI의 활동은 네덜란드 총독부의 관심을 끌게 되어 수까르노의 연설이나 회합은 총독부 비밀경찰(폴리티케 인릭팅겐 딘스트 - Politieke Inlichtingen Dienst/PID) 공작원들에 의해 자주 방해를 받았고 1929 12 29일 마침내 수까르노와 PNI의 주요 당직자들이 총독부에 의해 자바 전역에서 펼쳐진 일련의 기습적 단속을 통해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수까르노는 족자를 방문하던 중 체포되었고 반둥의 란드라드(Landraad) 법원에서 1930 8월부터 12월 사이에 벌어진 재판에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일련의 연설들을 토해내는데 이 연설은 인도네시아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30 12월 수까르노는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반둥의 수까미스낀(Sukamiskin) 형무소에 수감됩니다. 그러나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물론 네덜란드 본국에서도 자유주의자들이 그의 연설에 열광하면서 이를 언론이 광범위하게 다루었고 수까르노는 1931 12 31일 형기보다 훨씬 앞서 석방됩니다. 이 사건은 수끼르노가 인도네시아 전국무대에 민족영웅으로서 데뷔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수감되어 있던 동안 PNI는 총독부의 압력과 내홍을 겪으며 지리멸렬하여 원래의 PNI가 네덜란드 당국에 의해 해산된 후 PNI의 당원들은 두 개의 정당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대규모 궐기를 촉구하는 수까르노의 동료 사르또노(Sartono)가 주도하는 인도네시아당(빠르띤도 : Partindo)과 모하마드 하타와 수딴샤리르가 주도하는 인도네시아 민족교육당(Pendidikan Nasional Indonesia :PNI Baroe)이 그들이었습니다. 하타와 샤리르는 모두 민족주의자들로서 막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해외유학파들이었고 무지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근대적 교육을 제공해 네덜란드 식민세력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우수한 인재들을 키워내자는 장기적 전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수까르노는 이 두 개의 당이 다시 하나의 통일된 민족주의 전선을 구축하도록 촉구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자 그의 선택은 1932 7 28일 빠르띤도의 당수가 되어 즉각적으로 대규모 궐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타가 주장하는 엘리트 기반의 장기적 저항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타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자신의 생전에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반면 수까르노는 무력을 조직해 사용해야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정치의 속성을 하타가 간과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수카르노는 자신과 당에 경제적 도움이 되기 위해 다시 건축사업을 병행하기로 마음먹고 수까르노와 로스노라는 회사를 열었습니다. 또한 그는 당기관지인 피키란라잣 (Fikiran Ra'jat)에 사설도 실었습니다. 수까르노가 그렇게 반둥에 기반을 두고 있던 동안 자바 전역을 순회하며 다른 민족주의자들과 인맥을 쌓았는데 이러한 활동이 또 다시 총독부 비밀경찰의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그는 1933년 중반 인도네시아의 독립쟁취를 위하여라는 일련의 출판물을 간행했다가 이로 인해 그는 1933 8 1일 자카르타에서 모하마드 후스니 탐린(Mohammad Hoesni Thamrin)을 방문하던 중 네덜란드 경찰에 의해 다시 체포됩니다.

 

자카르타 중앙통인 수디르만 장군로 (Jalan Jendral Sudirman)와 호텔인도네시아 로터리에서 연결되는 M.H. 탐린 도로는 이 모하마드 후스니 탐린을 기념한 도로입나다. 1984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유복한 가정에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총독부에서 구청장을 역임했고 탐린 역시 총독부 여러 부처의 관료로 있다가 선박회사 근무, 자카르타 부시장을 거쳐 볼크라드의회에 의원으로 선출됩니다. 수까르노와 하타가 일본의 힘을 빌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전망했던 것처럼 탐린은 그 출생부터의 속성 상 네덜란드와의 협력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의회의 민족주의분파들을 모아 대인도네시아당(Partai Indonesia Rata : Parindra 빠린드라)를 결정했고 나아가 자신의 빠린드라당을 포함한 국내 8개 민족주의단체들을 연합해 더욱 거대한 인도네시아 정치연대’(GABI)를 결성하여 주류정치권 한 복판에서 네덜란드에 준법투쟁을 벌이다가 1941년 일본의 침공이 임박하자 평소 일본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와 함께 그 동안 박힌 정치적 미운 털도 작용하여 전격 가택연금을 당한 상태에서 세상을 등집니다. 수까르노가 그를 만나려 했던 것은 1933, 아직도 탐린이 정치권에서 네덜란드를 향해 큰 목소리로 인도네시아의 권익을 부르짖던 시절이었습니다.

 


 

다시 수까르노의 얘기로 돌아옵니다. 이번만큼은 수까르노에게 정치적 연설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강경파 주지사 존키어 보니파시우스 코르넬리스 드 용게(jonkheer Bonifacius Cornelis de Jonge)는 그의 긴급특권을 사용해 수카르노를 재판 없이 전격적으로 원격지유배를 보내 버립니다. 그래서 수까르노는 1934년 잉깃 가르니시를 포함한 그의 가족, 모두와 함께 플로레스섬 엔데(Ende)라는 머나먼 도시로 보내집니다. 플로레스에서의 이 시기에 수까르노는 운신의 폭이 크게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극장을 설립하며 나름대로의 활동을 했는데 그 어린이극장 멤버들 중엔 훗날 정치가가 되는 프란스 스다(Frans Seda)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플로레스에 말라리아가 창궐하자 네덜란드 총독부는 수까르노와 그 가족들을 1938 2월 수마트라 서쪽 해변의 벤쿨렌(Bencoolen – 지금의 벙꿀루 Bengkulu)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벙꿀루에서 수카르노는 지역 무하마디아 조직의 수장인 하산딘(Hassan Din)과 교분을 쌓았고 무하마디아가 소유한 현지 학교들에서 종교학습지도를 허락 받았습니다. 그곳 학생들 중엔 당시 15세였던 파트마와띠(Fatmawati)도 있었는데 그녀는 하산딘의 딸이었고 나중에 수까르노와 로맨스에 빠지게 됩니다. 그놈의 로맨스...  아무튼 수까르노는 잉깃 가르나시가 전남편과의 결혼생활을 포함해 20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던 점을 들어 자신의 불륜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언변에 능한 그가 어떤 말로 듣는 이들의 귀를 현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물만 본다면 참 파렴치하다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수카르노가 그렇게 벙꿀루 유배지에서 로맨스를 즐기던 1942년 일본이 동인도 열도를 침공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2015.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