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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 부역하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 본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까르노 (Soekarno) (3)
일본군은 현지 엘리트들의 지위를 보장해 줌으로써 그들을 이용해 일본산업과 전쟁수행을 위한 물자를 동인도제도에서 충당하려 했고 인도네시아의 지배계급과 정치가들은 대체로 일본군에게 협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까르노 역시 기꺼이 일본을 지원하는 대신 그것을 인도네시아 대중들에게 민족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애국이라 생각한 것이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제국주의의 주구가 된 소위 민족지도자들이 그런 순진하고도 무책임한 생각을 가지고 수많은 동포들을 적극적으로 등떠밀어 일본군의 전선에서 총알받이가 되고 동남아 강제수용소의 전범이 되고 남태평양 이를 모를 섬에 정신대 성노예가 되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가게 만든 바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일본군은 전쟁물자와 인력조달을 위해 노동력과 자원을 확보해야 했으므로 인도네시아 인민들의 저항을 예방하고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수까르노를 ‘3A 운동’의 수장으로 삼았습니다.
3A 운동이란 "Jepang Cahaya Asia"(일본은 아시아의 등불), "Jepang Pelindung Asia"(일본은 아시아의 수호자), "Jepang Pemimpin Asia"(일본은 아시아의 맹주) 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일본제국의 프로파겐다로 시미즈 히토시가 창안했고 훗날 인도네시아 부총리와 특별대사를 지낸 샴수딘이 이 운동의 첫 회장이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호감을 고취할 목적으로 시작한 이 운동은, 그러나 수까르노가 수장이 되고서도 별다는 성과를 보이지 않아 1943년 3월 민족역량본부 (Poesat Tenaga Rakjat : POETERA = PUTERA)라는 새로운 조직으로 대체되었고 수까르노, 하타, 끼하자르 데완따라(Ki Hadjar Dewantara), KH 마스만슈르(KH Kas Mansjoer) 등이 그 지도부를 구성했습니다.
PUTERA의 목적은 로무샤인력 징용과 물자징발에 대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친일, 반서방정서를 조장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수까르노는 ‘Amerika kita setrika, Inggris kita linggis’ (미국은 털어버리고 영국은 발라버리자)라는 자극적인 구호를 만들어 반서방정서를 더욱 부추겼고 이들 저명한 민족주의자들의 열정적 연설과 중량감 넘치는 존재감으로 지원함으로써 인도네시아인 수백만명을 어렵지 않게 징집했는데 특히 자바지역에서 강제징용된 사람들을 ‘로무샤’라 불렀습니다. 로무샤 징용과 관련한 수까르노의 역할은 두고두고 그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습니다.
개인의 사는 지역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일제강점기의 경험은 큰 편차를 보이는데 전쟁수행을 위한 핵심자원을 가진 지역에선 주민들이 고문과 위안부징용, 임의체포와 처형 같은 전쟁범죄에 쉽게 노출되었던 반면 자바지역에서는 민족지도자들의 감언이설에 등떠밀려 일본의 전쟁을 돕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로무샤’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습니다. 이들은 군사용도의 기지나 도로건설을 위해 동인도제도의 군사적 거점들은 물론 버마 등외국에도 파송되었는데 버마와 샴(태국)을 잇는 철도와 사께티(Saketi)와 바야(Bayah)를 잇는 철도 등은 로무샤들이 흘린 피와 거기 뭍힌 뼈로 건설된 대표적 프로젝트들이었습니다. 로무샤들에 대한 처우는 매우 열악해 많은 이들이 가혹행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자바섬에서만 4백만에서 1천만명이 징용에 끌려나갔고 27만여명이 동남아 다른 지역으로 차출되었는데 그중 불과 5만2천명만이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징용지에서의 사망률은 80%를 넘나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강제노역에 내몰린 연합군 전쟁포로들과 유럽인 피억류자들의 사망률을 크게 웃도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진주 초기에 연합군 포로들을 포로수용소에 감금했지만 그들 중 네덜란드 KNIL부대 소속 인도네시아인 장사병들은 대부분 석방해 주었습니다. 한편 8만여명에 달하는 네덜란드군 중심의 연합군포로들 외에도 유럽계 민간인들과 일부 화교 등 피억류자 10만여명은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군이 진주하기까지 몇 년동안 수용소에서 노역에 시달렸는데 지역과 따라 사망률은 13%에서 30% 사이를 오르내렸던 것입니다.
한편 일본군정 하에서 수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기아에 허덕였고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나가야 했습니다. 훗날 UN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강점기 동안 유럽민간인 피억류자들 중 3만여명을 포함해 4백만명 가량이 인도네시아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네덜란드 정부 보고서에는 일본군 전용 창녀촌에서 일하던 200-300명의 유럽여인들 중 최소 65명 은 명백히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 막바지에 일본군의 식량징발은 자바전역을 심각한 기근상태에 빠뜨려 1944-1945년 사이에만 백만명 넘는 아사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물자측면에서도 자바섬에 있던 철도와 자재, 생산공장들은 모조리 뜯기고 해체되어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일본의 전쟁물자로 소진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기아선상에 내몰린 인도네시아인들은 얼마간의 돈과 음식이라도 얻기 위해 뭔지도 모를 일들을 무조건 해야 했고 그렇게 로무샤가 되었습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수까르노는 이 모든 것을 인도네시아가 훗날 독립을 얻기 위해 꼭 치러야 할 부득이한 희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PETA와 헤이호(Heiho)의 조직에도 앞장서 일본 라디오를 통한 연설과 자바/수마트라 전역 순회연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이 창설한 PETA( 조국수호단 - Pembela Tanah Air)는 자원병으로 이루어진 육군부대로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청년들에게 군사훈련과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패망해 가는 일본제국의 군사력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1945년에서 1949년 사이 벌어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네덜란드군과 맞서 싸우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중대한 전력자원이 되었고 인도네사아 정규군 창설의 위한 모체가 된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수까르노의 노력에 힘입어 1945년 중반 PETA 12만명을 포함, 헤이호, 의용군 등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자원하거나 징집된 사람들은 2백만명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수까르노는 이렇게 일본군정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1943년 11월 10일 하타와 함께 17일간의 일정으로 일본을 다녀오게 되는데 거기서 히로히토 일본천황에게 훈장을 받고 도조 히데키 당시 일본총리의 만찬에도 참석합니다.
그 와중에 수까르노는 마침내 잉깃과 이혼하기에 이릅니다. 원래 수까르노는 이슬람이 허용하는 네 명까지의 처 중 두번째 처를 얻는 형식을 취하려 했지만 잉깃이 일부다처제를 거부했기때문이라는 것이 이혼의 표면적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잉깃은 졸지에 이슬람의 규범을 멸시하는 여자가 된 셈입니다. 수까르노는 그의 정치력과 처세술을 엉뚱한 곳에도 유감없이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잉깃은 수까르노로부터 반둥에 집을 얻어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1943년 수까르노는 마침내 파트마와티와 결혼합니다. 그들은 자카르타의 동부 뻐강사안로 56번지의 저택에 살았는데 그곳은 원주인이던 네덜란드지주에게서 일본군이 빼앗아 수까르노에게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이 저택은 1945년 독립선언문이 낭독되는 역사적인 장소가 됩니다.
수까르노가 그렇게 일본군에게 협력하며 인도네시아인들을 선무했다고 해서 인도네시아인 모두가 일본에게 협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저항과 반란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일본점령군은 인도네시아를 세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수마트라는 육군 25군, 자바와 마두라는 육군 16군, 그리고 보르네오와 셀레비스를 비롯한 동부 도서지역은 해군 제2 남방함대의 지휘권 밑에 두고 처음엔 16군과 25군의 사령부를 싱가폴에 설치해 말레이 반도도 통제권 안에 두었다가 1943년 4월 작전지역이 수마트라로 한정된 25군이 부낏띵기(Bukittinggi) 지역으로 사령부를 옮기자 16군은 자카르타에, 제2 남방함대는 마카사르에 각각 사령부를 설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마무라 중장의 16군이 통제한 자바지역에선 민족지도자들을 지원하며 대체로 유화정책을 펼쳤지만 25군과 제2 남방함대는 현지인에게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자바의 인도네시아인들이 대체로 협조적이었지만 훗날 인도네시아의 초대 총리를 지내는 수딴 샤리르는 지하 학생운동을 조직해 일본군과 대항했고 좌익인사인 아미르 샤리푸딘도 항일전선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네덜란드 정부는 1942년 초 그에게 25,000 길더를 주며 그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연계를 통해 일본군에 대한 지하저항운동을 조직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1943년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수까르노의 구명운동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에 대한 수까르노의 공로가 매우 컸던 만큼 그의 한 마디로 일본군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미르가 가지고 있던 수라바야 그룹 말고도 적극적으로 연합군들 편에 서서 항일활동은 한 사람들 중엔 화교, 암본인, 마나도인들이 많았습니다.
남부 깔리만탄에선 일본군에 대항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이 네덜란드 측과 항일반란을 공모한 전모가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1943년 9월 남부 깔리만딴의 아무따이(Amutai)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이슬람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1943년 세르당 술탄왕국(Sultanate of Serdang)의 왕족이었던 떵꾸 라흐마둘라(Tengku Rachmadu'llah)를 참수했고 1943년에서 1944년에 걸쳐 벌어진 뽄띠아낙 사태(만도르사태 Mendor Affair 라고도 함)에서 일본군은 일본군정을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깔리만탄에 거주하던 말레이 엘리트들과 아랍인, 화교, 자바인, 마나도인, 다약족, 부기스족, 바딱족, 미낭까바우족, 네덜란드인, 인디아인 및 유라시아인들은 물론 모든 말레이족 술탄들을 대거 체포해 학살했습니다.
일본군은 뻐무다 무하마디아(Pemuda Muhammadijah 무하마디야 청년단)와 같은 단체들도 일본군정을 전복하고 ‘서부 보르네오 인민공화국’(Negara Rakyat Borneo Barat )을 건설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하여 이 반란의 주모자로 술탄을 지목했고 25명에 달하는 귀족들과 뽄띠아낙 술탄의 친인척들, 그리고 많은 저명인사들을 반란 혐의로 만도르(Mandor)에서 모두 처형했습니다. 뽄띠아낙을 비롯해 12개 지역의 술탄들도 모두 일본군에 의해 처형됐는데 이들은 후세에 의해 ‘열 두개의 보석’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자바섬에서는 일본군이 샤리프 모하마드 알카드리((Sjarif Mohamed Alkadri)의 아들인 샤리프 압둘 하미드 알카드리(Syarif Abdul Hamid Alqadrie – 훗날 술탄 하미드 2세)를 투옥했습니다. 그는 뽄디아낙 사태에서 무차별적인 학살을 당한 술탄 가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자였습니다. 일본군은 뽄띠아낙에서 술탄 모하마드 알카드리의 친척남자 28명 모두를 참수했는데 그들 중엔 차기 술탄도 포함되어 있었고 1944년 후반에 이 사건에서 자신의 잔혹함을 한껏 뽐냈던 일본인 나카타니를 다약족들이 살해하자 일본군은 그 대가로 뽄띠아낙 술탄의 넷째 아들 아궁왕자와 또다른 아들인 아디빠티 왕자를 공개적으로 참수했던 것입니다.
일본군이 깔리만탄에서 말레이 귀족들의 씨를 말리자 다약족 엘리트들의 일어나 그 빈 자리를 채웠습니다. 1945년 5월과 6월엔 일단의 일본인들이 상가우지역에서 다약족이 일으킨 반란에서 목숨을 잃었고 이렇게 다약족과 일본군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가운데 1945년 4월부터 8월에 걸쳐 ‘마장부락전투’가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42년 2월 네덜란드 총독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던 아쩨의 이슬람 성직자들은 1942년 11월 일본군에게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슬람학자 떵꾸 압둘자릴(Tengku Abdul Djalil)을 검거하기 위해 바유 소재 톳쁠리엥(Tjot Plieng) 부락의 머스짓 회교사원을 새벽 기도시간에 습격한 일본군을 격퇴한 주민들은 11월 10일 블로감뽕뜽아(Puloh Gampong Tengah)와 11월 13일 톳쁠리엥에서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들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며 세 번의 공격을 맞아 싸웠습니다. 세 번 째 공격에 머스짓이 점령되었지만 압둘자릴은 탈출할 수 있었고 목숨을 잃은 일본군 18명에 대한 보복으로 100-120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도주한 압둘자릴도 기도하던 중 추격해 온 일본군에게 사살당합니다. 그러나 불굴의 아쩨인들은 1945년 5월에도 다시 한 번 일본군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납니다.
비단 깔리만탄과 아쩨 뿐 아니라 거의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일본군과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는데 싱아빠르나(Singaparna), 인드라마유, 비악(Biak), 야뻰슬라딴(Yapen Selatan), 파푸아 등에서도 줄을 이었고 특히 PETA 군의 무장반란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1945년 2월 29일 동부자바의 블리타르(Blitar)에서 쇼단쬬(중대장) 수쁘리야디, 무라디, 이스마일 등이 도를 넘은 곡물징발과 헤이호 및 로무샤의 징집에 반발해 평소 고압적인 태도로 인도네시아 병사들을 무시하던 일본군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사건은 자바섬에서 벌어진 PETA군 반란 중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진한 인도네시아 장교들은 일본군 카타기리 대령의 협상요구에 응했다가 체포되어 네 명은 총살당하고 다른 세 명은 극심한 고문으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보다 앞서 1944년 11월에도 아쩨의 의용군 장교 뜨꾸 하미드(Teugku Hamid)가 반란을 일으켰고 1945년 4월 21에도 찔라짭에서 분단쬬(분대장) 꾸사에리(Kusaeri)가 동료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당시 PETA 다이단쬬(대대장)였던 수디르만 장군에 의해 진압되기도 했습니다. 꾸사에리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형은 집행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은 도시에선 수까르노와 같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후원하여 새로운 단체들을 조직하며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시키면서도 외곽에서는 이렇게 철저한 강압으로 일관했고 그 누구도 가혹한 물자징발과 인력징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일본군은 국가명으로서 ‘인도네시아’란 단어의 사용을 금했고 인도네시아의 적백기 사용 역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단체나 정부조직에 대한 어떠한 협의, 조직, 예측도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 일본의 원래 속내는 1943년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독립을 지원하는 대신 인도네시아의 도서들은 일본제국에 편입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곡창지대와 양질의 유전지대를 함께 가진 나라는 세계에서도 인도네시아 말고는 몇 되지 않았으니 누군들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1944년말 전황이 불리해지기 직전까지도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진심으로 심각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1942년초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며 축배를 들었던 일본군은 불과 몇 개월 후인 그 해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등 일본해군의 대표적인 항모 네 척을 잃으며 해군전력에 돌이킬 수 없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수세로 돌아선 후 1944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그 해 9월 7일 쿠니아키 코이소 당시 일본총리가 비로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짜만은 못박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연합군이나 주축국이 식민지국가들의 독립을 약속한 경우는 비단 인도네시아만이 아닙니다. 동남아와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많은 민족들이, 약속받은 조건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선과 후방에서 독립약속을 해준 나라의 승리를 위해 피를 흘리며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것입니다.
일본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독립약속 역시 일본의 전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독려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인도네시아 독립지원 프로그램이 실제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측 사료에 따르면 수까르노의 적극적인 부역에 대한 보상이라는 측면이 크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수까르노를 ‘최고위급 부역자들의 수괴’라고 간주했던 것이고 전쟁이 이대로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 연합군이 인도네시아에 상륙한다면 일본에 부역한 수까르노와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최악의 재앙이 될 터였습니다.
1945년 4월 29일 필리핀이 미국의 수중에 떨어지자 16군 사령관 이마무라 중장의 후임 쿠마키치 하라다 중장은 일본주도의 ‘독립준비조사회’(Badan Penjelidik Oesaha-oesaha Persiapan Kemerdekaan Indonesia :BPUPKI)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것은 준의회의 성격을 띠었고 인도네시아 대부분 민족들이 각각 보내온 67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수까르노는 이 BPUPKI의 의장으로 임명되어 미래 인도네시아 국가기틀의 준비를 논의했습니다. BPUPKI의 수많은 민족과 파벌들을 연합시킬 보편적이고도 수용가능한 플랫폼을 마련하기 위해 수까르노는 인도네시아인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여겼던 사상들을 빤짜실라(Pancasila)라는 이름의 다섯가지 원칙으로 함축시켜 1945년 6월 1일 볼크스라드 건물(Volksraad building – 지금의 빤짜실라 건물 Gedung Pancasila)에서 열린 BPUPKI 회의에서 발표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민족주의. 인도네시아는 예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총망라하는 사방(Sabang)에서 머라우께(Merauke)까지의 지역 모두를 포괄하는 단일 연합국가이다.
2. 국제주의. 인도네시아는 인권을 존중하고 세계평화에 이바지해야 하며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신봉했던 나찌의 광신적 애국주의 파시즘에 빠지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3. 민주주의. 수까르노는 서방의 자유주의와는 분명히 구별되어 민의를 중시하는 인도네시아식의 민주주의가 인도네시아인들의 피 속에 내재해 있다고 믿었다.
4. 사회정의.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 관점의 민중사회주의가 갖는 사회정의는 네덜란드인들과 화교들이 모든 경제적 결과물을 독점했던 식민지 시대와는 달리 인도네시아인들 모두에게 동등한 경제적 몫을 제공하려는 의지를 의미한다.
5. 신을 향한 신앙. 모든 종교는 동등한 지위를 누리며 종교적 자유를 보장한다. 인도네시아인들이 영적, 종교적인 민족이며 그 핵심은 다른 종교적 신념들을 포용하고, 배타하지 않는 것에 있다.
6월 22일 BPUPKI의 민족주의 이슬람파벌은 9명으로 이루어진 소위원회 구성을 요청해 수까르노의 사상을 보다 이슬람적이고 형이상학적 다섯 항목으로 묶고 손질해 발표했는데 이 문서는 오늘날 자카르타 헌장(Piagam Jakarta)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1. 오직 하나 뿐인 유일신에 대한 믿음과 이슬랍법에 입각한 무슬림들의 의무
2. 공정하고 계몽적 인본주의
3. 통일된 인도네시아.
4. 내적 지혜와 민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
5. 모든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사회정의
이슬람파벌의 압력으로 첫번째 원칙에 무슬림의 의무를 강조하는 샤리아법이 도입되었지만 1945년 8월 18일 발효되어 1945년 헌법에 포함된 빤자실라 최종본에 이 샤리아법의 언급이 삭제된 것은 인종과 종교의 다양성을 그 특성으로 하는 인도네시아의 국가적 화합을 추구하는 측면에서였고 이슬람파벌의 강경한 반발에 맞서 이를 끝내 관철한 것은 모하마드 하타였습니다.
1945년 8월 7일 일본군정은 BPUPKI보다 좀 더 작은 규모의 인도네시아 독립위원회(Panitia Kemerdekaan Indonesia : PPKI)를 승인하는데 이 21명 규모 위원회의 임무는 미래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정부골격을 기획하는 것이었습니다. 8월 9일 PPKI의 수뇌부인 수까르노, 하타, KRH 라지만 위조디닝랏 등 4명은 일본군 남방파견군 총사령관인 테라우치 히사이치 육군원수의 호출을 받아 사이공 북방 100km 지점의 달랏(Da Lat)에 초청되고 여기서 테라우치 원수는 더 이상 일본의 간여없이 인도네시아 스스로 독립준비를 시작할 권한을 수까르노에게 부여합니다.
극진한 만찬이 있은 후 수까르노 일행은 8월 14일 다시 자카르타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지만 테라우치 원수 등 남방군 사령부는 수까르노 일행을 만날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일련의 핵폭탄공격을 받었고 일본이 항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테라우치는 최후의 순간까지 생색을 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본 정부와 테라우치 원수의 배려 때문이라고 감읍하며 귀국 비행기에서도 어깨에 놓인 인도네시아 독립주도의 무거운 사명감에 감격하고 있던 수까르노는 일본에게 그렇게 끝까지 놀아나고 있었습니다.
2015.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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