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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디르만 장군 (Jendral Sudirman)

beautician 2015. 9. 10. 03:24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 수디르만 장군 (Jendral Sudirman)

 

 

자카르타에서 운전하다 보면 그 어려운 도로명 때문에 머리가 아파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쪼로아미노또 거리나 가똣수브로토, 하시마사리, 꺄이타파 거리 등등 발음부터 힘들어서 누구에게 전화로 길을 알려주는 것도 왠지 도전!’ 소리부터 외치고 해야 할 것 같고 중간에 지인 전화찬스같은 걸 써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게 되죠. 그런데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그 도로명 중 상당수가 역사상의 위인이나 유명한 전설 속의 인물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들이고 특히 인도네시아의 영웅들, 특히 외세와 맞서 싸운 항전과 독립의 아이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한국도 1945년 해방 당시 즉시 왜색을 떨쳐버리고 친일세력들을 청산했다면 오늘날의 서울거리엔 당시 일본에 맞서 봉기하여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 바쳤음에도 허무하게 잊혀져 버린 독립투사들과 영웅들이 좀 더 많은 도로이름들을 차지하고 있었겠죠. 세상사 사필귀정이란 말은 진실이라기보다는 한낱 희망사항에 불과한 현실에서 일제 강점기 당시 침략세력에 빌붙었던 세력이 해방 후 오늘날까지 위세를 떨치고 독립전쟁의 최전방에서 일제에 항거했던 열사와 투사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 가고 있는 작금의 한국은 언제나 한 수 아래의 후진국으로만 보았던 인도네시아가 독립영웅들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한 수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그 수많은 거리들 중에서 자카르타 도시 한 복판에 있는 잘란 젠드랄 수디르만(Jl.Jenderal Sudirman) , 수디르만 거리(직역하자면 수디르만 장군로)는 마천루 빌딩들과 각 은행 본점, 외국회사 지점들이 밀집해 있는 그야말로 자카르타의 최중심부, 아니 어쩌면 인도네시아의 최중심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단 자카르타뿐 아니라 반둥, 수라바야, 메단, 마카사르 등은 물론 인도네시아 전역의 도시들은 나름대로 중심가에 수디르만 장군의 이름을 딴 거리를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 사이에 수디르만 장군의 지명도는 어쩌면 한국의 이순신 장군 정도인 것 같습니다.

 

자카르타의 수디르만 거리에는 몇 년 전 수디르만 장군의 동상도 세워져 긴 코트에 어딘가 불편한 듯 지팡이를 짚은 모습으로 호텔인도네시아 로터리를 향해, 하지만 어찌 보면 하필 그 너머 직선거리에 있는 대통령궁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습니다. 이 거리에 즐비한 상사나 대기업 지점으로 발령받은 지사장이나 지사원들은 인도네시아어에도 별 관심이 없는데 인도네시아 근대사를 돌아보며 수디르만 장군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 하길 기대하기는 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유명한 관광지에 끌려 온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유명한 유적지가 있는 것도 아닌 자카르타에 오직 돈 벌러 온 사람들에게 경제활동 외의 다른 것을 기대하기는 아무래도 힘들겠죠. 하지만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데 그래도 기어이 얘기해주겠다고 덤비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사실 요즘 보면 그런 사람이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아 외롭지는 않습니다.

 

라덴 수디르만(Raden Sudirman) 1916 1 24일 네덜란드령 동인도, 즉 인도네시아의 쁘루볼링고(Purbolinggo)에서 태어났습니다. 1950 1월 고질이던 폐결핵으로 사망하던 당시 그는 불과 34세였는데 이미 별 셋의 중장계급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가 수디르만 장군(대장)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의 사망과 함께 일계급 진급이 추서되었기 때문이고 수하르토 정권 막바지였던 1997년에 이르러서는 인도네시아 전육군 총사령관으로 다시 추서되기에 이릅니다. 한국전쟁 당시의 백선엽 장군처럼 생전에도 고속 진급하여 청년 장군이 되었던 그는 죽은 후에도 진급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인도네시아 국민치안대(TKR – Tentara Keamanan Rakyat)의 사령관이었고 훗날 인도네시아 정규군의 첫 총사령관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그는 찔라짭(Cilacap)에서 삼촌 손에 키워졌는데 무하마디야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었고 이슬람에 대한 열정으로 그가 속한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커가게 됩니다. 그는 교원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하지만 1936년부터 교사로 일하기 시작하여 무하마디야 계열 초등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이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수디르만은 일본의 지원을 받는 조국방위대(PETA – Pembela Tanah Air)에 합류해 1944년엔 반유마스 지역에서 대대장의 직위에 오릅니다.

 

이 부분은 그가 친일행위에 가담한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친일행적에 대한 평가는 한국의 그것과 많은 차이가 납니다. 한국의 경우 무려 36년간의 일제 강점기를 거친 끝에 그간의 울분과 원한만 보더라도 가장 처참하고 단호하게 처단되었어야 할 친일파들이 미군정에 발탁되어 더욱 더 그들의 특권을 공고히 하면서 한국 근대사를 뒤틀어버리고 말았지만 인도네시아의 경우 일본의 침략은 불과 3년뿐이었고 그 이전 350년간 네덜란드의 강점기가 있었으니 인도네시아의 독립이란 사실상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기보다는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측면이 더욱 크며, 당시 아직 무장해제되지 않았던 인도네시아 주둔 일본군들, 또는 개별 일본인들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에서 일정부분 역할을 했던 것이 일본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관점을 침략군에서 동맹, 또는 은인이라는 이미지로 바꾸는 데 기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디르만이나 인도네시아 초대대통령 수까르노의 친일 경력이 후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이라 보입니다.

 

수디르만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일본군이 동인도를 침공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도록 하죠.

 


 

1942 3 9일 네덜란드의 띠야르다 반 슈타켄보 수타커우워(Tjarda van Starkenborgh Stachouwer) 동인도총독과 히엔 터르 포르텐(Hein ter Poorten) 장군이 일본군에 항복하면서 인도네시아에서도 3년간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됩니다.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당시 이미 중국본토를 침공하고 있던 일본이 동인도제도에 눈을 돌릴 것임은 이미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지 주민들에 대한 군사교육을 제한하던 네덜란드 총독부도 공습대피훈련을 시작하면서 민간 공습대응팀을 조직해 운용했는데 지역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 찔라짭(Cilacap) 지역의 대공팀들을 지휘하게 된 수디르만은 주민들에게 안전교육을 하는 한편 그 일대에 공급경보를 알릴 관측소들을 설치했고 네덜란드 당국과 협조하여 실전 공습낙하물에 대한 대비훈련도 실시했습니다. 그는 당시 여러 사회활동은 물론인도네시아 민족협의회 (Koperasi Bangsa Indonesia)의 회장을 맡는 등 인권조직에서도 활동했으므로 찔라짭의 주민들 사이에 그 명망이 드높았습니다. 이 대목까지도 수디르만에게서는 아직 독립투사의 아우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매우 체제순응적인 모습입니다.

 

일본군은 동인도제도를 침공하기 시작한 1942년 초, 네덜란드군은 물론 네덜란드가 훈련시킨 네덜란드제국 동인도군(KNIL)을 여러 전투에서 격파한 끝에 1942 3 9일 네덜란드군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 냅니다. 이로 인해 동인도제도 전역의 정치지형이 급변했고 급증하는 일본군의 인권유린으로 지역내 비일본인들은 더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수디르만이 교편을 잡고 있던 학교 역시 폐쇄되어 군관측소로 사용되었는데 일본군은 동인도제도 전역에서 현지 사립학교들을 폐쇄하고 있었습니다. 수디르만은 일본군을 설득해 학교를 다시 열 수 있었지만 교사들은 열악한 교재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1944년 초, 일본군이 지휘하는 지역위원회의 대표였던 수디르만은 일본 점령군 지휘부가 연합군의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 1943년 조직한 ‘PETA’라 불리는 국토방위대’ (Pembela Tanah Air)에 참여할 것을 권고받습니다. 이 조직은 네덜란드 정권에 오염되지않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모병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린 시절 입었던 무릎부상이 마음에 걸려 며칠 주저하던 수디르만은 결국 그 제안을 수락하고 보고르의 훈련캠프에 합류합니다. 그런데 수디르만이 20대의 젊은 나이였음에도 높은 계급을 달고 지휘관 교육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사회적 지위가 고려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생도들은 일본군 장사병들에게 직접 군사훈련을 받았고 네덜란드군으로부터 압수한 무기들로 무장했습니다. 그렇게 수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수디르만은 찔라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중부 자와 반유마스 소재의 크로야(Kroya)에 주둔한 대대병력의 지휘를 맡게 됩니다.

 

인도네시아에 진주한 일본군의 만행도 만만치 않았는데 왜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PETA에 참여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인도네시아를 350년간 지배했던 네덜란드와 유럽 열강을 군사적으로 단번에 무너뜨린 일본에게 크게 감명받은 측면이 크다고 보입니다. 더욱이 네덜란드인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을 저급한 인간으로 취급했고 행여나 네덜란드에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군문에 들어서는 것을 제한했었죠. 그러나 일본은 현지인들을 총알받이로 쓰겠다는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지만 아무튼 군문을 활짝 열고 인도네시아인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 주었던 것입니다. 수디르만도 그런 일본의 절도와 전투력을 동경하고 열광해 마지 않았던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수디르만을 비롯한 수많은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합류한 이 PETA가 훗날 인도네시아 정규군의 모체가 되리라고는 당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1945 4 21일 꾸사에리(Kusaeri)가 지휘하는 PETA의 한 부대가 일본군에 항거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진압명령을 받은 수디르만은 PETA 반군들을 처형하지 않고 근거지 소탕작전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일본군 지휘관으로부터 받아낸 후에야 진압작전에 돌입합니다. 그가 부대를 움직여 반군을 추적하기 시작하자 꾸사에리 측 병사들은 처음엔 수디르만 측의 지휘관들에게 총을 쏘기도 했지만 확성기 방송을 통해 집요하게 설득한 결과 꾸사에리는 4 25일 항복하기에 이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점령군 내에서의 수디르만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고 한편 일본군 고위장교들은 수디르만이 인도네시아 독립의지를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 것에 큰 우려를 표현했습니다. 수디르만은 임무를 잘 완수해 냈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그의 성향과 능력을 보고 견제하려는 마음을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디르만과 그의 부대는 보고르로 보내졌는데 명목상 훈련을 위한 것이라 했으나 실제로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수디르만 측의 반란을 우려해 가혹한 사역임무를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일본군이 PETA의 인도네시아인 간부들을 곧 살해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1945 8월초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그 달 17일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선포되면서 일본군의 통제는 눈에 띄게 약화되었습니다. 수디르만은 보고르의 캠프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당시 그의 참모들은 일본군을 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수디르만은 그들을 설득해 만류했고 오히려 자신의 부대를 해산해 부대원들을 귀향시킨 후 자신은 자카르타에서 가서 수까르노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수까르노는 수디르만이 자카르타에 머물며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지휘할 것을 요구했으나 자카르타 지리에 어두웠던 수디르만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끄로야(Keroya)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의 지휘권을 넘겨 받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1945 819PETA 시절부터 자신의 임무지였던 반유마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해 8월 하순 수까르노는 예전의 PETA, 헤이호(Heihō), KNIL 등의 조직들을 규합한 국민치안단(Badan Keamanan Rakyat - BKR)을 발족시켰습니다.

 

각 출신들은 서로 충돌과 반목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앞서 설명한 PETA 외에, KNIL은 네덜란드제국 동인도군(Koninklijk Nederlands Indisch Leger)을 뜻하는 것으로 19세기엔 동인도지역 식민지 확대를 위한 침공작전에 동원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 현지저항이 미약해지자 주로 치안유지 등 경찰업무에 주력하게 되었고 일부 출세하려는 인도네시아인들도 이 조직에 어렵사리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헤이호는 병보’(兵補)의 일본어로 원래는 인도네시아인으로 이루어진 일본군의 보조부대 같은 성격이었는데 1942 9 2일 자 대본영훈령에 따라 인도네시아에서는 1943 422일부터 모집하기 시작해 주로 수용소 건설 및 포로감시 등의 업무에 동원했으나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헤이호도 무장을 갖춰 버마(Burma)나 모로타이 전선에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전투임무에 투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패망직전엔 그 인원이 42,000명에 이르렀던 헤이호는 인도네시아 건국준비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해산됩니다.


 

이렇게 발족된 BKR은 군대의 성격보다는 주로 경찰치안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정치지도층은 외교력을 통해 인도네시아가 국제사회에서 신생국가로서 공인받고자 했으므로 아직도 열도에 남아 있는 일본군에 대해 지나치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수디르만과 그의 PETA 동료들은 끄로야로 돌아가 8월 말 반유마스에 BKR 지부를 구성했습니다. 해당 지구 일본군사령관 사부로 타무라, 이와시게, 그리고 반유마스 주민대표가 참석한 회합에서 수디르만과 이스깍 쪼끄로아디수리오(Iskak Cokroadisuryo)는 무장한 인도네시아인들이 일본군 주둔지를 에워싸도록 하여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여기서 획득한 일본군 무기들은 훗날 수디르만의 BKR 부대 무장에 사용돼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잘 무장된 부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부대에도 보급되었습니다.

 

 

신생국으로서 아직 정규군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수까르노 대통령은 1945 10 5일 국민치안군(TKR, 훗날 인도네시아 정규군의 모체) 발족과 관련한 법령을 통과시킵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KNIL 출신들이었고 병사들은 PETAHeihō 출신들이었습니다. 당초 법령에 명시되었던 전군 총사령관 수쁘리자디(Soeprijadi)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우립 수모하르죠(Oerip Soemohardjo) 중장이 참모장으로서 군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한편 연합군이 동인도 제도의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시도가 시작되어 제일 먼저 영국군이 1945 9 8일 인도네시아에 진주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일본군 무장해제와 네덜란드군 전쟁포로 귀환의 임무를 가진 영국군 주도의 연합군이 그 해 10월 스마랑에 상륙해 남쪽 마겔랑을 향해 진주했고 그들은 해방시킨 네덜란드 전쟁포로들을 다시 무장시켜 마겔랑에 군사기지를 확보하려 했습니다. 그 상황을 보고받은 수디르만(당시 대령)은 휘하의 이스디만(Isdiman) 중령의 부대를 보내 그들을 몰아내도록 했는데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유럽군들은 마겔랑과 스마랑 사이에 있는 암바라와(Ambarawa)로 후퇴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수디르만은 10 20일 제 5사단장으로 임명됩니다. 자와지역의 군사지휘권을 몇몇 지휘관들에게 분할하던 우립 장군이 수디르만의 능력을 높이 샀던 것입니다.

 

그런데 좀 곤란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945 11 12. 첫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수디르만은 세 번 째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22표를 얻어 21표를 얻은 우립 장군을 제치고 국민치안대 총사령관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이는 수마트라 지역 사령관들이 수디르만에게 몰표를 던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29살이었던 수디르만에게 있어 우립 장군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군에 몸담았던 대선배였습니다. 사리에 밝고 도리를 지키려는 수디르만으로서는 그 투표 결과에 놀라 총사령관직을 우립 장군에게 되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우립 장군 역시 기꺼이 총사령관직을 내놓았습니다. 상황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은 수디르만은 차선책으로서 우립 장군을 극구 만류해 참모장으로 남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총사령관의 직을 수행하기 위해 4성장군, 대장의 계급장을 달게 됩니다.

 

전군 지휘관회의를 마치고 반유마스로 돌아간 수디르만은 TKR 총사령관으로서의 비준을 기다리면서 유럽연합군을 물리칠 전략에 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다시 지배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고 실제로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은 이미 9월 자와섬에 상륙해 10월말과 11월에 수라바야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인 바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전황에 수디르만의 자격에 대한 수까르노의 불신까지 겹치면서 수디르만의 비준을 지연시키고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독립전쟁 당시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로서, 위에 언급된 수라바야 전투를 한번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수라바야 전투는 인도네시아 정규군 보병 2만명, PETA 비정규군 10만여명, 그리고 무장해제되었던 해당 지역 일본군이 당시 전차와 전함, 전투기 등 첨단무기들을 앞세운 3만명의 영국군, 그리고 영국령 인디아군을 상대로 1945 10 27일에서 11 20일까지 약 한달 가량 치열하게 교전했던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인도네시아군은 6천명 이상이 전사했고 영국군의 피해는 그 10분의 1에 불과했으니 영국군의 전술적 승리가 분명했으나 예상보다 분전하며 오래 버텨낸 인도네시아 측도 정치적, 전략적으로 얻은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1945 11월에 들어서면서 절정에 달하는 이 전투는 단일 전투로서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고 이젠 독립항전의 국가적 심벌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보여준 인도네시아측의 영웅적 항전노력은 인도네시아 독립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가 11 10일을 영웅의 날’(Hari Pahlawan)로 정한 것 역시 수라바야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날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건이 벌어진 것은 일본의 패망 후 인도네시아가 아직도 혼돈기를 맞고 있던 와중에 일본군의 비호를 받던 일단의 네덜란드인들이 수바라야 시내 야마토 호텔(지금의 마자빠힛 호텔)에서 네덜란드 국기를 옥외 국기게양대에 게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방의 기쁨에 들떴기 때문이라 하기엔 그 날짜가 9 19일이었으니 크게 뒤늦은 일이었고 당연히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지로 다스리겠다는 네덜란드의 야무진 의지로 받아들여졌죠. 그 행위는 인도네시아인들의 공분을 사 성난 군중이 네덜란드인들과 일본인들을 공격하며 네덜란드 국기를 훼손했고 플뢰그만이라는 네덜란드 남자가 군중에게 공개적으로 살해당하고 맙니다.

 

한편 수라바야의 일본군 지휘관 시바타 야이치로 제독은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지하며 무기고를 개방한 후 10 3일 연합군 대표로서 도착한 한 네덜란드군 대위에게 항복하고 스스로의 신병을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휘하의 부하들에게 남은 무기들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넘겨줄 것을 지시했고 인도네시아인들은 일본군을 연합군에게 인도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일본군들이 수라바야 전투에서 인도네시아군 편에 서서 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한 고급지휘관의 지혜로운 판단과 결정이 일본의 위상을 침략자에서 인도네시아의 은인으로 바뀌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수라바야에 전운이 감돌자 인도네시아 최대 이슬람조직인 나드라툴 울라마(Nahdlatul Ulama – NU)는 조국을 지키는 것이 성전(Holy War)이라고 공포합니다. 성전(聖戰)은 어떤 무슬림도 외면할 수 없는 종교적 의무였습니다. 이로 인해 동부자와 전역의 이슬람 지도자들과 이슬람 기숙학교 학생들이 대거 수라바야로 몰려들어 전투를 준비했고 카리즈마 넘치는 붕또모(Bung Tomo)는 유명한 라디오연설을 통해 혁명열기를 최대로 고조시킵니다.


양측 병력이 서로 마주보며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하자 당초 제 23 인디아 사단 소속 제 49 보병여단의 경무장 인디아군 6천명이던 영국군은 제 5 인디아 사단24,000명의 중무장 병력은 물론 셔먼탱크 24, 전투기 24, 순양함 2대와 구축함 3대까지 동원해 무력시위에 나섰습니다. 영국군은 10 27일 수라바야에 공격이 임박했으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는 전단을 항공기로 살포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인도네시아군의 공분을 사 다음날 공세에 나선 인도네시아군이 인디아군 200여명이 사살되는 전투가 벌어집니다.

 

영국측은 10 30일 수까르노 대통령, 하따 부통령 및 아미르 샤리푸딘을 포함한 각료들을 수라바야로 급히 불러들여 제 23 인디아 사단 사령관 호손(Hauthorn) 소장, 49여단의 멜러비 준장이 동석한 자리에서 일단 휴전협정을 맺습니다. 하지만 그 협정은 그 후 본격적으로 벌어질 수라바야 전투를 막지 못합니다. 전선을 순회하며 그 협정에 대해 설명하던 멜러비 준장이 인도네시아 민병대에게 사살된 것입니다. 인도네시아군들은 역시 아직 휴전협정에 대해 듣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전이 시작되었고 수라바야에는 헬게이트가 열렸습니다. 영국군은 인도네시아군의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하다가 11 10일 수라바야로 칫쳐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폭격과 함포사격 지원을 받으며 진격해 들어간 영국군은 도심의 각 건물 방 하나 하나를 차근차근 제압하면서 사흘 만에 도시의 반을 확보했지만 인도네시아군의 맹렬한 반격에 전투는 11 29일까지 3주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총기가 모자라 상당수가 죽창으로 무장했던 인도네시아군은 6,300~15,000명 가량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그 사이 20만명 정도의 주민이 수라바야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인디아-영국군의 사망자는 60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 인도네시아군이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아 독립전쟁 내내 그 후유증, 특히 무기 부족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고 독립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내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측에게도 인도네시아가 결코 민중의 인기에 영합한 얄팍한 부역자들의 집단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고 영국군에게도 네덜란드 편에 서기보다는 중립을 지키는 편이 낫다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실제로 영국은 1년 후 수라바야에서 철수하고 다시 몇 년 후 국제연합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지지하게 되죠.

 

다시 수디르만의 얘기로 돌아옵니다. 그는 사령관직 비준을 기다리면서 그 해 11월 하순 5사단에게 암바라와에 주둔한 연합군 공격을 명령했고 이번에도 이스디만이 전투지휘를 맡았습니다. 이 도시에는 식민지시절부터 병영과 군사훈련시절이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이 공습과 탱크로 맞서면서 인도네시아군은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스디만도 이 전투에서 P-51 머스탱 전투기의 기총소사에 맞아 전사합니다. 이번에도 인도네시아군은 총기가 부족해 죽창과 일본도 까지 동원한 반면 영국군은 근대화기를 모두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디르만은 스스로 최전방에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전투를 독려했습니다. 그러한 혼전 속에서 게릴라부대가 스마랑에 있던 깔리반뗑(Kalibanteng) 비행장을 파괴해 항공지원이 중단되자 수세에 몰린 연합군은 윌렘요새에 참호를 파고 들어갔습니다. 수디르만은 4일간 공성전을 진두지휘 했고 결국 연합군은 12 12일 스마랑으로 퇴각했습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12 12일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이 암바라와 전투를 통해 수디르만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천한 군경력, 교사로 근무했다는 사실 등으로 인해 그가 군사령관 재목이 아니라는 수근거림을 단숨에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애당초 수디르만이 군사령관으로 선출된 것은 그의 의심할 여지없는 애국심 때문이었고 만주군 사관학교에 입교하려던 박정희가 멸사봉공 견마지로의 혈서를 일본천황에게 바쳤던 것처럼 우립 장군이 과거 식민지시절 네덜란드에 충성을 맹세했던 사실을 군 후배들이 혐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45 12 18일 마침내 총사령관으로 비준되자 그 동안 지휘했던 5사단을 수띠로(Sutiro)대령에게 인계한 수디르만은 좀 더 전략적 부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문단을 구성해 정치적 문제와 군사적 이슈들에 대한 조언을 받았고 특히 우립 장군이 군사적 문제들 대부분을 처리했습니다.

 

수디르만과 우립은 힘을 합쳐 종전 KNIL 부대출신들과 PETA 부대출신들 간의 차이점과 불신을 상당부분 불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앙 지휘권에 귀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선출한 부대장을 추종하는 부대들도 있었습니다.

 


한편 정부는 1946년 부대를 두 번씩이나 개명했는데 한번은 국민치안군(TKR)이라 했다가 다시 인도네시아 공화국군(Tentara Pepoeblik Indonesia – TRI)이라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 해 초엔 인도네시아 해군과 공군도 각각 정식 출범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인도네시아 정부는 네덜란드의 손에 떨어진 자카르타를 떠나 그 해 1월 족자로 옮겨온 상태였습니다. 수딴 샤리르(Sutan Sjahrir) 총리가 이끄는 대표단이 네덜란드에게 인도네시아의 주권인정을 요구하며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아무 성과 없이 4월과 5월이 지나고 있었고 그 사이 수디르만은 5 25일 확장된 인도네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재신임 되었습니다. 그 의식에서 수디르만은 자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 흘려서라도국가를 보위할 것임을 맹세했습니다.

 

 

당시 국방장관으로서 정권재편과정에서 거대한 권력을 위임받은 아미르 샤리푸딘(Amir Sjarifuddin)은 근본적으로 좌익으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는데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부대들은 물론 자신들을 후원하는 각 정당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좌익 준군사조직(라스카르-Laskar)들도 그의 휘하에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쿠데타의 전조였죠. 그는 군에 정치교양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장병들에게 좌익사상을 전파했습니다. 그의 그러한 정치적 행동은 당시 각각 다른 군사적 배경과 출신을 가진 장사병들을 평등하게 대하기 위해 최선을 기울이고 있던 수디르만 장군과 우립 장군을 실망시키기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오히려 수디르만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시도가 1946 7월초 실제로 벌어지긴 했지만 수디르만이 거기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수디르만은 인도네시아 국영 라디오방송(Radio Republik Indonesia – RRI)을 통한 연설에서 이 소문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다른 모든 인도네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종복이며 만일 그에게 대통령직을 제안하려는 세력들이 있다면 단호히 거절한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그 후에도 군은 정치를 하는 곳이 아님을 기회가 날 때마다 강조했습니다

 

한편 연합군과 협상을 계속하던 샤리르 총리는 1946 10 7일 네덜란드의 윔 쉐머혼(Wim Schemerhorn) 총리와 휴전을 논의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 협의는 영국외교관 킬런경(Lord Killerrn)과 수디르만이 합류하면서 급물살을 탔습니다. 수디르만은 10 20일 특별열차 편으로 자카르타를 향했으나 네덜란드군이 그와 그의 부대가 무장한 채 자카르타에 입성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중도에 족자로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수디르만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오해 때문이었다는 네덜란드 측의 사과를 받은 후에야 수디르만은 10월말 다시 기차에 올라 11 1일 마침내 자카르타 감비르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엔 엄청난 환영인파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자카르타에서의 협의의 결과로 11 15일 링가자티 협정(Perjanjian Linggajati)을 초안하게 되는데 1947 3 25일 비준을 받긴 하지만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가열찬 항의에 직면해야만 했고 수디르만 자신도 개인적으로는 이 협정이 인도네시아의 국익을 저해할 소지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인으로서 정부의 결정을 따르기로 합니다.

 

1947년초 링가자티 협정을 통해 비교적 평화적인 시기가 도래하자 수디르만은 기존의 TKR 국민치안대와 각종 라스카르 준군사조직들의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위원회의 일원으로써 군을 재편하고 1947 5월 합의에 이르러 마침내 1947 6 3일 인도네시아 정규군(Tentara Nasional Indonesia = TNI)이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라스카르 조직들을 군에 포함시킨 수디르만은 그 배후에 정치단체들의 집요한 공작이 작용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한편 링가자티 협정을 통해 얻은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영국군이 1946 11월 철수한 후 그 지역을 물려받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군은 1947 7 21프로덕트 작전이란 이름의 군사공세를 시작해 자와와 수마트라의 상당부분을 수중에 넣었습니다. 다행이라면 족자의 인도네시아 정부가 무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디르만은 전군의 항전을 요구했지만 수 차례 국영라디오방송을 통해 연설을 했음에도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인도네시아군은 전혀 준비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신속하게 괴멸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동인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비우호적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엔의 압력으로 네덜란드군은 1947 8 29일 인도네시아군과 네덜란드군의 지배지역을 구분한 반묵라인(Van Mook Line)이란 것을 선포합니다. 위의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인도네시아군이 지배하는 곳이었는데 이 라인을 따라 휴전이 선포되었고 수디르만 장군은 부득이 35,000명의 게릴라 병력을 네덜란드군 점령지역에서 인도네시아군 지배지역으로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그는 이것을 히즈라(Hijrah)작전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서기 622년 무하마드가 자신이 돌아올 것을 예언하면서 메디나(Medina)로 도망갔던 사건에서 따온 명칭이었습니다. 이들 병력은 철도와 선박편으로 속속 족자로 들어왔습니다.

 

이 경계선은 1948 1 17일 렌빌 조약(Perjanjian Renville)으로 고착화되는 듯 했습니다. 이 조약에 서명한 사람들 중엔 당시 총리직을 맡게 된 아미르 샤리푸딘도 있었습니다. 그는 군 정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병력감축을 시도했는데 당시 정규군은 35만명, 라스카르 준군사조직은 47만명에 달했습니다독립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병력을 증강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축한다는 이 계획을 군수뇌부는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이 강행되는 과정에서  수디르만은 대통령령에 의해 1948 1 2일 군 총사령관직을 잃고 중장으로 강등되었습니다. 그 대신 공군사령관 수르자디 수르자다르마(Soerjadi Soerjadarma)가 총사령관직에 오릅니다


그러나 샤리푸딘은 불평등한 빌 조약에 서명했다는사실이 알려져 불신임투표로 퇴출당하고 그 뒤를 이어 총리직을 맡은 무하마드 하타(Mohammad Hatta)가 군정상화 프로그램도 넘겨 받았는데 수개월간 찬반양론의 격론이 오가는 동안 수디르만 장군은 노장들을 포함해 이 프로그램을 반대하는 진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1948 6 1일 다시 총사령관직에 복귀한 그는 마침내 이 프로그램을 철폐하고 압둘 하리스 나수티온 (Abdul Haris Nasution) 소장을 부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앞서 강등된 계급인 중장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군감축 프로그램이 무산되자 샤리푸딘은 사회당, 공산당은 물론 전인도네시아 노동조직의 구성원들을 끌어 모아 1948 9 18일 동부자와의 마디운(Madiun)에서 프롤레타리아 봉기를 일으킵니다. 당시 병석에 누워있던 수디르만 장군은 나수티온을 보내 이 혁명을 진압하려 했고 공격전에 두 명의 장교를 먼저 보내 평화적 해결을 타진해 보았습니다. 혁명 지휘관인 무쏘(Musso)는 평화적 타결에 동의했지만 나수티온 장군은 이를 무시하고 9 30일 군사작전을 감행해 봉기를 무력화시킵니다. 전투가 있은 지 얼마 후 마디운 현장을 방문한 수디르만 장군은 그 곳에서 흘린 많은 동족들의 피가 안타까워 도저히 그곳에서 잠을 이룰 수 없음을 부인에게 토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48년의 이 쿠데타는 마디운 사태(Madiun Affair)라고도 불리웁니다.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시점에서 민병대의 해체를 둘러싸고 동부자와의 마디운에서 벌어진 이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는 좌우진영의 첨예한 충돌을 야기했고 여기서 좌익이 패배하면서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은 치명적 타격을 입습니다.

 


이 일이 전개는 이랬습니다. 1948 9 18일 동부자와의 마디운에서 인도네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성립이 공표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세력은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와 인도네시아 사회당(PSI)이었습니다. 그들은 수까르노-하타 정권을 일본과 미국의 주구로 규정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봉기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지역에서 주지사를 비롯한 경찰, 종교지도자 등 저명인사들을 살해하면서 위세를 떨쳤지만 불과 몇 주 후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PKI 당수 무쏘와 전임 총리 아미르 샤리푸딘을 비롯한 PKI 핵심지도부 대부분이 처형되고 3만 명이 넘는 좌익분자들이 투옥되었습니다.

 

이 반란을 겪으면서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외교적으로 지원키로 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냉전체제에서 인도네시아가 확고한 반공국가가 되어 소련의 세력확장을 막아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반란과 그 후에도 계속된 일련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이 수디르만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켜 1948 10 5일 인도네시아군 창설 3주년 기념식장에서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의사의 진단은 폐결핵이었습니다. 그는 10월 말 빤띠라삐병원(Rumah Sakit Panti Rapih)으로 후송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오른쪽 폐는 그 기능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군의 대소사는 그의 대리인 나수티온 장군이 처리했지만 두 사람은 대네덜란드전 군사계획을 끊임없이 협의했고 수디르만은 매일 상황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해 5월부터 이미 네덜란드 점령지 공격작전에 활용되고 있던 게릴라전술이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임에 뜻을 같이 합니다.

 

 

그와 관련한 일반명령을 퇴원 3주 전인 11 11일 발표하는데 그 준비에는 나수티온의 역할이 컸습니다. 수디르만 장군이 다시 지휘봉을 잡은 것은 12 17일이었습니다. 네덜란드군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수디르만은 인도네시아군이 좀 더 경각심을 갖도록 촉구했고 그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해 네덜란드군의 기를 꺾으려 했지만 그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틀 후인 12 19일 오히려 네덜란드군은 더 이상 렌빌 조약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심야성명을 발표하고서 크라이 작전(Operation Kraai)을 펼쳐 당시 인도네시아 수도인 족자를 공격해 왔던 것입니다. 아침 7 10, 마구워(Maguwo)비행장이 네덜란드군 에코트(Eekhout)대위가 이끄는 공수부대에 의해 점령되자 전황을 파악한 수디르만 장군은 인도네시아 국영 라디오방송 RRI를 통해 모든 병사들이 훈련 받은 대로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항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전술명령 No. 1/PB/D/48

 

1. 우리는 공격받았다.

2. 1948 12 19일 네덜란드군이 족자와 마구워비행장을 공격해왔다.

3. 네덜란드정부가 휴전협정을 깨뜨렸다.

4. 모든 병사들은 앞서 훈련한 바와 같이 네덜란드군 공격에 항전하라.

(Sudirman's radio address, from Imran (1980, p. 55))

 

그런 후 그는 족자 중심부의 대통령궁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식민통치를 거부한다면 족자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네덜란드군의 최후통첩에 대한 회의가 한창이었습니다. 수디르만은 대통령과 부통령이 즉시 도시를 떠나 그들이 이미 계획했던 게릴라전으로 항전할 것을 강권했지만 그의 요구는 간단히 거절되었습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정치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할 용기조차 내지 않는다는 사실에 깊이 좌절한 수디르만은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까르노에게 허락을 얻어 병사들과 합류하기 위해 전선으로 돌아갔습니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물론 그 자리에 없었던 장관 6명을 제외한 내각전체를 포함하는 족자의 중앙정부는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의 강권에 따라 끄라똔 궁전으로 피신했으나 대통령궁까지 진주해 온 네덜란드군에게 모두 붙잡혀 수마트라의 방카섬(Pulau Bangka)으로 유배되는 신세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말까지 자와와 수마트라의 대부분 도시들이 네덜란드군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수디르만은 대통령도, 정부도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항전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수디르만은 우선 자신의 숙소에서 중요문서들을 파기한 후 소수의 병력과 주치의만 대동하고 남쪽 반뚤 빠랑뜨리띠스 지역의 끄레떽(Kretek)으로 탈출합니다. 빠랑뜨리띠스 지역 해안엔 마따람 왕국의 수호자이자 남쪽바다의 지배자인 니롤로키둘여왕이 출몰한다고 알려진 곳이었는데 그 옛날 권능왕 스노빠띠에게 니롤로키둘이 현신하여 제국의 건설을 돕기로 했던 것처럼 풍전등화의 운명이 된 인도네시아에게도 뭔가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끄레떽에 들어서 촌장의 환영을 받은 수디르만 일행은 며칠 그곳에 머무는 동안 네덜란드 점령지를 정찰하는 한편 부인에게는 패물을 팔아 게릴라활동에 보태줄 것을 당부한 후 자기 일행과 함께 다시 남쪽 해안을 따라 워노기리(Wonogiri)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침공이 있기 오래 전부터 그가 동부자와지역에서 게릴라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이미 결정된 일이었는데 그곳에 기지로 사용할 만한 장소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의 포위망이 좁혀지던 12월 23일 수디르만과 그의 부대는 뽀노로고(Ponorogo)로 진행하다가 마푸즈라는 이슬람 끼아이를 만나 지팡이를 선물 받습니다. 그는 절룩거리면서도 그 지팡이에 의지해 동쪽으로 계속 진행해 갔습니다.

 

 

뜨렝갈렉 외곽에서 수디르만 일행은 인도네시아군 102대대의 병사들과 조우합니다. 사복으로 변복한 수디르만 장군을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수디르만 일행이 탈출한 포로라고 둘러댄 얘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도나 노트에 표기된 인도네시아군의 동향 같은 것들은 스파이들이나 가지고 다닐 법한 것들이어서 그들을 의심한 군인들은 수디르만 일행을 통과시키지 않고 붙잡아 두었습니다. 그들을 알아본 것은 상황을 확인하러 온 그 부대 지휘관 자이날 파나니 소령이었습니다. 그는 수디르만 장군에게 사과하면서도 자기 병사들이 제대로 근무하고 있었음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파나니는 끄디리(Kediri)에 전화해 장군과 그 일행을 태울 차량을 가져왔습니다. 끄디리에서 도착한 그들은 곧 동쪽으로 길을 재촉했는데 그들이 막 출발하고 난 12 24일 네덜란드군의 전투기들이 끄디리를 맹폭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의 집요한 추적과 공격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수디르만은 자신과 외모가 많이 닮은 헤루 께써르(Heru Kesser)중위에게 자기 옷을 입혀 비교적 많은 병력을 데리고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옷을 다시 갈아입고 북쪽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기만전술을 사용하면서 정작 수디르만 장군 자신은 까랑농코(Karangnongko)에 머물렀습니다. 그 기만작전으로 적군의 시선을 따돌린 수디르만과 그의 부대는 12 27일 그곳을 출발해 1949 1 9일 데사잠부(Desa Jambu)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수디르만은 네덜란드군의 족자공략 당시 그 자리에 없었던 몇몇 장관들을 거기서 만나 그들과 함께 반유뚜워(Banyutuwo)로 진행해 일주일 가량 머물렀으나 네덜란드군이 그곳으로 접근해 오자 수디르만 일행은 폭우를 틈타 또 다시 탈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동하던 중에도 수디르만은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지역에서는 무전기를 꺼내 인근 인도네시아군에게 작전명령을 하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수디르만은 밀림을 가로지르는 행군과 부족한 식량사정으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수디르만의 부대는 정글을 헤치며 계속나아가 마침내 라우산(Gunung Lawu)인근 소보(Sobo)라는 곳에 2월 18일 도착합니다 다행히 소보지역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졌으므로 수디르만은 그곳에 게릴라전 지휘소를 설치하고 주둔키로 합니다. 

 

지역사령관인 윌리아떠르 후따갈룽(Wiliater Hutagalung) 중령이 수디르만 장군과 다른 지휘관들 사이에서 연락과 조율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는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가 벌이고 있는 군사행동을 비난하는 쪽으로 더욱 기울고 있어 인도네시아가 독립국으로서 인정받을 기회가 커지고 있다고 판단한 수디르만은 후따갈룽과 모든 가능한 작전들을 구상하여 마침내 대규모 공세를 조직합니다. 한편 네덜란드군은 자신들이 수디르만 장군을 체포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며 인도네시아 게릴라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수디르만은 후따갈룽에게 총공세를 기획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 총공세에서 정규 군복을 입은 인도네시아군 병사들이 네덜란드군을 호되게 공격하는 모습을 외신기자들과 UN 조사팀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후따갈룽은 밤방수겅(Bambang Sugeng) 등 휘하의 지휘관들, 웡소느고로(Wongsonegoro)주지사 휘하의 관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가장 효과적으로 공세를 퍼부을 작전을 며칠 동안 골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작전이 1949 3 1일의 총공세였는데 족자를 중심으로 한 중부자와 전역의 네덜란드군 전초를 인도네시아군이 동시에 총공격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으로 수하르토 중령의 부대가 6시간 동안 족자를 점령했다가 철수하는 등 무력시위를 벌임으로써 그간의 승승장구로 콧대가 한없이 높아져 있던 네덜란드를 톡톡히 망신 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군이 이미 괴멸상태라고 국제사회에서 공공연히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49 3 1일 총공세 (Serangan Umum 1 Maret 1949)는 독립전쟁의 가장 결정적인 작전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전략적 승리, 그러나 전술적 패배로 평가되는 이 작전의 배경과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949년 초,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는 족자를 점령하고 있는 네덜란드군에 대한 대규모 공세에 대한 아이디어를 수디르만 장군에게 제출합니다. 이 공세의 목적은 인도네시아군이 아직도 버티고 있으며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수디르만의 제가를 받은 하멩꾸부워노 9세는 그 해 2월 수디르만이 야전사령관으로 발탁한 수하르토 중령과 의견을 조율하여 공세를 준비합니다. 이 작전은 우선 족자 외곽지역 마을들에서 게릴라공격을 감행해 족자의 네덜란드군을 출동시켜 도시방어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첫 단계로 하고 있었습니다. 1949 3 1일 오전 6, 수하르토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총공세를 시작해 네덜란드군을 기습했고 하멩꾸부워노 9세는 자신의 궁전을 부대의 은신처로 사용할 것을 허락했습니다. 수하르토 중령의 부대는 족자를 수중에 넣어 6시간 동안 실질적으로 통제한 후 철수했는데 네덜란드군은 불과 6명이 사망한 반면 공세를 벌인 인도네시아군은 300여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당시 연이은 패배로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인도네시아군의 사기를 크게 북돋은 것은 큰 성과였습니다하지만 인도네시아군의 월등한 군사력을 과시했다고 보긴 어려워 UN의 반응은 비교적 냉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네덜란드군의 대승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기도 했습니다.

 

훗날 이 총공세가 크게 주목받음에 따라 참전 지휘관들 사이에서 그 공을 서로 다투는 촌극이 벌어졌는데 먼 훗날 수까르노의 뒤를 이어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이 된 당시 수하르토 중령과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가 서로 자신이 총공격의 주역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를 한동안 지켜보던 밤방수겅 대령 측에서도 자신이 총공세를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수디르만이 살아 있었다면 혀를 끌끌 찰 일이었겠죠.

 

 

국제연합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1949 5 7일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는 협상을 통해 로엠로옌 조약’(Perjanjian Roem-Royen)을 맺게 되는데 논란거리를 다수 포함한 이 조약은 네덜란드군의 족자 철수를 주요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한편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미 1948 12 24일자 결정문 63호를 통해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각 측의 적대적 행위를 중지하고 1948 12 18일 이후 유배상태에 있는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다른 정치적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UN의 압박에 따라 1949년 6월 29일 족자에서 철수했고 유배되었던 인도네시아 수뇌부는 7월 초 족자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배에서 풀려난 수까르노는 수디르만도 족자에 돌아와 국정에 참여할 것을 명했지만 수디르만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전투도 없이 네덜란드군이 유유히 철군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 없었던 그는 이제 인도네시아군이 충분히 강해진 상태에서, 사기가 꺾인 네덜란드군을 당장이라도 추격해 섬멸해야 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족자에서 의료혜택과 모든 지원을 약속 받았지만 네덜란드와 질적으로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여기던 족자의 정치 지도층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군의 끄라이작전 당시 족자에서 탈출하여 목숨을 걸고 게릴라전을 펼치기보다 안전하게 포로가 되기를 선택했던 수까르노 정부와 내각에 수디르만은 아마도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떤 편지 한 통을 받고 족자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게 되는데 그게 누가 보낸 것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7 10일 수디르만과 그의 일행은 족자에 입성하면서 수십만의 군중들과 정치엘리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습니다. 편지가 전달될 당시 현장에 있었던 로시한 안와르(Rosihan Anwar)라는 기자는 1973년 저서에서 수디르만은 공화국의 최고지도층 안에 불화와 알력이 있다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족자에 돌아가야만 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8월초 수디르만은 수까르노에게 게릴라전을 속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앞서의 조약들이 모두 파기되었던 것처럼 네덜란드가 로엠로옌 조약도 언젠가 파기할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까르노의 거절은 수디르만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폐결핵 치료나 1948년 11월 세상을 떠난 우립 장군에 대해 정부가 일관성을 지키지 못한다고 비난하며 자신의 사퇴 카드를 꺼내 들고 위협했으나 수까르노는 맘대로 해보라는 식의 반응을 보여왔습니다. 전쟁은 끝나가는 중이었고 수까르노에게 있어 수디르만의 효용가치가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디르만은 자신이 고집을 부려 봐야 내부 불안만 가중될 것이란 생각에 결국 고집을 꺾었고 1949년 8월 11일 자와섬 전역에서 휴전이 발효되었습니다.

 

폐결핵이 악화된 수디르만은 다시 빤띠라삐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 해 10월 빠껨 인근의 요양소로 이송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병세로 인해 대중들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고 그 해 12월 마겔랑으로 다시 이송됩니다. 그 사이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정부는 수개월 동안 스트레이트로 진행된 회담을 통해 마침내 1949 12 27일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날 수디르만은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새롭게 발족한 인도네시아 합주 공화국을 섬기는 인도네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재신임되었습니다. 그리고 12 28일 자카르타가 다시 인도네시아의 수도로 선포되었습니다.

 

 

수디르만은 그로부터 불과 한 달 후인 1950 1 29일 마겔랑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34살의 젊디 젊은 나이였습니다. 총을 든 이후 인도네시아의 완전한 독립만을 바라보며 달려갔던 그로서는 최소한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임종소식이 RRI를 통해 보도되자 수디르만의 자택엔 수많은 손님들이 내방했는데 그 중엔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제 9여단 장병 전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음날 수디르만의 유해는 족자로 옮겨졌고 제 9여단에서 조직한 네 대의 탱크와 여덟 대의 자동차가 선도하는 발인행렬이 지날 때 인도엔 수천 명의 주민들이 애도하며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정치인들과 관료, 군 고위장령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는 스마키 명웅묘지 (Taman Makam Pahlawan Semaki)에 뭍혔는데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조문객들의 행렬은 2킬로미터 넘게 늘어섰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전국에 조기를 게양할 것을 명했고 수디르만은 4성장군 대장으로 추서되었습니다. 예전 한 때 달았던 계급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의 뒤를 이어 따히 보나르 시마뚜빵(Tahi Bonar Simatupang)소장이 군사령관에 취임했고 그를 추모하는 책들이 줄지어 출간되었음은 물론 그의 연설문들도 책으로 묶여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주도했던 게릴라항전은 인도네시아군이 단결심을 배양하는 모체가 되었고 족자가 네덜란드의 수중에 떨어진 직후 그가 걸었던 100킬로미터에 달하는 게릴라 루트는 생도들이 사관학교를 이수하기 전 꼭 완주해야 하는 과정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수디르만 장군은 1968년 발행된 지폐에도 등장했었고 그의 이름을 딴 도로, 학교, 박물관, 기념비 등을 전국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인도네시아 국민영웅’(Pahlawan Nasional Indonesia)으로 지정된 것은 1964년의 일입니다.

 

그가 게릴라전을 기동할 때 타고 다녔던 가마 얘기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의 폐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수디르만 장군은 부득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가마를 타고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이 가마는 지금도 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이상이 대강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과 수디르만 장군의 생애입니다.

 

이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와 닿는 아쉬움은 너무나도 달랐던 2차 세계대전 직후의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상황이었습니다. 둘 다 개고생 한 건 맞는데 그 질과 방향이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1945년 8월 17일 일본패망이 알려지자마자 그 해 9월 유럽연합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수행할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자격으로, 그리고 네덜란드군이 옛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무력으로 확인하려 진주하기 전 인도네시아의 독립지사들이 즉시 규합해 정부를 구성하고 미흡하나마 군대를 조직하여 자력으로 네덜란드군과 맞설 준비를 하는 동안 한국은 친일파들의 청산도, 독립투사들을 맞을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해 들어오는 것을 손을 놓고 바라보기만 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은 우리에게 나치를 물리치고 파리에 들어선 해방군이 아니라 ‘36년간 일본이었던 지역’에 진주한 점령군일 뿐이었므로 실제로는 인도네시아에 상륙한 네덜란드군과 그 성격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록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이 사실상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끌어냈지만 만주와 중국과 연해주 등지에서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독립군들의 입장에서는 그토록 해방시키려 했던 조국을 국민들과 민족지도자라 하는 자들이 스스로 미국과 소련에게 갖다 바치는 모습을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서 목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들과 지도자들이 정신차리지 못하고 허둥지둥 하는 동안 진주한 미군들은 우리가 청산해야 할 친일파들을 중용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해 줌으로써 미국을 등에 업은 세력과 친일파들이 서로 잇권을 주고받으며 결탁하고 야합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 결과 해외에서 목숨바쳐 싸웠던 독립투사들이 귀국하는 족족 친일파들에게 빨갱이로 몰려 죽고 고문당하고 쫒겨나고 마침내 월북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일제 강점기 당시 훼손되었던 민족정기를 영영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패망을 맞고서도 4년 가까이 더 치열한 전쟁에서 피를 흘린 후에야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된 것은 대견스럽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겪을 수 밖에 없었을 너무 큰 고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시기를 한국은 갖지 못했던 것을 너무나 아쉽게 생각합니다. 인도네시아가 겪은 독립전쟁의 시간은 예전에 네덜란드에 빌붙었거나 일본군 밑에서 친일했던 사람들에겐 ‘속죄의 시간’이기도 했을 테니까요. 네덜란드에게나 일본에게나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체제에 순응했던 수디르만이나 네덜란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우립 장군 역시 그 시간을 통해 숨어있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있는 데로 짜내어 마침내 독립의 영웅, 건국의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 속죄의 시간에 일본군마저도 인도네시아에서 거듭 났습니다.


하지만 일본 외에는 당장의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한민족은 그렇게 일본이 패망하자 그 속죄의 기회마저 단숨에 증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독립을 맞은 인도네시아에게 있어 네덜란드군과 유럽연합군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어 모든 인민이 무서운 단결력을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미군과 소련의 점령군들을 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한국에서 친일잔당들은 민중의 보복이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빨갱이'라는 희생양을 만들었고 유병언만 찾으면 세월호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처럼 호도했던 작금의 정권과 마찬가지로 반공을 기치로 빨갱이만 때려잡으면 모든 국가적 문제가 해결될 듯이 수십년째 호도하며 자꾸 자신들을 향해 기울어져 오는 총칼들을 매번 '빨갱이'들의 가슴을 향해 애써 방향을 틀어 놓았던 것입니다.


속죄하지 않은 친일파들은 그들의 원죄를 숨기기 위해 그들이 가진 온갖 기득권을 동원하는 와중에 그들의 죄를 알고 있거나 파해치려 하는 사람들이 무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파뭍어 둔 그들의 원죄는 국가적 염증이 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썩어 들어가 우리 사회에 악취를 풍기는 암덩어리가 되어 국가와 국민을 갉아 먹고 있는 있는데도 그런 일엔 이제 만성이 된 만랩 국민들은 세상이 원래 그러려니, 내가 뭔가 잘못했으니 그러려니 하면서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는 건 아닐까요?


수디르만 장군이 인도네시아 사람들 마음 속에, 모든 도시들의 중앙통 거리에, 건물과 박물관들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참 부럽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2015.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