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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바라와의 추모비

beautician 2023. 8. 1. 11:25

 

 

암바라와의 추모비 파행

 

연합뉴스에서 이런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 위안부 처소에 태평양 전쟁 희생자 추모공원 착공

"광복절 전까지 완공 목표예산 부족에 사업진행 어려움"

 

태평양 전쟁 희생자 추모비 및 추모 공원 착공식   16일(현지시간) 채환 중부자바 한인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과 이태복 사산자바문화연구원장(왼쪽에서 세번째), 인도네시아 군 관계자 등이 인도네시아 중부자바주 스마랑 암바라와 지역에 '태평양 전쟁 희생자 추모비 및 추모 공원' 착공식에서 기념삽을 뜨고 있다. [이태복 사산자바문화연구원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자카르타=연합뉴스) 박의래 특파원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가 지냈던 인도네시아 내 위안부 처소에 태평양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추모비와 추모 공원이 세워진다.

 

인도네시아 중부자바 한인회와 재인도네시아 한인회는 16일 인도네시아 중부자바주 스마랑 암바라와 지역에 '태평양 전쟁 희생자 추모비 및 추모 공원' 착공식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일본군은 1942 3월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점령했으며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식민 지배 시절 축조한 스마랑의 암바라와성을 점거, 포로수용소와 군부대 등으로 썼다.

 

또 암바라와성 문밖에 축사 같은 위안부 처소를 만들어 인도네시아까지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 등을 '성노예'로 부렸다.

 

이곳에서는 일본군에 항의하다 끌려온 조선인 군속 10명이 혈서를 쓰고 항일결사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한 뒤 무기고를 탈취, 일본군에 저항하다 끝내 자결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지만 일본군이 떠난 뒤 인도네시아나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사실상 방치돼 왔다.

 

특히 위안부 처소는 주변 관광객을 위한 화장실로 개조돼 있었고 독립열사들의 유적지 또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남겨졌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인사회와 시민단체 등에서는 표지석이라도 세우자는 움직임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주요 부지가 군 소유라서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부자바 한인회와 스마랑의 한국 위안부·독립열사 알리기에 앞장서 온 이태복 사산자바문화연구원장 등이 인도네시아 군을 설득한 끝에 이날 추모비와 추모 공원 착공식을 할 수 있게 됐다.

 

추모비에는 이곳에 끌려온 위안부 등을 기리는 추모시와 추모비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비문이 적힐 예정이다.

 

또 추모 공원 내 있는 위안부 처소에 지붕을 씌우고 이곳에 있던 화장실도 다른 곳으로 옮길 예정이다.

 

추모 공원이 완성되면 추가 모금을 통해 고려독립청년당의 결성지와 자결지 등에 표지석을 세우는 작업 등도 진행할 계획이다.

 

채환 중부자바 한인회장은 "30억 루피아( 26천만 원)의 예산이 필요한데 현재 10억 루피아( 8600만 원) 정도만 마련됐다"라며 "올해 광복절 전까지 완공이 목표인데 예산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나 기업, 시민단체 등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laecorp@yna.co.kr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230316161500104

 

 

기념비는 이런 모양으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문구들이 잘 보이지 않지만 일단 암바라와 지역군 사령부와 스마랑 군청의 참여는 왼쪽 아래 문구로 분명해 보인다.

 

 

한편 암바라와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한데 이것은 2020년 한인100년사 집필 당시 사료 수집을 위한 현지답사기록이 자카르타 경제신문에 실려 있다.

 
<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기획탐방>

1. 고려독립청년당의 독립투쟁 현장과 망국의 한이 서린 위안소

스마랑 소재 스모워노(sumowono) 보병훈련장, 취사장에서 1944 12 29  11시에 고려독립청년당이 결성되었다. 이억관(가명 이활ㆍ33) 등 조선인 포로감시원 10명은 흰 천에 혈서로 이름을 쓰고 당가(黨歌)를 불렀다. ‘반만 년 역사에 빛이 나련다. 충의의 군병아 돌격해라. 피 흘린 선배들의, 분사한 동지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창을 겨눠라(1).~~ 우리는 고려독립청년당원 해방의 선봉이다. 피를 흘려라.‘ ‘아세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라’ 등의 강령도 발표하고, 불발탄이 되었지만 연합군 포로 수송선 탈취 거사 계획도 세웠다. 이후 당원은 26명이 된다.

 

 암바라와 (Ambarawa)

중부 자바의 스마랑과 살라띠까 (Salatiga)시 사이에 위치한 도시로 행정상 스마랑시에 속한다. 식민지 시대부터 암바라와는 족자와 마글랑(Magelang)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철도 허브였다. 스마랑-암바라와-마글랑 (Semarang-Ambarawa-Magelang) 노선은 1977년까지도 운영되었으며 철도박물관도 있다.

 

암바라와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인 일본 점령기간에는 최대 15,000명의 유럽인이 수용된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일본의 항복과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에 이어 1945 1120 ~1215일까지 암바라와 주변에서 인도네시아군과 영국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연합군과 NICA 부대가 암바라와와 마글랑에 있는 네덜란드 포로들을 석방시키고 인도네시아군을 무장해제 시키기 시작하면서 지역 주민들은 분노했고 연합군과의 관계는 파멸에 이른다. 그 결과 암바라와 전투가 벌어진다.

 
<한국일보 고찬유 기자 제공>
② 암바라와 의거

1945 1 4~6 3일간 중부자바 암바라와 일대에서 조선인 포로감시원으로 와서 고려독립청년당원이 된 민영학(당시 28) 손양섭(24) 노병한(25) 3의사(義士)가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한 뒤 모두 자결한 항일 의거다.

 

1945 1 4, 오후 3시쯤 일본군이 자바포로수용소 스마랑분소 제2분견소로 쓰던 암바라와의 성요셉성당에서 출발한 트럭이 8~9㎞ 정도 갔을 때, 고려독립당 혈맹당원인 손양섭 의사가 운전병에게 총을 겨누며 성당 옆 무기고로 가서 민영학, 노병한 의사와 함께 총 네 자루와 총탄 2천 발을 탈취한다. 무기고는 현재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후 5시 분견소장(대위) 관사(현 농업학교사무실)를 습격했다. 일본군은 대규모 지원 병력을 급파한다. 1 5일 민영학 의사가 자결한 옥수수 밭에는 푸르디푸른 벼가 자라고 있었다. 남은 두 의사는 시내로 돌아가 의거를 계속했다고 전해진다. 1 6일 위생자재창고에서 자결한 손양섭, 노병한 의사는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민 의사가 숨진 옥수수 밭과 고 정서운(1924~2004) 할머니 등 조선처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3명이 머물던 암바라와 성 앞에 위치한 위안소에서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민영학 의사가 자결한 옥수수밭>

 암바라와 성과 위안소

암바라와 성은 1834-1845년에 세워졌으며 1865년 큰 지진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1927년에 교도소로 사용되다가 일본군 점령 당시인 1942-1945년에는 빌렘 교도소, 군 막사가 있었고, 부속 건물로 위안소, 위안부병원이 있었다. 1945년 이후에는 TKR 본부 (안보 군), 1950년 이후에는 교도소와 군대 막사로 사용하고 있다.

 

<암바라와 성>
<화장실로 변한 위안소>

 

짐승우리보다 못한 위안부들의 처소를 보고 우리는 이방인처럼 서 있었다. 위안소는 충격적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권유린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소름끼치는 인간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인류보편적인 가치인 인권, 평등, 정의를 외치는 일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를 깨닫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무상함이 가득한 이 위안소에 조선처녀 13명이 끌려와서 3명은 가혹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죽고, 3~4명은 방공호에 생매장되고, 6~7명 정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아난따 뚜르 프라무디아가 쓴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이야기』 (원제: 일본 군부압제하의 처녀들)이라는 책도 떠올랐다. 절규하다 못해 침묵으로 밖에 말할 수 없는 무겁고 아픈 이름 위안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본 병사, 하루에도 30~50명에게 처참하게 강간당하고 성병에 걸리고 임신하는 소녀들. 강간당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다가, 낙태하기 위해 아편에 중독 당했던 그들. ‘황군 병사에게 주는 선물,’ ‘위생공중변소’로 취급되었던 이름. 생존, 인간존엄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었다.

 

< 인도네시아 한인 문화탐방단이 19일 70여년 전 조선 소녀가 끌려왔던 중부자바주 암바라와의 일본군 위안소를 찾았다. 방 한 칸은 화장실로 변했다 (사진=한국일보 고찬유 기자 제공) >

(후략)

출처: 자카르타 경제신문

https://www.pagi.co.id/bbs/board.php?bo_table=culture_haninni&wr_id=124

 

 

 

저 암바라와 추모비가 3월에 착공했으니 4개월 넘게 지나 7월말이 된 시점에서 거의 다 끝났으리라 생각했지만 현지 역사전문신문 히스토리아(Historia)의 기자이자 역사협회 히스토리카 인도네시아(Historika Indonesia)의 발기인인 헨디 기자로부터 7월 23일 경 다음과 같은 문자가 왔다.

 

 

Selamat siang, Pak Bae...

Kemarin saya ke Ambarawa, Jawa Tengah untuk menelusuri keberadaan bekas markas tentara Jepang yang di sana orang-orang Korea pernah melakukan pemerontakan kepada militer Jepang.

Di Benteng Willem I Ambarawa, saya melihat satu "monumen yang belum jadi".

Katanya itu dibuat oleh pihak Korea bekerjasama dengan Kodam Diponegoro.

Namun anehnya, monumen itu seperti "tidak sempurna" dan belum jadi. Katanya ada masalah.

Pak Bae tahu itu kenapa?

Terimakasih

 

암바라와에 출장취재를 간 헨디 기자가 만들다 만 추모비를 보고 사람들에게 물으니 중간에 문제가 생겨 완성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한테 무슨 일인지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물어본 것이다. 그는 다음 사진들도 함께 보내왔다.

 

 

추모비를 세우겠다고 만든 밑단 부분인데 저 상태로 장기간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5월 말 경에 한인회 인사를 만나 점심식사를 하던 자리에 이 추모비 건립이 순탄치 않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는데 당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프로젝트가 한국-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에 맞추어 준비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아마 대사관에서 지원승인을 받지 못했는지 대사관이나 자카르타 한인회의 참여 없이 진행된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초 연합뉴스 기사에서도 돈이 모자라다는 얘기가 나와 저 기사의 목적이 모금을 위한 것이라는 것 정도만 눈치챘을 뿐이다.

 

이번에 관련 인사들과 헨디 기자의 취재 결과 등을 받아 취합해 본 바 확인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본건은 살라띠가 소재 사산자바문화연구소 이태복 소장이 주축이 되어 중부자바 한인회(회장 채환)를 움직이고 스마랑 시청과 현지 지역군사령부(디포네고로 부대)의 동의를 받아 진행됨..

 

2. 이태복 소장이 해당 내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됨. 연합뉴스를 타고 해당 내용이 한국에도 실리자 이를 스크랩한 주한 일본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하고 관련 훈령이 주인도네시아 일본대사관에 내려온 것. 현지 인도네시아 대사관이 외교 경로로 스마랑 시청 등과 접촉해 해당 추모비 건립 반대의사를 표하며 최소한 문구를 고치라고 요구했다고 하는데 당초 한인 위안부들과 포로감시원, 군무원으로 끌려와 의거를 벌이다 목숨을 잃은 한국인들을 추모하는 내용의 추모사 또는 추모시가 실릴 예정이었으나 일본 측은 '태평양 전쟁 전몰자'를 일괄 추모하는 내용으로 바꿔달라고 했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태평양 전쟁 전몰자란 한국인들이 아니라 태반이 일본인들이므로 결과적으로 현지 한국인 기업, 커뮤니티, 기관들이 비용을 출연해 일본군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는 꼴이 된 셈. 

 

3. 거기에 현지 군부대에서 아마도 당초에 해당 추모비가 세워질 토지에 대한 임대료나 관리비 등에 대한  시전 약속이 되어있었을 텐데 갑자기 진행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의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다는 것. (이 부분은 크로스체크가 필요함)

 

4. 사산자바문화연구소나 중부자바 한인회로서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없어 결국 추모비 건립은 저 상태에서 방치되고 만 것.

 

 

아마도 이런 상황을 미리 예견했던 대사관 측에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우려해 이 사업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기까지 가면서 들어간 비용은 모두 매몰비용이 될 참이다.

 

아무리 취지가 좋았다고 하지만 교민사회의 의견수렴이나 관계기관 동의나 조율없이 진행한 사업이 중간에 발생할지도 모른 문제들에 대한 대비도 없이 졸속 진행한 후 문제가 생겨 저렇게 방치해 버리는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당분간, 이 문제는 출구나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하나 제안하자면, 일본과 대결구도로 나갈 것이 아니라 가룻에 있는 양칠성 며 옆 두 명의 일본인 동료들의 묘도 손질해 단장해 주는 식으로 일본 측을 회유하여 암바라와 추모비 문구에 대해 좀 더 전향적인 방향의 합의를 보거나, 해당 추모비 장소를 다른 취지와 방향으로 전용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2023.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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