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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공항과 비행기에서 남는 시간

beautician 2022. 10. 25. 11:15

자투리 시간 찬사

 

 

1시간 7분.

수라바야에서 자카르타까지 비행기가 날아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다.

오후 4시 30분에 출발하는 그 비행기를 타기 위해 우린 아침 10시반에 호텔을 체크아웃했고 간단한 기념품 구매, 점심식사를 한 다음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세 시간 넘는 자투리 시간이 생긴 것이다.

 

대개의 경우 난 어딘가 앉을 곳이 있고 와이파이도 터지는 곳에서 겪게 되는 자투리 시간을 환영하고 한껏 즐기는 편이다.

 

보통 긴 기사를 하나 번역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2시간 전후, 수필을 하나 쓰는 것도 그 정도 시간이 걸린다. 인천공항에서 트랜짓을 위해 다섯시간을 기다려여 한다면 난 기사 하나 번역하고 근사한 수필도 하나 써놓고도 아직 한 시간 정도의 시간여유를 가지며 뭘 더 해야 할지 선택의 사치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오늘 수바바야 공항에서의 3시간 남짓 시간은 일행들과 함께여서 그런 시간을 누리진 못했다. 9월28일 하루종일 진행된 인도스프링과의 미팅과 공장 공정견학에 한국에서 온 일행들은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었고 특히 통역이 시원시원하고 명확해서 좋았다고 한다. 달러강세로 원화 가치가 몇 십원씩 떨어지는 상황에서 달러로 비싼 보수를 받고 한 통역인데 사용자들이 만족하지 않았다면 곤란할 뻔했다.

 

그래서 28일 밤 호텔방에서 21년산 발렌타인을 까면서 뒷풀이를 하며 이번 출장을 주도한 22기 선배와 보령 공장에서 온 블루칼라 세 명과는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었지만 그들 앞에서 랩톱을 열어놓고 공항 자투리 시간에 내 글을 쓰기엔 좀 눈치가 보였다. 어차피 더 이상 통역할 일이나 상황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내 할 일 다 끝났으니 난 모르겠다고 다른 일을 하는 건 사흘치 통역비를 풀로 받은 사람으로서 적절치도 프로페셔널하지도 않은 일이다.

 

그래서 세 시간 남짓 시간 내내 이어진 오랜 대화.

뭐, 그것도 썩 나쁘진 않았지만 원래 내가 내 시간을 운용했다면 그 시간에 기사들을 스크랩하며 주간 이슈들을 살폈을 것이다. 전날 밤 뒷풀이로 술이 들어가 밤에 하기로 했던 기사 선정과 번역작업을 못하고 잠이 들었던 상황. 새벽 4시에 일어나 못한 일들을 따라잡은 상황이어서 사실 잠이 부족한 상황. 차라리 잠을 잤으면 좋을 뻔했다.

 

그리고 결국 시작된 보딩.

비행기 안에 올라 타고서야 나를 제외한 4명 모두 20번 대 좌석번호였는데 나 혼자 44번 저 뒤쪽에 동떨어져 앉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쾌재를 불렀다. 진정한 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승객들로 꽉 찬 비행기, 가죽 잠바를 입고 좌석 공간을 풀로 사용하며 의자 팔걸이의 내 부분을 침범해 온 옆 자리 인간, 랩톱을 완전히 펴기 어려운 좌석 앞뒤 공간 등의 문제가 있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 후 마침내 갖게 된 나 혼자만의 시간을 난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잠시 눈을 붙여야 했지만 난 랩톱을 열고 짧은 글을 쓰기로 했다. 이게 끝나고 나면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주간 이슈를 쓰려 한다. 주간이슈 정리는 매주 하는 루틴이다.

 

비록 좌우에 사람들이 꽉 차 있고 내 랩톱 모니터에 시선이 모이지만 아무도 내가 치고 있는 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내가 가장 즐기는 순간이다. 인파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순간.

 

내가 좀 이상한 놈일까?

뭐, 상관없지만.

 

2022. 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