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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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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세상이 멸망할 때 글쓰기를 택하는 사람들

beautician 2022. 10. 27. 08:23

사과나무와 글쓰기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사실 세상이 멸망할 때엔 우리가 무슨 짓을 하며 버둥거리든 다 부질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말처럼 그 순간 정말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 사과열매 맺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 그의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는 가장 효과적인 행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저 말을 한 철학자는 코 앞에 닥쳐온 세상의 종말 앞에서 절망으로 몸부림치거나 남은 시간 동안 술과 마약, 약탈 등의 형태로 그간 억눌러온 모든 욕망을 유감없이 드러낼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고고함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난 굳이 그 고고함에 묻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혼자 종말을 맞아야 한다면 아마도 골방에 들어가 글을 쓸 것 같습니다. 내겐 그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5, 자카르타 한복판에서 군경의 총격으로 뜨리삭티 대학생들 중 사망자가 나오면서 더욱 격렬해진 반정부 시위는 마침내 대규모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해 32년간 철권으로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던 수하르토 대통령을 끌어내렸지만, 그 이면에서 벌어진 빈민들의 폭동과 약탈은 자카르타를 2주 이상 전쟁터처럼 만들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우리 교민들이 이전에 알고 있던 세계가 그때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난 한국의 동업자들이 받은 봉제 오더를 인도네시아 공장에 넣고 생산과 수출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오더가 인도네시아 대신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정권 교체와 자카르타 폭동이 야기한 전국적인 혼란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납기를 맞춰 오더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란 우려가 어느 때보다도 커졌기 때문입니다.

 

이후 1년이 지나도록 아무 성과를 내지 못한 나는 본국 철수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만일 그때 한국에 정착했다면 난 지금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일단 숨을 고르기 위해 1999 6월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자카르타에 벌려 놓은 것들을 다 정리하지도 못했고 임대기간이 남은 사무실과 직원들을 뒤로 하고 떠나면서 과연 다시 자카르타에 돌아갈 수 있을지, 한국에서 현지 직원들 월급을 보내줄 수는 있을지 무엇 하나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한국의 동업자들은 생산지를 중국으로 바꾼 후 급격한 환율 차이로 돈벼락을 맞고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나를 중국 OEM 사업에 끼어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대기업을 그만두고 나온 동료들과 나름 인생을 건 베팅을 하며 함께 회사를 세운 것인데 당시 우리들이 가졌던 동업의 연대는 그만큼 느슨했습니다.

 

절치부심 하며 여러 업체들을 만난 끝에 한 제약회사 지사장이 되어 3개월 만에 자카르타에 돌아가지만 그 회사와도 두 달 만에 계약이 깨지면서 난 또 다시 현지에서 낙오하게 됩니다. 사람 인생이란 게 정말 다이내믹하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밤을 지새며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카르타를 떠나기 전인 1999년 초, 세상이 내게 칼을 겨누고 조여 들던 시절, 무엇을 시도해도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 모든 노력이 무위로 끝나고 더 이상의 어떤 시도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나를 질식시키려 짓누르던 그때, 10여년 전 전역하면서 완전히 놓아버렸던 글쓰기를 떠올렸습니다.

 

난 늘 글쓰기를 좋아했고 그게 군시절까지 이어졌습니다. 전방 반공교육시설 관리부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일과 후엔 소대원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일인용 장교숙소에서 잔뜩 사놓은 원고지를 꺼내 놓고 소설을 썼습니다. 군인이라 군대에 대한 글을 쓴 것이 문제였죠. 더욱이 때는 아직도 신군부 독재 시절이었습니다. 부대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내 숙소에 쉬러 들어간 선배 중위가 책상 속에 잔뜩 쌓인 내 원고를 읽어보고 노발대발했습니다. 당시 우리 부대가 자주 겪던 보안부대와의 충돌을 소재로 한 소설이었는데 그 선배는 내 눈 앞에서 그 원고 수백 장을 발기발기 찢어 소각하면서 이건 반역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게 1987년의 일이었고 난 그 이후 단 한 번도 출장보고서나 제안서 이외의 글을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자카르타에서 다시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켜면서 세상이 내 머리 위로 무너지고 있는데 이게 무슨 헛발질이냐고 스스로 생각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를 부숴버릴 듯 짓누르는 무거운 좌절과 절망을 잠시라도 잊을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요가나 명상은 해본 적도 없었고 어딘가 기도원에 들어가 나무뿌리를 붙잡고 통성기도에 매달리는 건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최소한 글 쓰는 건 고고한 일이었고 글을 쓰는 동안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쓴 글 몇 편을 당시 온라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딴지일보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1998년에 창간된 딴지일보는 당시 엄혹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는 참신하고도 맹랑한 콘텐츠를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김어준 총수 혼자 하다시피 했으니 기사가 실린 메인 페이지 업데이트는 느려 터졌지만 게시판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어 글을 썼습니다. 그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내가 절망하고 있다 해서 거기 암울한 이야기들만 풀어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내 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단상, 논평 같은 것들을 썼습니다. 그래야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은이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첫 사랑 이야기를 올렸는데 갑자기 많은 감상평이 이메일로 들어와 깜짝 놀랐습니다. 게시판에 올린 글을 누군가 납치해 메인 페이지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그 수많은 이메일 중 김어준 총수가 보낸 것도 있었습니다. 귀하를 인도네시아 특파원으로 임명하니 앞으로 오직 충성만이 살 길이란 취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당시 그런 이메일을 남발했다는 뒷얘기를 나중에 다른 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날 오랜만에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물론 그는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죠.

 

그렇게 10년도 넘어 다시 시작한 글쓰기는 인생의 고비마다 큰 위안이 되곤 했습니다. 이후 2000년대 초에 자카르타에서 한 번 파산을 맞았고 겨우 재기했다가 2014년부터 다시 급격한 하락세를 탔습니다. 급기야 베트남에 이주할 생각으로 13개월 동안 호치민과 하노이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정착에 실패하고 자카르타로 돌아왔을 때 전에 하고 있던, 그래서 베트남 갈 때 직원에게 맡겨 두었던 현지 사업은 거의 무너져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사업을 되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소용없었어요.

 

글은 역시 그럴 때 잘 써집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모든 걸 다 내려놓았을 때 말입니다. 늘 그렇듯 몇 년 후 상황은 다시 호전되기 시작했지만 2015~2016년 사이 경제적 밑바닥을 헤매던 일년 넘는 기간동안 난 거의 매일 밤 인도네시아 역사와 무속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썼습니다. 공모전에 글을 내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의 일입니다.

 

요즘도 일하다가 심란할 때면 랩톱에 새 창을 열고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현지 기사나 동화를 번역하기도 하고 간단한 단상을 글에 담아 블로그나 밴드에 올려놓기도 합니다. 글을 써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이유는 사실 닥친 문제를 잊는 게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이 정리되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가,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내가 얼마나 양보해야 하는가에 따라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 따름이죠. 그리고 그 문제가 필연적으로 당시의 글 속에 남아 예전에 내가 어떤 일로 그토록 고민했는지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새삼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참 특별한 경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