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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부야 함카 (Buya Hamka) (4)

beautician 2021. 4. 17. 12:56

함카의 메카 시절

 

 

고향 반응과 순례 출발

 

말릭은 고향에 돌아올 때 환영받았지만 종교학자라기보다는 단지 연설가로 받아들여졌다. 아랍어 문구나 단어를 읽을 때 말릭은 어순(tata)과 문법(nahwu), 단어의 변화(sharaf)를 잘 이해하지 못해 아랍어가 유창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타왈립 학교에서 교육을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랍어를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한 결과물은 늘 다른 사람들이 한 것보더 훨씬 나았지만 함카 스스로도 자산의 아랍어 발음이 자주 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말릭은 풀이 죽었다.

 

아버지 역시 연설만 잘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좀더 공부를 하라고 조언했다.

 

무함마디야가 빠당빤장에 학교를 열었을 때 그는 자바에서 돌아온 다른 친구들과 함께 교사로 지원했다. 모든 지원자들은 이름과 주소, 학력을 적는 양식을 다 채워야 했고 졸업장이나 수료증 같은 학력증빙을 첨부해야만 했다. 합격자 발표일에 말릭이 떨어진 이유는 수료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후 두 번째 만나는 큰 실망감이었다.

 

그는 자신의 슬픈 감정을 할머니에게 자주 털어놓았다. 할머니는 말릭의 아버지가 말릭을 메카에 보내 10년간 공부시키기로 약속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아버지를 두려워한 말릭은 아버지가 자길 보내기 전, 자신이 먼저 스스로 메카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집을 떠날 때에도 아버지에게 어디로 간다고 분명히 하지 않고 그저 먼 곳으로 간다는 정도만 얘기해 두었다. 그래서 당연히 여비도 요구하지 못해던 그는 돈이 모자라 마닌자우에서 빠당까지 도보로 걸어가야 했다. 그가 빠당에서 다시 배를 타고 블라완(Belawan) 항구에 도착하고서야 거기서 만난친구 이사(Isa)가 여비를 보태주었다.

 

1927년 2월 초, 하지를 떠나는 인도네시아인들 무리가 출발하는 라잡(Rajab)월에 말릭도 그들 사이에 섞여 블라완 항구를 떠나 제다(Jeddah)로 향했다. 그는 알꾸란을 잘 읽었으므로 선상에서 사람들은 그를 존중하여 이슬람선생이란 의미로 아젱안(ajengan)이라 불렀다.

 

선상에서 함카는 한 반둥 소녀에게 마음을 빼았겼는데 결혼제안까지 받고서도 결국 이를 거절했다. 당시엔 선상에서 결혼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고 함카는 훗날 회고했다.

 

 

1900 년대 메카의 하람사원(Masjidil Haram). 1927년 메카로의 여행은 함카에게 훗날 <카바의 보호 아래(Di Bawah Lindungan Ka'bah)를 쓰게 되는 영감을 주었다.

 

메카에 도착한 그는 안내인 하지 ‘쉨’ 아민 이드리스의 집에 묶게 되었고 생활비를 위해 미낭까바우 출신 울라마 아흐맛 챠팁(Ahmad Chatib)의 장인인 뚜안 하미드 쿠르디(Tuan Hamid Kurdi)의 인쇄소에서 일했다. 일터에서 그는 아랍어로 된 고전 경전들과 책들, 이슬람 뉴스레터를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아랍어는 그가 완벽하게 터득한 유일한 외국어였다.

 

하지 순례가 시작될 무렵 그는 동인도 연맹(Persatuan Hindia-Timur)이라는 인도네시아인들의 모임에 가입했다. 그 즈음에 그는 이미 유창한 아랍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 모임이 인도네시아인 순례자 무리를 위한 하지순례 지원 프로그램을 계획하자 말릭은 사절단을 이끌고 입누 사우드(Ibnu Saud)의 아들 아미르 파이샬(Amir Faishal)과 하람사원의 큰 선생(Imam) 아부 사마(Abu Samah)를 만났다.

 

강의는 하람 사원 콤플렉스에서 진행되었고 말릭도 종교강의를 했으나 곧 하지 안내원들에게 금지당했다.

 

한여름에 하지 시즌이 왔을 때 말릭은 심한 두통으로 몸져 누워 아무 데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자정이 지날 때까지도 정신이 들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쉽게 죽었기 때문에 그 역시 아마 자신이 죽을 때가 온 것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를 마치면 각각 쉨(syekh -아랍인)이 소르반(Sorban)이라 하는 터번을 씌워주고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말릭은 이 의식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는 이 의식을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도 안되는 규칙”이라 폄하했다.

 

한동안 메카에 머물 계획을 세운 말릭은 아구스 살림(Agus Salim)을 만난 후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구스 살림은 세계 이슬람 회의가 취소되어 출발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그의 빈 시간을 말릭은 인도네시아 정치상황에 대해 배우는 기회로 삼았다.

 

아구스 살림은 거의 1주일 간 하인처럼 그를 모신 말릭에게 고향에 돌아가라고 조언했다. “활동이나 학습, 투쟁 등에 있어 당신이 할 수 있는 더욱 중요한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소. 그러니 이제 고국에 돌아가 스스로를 더욱 계발시키도록 하시오.” 아구스 살림은 그렇게 조언했다.

 

아구스 살림. 그는 뿌장가(Pujangga) 시인이었고 인도네시아의 초대 외무장관이었다.
방카(Bangka) 유배생활 시절의 수카르노와 아구스 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