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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깔리만탄 민화] 냐뿌와 영리한 모렛

beautician 2022. 5. 27. 12:04

냐뿌와 영리한 모렛

 

옛날 동부 깔리만탄에 까하얀 강(Sungai Kahayan)으로 흘러드는 시안강(Sungai Sian)이란 이름의 작은 지류가 있었습니다. 그곳 강어귀에는 잘 정돈된 마을이 번영하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도 서로 도우며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수적들이 자주 쳐들어와 약탈을 해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한번 공격을 받으면 가옥들이 모두 부서지고 계단과 기둥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나뒹구는 등 마을은 매번 난장판이 되었고 많은 이들이 죽고 상했습니다.

 

강도들의 잔혹함에 마을 주민들도 더 이상 가만이 있지 않았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장기를 들고 저항에 가담해 강도떼와 치열한 전투가 벌여 마침내 물리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상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죽은 이웃들을 매장하고 난장판이 된 동네를 정리하고 재건했습니다.

 

또 다시 한 차례 공격을 막아낸 후 모든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마을이 더 이상 강도떼의 공격을 받지 않을 방법을 모색했는데 냐뿌(Nyapu)라는 이름의 주민은 조금 다른 의견을 냈습니다.

“외람되지만 우리가 이 마을을 버리고 떠나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찾아 마을을 새로 만든다면 우리가 지금 이 마을을 지킬 이유가 없어요. 수적들의 목표가 된 이상 그들은 시시때때로 계속 찾아올 것이니 우리가 이 마을에서 지켜내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강도들은 반드시 더 많는 숫자를 끌고 우릴 공격해올 겁니다. 우린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막아내지만 매번 많은 사람들이 죽고 상하지 않습니까?”

냐뿌의 말을 시작으로 열띤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냐뿌의 의견에 그의 처 이외엔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주민들 대부분은 마을에서 계속 버티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귀신들을 불러들여 강도들로부터 마을을 지키도록 하는 의식도 치르고 물리적으로도 요새를 구축하고 병장기들을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모든 남자들은 밤낮으로 경계를 서거나 순찰을 도는 데에 동원되었고 여자들은 그들을 먹일 음식을 준비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저녁밥을 짓던 한 여인이 강 하류로부터 주꿍(jukung)이라는 종류의 선박들이 마을을 향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강도떼를 태운 배들이었습니다. 마을은 공포로 아수라장이 되며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주꿍(jujung)은 노를 젓는 방식의 긴 배

 

그 소리를 들은 남자들은 그동안 미리 준비하고 연습한 대로 쉬고 있던 다른 남자들을 깨워 강도떼에 대항할 준비를 했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또 다시 벌어졌고 그 결과 마을사람들이 또 한 번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을의 피해는 만만찮았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죽었고 과부가 된 부인들과 고아가 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마을에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이 상하고 마을이 크게 파괴된 상황에서 냐뿌는 다시 한번 마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자 냐뿌는 자신과 아내 단 둘이서라도 마을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따라올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 부부 둘만이라도 떠나겠습니다. 우린 상류로 올라가 개간할 곳을 찾을 겁니다.”

냐뿌는 마을사람들에게 그렇게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출발하려 하니 이번 전투로 남편과 가장을 잃은 사람들 40명가량이 냐뿌 부부와 함께 가려고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충분한 물자를 준비해 주쿵 배에 싣고 까햐얀 강 지류를 따라 물살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갔습니다. 며칠 간 여행을 계속한 끝에 미리 강(Sungai Miri) 지류로 들어선 후 더욱 상류로 올라가 나뽀이 강(Sungai Napoi)강 지류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나뽀이 강 상류로 계속 진행하여 이전에 누구도 온 적 없는 지역에 도착해 그곳 강을 볼로강(Sungai Bolo)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곳은 물이 맑고 경관도 수려했습니다. 날씨도 선선한 그곳 강변 비옥한 땅에 울창한 숲이 펼쳐졌습니다.

그곳은 실개천들이 많이 흐르고 물이 충분해 토지도 비옥해 냐뿌는 사람들에게 그곳에 정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살 집을 짓기 시작했고 불과 일주일 만에 작은 마을이 만들어졌습니다. 냐뿌는 그곳 이장이 되었고 사람들은 마을 이름도 냐뿌 마을(kampung Nyapu)이라고 붙였습니다.

 

냐뿌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토지를 개간해 벼를 심었고 열심히 일한 끝에 많은 수확을 낼 수 있었습니다. 냐뿌와 마을사람들은 오랜만에 행복을 만끽했습니다. 그리고 냐뿌의 아내가 임신해 예쁜 딸을 낳으면서 그들의 행복은 더욱 커졌습니다. 냐뿌 부부는 딸의 이름을 모렛(Moret)이라 짓고 사랑을 다해 양육했습니다. 모렛이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냐뿌는 딸을 밭과 들로 데리고 나가 자연 속에서 지혜롭게 사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모렛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영리한 아이로 성장했고 마을사람들 모두가 모렛을 사랑했습니다.

 

한편 하류 시안강 지류의 마을은 또 다시 강도떼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마을을 방어할 능력을 상실한 그곳 사람들은 결국 마을을 버리고 냐뿌 마을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유입되면서 냐뿌 마을은 더욱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인으로 성장한 모렛은 또래 남자아이들을 매혹시키기 충분한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습니다. 만나는 남자들마다 모렛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모렛은 남편감을 고르는데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능력 있는 남편감을 원했고 마을 전체의 번영과 평화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마음을 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냐뿌 마을에서 가장 큰 창고를 하루 사이에 과일열매들의 씨로 가득 채울 수 있어야 한다는 청혼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 과일 씨는 혼인잔치가 끝나고 나면 마을사람들이 소유한 밭에 심을 용도였습니다. (우물을 파라고 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미 많은 마을 젊은이들이 모렛에게 청혼을 넣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제시한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모렛 역시 자신이 쉽지 않은 조건을 내걸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 조건을 충족시킬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이어야만 자신의 남편이 되어 이 마을을 든든히 가꿔 갈 터였으니까요.

 

그러다가 다른 마을에 사는 까랑(Karang)이란 젊은이가 찾아와 청혼을 넣었습니다. 그는 잘생긴 젊은이였고 높은 도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도력으로 모렛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 장담했고 모렛은 그 증거를 확인하길 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아무리 잘생겨도 예외는 없습니다. 이 마을 가장 큰 창고를 과일 씨로 가득 채워야만 당신의 청혼을 수락하겠어요.”

모렛은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먼저 말씀하신 조건부터 수행하죠.”

까랑은 당당히 웃으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까랑은 곧바로 숲으로 들어가 도력을 발휘해 어마어마한 양의 과일 씨를 모아 마을에서 가장 큰 창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으므로 모렛은 까랑의 청혼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며칠 후 성대한 혼인식이 열렸고 모렛의 아버지인 냐뿌 이장은 거기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까랑이 모아온 과일 씨를 파종하라고 권고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혼인식 다음날 반나절 만에 과일 파종을 마쳤습니다. 모렛은 그렇게 마을이 날로 번영해 가는 모습에 마음이 벅찼습니다.

 

몇 해 후 모렛은 까랑의 남녀 아이들을 낳았고 그때 심은 과일나무들이 어느 새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모렛과 냐뿌 마을 사람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수확한 벼를 모아놓는 룸붕 빠디(Lumbung padi) 창고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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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깔리만탄의 이 이야기는 영웅과 전쟁, 권모술수와 권선징악을 다룬 다른 동화나 민화와 달리 한 공동체의 번영과 평화에 초점을 맞춰 스토리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전쟁을 이기고 용들을 물리치는 용사들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행정개혁가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이 냐뿌와 모렛의 민화는 재평가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끝)

 

 

출처:

https://histori.id/kisah-nyapu-dan-moret-yang-cerd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