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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깔리만탄 민화] 신령한 물소의 강(Sungai Kerbau Keramat)

beautician 2022. 5. 28. 11:59

 신령한 물소의 강(Sungai Kerbau Keramat)

 

인도네시아 신수도가 들어설 꾸따이 꺼르타느가라 지역의 꺼르바우 강 위치

 

동부 깔리만탄의 마하캄 강(Sungai Mahakam)은 많은 지류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대도시 사마린다를 지나가는 꺼르바우 강(Sungai Kerbau)입니다. ‘물소의 강’이라고 번역되죠. 아마 물소들이 떼를 지어 건너던 강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수백 년 전 벌어진 한 사건으로 인해 이 강을 지금도 신성시하고 있습니다

 

14세기 중반 꾸따이 꺼르타느가라 왕국(Kerajaan Kutai Kartanegara)은 아지 마하라자 술탄(Aji Maharaja Sultan)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꾸따이 꺼르타느가라 왕국의 세 번째 술탄으로 역사적으로도 1360년부터 1420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치세 기간 동안 꾸따이 마르타뿌라(Kutai Martapura), 스리방운(Sri Bangun), 스리 문타이(Sri Muntai), 딴중(Tanjung), 바하우(Bahau) 같은 마하캄 강 유역의 왕국들을 꾸따이 꺼르타느가라 왕국 밑으로 복속시켜 통일시켰고 왕국은 더욱 번영하고 강성해졌습니다. 왕국에는 물자와 자원이 넘쳐났고 인근 여러 왕국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지 마하라자 술탄은 외부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왕도를 더욱 아름답고 화려하게 가꾸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궁전도 우아하고 매끄러운 조각들로 장식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런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신료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 회의가 진행되는 도중 왕세자인 망꾸부미 왕자가 자바에서 조각장인을 불러오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자바에는 마자빠힛 왕국이 절정기를 맞고 있었는데 크게 발전한 건축술과 조각술은 꾸따이 꺼르타느가라에도 정평이 나 있었으므로 술탄은 그 제안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곧바로 출발한 사절단은 자바의 왕에게 술탄의 의향을 전했고 마자빠힛의 국왕은 흔쾌히 뛰어난 궁정 조각가 두 명을 꾸따이 꺼르타느가라로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두 명의 조각가들은 형제였습니다. 그들은 여러 날 배를 타고 여행한 끝에 꾸따이 꺼르타느라가 왕국에 도착해 아지 마하라자 술탄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잘들 왔소. 난 그대들이 목공에 뛰어나다고 들었소. 난 이 왕궁의 모든 방들을 목공예품들로 가득 채우고 싶소.”

“폐하, 저희들의 적은 재주를 폐하를 위해 쓰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양이나 형상을 새기길 원하시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두 장인 중 형이 물었습니다.

“나는 꾸따이, 바하우, 끈야, 딴중의 조각기술이 자바의 예술적 기술과 결합된 결과물을 원하오.”

술탄의 대답에 두 장인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폐하. 즉각 그렇게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자바에서 온 형제 장인들은 기민하게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엄선한 목재들을 가지고 놀라울 만한 조각품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영험한 존재의 도움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해야 할 일들을 모두 짧은 시간 안에 끝마쳤습니다. 이제 꾸따이 꺼르타느가라 궁전은 수려하고 장대한 목제 조각품들로 가득 찼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목제 부조 조각작품 들

 

그들의 작품에 매료된 아지 마하라자 술탄은 장인들에게 큰 상을 내렸고 가족들과 함께 궁전 안에서 사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자바에서도 궁전 조각가로 일했던 두 사람은 왕실의 법도와 궁중예절을 잘 지켰고 술탄 역시 그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그 조각가들에 대한 술탄의 관심과 칭찬이 잦자 왕실의 신료들이 질투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궁에서 쫓아내려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어느날 그들은 술탄도 모르게 비밀 회합을 가졌습니다.

“술탄 폐하에게 무슨 말을 해야 저놈들을 궁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

이게 그날 그들의 회의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쉽사리 그 문제의 해법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숙고한 끝에 한 관료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 두 명의 조각가들이 궁녀들에게 음탕한 짓을 했다고 모함해 봅시다. 그런 혐의라면 격분한 폐하가 반드시 그들을 추방하라 명할 것이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그 생각에 동의했습니다.

 

다음날부터 조각가들에게 대한 아지 마하라자 술탄 앞에서 비방과 참소가 시작되었고 결국 술탄은 크게 화를 내며 그들의 추방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관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한 것을 요구했습니다.

“폐하, 만약 저들을 살려 둔다면 다른 왕국에 찾아가 더 아름다운 궁전을 만들어 줄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술탄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기껏 멋진 궁전을 만들어 놓은 지금 다른 왕국에게 경쟁을 허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존심과 질투심이 술탄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대들 말이 옳다. 그 두 사람을 당장 붙잡아 처형하라!”

아지 마하라자 술탄은 그렇게 명령했습니다.

 

두 조각가는 곧바로 잡혀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이 집행되지 직전 두 사람 중 동생은 간신히 몸을 빼내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몰랐지만 그는 자바에서부터 그런 능력을 감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형까지 구할 능력은 되지 못했습니다. 형은 결국 높은 장대에 매달려 죽게 되었는데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술탄과 신하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열은 무너져 산산조각 나고 열하나는 발밑 깔개가 될 것이다.” 그의 유언이 무슨 뜻인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궁정 점술가는 죽은 조각가가 남긴 말 뜻이 10년 후 꾸따이 꺼르따느가라가 무너지고 11년 후엔 왕국의 도성이 기초까지 파헤쳐져 정글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훗날 그 점술사의 말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기간이 딱 맞아 떨어지진 않지만 후대 왕인 아지 술탄 알리이딘(Aji Sultan Aliyiddin)이 다스리던 1752년경 꾸따이 꺼르타느가라 왕국은 다또 탄 퍼라나(Dato Tan Perana)라는 이가 이끄는 필리핀 남부의 술루 커분탈란(Sulu Kebuntalan)이란 이름의 해적들 공격을 받아 무너졌고 예전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며 번성했던 도성은 완전히 파괴되어 정글이 되었다가 지금은 꾸따이 라마(Kutai Lama)라는 작은 마을이 되어버렸습니다.

 

교수형을 당해 죽은 조각가의 시신은 꺼르바우 강에 버려졌는데 놀랍게도 그 시신이 강의 흐름을 따라 하류로 떠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상류 쪽인 사마린다 도시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들은 꺼르바우 강이 신령한 곳이라고 생각하며 강변에 조각가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는데 지금까지도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그 무덤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꺼르바우 강변에 있는 마자빠힛 조각가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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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적당히 섞인 이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이야기 속에 깔린 복선, 요즘 말로 하자면 ‘던져놓은 떡밥’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자바 왕국에서 데려온 조각가들은 왜 형제로 묘사되었을까요?

처형 직전에 달아난 동생은 어떻게 된 걸까요? 자바로 돌아갔을까요?

자바의 왕국, 시기적으로 따지면 아마도 마자빠힛 왕국에서 파견했을 그 조각가들을 죽였다면 꾸따이 꺼르타느가라는 당시 강성한 마짜빠힛 왕국과의 외교적 문제까지도 각오했던 것일까요?

강성했던 국가가 필리핀 해적들에게 멸망했다는 건 정말 역사적 사실일까요?

 

그런 얘기들이 다 풀리지 않은 이곳에 이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신수도 건설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2024년까지 정부청사들을 짓는 1차 공사를 마치고 2025년에 민간부문을 포함하는 2차 공사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꾸따이 꺼르타느가라 왕국의 영광이 재현되려는 것일까요?

 

그 조각가의 저주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일까요?

 

출처:

https://histori.id/legenda-sungai-kerb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