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니 민속과 주술

인도네시아 삭티(Sakti)문화의 전형: 시빠힛리다 이야기

beautician 2022. 5. 21. 12:01

시빠힛리다 – 독한 혓바닥(을 가진 녀석)

 

스룬띵 삭티 도술의 도인 시빠힛라다 동상

 

시빠힛리다(Si Pahit Lidah), 즉 ‘독한 혓바닥(을 가진 놈)’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흐릅니다. 같은 시빠힛리다라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별로 동일인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룬띵(Serunting)’이라는 단어가 한쪽에는 왕자의 이름으로, 다른 쪽에는 도술의 명칭으로 등장하고 있어요. 그 두 가지 이야기를 하나씩 소개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

옛날 남부 수마트라 수미당(Sumidang) 지역에 큰 왕국이 있었고 스룬띵(Serunting)이란 이름의 왕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쉽게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지만 처남 아리아 떠빙(Aria Tebing)과는 대체로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쪽 면의 넓은 숲 한 가운데서 경계를 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숲이 문제였습니다. 아리아 떠빙이 소유한 영지에 속한 쪽에선 버섯들이 자라나 금덩어리로 변하는데 스룬띵 왕자 쪽 버섯들은 벌레들이 들끓어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당연이 아리아 떠빙의 재산은 날로 늘어났고 그 사실을 안 스룬띵 왕자는 더욱 질투심을 불태웠습니다.

 

그런 불공평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필시 아리야 떠빙이 뭔가 장난을 쳤기 때문이라고 스룬띵 왕자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리아 떠빙을 찾아가 불만과 분노를 터트렸고 급기야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네가 뭔가 나 몰래 나쁜 짓을 한 게 틀림없어! 결투다! 내일 결투장으로 나와!”

스룬띵 왕자가 그렇게 큰소리를 쳤습니다.

“하지만 난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야 떠빙이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스룬띵 왕자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결투를 고집했습니다.

 

아리아 떠빙은 매형인 스룬띵 왕자가 높은 무술실력은 물론 도술을 배워 도검불침의 일무끄발(ilmu kebal) 신공까지 갖추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결투를 하면 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모로 궁리했지만 길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누이인 스룬띵 왕자의 왕자비를 찾아가 벌어진 상황을 설명하고 스룬띵 왕자의 약점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이건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누님이 대답해 주지 않으면 난 내일 결투에서 반드시 왕자의 손에 죽고 말 겁니다.”

그는 누이에게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누이는 난색을 표했습니다.

 “미안해. 난 내 남편을 배신할 수 없어. 그것만은 절대 가르쳐 줄 수 없어.”

 “날 믿어요 누님. 내가 매형의 약점을 알게 된다 해도 절대 그 약점을 이용해 그를 죽이진 않을 거에요.”

오랜 설득 끝에 결국 왕자비는 스룬띵 왕자의 약점에 대해 입을 열었습니다.

 

스룬띵 왕자의 도력의 비법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잡초’에 있었습니다. 아리아 떠빙은 다음날 결투 전에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잡초’를 구해 즙을 내서 창에 발랐습니다. 그리하여 벌어진 결투에서 결국 아리아 떠빙은 여러 차례 궁지에 몰렸지만 마침내 스룬띵 왕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결투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스룬띵은 자신의 비밀을 자신의 아내가 아리아 떠빙에게 이야기해 주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깊은 배신감에 휩싸인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방황하다가 시군땅 산(Guning Siguntang)에 들어가 명상을 하며 폐관수련에 돌입했습니다. 명상 중에 향 마하메루(Hyang Mahameru)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향 마하메루는 힌두신의 이름으로 최근 자바섬에서 크게 분화한 스메루(Semeru) 산도 이 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봐 스룬띵! 내가 신비한 능력을 네게 넣어주지. 어떤가?”

“부탁합니다. 향 마하메루! 그 신비한 능력을 내게 주세요!”

스룬띵 왕자가 열정적으로 답변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조건이 하나 있어. 우선 대나무 밑에서 명상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네 온 몸이 대나무 잎사귀에 덮이게 되면 그 능력을 얻게 될 거야.”

마하메루는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스룬띵은 2년이 넘게 명상수련을 했고 마침내 그의 온 몸이 대나무 잎 낙옆 더미 속에 완전히 묻히게 되자 향 마하메루가 약속한 능력이 눈을 떴습니다. 그것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는 마력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명상을 멈추고 수미당 고향에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시범삼아 강변의 있는 모든 나무들에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강변 나무들아, 모두 돌이 되어라!”

그가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자 강변 나무들이 모조리 돌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이번엔 자신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바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스룬띵 왕자는 스스로를 과시하는 오만한 인간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시빠힛리다(Si Pahit Lidah) 즉 ‘독살스러운 혀(를 가진 사람)’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부낏 서룻(Bukit Serut)의 한 민둥산에서 불현듯 자신이 그간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도술을 이용해 그곳을 울창한 산림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도술을 이용해 처음으로 한 긍정적인 행위였습니다. 순식간에 푸르른 산림이 우거지자 생계를 이을 방편이 생긴 그 지역 사람들이 스룬띵에게 고마워했습니다.

 

스룬띵은 여행을 계속하다가 까랑 아궁 마을에 들어서 한 오두막에 사는 노부부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을 한 잔 달라고 청했습니다. 노부부는 친절하고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를 잇고 그들의 노후를 돌봐 줄 후사 얻기를 오랫동안 기원해 왔는데 그것을 안 스룬띵은 그 소원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할머니의 머리칼 한 올이 옷에 붙어 있었는데 그것을 떼어 손에 쥔 스룬띵은 그 머리칼로 아기를 만든 것입니다. 노부부는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스룬띵에게 고마워했습니다.

 

스룬띵 역시 사람들을 돕는 것이 그토록 기쁜 일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후 계속 세상을 주유하면서 어려움을 겪는 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람이나 생명 있는 그 어느 것도 돌로 만들지 않았고 그의 입에서는 인간세상을 돕는 말과 주문들만 나오게 되었지만 이미 그에게 붙은 시빠힛리다라는 별명은 평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오만하던 시절 저질렀던 모든 악행을 인해 업보였습니다.

 

이 버전의 시빠힛리다 아트 모음

 

 

두 번째 이야기

또 다른 버전의 시빠힛리다 이야기는 그 성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옛날옛적 반딩 아궁(Banding Agung)이란 곳에 두 명의 걸출한 도인들이 살았는데 한 사람은 시빠힛리다, 다른 한 사람은 시마따음빳(Si Mata Empat - 네 개의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명성이 높았는데 호승심 높은 두 사람이 스스로 자족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 결투를 벌여 누가 더 나은지 자웅을 겨루기로 했습니다.

 

시빠힛리다가 가진 힘은 스룬띵 삭티(Serunting Sakti)라는 도술이었습니다. 그의 독랄한 혀로 저주를 퍼부어 그 저주가 실제로 구현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저주에 사람이든 물건이든 바위로 변하기 일쑤였습니다. 시마따음빳이 가진 능력은 뒤통수에도 두 개의 눈이 있어 앞뒤를 모두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싸움에서도 쉽게 승리하곤 했습니다.

 

그들의 도력 대결은 라나우 호수변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시빠힛리다와 시마따음빳은 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일정한 시간을 갖기로 했는데 교활한 시마따음빳은 자신이 반드시 이길 계책을 세웠습니다.

 

라나우 호수

 

도력 대결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두 사람이 싸움을 통해 힘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같은 상황을 누가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것은 둘 중 한 사람은 야자나무 밑에 땅을 바라본 채 엎드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렌 야자나무 위에 올라가 야자열매를 잘라 떨어뜨려야자열매에 뒤통수가 깨지는 쪽이 지는 것으로 했습니다. 진 쪽은 이긴 쪽아 더 높은 노력을 가졌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이었어요. 하지만 20미터도 넘는 높이에서 떨어지는 야자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으면 머리가 깨져 죽을 터였습니다. 사실 그것이 이 대결의 묘미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대결을 보려고 마을 사람들은 물론 소문을 들은 이웃마을 사람들도 구름처럼 몰려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시마따음빳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만한 그는 시빠힛리다가 먼저 야자나무 위에 올라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시빠힛리다가 세 번이나 야자열매를 떨어뜨렸으나 시마따음빳은 간단히 모든 공격을 피해냈습니다. 이번엔 시마따음빳이 공격할 차례였습니다. 시빠힛리다도 자신이 이번에 살아나지 못할 것이란 예감을 느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빠힛리다야, 죽을 준비가 되었느냐?”

시마따음빳이 거들먹거리며 위협했습니다.

“말이 많구나. 빨리 야자나 따거라!”

시빠힛리다가 이렇게 응수하자 시마따음빳은 기다렸다는 듯이 야자열매를 떨어뜨렸습니다. 뒤통수로 떨어져 내리는 야자열매를 시빠힛리다는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비명이 울려 졌고 야자나무 밑에 피가 흥건히 흘렀습니다. 사지를 꿈틀거리던 시빠힛리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시마따음빳은 자신의 오랜 숙적이 마침내 죽은 것을 보고 스스로의 도력이 월등함이 드러난 것이라 여겨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빠힛리다의 늘어진 시신을 보며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시빠힛리다라는 이름이 붙은 건 정말 그의 혀 맛이 쓰기 때문일까? (pahit은 ‘맛이 쓰다’는 의미)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호기심에 이끌려 죽은 상대방의 혀를 손가락 끝으로 찔러보고 자기 입에 넣어 맛을 보았습니다.

 

시마따음빳은 시빠힛리다의 혀 맛이 자신이 아는 그 어떤 쓴 맛보다도 더 쓰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시빠힛리다가 죽은 이유가 나무에서 떨어진 야자에 머리가 깨져 죽은 것이 아니라그 충격에 자기 혀를 깨물어 혀 안의 악랄한 독이 입안에서 터져 그 독에 죽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독을 조금 전 자기 입에 넣어 맛을 본 시마따음빳의 온 몸이 시퍼렇게 변하며 굳어졌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시마따음빳 역시 그 자리에 고꾸러져 곧바로 죽어버렸습니다.

 

그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두 도인의 시신을 거두어 그들이 결투를 벌인 라나우 호수 변에 묻어 장사 지냈습니다.

 

시빠힛리다와 시음빳마따의 결투를 다룬 만화와 영화

 

이 이야기는 인도네시아 민간에 편만한 삭티(sakti)의 개념을 다시 한번 조명합니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로 쁜짝실랏(pencak silat) 무술처럼 묘사되기도 하고 때로는 중국 무협처럼 장풍과 경공을 쓰고 사람들이 붕붕 날아다니는 삭티는 사실 무술이라기보다는 주술을 혼합한 도술에 가깝고 수련을 통한 능력의 발전보다는 접신(接神)을 통한 초능력의 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술이나 차력의 차원을 훨씬 넘어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조차 뛰어 넘어 시빠힛리다처럼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파멸시키기도 하고 시마따음빳처럼 원래 가진 두 개의 눈 말고 다른 눈 두 개를 더 뜨는 것은 삭티를 넘어서 매직(magic) 즉 순순한 주술이나 마술의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결국 삭티라는 단어는 차력에서 도술, 마술까지를 포괄하는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죠.

 

이토록 흥미로운 삭티가 영화나 매체에서 너무 허접하게 그려지는 것은 홍콩 무협영화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감독들, 배우들이 인도네시아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019년 <군달라(Gundala)>로 시작한 인도네시아의 수퍼히어로 세계관인 ‘부미랑잇 유니버스’(Bumilangit Universe)가 삭티의 개념을 담게 될 것이라 예측해 봅니다. 인도네시아 수퍼히어로들의 초능력은 기본적으로 ‘삭티’이니까요. (끝)

 

부미랑잇 유니버스 속 수퍼히어로들

 

참조:

https://dongengceritarakyat.com/dongeng-cerita-rakyat-si-pahit-lid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