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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깔리만탄 민화] 뿌뜨리 준중 부이(Putri Junjung Buih) 본문
강의 거품 속에서 태어난 신비로운 공주 - 깔리만탄 술탄들의 조상
남부 깔리만탄이면 반자르마신(Bajarmasin)이나 빨랑까라야(Palangkaraya) 같은 도시들이 있는 다약족 지역입니다. 용맹한 다약족은 외세와 강력히 맞서 싸웠고 수많은 술탄국들이 세워졌지만 어느 시점에서 술탄들 대부분이 네덜란드 식민정부와 손잡고 우호적인 세력으로 돌아섭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절 깔리만탄에서 벌어진 독립군들의 항전 기사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서부 깔리만탄 주도인 뽄띠아낙의 시립 박물관에 가보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의 역사는 마치 칼로 오려낸 듯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당시 그 지역이 네덜란드 식민정부 측에 서서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정부에 맞서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죠. 그래서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짓쳐 들어올 당시 이례적으로 깔리만탄의 술탄과 그 가족들은 대부분 일본군들에게 학살당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네덜란드 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깔리만탄의 술탄들 기원이 사뭇 궁금한데 그들 대부분이 반자르 지역의 한 강물 소용돌이 속에서 솟아난 큰 거품과 그 속에서 나타난 신비로운 소녀의 후손들이라는 내용을 담은 이 뿌뜨리 준중 부이(Putri Junjung Buih)의 전설이 꽤 흥미롭습니다. 유명한 다른 전설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판본들이 존재하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들도 있어 그 중 두 개를 여기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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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 남부 깔리만탄엔 아문타이 왕국(Kerajaan Amuntai)이 세워졌고[1] 파트마라가 왕(Raja Patmaraga)과 그 동생 수크마라가 왕(Raja Sukmaraga)의 치세 속에서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두 명의 왕은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했고 서로 존중하며 화합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후사가 없어 마음 속에는 늘 쓸쓸한 마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동생 수크마라가 왕과 왕비는 남자 쌍둥이 낳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간곡히 기도하자 결국 그들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임신한 왕비의 배가 불러오자 수크마라가 왕은 왕비의 태속에 쌍둥이가 자라고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아홉 달 후 정말 쌍둥이가 태어나자 수크마라가 왕은 이 기쁜 소식을 온 백성에게 공표했습니다.
빠트마라가 왕 역시 동생의 쌍둥이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아직 아기를 얻지 못한 자신이 상대적으로 불쌍하게 여겨졌습니다. 더욱 절실한 마음이 된 그는 쌍둥이나 남자아이가 아니라 단 한 명의 공주라도 갖게 된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히 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빠트마라가 왕 역시 신에게 그 생각을 간절히 빌었는데 꿈 속에서 답을 받았습니다. 꿈 속에서 빠트마라가 왕은 아문타이 왕국 경계 바깥의 아궁 사원(Candi Agung)에서 명상에 잠겨 있었습니다.[2]
이를 기이하게 여긴 빠트라마가 왕은 호위병 몇 명과 왕궁 원로 다뚝 뿌중(Datuk Pujung) 만을 대동하고서 곧바로 아궁사원을 향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며칠간 깊은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별다른 징조가 나타나지도 않았지만 반드시 그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궁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강에서 둥둥 떠내려오는 여자아기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뭐지? 내가 잘못 본건 아닐까? 어떻게 아기가 강을 떠내려 오는 거지?” 왕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다뚝 뿌중이여. 나를 도와 아기를 안아 주시오.”
다뚝 뿌중이 왕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으며 울지 않는 아기를 보고 기이하게 여겼는데 갑자기 입을 열어 또박또박 말을 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기의 작은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가 명료했습니다.
“나를 이런 식으로 데려가면 안되요. 나를 데려가려면 40명의 미녀들의 손을 빌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나를 이렇게 벌거벗은 채로 갈 수 없어요. 반나절 안에 베틀로 짠 담요 한 장을 준비해 주세요.”
빠트마라가 왕은 즉시 다뚝 뿌중을 궁전으로 급히 보내 아기가 요구한 담요를 짜도록 경쟁을 시키고 40명의 미녀를 모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모두에게 고한다. 지금 빠트마라가 전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누구든 반나절 안에 담요를 짤 수 있는 사람을 아기의 유모로 임명하겠다.”
궁전에 돌아간 다뚝 뿌중은 궁인들과 백성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렇게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은 반나절 안에 담요 한 장을 짤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여성들이 담요 짜는 일을 시작했고 최고의 실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이 다가와도 작업을 마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뚝 뿌중도 그런 상황을 보고 망연자실해 있었는데 갑자기 한 여성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재상 어른, 이건 제가 짠 담요입니다. 이것으로 빠트마라가 전하의 아기를 감싸 들기 충분한지 봐주세요.”
그녀는 정갈하게 개어진 담요를 내밀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다뚝 뿌중이 그 담요를 펼쳐보자 그 주변으로 구름처럼 모여든 여인들이 담요에 들어간 아름다운 무늬와 섬세한 솜씨에 탄식을 흘렸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넌 빠르마라가 전하의 공주를 키울 보모 상궁이 될 자격이 충분하구나”
다뚝 뿌중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 이름은 라뚜 꾸리빤(Ratu Kuripan)입니다. 빠트마라가 전하께서 날 보모상궁으로 임명해 준다면 크나큰 광명과 영예일 것입니다.”
여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일반 여인의 이름 앞에 여왕을 뜻하는 라뚜(Ratu)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이 너무 작위적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뚝 뿌중은 라뚜 꾸리빤과 그 사이 모은 40명의 미녀들와 함께 빠트마라가 왕을 모시러 궁을 출발했습니다. 아기는 아무 불평없이 라뚜 꾸리빤이 지은 담요에 포근히 감싸 안겼습니다.
“참 예쁘구나. 내가 널 강물의 거품 위에서 발견했으니 네 이름을 뿌뜨리 준중 부이(Putri Junjung Buih)라 하마”
왕은 아기에게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것은 ‘거품을 부리는 아이’라는 의미였죠. 아기는 빠트마라가 왕이 지어준 이름에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제 아문타이 왕국은 두 명의 왕이 모두 아들과 딸을 갖게 되어 더욱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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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에게 잘 알려진 버전인데 갓난 아기가 유창하게 말을 한다는 부분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표절 느낌도 나고 아무래도 좀 깨는 측면이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말하며 걸어가는데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났다는 석가모니 싯다르타도 떠오르죠. 하지만 그와는 조금 다른, 좀 더 전설의 구색을 잘 갖춘 버전도 있습니다.
느가라 빠티 왕국의 재상 람붕 망꾸랏은 어느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3] 그는 꿈속에서 돌아가신 선대 왕 음뿌 자트미카(Empu Jatmika)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람붕 망꾸랏에게 14그루의 사바 바나나 나무를 베어 그 나무로 뗏목을 짜고 흰 천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으라고 말했습니다. 네 모서리에는 야자수 속대를 풀어 걸어 놓고 향을 피운 채 강의 흐름을 타고 하류로 내려가야 하며 악어나 큰 물고기, 큰 뱀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죠. 뗏목이 루북 바르가자(Lubuk Bargaja)에 이르면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지만 곧 물결은 잠잠해지고 큰 거품이 나타나는데 그 안에서 람붕 망꾸랏 자신에게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여인이 느가라 디파를 다스리는 여왕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다음날 람붕 망꾸랏은 꿈 속에서 들은 대로 뗏목을 만들어 강의 하류로 향했습니다. 실제로 중간에 악어와 큰 뱀들을 만났고 거대한 물고기가 뗏목에 부딛쳐 오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강 하류에서 소용돌이를 만난 그는 그 속에서 꿈속에서 본 큰 거품이 빛을 내며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람붕 망꾸랏, 그대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느가라 디파(Negara Dipa)를 다스리는 재상입니다.”
람붕 망구랏이 공손하게 대답하자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람붕 망꾸랏, 나는 당신이 찾는 공주, 뿌뜨리 뚠중 부이(Putri Tunjung Buih)입니다.”
그 상황과 목소리에 압도된 람붕 망구랏이 그녀를 위한 궁전으로 사원을 지어 바치겠다고 약속하자 뿌뜨리 뚠중 부이는 사원엔 신들의 석상들이 세워질 것이니 자신은 거기서 살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자신이 머물 전각을 궁 안에 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거기에 세울 기둥으로는 바뚜 삐링 산(gunung Batu Piring)에서 가져온 바뚜 바뚤리스 나무(pohon batung batulis)를 쓰되 전각은 반드시 하루 안에 완성시켜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40명의 여인들이 폭 2미터에 길이 7미터짜리 노란색 천을 짜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 천은 공주가 길을 행할 때 사용할 슬렌당으로 쓸 용도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람붕 망구랏은 즉시 궁에 있는 자신의 형인 음뿌 만다스타나(Empu Mandastana)에게[4] 벌어진 사건을 알리고 공주가 전각에 들기 전까지 백성들이 강에 배를 띄우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네 명의 고위 관료들에게는 바뚱 바뚤리스 나무 네 그루를 구하도록 지시하여 공주가 원하는 데로 새 전각 건설을 하루 안에 마치도록 안배했습니다. 40명의 여인들도 자기 맡은 바를 해내 공주가 요구한 대로 랑군디 천으로 슬렌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람붕 망꾸랏은 대대적인 행렬을 만들어 뿌뜨리 뚠중 부이를 모셔가려 했는데 여기 노란색 복식을 입은 40명의 여인들이 동원되었고 그들이 짠 노란색 슬렌당 천도 뿌뜨리 뚠중 부이에게 전달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러자 큰 거품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공주가 걸어 나와 준비된 복식을 하나하나 입고 여인들이 짜온 노란 슬렌당도 허리에 걸쳤습니다. 강에서 출발한 공주의 행렬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지만 공주의 전각에는 예의 40명의 여인들만 공주와 함께 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뿌드리 준중 부이는 느가라 디파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물론 정사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음뿌 만디스타나의 동생 람붕 망꾸랏이 맡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당시 왕으로 설정되어 있던 음뿌 만디스타나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지지만 이 전설에서는 특별히 다른 언급이 없으니 지나가기로 합니다. 첫 번째 전설에서는 한 왕국을 동시에 두 명의 왕이 다스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당시 깔리만탄의 왕국들은 동시에 몇 명의 왕들이 함께 다스리는 과두정치 체제가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느날 람붕 망꾸랏은 뿌뜨리 준중 부이에게 남편감을 구할 것인지를 묻자 공주는 깊은 명상에 들 수 있는 도력 높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그런 남편감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람붕 망꾸랏조차 그런 정도의 남자는 아니었기에 살짝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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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이야기는 전설에서 역사 장르로 넘어와 람붕 망꾸랏이 1319년경 마자빠힛 왕궁 까후리빤(Kahuripan) 지역 총독이던 유명한 가자마다 재당을 방문하여 마자빠힛의 라덴 뿌뜨라(수리야타나 왕자)를 느가라 디파 왕국으로 데려갑니다. 결국 전설과 연결되어 마자빠힛의 수리야타나 왕자가 뿌뜨리 준중 부이 공주와 결혼해 느가라 디파 왕국을 다스리는 것으로 전개됩니다.
일설에는 느가라 디파 왕국을 세운 음뿌 자트미카가 마자빠힛 출신이었다고도 하며 그렇다면 마자빠힛의 왕자를 데려가 왕으로 삼는 것에 느가라 디파 왕실이나 백성들에게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가라 디파 왕국 이전에 있었던 꾸리빤 왕국(Kerajaan Kuripan) 왕국이 사실은 자바의 아이를랑가가 세운 까후리빤 왕국(Kerajaan Kahuripan)의 점령지 또는 속국이었다는 식의 가설은 인도네시아 전체 역사를 너무 자바 중심으로 끌고 가려는 시각에 영향을 크게 받은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적지 않습니다.
히카얏(Hikayat)이라는 형식의 문학직품 속에서 뿌뜨리 준중 부이는 람붕 망꾸랏(Lambung Mangkurat)이 명상수련을 하던 시기에 강의 거품 속에서 나타나 그의 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나중에 마자빠힛 왕국의 수리야나타 왕자(Pangeran Suryanata)와 결혼하게 되고 그들의 자녀 중 아리야 데왕가 왕자(Pangeran Aria Dewangga)가 람붕 망꾸랏(왕국을 건국한 가문)의딸 뿌뜨리 까부와링인(Putri Kabuwaringin) 공주와 혼인합니다. 그들의 후손들이 느가라 디파 왕국과 느가라 다하 왕국(Negara Daha hingga), 반자르 술탄국(Kesultanan Banjar), 그리고 꼬따와링인 술탄국(Kesultanan Kotawaringin)의 왕위를 이어나가죠.
깔리만한 해안지역 왕국의 왕들은 뿌뜨리 준중 부이 공주의 후손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꾸타이 왕국의 전통에 따르면 뿌뜨리 준중 부이는 꾸타이 느라가 최고 신인 아지 바타라(Aji Batara)의 두 번째 아내라고도 합니다.
출처:
https://dongengceritarakyat.com/cerita-rakyat-putri-junjung-buih/
[1] 인도네시아가 왕국이름을 언급할 때 그 왕국의 본래 이름 대신 수도를 왕국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아문타이 역시 마자빠힛 왕국 시대(13~15세기)에 존재했던 느가라 디파(Negara Dipa) 왕국의 수도이므로 아문타이 왕국은 느가파 디파 왕국을 뜻한다. 느가라 디파 왕국은 힌두왕국으로 1438년 따발롱강(Sungai Tabalong), 발랑안 강(Sungai Balangan), 느가라 강(Sungai Negara) 등 세 개의 강이 만나는 유역에 세워졌고 여기서 훗날 반자르마신 술탄국과 느가라 다하(Negara Daha) 왕국이 갈라져 나왔다. 이는 반자르 앙국의 전신이기도 하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준중 부이 공주와 그 남편 마하라자 수리야나타(Maharaja Suryanata)가 통치했고 당시 재상 람붕 망꾸랏이 실질 행정을 담당하는 정부 수반이었다. 느가라 디파는 훗날 아문타이 시로 발전했다.
[2] 짠디 아궁(Candi Agung)사원은 14세기에 음뿌 자트미카(Empu Jatmika)가 건설한 느가라 디파 왕국의 유물이다. 1967년 아문타이 시에서 발굴된 이 유적은 40m x 50m 규모의 사원이다.
[3] 출처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람붕 망꾸랏은 느가라 디파 왕국을 건국한 음뿌 자트미카 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왕이 된 사람으로 나타난다. 다른 자료에서는 그 형인 음뿌 만디스타나가 왕, 람붕 망꾸랏은 재상으로 나타난다. 이 전설은 그가 국왕이든 재상이든 어떤 식으로든 진행되지만 여기서는 해당 판본의 내용대로 람붕 망꾸랏을 재상으로 설정하기로 한다.
[4] 음뿌 만다스타나는 람붕 자야 와나기리(Lambung Jaya Wanagiri)라고도 하는데 짠디 아궁 사원을 지은 음뿌 자트미카의 아들이자 람붕 망꾸랏의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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