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그때 우리 실장님

beautician 2016. 9. 29. 10:00

 

87년이니까 무지 오래된 얘기죠.

 

그 해에는 6.29선언도 있었고 김현희가 KAL기를 떨어뜨리기도 했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선거도 있어 민정당 후보인 노태우씨와 야당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YS, DJ, JP 등 한국 정치사에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깊고 큰 획을 그은 전설적 3김씨가 4파전을 벌이고 있었죠.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시에는 총선이나 대선이나 어렵사리 야당후보가 앞서 나가다가도 군 부재자표가 도착하면 일거에 여당 쪽으로 뒤집어지곤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대대장님은 우리 소대원들을 모아 놓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 군인들은 옛날보다 학력이 높아졌어요. 그래서 안경 낀 병사들도 많고 몸이 약한 병사들도 많아요. 그래서 자기는 1번을 찍고 싶은데 시력 때문에 잠시 눈이 흐려져서 잘못된 번호를 찍어버리는 안타까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마음은 1번인데 몸이 허약해 팔이 떨려서 급기야 다른 번호에 도장을 찍고 마는 심각한 사태가 가끔 벌어져요. 이 대대장, 물론 마음이 몹시 아파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편의를 돕고자 엄정히 선발된 우리 군 선거관리위원들이 1번만 펴서 투표용지를 나누어 줄 테니까 여러분들은 구태여 용지를 다 펴볼 것도 없이 보이는 번호에만 찍으면 되겠어요. 알겠죠?"

 

당시 많이 민주화되었다는 군이었고 고질적인 구타도 줄이려는 노력이 시작되던 시절이었기에 더더욱 대대장 입에서 나온 소리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대대장이 가고 난 다음 소대원들에게는 웃기지 말고 알아서 찍으라고 얘기했지만 다음날 아침 투표소를 갔다 온 병사들은 도저히 맘대로 찍을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새가슴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은 사단소속으로 되어 있는 우리 장교들 차례였고 투표소는 사단 사령부 안에 설치되어 있었어요. 사실 그 전날 629포대에서 전라도 출신 신병 두 명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DJ  찍었다가 작부(작전부사단장)가 헬기 타고 날아가 포대장 쪼인트 깠다는 전설이 사단에 파다하게 퍼져 장교들 투표소에 보내는 우리 실장님 안색이 벌써부터 무척 어두웠습니다.

 

사단 투표소에는 달랑 두 명이 관리관이라고 앉아 있었는데 한 명은 정보처 소속 대위였고 또 한 명은 보안대 병장이었어요. 물론 정말 병장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한쪽에 놓인 난로 위에는 주전자가 김을 무럭무럭 뿜고 있는 투표소는 마치 별장 같은 아늑한 분위기였죠. 관리관 탁자에서 투표용지를 나눠주던 대위가 내심 미심쩍은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물어 왔습니다

"여어, 우리 중위님들, 그쪽 실장님한테 교육 잘 받고 오셨죠?" 

모두들 건성으로 그렇다고 대답하는데 1번을 찍을 생각은 애당초 추호도 없었던 난 그 질문을 그냥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장교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 거죠. 게다가 육사출신으로 줄곧 야전부대를 돌다 잠시 멸공관에 부임해 와 숨을 고르며 이제 머지않아 중령 진급을 목전에 둔 우리 실장이 부하장교 하나 잘못 둔 죄로 진급심사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괜히 한 마디 덧붙인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실장님 교육이야 잘 받았지만, 민주화된 군에서 촌스럽게… 난 1번 안찍어요."

 

관리관 대위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동료장교들은 모두 투표를 마쳤지만 난 그날 부대로 돌아올 때까지 결국 투표용지를 만져보지도 못했어요. 돌아가 보니 실장님 방에는 대대 보안반 이중사가 와 있고 부대 전체를 감돌고 있는 살벌한 분위기가 자못 심상치 않았습니다. 다음 날 다시 사단에 투표하러 갈 때까지 실장님은 몇 번 날 불렀지만 차마 1번 찍으라고 대놓고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그게 우리 실장님 최소한의 양심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보다 더한 말을 듣고야 말았습니다.

 

"자네 아버지가 목사님이시라며? 요즘 좌경으로 기운 목사들이 많다는데 혹시 자네 아버지도 그런 사람 아냐?" 

 

우리 아버지는 6.25때 강경상고에서 기독교 학생회장을 했고 피난도 못가 인민군에게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난 당시 무슨 정치적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조건 YS를 찍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물론 몇 년 후 YS가 삼당합당이란 야바위판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시절이었고요.

 

다시 사단본부로 출발하기 직전 출발보고를 위해 실장실에 들어섰을 때 실장은 사단에 전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감독관과 통화하는 듯 했습니다.

 

", 알았다니까... 그냥 투표용지 줘요. 이 사람아, 우리 민주군대 아닌가? , 그건 당신이 책임질 필요 없어.... 내 부하니까 내가 책임 질께.... 아니...얌마!, 내가 내 계급장 걸고 책임진다는데 무슨 개소리야? 용지 주란 말이야!! 이 개시키야!!!"

 

, 그렇게 그 난리를 치고 결국 사단본부에 도착-_-

어제 그 정보처 대위, 보안대 병장이 눈을 치켜 뜨고 부라리는 험악한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며 기표소에 들어가 2번에 회심의 도장빵 때리고 봉투 잘 봉해서 대위에게 제출할 때 대위님 눈 치켜 뜬 기세에 금방이라도 귀싸대기가 날아올 것 같았습니다.

 

천하의 육군중위 배중위도 역시 그날만큼은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투표소를 나와 담배 한대 피우다가 문득 전투모를 기표소 안에 놓고 나온 것을 깨달았던 것이죠. 다시 투표소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노크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난로 위에서 김이 무럭무럭 뿜어내던 주전자의 용도 중 하나가 봉한 부재자 투표용지를 다시 까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주전자 앞에서 그 보안대 병장이 내가 바로 몇 분 전에 제출했던 봉투를 왼손에, 그 안에 들었던 투표용지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가 다시 들어오는 날 보고 화들짝 놀라고 있었습니다. 내 눈에서 불똥이 튀었습니다. 사이코 폭력 장교로 변신하는 순간이었죠.

 

대위가 말릴 틈도 없었어요.

평소 보안대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게 사실 내 신조였습니다. 왜냐하면 부임초기에 우리 상황병하고 연대보안대 상황병하고 전화로 서로 욕하고 싸운 게 시발이 되어 결국 연대보안반장 대위가 한밤중에 우리 소대원들 집합시키고 연대에서 찝차 타고 씩씩거리며 달려온 걸 당시 새파란 소위였던 내가...

 

'반장님, 요즘 제대 교육제도 걸랑요. 우리 소대원 처벌할 일이 있으면 소대장인 절 통해서..."

 

이러다가 말도 채 못마치고 한 500평정도 되는 우리 강당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주먹이며 발로 조터지며 끌려다닌 적이 있어서입니다. 근데 이번에는 어제부터 그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뜻을 관철시켜 찍은 내 투표용지를 지가 보안대원이라고 맘대로 뜯어보고 바꿔치려 든다...??? 비록 뒷덜미가 몹시 캥기면서도 갑자기 이단옆차기가 되면서 대위가 달려들어 뜯어 말리기 전까지 병장을 좀 심하게 주먹질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걔도 나름대로 임무 수행중이었는데... 미안하다, 병장아. 진짜루.

 

부대에 돌아오니 내가 벌인 소동을 이미 보고받은 것이 틀림없는 우리 실장님은 날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가끔 눈언저리로 던지는 눈빛이 탄띠에 찬 콜트 45권총에 실탄이라도 장전되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내 머리를 날려버리려는 눈치처럼 느껴졌어요. 빨리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난 틀림없이 서울출신으로 2번을 찍었다는 사실만 빼면 동기들이나 역대 선배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스탠다드 싸이코 꼴통 곱창 장교였는데 3번을 찍은 전라도 빨갱이 장교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사단을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결국 1번 노태우 후보가 아주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었죠. 하지만 부재자 투표 만 볼 때에는 정말 압도적인 차이가 났을 겁니다. ‘대다수’ 라는 것은 가끔 그렇게 만들어지기도 하는 모양이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전혀 후환이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실제로 나에게 일어난 일은 별로 없었어요. 작부 헬기가 우리 부대 상공을 지나가지도 않았고 연대보안반장이나 사단보안대장이 씩씩거리며 찦차 타고 날아 오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육사 출신인 우리 실장이 대부분 삼사 출신인 보안대로부터 잘 막아주며 무마시켰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잘나가던 우리 실장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중령 진급을 하고 다시 야전 대대장을 맡아 나가셨으니 지금쯤은 별을 몇 개쯤은 달고 어딘가에서 군단장이나 군사령관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혹시 하나회 소속이었을지도 모르는 그가 몇 년 후 정권을 잡은YS가 휘두른 숙청 칼날에 맞아 바람처럼 날아 갔는지도 모르고요.

 

고작 나한테 일어난 일이라고는 어느날 밤 동료들과 함께 문산에 나가 당시 그 일대에서는 꽤 유명하던 미스 노의 ‘열’ 까페에 기분내자고 들어섰다가 사단참모들이랑 바에 나란히 앉아 있던 사단 보안대장과 마주쳐 한 2,30분 양주잔을 사이에 두고 정훈교육을 받은 것뿐이었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리라 예상했던 보안대장은 눈썹이 송충이처럼 굵고 짙은 강인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게 민주사회의 당연한 기본이지. 그리고 위관장교라면 당연히 자기 생각을 관철시킬 패기쯤 있어야 하는 거고. 하지만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입장에서 자네도 가끔은 다른 사람들 입장을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닐까?." 

 

지당한 말씀이었고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한번 소신을 굽힘으로써 부대의 평화를 지켰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것이란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습니다. 5공 군사정권이 맹위를 떨치던 한 복판에서 군복을 입고 장교계급을 달고 있었다 해서 당시 정권실세들이 불과 몇년전 쿠데타를 일으킨 것처럼 나도  학교에서 배워왔던 민주주의의 원칙을 그날 사단투표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 짓밟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87년의 대선이 최소한 부재자투표에서만큼은 부정선거라는 오명을 지울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내가 전역한 것은 그 이듬해 6월이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대대 보안반 이중사가 전역신고식이 있는 사단 휴양소까지 찾아와 나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영내의 빨갱이 장교 관리하느라 노고도 많았던 우리 이중사는 뻑하면 BOQ로 찾아와 오징어다리에 소주잔 기울이며 밤늦도록 신소리로 진을 빼기도 하고 어떤 날은 죽이 맞으면 노을 진 1번 국도를 그의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달리기도 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었죠. 그는 전역하는 나를 보면서 골치덩이 재소자를 마침내 내보내는 간수의 심정이었을까요?

 

별로 의미없는 얘기들이 오간 끝에 이중사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나한테 선물할게 있다며 자기 수첩을 꺼내 들었습니다. 수첩 안에는 여기 저기 수많은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데 내 이름이 적힌 페이지도 있었어요. 그러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까만 싸인펜으로 내 이름을 직직 지우는 것입니다.

 

그게 다였어요. 선물 준다더니...싱거운 녀석...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혹시 소위 블랙리스트라고 불리던 것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렇다면..., 그게 이중사 수첩에서 지운다고 정말 없어지긴 하는 걸까요?

아무튼 이중사는 그거 그렇게 지우면서 무지 생색을 내는 눈치였습니다.

 

그 당시 대선후보들이 이젠 대부분 대통령을 한번씩 돌아가며 해보았고 또다시 바뀐 얼굴들이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대선의 계절이 돌아 올 때마다 이런 오래된 역사가 새록새록 기억나곤 합니다.

 

당시 떠돌던 보안대 블랙리스트의 괴담은 이럴 것이 아니었을까요?







#보안대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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