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싱가폴 창이공항 흡연실

beautician 2016. 10. 6. 21:47

 



싱가폴 창이공항 흡연실에서 담배 두 대를 연거푸 피워대며 생각에 잠긴다.
 

짧지만은 않은 세월을 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든 자카르타를 떠나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국으로 향하는 마음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다. IMF 한파가 밀어닥치기 직전 적잖은 봉제오더를 돌리던 우리 사무실은 업종 다변화를 꾀하며 Magic Printer라는 광고전용 프린터를 자카르타에 마케팅하고 있었다. 가로 1.8m, 세로 1.8m 수직으로 단번에 프린트할 수 있는 이 프린터는 그동안 염원했던 탈봉(봉제업계 탈출)을 조만간 실현해 주고 앞으로 찬란하기만 할 미래를 약속해 주는 듯 했다. 그래서 분주히 시장조사를 하며 만난 광고업체, 인테리어 업체, 심지어 세라믹 타일 제조업체들이 부지기수

 

하지만 태국 바트화가 폭락하면서 아시아 전체에 밀어닥친 97년 하반기의 경제위기는 98년 초부터 열대의 자카르타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어 버렸다. 발주를 준비하던 업체들은 오더를 취소하고 그들 중 적잖은 수가 몇 달 후 도산하면서 찬란하던 미래는 잿빛으로 어두워지고 말았다. 프린터가 팔리지 않은 것은 물론 봉제 오더마저 떨어져 나가면서 나의 자카르타 사무실은 그 후 1년 동안 아무런 매출도 올리지 못했다.
 
서울의 친구들이 자카르타 사무실 폐쇄를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큰 꿈을 안고 밟았던 이역만리의 땅에서 가슴 저미는 실패를 부둥켜 안고 떠나야 하는 마음은 결코 편치 못했다. 뭔가 마무리 짓지 못한 것 같은 느낌. 인도네시아를 떠난 지 겨우 두 시간 정도 지난 셈이지만 벌써 자카르타의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릴리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
 
이번에 귀국하면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귀국도 그 동안 여러 번 있었던 출장 정도로 생각하며 짧은 이별이라 생각했기에 릴리는 공항까지 나를 데려다 주고서도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도 못한 채 바쁘게 수카르노 하타 공항을 빠져 나갔다. 당시 총선을 앞두고 있던 시절, 98 5월 폭동 후 여전히 어수선하기만 한 자카르타의 밤길을 혼자 달리는 것을 릴리는 무서워하곤 했다. 하지만 사실을 알았다면 그녀는 분명 내가 탄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까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
 
착찹한 심경으로 도착한 싱가폴 창이공항
.
 
바로 1년 전인가 다시 증축한 후로 세계각국으로부터의 여행객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밤 열 시가 다 된 시간에 새로 증축된 F로 시작되는 게이트들이 있는 윙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들어간다. 흡연실도 사람들로 붐비는 것은 예외가 아니다
.
 
첫 담배를 피울 때 문득 눈에 띈 담배갑. 쓰레기통 위에 버려져 있는 그 담배는 Benson & Hedges. 하드박스의 윗면에 적힌 문구가 처져 있던 내 기분을 조금은 낫게 해 준다
.
 
Smoking Kills"
Government Health Warning.
 
직역하면 ‘흡연 쥐긴다’
.
경고문구라지만 이런 멋들어진 광고 스크립트도 없다는 생각에 모처럼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옆에 앉은 서양 할머니가 말을 걸어 온다
.
 
“댁 시계 좀 볼수 있수?

“물론이구 말구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그 할머니가 자리를 뜰 때까지 꽤 오래 계속된다. 지난 20여년 간 세계 각국을 돌아다녔다는 할머니. 할머니라고 불리우기는 좀 이른 사실은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독일 아주머니다. 작은 체구에 훈장처럼 새겨진 눈가의 주름살들이 눈매를 더욱 순해 보이게 하는 이 아줌마는 자기가 더 잘 알 것이 분명한데도 비행기 출발하기 몇 분 전까지 타면 되냐고 물어온다

 
“독일까지 12시간 걸리는데…요즘은 어떤 비행기에도 흡연석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아줌마의 미소에는 수줍음마저 엿보인다. 이젠 어느 나라를 가도 친구들이 다 있어서 더 이상 호텔에서 묵지 않아도 된다고 자랑하는 아줌마의 쾌활한 솔직함이 나도 덩달아 미소 짓게 한다
.
 
하지만 이 독일 아줌마가 작별인사를 하며 일어서자 다시 밀려드는 허탈함.

창밖으로 보이는 저쪽이 자카르타의 하늘이던가…? 인생의 한 조각을 저쪽에 묻어 두고 난 이제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그리고 릴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 건가…

 

자카르타 사무실을 놔두고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돌려버린 친구들은 우리가 처음 일을 시작하던 첫 순간부터 자카르타에서 일을 도왔던 릴리를 결코 창업동지로 생각하지 않았고 여러 순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기대할 수 없었던 창의력과 근면, 죽더라도 회사에서 일하다 죽겠다는 악바리 근성과 함께 놀라운 상담수완을 보여 주었던 그녀를 퇴직금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렇게 ‘내 팽개치고” 서울로 도망오라고 나에게 종용하고 있었다.
 
철저한 실패를 그것도 두 번 째 겪고 바다 건너 자카르타를 떠올리며 창이공항의 흡연실에서 들이키던 담배 연기는 몹시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으로 떠나는 SQ882 연결편을 기다리면서 거의 반 갑의 담배를 피워버렸고 그렇게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다시 창이공항의 흡연실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싱가폴에서 비자를 낸 후 자카르타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
 
서울에서의 3개월은 피말리는 시간이었고 한동안 원화환율 폭락으로 수출대금이 뻥튀기되어 들어오던 시절 큰 돈을 만졌던 친구들은 차와 아파트를 바꾸고 사무실도 넓혀 이사했지만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룸살롱을 흥청망청 드나들며 검증되지 않은 신규사업에 눈먼 돈을 투자한 끝에 99 5월에 이르러서는 현금이 바닥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동업자인 내가 멀리 자카르타에 있다는 이유로 돈벼락을 맞는 동안 내게는 쉬쉬하며 저희들끼리 풍족함을 만끽했고 돈이 떨어지자 비용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내 자카르타 사무실에 먼저 칼을 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난 도무지 서울이라는 곳에 적응을 하지 못했으므로 결국 그 친구들과 결별을 하게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으리라. 그러다가 우연찮게 연결된 한 의약품 수출업체와 손을 잡고 그 회사의 인도네시아 지사장의 자격이 되어 다시 자카르타에 돌아 왔을 때, 내가 그 동안 개인적으로 조금씩밖에 보낼 수 없었던 경비의 부족한 부분을 충당하려 가진 패물을 다 팔아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릴리의 마른 어깨와 갈라진 입술, 장식품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허전한 목덜미와 손목을 보며 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이런 친구를 인도네시아에서 만나게 된 건 행운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오래도록 창업동지였지만 서울 친구들을 책망하기에 앞서 나 역시 릴리를 나와 같은 레벨에 올려 놓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난 자만스러운 고집만으로 또아리를 틀고 독기를 뿜으면서 바로 곁에서 손색없는 파트너로서 일해 온 이 친구를 그토록 오랫동안 알아 보지 못했다. 시내에 얻은 새 사무실에 들어서며 난 릴리에게 서류 한 장을 내 밀었다
.
 
“이런 게 원래 필요 없는지도 모르지만… 우린 이제 끝까지 같이 가는 거야. 여기 서명하면 여기 있는 건, 사실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지만, 내꺼나 니꺼가 아니라 모두 우리께 되는 거야.

 

그 서류를 받아 들며 당황해 하던 릴리의 눈동자를 떠올리면서 불과 몇 달 전 참담한 마음으로 담배연기를 들이키던 흡연실에 앉은 내 가슴속에서 뭔가 뭉클하며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자카르타에 돌아온 후로도 또다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리의 실험과 릴리의 모험은 계속 되었고 창이공항에도 수없이 내리게 되었지만 흡연실을 들를 때 마다 자카르타를 도망치듯 떠나던 당시 처연한 고민의 흔적이 그곳 구석 어딘가에 아직 묻어 있는 것 같아 새삼 주변을 둘러 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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