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그때 우리 김사장

beautician 2016. 10. 5. 21:36

 

 

어디나 좀 유별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인도네시아에 몇번 출장온 경험을 가지고 현지에서 십수년을 산 사람들에게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고 강의하려 하는 사람들도 종종 만나게 된다.
 
"에이, 제가 뭐 자카르타에 하루 이틀인 줄 아세요? 인도네시아 거래 몇 년인데 여기 애들 성격 잘 알죠. 여기서 폭동까지 겪어봤는데 그 정도면 인도네시아 파악 다 끝난 거죠."
 
배부장은 팩케지업체 선두주자중 하나인 P물산의 원단영업팀장을 하다가 그 해 초 P물산을 나와 함께 퇴직한 두 여직원과 함께 친구인 김사장의 R텍스에 취직해 있었다. 1주일간의 자카르타 출장 동안 그가 무의식 중에 내뱉는 말들이 그들에게 거래선들을 소개해 있던 내 귀에 거슬린 것이 적지 않았는데 가는 곳마다 그가 떠벌이는 98 5월의 자카르타 폭동경험은 항상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불타는 스넨(Senen) 상가며 장갑차들 앞에서 군중들이 쇼핑몰을 약탈하는 장면들을 그는 실제로 본 적이 없고 이 친구는 폭동기간 내내 힐튼호텔에 갖혀 한발짝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그건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니고, 내 얘기는 사장님은 주로 무슨 원단을 쓰시냐구요? 혹시 이런 원단은 아세요?"
 
나나 R텍스 김사장이 상담하러 간 업체에서 매번 곤혹스러워지는 것은 이렇게 상대방의 말허리를  끊어 버리며 무시하듯, 가르치려는 기세로 얘기하는 배부장의 태도 때문이다. 상대방을 힐난하는 듯한 어조마저 내비친다.


 

물론 전혀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나 역시 전역직후 소대장 생활로 굳어진 양 어깨 위의 벽돌들을 하나씩 끌어내리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고 대기업인 전 직장을 그만두고 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대기업 프리미엄을 스스로의 마음으로부터 지워버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
쟤가 말을 좀 함부로 하는 건 있어요. 게다가 P물산 그만 둔 게 바로 엊그젠데 형님도 잘 아시잖아요? 중소기업에 적응하는 게 시간 좀 걸리는 거. 쟨 나랑 틀려요. 대학도 나온 똑똑한 친구라구요. 앞으로 저한테도 도움이 많이 될 텐데 형님도 좀 예쁘게 봐 주세요"

식당 화장실에서 잠깐 배부장의 첫인상에 대한 내 속마음을 얘기했을 때 김사장은 어쩔 줄 모르며 배부장을 극구 옹호하고 나선다. 조폭 조직에 들어가도 통할 김사장의 인상 어디에 그런 싹싹함과 의리가 숨어있는지 난 항상 궁금해 하고 있다.

김사장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아직도 J양행이라는 원단무역회사의 말단 영업사원 때였다. 학창시절 유도를 했던 우락부락한 모습의 상고출신 김사장의 첫 사회생활은 학벌에 대한 차별이 외국의 인종차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은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80년대 말 상황을 상기하면 고난의 연속이었음은 충분히 짐작이 가겠지만 그는 근면과 솔직함으로 거래업체들의 신임을 받았고 나도 그의 팬 중 한 사람이었다
.

경제위기가 한국에 몰아 닥쳤을 때 원단업계의 허리를 이루고 있던 옥방, 대덕물산, 창녕 등 중견기업들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당시 창녕으로 옮겨와 있던 김사장은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지만 그 후 1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그는 자기 손으로 R텍스라는 원단회사를 세우고 첫 해 25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면서 자기사업의 멋진 첫 장을 열어 제쳤다. 그의 주력 수출시장이 인도네시아였으므로 내가 첫 직장을 떠난 후 오래 끊어져 있던 그와의 인연도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되었다.

 
그가 배부장을 믿는 것은 오랜 친구 사이라는 것 말고도 배부장이 모대학 섬유공학과를 나왔다는 사실과 P물산 원단영업팀장으로 그 전해에 올린 3백만불의 수출실적을 그대로 가지고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학력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 나온 사람이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에겐 껌뻑 간다는 사실을 난 잘 알고 있었다. 그 부러워하는 정도가 존경의 도를 넘어 거의 신앙심에 가깝다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실적을 쌓았다는 배부장의 영어실력은 한 독일계 바잉오피스에서 몹시 실망스럽게 다가왔다.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Vanda라는 22살의, 그야말로 오랜만에 보는 미인과 상담을 하게 되었을 때다
.
 
"완야드 완딸라 화위부 센뜨. 오께? 노 오께?"

오래전 일본어를 처음 공부하게 되었을 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왜 그리도 유창한 일본어를 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오카야마 지방의 사투리를 대충 주먹구구식으로나마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이르러 비로서 예전에 그토록 우러러 보이던 사람들의 일본어가 그렇게 존경까지 할만한 것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영어=고문 이라는 등식으로 생각하는 김사장에게는 배부장이 기관총 쏘듯 뱉어내는 이런 식의 영어조차 유창하게 들렸을 것이다.


"웬 쌤플들을 한 군데 그렇게 왕창 뿌려? 저것도 돈 꽤 들었을 텐데?"
"
배부장이 그 정도씩은 줘야 된다고 해서 많이 만들었어요. 한 천만원 들었지만 올해 배부장이랑 같이 하면 작년보다 두 배 이상은 더 하게 될 텐데 투자 좀 해야죠
."
 
원단을 생산하는 대기업들도 주요 거래선에 기껏 한 세트씩 나줘 주고, 영양가 없다고 여겨지는 업체들은 그나마 구경도 하기 힘든 두꺼운 행거 원단쌤플북을 배부장은 만나는 거래선마다 종류별로 5-6부씩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출장기간 동안 10여 군데 거래선을 모두 거치는 동안 삼단가방 한 개와 사과박스 두 개에 가득 담아온 원단쌤플들이 모두 바닥나고 말았다



"대부분 배부장이 P물산 시절에 거래하던 업체들이래요. 얼마 전에 중국에도 같이 갔다 왔는데 배부장 아는 업체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배부장이 그래도 큰 업체에서 옮겨왔는데 체면 상하지 않게 쌤플북이나 접대비 정도는 충분히 지원해 줘야죠."

귀국하는 날 우리 직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김사장은 옆에 앉은 배부장을 추켜 세워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해 첫 자카르타 출장이었고 그 동안 만난 거래선들의 호의적인 반응 때문에 두 사람의 분위기는 잔뜩 고조되어 있던 참이었다. 내 차도 이들의 출장기간 동안 자카르타 안에서만 1,200km를 뛰었으니 엄청나게 돌아다닌 셈이다.

"이제 김사장하고 같이 일하게 됐으니 선배님이 자카르타에서 많이 좀 도와 주세요."
 
술이 몇 순배 돈 끝에 취기가 역력한 배부장도 출장 마지막 날이 되어서는 꽤 공손해져 있었고 나도 그럭저럭 그의 태도에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김사장의 계속된 배부장 옹호발언에 어느 정도 쇄뇌되어 있었다. 어쨌든 그들의 자카르타 출장은 많은 거래선들로부터 원단발주를 약속 받으며 그렇게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들이 귀국한 것은 그 해 2 22일 화요일 밤, 그러니 23일 아침에 자카르타 도착했을 텐데 김사장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24일 목요일 저녁, 그러니까 한국에 도착한지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

"배부장이 나간데요."
"
?"
"......"
"
출장결과가 너무 좋았던 거지
?"
 
불현듯 머리를 스친 생각이 적중하고 있었다. 출장결과가 너무 좋았던 것이다.

김사장이 그렇게 쌤플준비와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나도 회사차원에서 일주일 동안 통역과 안내를 포함한 전폭적인 노력동원을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좋은 결과가 오히려 배부장의 마음을 확 돌려 놓은 것이다. 한번만 얼굴에 철판을 깐다면 영어 한마디 못하는 김사장에게서 이번에 받은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오더들을 빼앗아 오는 건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울을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오더의 독식을 꿈꾸며 미소 짓고 있었을 배부장의 얼굴이 선연히 떠올랐다.

"그말 하고 나서 배부장은 사무실 구하러 간다고 오늘 오전부터 나갔구요. 하루종일 화가 나서 외출도 안하고 있었는데 같이 나간다는 배부장 쪽 여직원이 아까 오후에 카드 영수증 3백만원 짜리를 결재해 달라고 가져 오더라구요. , ... 내가 병신이지."

그의 억울한 마음이 전화선을 통해 내게도 전해졌다. 그들의 출장기간 중 내가 노력하며 도운 것은 김사장을 위한 것이었건만 그 결과를 배부장이 고스란히 따먹을 것이라 생각하니 나 역시 분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P
물산을 나와 집도 절도 없는 배부장에게 사무실과 집기들을 마련해 주고 두 여직원까지 함께 받아준 것이 김사장이었고 그들에 대한 두 달 간의 월급은 물론 구정보너스에 출장비는 물론 배부장이 물쓰듯 쓰는 신용카드까지 결재한 것도 김사장이었으니 쌤플비까지 합치면 김사장이 배부장으로 인해 두 달 간 지출한 금액은 거의 회사를 하나 차릴 정도의 비용이었을 것이다
.

결국 배부장은 김사장을 완전히 가지고 놀며 실컷 이용해 먹은 셈이었다. 그는 분명 따로 회사를 차리겠다는 마음을 지난 중국출장 이후 굳히고 있었겠지만 내친 김에 인도네시아까지 김사장 돈으로 다녀오겠다는 생각이었음이 틀림없다. 김사장은 엄한 곳에 돈을 퍼부은 것이다
.

"저 지금 열 받아서 술 먹으러 가는데 하도 답답해서 형님한테 전화 드리는 거에요. , 같이 술한잔 하면 더 좋겠는데 태평양이 가로놓여 있으니...전 여기서 술 한잔 할 테니까 형님도 거기 어디 가서 술 한잔 하세요. 형님도 실망 크시죠? 저야 뭐...한 두 번인가요. 오늘 술 먹고 내일 아침이면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서 일할 텐데 오늘 그냥 너무 열받아서 전화 드렸어요. 지난 출장 때 너무 애써 주셨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네요..."

그건 내가 할 말이네, 김사장...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열심히 괴롭히는 사람도 꼭 있기 마련이다. 그 동안 대학 나왔다는 사람들에게 무던히도 속고 당하던 김사장은 요번에는 대학 나온 오랜 친구에게 그렇게 또 등을 찔리고 말았다. 애써 미소를 띄며 살아가는 그의 양복을 제치고 와이셔츠마저 제쳐보면 그 넓은 가슴엔 한맺힌 멍자국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을까. 그 가슴에 또 하나의 상처가 더해진 것을 생각하면서 김사장의 언제나 시원시원한 미소가 민망스러워진다
.

"김사장 걔네 회사는 자금력이 너무 약해서 내가 직접 하기로 했어요. 내가 직접 하니까 따라 오실 거죠?"
 
배부장이 만든 회사의 이름은 번역하자면 ㈜당신과 함께 텍스타일 이었다. 벌어진 일과는 매우 거리가 있는 이름이었으므로 나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김사장과 나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오간 속사정도 모르고 내게 국제전화를 걸어 자기 거래선 관리를 부탁하면서 해온 말이었다.

 

남을 짓밟으면서 그렇게 당당해도 괜찮은 건가?

친구라도 대학 못나온 친구는 그렇게 짓밟아도 괜찮은 건가?

정의란 과연 현세에서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 하나의  개념일 뿐인가… ?

 

못 따라가! 이 나쁜 놈아!!”

 

그게 그날 내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