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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왕이의 강물이 향기로운 이유

beautician 2022. 3. 15. 11:32

[민화] 반유왕이(Banyuwangi) 지명의 기원

 

반유왕이  

 

옛날 자바섬의 동쪽 끝자락에 정의롭고 현명한 왕이 다스리는 거대한 왕국이 있었습니다. 왕의 아들 라덴 반뜨랑(Raden Banterang)은 전쟁에 나가면 호랑이처럼 용맹한 장수였고 평상 시엔 사냥에 빠져 살다시피 하는 천상 무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라덴 반뜨랑 왕자가 여느 때와 같이 시종들을 거느리고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숲 속에서 사슴 한 마리가 일행 앞을 빠르게 지나가자 그는 사슴을 쫓는 과정에서 부하들과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무와 덤불을 헤치며 사슴의 흔적을 쫓았지만 그는 결국 놓치고 말았습니다.

 

지친 왕자가 헤어진 일행을 찾던 중 개울을 만났는데 그곳 물이 너무나도 맑고 깨끗했습니다. 그 물을 마시니 아까의 피로가 모두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 개울은 도성 근처를 지나는 넓은 강의 상류였습니다. 그곳에서 왕자는 개울 건너에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보이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깊은 숲 속에 선녀 같은 미모의 여인이 있다면 절대 사람일 리 없으니 자신을 홀리려 나타난 정령이나 귀신일 터였으니까요.

 

“깊은 숲 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니? 정말 사람일까? 아니면 숲 속에 사는 귀신일까?”

“저는 사람이에요” 라덴 반뜨랑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여인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가다듬은 라덴 반뜨랑이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자 여인도 화답했습니다.

 

“저는 끌룬꿍 왕국(kerajaan Klungkung)에서 온 수라티(Surati)라고 합니다. 저희 나라가 적국의 침탈을 당해 도망치다 보니 이곳 숲속까지 들어오게 되었어요. 부왕께서는 도성을 지키며 분전하다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여인의 말에 라덴 반뜨랑은 놀라움과 연민을 감추지 못했고 끌룽꿍 왕국의 공주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 솟았습니다. 그는 공주를 왕궁으로 데려가 시종을 붙이고 좋은 옷과 음식을 주며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한 가지 진실에 대한 타협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끌룽꿍 왕국을 무너뜨린 나라가 바라 라덴 반뜨랑 왕자의 왕국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라티 공주는 뒤얽힌 운명에 눈물을 흘렸지만 자신을 도우려는 라덴 반뜨랑 왕자의 진심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추스린 수라티 공주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왕자의 곁에 계속 머물기로 했고 얼마 후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왕자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라덴 반뜨랑 왕자를 사랑했습니다. 고국을 멸망시킨 나라의 왕자비가 되었다는 사실에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진심으로 왕자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가지, 라덴 반뜨랑 왕자가 털어놓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묻혀 있을 것만 같은 그 비밀은 예기치 않게 드러나게 됩니다.

 

어느 날 수라티 공주가 평민으로 위장하고 궁밖으로 나와 혼자 장터를 거닐며 장신구들을 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누더기를 입은 한 남자가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습니다. 그녀는 변복을 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는데 목소리가 낯 익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 누더기 거지는 자기 친오빠인 끌룽꿍 왕국의 루빡사(Rupaksa) 왕자가 변장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빠가 전란에서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루빡사 왕자는 인적이 없는 곳으로 동생의 손을 끌고 갔습니다. 재회의 반가움이 채 가시기도 전, 오빠는 왕궁까지 쳐들어와 부왕을 죽인 사람이 바로 라덴 반뜨랑 왕자라는 것을 수라티 공주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가 찾아온 이유는 동생과 힘을 합쳐 라덴 반뜨랑 왕자에게 복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너도 그러기 위해 수모를 무릅쓰고 원수의 아내가 되어 환심을 산 것이 아니냐? 이제 때가 되었다. 네가 돕는다면 반드시 부왕의 원수, 우리 왕국을 멸망시킨 원흉인 라덴 반뜨랑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수라티 공주는 오빠의 말에 당황했습니다. 자신이 라덴 반뜨랑 왕자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은 그때 숲속에서부터 은혜를 입었고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라덴 반뜨랑 왕자가 자기 손으로 부왕을 죽였다는 사실을 숨겼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고 그로 인해 마음이 흔들린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는 원수를 원수로 갚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주는 그간의 이야기를 오빠에게 들려주며 오빠의 계획을 돕지 않겠다는 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오빠 루빡사 왕자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너의 그 알량한 사랑이 부왕의 원수를 갚는 것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냐? 나와 함께 복수를 하겠느냐? 아니면 라덴 빤뜨랑 곁에서 함께 내 복수의 칼을 받겠느냐?”

 

루빡사가 그렇게까지 위협했지만 수라티 공주는 끝내 자신의 남편을 지키며 오빠에게 복수를 포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미 끌룽꿍 왕국은 어쨌든 이미 멸망해 버렸고 자신이 오빠의 복수를 도와 라덴 반뜨랑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로 인해 끌룽꿍 왕국의 유민들이 더욱 고통을 받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만류에 루빡사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복수를 종용하는 대신 끌룽꿍 왕국의 전통문양이 들어간 머리끈을 동생에게 내밀었습니다.

 

“아까 장신구를 보고 있더구나. 너에게 주려고 가져온 거다. 고향의 문양이 너도 그리웠을 거야. 하지만 저 문양을 보면 네 남편이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니 평소엔 네 침상 밑에 숨겨두렴.”

 

수라티 공주는 오빠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이라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그 머리끈을 받아 들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끈을 머리를 치장하는 것인데 그걸 왜 침상 밑에 넣어두라는 것이었을까요? 수라티 공주는 자신이 오빠를 만났다는 사실도, 부왕을 남편이 죽였음을 알았다는 것도 라덴 반뜨랑 왕자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라덴 반뜨랑 왕자가 이번에도 숲 속에서 사냥감을 쫓다가 또 다시 혼자 떨어졌을 때 눈 앞에 누더기를 입은 남자가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왕자는 자객이라 생각하고 급히 칼을 꺼내 들었지만 누더기 남자는 덤벼들지 않고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덴 반뜨랑 왕자님! 당신의 아내가 당신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왕자비님 침상 밑엔 숨겨놓은 끌룽꿍 왕국의 머리끈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자비께서 나를 불러 당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할 때 내가 끌룽꿍 출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왕자비께 드린 것입니다.”

 

이 말뿐이었다면 왕자가 누더기 남자의 말을 믿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더기 남자는 마치 마술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라덴 반뜨랑은 이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남자가 정말 자객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누더기 남자가 한 말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더욱이 누더기 남자는 사라지기 직전 이런 말도 했습니다.

 

“당신이 숲속에서 왕자비를 만난 게 과연 우연이겠습니까?”

 

그의 말을 라덴 반뜨랑 왕자의 마음 속 의심의 불을 지폈습니다. 왕궁에 도착한 왕자는 쳐들어가듯 곧바로 아내의 침실로 향했습니다. 그녀의 침상 밑에는 누더기 남자가 말한 것처럼 끌룽꿍 왕국 전통 문양이 들어간 머리끈이 정말로 있었습니다.

 

반유왕이 고사  

 

“당신 침상에서 이 머리끈이 나왔소! 이걸 준 사람에게 날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니! 어떻게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있소?”

라덴 반뜨랑은 아내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그건 누명이에요. 저는 당신을 해칠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그런데 당신을 죽여달라고 사주했다니요!”

수라티 공주는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라덴 반뜨랑 왕자는 자신이 한때 구원했던 수라티 공주가 이제 자신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한번 품은 마음 속 의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뿐이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을 해치기 전 자신이 먼저 아내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라덴 반뜨랑은 수긍한 척 물러섰지만 아내를 강에 빠뜨려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며칠 후 둘만의 피크닉을 가자며 아내를 도성 강가로 데려갔습니다. 그 강은 그가 수라티 공주를 만났던 숲 속 개울들이 모여 이룬 하류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누더기 사내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아내를 몰아붙였습니다.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으므로 수라티 공주는 자신이 살아서 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간단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는 제 친오빠에요. 그가 나에게 머리끈을 주었는데 거기에 이런 음모가 있을 줄 몰랐어요.” 그녀도 누더기 남자, 즉 자기 오빠를 만났던 이야기를 모두 애기하며 최선을 다해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라덴 반뜨랑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은 의심은 점점 더 짙어질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제 남편입니다. 당신의 진심을 알려주세요. 당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 오빠인 루빡사 왕자를 만났던 이야기는 한 점 거짓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을 죽이려는 것은 제가 아니라 제 오빠의 의지였어요. 오빠가 당신을 죽이도록 도와달라 했지만 저는 거절했어요.”

 

아내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이미 굳어버린 라덴 반뜨랑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어요. 수리티 공주도 남편의 고집스러운 표정에서 그가 자신을 전혀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에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단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강의 정령이 내 마음을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만약 이 강물이 청명해지고 향기로워지면 당신의 아내가 결백했다는 것을 믿어 주세요. 하지만 만약 물이 흐려지고 악취가 풍긴다면 그건 제가 정말 죄를 지은 거겠죠!”

 

라덴 반뜨랑 왕자는 그저 아내가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허리춤에 찬 끄리스 단검을 뽑아 들었습니다.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전 끌룽꿍 왕국의 궁전에서 왕의 심장에 칼을 찌르던 순간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에도 끌룽꿍 왕실의 씨를 말려 후환을 없애려 했었죠. 그 생각을 이제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라덴 반뜨랑 왕자의 눈빛이 광기에 젖어 번득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찌르기도 전 수라티 공주가 먼저 강물에 몸을 던졌고 곧 깊은 강바닥으로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라덴 반뜨랑 왕자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망연자실해 있는데 곧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강물 전체에 감미로운 향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라덴 반뜨랑은 아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기억하며 몸을 떨었습니다.

 

“아내는 정말 결백했구나! 강물에서 향기가 피어오르다니!”

 

그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아내 수라티 공주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은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남의 말을 믿어 정작 가장 믿어야 했던 아내를 믿지 못한 라덴 반뜨랑 왕자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도 그곳을 흐르는 강물에서는 향기가 사라지지 않아 그곳을 반유왕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반유(banyu)란 물, 왕이(wangi)란 향기를 뜻하는 말이죠. 즉 ‘향기로운 물’이란 반유왕이는 그곳 지역 이름으로 붙여져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반유왕이 고사 아트 모음    

  

 

참고

https://www.kozio.com/cerita-rakyat/#Cerita_Rakyat_Asal_Usul_Banyuwan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