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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착한 뱀

beautician 2022. 3. 12. 11:36

나가 바루끌린팅 전설

 

 

아주 오래 전 옛날에 드망 망이란(Demang Mangiran) 주민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남자를 접한 적 없는 처녀가 임신해 아홉 달 하고도 하루 만에 어른 팔뚝 만한 뱀 한 마리를 낳은 것입니다. 그 처녀는 족장 끼 다망 딸리왕사(Ki Damang Taliwangsa)의 딸이었습니다.

 

끼 다망 딸리왕사는 딸이 뱀을 낳았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마을 사람들 볼 낯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썩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며 딸에게 뱀으로 태어난 아기를 갖다 버리라고 명했죠.

 

딸은 아버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뱀으로 태어난 아기는 벌써부터 사람들의 말을 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기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엄마는 왜 날 버리려 해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아기가 그렇게 하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기를 버리겠다는 마음이 온데간데없어지고 오히려 아기를 지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뱀 아기를 다른 인간 아기들과 똑 같은 방식으로 키웠고 마을사람들이 하는 험한 말들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버지 끼 다망 딸리왕사에게도 아기를 키우며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고 아버지도 결국 딸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

딸은 아버지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아기를 잘 키우고 마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버지도 마을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아기를 집안에서만 키우고 집밖에 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뱀의 몸집이 점점 커져 집을 온통 휘감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어머니의 말에 순종해 집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이름이 없던 뱀은 어머니에게 자기에게도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이미 집채만큼 자란 큰 뱀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나가 바루끌린팅(Naga Baru Klinting)은 어떠니?”

나가(Naga)란 용이란 뜻이죠. 아들은 그 이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바루끌린팅의 아버지

한편 바루끌린팅은 다 자랄 때까지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내 아빠는 누구에요? 아빠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어머니는 깜짝 놀라더니 아들에게 끼 다망 딸리왕사가 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바루끌린팅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끼 다망 딸리왕사가 어머니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루끌린팅이 계속 아버지에 대해 물었으므로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어머니가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아버지에 대해 자꾸 물으니 오래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너에게 말해 주마.”

 

바루끌린팅이 태어나기 전 드망 망이란 마을에 정화의식이 있었고 그녀는 족장인 다망 딸리왕사의 딸로서 그 의식준비를 보왔습니다. 그때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높은 도력을 가진 끼 와나바야(Ki Wanabaya)를 찾아가 정화의식에 사용할 성유물을 며칠간 빌리기로 했습니다. 끼 와나바야는 온갖 신비한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중 정화능력이 깃든 성유물 끄리스를 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끼 와나바야는 흔쾌히 성유물을 내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인 힘이 깃든 끄리스를 잊어버리거나 길에서 강도를 만나 뺏길까 두려워했습니다. 물론 성유물에 깃든 신비로운 힘은 생각지도 않은 더 큰 사건을 스스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끼 와나바야는 친구 끼 다망 달리황사의 딸을 찬찬히 살펴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결국 그녀에게 끄리스를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그는 끄리스를 쥐어주면서 끄리스를 아무 데나 함부로 놓지 않고 특히 무릎 위에는 절대로 올려놓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응에벨 뽀노로고 호수(Telaga Ngebel Ponorogo)에 만들어진 바루끌린팅 조형물  

 

그녀는 그렇게 끄리스 단검을 받아들고 집에 돌아왔는데 집 부엌에 온 동네 처녀들과 아낙들이 모여 음식을 하느라 왁자지껄한 탓에 그들과 어울리다가 끄리스를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끄리스를 아무 생각 없이 잠시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끄리스는 순식간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습니다. 끼 와나바야가 경계하며 당부하던 이야기가 그제야 기억났기 때문이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당부를 제대로 따르지 않아 성유물 끄리스를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끼 와나바야가 알게 되면 크게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녀는 곧바로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마치 독에 중독된 것처럼 그녀의 온몸이 새파랗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끼 다망 딸리왕사가 깜짝 놀라 달려오는 등 난리법석이 벌어졌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딸이 어렵사리 자초지종을 말하자 아버지는 지체없이 끼 와나바야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드망 망이란을 방문해 딸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끼 와나바야가 도착하자 딸은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가누기 어려운 몸을 일으켜 그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끼 와나바야는 한숨을 내쉴 뿐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아버지 끼 다망 딸리왕사를 불러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본의 아니게 벌어진 일이지만 운명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겠네. 벌어진 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자네 딸에게 그 끄리스를 무릎 위에 올려 놓지 말라고 분명히 얘기해 주었네. 하지만 자네 딸이 부주의하게 그 끄리스를 무릎 위에 놓았던 거야. 그 결과 그 성유물 끄리스는 무릎 위에서 사라져 곧바로 자네 딸의 자궁 속으로 들어갔네. 자네 딸이 처녀란 것을 알지만 자네 딸은 이제 임신한 걸세.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마을 사람들이 자네 딸을 손가락질하게 될 텐데 어쩌면 좋은가?”

 

그 말을 들은 끼 다망 딸리왕사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오랫동안 방법을 궁리하던 끼 와나바야는 자신이 친구 딸의 남편이 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아기를 낳으면 자신이 그 아기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자신은 곧바로 머라삐 산의 처소로 돌아가 다시는 끼 다망 딸리왕사 딸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았죠. 끼 다망 딸리왕사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딸 혼자 아기를 낳게 되었지만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리를 듣지는 않을 터였습니다. 그는 결국 친구의 제안을 수락했고 간단한 혼인식도 가졌습니다. 그런 후 끼 와나바야는 머라삐 산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죠.

 

모든 게 순조로왔어야 하는데 그녀가 뱀의 형상을 한 바루끌린팅을 낳을 것이란 사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세상 밖으로

이제까지 어머니의 말을 들은 바루끌린팅은 자신의 아버지, 즉 끼 와나바야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에게 머라삐 산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미 깊이 정든 자신의 아이가 이제 멀리 떠나려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집요하게 물었으므로 어머니는 결국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저기 보이는 봉우리가 머라삐산이란다.”

어머니는 거대한 바루끌린팅의 머리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슬퍼했습니다.

 

바루끌린팅은 그날 밤 곧장 드망 망이란을 떠나 쁘로고 강(Kali Progo)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머리삐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뜨거운 장벽이 세워져 있기라도 한듯 바루끌린팅이 바로 올라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루끌린팅이 쁘로고 강변에 머무는 동안 몸집은 더욱 커져 이제 거대한 용의 형상을 했습니다. 온몸은 단단한 비늘로 덮였고 무서울 정도로 안광이 형형했습니다. 그가 쁘로고 강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산사태가 일어너 그곳 주민들은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았습니다. 그 소식이 머라삐산 정상에서 수행을 하고 있던 끼 와나바야의 귀에도 들렸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큰 뱀을 쫓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명상을 멈추고 머라삐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바루끌린팅은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 끼 와나바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끼 와나바야는 자신과 큰 뱀의 관계를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바루끌린팅도 자신 앞에 나타난 도사가 끼 와나바야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끼 와나바야에게 자신이 왜 이 지역에 왔는지 설명했습니다. 그제서야 끼 와나바야는 바루끌린팅이 친구 딸 자궁 속으로 빨려 들어간 성유물 끄리스가 뱀의 형상으로 태어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치미를 떼고 바루끌린팅에게 머라피 산 꼭대기에 그의 아버지가 명상에 잠겨 있는데 머리삐 산을 뱀의 몸으로 둘러 감싸 안으면 자연히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루끌린팅은 머라삐 산에 가서 자신의 몸으로 감싸 안았는데 조금 길이가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바뚜끌린팅은 혀를 쭉 내밀어 꼬리에 대면서 머라삐 산을 감싸는 미션을 완성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끼 와나바야가 끄리스 단검을 꺼내들어 뱀의 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의 혀가 급소라는 사실은 바루끌린팅 자신도 모르던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끼 와나바야만이 아는 비밀이었습니다.

 

 

혀를 잘린 바루끌린팅은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을 쳤지만 마치 마른 낙엽이 부서지듯 순식간에 바스러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땅에 떨어진 바루끌린팅의 혀는 한 자루의 창이 되었는데 그것을 후세 사람들은 똠박 바루끌린팅(Tombak Baru Klinting) 또는 끼아 바루끌린팅(Kia Baru Klinting)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창이라면 여인들의 무릎 위에 놓이는 일은 없겠지.”

끼 와나바야는 그 창을 집어들면서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고대의 비술을 배워 영원을 사는 끼 와나바야가 큰 뱀의 혀를 자를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드망 망이란 마을 끼 다망 딸리왕사의 딸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이미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손안에서 똠박 바루끌린팅이 웅웅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그 안에는 왜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냐고 화를 내며,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울부짖는 바루끌린팅의 혼이 담겨 있었습니다.

더욱 큰 한을 품고 더 크게 울부짖으렴.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땅의 영웅들 피를 너에게 먹여주마. 영웅들의 피를 뒤집어쓴 용의 혼을 그 누구도 당할 수 없겠지.” 끼 와나바야는 껄걸 웃음을 터트리며 그 창을 어깨에 걸치고 머리피산을 올랐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똠박 바루끌린팅은 끼 아긍 버마나한이 갖게 되고 다시 그 아들이자 마타람 왕국의 시조인 스노빠티를 거쳐 그 손자인 술탄 아궁에게 손에 들리게 되어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의 반란을 진압하는 전장에서 수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게 됩니다.

 

똠박 바루끌린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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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형상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평생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다가 자신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끼 와나바야에게 죽임을 당하고 마는 바루끌린팅의 이야기는 인간이 뱀보다 더욱 짐승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루끌린팅의 전설은 여러 버전이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거대한 용으로 성장해 가는 바루끌린팅에게서 폭력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버전에서 그는 떨로모요 산(di Gunung Telomoyo)의 한 동굴 속에 은거하는 아버지 끼 하자르 살로깐타라(Ki Hajar Salokantara)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증표로서 어머니가 준 종이 달린 목걸이를 보여주어도 아버지는 그가 자기 아들이이란 걸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말하는 뱀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에덴동산의 이브 밖엔 없습니다.

 

끼 하자르 살로깐타라는 바루끌린팅에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이들임을 입증하라고 요구합니다. 그것은 떨로모요 산을 둘러 감싸고서 1년 동안 꼼짝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1년 후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루끌린팅은 기쁜 마음으로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는 떨로모요 산을 감싼 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먼지와 낙엽이 쌓이면서 바루끌린팅은 점점 산에 동화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산 아래 마을에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풀과 나물을 캐고 사냥을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거대한 뱀이 미동도 없이 산을 감싸고 또아리를 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뱀이 움직이지 않아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칼로 뱀의 살을 발라 내기 시작했습니다. 뱀고기로 배를 잔뜩 채운 마을사람들은 그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산에 올라와 뱀의 살을 발라 가져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뱀은 뼈만 남은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1년만에 동굴에서 나온 끼 하자르 살로깐타라는 그렇게 백골이 되어 있는 바루끌린팅을 보고 흠칫 놀랐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 그는 마을사람들이 자기 살점을 베어가는 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목숨을 잃고 만 것입니다.

 

여기 왜 뱀 시체가 있지?”

끼 하자르 살로깐타라는 대수롭지 않게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약속들은 물론 바루끌린팅에게 산을 감싸고 1년간 움직이지 말라고 했던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입니다.

 

참고:

https://dosenwisata.com/cerita-rakyat-sejarah-baru-klinting/

https://www.semarangpos.com/baru-klinting-lingkari-gunung-demi-diakui-anak-pertapa-1044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