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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먼둣: 정조의 아이콘과 담배장사

beautician 2022. 3. 11. 11:27

라라먼둣: 정조의 아이콘을 담배장사로 묘사한 이유

 

라라먼둣 (Roro Mendut)  

 

오래 전 자바섬 북쪽 해안, 정확히는 중부자바 빠띠(Pati) 지역에 떨룩찌깔(Teluk Cikal)이라는 어촌은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Adipati Pragolo II)가 다스리던 곳으로 마타람 술탄국의 영토였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마타람의 세 번쨰 군주 술탄 아궁(Sultan Agung)의 시대.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는 마타람의 시조 스노빠티의 증손자 뻘이었지만 마타람 왕실과는 선대의 복잡한 권력투쟁의 역사로 인해 대체로 척을 지고 있었습니다.

 

떨룩찌깔 마을에는 라라먼둣이라는 여인이 살았습니다. 그녀는 마침 그림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뿐 아니라 올곧고 강단있는 성품으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소문난 아름다움에 홀린 남자들이 무수히 찾아와 청혼했지만 그녀는 정혼자와 결혼은 약속한 사이였으므로 아무리 대단한 남자들이 찾아와도 서슴없이 거절하는 담백하고 깔끔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유가 쁘라나찌트라(Pranacitra)란 이름의 정혼자가 마을에서 가장 잘 생긴 사내이고 엄청난 부를 일군 거상 냐이 싱아바롱(Nyai Singabarong)의 아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녀는 한번 마음을 정하고 나면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라라(rara) 또는 로로(roro)라는 말은 자바어로 여인을 의미합니다. 먼둣(mendut)은 찹쌀가루와 코코넛 밀크를 섞어 작은 공 모양으로 만든 후 속을 채운 후 바나나 잎에 싸서 찐 스낵을 말하죠. 그러니 라라먼둣이란 실제 이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먼둣을 잘 만드는 (아름다운) 소녀’라는 의미인 셈입니다. 아름답다는 묘사가 따라붙는 이유는 라라종그랑(Rara Djonggrang), 니로로키둘(Ni Rorokidul)처럼 자바 여인의 이름 앞에 ‘라라’, ‘로로’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자동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이 여인의 본명이 따로 등장하지 않으므로 라라먼둣을 그녀의 이름으로 간주하기로 합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품격높은 몸가짐이 사람들 입을 타고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모든 문제들이 시작됩니다. 빠티 영지의 주인인 그는 라라먼둣을 데려와 자기 첩실로 삼고 싶어 몇 차례 선물을 들려 보내 청혼했으나 라라먼둣은 매번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실망한 쁘라골로 2세는 약이 올라 화가 나기도 해 일단의 무사들을 보내 라라먼둣을 납치해 오기로 합니다. 당시 영주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 여기던 시대입니다.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가 보낸 사들은 라라먼둣이 해변에서 홀로 생선들을 말리고 있을 때 들이닥쳤습니다.

“순순히 우리를 따라 끄라톤으로 가자”

그들은 라라먼둣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라라먼둣은 거칠게 저항했습니다.

“이 손을 놓으시오! 난 이미 정혼자가 있는 몸이요. 아디빠티 쁘라골로님의 첩실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무사들은 그녀를 강제로 말에 태워 끄라톤으로 향했습니다. 영주의 끄라톤에 도착한 그녀는 영주의 첩이 될 여인이었으므로 니스망카(Ni Semangka)라는 이름의 지위높은 궁녀가 관리하는 아디빠티 궁의 한 전각에 머물게 됩니다. 거기서 라라먼둣은 건둑 두쿠(Genduk Duku)라는 나이 어린 궁녀의 도움을 받게 되죠.

 

여기서 니스망카란 ‘수박부인’이라고 번역할 수 있고 두쿠(duku)란 동그란 노란색 껍질을 가진 열대과일을 말합니다. 건둑(genduk)은 여성, 소녀의 이름 앞에 붙여주는 경칭이므로 건둑 두쿠는 ‘두쿠양’ 정도의 의미가 됩니다. 쁘라골로 2세 후궁들의 전각이 무슨 과일가게도 아닌데 저렇게 궁녀들 이름에 과일 이름이 붙은 것이 여성을 언제라도 먹어치울 수 있는 달콤한 과일 정도로 보는 당시 쁘라골로 2세의 악취미를 반영하는 실화가 아니라면 이 이야기가 정사(正史)가 아니라 비유와 상징을 담은 민화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두쿠 열매  

 

라라먼둣이 쁘로골로의 후궁에 감금되어 있을 때 빠티 공국은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가 마타람 왕국에 세금을 내지 않았으므로 술탄 아궁이 그를 반역자로 지목하고 그 자신이 선봉에서 서서 빠띠 공국을 공격해온 것입니다. 영주가 왕실에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최소한 마타람에서는 분명한 반역의 조짐이었습니다. 그 옛날 마타람의 시조 스노빠티, 즉 수타위자야가 빠장왕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에도 처음 한 일은 빠장왕국 술탄 아디위자야의 왕실에 세금을 보내지 않고 세금을 거두러 온 관리들을 회유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전장에서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는 금속으로 만든 신비로운 갑옷을 입고 있어 술탄 아궁 측의 군사들은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별로 신비할 것도 없는, 포르투갈인들에게서 산 서양의 갑옷이었어요. 술탄의 양산을 받치고 있던 끼 나야다르마(Ki Nayadarma)라는 시종이 멀리서 함께 전황을 살펴보다가 한탄하면서 분개했습니다.

 

“맙소사, 쁘라부 전하, 내가 나가 아디빠티 쁘라골로를 대적하게 허락하소서!”

“허락하마, 이 바루 끌린팅 창(tombak Baru Klinting)을 사용하거라!”

술탄은 끼 나야다르마에게 왕국의 성유물인 바루끌린팅 창을 내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루끌린팅은 뽀노고로(Ponogoro)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용의 이름입니다. 마타람의 성유물 바루끌린팅 창은 용의 정기를 담은 신물(神物)이었겠죠.

 

똠박 바로끌린팅은 아마도 이런 모습  

 

끼 나야다르마는 술탄에게 받은 바루끌린팅 창을 휘두르며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에게 쇄도했으나 여전히 모든 공격이 갑옷에 막혀 그의 몸을 상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기세가 오른 쁘라골로가 공격하는 사이 갑옷 이음새의 헛점을 발견하여 창을 찔러넣자 쁘라골로가 마침내 고꾸라지져 죽고 말았습니다.

 

멋지게 등장해 대단한 일을 해낸 끼 나야다르마는, 그러나 이것으로 이 이야기에서 퇴장하고 그 대신 이 대목에서 마타람의 정벌군 사령관 뚜먼궁 위라구나(Tumenggung Wiraguna)이 등장합니다. 그는 군사들과 빠티 영지로 진입해 처절한 약탈을 자행했는데 후궁에 갇혀 있던 라라먼둣도 전리품이 되어 마타람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녀를 본 뚜먼궁 위라구나는 단번에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해 라라먼둣을 마타람으로 데려가 자신의 첩실로 삼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라라먼둣은 뚜먼궁 위라구나의 회유와 청혼을 매번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위라구나에게 불려나온 자리에서도 또렷이 자신은 고향에서 쁘라나찌트라와 이미 정혼한 사이라고 밝히며 자신이 그를 거절하는 이유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뚜먼궁 위라구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라라먼둣, 네가 정히 내 첩이 되고 싶지 않다면 죽은 아디빠티 쁘라골로 2세를 대신해, 그가 그동안 내지 않은 세금을 네가 내야 하겠다. 세금을 마지막 한 푼까지 모두 내기 전엔 절대로 이 궁전을 떠나지 못할 것이야. 아마도 영원히!” 뚜먼궁 위라구나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라라먼둣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뚜먼궁 위라구나의 위협에 굴복해 그의 첩이 되는 것보다 세금을 내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그녀는 비록 병사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지만 세금을 내기 위해 시장에서 담배장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뚜먼궁 위라구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 요청을 승인했는데 라라먼둣의 담배장사는 너무나 잘되었습니다. 그녀는 담배를 말아 권련을 만들었는데 담배를 말아 끝부분을 붙일 때 접착제 용도로 라라먼둣이 침을 발라 붙였으므로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은 그녀의 침이 뭍은 담배에 환장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녀가 피우던 담배는 더욱 인기가 많아 이를 사려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장사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라라먼둣의 담배를 사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라라먼둣을 다룬 모든 채과 영화에서 라라먼둣은 한결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어느날 라라먼둣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중 멀리 자신을 찾아온 쁘라나찌트라를 만났습니다. 그는 라라먼둣을 데리고 마타람왕국을 탈출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라라먼둣은 영주의 궁전으로 들어가 위라구나의 첩실 중 한 명인 뿌뜨리 아루마르디(kepada Putri Arumardi)에게 자신이 정혼자인 쁘라나찌트라를 만난 사실과 그와 함께 궁전을 떠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최소한 뿌뜨리 아루마르디는 위라구나가 더 이상 첩실을 늘려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자신이 그곳을 나간다고 하면 반드시 도움을 줄 것이라 여겼습니다. 뿌뜨리 아루마르디는 여전히 뚜먼궁 위라구나가 라라먼둣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냐이 아젱 (Nyai Ajeng)이라는 또 다른 후궁과 함께 라라먼둣을 궁에서 내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녀가 뚜먼궁과 감시병들의 눈을 피해 궁에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빠티 영지의 고향으로 정혼자와 함께 돌아갈 수 있을 터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얼마 가지 못해 그들의 탈출을 알아차린 위라구나가 보낸 병사들에게 따라잡히고 말았습니다. 위라구나는 라라먼둣을 다시 궁으로 압송하는 한편 쁘라나찌트라를 추방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수하에게 몰래 죽이라고 시켰습니다. 쁘라나찌트라는 그렇게 라라먼둣이 알지 못하는 사이 죽임을 당해 족자에서 9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간두마을(Desa Gandhu) 쯔뽀란(Ceporan)의 작은 숲 속에 묻혔습니다.

 

쁘라나찌트라를 해치운 뚜먼궁 위라구나는 다시 집요하게 라라먼둣에게 자신의 첩실이 되어 수청을 들도록 회휴했으나 라라먼둣은 여전히 기개가 꺾이지 않은 채 그 요구를 계속 거절했습니다. 이에 화가 나 눈이 뒤집힌 위라구나는 라라먼둣에게 정혼자가 이미 목이 잘려 땅속에서 해골이 되었을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이미 죽어 백골이 된 사람에게 시집가겠다는 건가? 라라먼둣, 네가 날 거절하는 건 다 부질없는 짓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라라먼둣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직도 못알아들은 게냐? 네가 사랑한다는 그 정혼자가 이미 죽었단 말이다.”

 

라라먼둣은 자신을 구하러 온 정혼자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말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뚜먼궁 위라구나는 그녀의 기개를 꺽으려 했습니다.

“못믿겠다면 그 녀석이 묻힌 곳을 보여주마!”

뚜먼궁 위라구나는 라라먼둣을 쁘라나찌트라가 묻힌 곳까지 끌고 갔습니다. 쁘라나찌트라가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라라먼둣은 북받치는 슬픔과 괴로움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네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을 했는지 이제야 알겠느냐?”

라라먼둣은 한참을 울다가 고개를 들고 무서운 얼굴로 뚜먼궁 위라구나를 노려보았습니다. 그녀는 위라구나의 악행을 마타람의 왕 술탄 아궁에게 고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당신은 심하게 선을 넘었습니다. 당신의 악행을 마타람의 술탄에게 알려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요!”

뚜먼궁 위라구나는 그렇게 소리치는 라라먼둣의 손을 잡아 끌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항하며 몸부림치던 라라먼둣은 마침내 위라구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면서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끄리스 단검을 빼앗아 들었습니다. 그런 후 곧바로 돌아서 쁘라나찌트라가 묻힌 곳으로 달려 갔고 위라구나가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쫒았습니다.

“멈춰라! 게 섰거라!”

 

쁘라나찌트라의 무덤에 다다른 라라먼둣은 칼끝을 자신의 목 쇄골 사이의 움푹한 곳에 겨누었습니다. 자결하려는 것이었죠.

“잠깐, 그러지 말거라, 그러지 마!”

뚜먼궁 위라구나가 급히 그녀를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끄리스 칼은 손잡이가 쇄골에 닿도록 그녀의 목을 깊숙히 파고들어 칼끝이 심장을 찔렀습니다. 라라먼둣은 그대로 쓰려져 쁘라나찌트라의 무덤 위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뚜먼궁 위라구나는 그제서야 자신이 부당한 욕심을 부려 젊은 두 사람을 죽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강요하지 않았다면 라라먼둣은 자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주워담을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를 따라 순결을 지킨 라라먼둣을 뚜먼궁 위라구나는 그녀의 정인 쁘라나찌트라의 무덤에 합사하고 그녀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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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로먼둣의 이야기는 암바라와 출신 작가 Y.B 망운위자야(Y.B. Mangunwijaya)가 1982년부터 1987년 사이 일간 꼼빠스에 연재한 3연작 소설 속에 등장하는데 각각의 소설명은 ‘라라먼둣(Rara Mendut)’, ‘건둑 두꾸(Genduk Duku)’, ‘루시 린드리(Lusi Lindri)’였습니다. 이 3연작은 2008년 ‘라라먼둣: 트리올로지’(Rara Mendut: Sebuah Trilogi)라는 제목으로 그라메디아(GPU)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참고:

https://www.kozio.com/cerita-rakyat/#Cerita_Rakyat_Legenda_Roro_Mend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