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인도네시안 드림

인도네시안 드림 (5)

beautician 2022. 2. 11. 12:03

 

 

ep5. 도어락

 

 

그러나 정작 문제는 최사장 자신에게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중산층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인도네시아에 날아와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적 지위가 현지에서 갑자기 격상되는 것에 스스로 놀랍니다. 대개 인도네시아에서 외국인이라면 무조건 부자 취급을 해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 한국화폐는 현지의 싼 물가와 저렴한 인건비 환경에서 위력을 발휘했지요. 그래서 자칫 잘못 생각하는 순간 운전사, 가정부도 필요 이상으로 각각 두 명씩 들이고 수스터(Suster)라 부르는 보모도 둘, 거기에 집에서 쓰는 비서까지 따로 채용하기도 하고 그 생활에 중독되면 집사와 정원사까지 두고 영화 속 대저택의 영주 같은 생활을 완성해 가지요. 최사장이 그런 상태였어요. 그는 절대 자신의 것일 리 없는 목돈을 뿌려가면서 대기업 회장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하려 했고 그래서 사무실은 김부장에게 맡기고 자긴 출근도 하지 않으면서 집에서 보고를 받으려 했죠. 출근하지 않으니 현장 상황을 전혀 챙기지 못했고 그래서 모든 디테일을 꽁꽁 꿈치고 있던 김부장을 쉽게 내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난 그의 요구에 따라 얼마 후 여직원 한 명을 소개해 주게 됩니다. 그 여직원이 패밀리 노래방인 이눌비스타 가라오케의 빠사르 페스티발점에서 경리캡틴으로 있던 메이라는 아가씨였어요. 활발하고 총명한 메이는 최사장과의 면접을 간단히 통과했고 최사장은 1주일 후 정식 채용할 때까지 내가 맡아 업무교육을 시켜달라고 요청해 옵니다. 사무실을 빌려 쓰는 동안 최사장은 정말 다양한 요구를 해오고 있었어요. 그러나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도 최사장은 메이를 데려가겠다는 얘기를 해오지 않았습니다. 최사장의 미적거림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맡은 나는 급기야 최사장의 아파트를 방문해 그의 입장을 재차 물었습니다.

 

김부장이 회사의 주요 기밀을 다 가지고 있는데…, 그 친구가 메이를 받을 수 없다고 하네요. 배사장한테 교육을 맡긴 게 마음에 안들었던 건지  물론 곧 짤라야 할 사람이지만 당장은 아직 진행하는 일들을 마무리 해야 하니…, 어떻게…, 배사장은 직원이 더 필요하지 않으세요?”

 

최사장의 대답에 기가 찼습니다. 한국사람들이 한껏 우습게 보곤 하는 현지인, 그것도 고졸출신 여자라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인생을 가지고 함부로 장난쳐서는 안되는 겁니다. 메이는 최사장과의 면접 후 이눌비스타에서 정식으로 퇴직해 이젠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최사장은 이제 와서 채용할 수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화를 내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최사장이 미안해서 난처해 하는 표정을 보며 나도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어요. 그를 소개해 준 양프로의 입장도 있었고 그렇다고 내가 빠룽공장의 박치기 대마왕에게 당했던 것처럼 돈 몇 푼 집어 주며 알아서 살 길 찾아보라고 메이를 길바닥으로 내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메이를 내가 떠안기로 마음먹기에 이릅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메이와의 인연은 그때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최사장이 자금 운용을 방만하게 한다는 것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발릭빠빤 실리카 광산에 30억 원을 쏟아 부으면서도 자기가 현지에서 타고 다닐 차 한 대도 사놓지 않았어요. 물론 그가 30억 원을 고스란히 광산에 넣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는 렌터카를 사용했는데 납원석 사러 산골짝의 가파른 경사길을 다니기 적합한 밴이나 찦이 아니라 굳이 토요타 로얄살롱 세단승용차를 고집하는 것도 그랬고 앞서 언급한 호화로운 아파트 유닛도 그랬어요. 그는 동생에게도 따로 아파트를 구해 주었는데 앞서 언급한 원석 구매사고로 동생이 도주한 후 필요한 자료들을 가지러 그 아파트에 가 보았을 때 그 호화로운 인터리어에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최사장 말에 따르면 실리카 광산에 투자한 30억원은 자기 돈 6억에 한국 투자자들로부터 받은 24억을 합친 것이었다는데 결국 막대한 남의 돈을 줄줄 흘리면서 지은 광산을 황사장 현지처 명의로 해놓고 제대로 시운전도 못한 채 황사장이 당장 소유권을 가로채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어정쩡한 상태로 방치해 놓고서 이번엔 납 원석 수출사업을 위해 포항 투자자들에게 추가 투자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큰 돈을 떼일 위기에 처한 투자자들은 이미 똥줄이 타고 있었는데 말이죠. 거기에 이제 동생과 김부장을 통해 원석 구매비 4억을 추가로 날려 버린 상황에서 최사장 부부가 최고급 피트니스센터에 다니고 비싼 골프레슨을 받고 매일 밤 호화로운 외식을 하며 가라오케에서 밤을 지새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의 30억 중 대부분을 차지했던 남의 돈을 다 날려 엄청난 빚은 진 상태에서 최사장은 추가로 투자를 끌어와 그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던 셈이었죠. 그런데도 그는 그야말로 돈을 물쓰듯 쓰고 있었습니다.

 

투자자들은 나한테 돈을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말할 자격이 없어요. 어차피 다 내가 책임지면 되는 것이고 나중에 투자원금 이상으로 수익을 내서 벌어주면 되는 것인데 그 사람들이 여기 지출되는 내역을 가지고 감 놔라 대추 놔라 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사업 합니까?”

 

최사장은 곧잘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돈을 어디다 쓰겠다는 목적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투자를 받은 것일 텐데도 말이죠. 그러나 나는 그의 돈 문제까지 간여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투자하는 사람들도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최사장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큰 돈을 밀어 넣었던 것이고 나는 그의 지출 내역을 왈가왈부할 입장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그가 황사장에게 집과 차를 사주고 김부장에게도 아파트와 가구를 내 준 재원은 분명 투자자들 돈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의 사업은 수익을 내기는커녕 아직 활로도 보이지 않는데 원금회수도 불투명한 그 거대한 금액을 최사장이 어떤 식으로 책임질 것인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최사장은 분명 남의 돈에 대해 무책임한 측면이 있었어요. 그런 그가 메이의 채용을 번복하면서 사람에 대한 무책임마저 보였다는 사실은 이미 그의 사업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던 나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최사장과 김부장 사이에 결국 파국이 찾아 왔습니다. 최사장은 더 이상 월급을 줄 수 없으니 마나도 직원들을 해고하고 김부장에게도 나가 달라 요구했고 김부장은 어차피 최사장이 사무실에 잘 나오지도 않으니 월급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새 직장을 찾을 때까지 몇 달만 더 사무실을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최사장은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김부장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했어요. 그것은 회사가 최사장의 사업과 관련 없는 김부장의 개인사업공간으로 변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뜻이었으므로 거기 세 들어 있는 셈인 내 입장은 더욱 애매해졌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최사장의 승락을 기화로 김부장은 또 다른 요구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메디테라니안 아파트에 있는 가구들은 어차피 중고가 된 셈이니 자기한테 거저 달라는 것부터 최사장이 동생의 말만 듣고 거금을 들여 산 스펙이 지나치게 높은 디자인 전용 검퓨터 네 대와 20인치 LCD 모니터, 프린터 복합기 등을 퇴직금 조로 넘겨 달라고도 하고, 최사장 측에서 회사를 나가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니 해고수당을 주지 않으면 노동부에 고발하겠다는 위협까지, 김부장은 거의 매일 새로운 요구를 내세우며 최사장을 압박했습니다. 그는 분명 선을 넘고 있었는데 그것은 최사장을 얕잡아 봤기 때문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참다 못한 최사장이 결국 언성을 높이며 당장 사무실을 비우라고 불호령을 내렸죠. 그리고 그 다음날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지만 나와 우리 직원들은 사무실에 할 일이 있었어요. 미용실들과 거래하는 우리들은 미용실 근무일에 맞춰 휴일 일하고 평일에 교대로 하루 쉬는 식이었습니다. 내가 출근했을 때 토요일인 전날 사무실을 비우기로 했던 김부장과 마나도 직원들이 와있었는데  휴일 아침에 나타난 나와 내 직원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들이 반나절 넘게 우리 눈치를 보며 빈둥거리는 게 좀 수상했는데 어잿든 오후가 깊어오자 일단 사무실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퇴근하려는데 사무실 현관문 열쇠가 도무지 열쇠구멍에 들어가질 않는 거에요.

 

열쇠가 바뀐 것 같아요. 이거 보세요. 이 자물쇠 세트는 반짝반짝 윤이 나잖아요? 이건 새 거에요.”

 

메이가 지적한 데로 사무실 현관 자물쇠 세트가 정말 통째로 새것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그날 퇴근한 마나도 직원들이 저녁이 다되도록 왜 사무실 근처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는지, 그들이 아침에 우리들을 보고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휴일엔 가족들이 쓴다던 김부장의 임대차량이 왜 일요일인 그날 아침부터 사무실 앞에 주차되어 있었는지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토요일 밤 우리가 퇴근할 때에도 사물정리를 한다며 우리가 퇴근한 후에도 사무실에 남아 있었죠. 그때 김부장은 사무실 자물쇠 세트를 새것으로 사서 바꿔 끼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무실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들려 했던 것이죠. 일요일 아침에 그들이 사무실에 나와 있었던 이유는 비록 최사장이 거절했지만 얼굴 다시는 안볼 요량으로 컴퓨터, 프린터 등 집기들을 들고 갈 목적이었을까요? 

 

우리가 월요일에 출근해 잠긴 문 때문에 고생고생 하다가 마침내 열쇠전문가를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갈 때까지 김부장은 시간을 벌려 했을 것이고 집기들이 없어진 사실을 따져 물으면 또 시치미를 뗄 요량이었겠지요. 그런데 거사 당일, 휴일인데도, 그것도 하필이며 자물쇠를 바꾼 문이 열려 있을 때 우리 직원들이 사무실에 나타나자 그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날 밤, 우린 현관뿐 아니라 사무실의 모든 자물쇠 세트들을 다시 바꾸어 버렸고 그 열쇠 한 세트를 빨라디안 아파트의 최사장에게 전달할 때 그는 그 날의 해프닝을 듣고 혀를 끌끌 찰 뿐이었습니다. 김부장과 그의 직원들은 그후 다시는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김부장이 납 선별장을 하겠다며 말링핑, 바야 등지에서 채굴업자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지만 얼마 후 그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메디테라니안 아파트의 임대기간이 끝나고 차량 임대기간도 끝나면서 그 가구들을 싣고 다시 빈민촌으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가족들과 함께 마나도로 돌아갔는지도 모르죠.

 

김부장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한편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적잖은 시간을 백수에 불법체류자로 지내며 아무런 희망도 없던 암울한 시절, 그래서 미래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세울 수 없던 상태에 현지인 처 사이에서 내지르듯 낳았던 아이들 셋이 어느새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고 더 이상의 후회조차도 의미가 없어지던 순간, 그가 최사장을 통해 쥐게 된 천금 같은 기회를 통해, 퇴색해버린 그의 생활과 인생을 개조하기에 그가 빠져 있던 나락의 깊이가 너무 깊었던 것입니다. 최사장이 나름대로 배려한 것은 분명하지만 김부장의 절망의 크기는 그것을 훌쩍 뛰어 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의 처절한 절박함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허망하고도 게걸스럽게 집어삼켜 버린 것입니다.

 

김부장이 그렇게 떠난 후 최사장은 이제 전적으로 내게 기대오기 시작했고 그가 가진 문제들이 어쩌면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생각보다 과중함을 새삼 깨달으며 그 무게가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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