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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니켈광산 영적 방어작전 (12)

beautician 2022. 1. 22. 11:34

ep12. 축제 전야

 

그 루벤이 2013 12월 연말휴가를 얻어 자카르타에 돌아왔습니다. 조호바루의 동업자 나타샤도 부모, 오빠와 함께 입국했습니다. 릴리는 왕구두에서 꼬나웨 우타라의 부빠띠와 고위 공무원들은 물론 아세라 주민 전원을 초청하는 대대적인 송구영신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모두 그 행사에 초청된 것입니다. 비록 두꾼과 싸워 일단 끈다리에서 밀려났지만 나도 거기 초청되었습니다. 릴리와는 아직 앙금이 남았지만 뭐, 그 정도는 1996년 처음 릴리와 만난 이후 늘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던 일입니다.

 

난 다음 달에 샹하이로 가요. 하지만 릴리는 이번에도 따라오지 않을 모양이네요.”

글쎄요. 꼬나웨에 벌려놓은 일이 릴리 없으면 수습이 안되니 말이죠. 하지만 곧 원석수출금지조치가 발효되면 당분간 일도 소강상태에 들어갈 테니 최소한 릴리가 무티아라 데리고 자주 방문할 수 있을 거에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루벤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의 스리랑카 생활은 대충 5-6년 정도였습니다. 그가 일하던 콜롬보의 벨기에 공장은 특수 타이어를 만드는 캐나다 회사에 인수합병 되었습니다.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는 오히려 그 회사의 아시아 오퍼레이션 전체를 관장하는 샹하이 본부의 CFO로 영전하게 되었습니다. 급여와 근무조건도 크게 좋아졌습니다. 우린 잘 몰랐지만 루벤은 엄청나게 능력있는 남자였던 겁니다.

 

기본적으로 샹하이는 콜롬보와 비할 바 없는 대도시였고 그 회사는 한국과 일본, 동남아 등에 지사와 공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호치민에도 새로 공장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루벤은 끊임없이 지점들을 날아다녀야 했습니다. 재무관리 책임자인 그는 동양문화에도 깊이 심취해 있었으므로 더없이 흥미로운 근무처가 될 터였습니다.

 

그해 12 30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끈다리에 도착한 우리들은 시내 스위스벨 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나로서는 두꾼을 데리고 광산에서 내려온 후 2 주 만에 끈다리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최고급 신축호텔의 그날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디스타로와 페리, 로니를 비롯한 광산 간부들은 물론 모셈파 현장에서 일하던 암본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까지 수백 명이 이미 며칠 째 그 호텔에서 묵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전 처음 고급호텔에 묵어 보는 암본인들은 호텔을 이미 충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돈봉투를 쥐어주는 게 저 친구들한테도 도움되는 거 아니었어? 이건 그냥 돈지랄이잖아?” 

릴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기야 이미 벌어져 버린 일을 탓하고 계산한들 의미 없긴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자면 사실 왕구두에서의 송구영신 축제는 더욱 말도 안되는 돈지랄이었습니다. 릴리는 그 축제를 위해 대략 50만불 정도를 쏟아 부었는데 그 비용을 관리하는 사람은 조카 암릴이었어요. 코파수스 무술교관이라는 친구 말입니다. 비용이 줄줄 새는 것은 눈에 훤히 보였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이 없는데 어떡해요?” 

하지만 암릴은 그런 큰 행사를 한번도 조직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행사 에이전트들을 이중, 삼중으로 끼고 이벤트를 조직했습니다. 만약 먼 친척 조카라는 믿음 때문에 그 큰 돈의 지출창구로 삼았다면 더욱 가까운 형제나 조카들도 얼마든지 있었고 이벤트 오거나이저가 필요했다면 마카사르나 자카르타에서 경험 많은 전문가를 불러올 수도 있었습니다. 릴리는 예전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꼭 믿어야 할 사람 대신 절대 믿어선 안될 사람을 선택하는 패착을 두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셈이었습니다. 암릴은 호텔 식당이나 라운지에 앉아 두툼한 지갑을 흔들며 코파수스 군인들이나 암본 노동자들 앞에서 대장처럼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카르타에서 밴드도 불러오고 2-3천 명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큰 행사였지만 릴리가 니켈 수출대금으로 마련한 그 비용의 상당 부분이 누군가의 주머니만 불려주었을 것 같았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에요?”

다음 날 축제를 앞두고 왕구두로 출발하기 전 호텔 펑션룸에서 열린 사전모임에서 루벤이 넌지시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는 릴리의 옆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아리(Ari)라는 친구를 가리켰습니다. 한 달쯤 전부터 릴리의 광산사업 언저리에 등장한 그는 내가 자리를 비운 지난 2주 사이에 마치 개인 경호원처럼 릴리에게 바짝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릴리는 그가 KPK(부패척결위원회)에 파견나온 해병대 소속이라고 소개해 준 바 있었는데 난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빠 아리. 요 앞전까지 어디서 근무했어요? 계급이 뭐에요?”

그건 비밀입니다. 말해줄 수 없어요.”

“KPK에 파견나왔다면서 이렇게 광산을 다녀도 되는 거에요?”

그런 내용은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게 나아요.” 

이상하죠?

 

그는 마치 무슨 비밀을 잔뜩 숨긴 비밀첩보원처럼 행동하면서도 마치 상관에게 관등성명을 대듯 뻣뻣한 말투를 썼습니다. 그건 마치 군인이나 경찰처럼 보이고 싶은 주택가 경비원들이 군인 말투를 흉내 내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내겐 그가 더더욱 군인같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쥬프리 대위의 코라밀 부대원들이나 코파수스 특전사 대원들은 모두 군복을 입고 다녔지만 해병대라는 아리는 언제나 사복차림이었습니다. , 그가 심복처럼 데리고 다니는 파푸아 남자는 북한 인민복 같은 아파트 경비원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군인이라기보다 인상으로 한몫하려는 양아치 같았습니다.

 

저 친구 누구한테 소개 받은 거야?”

로니요.” 

릴리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암본 마피아 두목 로니가 KPK 파견 해병대 군인을 소개해 줬다고? 

저 사람 어쩌면 장군인지도 몰라요.”

 

아무리 군대를 모른다 해도 릴리가 그런 소리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명실공히 해병대 장군이 일개 광산 사업가의 개인 경호원으로 와서 허드렛일을 할 리 없습니다. 게다가 아리는 장군이 될만한 나이도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동안 아리의 배경을 물었을 때 그가 해병대 상사라거나 대위라고 오락가락 대답을 하던 릴리가 장군 운운한 건 분명 누군가(물론 십중팔구 아리 스스로가) 릴리가 그리 생각할 만한 인상을 주었거나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 의도와 배경이 수상했는데 그걸 철썩같이 믿는 듯한 릴리의 반응이 더 놀라웠습니다.

 

왜 그리 생각하냐 묻자 릴리는 이번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난 한 마디 쏘아 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놈이 장군이면 모기도 전투기다!”

그런 이상한 놈을 주변에 달고 있는데 그가 누구냐 묻는 루벤의 질문에 뭐라고 자세히 설명해 주기 곤란했습니다.

그냥, 경호원인 모양이죠.”

 

하지만 루벤도 장님이 아닙니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아리를 쳐다보며 턱을 쓰다듬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아리에게서 그날 광산에서 데리고 내려온 빽구두 두꾼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아리는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빽구두도 신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두꾼들을 하이룩스 뒷좌석에 태우고 광산을 올라가던 도중 계속 맡았던 어딘가 비릿한 꽃향기 같은 것이 아리와 얘기하는 동안 그의 몸에서도 났던 것입니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가 정말 해병대라면 이제 릴리는 제일 외곽으로부터 로니의 암본 마피아  암릴의 코파수스 특전사  쥬프리 대위의 코라밀 부대원  그리고 아리의 해병대 순으로 튼튼한 방어벽을 쌓은 셈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찌레본 출신 순다인이라고 말하는 아리는 아무리 봐도 암본인처럼 보였고 아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그와 로니와의 관계가 전혀 석연치 않았습니다.

 

조심성 많은 릴리가 그걸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린 그런 마음을 가진 채 송구영신 축제가 열리는 왕구두를 향했습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