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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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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니켈광산 영적 방어작전 (11)

beautician 2022. 1. 21. 11:34

ep11. 루벤

 

 

그런데 내가 정작 그날 밤 릴리에게 물으려고 했던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그 알라의 뜻, 네 임신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미스떠르가 신경 쓸 일 아니에요.”

신경 안 써지겠냐?”

 

옛날 릴리의 약혼자가 싱가폴에 공부하러 갔다가 거기서 릴리의 친구를 임신시켜 돌아오면서 그녀의 첫사랑이 무참히 깨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일하기 시작할 당시 그녀는 어느 정도 남자들을 혐오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필 그때 내가 처음 일했던 짜꿍 보세공단의 봉제공장을 인수한 벨기에 회사의 관리이사가 릴리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왠지 잡고 흔들어야 할 듯 오똑한 코를 가진 루벤은 벨기에 남자입니다. 그들이 공장 시운전을 할 때부터 우리가 노르웨이 바이어로부터 받은  씸씰링(Seam-sealing) 오더를 넣어주었는데 제품검사를 하러 가던 릴리에게 루벤은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근사한 저녁식사나 유럽인들의 사교모임에 자주 초대하곤 했습니다. 처음엔 노골적으로 불괘감을 보이던 릴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죠. 루벤의 사주를 받은 나도 열심히 릴리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루벤은 시온(SIOEN)이라는 회사의 관리전반을 담당하고 있었고 나중에 버카시 나로공 지역의 한국회사 숭인텍스를 인수하면서 CFO의 타이틀을 달았습니다. 벨기에군을 중위로 전역한 그는 학군출신인 나와도 죽이 맞아 자주 어울렸는데 릴리랑 약속이 여의치 않을 때마다 나한테 전화를 걸어 SOS를 청했습니다. 그들의 연애시절 루벤은 아마도 나와 더 많이 전화통화를 했지 싶습니다. 끈질긴 구애 끝에 그는 결국 릴리의 마음을 돌려 뿔로마스의 빠사데니아(Pasadenia)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했는데 그게 대략 나와 릴리가 아세라의 제재소 때문에 파산할 즈음이었죠.

 

자카르타에 있는 내 딸들을 자네가 아버지처럼 잘 돌봐주게. 꼭 부탁하네 

무너져가던 제재소 사업 막바지에 끈다리에서 만났던 릴리의 아버지가 당부했던 말입니다. 신선 같이 보이는 분이 무슬림 모자 꼬삐아(Kopiah)를 쓴 모습이 무척 인상적인 새하얀 할아버지였습니다. 거대 지주였던 아버지가 죽자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는 재산을 노린 친척들로부터 독살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유일한 상속자인 그만 죽는다면 그 거대한 재산은 친척들의 손에 떨어질 터였으니까요. 결국 그는 도망치듯 끈다리를 떠나 남부 술라웨시의 우중빤당, 즉 지금의 마카사르로 피신했고 그 사이 그의 아버지가 끈다리와 아세라, 꼬나웨에 걸쳐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재산과 부동산들은 친척들이 발기발기 나누어 차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혈혈단신으로 끈다리를 탈출한 후 40년이 지나 장년이 된 그는 가히 일족이라 할 만한 장성한 자녀들과 그들이 결혼하여 이룬 가정까지 모두 거느리고 끈다리로 돌아와 친척들의 강력한 반격을 받으면서도 빼앗겼던 토지와 재산 상당부분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친척들이 순순히 돌려줄 리 없었으니 그 지난한 과정과 치열한 물밑 다툼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릴리는 그 후에 끈다리에서 태어났죠. 평화로운 시절에 태어난 철없는 딸들은 고향을 떠나 자카르타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릴리 말고도 바로 위의 누나 티니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티니는 당시 경찰관의 둘째 처가 되어 있었고 릴리도 루벤과 동거하고 있었는데 왜 뜬금없이 나한테 딸들을 부탁했을까요? 그냥 입에 발린 인사치레였을까요?

 

,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분은 아마도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지 불과 몇 개월 후 릴리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와 맺은 약속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서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일을 루벤은 누구보다도 존중해 주었습니다. 2007년의 어느 날 루벤은 직장을 옮기는 일에 대해 내게 허락을 받으려 했습니다. 평소 좋은 친구로 불과 3년밖에 나이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그는 릴리의 문제에 있어서만은 나를 돌아가신 릴리 아버지의 자카르타 대리인 정도로 생각했고 릴리의 집안도 나를 대체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난 릴리와 고작 11살 차이, 티니와는 불과 여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달 수입이 내 몇 배가 되는 친구가 벨기에 타이어 회사의 스리랑카 공장으로 전직해 월 2만 유로의 기본급과 각종 부가조건들을 받아 CFO로 가겠다는 걸 내가 가라 마라 할 입장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루벤이 굳이 그렇게 형식을 갖춘 것은 릴리를 자카르타에 두고 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루벤은 릴리를 데려가려 했지만 당시 광산사업을 키우고 있던 릴리는 자기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해 자카르타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루벤은 비록 자신이 인도네시아를 떠나 다른 나라에서 일하더라도 2-3개월에 한 번씩은 꼭 자카르타에 돌아올 것이며 릴리에게 필요한 주택임대료, 차량, 생활비 등을 반드시 책임지겠다고 서약했는데 그 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약속들은 모두 지켰습니다. 지금까지도요.

 

정신이 있는 거야? 남편이 스리랑카에 있는데 애기를 혼자 만들면 어떻게 해?” 

내가 릴리에게 말하려던 문제는 이겁니다. 남편이 자카르타를 떠나 있는 사이 릴리가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도 이젠 나이가 있어요. 루벤 기다리다간 영영 아기를 못 가진다고요!”

루벤한테 뭐라고 말할 거야?”

이미 얘기했어요. 몸도 떠났는데 마음이 떠나는 건 시간문제잖아요?”

 

릴리는 처음부터 루벤과의 관계에 대체로 비관적이었습니다.

루벤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무척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마음에 싶은 상처를 받았고 그래서 결혼이나 가정의 가치를 믿지 않았어요.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그는 어쩌면 불행해질 지도 모를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빠사데니아 아파트에서 그와 5년간 함께 지내면서도 릴리는 아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건 루벤만 탓할 건 아닙니다. 광산을 쫓아다니며 숲속과 제티에서 밤을 지내야 했던 릴리 역시 아기를 가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여전히 동거상태였어요. 릴리는 최소한 서류상으로나마 온전한 부부가 되길 열망했지만 루벤은 정식 혼인신고를 미룰 뿐이었습니다. 난 그들의 사적인 문제에까지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릴리는 간혹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루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루벤이 스리랑카로 떠난 후 2년 차에 릴리는 기어이 혼자 사고를 친 것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광산개발과 시멘트 공장매각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말입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에요. 루벤은 결코 나랑 결혼해 주지도 않을 거라고요. 지금쯤 콜롬보에서 어떤 새카만 스리랑카 아가씨를 숨겨놓고 함께 살고 있을지 누가 알아요?”

그럴 놈이 아닌 걸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남자들을 어떻게 믿어요?” 

이건 릴리의 패기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루벤은 정말 그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몇 주 후 주말을 틈타 자카르타로 날아왔습니다. 모멸감과 배신감에 휩싸여 모든 비난을 쏟아 부으며 릴리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루벤은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이 너무 오래 떠나 있었다며 오히려 릴리에게 사과했습니다.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릴리는 물론, 앞으로 태어날 아기도 가족으로서 받아들여 영원히 책임지겠다고 말했어요. 그 맹세를 할 때에도 그는 굳이 날 불러 들였습니다. 저 커다란 덩치를 한 서양남자의 마음 속에 천사 같은 이해심과 포용력이 넘쳐나, 아무리 나라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상황을 모두 끌어안고 용납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뭔가를 건드렸습니다. 똑같은 것을 릴리도 느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해 11월 릴리는 딸을 낳아 진주라는 뜻의 무티아라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뒤에 릴리와 루벤의 성 배크란트가 차례로 따라 붙었고 난 그 이름들을 대충 합쳐 백진주라는 한국이름도 붙여 주었습니다. 루벤은 크게 기뻐하며 무티아라를 호적에 올렸고 그 과정에서 벨기에 대사관에 릴리와의 정식 혼인신고도 마쳤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두 사람의 결혼은 무티아라의 탄생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무티아라는 루벤에게 있어 눈에 넣어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딸이 되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