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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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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켈광산 영적방어작전

니켈광산 영적 방어작전 (14)

beautician 2022. 1. 24. 11:38

ep14. 스피드보트

 

 다음날 나타샤의 가족들과 미쯔비시 상사원 등은 아침 일찍 다이빙 포인트가 있는 와카토비 리조트로 들어갔습니다. 새해 첫 날을 해외 유명 유원지에서 보내는 것은 늘 꿈꿔온 것이지만 내가 그들과 함께 와카토비에 가지 못하고 릴리에게 목덜미를 잡혀 광산에서 2014년의 첫 날을 보내게 된 것은, 나타샤가 가족들에게 이 사업에서의 자기 위상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처럼 릴리 역시 기왕에 끈다리까지 모두 날아온 김에 이번만은 꼭 남편에게 광산을 보여주고 격려와 칭찬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릴리는 루벤에게서 사업적 조언을 수없이 얻었지만 한번도 광산을 직접 보여준 적이 없었습니다. 루벤으로서도 짧은 휴가를 틈타 자카르타에 돌아오면 무엇보다도 딸 무티아라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으므로 며칠씩 걸릴 술라웨시 출장이나 하루를 꼬박 잡아먹을 광산 방문은 그동안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번 끈다리와 왕구두에서의 행사는 릴리와 루벤이 함께 광산에 오를 둘도 없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난 왜? 

뭐 하러 남의 가족들 가는 와카토비에 따라가려고 해요?” 

, 깜빡 잊었습니다. 난 릴리네 가족이었죠. 릴리는 나타샤 가족들을 따라 가려던 나를 굳이 광산행에 동행시켰습니다.

 

하지만 새해 첫 날 새벽부터 토요타 반트럭을 타고 장시간 광산을 다녀 오기엔 여독도 깊었고 전날 밤 행사의 후유증으로 잠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차량 대신 끈다리 컨테이너 항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민간부두에서 스피드보트를 임대하기로 했습니다. 차량으로는 산허리 타고 구비구비 이어지는 열악한 비포장도로를 다섯 시간 가량 달려야 하지만 스피드보트로는 해안선을 타고 북상해 모롬보 만까지 한 시간 정도면 주파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문제는 보트 임대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빌린 보트는 교통부 소속 국립수색구조대(Badan SAR Nasional: SAR Search And Rescue의 약자)의 구조용 고무보트였는데 마치 우버(Uber) 뛰는 승용차처럼 구조대 측은 모롬보 왕복에 1천만 루피아,  1백만 원 정도를 요구했습니다. 예의 하이룩스 반트럭으로 간다면 디젤 80리터 정도,  8만원 정도면 다녀올 수 있는 곳이었지만 스피드보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대개 급박한 상황에 처했거나 비용에 구애 받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므로 1천만 루피아는 그런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부르는 가격이었습니다. 실제로 릴리는 바이어 사장이나 주요 임원이 광산을 방문하면 종종 스피드보트를 빌리곤 했으니 하물며 루벤에게 광산현장과 벌크선들을 보여주기 위해 그 정도 비용은 기꺼이 지출할 용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디가드들이었습니다. 릴리와 내가 루벤과 함께 배편으로 광산에 들어간다는 것을 안 그들은 서로 릴리를 수행하겠다며 첨예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팀만 데려가도 충분할 상황에서 쥬프리 대위의 육군팀, 암릴의 특전사팀, 그리고 해병대라고 주장하는 아리가 서로 수행하겠다며 자기 팀을 데리고 다음날 아침 모두 선착장에 나온 것입니다. 그들을 모두 태우려면 작은 보트가  미어터질 판이었습니다. 난 권총을 차고 있던 쥬프리 대위 한 명만 데려가자고 했지만 릴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들을 모두 데려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건 스피드보트를 한 척 더 임대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비용도 두 배로 늘어나는 겁니다.

 

그 돈 들여 보디가드들 줄줄이 끌고 가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낭비야. 해적이라도 만날 거라 생각하는 거야?”

저 사람들 경쟁을 붙여 충성심 끌어내는 데에 그 정도 써도 돼요.” 

내 충성심을 그렇게 좀 끌어내 봐!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우린 결국 다른 선착장을 들러 스피드보트를 한 대 더 빌리고서야 마침내 모롬보로 출발할 수 있었지만 그 사이에도 보디가드들의 힘겨루기는 계속되었고 결국 배를 옮겨 탄 것은 암릴과 코파수스 대원, 그리고 쥬프리 대위를 따라온 코라밀 병사, 그렇게 세 명뿐이었습니다. 쥬프리 대위가 구조대 고무보트를 탄 것은 그가 차고 온 권총 말고도 릴리의 친척 아저씨라는 이유로 당연한 일이었으나 릴리가 암릴을 다른 배에 태우고 인천관계가 없는 보디가드 아리의 팀을 구조대 보트에 남겨 놓은 것에 난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암릴은 그녀가 전날 밤 행사 비용 지출을 맡겼던 친척 조카였고 코파수스 태권도 교관 출신으로 특전사와 연결고리였는데 말입니다. 루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보트를 달려 모롬보와 광산을 다녀오는 동안 아리가 줄곧 릴리의 등 뒤를 바짝 붙어있는 아리의 모습이 유쾌할 리 없었습니다. 아리는 마치 나와 루벤으로부터 릴리를 경호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냥 기분 탓이었을까요?

 

                                                                                              

그날 오후 끈다리 선착장에 돌아와 현금으로 뱃삯을 치르는데 두 번째 배에 타고 있어야 할 암릴과 코파수스 대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모롬보에서도 암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린 그가 아마 배에서 잠이라도 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아까 그 선착장에서 배를 빌릴 때 잠깐 탔다가 구조대 보트 뒤따라 출발하려고 할 때 거기서 바로 내렸어요.” 

그 배에 함께 탔던 코라밀 병사의 말입니다. 암릴은 아무 말도 없이 애당초 함께 출발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서로 경쟁하던 보디가드들을 달래기 위해 배를 한 척 더 임대한 릴리가 나중에 어쨌든 그 뱃삯을 내야 할 것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결국 내내 우리 보트 뒤를 따라왔던 그 보트는 빈 배였던 겁니다.  암릴은 이모의 돈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던 거고 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건 충성심 경쟁이 아니라 다들 앙탈을 부리는 거잖아?” 

릴리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끈다리 시내 식당 저녁식사일정을 계속했습니다. 그날 호텔에 돌아와 보니 암릴이 평소처럼 호텔 레스토랑에서 뭔가 잔뜩 주문해 놓고 코파수스 대원들과 암본 사람들 앞에서 호기롭게 거들먹거리고 있었습니다.

 

난 릴리가 겹겹이 구축해 놓은 방어선들이 사실은 서로의 반목과 알력으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실제로 어쨌든 충성심을 가지고 릴리의 편에 서있다고 볼 사람들은 코파수스와 코라밀이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셈법이 있을지 몰라도 아무튼 그들은 인도네시아 정규군 소속이었고 쥬프리 대위와 암릴은 어떤 식으로든 릴리와 인척관계가 이어져 있었으므로 보호계약을 파기할 지는 몰라도 릴리의 등에 총을 겨눌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로니와 암본 마피아들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릴리가 로니의 직위와 수입을 보장하고 암본인 정착촌에 이런저런 도움을 베풀고 있다 해도 그들은 언제든 더 좋은 조건과 금액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 붙어버릴 터였습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한편 정체불명의 아리는 더욱 예측하기 힘들었습니다. 우선 그가 부패척결위원회(KPK)에 파견된 해병대원이라는 설명부터 믿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해병대라고 부패척결위원회와 협력하여 파견인력을 보내지 말란 법은 업지만 그렇다면 십중팔구 해병대 헌병수사관 정도일 텐데 그런 군인이 왜 광산사업자의 보디가드가 되어 있는지부터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트리거 가드를 밑으로 당긴 다음 윗부분을 뒤로 밀어 봐요.” 

러시아제 압축가스 권총은 군 시절 분해결합 방법을 배웠던 콜트 권총과 사뭇 달랐지만 한 두 번 해보니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릴리의 권총도 몇 번 분해해서 청소해 주었는데 아리가 자기도 하겠다며 끼어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해는커녕 탄창조차 뽑지 못했어요. 

난 리볼버를 사용해서 이건 잘 몰라요.” 

그는 당황하며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38구경 리볼버 권총은 한국군에서 장군들이나 사용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지 몰라도 내가 군복을 입고 있던 시절엔 대령들도 무거운 쇳덩어리 45구경 콜트 권총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다가 디스크에 걸리곤 했죠.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상사나 대위도 리볼버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혹시 그래서 아리가 장군일지도 모른다고 릴리가 얘기했던 것일까요? 대부분의 한국군 병사들이 그렇듯 인도네시아 해병대 병사 역시 권총에 익숙하지 않다면 그걸 분해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권총을 분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리볼버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아리는 내가 보기에 절대 군인이기 힘들었는데 릴리가 왜 그런 인간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걸까요?

    

 

아리가 암릴과 반목하고 있음은 스피드보트 사건으로 분명해진 셈입니다. 결국 가장 바깥과 가장 안쪽의 방어선이 릴리의 방어체계의 약한 고리인 셈인데 로니가 아리를 릴리에게 처음 소개해 줄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습니다. 그 부분에서 냄새가 났습니다. 마피아가 소개해 준 해병대원? 어쩌면 릴리는 겹겹이 쌓은 방어선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위험한 사람들의 손아귀 안에 있는 셈이었어요.

 

 

그게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지만 보디가드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건 알겠어요.” 

루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루벤은 합리적인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서구 대기업의 현지법인 CFO로 지내면서 인도네시아 사회 밑바닥의 인간군상들을 굳이 이해할 필요 없는 너무 높은 곳에서만 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 논리와 팩트를 중시하는 대기업의 높은 분들이 그 지위와 입장에서는 죽어도 알 수 없을 복잡다단한 일들이 저 밑바닥엔 얼마든지 널려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자카르타를 떠나는 기분이 썩 개운치는 않네요.”

하지만 루벤도 어떤 냄새를 맡은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단지 그는 불확실한 것을 입에 담아 침소봉대할 사람이 아니었어요. 인도네시아 일정을 마치고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간 루벤은 다음 달 상해에 구한 숙소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왔습니다. 연립주택처럼 보이는 저층 아파트에 구한 유닛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방 하나가 핑크색 예쁜 침대와 인형들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물론 루벤이 그런 침대에서 인형들을 껴안고 잘 사람은 아닙니다. 그 방문에는 나의 작은 컵케이크, 무티아라의 방이라는 팻말이 달려 있었습니다. 난 또 한번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