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무니르 독살 사건 해결 안되는 이유 본문
인도네시아의 엘리트 정치가문들
2021년 4월 북부 수마트라의 대도시 메단(Medan)에서 시장의 과도한 경비지출에 대해 취자하려고 시청에 진을 치고 있던 메단 트리뷴 등 여러 매체 기자들이 공권력에 의해 퇴거당하는 과정에서 두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성난 기자들이 시청 앞에서 한동안 언론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는 일이 있었다. 기자들을 시청에서 몰아낼 때 비단 경찰만 동원된 것이 아니라 시청 소속 도시관리국 경찰단(Satpol PP)과 대통령 경호부대 빠스빰쁘레스(Paspampres)도 힘을 보탰다. 이 사건에 뜬금없이 대통령 경호부대가 등장한 이유는 메단 시장이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사위인 무하마드 보비 아피프 나수티온(Muhamad Bobby Afif Nasution-이하 보비)이었기 떄문이다.
대통령의 1987년생 장남 기브란 라까부밍 라까(Gibran Rakabuming Raka)도 2021년 2월 수라카르타(Surakarta-솔로) 시장에 취임했다. 그 선출직 공직은 오래 전 아버지가 처음 맡았던 것이기도 하다. 원래 사업가였던 조코 위도도 대통령 집안이 그의 성공적 정치행보와 2019년 재선 성공으로 2024년까지, 결국 10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지내면서 정치적 엘리트 가문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라 하겠다.
하지만 재선 임기를 지내고 있는 현직 대통령인데도 오랜 세월 인도네시아 정치권은 물론 사회 각 부분에 깊게 뿌리 내린 전통적인 정치 엘리트 가문들의 입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선 그의 소속 정당인 민주투쟁당(PDI-P) 메가와티 수카르노뿌트리 총재를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고 임기 중 행정수도 이전 같은 역사적 업적을 이루기 위해 두 차례 대선에서 상대당 대통령 후보로 나와 건곤일척의 대결을 펼쳤던 그린드라당 총재 쁘라보워 수비얀토를 국방장관으로 영입하면서 상당한 권력을 나누어 주었다. 연정이 확대되면서 야당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정의복지당(PKS)와 함께 야당으로 남은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대통령의 민주당의 저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 만이 아니다. 정재계와 언론이 정치 엘리트 가문들을 늘 주시하면서도 입조심 하는 이유는 그들이 권력의 정점, 또는 그 주변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깊이 뿌리내린 힘이 그들이 퇴임하거나 실각한지 오래인데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니르 사건
2004년 9월 7일 무니르 사이드 탈립(Munir Said Thalib)이란 인권변호사가 자카르타에서 싱가포르를 거쳐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던 인도네시아 국적기 가루다 항공기 안에서 독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무니르는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당시 끊임없이 분리독립 무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아쩨, 동티모르, 파푸아 등에서 인도네시아 군경에게 짓밟히던 민간인들의 인권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고 1998년 3월엔 지금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인권단체 중 하나가 되어 있는 ‘실종자 및 폭력피해자 위원회’(Kontras)를 설립했다. 자카르타에서 뜨리삭티 대학생들 여럿이 군경의 발포에 사망하면서 민주화시위가 격화되고 이를 틈탄 도시빈민들이 자카르타 곳곳에서 약탈과 방화를 일으키는 자카르타 폭동으로 비화되며 결국 수하르토 당시 대통령이 하야하기 불과 두 달 전. 수하르토 정권의 서슬이 가장 시퍼렇던 시기에 가장 큰 소리로 저항을 외쳤던 것이다.
<그림 1. 무니르 사이드 탈립>
암스테르담에서 이루어진 부검에서 무니르 체내에 치사량의 독극물이 발견되었다. 기내에서 마신 음료에 누군가가 비소를 탄 것이다. 음료에 독극물을 넣은 것은 기내 보안요원 자격으로 탄 가루다 항공 조종사였다. 그는 재판 끝에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를 보안요원으로 태우기 위해 서류를 조작한 항공사 행정직 직원들 세 명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들에겐 무니르를 죽일 동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를 사주한 배후인물로 당시 국가정보국(BIN) 부국장이던 묵디 뿌르워쁘란조노(Muchdi Purwoprandjono)도 재판에 회부되었다.
묵디는 1998년 수하르토 하야 당시 쁘라보워 수비얀토 장군 후임으로 소장 계급장을 달고 특전사(KOPASSUS) 사령관을 맡은 전도유망한 육군 장성이었다. 하지만 불과 두 달뿐이었다. 무니르가 민주화 운동가들을 조직적으로 납치하도록 지휘했다고 지목하여 비난했기 때문에 결국 그는 논란 속에 1999년 군복을 벗었다. 어쩌면 그는 그때부터 무니르에게 원한을 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묵디는 와히드 대통령, 메가와티 대통령 시절에 오히려 국가정보국 부국장으로 영전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데 무니르가 독살되던 2004년 9월은 메가와티와 유도요노가 대선에서 맞붙던 시기였고 묵디는 메가와티 측에 서있었다. 그래서 의견이 분분했다. 묵디가 무니르를 독살한 거라면 수하르토 시대의 구원(舊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메가와티와 뭔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선거에서 메가와티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묵디는 유도요도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2008년 12월 1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받았다. 독살사건의 주범과 41차례나 사전에 전화통화가 오건 것이 밝혀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재판정엔 그를 옹호하는 깡패들이 시위를 벌이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었고 그를 기소한 검사는 공교롭게도 부패혐의에 휘말렸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2009년 6월 대법원은 결국 그의 무죄를 확정했다.
그후 묵디와 주범과의 통화녹음 등 새로운 증거들이 나와 재심을 청구했으나 미적거리던 검찰은 이를 기각했다. 그래서 아직도 무니르가 독살당한 9월 7일이 되면 한맺힌 그의 넋을 기리며 시내 곳곳에서 정의구현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묵디가 모든 혐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수완도 있었지만 그가 평생을 충성해 온 수하르토와 그 가문의 비호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묵디는 재판이 진행되던 당시 더욱 활발한 정치적 행보를 했는데 쁘라보워 수비얀토의 그린드라당에서 부총재직을 맡기도 했다. 쁘라보워는 한때 수하르토 전대통령의 오른팔이자 사위였다. 현재 72세의 묵디는 2020년 직능당(Partai Berkarya) 당의 총재로 안착했다. 전임 총재는 토미 수하르토(Tommy Soeharto), 수하르토 전대통령의 막내아들이다. 그의 행보에서 대략의 정황이 읽힌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2018년에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1901-1970)의 일생에 걸쳐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주요 사건들을 망라한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발간한 적이 있다. 수카르노의 투쟁과 독립선언을 다룬 영화 <수카르노(Soekarno)>(2013)가 나왔을 때에도 일본군에 부역하며 위안부를 모집하던 장면에 분노한 수카르노 지지자들이 영화상영금지를 요구하는 소란이 있었지만 수카르노 시대는 어느 정도 역사적 평가가 완결되었고 그에 대한 국내외 책자들이 많이 나와 있어 수카르노 시대의 역사를 말하는 데에 큰 부담은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책으로 <수하르토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로 내려고 자료를 다 모아놓고도 포기한 것은 그 책을 객관적이고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내고 나면 왠지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인도네시아를 철권으로 통치하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축적한 수하르토 가문의 권력은 이후 여러 대통령들이 바뀐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지금도 살아있는 가족들이나 측근들이 수하르토에 대한 비난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수하르토 시대보다는 과거로 좀 더 올라가 근대 식민지시대에 대한 책을 쓰기로 방향을 전면 수정했다.
수카르노 가문
수카르노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민족주의 독립투사로 인도네시아 국민당(PNI)를 발족하여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다가 여러 차례 투옥과 유배를 당했다. 1942년 인도네시아에 진주한 일본군이 네덜란드군을 패퇴시키자 그는 훗날 부통령이 되는 무하마드 하타(Muhammad Hatta) 등 내로라하는 민족주의자들을 겹집해 일본의 태평양전쟁 승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부역한 것은 오랫동안 흑역사로 남는다.
수카르노는 일본군 강점기 기간 중 독립준비조사국(BPUPKI)와 독립준비위원회(PPKI)를 이끌며 인도네시아가 일본 패망 직후 곧바로 인도네시아 정부수립이 가능케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17일 일본에 대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재임기간 중 외교력을 발휘해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서파푸아를 합병하는 등 현재 인도네시아의 국경을 완성했고 그 광대한 지역,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가진 수많은 민족들을 빤짜실라 이념 아래 한 개의 국가,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은 것이다. 1945년 인도네시아 정부 수립 후 1967년 실각하기까지 23년간 장기독재하면서 많은 과오도 남겼지만 오늘날 인도네시아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인물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그는 세 번째 부인 파트마와티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는다. 장녀 메가와티 수카르노뿌트리는 1998년 수하르토가 하야하고 1년 반 동안 차기 대선을 관리한 하비비 대통령 이후 1999년 10월부터 와히드 대통령 정부의 부통령을 역임했고 2001년 와히드 대통령이 탄핵되자 3년 남짓한 잔여임기 동안 인도네시아 제4대 대통령을 지냈으나 다음 대선에서 유도요노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했다.
1947년생인 메가와티는 일찍이 1986년 인도네시아 민주당(PDI)에 들어가 정치를 시작했다. 1967년 아버지가 종신 대통령직을 박탈당하고 하야한 후 수하르토 정권의 철저한 감시를 받아오던 터였다. 그녀는 국민들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1993년 PDI 총재로 선출되지만 1996년 공작에 의해 총재직을 찬탈당한 후 1999년 현재의 민주투쟁당(PDI-P)를 따로 설립해 곧바로 원내 1당으로 올라섰다.
메가와티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민주투쟁당 총재직을 유지했고 2014년 조코 위도도를 민주투쟁당 대통령 후보로 내보내 당선시킨 후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더욱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미 70대에 들어선 메가와티는 1973년생 장녀 뿌안 마하라니(Puan Maharani)를 후계자로 키우고 있다.
<그림 2. 메가와티와 뿌안>
뿌안은 2009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 2014년 대선에 조코 위도도 후보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거론되었으나 골카르당 유숩 깔라(Yusuf Kalla)가 부통령이 되자 조코 위도도 대통령 1기 2014~2019년 기간 인류개발문화조정장관이란 핵심요직을 지냈고 2기인 2019~2024년 기간 국회의장직을 수행 중이다. 2018년 장관시절 전자신분증 교체사업과 관련해 업자로부터 50만 불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졌으나 정식 조사 대신 부패척결위원회 위원장과 담소를 나누는 정도로 혐의를 벗어냈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최근 메가와티를 빤짜실라이념 육성기구(BPIP)와 국가연구개혁기구(BRIN) 등 양대 이념정책기구의 수석자문으로 임명했는데 사실상 여당총재에게 이념전략의 헤게모니까지 쥐어준 셈이어서 메가와티는 전략적으로 더욱 유리한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민주투쟁당에서 차기 대선 주자 후보로 가장 큰 국민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사람은 중부자바 주지사 간자르 뿌르노워(Ganjar Purnowo)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 당선가능성이 가장 높게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투쟁당 대통령 후보 지명권을 가진 메가와티는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많이 떨어지는 뿌안을 기어이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것이란 언론보도가 많이 나오고 있다.
한편 메가와티의 다른 남매들 중 셋째 라크마와티 수카르노뿌트리(Rachmawati Soekarnoputri)도 정치권에서 들어와 2002년 개척당(Partai Pelopor)를 설립하기도 하고 그린드라당에도 몸담았다가 2021년 7월 코로나-19 감염으로 사망했다. 넷째 수크마와티 수카르노뿌트리도(Sukmawati Soekarnoputri)도 정치권에서 활동하다가 발리의 브라만 카스트 출신 할머니, 즉 수카르노의 어머니 종교를 따라 최근 힌두교로 개종해 크게 보도되었다.
수하르토 가문
1965년 10월 1일 새벽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주도한 세력이 육군 수뇌부의 반공장성 여러 명을 납치, 살해하면서 이른바 9,30 쿠데타가 벌어지자 당시 육군전략예비사령부 수하르토 사령관(소장)은 이 쿠데타를 불과 며칠 만에 진압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1945-1949년 기간의 독립전쟁 중에도 인도네시아 공화국 소속으로 전설적인 수디르만 장군(Jendral Sudirman) 밑에서 네덜란드와 싸웠던 전쟁영웅이다.
쿠데타 진압을 시작으로 수카르노가 그간 누리고 있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하나하나 빼앗아 온 수하르토는 1967년 마침내 수카르노를 대통령궁에서 내쫓고 자신이 대통령직에 올랐다. 1967~1998년의 32년간 그는 한편으론 해외자본과 기업을 적극 유치해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다른 한편에선 부통령 여섯 명 중 세 명이 군인일 정도로 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철권정치를 이어갔고 1975년엔 동티모르를 침공해 합병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자녀들이 국가적 이권사업에 간여하거나 사업을 일으켜 모두 재벌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치세에 가장 눈에 띄는 인물들은 9.30 쿠데타 진압 당시 최선전에서 뛰었던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hie Wibowo)로 이전엔 서파푸아 합병, 이후엔 이른바 인도네시아 대학살이라 부르는 1965-1966년 기간 공산당 숙청의 핵심인물이다. 원래 수하르토의 충실한 오른팔이었으나 이후 수하르토와 갈등을 겪으며 주한 대사를 비롯해 한직으로 돌았지만 훗날 유도요노 대통령의 장인이 된다.
또 다른 한명은 현재 그린드라당 총재이자 조코 위도도 2기 정부 국방부 장관인 쁘라보워 수비얀토다. 그의 아버지 수미트로 조요하디꾸수모 (Sumitro Djojohadikusumo)는 경제학자로 산업통상부 장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쁘라보워는 청년장교시절 띠띡(Titiek)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수하르토의 둘째 딸 시티 헤디아티 하리야디(Siti Hediati Hariyadi)와 결혼하지만 육군중장으로 군복을 벗던 시기에 이혼하므로 수하르토 가문으로 간주하기엔 좀 애매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는 공교롭게도 9.30 쿠데타 당시 수하르토가 맡아 쿠데타를 진압했던 육군전략예비사령관 자리에 있을 때 수하르토가 하야하자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 당시 하비비 대통령, 위란토 통합군사령관과 충돌하면서 장인에 대한 충성심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 후 군복을 벗은 쁘라보워가 정치보복을 피해 요르단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인도네시아에 돌아와 2008년 그린드라당을 설립하고 2009년 대선에 수하르토 막내아들 토미 수하르토를 대선 후보로 삼을 듯한 의향을 비쳤다. 비록 그렇게 추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쁘라보워와 수하르토 가문의 끈끈한 관계를 시사하는 장면이었다. 그린드라 당은 그해 총선을 통해 처음 국회에 진출했고 쁘라보워는 2014년, 2019년 연속 대통령 선거에서 조코 위도도 대통령에 맞섰으나 매번 고배를 마셨다.
수하르토의 자녀들은 모두 화제의 중심이었는데 그중 가장 눈길을 모은 것은 역시 토미 수하르토였다. 그는 2001년 자신에게 부패혐의로 18개월 실형을 선고한 판사를 청부살인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이로 인해 10년 형을 받고도 4년 만에 사회로 나왔다. 법을 무력화시켰고 황제같은 감방생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직능당(Partai Berkarya)를 설립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한국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유도요노 가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도요노 가분이 정치 엘리트 반열에 들어선 것은 그의 장인 사르워 에디 위보워의 후광이 컸다. 아니 여사로 알려진 영부인 리스띠아니 헤라와티(Kristiani Herrawati)는 사르워 에디 위보워의 셋째 딸이다.
육군 대장으로 전역한 유도요노는 와히드 대통령과 메가와티 대통령 시절 요직인 정치사회조정장관을 역임했지만 중도 사퇴하고 2004년 메가와티를 상대로 대선에 승리해 2014년까지 10년간 2회에 걸쳐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당시 고질저인 부정부패척결에 적임자로 평가받았으나 임기를 마칠 즈음엔 오히려 그 자신이 센츄리은행 사건 등 여러 부패혐의에 휘말렸다.
그의 장남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Agus Harimurti Yudhoyono)는 1978년 생으로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복무를 하다가 2017년 소령으로 전역해 정치에 참여했고 현재는 아버지가 설립한 민주당(Partai Demokrat) 총재로 재직 중이다. 2019년 대선 때 그는 쁘라보워 수비얀토의 부통령 러닝메이트가 되길 희망했으나 당시 자카르타 부지사인 산디아가 우노에게 기회를 빼앗겼다.
<그림 3. 유도요노 부자>
이렇게 쟁쟁한 정치 엘리트 가문들 앞에서 이제 막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조코 위도도 가문은 아직 명함 내밀기 어렵다. 위에 열거한 정치 엘리트 가문들은 어느 하나 부패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감히 그 혐의를 적극적으로 파고들어 보도할 기자나 심리할 판검사들은 많지 않았고, 저들 가문들은 어떤 식으로든 위기를 극복하고 혐의를 벗어났다.
장기독재정권이 끝나고도 몇 년이 더 흐른 2004년에 벌어진 무니르 사건의 배후를 아직까지 밝히지 못했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전통의 정치 엘리트 가문들이 더욱 공고해지고 그 위에 신흥 엘리트들이 속속 더 나타나고 있는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정치권 한복판에서 언론이 진실을 찾아내거나 입바른 소리를 하기 더욱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는 것으로 읽힌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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