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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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의 조건
대학입학 오리엔테이션 당시 교수님들이나 선배님들은 대학 합격통지만 받아 놓고 첫 강의도 듣지 못한 상태였던 우리들에게 "여러분들은 이제 지성인이 되었으니 이제는..." 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었다. 참 어이처구니 없는 소리였습니다.
듣기 좋으라고 한 얘기겠지만 그 이면에는 대학을 밟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비지성인으로 치부하고 대학입학을 지성인 임명장처럼 간주하는 오만함이 있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갓 고등학생이지 비지성인이었던 내가 대학 입학과 동시에 하룻밤 사이에 간단히 지성인으로 탈바꿈한다는 게 놀랍도록 무식한 얘기라 생각했습니다. 사실도 아니었고요.
지성이란 시장바닥에서 돈 주고 티셔츠 하나 사는 것처럼 첫 대학등록금을 내는 것만으로 간단히 얻어지는 건 아닐 터입니다. 대학을 나오고서도, 아니, 그보다 더욱 화려한 학력과 이력을 갖고서도 지성인이라 불리기에 부끄러운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성인이란 학문을 정진하면서 지식뿐 아니라 주관과 포용력을 동시에 길러 자신과 타인, 국가와 세계와 미래에 대한 안목을 정립한 사람이란 뜻일 텐데 그런 인간이 되려면 분명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루 아침 자고 일어나 보니 지성인이 되어 있을 리 없습니다. 최소한 그게 벼락부자 졸부와 지성인의 차이점일 텐데요.
하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은 신입생들에게 그렇게 사기를 치며 바람을 불어 넣었습니다.
지성인처럼 '공인'이란 개념에 있어서도 좀 사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음반 한번 내고 TV에 한번 얼굴 비치고 나면 하루 밤 사이에 공인이 되는 우리나라.
공인되기 참 쉬운 나라라 생각하곤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연예인들이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히 섹스 비디오 사건에 연루된 여성 연예인들, 오현경, 백지영, 아이비 등의 사건이 한국사회를 떠들썩 하게 했었죠. 그 당시 피해자인 것이 명백한 그 여성 연예인을 ‘공인’으로서 잘못된 처신을 했다며 닦아 세우며 공중파에서 밀어내고 매장시키는 것을 보았고 요즘도 각종 스캔들과 사건사고에 시달리는 연예인들의 얘기가 일간신문의 1면 톱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공인’ 이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습니다.
과연 누굴 공인이라 하는 게 맞을까요?
기본적으로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정부 부처와 산하기관 구성원인 공무원, 군인, 경찰들이 공인이란 것에는 대체로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비단 정치권이나 정부 뿐 아니라 사회경제계에도 공인들이 분명 존재하죠. 하지만 그 기준이 좀 애매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 재벌회장들을 정말 공인일까요?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책 한 권 달랑 내고 대학 강단에 초청연사로 선다면 그도 공인이 되는 걸까요? 누가 어느 날 매스컴 한번 탔다고 그 전날까지는 공인이 아니었는데 그 날 부로 공인의 반열에 올라서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죠?
새파란 10대 댄스그룹들이 자기들 노래가 조금 뜬 다음 TV에 얼굴을 내놓으면서 "이젠 공인이 되었으니…” 운운 하거나 언젠가 운전면허사건으로 TV에서 사과하던 이승연씨가 "공인으로써 죄송하게 생각…” 운운 하던 이야기를 들으면 가소롭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현경씨나 백지영씨의 비디오 사건에 대해서 사건의 본질이 명확해지고 그들이 피해자임이 밝혀진 후에도 "공인으로서 절대 그럴 수는 없다"고 거품을 물고 기염을 토하며 인터넷 공간 구석구석의 게시판을 도배하던 반론들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습니다. 우선 그들이 정말 공인인지 공감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애매모호한 선상의 사람들을 통칭하여 부르기 위해서는 '공인'외에 별도의 다른 명칭을 고안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좀 더 질문을 해 봅시다.
얼굴과 이름을 알려진 사람들, 뉴스를 타고 TV에 자주 나오면 공인인가? 그렇다면 예전의 이근안 경감, 신창원, 막가파나 지존파, 오사마 빈 라덴도 공인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의 행동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킨다면 공인이 되는가? 그렇다면 조양은도 공인인가? 종로시절 김두한은? 오늘도 세확장에 여념이 없는 전국팔도의 내로라하는 조폭 두목들은 공인인가 아닌가?
연예인은 모두 공인인가? 백댄서, 작가, 연예인 매니저, 방송국 경음악단원, 방송국 합창단원, 대학로 연극단원들, 음반 한 번 내본 사람들을 그럼 모두 공인인가? 이름 알려진 연예인들만 공인이고 무명 연예인들은 공인 안시켜줘도 불만 없는 건가? TV에 얼굴 안비치는 분장실 직원, 방송국 청소아줌마들은 왜 공인 아닌가? 유승준은 더 이상 공인 아닌가?
프로 운동선수들은 모두 공인인가? 후보선수들은? 연습생들은? 현역 시절 이름 한번 날리지 못하고 은퇴한 선수들은? 아마추어 선수는 공인 아닌가? 올림픽에 나가서 TV에도 나오고 메달도 따고 유명세도 치르는데? 배구 여제 김연경은 공인인가? 그렇다면, 이재영, 이다영은?
미스코리아는 다 공인인가? 뽑힌 여자들만 공인인가? 아니면 떨어진 여자들도 깨평으로 끼워주는가? 이미 기억에 잊혀진 미스코리아도, 어느 양가댁의 현모양처가 되어 있는 미스코리아도, 지금은 백조가 되어 빈둥거리는 미스코리아도 일단은 공인인가? 아니면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사고 치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미스코리아 출신이라고 나와야 다시 공인신분으로 복귀하는가?
언론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다 공인인가? 사주, 편집장, 기자들만 공인이고 언론사 경리실장은 공인 아닌가? 수습기자들은? 썬데이서울 사장은? 대학신문사 직원들은? 웹진 발행인들과 기자들은?
책 한 번 낸 사람들은 다 공인인가? 한 10만부 이상 팔려야 그때부터 공인 딱지가 붙고 시집 100권 팔린 시인은 공인 자격이 없는 건가? 책 안내고도 PC통신 게시판에 엄청난 독자를 확보하는 인터넷 작가들은 공인인가 아닌가? 어느 카페 게시판에 글 올려 조회수가 장난 아니게 오르는 사람들은? 각각의 페이지 마빡에 사진 걸어놓고 있는 수십만 불로그의 불러거들은 공인인가 아닌가? 그렇다면 공인여부를 결정하는 적정 조회수가 최소한 정보통신부 장관령으로라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유명하면 다 공인인가? 유명한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떼로 씹히고 인민재판, 언론재판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공인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유명하기 때문인가?
종교인들은 다 공인인가? 목사들은 공인이고 집사는 아닌가? 신도는 택도 없는가? 주지스님 쯤 되야 공인의 반열에 들어서는가? 정명석은 공인인가? 박태선 장로는? 통일교주는? 신도수가 한 100명 정도를 커트라인으로 끊어서 목사의 공인 여부를 가늠하는가?
정치인들은 가족들도 모두 도매급으로 공인이 되는 건가? 정치인들 아들이 병무비리로 욕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공인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공인이기 때문인가?
기업인들은 모두 공인인가? 이건희 회장, 최태원 회장 등이 공인이라면 중소기업 사장들도 공인인가? 그럼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은? 10대기업 임원들, 부장, 차장들은? 대기업 신입사원들은? 포장마차 사장은? 동네 분식집 주인은? 회사 망하고 나면 전직 재벌사 회장, 전직 언론사 사장들은 더 이상 공인 아닌가? 뭐 그렇게 쉽게 왔다 갔다 하는 건가?
교육자들은 모두 공인인가? 최소한 초등학교 이상에 근무해야지 유아원, 유치원 원장, 선생들은 공인자격이 없는 건가? 아니면 대학총장, 교수쯤 되어야만 공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가? 박사학위 받고도 기업체 연구실에서 일하면 공인자격 없는가?
그럼 나는 위에 어디 하나라도 걸리지 않는가? 난 정말 공인 아닌가? 어쩌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어느 날 운수대통해서 대통령 될 가능성, 아니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이 최소한 0.000000001% 씩은 있는 사람들은, 지금은 비록 백수 백조라 하더라도 일단 준공인의 마음가짐으로 지금부터라도 몰카조심하고 무조건 애들 군대 보내면서 조신하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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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질문들은 끝도 없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공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이런 모든 질문들에 정답이 있어 개마고원 넓다란 평지 위에 대한민국 국민을 전부 모아놓고(월북 시키자는 뜻 아님!) O는 왼쪽, X는 오른쪽으로 모이게 해서 이런 질문을 한 천 번쯤 하게 되면 진짜 엑기스 오리지날 공인을 가려낼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럼 지금 자칭, 타칭, 공인이라 떠드는 사람들 중 몇 명이나 마지막까지 남게 될까요?
국민들의 한 표씩을 던져 선출한 높은 분들이 서로의 목에 공인이라는 올가미를 덮어 씌워 숨통을 조이려는 모습을 보면 재들 저게 정말 공인의 모습일까 싶어질 때가 많습니다. 국회 회의장 문을 해머로 때려 갈기는 공인들도 있습니다. 성추행과 금전비리에 연루된 국회의원들, 지차제장들도 넘쳐나고 있죠. 시정잡배와 공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공인이라는 명칭으로 제발 사람 목 좀 조르지 맙시다.
스스로를 공인이라 칭하는 사람들도 거기에 자기 목도 좀 매달지 맙시다.
공인이란 개념은 거의 사기나 다름 없는데 정치인, 공무원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공인이란 호칭으로 목을 조르는 사람들도 역시 사기꾼들인 셈입니다. 나쁜 놈은 나쁜 놈이라 욕합시다. 공인이 왜 그러냐 하지 말고.
2021. 12. 12
(2016. 8. 23(Rev) 및 그 이전 여러 판본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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